The Sheltered Life (Paperback, Reprint)
Glasgow, Ellen / Univ of Virginia Pr / 199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회피적 관념주의(evasive idealism)에 대한 통렬한 비판. 엘렌 글래스고우(Ellen Glasgow)가 소설 <보호받은 삶>(Sheltered Life 1932)와 자서전 <내 안의 여성>(Woman Within 1955) 등에서 미국 남부의 위선적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안일한 생활을 두고 비판한 표현.  글래스고우는 미국 남부의 온갖 위선과 변화에의 저항을 비판하면서 "회피적 관념주의는 사람들을 둔감하고 잔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회피함시롱 보지 않으려 하게 하고 그리하야 눈멀게 했다"라고 쓰고 있다 (<내안의 여성>). 회피적 관념주의자는 현실과 대편하기를 피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도피하려 한다. <보호받은 삶>의 마지막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사람을 죽여놓고선 "나는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하는 여주인공 제니 블래어 마지막 대사는 회피적 관념주의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호받은 삶>에서 19세기 말 미국 남부는 "믿는 척 하는 시대"(Age of Make-Believe)로 기술된다. 여성에게는 외모가 가장 중요한 것인 사회에서 여주인공 제니 블래어 역시 이쁜 것을 최고의 가치로 배우며, 여성은 이쁜 척해야 대우받는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반복적으로 주입당한다. 제니가 사는 사회의 대부분의 여성들(과 남성들)이 그러하듯, 제니도 "보호받은 삶을 살았다. . . . 그녀는 환상이라는 환한 영역 속으로 퇴행해 들어갔다." 제니가 보여주듯, 이런 사회에서 정체성은 외모, 겉모습에 의해 좌우된다.

미국 남부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미국 재건기를 거치면서 쭈욱 완강하게 변화에 저항해온 회피적 관념주의자의 대표격 인물인 제니의 할아버지, 아치볼드 장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에의 저항이 환상일뿐이라는 점을 뒤늦게 나마 "현명한" 노인답게 간파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자기의 80 평생을 회고하면서 이 장군님 왈: "중요한 것은 끈을 붙잡고 연결을 유지하는 일"일 테지만, 변화 앞에선 그 끈도 달라져야 하는 법. "전통을 지닌 사람들은 바로 그 전통에 의해서 억압당하지"라고 토로하는 게 전부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현실주의적인, 즉 세상이 변하고 있고 변화에 저항보다는 적응, 창조해야 하는 것이 낫다고 인식한 유일한 인물인 존 웰치는 30년쯤 연상인 버드송과 연애질을 하는 어린 제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딱 한 번을 위해서 너의 모든 행복을 결코 감수하지는 말엇. 무언가를, 그것이 빵부스러기일지라도, 무언가를 항상 뒤에 남겨놓으란 말이야."

늘상 바람질인 남편에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남부 사회에서 나름의 우아고상을 유지하는 것을 보이려는 여성체면으로 삶을 탕진한 에바 버드송은 미국 남부 사회가 칭송하는 (있지도 않은 이상적) 여성성을 체현한 여자였다. 그렇지만, 뒤늦게 중년이 훌쩍 넘어서야 회피적 관념주의와 우아고상 체면사회의 이중성이 자신의 삶을 망쳐놓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인척 하는 것에, 다른 이들이 지닌 이상형인 척 하는 것에 나는 지쳤어. 이제라도 내 주위를 돌아보고, 너무 늦기 전에 잠시만이라도 내 자신이 되고 싶어."

버지니아 주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변화에 저항한다. 남북전쟁 후 재건기를 거쳐 자본주의가 확장일로를 걷고, 흑인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시대에, 남의 노동으로 밥먹고 사치를 부리는 게 익숙한 즉 흑인노예시절의 삶에 익숙한 남부인들에게 노예해방 이후에 자본주의 확장과 더불어 오는 변화에 대한 저항은 예정된 것이다. 그렇지만, 변화에의 저항은 또한 변화중인 현실을 대면하기를 거부하는 남부 사회의 완강한 오만을 비추어주기도 한다. 

변화의 시대에 놓인 남부, 그라고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는 미국 남부의 이데올로기적 이상, 이상적 여성성. 

그 이상적 여성성을 체현했던 에바 버드송은 20년 넘게 자신에게 상처만 준 남편이 20년보다 훨씬 더 어린 제니에게 추근대면서 바람질하는 장면을 (안 보려고 10년을 회피하다가 결국은) 직접 목격하고 남편을 쏴버린다. "나는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라는 제니의 마지막 대사는 변화에 저항하는 남부 사회의 회피적 관념주의를 제니도 물려받았다는 점, 그리하야 그녀가 배운 "교훈"들을 선택함으로써, 지적 도덕적 성장의 기회를 보류당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성의 아름다움만을 숭배하는 사회, 회피적 관념주의 전통 속에서 자란 어린 소녀. 육체적 아름다움의 중요성과 여성에게 외모만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제니는 사기치는 게 도덕적이고 문명화된 행동이라고 배운다. 다른 이들을 기분좋게 하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것이 좋다고 말이다. 

이런 남부 "전통"을 비판하는 글래스고우는 남부는 다름 아닌 억압적인 하나의 제도로 기능한다는 점, 제도로서 남부에는 표면이야말로 모든 것이라는 점을 통렬하게 묘사한다. 

이상적 여성성의 체현이었던 에바는 낭만화된 여성 정체성과 대면하여 결국은 그것이 파괴적인 환상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제도로서 남부의 희생자인 그녀가 남부의 유산을 집어던지는데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젊은 제니가 아니라 중년을 넘긴 에바가 뒤늦게 서야, 그라고 유일하게,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다. 

글래스고우, 잔인할 정도로 날카로운 삶의 관찰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