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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 - 마광수 문화비평집
마광수 지음 / 새빛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우리는 흔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데에 익숙해져서 남이 보는 데서 하는 것과 남이 없을 때 하는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결과 우리의 삶은 가식적이고 또 이중적이 된다. 그렇다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마광수는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로서는 항상 그의 행보가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마광수는 자신이 선택한 그 가치관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도 있었다.
‘마광수!’하면 보통 ‘성’에 관해 솔직하다 못해 과감한 표현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부분 때문에 구속이 되고 교수직위도 잃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마광수의 그런 솔직함이 아주 마음에 든다. 내가 못하는 것을 그는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버자이너 문화사>(동아시아.2007년)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극명하게 표현되었듯이 여성의 성기에 관한 책으로 적나라한 표현에 속이 시원했던 기억이 있다. 마광수의 글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광수의 글을 읽으면 일단 그의 과감함에 박수를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 시대는 개인주의자를 요구한다>(새빛.2007년)는 마광수의 문화비평을 모아놓은 책으로 그의 폭넓은 문화에의 관심과 또 전문가로서의 날카로움이 번득인다. 마광수는 우리에게 성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만 알려진 것에 대해 강한 부정이라도 하듯이 지식인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 및 교육 나아가 종교에 까지 그의 관심 영역이 넓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는 역시 그의 ‘성담론’이 마음에 든다.
어쨌든 마광수다운 것은 노골적인 ‘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항상 ‘야한 여자’가 좋다고 소리친다. 그가 말하는 야한 여자는 ‘夜한 여자’가 아닌 ‘野한 여자’이다. 그가 말하는 ‘野한’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야하다의 어원을 ‘들야(野)’자로 보아 본능에 솔직하다고 본다. 본능적 욕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욕이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이성의 눈에 띄어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에서 독자들은 그의 표현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는 본능으로만 살지 않는다’라는 거부감과 아울러 ‘이성의 눈에 띄어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마광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아마 많은 생물학자들의 견해도 이와 같을 것이고, 나의 생각도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말을 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사고나 행동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고 감성적이라고 느낀다.
그의 예술관을 한 번 들어보자.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금지된 것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어야 하고 ‘자유에 대한 한없는 갈망’이어야 한다. 정치적 억압에 대한 도전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문화인들은 거의가 ‘성 알레르기’증세에 걸려 있어 성에 대해서만은 중세기적 ‘모럴 테러리즘(moral terrorism)'을 행사하는 것을 예사로 한다. 그러다보니 도덕과 윤리를 핑계로 한 정치적 억압이 은근히 정당화되고, 일반 민중들은 여전히 공포와 죄의식 속에서 각자 각자의 천부적 자유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장을 보면 그의 가치관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외침은 끝없는 ‘자유’에의 의지에 있다. 예술도 성도 모두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가감없이 투영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자유에의 열정과 아울러 거침없는 자기 표현에 찬사를 보내주고 싶다. 내가 못하고 있는 것을 그는 아주 쉽게(?) 표현함으로써 내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