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고양이 - 과학의 아포리즘이 세계를 바꾸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박규호 옮김 / 들녘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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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찰스 P. 스노우의 <두 문화>에 보면 “비과학자(문학적 지식인)들은 과학자가 인간의 조건을 알지 못하며, 천박한 낙천주의자라는 뿌리 깊은 선입관을 갖고 있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즉 과학자들은 ‘비인간적 낙천주의자’라는 말인데, 오히려 이 ‘낙천주의적 성격 때문에 현대 과학이 이렇게 발전한 것은 아닌가’하고 반문을 할 수도 있다. 낙천주의하면 나는 카를 포퍼가 생각난다. 포퍼(1902-1994)는 과학철학자이자 저술가다. 그의 저술은 과학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비평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를 다루고 있다. 포퍼는 겸손하였으며, 낙천주의자였다. 그를 겸손하다고 보는 이유는 그의 과학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과학에 있어서 이론은 언제라도 거짓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절대적인 이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완성한 가설이나 이론도 검증과정에서 반론에 무너지거나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서 그 결과 폐기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어려운 과제일지라도 과학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 말이다. 이것이 포퍼의 낙천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낙천적인 포퍼도 미래에 대해서는 그리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우리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미래를 잘 예측할 수 있을지에 대해 포퍼는 강력한 의문을 표시한다. 포퍼는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미래에 무엇을 알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오늘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미래가 우리의 지식에 더 많이 좌우될수록 우리는 미래에 관해서 점점 더 조금밖에 알 수 없게 된다...오늘날 전문지식을 갖추는 일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중요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를 가꾸기 위해서일뿐 예측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미래에 대해 예측하려면 다른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가령 느낌이나 감정 같은 것 말이다.”(346쪽)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든다. 역시 포퍼는 겸손하다. ‘과학적 예측’보다는 ‘느낌’이나 ‘감정’같은 비과학적 도구가 필요하다니 말이다. 이러한 포퍼의 견해를 ‘포퍼의 역설(Popper's Paradox)'이라고 한다. 이 부분은 이 책 <슈뢰딩거의 고양이>(들녘.2009년)에 나오는 41가지 이야기 중 하나다.

 

포퍼하면 또 생각나는 것은 포퍼를 ‘프로이트 살인자(The murder of Freud)'’라고 부른다. 이 말은 포퍼가 프로이트를 과학계에서 추방했음을 의미한다. 즉 포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과학이 아니라고 했다. 포퍼는 과학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부분으로 반증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이론은 귀에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같아서, 이는 검증이 불가능하기에 사이비과학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무의식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이제 더 이상 프로이트의 이론은 과학 분야에서 찾을 수 없다. 그의 이론은 문화 분야에서나 살아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프로이트의 모욕(Freudian Insult)'부분에 나온다. 프로이트가 모욕을 당했다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포퍼의 겸손함과는 달리 건방진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프로이트의 모욕’ 부분을 보도록 하자. “프로이트는 태양 중심의 세계관과 세대를 거치며 종이 변화한다는 생각이 인간의 나르시시즘에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에게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다윈은 그들이 동물계의 꼭대기에 자리 잡는 것을 막았다. 그 다음으로 프로이트 자신은 정신분석의 아버지로서 인간이 더 이상 자아의 주인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시켜주었다고 보고 있다.”(321쪽) 이 부분은 인간의 존엄성에 상처를 주고 어찌 보면 모욕적인 과학적인 발견을 한 사람으로 자신을 코페르니쿠스와 찰스 다윈과 동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자화자찬의 극적인 표현이다.


‘포퍼의 역설(Popper's Paradox)’, ‘프로이트의 모욕(Freudian Insult)' 같이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은 각 분야의 이론과 지식, 연구방법을 도구로 인물의 이름을 사용해서 아주 짧은 제목으로 전체의 내용을 적시하고 있다. 책의 부제가 ‘과학의 아포리즘이 세계를 바꾸다’인 것이 정확한 표현으로 인다. 아포리즘(Aphorism)의 사전적 의미는 ‘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같은 글이 아포리즘을 나타낸 대표적인 경우다. ‘간결한 것이 의미를 가진다’라고 하면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 떠오른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을 경우 그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가정을 사용한 것이 옳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설명은 간단할수록 좋다는 의미다.  E=mc² 처럼 간결한 공식 하나로 현상을 충분히 설명한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E=mc² 를 보고 과학자들은 ‘아름답다’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이 책에 수록된 41개의 주제 중에는 나에게 익숙한 내용도 나오지만, 물리학 특히 양자물리학과 수학에 관련된 부분은 상당히 어려웠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과 같은 양자물리학의 경우에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대중을 위한 과학책이어서 상당히 쉽게 써졌음에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백 번 듣는 것 보다는 한 번 보는 게 낫다’라는 말은 우리의 시각이 감각기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일 터.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부분이 더 많다. 가시적인 세계 보다는 비가시적인 세계가 훨씬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외치는 것은 교만한 것 아닌가. 이런 과학의 세계를 보면 항상 겸손해져야 한다고 느낀다.

 

이 책의 저자는 독일 출신의 에른스트 페터 피셔로 독일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미국 칼텍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과학의 여러 분야를 전공한 사람답게 전방위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과학책 읽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이 책을 천천히 정독을 하면 과학책도 쉽고 재미있구나 하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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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동력, 당신이 에너지다
유진규 지음 / 김영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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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위기, 그렇다. 21세기 초반인 지금 우리는 더 이상 화석연로에 의존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언제일지 모르나 석유 생산은 정점을 지나고,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아니, 이미 그 정점을 지났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위기가 올 것을 알고는 있었기 때문에 대체에너지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태양력, 풍력, 지열 등 많은 신재생에너지는 아직도 생산 비용이 화석 연료보다 높아서 실용화의 길은 멀다. 그 대안으로 인간 동력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인류 역사에서는 인간의 삶을 크게 변화시킨 경험이 두 번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 신석기 혁명과 산업혁명이 그것이다. 신석기 혁명 혹은 농업혁명이라고 불리는 혁명은 1만 년 전에 나타났다. 수렵 채집으로 생활을 영위하던 인간에게 농업은 정착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정착으로 인해 인구는 이전보다 증가하고 집단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산업혁명도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드디어 인간은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데 본격적으로 기계를 활용하게 시작했고, 이 기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연료가 필요했다. 석탄은 이전에 나무로 대표되던 에너지원을 대체했고, 이로 말미암아 산업혁명은 꽃을 피우게 되었다. 20세기에 시작된 석유 중심의 에너지 체제는 20세기 풍요로운 생활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는 법. 화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현대 문명은 그 한계에 달했다. 지구 온난화는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큰 두려움으로 자리하고 있다.

 

처음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돌아가 보자. 인간의 힘으로 과연 에너지 위기를 돌파하고 화석연료로 쌓아올린 현대의 문명이 지속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이 이 책 <인간 동력, 당신이 에너지다>(김영사.2008년)안에 들어있다.

 

저자인 유진규는 어느 날 헬스클럽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5층 전체가 헬스클럽인 이 건물은 바깥에서도 안이 환하게 들어다 보일 정도로 밝은 빛으로 밝혀 있었고, 러닝머신이 수십 개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 러닝머신에는 운동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 켜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서 저마다 운동에 열심이었다. 그 장면을 보고 저자는 “전기세 많이 나오겠네..”하고 생각하였다. 그 후 이 장소를 지날 때마다 그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그 장소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고, 나아가 적개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러닝머신의 소비전력을 확인했다. 1,300wh, 형광등 40개를 한 시간 동안 켜 놓는 것과 맞먹는 전력양이었다. 이 정도의 전력양이라면 제3세계의 한 학교 학생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의 혜택을 줄 수 있고 병원 응급실과 수술실을 운영할 수 있다.”(17쪽)라는 저자의 표현은 그 거부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그가 인간 동력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였다. 방송사의 PD인 저자는 인간 동력이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한다.

 

인간 동력에 대한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고, 촬영계획을 수립한 후 드디어 취재에 나섰다. ‘인간 동력’하면 제일 먼 저 생각나는 것이 아마 자전거일 테다. 그의 첫 번째 취재 장소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였다. 그곳에는 자전거 페달로 동력장치를 만든 버스가 있는 곳이었다.

자전거로 북미대륙을 두 번이나 횡단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마틴 크리그는 14인승의 버스사이클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전거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든다고 말할 만큼 자전거 애호가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다리로, 자신의 근육으로 직접 이동하게 되면 새로운 감각의 세계가 열립니다.”(42쪽)라고 말한다. 또 “자전거에는 평화와 사랑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면 적개심과 폭력성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면 모두가 친구가 됩니다. 인간 동력에는 부유함이 있습니다.”(42쪽)라고 말하기 까지 한다. 그렇다면 14명의 사람이 페달을 밟아서 움직이는 이 버스사이클은 얼마만큼의 힘을 낼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저자의 계산에 따르면 이 버스는 2마력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즉 자전거 페달 하나가 보통 100w의 힘을 가지고 있고, 페달이 14개이므로 1,400w, 700w가 1마력이므로 버스사이클은 2마력의 엔진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1500cc의 배기량을 가지고 있는 승용차가 100마력 정도의 출력을 낸다고 하니, 버스사이클은 승용차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이 약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버스사이클은 인간 동력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48쪽)라고 적고 있다.

 

물론 인간의 힘은 기계장치와 비교했을 때 확실히 약하다. 그러나 19세기가 끝날 무렵까지 모든 산업 활동생산에서 인간의 노동이 94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한다. 요즈음은 고작 8퍼센트 수준이라고 하니, 인간 동력은 거의 설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이는 위에서 자동차와 버스사이클의 비교에서 보았듯이 출력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이 책에 소개되는 인간 동력의 가능성에 도전한 사례를 보도록 하자. 1972년 영국의 한 공군기지에서는 인간 동력비행기에 대한 시험비행이 있었다. 인간 동력비행기의 이름은 ‘주피터 Jupiter’였는데, 순수하게 인간의 근육만으로 이륙해서 1Km를 날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 동력은 페달을 밟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힘을 낼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비행기를 순전히 인간 동력으로 날 수 있게 만들을 수 있다면 인간 동력으로 화석에너지를 어느정도는  대체할 수 있을 수 있다고 보여 진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클라우드 팜(Croud Farm)이란 재미있는 단어가 나온다. 이는 지하철역이나 광장 같이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에서 군중의 발자국 충격을 바닥에서 흡수해 일종의 발전소를 만든다는 것이다. 지하철 동경 역에서는 2008년 초 실제로 이를 실험했다, 불과 90평방미터의 면적에 설치했지만, 발생하는 전기량은 500KWsec로 100W짜리 전구를 80분간 밝힐 수 있으며, 전철역 개찰구 하나를 하루 종일 운용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저자는 신도림역에다가 이를 설치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생각해본다.

“서울 신도림역은 환승통로와 각 출구의 계단만 2천 평방미터, 하루 유통인구는 45만 명에 이른다. 여기에 지금보다 효율이 1,000배 개선된 발전마루를 깔면 하루 2,600kwh의 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전동차 운영에 필요한 고압전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역내 전기는 승객들의 발걸음만으로 충당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252쪽)라는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렇게 인간의 발걸음의 압력을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렇다면 좁은 공간에서 인간의 발걸음 활동이 더 활발한 곳이 있다. 바로 나이트클럽이다.


네덜란드의 로터담에는 세계 최초의 ‘발전형 댄스 클럽’이 2008년9월 오픈 했다고 한다. 이 클럽은 지하1층 지상3층의 대형 나이트클럽으로 1,500명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한사람이 댄스 클럽에서 춤을 추면 1인당 20~100W 까지 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이를 보고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매일 한 시간씩 인간 동력 운동기구로 운동하면 총 18.2 Kw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4,300리터의 이산화탄소가 방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만약 서울 시민 모두가 하루 한 시간씩 인간 동력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한다면 하루 30만Kwh, 화력 발전소 1기분의 전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 클라우드 팜, 지속가능한 댄스클럽, 그리고 인간 동력 헬스클럽은 인력발전에 말 그대로 ‘인해전술’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258쪽)라며 취재를 마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에너지 위기를 극복할 방안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근육의 힘이라는 것이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우리의 근육의 힘으로 세상을 돌려보도록 하자. 우리의 몸도 건강해질 것이고, 지구도 건강해질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과연 에너지 위기를 돌파하고 화석연료로 쌓아올린 현대의 문명이 지속될 수 있을까? 라는 처음의 질문에 이제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당연히 우리의 근육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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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인류 최후의 고향
존 리더 지음, 김명남 옮김 / 지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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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속성이 극명하게 표출되는 공간이 바로 도시일 것이다. 지금 세계 인구 60억 명 중에 반이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하고, 한국에서의 비율은 세계 평균보다도 훨씬 높은 81.5퍼센트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200년 이상 걸린 산업화를 불과 몇 십 년 만에 이룩한 것처럼, 도시화도 빠른 시간에 해치웠다. 그런데 도시와 농촌의 구분 기준은 무엇입니까.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도시와 마을을 구분할 때 인구수보다는 공동체내에서 사회경제적 분화가 일어났는가 여부로 정한다고 말한다. 즉 다양한 직업이나 업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도시, 인류 최후의 고향>(지호.2006년)은 도시의 생성에서부터 그 속성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인간이 도시와 맺어온 상호 작용과 미래에 도시의 모습은 어떨지에 대해 종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책이다.

그렇다면 인류최초의 도시는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 그 의문을 풀기위해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문명에서는 약 6천 년 전에 최초의 도시들이 생겨났다. 그 조금 뒤에 이집트에서 도시가 생겼다... (지구) 어디에서건 한 도시의 탄생은 독특한 한 문명의 시작을 의미했다. 마치 일정한 선행조건이 갖추어지면 도시와 문명은 필연적으로 솟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 선행조건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도시의 성장을 부추긴 원동력은 또 무엇이었을까?”

이 책의 저자인 영국의 작가이자 포토저널리스트인 존 리더(John Reader)는 이렇게 의문을 제기한 후 그 대답으로 “농경과 전쟁”을 꼽았다. 농경의 성공으로 인하여 부유해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방어용 거주 공간을 만들었다. 나아가 그들은 권력자로 등장했고, 이들은 결국 왕이 되어 공동체를 통치하고 도시를 건설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농경과 전쟁”이 도시 등장의 선행조건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전 세계 모든 초기 문명의 유적에서는 전쟁의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루이스 멈포드는 도시를 만든 요인으로 토기 물레, 베틀, 돛배, 금속 주조술, 활자, 쟁기, 곡물 경작술 등을 꼽고 있는데, 이중 쟁기와 경작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시작된 도시화의 물결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가속화된다.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도시로 도시로 몰려든 것이다. 이렇게 커진 근대적인 도시는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었고, 인류의 위대한 문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그 그림자는 1990년대 환경학자들이 개념을 만든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이란 단어에 함축되어 나타난다. “‘생태발자국’ 은 한 도시나 지역, 경제계에 흘러드는 모든 에너지와 물질의 양을 측정하여 그러한 유입량을 생산하기 위해 요구되는 생산지 또는 바다의 영역을 넓이로 환산해보는 방법이다.”(469쪽)

 

오늘날 도시는 지구 표면의 2퍼센트 미만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만, 세계 자원의 75퍼센트 이상을 소비하고 있는 블랙홀이다. 런던이란 도시는 자신의 각종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120배에 달하는 토지 면적이 필요하다고 한다. 또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북아메리카의 보통 시민들처럼 편안하게 살려면 지구 하나만 가지고는 턱도 없고, 지구 3개 정도의 넓이가 확보되어야만 필요를 충당할 수 있다고 하니, 도시의 그림자는 꽤 짙다.

 

그래서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그저 숲에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과학적 증거들도 있다. 초록으로 얼룩진 나무 그늘에 몇 발짝 들어서기만 해도 벌써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근육 긴장이 풀린다고 한다. 틀림없이 숲은 도시 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줄 수 있다.”(463쪽)고 저자는 표현하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묻고 있다. “도시는 인간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과연 인간은 도시를 떠나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스스로 대답한다. “이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도시는 아직도 중요하다. 그들에게 도시는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해결책인 것이다.”(476쪽)

 

이 책의 원제목은 <Cities> 즉 ‘도시들’ 이다. 그런데 한글 제목은 <도시, 인류 최후의 고형>이라고 번역해 놨다. 저자인 존 리더는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도시와 농촌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농촌은 좋은 곳이고 도시는 나쁜 것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리고 도시화로 인하여 벌어진 나쁜 것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도시는 인간이 스스로의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이미 우리는 도시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도시를 ‘인류 최후의 고향’이라고 한글 제목을 붙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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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 - 섞임과 넘나듦 그 공존의 민족사 너머의 역사책 1
이희근 지음 / 너머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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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 <쌍화점>은 조인성과 주인모라는 잘 생긴 배우가 출연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이 봤다고 한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영화 줄거리를 들으니 내가 알고 있던 ‘쌍화점’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내가 아는 쌍화점은 <고려사> ‘악지’에 실려 있다. 흔히 남녀상열지사라고 표현되는 그런 내용의 가사인데, 이렇게 시작이 된다. “쌍화점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

 

위 가사를 요즘 말로 바꾸면 “쌍화점에 떡을 사러 갔더니, 회회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 이다. 눈에 띄는 단어가 있는데 ‘회회(回回)아비’와 “쌍화(雙花)”다. 회회는 이슬람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쌍화는 이슬람식 떡을 뜻한다. 그러니까 고려시대에 아라비아인이 떡집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 집에 떡을 사러 온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는 내용이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터키 사람이 케밥 집을 서울에서 운영하고 있는 식이다. 세계화 시대인 지금 서울 같은 대도시는 수많이 인종이 살고 있고, 그들이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약 700여 년 전인 고려 말에 외국인, 그 중에서도 아주 먼 나라인 아라비아인이 개경에서 떡집을 했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서 보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존재는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찾아서 끊임없이 이주를 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동부에서 태어나 전 세계로 이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음은 자명하다. 쌍화점을 운영하던 회회인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 고려에 왔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반도에도 이처럼 끊임없이 이주민들이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역사가 이희근의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너머북스.2008년)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로 들어온 이주민들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秦)시황은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벌였다. 그런데 무리하게 진행된 토목 공사와 폭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진을 떠나 한반도 남부까지 이주했고, 이들이 진한을 건국했다고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에 나온다. 또 진한 교체기에 수만 명이 고조선으로 이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 원성왕릉에 있는 무인석을 보면 이목구비가 우리와는 아주 다르다. 또 복장이나 헤어스타일도 마찬가지인데, 아랍인의 형상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즉 아랍인들이 신라에 와서 무인으로 활동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처용그림이나 처용탈의 모습도 우리와 사뭇 다르다. 처용의 정체에 대해서 학계에서 논란이 있는데, 처용이 아랍인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조선시대 백정(白丁)은 천민을 의미했다. 이들은 도축을 주업으로 하면서 사냥, 기예, 유기 및 가죽제품의 제조와 판매에 종사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런데 백정 집단은 고려시대 거란인, 몽골인 등 북방 유목민들이 한반도로 들어와서 농경에 종사하지 않고 유목인의 삶의 방식을 가지고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들로 인하여 육식이 보급되었고, 또 우리사회의 식생활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렇게 외국에서 들어와 한반도에 정착한 이들의 수는 상당히 많았을 것이고, 그들은 지금 한반도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의 선조일 것이다. ‘한민족이 단일 민족이다.’라는 말은 이제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즉 단일 민족은 단순히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조선시대의 백정 집단처럼 북방 이주민들은 한반도에서 차별을 받았다. 아마 그 집단이 대규모였고 힘이 있었다면 그들이 주류로서 활동했겠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기에 차별 속에서 힘든 삶을 영위했을 터. 실상 낯선 자에 대한 경계는 동물의 본능적인 행동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결혼 상대자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신부를 수입(?)해서 가정을 꾸린 집이 많아지고 있다. 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근로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많다. 역시 이들도 차별을 받고 있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 출신이라고 그들을 차별해도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들을 차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우리는 잘못이 없는 것일까? 거꾸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자. 한국인이 미국이나 유럽처럼 부유한 나라에 가서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면 이도 당연히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백인들에 의한 유색인종 차별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우리 또한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그들을 차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배타적인 ‘이방인 혐오증’을 만들었다. 우리도 이 한반도에 이방인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왔다는 이유하나로 텃세를 부리는 유아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을 통해 이 시대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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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도의 악몽 - 소설보다 무서운 지구온난화와 환경 대재앙 시나리오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매년 초여름이 되면 언론에서는 그 해의 여름 날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올 여름은 기상관측사상 제일 더운 여름이 될 것입니다.” 정말 지구는 매년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즉 ‘지구 온난화’는 지속되고 있다. 과연 앞으로 100년간 지구의 온도는 얼마나 올라갈까. 얼마나 더 뜨거워질까. 이 책 <6도의 악몽>(세종서적.2008년)은 이런 의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다.


지난 100년간 지구의 평균 기온은 섭씨 0.8도 정도 올랐다고 한다. 이 수치는 전 세계 평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지역은 2도가 올라갔을 수도 있고, 어떤 지역은 0.3도가 올라갔을 수도 있다. 한국은 같은 기간 동안 1.5도가 올라갔다고 하는데, 겨울의 일교차로 보았을 때 하루에도 몇 도가 오르내리고 있어서, 1도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평균 기온 1도는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1만 년 전에 끝난 마지막 빙하기는 지금보다 불과 평균 3도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하니, 1도가 올랐다고 하는 이야기는 심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1도가 더 올라가면 지구는 어떻게 변할까. 아니 2도, 3도 나아가 6도까지 오른다면 지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빙하기와 빙하기 사이에 간빙기가 존재했다. 즉 지구의 기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자연적인 순환이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지금의 온난화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기후 변화의 속도가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과거의 기후변동은 수천 년, 수만 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는데, 지금의 변화는 엄청난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속도가 빨라지게 된 원인이 바로 이산화탄소 때문이라는 것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지구시스템의 운동반응 시차 때문에 1도 정도의 온도 상승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일 당장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전혀 없더라도 온도는 당연히 오를 것이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대기 중에 뿜어낸 탄소의 양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기온은 앞으로 적어도 30년 동안 급격히 상승할 것이다.

 

지구가 지금보다 3도가 오르면 ‘탄소 순환’이 역전된다고 한다. 날이 더워지면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지 않고 오히려 대기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런 상태가 되면 대기 중의 탄소농도는 2100년에는 250ppm까지 올라가며, 이에 따라 온도는 1.5도 상승한다고 한다. 즉 탄소순환의 양의 되먹임이 일어나 온난화는 가속이 붙게 된다. 따라 21세기 말이면 지구온난화로 인해 기온은 4~4.5도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는 정말 최악의 시나리오이고 인간에게는 재앙일 것이다. 지구의 온도가 3도까지 오른다면 6도까지 오르는 것은 당연히 따라오는 현상이다.

 

지구온난화에 따라 이득을 보는 지역도 생겨난다. 북극 같은 지역은 날씨가 온화해짐에 따라 식량생산도 가능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 이면을 살펴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일단 북극에 얼음이 없어지면 북극곰과 같은 동물이 멸종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수도 있다. 왜냐하면 더욱 두려운 일이 발생할 테니 말이다. 북극의 얼어붙은 토양에는 약 5천억 톤 정도의 탄소가 묻혀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런 북극의 땅이 녹으면 이 탄소의 상당량이 배출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구온난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이에 대해 한 과학자는 “우리는 북극 냉장고의 플러그를 뽑아버렸습니다. 이제 안에 들어 있던 것이 전부 썩기 시작할 것입니다.” 라며 심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이렇게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을 그냥 보면서 멸종해갈 것인가.

 

물론 방법은 있다. 먼저 지구의 온도를 2도 오른 상황에서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실질적인 ‘에너지 효율’과 광범위한 ‘신기술’들이 결합되어야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프린스턴 대학의 로버트 소콜로우와 스티브 파칼라가 발표한 논문은 이런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두 학자의 아이디어는 여러 가지 기술을 하나하나 쐐기로 간주해서 지구 온난화를 막아 보고자하는 것이다.

 

소콜로우와 파칼라는 탄소 배출량을 줄이면서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도록 해주는 특효약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다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세계 모든 자동차들의 연비를 갤런 당 30마일에서 60마일로 높인다면, 하나의 쐐기를 안정시킬 수 있다. 자동차 당 평균 이동 거리를 매년 1만 마일에서 5천 마일로 줄여도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건물이나 발전시설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도 하나의 쐐기를 안정시킬 수 있다. 발전에 석탄보다 가스를 더 많이 사용하거나 가스 발전소를 네 배 늘인다면, 이 역시 하나의 쐐기 안정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말하면 이런 쐐기를 박아서 지구온난화를 막아보자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자자는 또 하나의 제안을 한다. ‘열대림 벌목을 금지해야 한다’고.

 

저자인 마크 라이너스는 <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돌베개 2006년)을 쓴 바 있었다. 이 책에서 라이너스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가 온난화로 인해 점차 높아지는 해수면에 섬전체가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슬픈 목소리로 독자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6도의 악몽>은 그보다 더욱 슬픈 이야기다. 이 슬픈 이야기는 내셔널 지오 그래픽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작년 여름 국내에서 방송된 바 있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저자가 말하고 있는 ‘지구 온난화에 쐐기 박기’는 우리에게 남겨진 최후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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