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자본의 감추어진 진실 혹은 거짓 청소년 철학창고 8
칼 마르크스 지음, 손철성 엮음 / 풀빛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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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제목의 '자본론'입니다.
이책은 풀빛출판사에서 청소년용으로 나온 책입니다.
원래 자본론은 6권쯤 되고 분량도 굉장히 많은 책입니다....

이책은 읽기쉽게 풀어쓴 요약본입니다.

우선 책내용에 들어가지 전에
저는 올해부터 성과연봉제 대상이 되었습니다.
급여에 대한 설명은 실제 총 급여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모를 찝찝함과 성과연봉제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은 어쩔수 없었습니다.
이책을 읽으며 왠지 모를 찝찝함과 거부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성과급제 임금의 본질은 성과가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겠다는 이야기 입니다.
바꾸어 보면 일정 성과를 내지 못하면 더 적은 임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입니다.
성과급제 임금이 얼마나 효율적인 노동착취인 방법인지 이책은 설명합니다.
임금은 곧 노동의 대가라는 일반적인 상식이 얼마나 폭력적인 시각인지도 설명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본소득이나 청년수당 등의 소득보전에 대한 정책은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임금은 노동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이익의 분배기능도 해야하는데 점점 노동의 대가로써의 임금만 강조되는 것이 안간성을 얼마나 말살하는 것인지에도 생각해 보게 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신봉하고 있는, 공공기관까지 확대운영을 추진하고 있는 성과급제 임금에 대한 19세기 학자의 비판은 한번쯤 곰곰히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배경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나타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들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하여 문제점을 신랄하게 분석합니다.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산업혁명으로 거대자본이 생산설비를 확대하고 노동력을 가치는 떨어지고 생산설비의 확대로 재화의 생산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으나 소비의 주체인 노동자의 임금은 턱없이 낮아 생산과 소비의 순환이 어긋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 대공황, 2차 세계대전은 원인은 자본주의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자본이 자본순환을 통해 끊임없이 잉여자본을 축적하려면 지속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계층이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 계급의 임금이 증가하여야만 소비기 지속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19세기에 씌여진 책에 21세기의 지금을 그대로 반영하기는 어렵겠지만.
자본주의 라는 이름의 행해지는 인간의 억압, 노동 소외, 비인격적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은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자본, 대량생산, 노동착취의 시대의 악순환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21세기 우리는 마르크스의 제기한 자본주의의 한계를 얼마나 극복했는지, 과연 극복할 의지는 있는것인지
하는 생각도 하게됩니다.

아마도 마르크스는 인간이 인간으로 차별받지 않고, 인간의 노동과 자본의 평등한 관계를 꿈꾼 사람이 아니였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공동생산 공동분배라는 기치로 "공산주의"의 선언했을 겁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를 실현하지 못하고 독재나 전체주의로 변질되고 결국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념이 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마르크스가 놓친 부분은 바로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은 공산주의를 실현할 만큼 선하지 못하고 자본주의를 실현할 만큼 이기적 이다"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슬픈 현실입니다.

어릴적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찬양 한구절이 생각납니다.
"이상하다 동전 한닢, 움켜잡으면 없어지고 쓰고 나눠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차네~~"
깊은 뜻을 이제야 이해합니다. 진리의 말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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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사람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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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으로 읽었던 "생의 이면" 작가 이승우의 소설입니다.
"생의 이면"이후 이승우 작가의 책은 찾아 읽는 편입니다....

식물들의 사생활, 지상의 노래, 단편집인 오래된 일기가 생각납니다.
이승우 작가의 글은 좀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짦고 간결하고 동어반복이 없는 문체를 좋은 문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동어반복의 긴 문장을 미끄럽게 쓰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분입니다.
어쩌면 카프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주제는 종교적 구원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에 끝없이 천착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그러나 "생의 이면"을 넘어서는 작품은 없는 듯하기도 했는데
"신중한 사람"은 제가 기대하던 그 이상이었습니다.

작가가 자기 안으로 굉장히 깊이 들어가 쓴 글인것 같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작정하고 작가의 내면에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가 독자를 의식하는 순간 작가의 특징은 희석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편안하지는 못했습니다.
신중한 사람의 부자연스러움이 내안의 그것과 참 많이 닮아 있어서 불편하기도 했고 나의 깊은 어딘가의 부자연스러움을 찌르는 것 같이 놀랍기도 했습니다.

"신중한 사람"은 8편의 단편을 묶은 단편집입니다.
이야기 하나하나 다른 이야기이지만 "신중한 사람"들의 부자연스러움이 전체를 관통합니다.

억지와 불합리와 막무가내를 거북해하는, 그리고 그 거북함이 불편해 결국 아무것도 하지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칼 끝이 되어 되돌아 오는 것 같습니다.

지방 소도시에 리모컨이 없어져 매일 새벽5시에 켜지는 슬픈 텔레비전

(읽어보면 정말 슬퍼집니다),
신중해서 너무나 신중해서 자기집에 세들어 살게된 주인공은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를 또다른 모습 같기도(해설에도 나와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스승의 작업실에 대면한 나의 과거의 모습이 이렇게 부끄러울 모습

(어쩌면 나와 닮은),
이미를 떠나왔지만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비루하지만 나와 같은 이야기

(나는 어디있는 건지),
내가 뭘한건지 나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은 알아버린 나의 치졸함과 만나는 순간, 그 칼의 끝은 나를 향한 것인지 너를 향한 것인지, 칼이라도 지내지 않으면 살수 없는 용기없는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칼이도 하나 사야 겠습니다)
제일 가슴 졸이며 읽었던 어디에는 없는 그의 이야기(되는 일 하나 없는 어느 순간의 내 이야기 일지도)
하지 않은 일을 증명해 내야하는 쓰린 이야기. 그들의 꿈속까지 찾아가야만 가능한 이야기(꿈속까지 찾아길 용기조차 없는 슬픔)

묵직한 돌 덩이가 누르는 듯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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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 살림지식총서 282
변광배 지음 / 살림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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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

20세기 초 프랑스의 지식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이야기입니다.
두사람의 50여년간의 긴 계약결혼 기간이 대해 자세히 서술합니다.

...

얇지만 어렵게 생긴 책인데 생각보다 여렵지 않습니다.
글을 쓰신분의 사르트로와 보부아르에 대한 이해도와 애정이 각별해
보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이해한 만큼 독자는 읽기가 쉬운것 같습니다.

사실 사르트르나 보부아르는 이름만 들어봤지 책을 읽어봤다거나
관심을 갖고 찾아본 작가들은 아닙니다.

물론 두 사람을 작가의 범주로 묶기에는 그 폭이 넓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철학을 삶에서도 실천하고자 했고 그 방법이 둘의
계약결혼이었습니다.

계약조건은 3가지였죠.
1. 서로를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허락한다.
2. 상대방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속이지 않는다.
3. 경제적으로 서로 독립한다.

부부라는 공동체이기전에 각각의 개인의 개체성을 100% 존중한다는
의미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이상한 결혼생활이 순탄한 것 만은 아니였지만 50여년간을
부부이상의 영혼의 동반자로 함께하게 됩니다.

꼭 부부가 아니라도 서로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일 겁니다.

두사람은 각각 둘의 관계를 모티브로 삼은 소설을 출간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사상을 삶에서 실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두 사람의
삶이 부럽기도합니다.

자신이 제도권에 의해 규정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는 사르트르가 조금은 이해되기도 합니다.

몽파르나스 묘지에 두사람이 함께 누워있고 묘비에는 연인들에
키스마크가 오늘까지도 계속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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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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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VS 아가씨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때문에 읽게된 책입니다....
'핑거스미스'는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길고 지루한 묘사가 벽이긴 하지만 그벽만 넘는다면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빌어 인간의 모순과 욕망을 그려냅니다.

특별히 야한 소설 읽기 모임을 통해 귀족, 특히나 남성들의 이중성과 비겁함을 비판합니다.

이 소설은 귀족 남성들이 나오긴 하지만 철저하게 여성 소설입니다.

귀족으로써의 틀을 죽음으로 깼던 모드의 엄마,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 낸 석스비 부인,

그리고 필연과 악연, 연인인 주인공 모드와 수.

귀족 여성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어린딸에서 자유로움을 선물했던 엄마.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자신의 딸은 비천한 삶에서 구하고자 했던 엄마.

사랑하는 모드를 위해, 사랑하는 수를 위해 기다려야 했던 시간, 도망쳐야 했던 시간.

소설은 모두 3부로 되어있습니다.
1, 2부에서 차곡차곡 쌓여진 이야기가 3부에서 폭발하는 듯 합니다.
영화와는 많이 다르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게 되죠.

영화 아가씨는 1부와 2부는 그래도 나름 원작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3부를 과감히 삭제해버린 듯 합니다.
그래서 원작과는 많이 다른 결을 같게됩니다.

원작인 핑거스미스가 여성성이 진한 소설이라면
영화 '아가씨'는 여성성을 충분히 상업화 한 영화입니다.
마치 브라이어에 모여든 귀족 남성들 위한 영화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쉬운 지점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모드와 수와 석비스 부인에 몰입했다면

영화는 자연스럽게 젠틀먼의 시각이 됩니다.

영화만 봤을때는 잘 만들어진 영화고, 특히나 미술적 감각이 광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보고 나니 영화의 아쉬움이 더 많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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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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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천박한 성실함과 이제는 싸워야 겠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나 아렌트)

어려운 책이고 어럽게 읽었습니다.
한달내내 겨우겨우 읽은 책입니다.

...

나치 부역자였고 독일 패전 이후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이스라엘 비밀 경찰이 납치해서 이스라엘
법정에 세웠습니다.
(이부분도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이스라엘 경찰이 독일군을
납치해 자기나라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변호사를
파견합니다. 우리 역사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이 재판 과정을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기록한 책으로
1963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이지만 민족주의에서는 한발 떨어져서
기록한 책입니다. 유대인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이유로 이책은
1990년대에 와서야 이스라엘에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 당시 유대인 이주와 학살을 위한 이동에 깊이 관여했던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굉장히 성실하고 긍정적이며 심지어 착하기까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정신감정 했던 의사들의 대부분은 그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정서적 특징을 “천박함”이라고 평했습니다.
그리고 천박함의 뜻은 ‘사유하지 않는 성실함’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책의 기술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유대인 혐오자도 아니였습니다.
너무나 성실하고 평범하게 “악”을 실행에 옮겼던 그는 끝까지
자신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 것 밖엔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치는 대량학살이나 살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대인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방안” 이란 말로 대량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사람이 언어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사람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완곡한 표현은 죄책감으로 부터 일정부분
자유 롭게 하는 부분이 있고 나치는 이를 충분히 활용합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에 대한 존경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군 하사에서 거의 8000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양심은 휴식상태였다고 기술합니다.
아이히만은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가까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작은 권력에 작은 성공에 취해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양심의 소리와 존경할 만한 목소리. 아렌트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2차 대전이후 많은 나치 부역자들이 “내면적으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내면적으로 반대”했다면 “외적으로 드러나 악행”에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을까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각 나라들에서 행해진 학살을 위한 이송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자세한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서
많이 아쉽기도 했습니다.

아이히만은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였으며 그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의 죄는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됩니다. 그의 덕은 나치스에 의해 오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지배집단이 아니었고 그는 희생자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대신해서 고통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아이히만은 사형이 언도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죽는 순간까지 그는 그 스스로를 속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제 자신도 아이히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시끄럽게 합니다.

나의 성실함이 과연 “선”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아이히만의 “천박함”이 나의 성실함은 아닌지.
착하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덕목”으로 생각했는데
나의 성실함이 어쩌면 “평범한 악”이 될 수 있는 건 아닌지.
내가 나를 속이는 것조차 모르는 건 아닌지.

어렵고 무서울 질문들을 수없이 던지는 책이지만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하는 책입니다.

아렌트는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에간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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