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속, 발기하는 사물들 - 미술과 철학의 공통먹이, 사물 이야기
조광제 지음 / 안티쿠스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이 <미술 속, 발기하는 사물들>(안티쿠스.2007년)이라고? 제목 한 번 도발적이군.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보고서 든 생각이다. 미술 속에서 사물이 발기하다니, 발기라는 말은 남성의 페니스가 커진다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그림 속에서 사물이 커진다는 의미인가?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제를 한 번 보자 ‘미술과 철학의 공통먹이, 사물 이야기’, 여전히 잘 모를 소리가 계속된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어 저자의 서문을 살펴보았다. “미술과 관련한 담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더 풍성하게 만들고자 기획된 것이다. 이 안에는 철학적 사유를 감각의 보고인 미술을 통해 훤히 보일 듯이, 손에 확연히 잡힐 듯이 구체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함께 들어 있다. 이른바 미술과 철학, 철학과 미술이 서로에게 ‘몸을 녹여’ 삼투해 들어가는 장면을 연출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여전히 어렵다. 내게는 미술도 어렵고 철학도 어려우니 참 힘든 책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겁부터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책의 본문으로 들어갔다.

이 책은 저자가 2003년 철학아카데미 여름학기에 ‘회화와 사물’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 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술과 철학이 사물을 가운데에 두고 미술 쪽에서는 ‘감각적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철학은 ‘개념적 사유’를 통해서 접근하고 있다. 저자인 조광제는 철학자이다.

‘감각적 행위’에 등장하는 미술가는 ‘폴 세잔’, ‘파블로 피카소’, ‘마르셀 뒤상’, ‘칼 안드레’, ‘앤디 워홀’이고, ‘개념적 사유’의 측면에서는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와 ‘질 들뢰즈’이다.

미술은 기본적으로 피사체를 필요로 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이나 풍경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그 피사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며, 자신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피사체로서 사물들은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사물은 자생적으로 어떤 다른 것들로 생성, 변화해갈 수 있는 가소성과 다산성을 가지고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즉 사물은 미술가에 의해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며, 또 이 작품들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새로운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리라. 드디어 내게 이 책의 제목의 의미가 가까이 다가온다.

과연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화장실에 있는 남성용 변기는 화장실에 있으면 단순히 소변기에 불과하지만 이를 갤러리에 옮겨 놓으면 예술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마르셀 뒤샹의 <샘>이란 작품이 남성용 소변기 바로 그것이다. 뒤샹은 예술을 창조적인 행위라고 하는 말에 반대한다고 말한다. 그는 소변기를 갤러리에 다가 전시함으로써 예술의 의미를 새로 정의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정의는 예술의 무의미성 내지는 예술의 공허함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나아가 반예술의 주창자가 된다. 그러니까 뒤샹에게 있어서 어떤 사물도 예술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뒤샹의 경우는 이 책의 제목처럼 사물이 발기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시작으로 사물을 볼 때에 사물의 뒷면이나 옆면은 볼 수가 없다. 하지만 한 화면에 건축물의 설계도와 같이 사물의 모든 면을 표현하고자 한 미술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피카소이다. 2차원의 종이 위에 그는 3차원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피카소가 사물에 발기를 시키는 능력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 어떤 사물도 그의 예술적인 표현의 시선을 벗어날 수 없었고, 이윽고 그의 손을 잠시 거치기만 하면 그 무엇이든 전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 피카소에 이르러 회화 예술은 겉으로 표현되는 사물의 모습을 넘어서서 사물자체에 내재하는 자기 생성과 타자 생성이라는 힘에 접근하게 된다.”

얼마 전 서울에서도 앤디 워홀의 전시회가 있었다.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워홀하면 매를린 몬로와 마오쩌뚱의 얼굴이 생각이 난다. 그 대상들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대량생산해낸 그것들이 과연 예술일까 하는 의문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예술세계는 팝아트란 이름으로 미술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치 카피를 통해 대량생산된 워홀의 작품을 가지고 철학자는 어떻게 그 속에 담긴 미학을 읽어내고 있는지 들뢰즈의 말을 들어보자. “회화 부분에서 팝 아트가 모사, 모사의 모사 등등을 밀고나가 결국 모상이 전복되고 시뮬라크르로 변하게 되는 그 극단의 지점에 이르는 방식을 보라. 워홀의 그토록 멋진 계열발생적 시리즈들에서는 습관, 기억, 죽음 등의 모든 반복들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 들뢰즈의 표현이 쉽지는 않지만 독자들은 워홀이 표현한 사물들을 들뢰즈가 멋지게 발기시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들은 미술작품 속에 있는 사물들을 끊임없이 어루만짐으로서 사물들이 발기하게 하고 있으며, 이 사물들은 나아가 감상자들에게 사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예술의 미학인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03-31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좋습니다. 리뷰 제목이.

이환 2007-03-31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시스님이 철학전공하셨죠? 참, 철학 어렵습니다. 이 책 만만치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