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아카데미] <필경사 바틀비> + 성기현 강연 (바틀비 효과_7월 1일 오후 7시)
허먼 멜빌 지음, 정해영 옮김, 성기현 해설, 성기현 강의 / 그린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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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이유 없이 피고용인의 ‘선호‘ 따위만으로 고용인의 업무 지시를 거부하다니?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다. 피고용인으로서만 살아왔던 나에게는 바틀비의 정형어구가 ‘그래 맞아, 피고용인인 나에게도 선호라는 게 있다고!‘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주었고 또 다른 질문들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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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카데미] <필경사 바틀비> + 성기현 강연 (바틀비 효과_7월 1일 오후 7시)
허먼 멜빌 지음, 정해영 옮김, 성기현 해설, 성기현 강의 / 그린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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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와 바틀비


 상담 선생님께서 최근에 읽은 육아 관련 책에서 요즘 사람들이 대체로 다른 하고 싶은 것이나 대안 없이 하기 싫어하기만 한다는 내용을 읽었다고 하셨다. "그게 바로 저예요!" 하며 공감했는데요. 나는 인생에 크게 하고 싶은 것 없이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지는 것 정도가 목표인 사람이기 때문에 늘 바틀비를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틀비란 인물에 매우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미루고 미루며 읽지 않았고요. 그러다 이번에 알라딘 아카데미에서 비틀비 관련한 강의를 한다고 해서 책도 구매하고 강의도 들으러 다녀왔다. 강의는 그린비 출판사의 [필경사 바틀비]에 해설을 써주신 성기현 교수님이 진행해주셨다. 내용은 들뢰즈가 제시한 내용을 바탕으로 ▲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와 그 효과 ▲ 호모 탄툼(Homo tantum)으로서의 바틀비 ▲ 19세기 미국 문학과 '보편적 형제애'에 대해 다루었다. 이 글에서는 강의의 내용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내용 위주로 정리하며 내가 이해한 바를 기반으로 다른 감상도 추가해보고자 한다.


*인용구의 굵은 체는 책을 그대로 따랐으며, 배경색은 내가 넣은 것이다.


"저는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겠다는 말인가?"

"안 하는 쪽을 택한다는 말입니다."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는 정형어구


특징


○ 미규정성

→ 바틀비는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대체로 대상어(목적어) 없이 이야기한다. 거부의 대상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현재 변호사가 지시한 업무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결정들을 포함한 모든 대상이 된다.


○ 선호의 논리

→ 변호사는 고용주이며 정당한 세입자인 자신의 명령에 바틀비가 당연히 복종할 것이라 가정하며 그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사무실을 떠나달라고 간청/회유/호소한다. 하지만 바틀비는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선호를 표현하고 변호사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

→ 변호사가 하는 가정은 자본주의의 가정 그 자체다.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하는 업무지시는 비상식적이지 않은 이상 당연히 따를 것이라 생각하며 정당한 권리를 가진 세입자가 다른 사람이 그 장소에 함부로 들어온다면 나가라고 했을 때 당연히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틀비가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변호사의 지시를 거부했을 때 변호사는 당황하게 되고 나 또한 충격을 받았다. 이는 단순히 바틀비가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만약 바틀비가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면 그저 '통쾌하다' 정도의 감정만 생겼을 것이다. 나(그리고 아마도 변호사)를 당황하게 한 것은 피고용인에게도 '선호'가 있으며 그 '선호'가 위에서 '가정'이라고 표현한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규칙과 규정을 무시하며 겉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피고용인의 '선호' 따위만으로 고용인의 업무 지시를 거부하다니?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다. 피고용인으로서만 살아왔던 나에게는 바틀비의 정형어구가 '그래 맞아, 피고용인인 나에게도 선호라는 게 있다고!'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주었으며 그래서 그 선호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했다.


호모 탄툼은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가진 존재, 그런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배제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런 호모 탄툼이 역설적으로 어떤 정치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호모 탄툼은 사회를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이분법,  '복종' 아니면 '저항'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호모 탄툼(Homo tantum)으로서의 바틀비


◇ 호모 탄툼


○ 'Homo'는 '인간', 'tantum'은 '오직'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다. 이를 의역하면 '인간이기만 한 존재', '인간 이외의 다른 규정이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 (어떤 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여성'이라는 젠더가 '남성 아닌 것'이라고 정의된다는 얘기에 많은 감명을 받았었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속성에 '남성적' 성격을 부여하고, 그렇지 않은 속성에 대해 '여성적' 성격을 부여했다는 얘기도 그러했고 말이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있어 '타자'라는 개념은 '무엇이 아닌 것'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모든 규정에서 벗어난 '호모 탄툼'이라는 개념과 '절대적 타자'라는 개념이 비슷하다고 느껴져서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 중에 이 부분에 대해 질문했다. 교수님이 아주 이해가 쏙쏙 되게 설명해주셨는데 한 사람을 나타내는 '규정'이라는 건 한 사람을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제약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 '호모 탄툼'은 어쩌면 무척 자유롭고도 위험한 상태의 존재다. 그리고 호모 탄툼이 내 앞에 나타날 때 바로 '절대적 타자'의 모습으로서 나타난다고 하셨다. 나와 공유하는 규정이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호모 탄툼' 그 자체로의 정의가 있고, 호모 탄툼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타자'가 된다는 것을 잘 구별해서 알 수 있어서 개념에 대해 좀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리고 강의 중에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책에서는 위에 인용한 부분이 나온다. 호모 탄툼이 '복종' 아니면 '저항'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존재라면 사이보그와도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이해한 바로는 호모 탄툼은 어떻게 타자를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더 가까운 개념인 것 같고 사이보그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더 가까운 개념인 듯 싶긴 하다. 하지만 둘 다 이미 내가 살고 있는 이분법적 세계의 너머를 생각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비슷하게 묶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 [필경사 바틀비]와 [폭풍의 언덕]


○ 학교 수업에서 [폭풍의 언덕]을 다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망령에게 종종 자극을 받는 중이다. 그래서 강의 초반에 비틀비는 그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나오지 않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얘기를 듣고 히스클리프가 떠올랐다. 히스클리프가 워더링 하이츠에 오기 전의 생활과 워더링 하이츠를 떠나 있던 3년의 생활에 대한 정보가 아무 것도 없는 지점이 비틀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필경사 바틀비]와 [폭풍의 언덕] 둘 다 서술자와 주인공이 다르다는 점도 둘을 묶어주는 연결고리라고 생각했다.


○ 프레임

→ 나는 관찰자 시점의 소설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도대체 그 주인공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한 건데 관찰자 시점의 소설은 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폭풍의 언덕]과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면서 관찰자 시점의 소설일 경우 주인공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독자가 직접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또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구나 하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에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도 원래 질문이 정해져 있던 것이었나? 싶을 만큼 교수님이 대답을 잘해주셨는데 그 중에 변호사가 바틀비를 서술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변호사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의 서술 방식에 대한 윤리적 비평 또한 존재한다고 하셨다. 특히 마지막에 변호사가 언급한 비틀비의 소문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며, 그가 그 소문을 언급한 것이 바틀비가 원래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쓴 것인지 고민하며 해석해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하셨다.

→ [폭풍의 언덕]은 무려 이중의 프레임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수업 중에 이 이중 프레임을 통해 우리는 '문명'이 보는 왜곡된 '야생성'을 포착할 수 있다고 배웠다. 그래서 [폭풍의 언덕]을 단순한 로맨스만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문명이 야생성에 행하는 폭력, 즉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런 해석에 아주 동의하는 바였고 말이다. 그리고 [필경사 바틀비]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호사로 대변되는 자본주의가 바틀비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 자체가 이 글의 핵심인 것이다. '저항'에 대한 얘기였다면 오히려 분노의 감정을 바틀비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변호사를 통해 바틀비를 바라보면서 '당신이라면 바틀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변호사는 바틀비에 대해 온전히 얘기하고 있는가?', '변호사의 개인적인 호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정답인가?'라는 질문 또한 같이 가져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미규정성

 위에서 얘기했듯 비틀비와 히스클리프 모두 그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다는 점에서 비슷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바틀비는 본인 스스로 규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이고,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위해) 규정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지만 거절당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규정이 없고 이는 그들을 완전한 타자로 존재하게 만든다.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연민을 느끼긴 하지만 바틀비를 끝내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폭풍의 언덕]의 서술자들 또한 히스클리프에게 어느 정도 연민을 느끼긴 하지만 그를 '악',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는 일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어떤 규정도 없었기에 에드거를 택하려고 했다. 그래서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 3년은 히스클리프가 '규정'을 얻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워더링 하이츠로 돌아오고 얼마 있지 않아 캐서린은 어떤 규정도 없던 히스클리프를 그리워한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 '문명이 아닌 것', 타자로서 존재하던 캐서린 그 자체였으나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규정'을 박탈해버린 인물들에게서 '규정'을 빼앗아온다. 그는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된다. 하지만 타자 그 자체였기 때문에 무엇이든 그에게 투영할 수 있었던 과거의 히스클리프도, 이미 에드거와 결혼하였기에 워더링 하이츠가 되어버린 현재의 히스클리프도 가질 수 없던 캐서린은 결국 죽게 되고 그 죽음은 히스클리프를 더욱 미치게 만든다.

 히스클리프가 가지는 감정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그는 바틀비보다는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히스클리프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힘든 비현실적인 악행이었다. 바틀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인물이고 말이다. 그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정말로 현실에 존재하기 힘든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타자'는 이상하기보다는 낯선 존재라는 얘기이기도 한 것 같다.


○ [필경사 바틀비]에서도 결국 변호사가 바틀비를 잊지 못하고 글을 썼으며 [폭풍의 언덕] 또한 2세대의 캐서린과 헤어튼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시도가 좌절로 끝났지만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호모 탄툼으로 변해 가는 바틀비의 모습은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과 같은 저항, 즉 기성의 체제가 허용하고 또 때로는 조장하는 그런 저항이 아닙니다. 호모 탄툼은 기성의 체제가 감당할 수 없는 지점,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체제를 대변하는 인물인 변호사가 감당할 수 없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호모 탄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성의 체제와 그것을 운영하는 사회적·경제적 규범들너머 나아가야 하며, 변호사가 주저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보편적 형제애'


◇ 강의에서 교수님이 마지막으로 정리해준 [필경사 바틀비]가 던지는 물음은 세 가지다. '우리 앞의 바틀비(호모 탄툼)는 누구인가?', '그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그 관계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잡이로 떠올라 잘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선 한번 써보도록 하겠다.


◇ 사실 책을 읽으면서 변호사가 나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말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며 때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어느 정도 포기할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 여기서 나는 기분 좋은 자기만족을 값싸게 살 수 있어. 바틀비와 친구가 되고, 이상한 고집이 있는 그의 비위를 맞춰 주면 나는 거의, 또는 전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서 결국 감미로운 양심 한 조각으로 입증될 것을 내 영혼에 비축해 둘 수 있지."라는 변호사의 서술을 보고 어떤 한계를 느꼈다. 자기 만족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하는 얘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에서 짚고 싶은 건 그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는 지점에서 변호사가 자신을 무결하게 '선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서술을 통해서 내가 새삼 깨달은 부분은 '고용주-피고용인', '세입자-불법 점거자'라는 자본주의적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변호사는 바틀비를 자신과 평등한 존재로 생각할 수 없으며 변호사는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고 바틀비는 도움을 받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틀비는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도움일 수 있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틀비가 생각하는 자신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약자'가 아닌 듯하다.


◇ "호모 탄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성의 체제와 그것을 운영하는 사회적·경제적 규범들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는 글을 보고 타자화된 집단으로서의 '장애인'이 떠올랐다. (장애학에 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고 맨날 공부해야지 해놓고 미루기만 하는 나지만 그래도 글을 적어놓으면 누군가가 보고 그 생각은 틀렸다고 피드백해줄 수도 있으니 한번 적어보겠다. 괄호 속에 이런저런 변명을 써서 글이 길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장애인'이 떠오른 이유는 '장애인' 중에는 정말 생산적 활동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애인'이 아닌 사람 중에서도 정말 생산적 활동이 불가능한 사람이 있겠지만 우선 그들을 포섭하는 단어를 찾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우선 '장애인'에 대해서만 얘기해보겠다.) 장애인들도 생산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인가? 물론 현재 체제 안에서 그 방법조차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런 노력을 하는 장애인, 비장애인 분들에게 정말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함을 보낸다. 하지만 그런 노력만으로 포섭할 수 없는, 위에서 말한 생산적 활동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장애인은? 자본주의 내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규정'에서 배제된 채 정말 인간이기만 한 존재들과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당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능력에 대한 질문이다. '보편적 형제애'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 '보편적 형제애'라는 걸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기성 체제 '너머'에서 생각해야만 할 거라고 생각한다.


○ 극단적으로 아예 생산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도 '장애인'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의 생산성이 낮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철학에서 쓰일 때는 예외가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보편적 형제애'를 가지기 위해서는 '생산성'으로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 국가에서는 장애인을 위해 분배를 통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복지 혜택이 제도적으로 성립되려면 아무에게나 주어선 안 되기 때문에 장애에 대한 명시적인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체제 안에서의 생각만으로는 '보편적 형제애'를 달성할 수 없다.


○ 부끄럽게도 내가 장애학에 관해 읽은 책은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뿐이다.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성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만든 책이었다. 그리고 특히 장애인의 경험과 감정 등이 비장애인과는 다른 새로운 지식이 될 수도 있다고 한 부분이 나를 부끄럽게 했고 좀더 확장된 생각을 가지게 했다. 유전자 기술 등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행복한 미래라는 듯이 말하는 얘기들을 여전히 접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모든 상황을 포섭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장애를 제거할 수 있을까? 그런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장애를 가진 사람의 다르고 다양한 경험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확장시킬 수 있지 않은가? 장애는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인가?


결론


  오늘도 역시 결론은 이런저런 질문만 많아졌다~~입니다. 겨스님이 바틀비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라고 했다고요!! 여튼 체제 바깥에서 하는 생각과 시도가 때로는 무의미하고 좌절될 수도 있겠고 체제가 전복되는 일은 힘들 것이고 만약 체제가 전복된다고 해도 새로운 규정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생각과 시도는 전복을 낳을 수도 있고, 아니면 조금이라도 많은 호모 탄툼들을 포섭할 있는 세계의 확장을 가져올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딴소리지만 나는 강아지풀에 강아지풀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간들의 귀여움을 때로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고민하며 다들 화이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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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 불구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정치학과 상상력
앨리슨 케이퍼 지음, 이명훈 옮김 / 오월의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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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그리고 사회가 행동과 생각으로 (심지어 나를 포함한) 어떤 이들을 배제하고 타자화함으로써 장애를 만들어왔는지, 우리의 미래를 축소시켜왔는지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감각하고 인지했던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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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
앨리스 피니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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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실인증이 있는 남편인 애덤과 함께 어밀리아는 폭설이 내리는 날 외진 곳의 예배당으로 휴가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밖에서 창문 안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침실은 부부가 살고 있는 침실과 똑같이 꾸며져 있다. 어밀리아와 애덤은 서로를 의심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으스스한 상황을 보낸다.

고립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뻔한 내용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과연 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읽다 보니 술술 읽혔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음! 단순한 추리 소설이 아니라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어서 더 재밌었던 것 같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상되는 부부생활의 권태도 잘 느낄 수 있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게 오히려 관계를 망치게 할 때도 있다는 지점도 느꼈다.

그리고 조금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연출적인 지점에서 영화 양들의 침묵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느꼈는지는 다 읽고 나면 다들 알 수 있을 듯ㅎㅎ


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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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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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소결합을 하는 물은 고체인 얼음이 되면 부피가 더 커진다. 관계도 그렇지 않은가? 가까워지려 할수록 어떤 식으로든 더 몸집을 늘리곤 한다.


■얼어붙은 이야기


인생이 길지 않잖아요. 수십억 년 된 행성과 별들이 지내오는 시간에 비하면 백 년쯤은 잠깐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나마 넓디넓은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수십억 명이나 되는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보내는 삶이거든요. 그런데도 굉장히 귀중하다는 생각은 또 있어요.

곽재식, 얼어붙은 이야기


죽기 직전에는 살아온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들 한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지 그 말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이 소설은 죽기 직전 시간이 얼어붙는 이야기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원자화된 개인으로 연속된 시공간 속을 걸어간다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무질서 속에서도 원자들은 결국 서로 들러붙어 무언가를 만들곤 하지 않는가? 원자들이 연결될 때 규칙들은 이미 다 정해져 있지 않은가? 영화 <매트릭스>와 비슷한 결을 가진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인간보다 고차원에 있는 존재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 존재들이 어쩌면 인간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메타적으로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의미를 찾아보는 일. 의미도 모른 채 하루를 살아가는 건 정부와 사회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재밌게 읽었다.


■채빙


그 이름을 다 알지 못하여 열거하기 어려운 신들에게 자신의 안전과 영화를 위탁하는 일이 도대체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이 추구하는 바는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는 이치를 깨달은 자의 몸짓과 표정이, 그에게 깃들어 있다. 신은 없거나, 있더라도 자신들에게 무관심하며 그저 있기만 할 뿐임을 아는 태도가 엿보인다. 그러니 기도 대신 꽃을 건네는 것이다. 꽃도 신만큼이나 아무 까닭도 목적도 없이 피어 있는 것이기에.

구병모, 채빙


구병모 작가님이 참여하셨다고 해서 서평단에 참여 신청을 했다. 사실 읽어본 건 <파과>뿐이지만 <파과>를 너무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는 역시. 사한-현명의 시각으로만 쓴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풍성하다.

한 문명이 파괴되어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가질까? 내가 재밌게 읽거나 본 소설과 영화에서는 대체로 새로운 문명은 또 다시 새로운 '신'을 만들어낸다.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신에게 기대는 것을, 혹은 신을 협박하는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신 대접을 받는 것은 진짜 신인가? 완전한가? 그는 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능력도, 마음도 불완전한 인간에 더 가까운가. 신은 불변하는가? 영원에 가까운 것은 신인가, 사랑인가.

좋은 이야기는 질문을 많이 던져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채빙은 그런 이야기였다. 소재 자체가 매우 특이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그 소재를 다루는 시각이 신선했고 문장이 정말 멋지다고 해야 할까, 그 마음과 그 풍경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기억을 다루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만화 <츠바사>도 떠올랐다. 기억은 단지 정신에만 종속되는 것일까 아니면 체화되는 것일까. 특히 사랑이란 강렬한 기억은 단순히 시간이 지난다고 잊혀지지는 않을 거라는 낭만과 같은 믿음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낭만 같은 믿음 따위는 없는 현대의 차가운 인티제라고 생각해왔으나 채빙을 읽고 나서는 그런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고 차가운 얼음 위의 따뜻한 노랑, 그것이 사랑이라면.


■얼음을 씹다


나는 그것을 차마 뱉지 못하고, 오래도록 입 안에서 굴린다.

남유하, 얼음을 씹다


'식인'이라는 주제에 잠깐 골몰했던 때가 있다. 왜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고기는 '맛있게' 먹으면서 인육을 먹는 행위에는 그렇게 치를 떠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과학적으로 인육을 먹으면 유전병이 생겨서 먹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어느 정도 그 질문을 지워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마주한 주제였다. 인육을 먹는 게 정당화되는 경우는 다른 먹을 게 없는 상태에서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였을 때일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인육을 먹는 행위를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였어도 인육을 먹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체 왜일까?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른 존엄성이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아니면 그저 동족이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인간은 다른 이의 살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며 생존해야 할 만큼 고귀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글 속의 말처럼, 인간이 그리 고귀하지 않아서인가. 고인에 대해 예우를 다하려는 인간의 태도는 도덕적인 일인가, 그저 멍청한 짓일까.

이 소설은 인육을 먹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육을 먹지 않으려는 유리아에게도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그 상황이 됐을 때 나는 유리아처럼 신념을 고수할 수 있을까? 과거의 사람들이 지녔던 도덕적 가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읽으면서 좀 역겨웠고, 그래서 재밌었다.


■귓속의 세입자


"제가 얻는 건 뭔데요?"

반투명체가 잠시 침묵했다.

"시시하고 쓸데없는 아름다움이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확인이 필요하다면 거기서 잠시 관찰해주십시오."

박문영, 귓속의 세입자


귓속의 세입자. 너 인티제냐?ㅋ 우선 해빈의 기본적인 성정과 세입자에게 매우 공감할 수 있었다. 시끄러운 거 싫어. 혼자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들에 대해 열광하며 집착하지 마. 이런 마음? 하지만 결국 나도 요즘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처럼 해빈도 재언을 통해 조금이나마 함께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세입자는 인간이 아니니까, 혼자서 완전하게 살길 바란다.


■차가운 파수꾼


"나오지 말았어야지!"

이제트가 분노와 울음을 애써 붙든 소리로 말했다.

"어떡해. 목소리가 들리는 걸."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걸 모르는 척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나오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나갈 수밖에 없는 거야."

연여름, 차가운 파수꾼


하.. 진짜 너무 좋다... 진짜.. 사랑이... 사랑이 이런 거지.... 진짜 가슴 먹먹해져서 한참을 여운에 젖어 있었다.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벅차오르는 중. 어쩜 그래!!

나는 사랑이란 감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자꾸 멍청한 결정을 내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근데 사랑이어서, 나에게는 최악이지만 상대에게는 최선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면. 그건 너무 너무하잖아! 더 이상 말하면 스포가 될 것 같으므로 더 적지 않겠다 (이 정도도 스포일 것 같아서 걱정). 그냥.. 꼬옥 읽어주면 되.


■운조를 위한


너는 왜 나에게 다정한가.

천선란, 운조를 위한


인용하고 싶은 구절이 많았지만 열심히 절제해서 가장 짧은 구절을 골라보았다. 언어를 뛰어 넘는 다정. 우리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언어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정할 수 있기 때문일까? 우리가 지금 다른 나라 언어를 알고 배울 수 있는 건 결국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다정했기 때문에, 서로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죽음에 관해 쓰려고 하면 결국 삶에 대해 쓰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삶에 있어서야 의미를 가지니까. 결국 죽음이란 남겨진 생들에 관한 이야기니까. 아파할 바에야 죽는 낫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시간이 있다. 이제는 아파하는 자체가 삶임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리고 아픔 속에서 다정함들을 마주하고, 다정함들에 기대서 아픔을 살아가고. 그래도 좀더 원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삶에 가까운 삶을 살아보려고 삶을 내던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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