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
오주석 지음 / 월간미술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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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은 읽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글 속에 녹여서 표현하기 마련이다. 읽는 사람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쓴이가 처해있는 개인적인 처지나 시대적인 상황, 그리고 글쓴이의 취향과 가치관과 같이 여러 가지를 알아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어려운 책은 전문가의 해제를 읽을 필요가 있다.

그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화가도 자신이 그린 그림에 어떤 메시지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뭉크의 <스크림>은 그의 불행한 병력과 가족의 죽음 등 화가의 개인적인 환경을 알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의 그림 또한 의미를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그림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현대의 그림이 아닌 조선시대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조선 시대의 그림의 의미를 읽어주는 사람으로 오주석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테다. 그는 2005년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생전에 신문을 통해 발표한 글이 책으로 만들어졌다. 신간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월간미술.2009년)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그림 27장에 들어 있는 의미를 독자들에게 읽어 주고 있다.

27장 가운데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 6점으로 제일 많고, 겸재 정선 4장, 혜원 신윤복 2장, 표암 강세황 2장 그리고 추사 김정희 1장 등 조선 최고의 화가들의 그림이 들어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첫 번째 그림은 신윤복의 <월하정인도(月下情人圖)>이다.

조각달이 떠있는 밤에 남녀가 담 모퉁이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내고 있으며, 여자는 다소곳이 눈을 내리 뜨고 있는 모습이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 같기도 하다. 그림 왼 쪽 부분에 있는 화제(畵題)에는 “달도 기운 야삼경 / 두 사람 속은 두 사람만 알지”라고 적혀있다. 이 화제는 조선 선조 때에 정승을 지냈으며, 화류계에서 놀기를 좋아했다는 김명원의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요컨대 이 그림에서 혜원 신윤복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바로 은밀한 만남이다. 저자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신윤복은 남녀 간의 정을 주제로 한 그림의 명수였다.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 소설 한 편보다 더 소상하다.”(25쪽)

한국 그림이 서양화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공간의 활용에 있다. 바로 ‘백면(白面)’이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선인들은 크고 위대한 사물, 즉 하늘과 물을 여백으로 남겨두었다.”(36쪽) 즉 서양화는 하늘과 강이나 바다에 색칠을 하지만, 한국 그림에서는 그냥 화폭을 비어 놓는다. 공간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공간의 미학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세한도>를 꼽을 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는 그린 연도가 확실하다. 세한도에 있는 글에 의하면 이 그림은 1844년에 그렸다. 이때는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시기이다. 귀양가있는 사람에게는 친구도 멀어지는 법. 그러나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은 베이징에서 사들이 귀한 책들까지도 멀리 바다건너에 있는 스승에게 보냈다. 추사는 고마움을 이 그림에서 글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옛글에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사람은 그것이 다해지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는 어찌하여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 잣나무처럼 변함이 없는가?”(59쪽)

그림에도 보면 누추해 보이는 집을 푸른 소나무가 감싸고 보호해주는 모습으로 보인다. 이 소나무는 바로 이상적이다. “<세한도>엔 추운 시절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옛정이 있다. 그래서 문인화(文人畵)의 정수(精髓)라 일컬어진다.”(61쪽)라고 오주석은 이 작품에 대해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작가 미상인 <이재 초상>에서 보면 그림의 주인공인 이재의 눈빛이 아주 강렬하다. 게다가 복색이나 차림이 단정하고 강인해 보인다. 이 그림을 본 후 저자는 허리를 곧게 펴고 글을 썼다고 한다. 이는 이재의 마음에 있는 성실함이 저절로 외모에 드러났기에 저자가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게 오주석은 그림 한 장에 담겨있는 많은 의미를 우리에게 친절하게 읽어주고 있다. 그의 글을 따라 읽다보면 독자들은 그림에 담겨진 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 곁에는 그림을 읽어줄 오주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누가 우리 옛 그림의 가치를 되살려 줄까. 오주석의 설명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의 부존재가 우리를 한 없이 허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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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고노스케, 길을 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경영의 지혜
마쓰시타 고노스케 지음, 남상진.김상규 옮김 / 청림출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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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시타 전기제작소를 세워 내셔널(National)과 파나소닉(Panasonic)과 같은 세계적인 전자제품 브랜드를 만든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1894~1989)는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한 학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학력은 정말 성공하는 데에 필요치 않은 부분인가? 특히나 그가 사업을 하던 20세기 초에는 학벌이 없어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력이 높다는 점은 여러 가지를 함축하고 있다. 요컨대 학력이 높다는 말은 단순히 학력이라는 한 가지 요인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부모의 재력을 비롯해 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가족의 지적 수준과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열악한 조건 속의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장한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다. 바로 그의 삶에 대한 철학이 남다른 까닭이다. 그는 사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했다. 신간 <마쓰시타 고노스케, 길을 열다>(청림출판.2009년)에는 그의 경영철학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인생의 길은 크고 작은 오르내림이 따른다...그러므로 어쩌다가 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우쭐댈 필요도, 또 아래에 있다고 비관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묵묵한 자세로 밝은 희망을 가지고 걸어가는 일이다.”(18쪽)

마쓰시타의 말은 요즈음 같은 어려운 시기에 적합한 말로 들리지만, 실은 항상 맞는 말이다. 바람이나 바닷물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순환을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공기가 뜨거워지면 위로 올라가고 위에 있는 공기는 그 비운자리를 채우려 아래로 내려오는 법이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위로 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오르려고만 하고 있다. 내려가 있어야 위를 알 수 있거늘. 마쓰시타는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동안 사람은 갈고 닦이고 연마된다.”고 덧붙인다. 요컨대 마쓰시타의 철학은 ‘꾸준히 묵묵한 자세로 희망을 가지고 임하라’고 말해주고 있다.

쉬워 보이지만 범상한 우리네 입장에서 보면 실천하기에 여간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 조그만 일에도 일희일비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남의 눈치를 보면서 잘 안 될 경우 이리저리 바꿔보고 게다가 얼마나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가.

이런 부분에서 ‘경영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마쓰시타와 범인의 차이가 있다.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걱정거리는 좀 많은가. 금전적인 일에서부터 직장 업무, 자녀에 대한 일까지 우리는 걱정거리 때문에 온갖 인상을 쓰며 살고 있다. 마쓰시타는 이런 경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걱정거리가 생겼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걱정이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걱정거리나 근심거리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21쪽)

마쓰시타의 낙천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어려운 환경에서 조차도 타산지석을 이끌어내고 있는 여유로움을 보라. 이런 철학을 가지고 있는 마쓰시타도 실패를 한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실패조차도 그에게는 성공의 바탕이다. 그가 생각하는 성공에 대한 기준도 색다르다.

그는 “사람이 하는 일은 세 번에 한 번 정도는 실패하는 것도 괜찮다. 더불어 외형적으로, 타인이 보았을 때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고 해도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해보았을 때 미련이 남는다면 스스로 그것을 실패로 인정해야 한다.”(91쪽) 고 말한다. 요컨대 남의 기준을 통해 성공을 판단하지 말고 스스로가 판단을 내리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만 500만 부가 팔린 책이라고 한다. 처음 출간된 연도는 1968년이니 일본의 경제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그런 시기에도 마쓰시타는 어려운 시기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마쓰시타의 이 책은 독자들에게 많은 위안과 희망을 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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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보는 눈 - 갈릴레오 망원경에서 우주 망원경까지 천문학 혁명 400년의 역사
고베르트 실링 외 지음, 2009 세계 천문의 해 한국 조직 위원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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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표면은 매끄럽지 균일하지도 않으며 많은 철학자들이 믿었듯 둥글지도 않다. 달은 불균일하며 거칠고 계곡과 산들로 가득 차 있어서 지구의 표면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타임 머신을 타고 400년 전으로 가보자. 1609년11월30일 이탈리아의 파도바에 있는 자신의 집 뒤뜰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사용해서 지구 바깥을 최초로 관측한다. 그는 자신이 망원경을 통해 바라본 달의 모습을 위의 문장으로 표현했다.

신간 <하늘을 보는 눈, Eyes on the skies>(사이언스북스.2009년)의 14쪽에 나오는 갈릴레오의 이 말은 인류가 우주의 진실에 다가가는 큰 계기가 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400년 전에 일어난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유엔은 2009년을 ‘세계 천문의 해’로 정했다.

갈릴레오는 처음으로 망원경을 만들지는 않았다. 망원경을 최초로 만든 사람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이를 사용해 우주를 관측한 이는 갈릴레오가 처음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갈릴레오는 달에 이어 목성을 관측하고는 코페르니쿠스가 옳았다고 확신하게 된다. 즉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는 하나의 행성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그 시절을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적 세계관에 반하는 일이었다. 이는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갈릴레오는 종교 법정에 서게 되었으며, 그의 책은 금서 지정되었고, 그는 남은 생애를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게 된다. 지난 1992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갈릴레오의 업적에 대한 비방이 교회 역사상 가장 불행한 오류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함으로써 교회의 잘못을 인정했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갈릴레오가 만들어 사용한 망원경은 오목렌즈와 불록렌즈를 경통 양쪽에 놓은 굴절 망원경이었다. 굴절 망원경은 ‘색수차’라는 문제를 앉고 있었다. 즉 별빛이 번져 보인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니콜로 주기가 만들고, 1668년 뉴턴이 개량한 ‘반사 망원경’이 사용된다. 오목거울을 사용했기에 색수차를 없앨 수 있었지만, 거울이 좋지 않아 성능에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망원경 발전에 기폭제가 되었다.

인류는 더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한 필수적인 방법은 렌즈의 크기에 있었다. 18세기 후반 윌리엄 허셜은 직경이 1.2미터나 되는 망원경을 만든다. 그는 이를 통해 1781년 천왕성을 발견한다. 그러나 허셜의 망원경은 너무 커서 움직이기에 지나치게 힘이 들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 망원경은 높은 산으로 올라간다. 뉴턴이 이야기한대로 “높은 산 정상이 공기가 청명하고 안정되어 천체 관측이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1917년에 켈리포니아의 윌슨산 정상에 2.5미터 크기의 후커 망원경이 설치되고 헤일은 망원경에 카메라를 장치했다. 카메라를 몇 시간씩 켜놓자 인간의 눈을 통해 볼 수 없었던 우주의 세부 구조가 드러났다. 광학 망원경을 통해 우리는 우주의 신비로운 모습을 접하게 되었지만, 이는 우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눈으로 보는 가시영역은 세상의 일부만 볼 수 있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 전파 망원경이 탄생함으로써 렌즈는 없지만, 우주의 제대로 된 모습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이 전파 망원경으로 보여 지는 우주의 모습을 이 책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 태양은 전파로 보아도 매우 밝게 빛나고 있으며, 우리 은하 중심부도 그렇다. 우리 은하나 다른 외부 은하의 나선팔에 있는 수소 구름은 21센티미터 파장의 전파를 방출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펄서는 몇 초마다 회전하는 고밀도의 별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천체인데, 삑삑하는 단순한 전파 신호를 내고 있다. 펄서는 등대처럼 회전하면서 복사파를 방출하고 있다.”(81족)

20세기 중반 인간은 지구 밖으로 나갈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능력을 가지고 우주 망원경을 대기권 밖에 설치하게 된다. 이로 인해 우주를 24시간 관측이 가능해졌고, 지상에서는 대기에 흡수되어 볼 수 없었던 파장 대역도 관측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로 우주 망원경은 100대 이상이나 발사되었다.

우주에 대해 더 많이 알기 원하는 인간은 망원경을 발명해서 위에서 설명한 대로 끊임없이 개량 발전시켜왔다. 그렇다면 미래의 망원경은 어떨까? 일단 반사경을 이용한 대형 망원경이 개발 중이다. 개발이 완성되면 이를 통해 130억 년 전의 빛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된다. 요컨대 우주 초기의 모습을 관측할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태양계에 있는 지구와 유사한 행성을 관측할 수 있으리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는 우주의 생명체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세계 천문의 해’공식도서이다. 번역도 2009년 세계 천문의 해 한국조직위원회에서 담당했다. 망원경과 우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은 사진이 많이 수록되어 있어 책을 읽는 내내 눈이 즐겁다. 그리고 부록으로 세계 천문의 해 공식 DVD도 있다. DVD에는 세계 천문대의 영상과 에니메이션,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우주에 대한 최신의 연구결과가 수록되어 있다.

하늘을 보는 일은 과거와 만나는 일이다. 우리를 비추고 있는 태양빛은 8분 여 전에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다. 허블 우주 망원경을 통해 관측되고 사진에 찍힌 소마젤란 은하에서 별이 탄생하는 모습은 21만 년 전의 모습이다. 또 하늘을 보는 일은 미래와도 만난다.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미래를 알 수도 있고, 과거 인간은 하늘을 보고 길흉화복이나 나라의 안위를 점쳤다. 우주는 우리의 과거이고 또 우리의 미래다. 그래서 우주는 우리를 매료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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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로드 기행
편일평 글.사진 / MBC C&I(MBC프로덕션)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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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맥카시의 소설 <로드>에서 ‘길’의 의미는 생존이었다. 비단길(실크로드)에서 ‘길’의 의미는 동서양 간의 교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종이의 길(페이퍼 로드)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필자는 5년 전 진순신의 <페이퍼 로드>를 읽은 적이 있다. ‘페이퍼 로드’라는 새로운 단어에 대한 신선함과 아울러 종이의 길이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큰 비중에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최근에 발간된 <페이퍼 로드 기행>(MBC프로덕션.2009년)은 진순신의 책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진순신의 책에서는 종이의 유럽 전래와 그 의미를 다루었으나, 이 책은 종이의 전래경로를 따라 지구를 한 바퀴 돈다. 중국 뤄양(洛陽)에서 시작된 페이퍼 로드는 시안과 둔황, 신장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터키, 유럽을 경유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다가 다시 태평양을 통과해 일본을 들르고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온다.

나침반, 화약, 인쇄술과 함께 고대 중국의 4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 종이는 후한서의 ‘채륜전’에 따르면 AD 105년 채륜이 발명했다고 나와 있다. 그 종이의 이름을 채후지(蔡候紙)라 불렀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견은 채륜이전에 이미 종이가 사용됐음을 말해준다. 현재는 중국에 종이가 처음 등장한 시기를 BC 2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채륜의 지위는 하락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중국과학원 반지씽 교수는 “채륜의 활동은 객관적으로 말해 제지술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므로 그 공헌을 인정해야 한다.”(44쪽)고 말한다.

제지술의 중앙아시아 전래는 751년 탈라스 전투 시 이슬람에 포로가 된 당나라 군인 중 제지 기술자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 이전에 이미 중앙아시아에서는 종이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우즈벡 과학아카데미의 종이 역사가인 나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지술을 비밀로 귀히 여기던 중국이 종이 기술자를 먼 지역의 군부대에 두었을 리가 없었으며, 중앙아시아와 중국은 교역이 왕성해 사마르칸트에서는 이웃 나라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BC 1세기부터 이 지역의 제라프샨 강, 카슈카다리야 강 유역에 정착했던 소그드인들과 긴밀한 접촉이 이루어져 이미 종이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탈라스 전투 이전에 파미르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칼리프 영토 안 곳곳에서 종이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176쪽) 제지술의 전래 시기가 달리 결정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부분은 바로 중국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이다.

제지술은 중앙아시아를 통과해 유럽에서는 1150년에 에스파냐의 하티바에 제지소가 건설되었다. 채륜의 시기보다 거의 1천 년이나 지난 시기에 유럽에서 종이가 제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한반도로의 전래는 아주 빨았다. 196년 후한이 멸망하고 중국이 삼국시대의 혼란에 빠지자 197년경 전란을 피해 고구려에 밀려온 유민들에 의해 닥나무 종이가 전해졌으리라 추정된다. 유럽 보다는 거의 1천 년이나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유럽에 전래된 제지술은 인쇄술과 결합함으로써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종교개혁에서 시작해 유럽 근대문명의 초석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어 제지술은 대서양을 건너 1690년 미국의 필라델피아로 전해진다.

이 책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조선시대에 한지로 만든 온실이야기다. 조선 세종 조에 전순의가 편찬한 <산가요록 山家要錄>에 따르면 온실을 만들어 겨울철에도 신선한 채소를 생산하는 동절양채(冬節養菜) 요령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한국 원예학자 전희 박사는 <산가요록>에 적혀있는 대로 온실을 만들었다. 그 결과 550년 전에 겨울에 채소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했고, 이를 국제 원예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함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는 “161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초보적 온실보다 170년이 빠르고 자연 보온 온실을 개발한 영국보다도 무려 240이나 빠른 1450년경에 만든 것으로 한지의 기능성을 높였다.”(282쪽)고 그 의미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이 온실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온실에 우리의 전통 온돌을 사용했다. 그리고 한지에 기름을 발라 채광을 통해 실내 온도를 높이고, 습도 조절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창호지는 살아있는 종이여서 통기를 원활하게 하고 습도를 조절하며 채광성이 뛰어난 점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한다.

우리 고유의 “한지를 말할 때 ‘絹 五百, 紙 千年’이라는 표현을 쓴다.”(287쪽) 요컨대 한지는 질기고 통기성이 좋으며, 순 섬유질이기 때문에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석가탑 보수 공사 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에 목판 인쇄로 만들어진 경전이다. 1000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종이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은 우리 종이의 우수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지금의 한지 현실은 어떤가.

저자의 페이퍼 로드 기행은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우리나라로 돌아와, 전통의 기술로 한지를 생산하는 마을을 탐방한다. 이곳을 돌아보고 저자는 “한국의 한지는 동양3국의 수록지와 비교해 볼때 강도나 수명, 항균성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국제시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323쪽)고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그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한다.

저자는 “자연 식물에서 추출한 섬유를 손으로 뜨는 전통방식의 수록지는 동서양의 학문과 예술, 문화, 종교를 발전시켰고 가장 위대한 필사 도구로 인류의 역사를 기록했다.”(324쪽)며 종이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책을 맺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종이 전문가가 아닌 방송국 PD 출신인 편일평씨이다. 페이퍼 로드 기행은 그의 종이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됐다. 이 책의 내용은 다큐멘터리로 방송된바 있다.

인류 문명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종이가 발명되고 세계로 전파된 길, 즉 페이퍼 로드를 따라 지구를 한 바퀴 돈 그의 여행에서 독자들은 자랑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리라고 생각한다. 향후 한지를 세계에 알려 옛 명성을 되찾기를 바라는 바램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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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와인 셀렉션
박찬일 지음 / 예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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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이제 한국에서도 대중화의 길에 들어섰다. 무수히 많은 와인바와 와인샵, 그리고 서점에 가면 와인 책만 따로 모아놓은 서가도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와인은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그 이름도 어렵고, 맛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와인문화는 고급이라는 생각 때문에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서 와인에 대한 예절을 지켜야한다는 강박관념도 존재한다. 그래서 시중에 와인에 관련한 많은 책들이 넘쳐나며, 인터넷에도 와인에 대한 포스팅도 엄청나다. 정보의 홍수다.
 
보통 와인 책에서는 보통 와인을 알기위한 기본적인 용어에서 시작해서, 와인 이름에 관한 내용 그리고 각종 와인 상식, 그리고 추천 와인을 가격과 함께 수록한다. 그리고 마리아주(Mariage)가 꼭 따라온다. 마리아주란 와인과 음식의 궁합을 의미한다. 와인은 유럽에서 온 술이기에 당연히 그곳의 음식과는 잘 맞는다. 그렇다면 한식과 와인은 궁합이 맞는지가 궁금하다. 그래서 와인 안내서에는 반드시 마리아주가 포함되어 있다. 보통은 삼겹살과 어떤 와인이 어울린다는 식으로 안내를 해준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와인과 한식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스타 셰프로 유명한 박찬일이다.

신간 <박찬일의 와인 셀렉션>(예담.2009년)에서 박찬일은 삼겹살 자체는 와인과 좋은 매치를 이룰 수 있지만, 삼겹살과 함께 먹는 “생마늘과 파절임의 강력한 향 한방에 무너지고 만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고급 와인이 발산하는 코는 더 이상 감지하지 못하고, 타닌의 떫은 느낌과 알코올의 자극만 남는다. 다시 말해, 비싼 와인이 제값을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요컨대 저자는 “한식과 와인은 참 냉정한 관계”라고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와인과 한식의 만남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드시라. 그저 편하게 마시면 좋다. 약간 전문가인 척 조언한다면,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않는 음식과 와인을 고르면 된다. 매운 맛에 놀란 혀를 진정시킬 수 있는 발포성 와인이나 화이트와인은 대부분 한식에 곁들여도 괜찮다.”고 저자는 독자들에게 조언해준다.

이 책이 다른 와인 안내서와 달리 특별한 점은 또 있다. 우리가 와인을 즐기는 이면에 있는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어떤 책에서도 보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예컨대 와인생산과 이송 시에 사용하는 많은 화석 연료로 인해 탄소량이 상당하고 두꺼운 유리병은 자기 무게의 수십 배에 달하는 산업 폐기물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다시 말해 와인을 즐기는 가운데 우리는 지구 건강의 일정 부분을 해치고 있다는 말이다.
또 다른 예를 한 번 더 보도록 하자.

같은 브랜드의 와인이라고 빈티지가 다르면 가격도 다르다. 그 이유는 그 해에 좋은 포도를 생산했는지가 관련되기 때문이다. 여름의 폭염은 질 좋은 포도를 생산할 수 있어 수퍼 빈티지를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지난 2003년 유럽의 여름은 정말 뜨거웠다. 와인 생산자들은 당연히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폭염으로 인하여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사망한 사람들 대부분이 저소득층이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와인을 즐기는 행위가 마치 죄를 짓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와인을 지나치게 즐긴다면 문제가 있지만, 음식과 함께 가볍게 마신다면 문제가 크지는 않다고 위안을 해본다. 와인이 몸에 좋다고 지나치게 많이 마신다면 마시지 않는 것보다 못하리라. 다만 어느 정도 와인에 대해 알고 마시면 좋을 듯하다. 와인에 대해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아마 이 책을 읽고 와인을 마신다면 아마 과음을 하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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