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레 벡카리아의 범죄와 형벌 - 중판
한인섭 지음 / 박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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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철학

 원래 법학이나 법철학에 관심이 있어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개최하는 독서경시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법철학에 관련한 책을 읽게 되었다. 법철학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법이 보수적이기 때문이었다. 왜 보수적이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더 많았다. 특히 형법은 복지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복지 정책에 관심이 많은 나는 형법에는 관심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형법 또한 인간이 '잘' 살 수 있는 일과 굉장히 연관되어 있고, 내가 좋아하는 공리주의를 얘기한 벤담도 이 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로웠고 법에 대해 무엇이 옳을지 이런저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이 유명한 이유는 사형과 고문 폐지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이전부터 많이 접해보았고 생각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새롭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내게는 새로운 질문이었던, 범죄를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의도'인가 '결과'인가를 중점적으로 얘기해보려고 한다.


의도와 결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범죄의 유일 타당한 척도는 사회에 끼친 해악이다. 범죄의 진정한 척도가 범죄자의 의사에 있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한 개인의 의사는 그의 정신적 기질, 그리고 대상이 그의 감각에 끼친 실제적 인상에 달려 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심지어 한 사람에 있어서도 그 사상, 감정,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 의사를 범죄의 척도로 삼는 방식 하에서는, 개인별로 별개의 법전을 만들어내야 하며, 각 범죄마다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인간은 최선의 의사를 가지고도 사회에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 가장 사악한 의사를 가지고 하는 행위가 사회에 최대의 복지를 가져올 경우도 없지 않다.

 이 책에서 체사레 벡카리아는 범죄의 기준을 의도가 아닌 결과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도덕적 주의주의자이기 때문에 범죄의 기준에도 당연하게 의도가 포함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 한국의 법 집행에서도 그 의도를 감안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벡카리아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이가 행위를 하여 얻은 이득보다 더 큰 정도의 손해를 형벌로써 주는 것만이 사회 공공의 이익에 적합하다고 한다. 그리고 행위자의 의도는 시시각각 변하고 인간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타인의 의도는 파악될 수 없다. 따라서 측정할 수 없는 행위자의 의도보다는 그가 만들어낸 측정 가능한 결과를 기준으로 범죄를 판단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는 범죄의 기준에 의도를 포함시켜야 하는가, 라는 질문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무척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형벌의 목적, 인간의 능력에 대해 생각했을 때 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다. 결과를 기준으로 범죄를 판단하고 형벌을 내리는 것이 좀더 객관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특히 나는 '밥을 안 준다고 아내를 죽인 남편'보다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남편을 죽인 아내'가 계획적이었다는 이유로 더 많은 형을 받는 게 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보다는 결과를 더 중시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었다.


행위

유능한 마법사가 나에게 꼭두각시 마법을 걸어 내 손발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한 뒤에 나로 하여금 맞은편 사람의 뺨을 때리도록 만든다고 해 보자. 맞은 사람은 당장 나에게 화를 내고 어쩌면 나를 고소하려 들겠지만, 이 사태의 전모가 규명된다면 마법사의 못된 마법에 걸리는 일을 피하지 못했다는 불운한 사실 이외에 나에게 귀속될 비난이나 법적 책임은 없을 것이다.

고인석, 「인공물이 행위주체가 될 수 있을 조건」, 과학철학 23권 1호 (2020) pp. 1-34

 하지만 벡카리아의 주장에 동의하던 중, 전기가오리를 통해 「인공물이 행위주체가 될 수 있을 조건」이라는 논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행위'를 규정하고 그 '행위'를 '행위자(agent)'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는 의도이다. 그리고 행위자에게 행위가 귀속됐을 때만 행위자에게 그 책임, 다시 말해 형벌을 부과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것처럼 내가 의도하지 않게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그 책임은 내가 아니라 그 범죄를 저지를 의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져야 한다.

 이 부분을 접하게 되고 나서는 왜 한국의 법이 결과뿐만 아니라 의도 또한 범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결과만으로 범죄를 판단하고 형벌이 결정된다면 진짜 '실수'로 범죄를 저지른 행위자는 크게 억울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

형벌은 비록 온건하더라도 확실하기만 하면 형면제의 희망이라는 요행수와 결부된 무시무시한 처벌의 공포감보다 훨씬 더 큰 인상을 심어줄 것이 틀림없다.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확실히는 알지 못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벡카리아의 시대에는 종교의 힘이 강해서 불경의 '의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형벌에 처해졌던 경우도 있었던 같다. 그러한 형벌을 없애기 위해 벡카리아는 의도보다는 결과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했던 같다. 결국 그가 원했던 것은 의도냐 결과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을 만들 있는가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법은 사회 구성원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규칙인 만큼 그것을 제정하는 있어 깊고 많은 고민이 필요할 하다. 나도 책을 통해 관심이 생겼으니 지금보다 더욱 입법과 사법이 어떻게 행해지는지 살펴볼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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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가짜 진짜 노동 (총2권)
데니스 뇌르마르크 / 자음과모음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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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

다른 학파(마르크스와 프랑크푸르트학파 등)는 정상성 자체가 소외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경우 정상성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으로 인간다워질 수 있다. 즉, 정상적인 것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의미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의 나는 꽤 중증의 정동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도 나의 우울과 기복에 대해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정신과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이 나타나는 원인을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퇴를 결심하고 어른들을 설득할 때, 선생님들의 권유에 의해 학교 상담센터에도 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그게 꽤 기분이 나빴었다. 내가 자퇴를 결심한 건 단순히 학교를 다니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목적을 잃은 공교육의 '시스템'이 싫어서였기 때문이다. '시스템' 밖의 목적을 향해 갈 수 있는 '시스템' 안의 길을 알려주었다면 아마 나는 자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스템을 견딜 수 없는 사람에게 그저 시스템 안에서 견디라고만 하는 어른들을 당시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내 뜻대로 자퇴를 했다. 당시에 선생님께서 나에게 던졌던 질문과 나의 대답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학교를 졸업하고 노력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너의 뜻대로 시스템을 바꾸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이상한 시스템 안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지 않느냐고 답했었다.

 지금은 고등학생 때만큼 시스템에 반항하기 위해서 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상담을 받고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현실이라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려고 노력 중이다. 고등학생 때 그토록 시스템에 불만을 가졌던 원인 중에는 병리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도 나에게 더 나은 삶이란 '정상성'에 가까워지는 삶은 아니다. 진부한 얘기지만 여전히 세상이 비뚤어져 이 세상 안의 '정상성' 또한 비뚤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짜 노동]에서는 그 비뚤어진 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원인으로 '가짜 노동'을 지목한다.


노동 시간

옛 시절에 노동자들은 직조 기계 앞에서 가동 시간 내내 차곡차곡 옷감을 생산했다. 그때는 노동자가 37시간 대신 40시간을 일하면 더 많은 가치가 생산됐다. 하지만 지금은 현대의 사무직 노동자가 더 많은 시간을 일한다고 해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 째는 실질적인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사무직과 관리직이 너무 많이 생겼다는 것, 두 번째는 현대 사회에서 노동 시간과 생산량은 비례하지 않는데 노동 시간이 임금의 기준인 게 비합리적이라는 것, 세 번째는 앞의 두 가지에 대한 해결책이다.

 학생 시절의 나는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헛된 느낌이었다. 공부를 해서 자기를 계발하고 지식을 함양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기업에 취업하는 게 목적이라니? 그렇다면 취업을 하고 난 다음에는? 그래서 학생 때는 세상이 잘못되는 원인은 교육 시스템이라고 생각했고 교육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 여러 알바를 하고 주변인들이 직장인이 되면서 느낀 건 결국 교육 시스템이 망가진 건 노동 시스템이 망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노동 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생겼고 나름대로 생각이란 것도 해보았다. 하지만 아는 게 없기 때문에 그저 '정규직을 늘려야 한다' 같은 대체로 노조와 진보 진영에서 요구하는 주장들만 받아들이게 됐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정규직을 늘린다고 해서 사람들의 삶의 질이 비례해서 증가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스템의 변화는 사람들이 노동을 '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발전한 기술이 가져온 시간 감축은 생각지 않고 그저 직원들이 쉬는 게 꼴보기 싫어서, 일을 안 하면 불안해서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임금을 계산한다면 모두가 가치 있는 일자리를 가지기는 힘들다.

스트레스는 감옥 내 수감자와 교통 정체에 갇힌 운전자처럼 할 일이 아주 적은 상태의 사람들에게도 덮친다. 사실 일시적으로 바쁜 기간에 스트레스가 발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 편이다. 스트레스의 축적은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과 더 관련 있다.


사무직과 관리직

자문가로 수년을 보낸 스티브 매케빗은 많은 회사에서 고위 경영자들의 행동을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 그는 같은 패턴이 나타나는 데 주목했다. 그 패턴은 할 일이 그다지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이 회의와 출장이 포함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내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직장인이 공감할 만한 얘기가 나온다. "왜 어떤 사람들은 오랜 기간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고도 조직 내에서 수년씩 보낼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다. 현대 사회는 "표피적인 것이 내용물보다 더 중요해졌고 그건 잘 교육받은 말주변 좋은 인간이 조직 내 자신의 유용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실제로는 유용성이 제로면서도 말이다." 노동 시간을 채워 자신이 쓸모 있음을 보이기 위해 허위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너무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관리직들, 허위 프로젝트를 위해 채워지는 '가짜 노동'을 하는 사무직들, 사람이 늘어나면 그들을 관리하기 위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또 늘어나는 관리직들, 그리고 그 관리직들에 의해 또 '가짜 노동'을 부여 받아 일을 하게 되어 쉴 수 있는 시간이 적어지는 또 다른 사무직들. 늘어나는 사무직과 늘어나는 노동 시간은 서로의 굴레에 빠진 채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왜 그냥 할 일이나 잘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해결할 수 있는가

그러니 여러분도 온갖 어리석은 규칙과 문서 요구에 큰 소리로 의문을 제기하거나, 가치가 있는 일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전에 다른 방법은 없는지 궁리해봐야 한다.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다면 말이다.

 저자들은 개인이 '가짜 노동'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일찍 퇴근하고, 누군가가 제시한 해결책에 대해 부정의 답변을 내놓을 것을 제안한다(새로운 해결책은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키므로). 하지만 위 인용에서 저자들 스스로가 언급한 것처럼 개인이 그런 행동을 취하기란 쉽지 않다.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주4일제를 위한 서명에 참여하는 등 시스템 자체가 바뀔 수 있는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더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들이 제시한 개인이 실행할 수 있는 해결책 중 하나는 공감할 수 있어서 밑으로 인용하겠다.

우리는 또한 잘 작동하는 것들에 별거 아닌 혹은 최소한의 개선을 더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부서지지 않았다면 고치지 말자. 절대 망가지지 않는다는, 기대를 넘어선다는, 세계 최고의 상품을 공급한다는 회사의 과시적 헛소리를 무시하자. 완벽을 향한 이런 끊임없는 분투는 재정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최대 비용으로 최소 개선을 가져온다.

 스스로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노력하는 걸 멈추자. 해야 할 일만 끝내버리자.

 관리직이 꼭 되뇌었으면 하는 조언에 대해서도 밑으로 인용하겠다. (하지만 이것을 읽는 관리직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만일 결과가 형편없다면 최고 수준의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으로도 문제를 고치거나 수습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하가 해야 할 일을 알고 능력도 있다면 스스로 잘할 거라고 가정하자. 경솔한 허위 프로젝트, 회의, 통제 수단은 그만두자.

 직원을 믿자. 제발 좀~~~!!!

 그리고 사회적인 해결책으로는 근무자를 단기적으로 뽑을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할 것이므로 나라에서 기본 수당을 지급하는 것까지를 그들은 해결책으로 제안한다. 이 해결책은 나에게 굉장히 새로웠던 것 같다. 단순히 국민의 복지를 위해 기본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게 만들기 위해 기본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세상이 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여가생활을 누리면서 일로도 자아실현을 하기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구인 절차부터 퇴직금 지급 등 단순히 '기본 수당 지급'을 한다는 변화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더 많은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된 건 분명하다.


다시, 더 나은 삶

노동은 처리 활동이다. 사물을 만들고 처리하는 행위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이며, 한 인간이 세상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이 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환경을 처리하고 자신을 외면화, 즉 체현하는 건 노동을 통해서라고 헤겔과 마르크스는 말했다.

 세상이 쉽게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최종 목표는 소규모 기업을 창업하는 것으로 정하게 됐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임금을 지급한다면 삶의 질이 그만큼 낮아질 것이고, 창업하려는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시스템을 변경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될 것이므로 소규모일 때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활동들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행동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우선은 주4일제 먼저...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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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대여 페이백] 러브 크래프트 전집 1
H. P. 러브크래프트 / 황금가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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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이 아니었던 러브 크래프트


 알라딘에서 황금가지 전자책 페이백을 하길래 매번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러브 크래프트 전집을 대여했다. 워낙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보던 이름이라 나의 SF/미스터리/공포 컨텐츠 소비 생활을 위해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기대했던 탓일까. 생각보다 취향이 아니었다.. 러브 크래프트에게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이 많고, 나는 영향을 받은 예술가들의 작품들을 봐왔었기 때문일까 새로운 느낌도 아니었다. 나는 텍스트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묘사를 자세하게 해주지 않으면 이미지로 상상하는 힘든 편이다. 하지만 러브 크래프트의 작품은 묘사를 한다기 보다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없는 모습이나 소리  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작품들이 많아 읽기가 쉽지 않았다. 상상력이 떨어지는 나는 그냥 다음 내용으로 쓱쓱 넘어가게 됐음. 물론 작품들이 가진 음울한 분위기 자체는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낼 있다는 것이 작가의 능력일 것이고. 하지만 이야기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는 아니라 어떤 소재나 분위기를 제시하는 그치는 작품들이 많아 완결성 있는 작품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발터 뫼어스와 러브 크래프트 ( 작가의 작품에 대한 스포 있음)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이 있다. 「에리히 잔의 선율 (The Music of Erich Zann)」, 「더니치 호러 (The Dunwich Horror), 「인스머스의 그림자 (The Shadow Over Innsmouth)」다. 「더니치 호러」는 어느 정도 완결성을 갖춘 이야기로 느껴져 재밌게 읽었고, 「에리히 잔의 선율」과 「인스머스의 그림자」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독일 작가인 발터 뫼어스의 작품들이 떠올라 더욱 재밌게 읽었다.


◇ 발터 뫼어스와 러브 크래프트


○ 발터 뫼어스의 『잃어버린 은띠를 찾아서』에는 네벨하임이라는 도시가 나온다. 네벨하임의 안개는 어느 정도 의식을 가진 생명체인 하며 곳의 거주민은 지하 세계와 모종의 계약을 맺고 네벨하임에 들어온 외지인들을 지하세계에 제공한다. 「인스머스의 그림자」를 읽으면서 네벨하임이 떠오른 이유다. 인스머스의 거주민들도 바다에 사는 생명체와 계약을 맺고 젊은 사람들을 제공하며 그에 따른 이득을 취한다.


○ 발터 뫼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도 네벨하임의 주민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부흐하임에서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연다. 음악은 생명체를 일종의 최면상태로 몰고 가고 최면상태에 빠진 주인공 미텐메츠는 필요도 없는 책들을 마구 사댄다. 또한 스마이크(『잃어버린 은띠를 찾아서』의 폴초탄 스마이크 아님) 계략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에리히 잔의 선율」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다. 음악을 듣는 사람이 최면 상태에 빠진다기 보다는 없는 생명체가 음악을 연주한다는 맞겠지만 음악과 오컬트적 도취가 연결된다는 지점에서 「에리히 잔의 선율」을 읽으면서 『꿈꾸는 책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러브 크래프트 작가 본인도 「우주에서 색채」 다음으로 가장 작품이 「에리히 잔의 선율」이라고 했다고 만큼 작품 자체로도 기이한 분위기가 느껴져 재밌게 읽었다.


○ '네크로노미콘(Necronomicon)' 「더니치 호러」 러브 크래프트의 작품에 꾸준히 나오는 가상의 책이다. 발터 뫼어스의 차모니아 세계관 안에는 이와 같은 가상의 책은 없지만 꾸준히 나오는 캐릭터는 있다. 아이데트 족으로 뇌가 일곱 개인 나흐티갈러 박사다. 여기저기 홀연히 등장하여 신비로운 말과 행동을 하는 캐릭터다. 이처럼 세계관을 관통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러브 크래프트를 읽으면서 발터 뫼어스가 떠올랐다. 발터 뫼어스는 아예 차모니아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고, 러브 크래프트는 작품 자체가 연결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지점이 많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 발터 뫼어스가 러브 크래프트에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그의 작품만 좋아하지 작가 본인에 대해 알아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브 크래프트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만큼 러브 크래프트의 작품을 읽으면서 다른 작품이 떠오르는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에 나오는 Ancient One 러브 크래프트에서 따온 것일까? 뭔가 차원을 이동하는 문을 지키는 느낌이라는 지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책에 대한 후기를 쓰고 있다가 그냥 써보자 해서 썼는데 생각보다는 길게 썼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이기도 하고 취향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다른 작품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에 다른 작품도 천천히 읽어볼 예정이다. 인종차별적인 내용도 많고, 여성 캐릭터도 거의 없다는 점에서 현대에 러브 크래프트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을 주의하면서 러브 크래프트 자체에 몰입해서 읽기보다는 교양을 쌓고 배움을 얻는다는 느낌으로 좀더 작품을 접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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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홍성욱 : '이기적 유전자'라는 밈의 힘 (7월 31일 오후 7시) 알라딘 아카데미 14
홍성욱 강의 / 서울리뷰오브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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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안정감


 초등학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내가 종교를 기피하게 대단한 진실이나 지식을 위해서만은 아니다. 어쩌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것도 비슷한 이유로, 삶의 안정감을 위해 지금의 믿음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창조주가 있다는 믿음, 특히 창조주가 인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믿음을 받아들이며 나는 특별하게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분명히 창조주가 나를 만든 이유가 있을 거고, 삶에는 의미가 있을 텐데 내가 멍청해서 그것들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있다고 믿는 무언가를 찾지 못하니 불안했고 불안은 우울증을 심화시켰고 말이다. 정병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고방식을 바꾸기로 다짐했고, 그런 노력 끝에 어느 순간 인간은 그저 '발생'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의미 없이,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함 없이 그저 우연적으로 인간이 발생했고, 나도 어쩌다 다양한 유전자가 우연히 만나 발생하게 거라고. 물론 생각만으로 우울증이 치료된 아니지만 그래도 추상적인 목표에 집착하지 않고 좀더 실존에 관심을 갖게 되어 마음이 이전보다는 안정됐다고 느낀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던 차에 만난 『이기적 유전자』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아간 느낌이었다. 인간은 그저 유전자의 복제를 위한 생존 기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맞는 말임?


당신은 매우 복잡한 존재지만, 만약 로봇이 아니라면 당신 자신이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나의 생각


○ 아주 부끄럽게도 나는 과학 서적을 읽을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을 저자가 제시한 근거에 기반하여 생각하는 능력은 갖추고 있지 못하다. 과학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제시된 근거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명을 해보자면 어차피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강화할 있는 근거만 가지고 나올 아니에요~~ 물론 과학자라면 응당 자신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근거가 나오면 주장을 철회할 있는 사람이어야겠다만, 어쨌든 내가 권만으로 과학자의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 판단하기에는 쉽지 않다. 무척 동경하지만 어려운 과학이라는 세계~~


○ 위와 같은 이유로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때는 도킨스가 제시하는 근거에서 출발하여 그의 주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중점적으로 좇지는 못했다. 그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옳은지 아닌지의 판단도 보류하였고. 우선은 그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많은 힘을 쏟았고 이후에는 주장과 내용이 나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만을 생각할 있었다. 아주 좋은 독서 습관으로, 그가 주장하는 바가 나의 믿음 체계에 부합한다면 그가 제시하는 근거들을 차용하여 써먹고 부합하지 않는다면 믿음 체계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지 살펴보고 선택하는 식으로 독서를 하는 같다. 우선 도킨스가 주장하는 인간은 그저 유전자가 많은 자기 복제를 하기 위하여 만든 외피, 로봇, 생존 기계라는 이야기는 믿음 체계 안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물론 도킨스의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고 느껴져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확실해졌을 충격 받지 않고 세상에 대한 지식을 수정할 있을 정도로는 받아들일 있었다.


○ 물론 주장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의 관점은 신선했다. '종의 기원'이라는 책의 제목 때문인지 『이기적 유전자』를 읽기 전까지 나는 당연히 진화의 단위는 ''이라고 생각했다. 종의 보전을 위해 새끼도 낳는 거고 이타적인 행동도 하는 거고 말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진화의 단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새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유전자가 진화의 단위라고 했을 설명할 있는 사례도 흥미로웠다. 완벽하게 역할을 나누어 역할만을 수행하는 특정한 개미 종들이 신기했는데 그런 집단이 형성된 이유를 유전자를 진화의 단위로 놓고 보면 포괄적 근연도를 통해 설명할 있다는 점이 정말 재밌었다.


○ 하지만 재밌다고 해서 내가 그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없었고 그래서 알라딘 아카데미를 신청해서 나보다 넓은 시야를 가진 분의 설명을 들어보고자 했다.


◇ 알라딘 아카데미


○ 알라딘 아카데미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밈의 >이라는 제목으로 홍성욱 교수님이 진행해주셨다. 도킨스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 대한 다양한 배경지식, 책의 내용에 대한 설명, 책에 대한 여러 반응 다양하고 재밌는 사실들을 전해주셨다. 리뷰에서는 내가 재밌게 들은 부분에 대해서만 관점으로 설명하겠다.


○ 유전자 결정론

→ 강의가 끝난 어떤 분께서 책에 나온 도킨스의 견해는 '유전자 결정론' 지지한다고 수는 없지 않느냐, '유전자 결정론' 대한 비판을 통해 책을 비판할 수는 없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해주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기 때문에 흥미로운 질문이었다.

→ 출간된 이후 출간될 썼던 내용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고 하나 도킨스가 보주에서 구구절절 책에 대한 비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방어하는 보았다. 이전에 책에 대해 알지 못했어서 책에 대해 비판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는데 저자가 직접 열심히 방어하는 보면서 , 정말 많은 비판이 있었구나 있을 정도였다ㅋㅋ 여튼 방어의 내용을 보면서 도킨스는 '유전자 결정론' 지지한다기 보다는 진화의 단위가 유전자이며, 인간은 유전자가 프로그래밍한 로봇이다, 정도의 주장을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의 인공 지능처럼 유전자가 인간을 프로그래밍 해놓으면 창조자도 없는 방식으로 입력된 데이터를 가공하여 결과를 내놓는 그런 로봇이 인간임이라고 주장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 대해서도 얘기한 보면 문화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했고.

→ 하지만 교수님께서는 안에 유전자 결정론을 지지하는 듯한 문장이 많다고 대답해주셨다. 특히 "만약 당신이 나처럼 개개인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관대하게 이타적으로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경고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쳐 보자."라는 부분은 도킨스의 논의에서는 도출할 없는 결론이라고 짚어주셨다. 유전자가 이기적이라고 해서 표현형인 인간까지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부분에 대해서는 도킨스가 추가된 서문에서 '틀렸다' 하진 않지만 '오해였다' 오류를 인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와 같은 부분에서 도킨스가 유전자 결정론을 지지하는 모습을 있다.


○ 다양한 비판

→ 위에서 얘기했듯 책에 대한 비판이 많다는 책의 서문이나 보주를 통해 있었다. 하지만 비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몰랐는데 알라딘 아카데미를 통해 비판의 내용을 간단히 접할 있었다.

→ 단속평형 (스티븐 J. 굴드)

     — 유전자 중심적 관점에서는 진화가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변화일 것이라고 암시된다. 하지만 실제 사례를 보면 진화에서 종은 오랜 기간 변화하지 않다가 짧고 급격하게 진화적 변화의 시기를 경험한다고 한다.

→ Triple Helix (리처드 르원틴)

     — 진화에서는 유전자, 개체, 환경이 모두 중요하다고 한다.

     — 교수님이 알려주신 유전자가 진화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례가 엄청 흥미로웠다. 똑같은 유전자가 다른 환경에서 하나는 메뚜기로, 하나는 귀뚜라미로 표현됐다고 한다!

→ 이런 사례에서 있듯이 『이기적 유전자』를 비판할 있는 다양한 근거가 존재한다. 현재는 진화가 유전자, 그룹, 종의 모든 레벨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한다.


○ 홍성욱 교수님은 어떤 분의 질문에 대해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을 믿을 필요는 없으며,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한다고 답해주셨다. 이 책을 통해서 유전자도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점만 알 수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다른 과학 책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변화하는 패러다임 속에서 책은 아주 작은 지점 안에서 얘기한다는 기억하면서 읽는 좋다고 해주셨다.


오늘도 생존 기계는 열심히 사랑하네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가령살아 있다라는 말이 사전에 있다고 해도 말이 반드시 현실 세계에서 무엇인가 명확한 것을 지칭한다고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고충이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책이 여전히 많이 읽히는 이유는 인간은 특별하다는 믿음에 충격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 특별하든 특별하지 않든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가 지금 느끼는 감각, 감정이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 해도 무엇이 변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고 살아갈 것이다.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유전자가 이기적이라고 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모두 용납할 있는 것도 아니다. 생명의 기원, 세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그를 위해 인간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진실//진리(truth) 지금 살아있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가치들을 단번에 훼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유대감,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소중하는 것들을 대하는 나의 마음. 훼손될 없는 가치에 집중하고 살아간다면 자신도, 주변 사람도 더욱 행복해질 있지 않을까 싶다. 실재가 나의 삶을 응원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나의 삶을 응원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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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카데미] <필경사 바틀비> + 성기현 강연 (바틀비 효과_7월 1일 오후 7시)
허먼 멜빌 지음, 정해영 옮김, 성기현 해설, 성기현 강의 / 그린비 / 2024년 7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와 바틀비


 상담 선생님께서 최근에 읽은 육아 관련 책에서 요즘 사람들이 대체로 다른 하고 싶은 것이나 대안 없이 하기 싫어하기만 한다는 내용을 읽었다고 하셨다. "그게 바로 저예요!" 하며 공감했는데요. 나는 인생에 크게 하고 싶은 것 없이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가지는 것 정도가 목표인 사람이기 때문에 늘 바틀비를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틀비란 인물에 매우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미루고 미루며 읽지 않았고요. 그러다 이번에 알라딘 아카데미에서 비틀비 관련한 강의를 한다고 해서 책도 구매하고 강의도 들으러 다녀왔다. 강의는 그린비 출판사의 [필경사 바틀비]에 해설을 써주신 성기현 교수님이 진행해주셨다. 내용은 들뢰즈가 제시한 내용을 바탕으로 ▲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와 그 효과 ▲ 호모 탄툼(Homo tantum)으로서의 바틀비 ▲ 19세기 미국 문학과 '보편적 형제애'에 대해 다루었다. 이 글에서는 강의의 내용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내용 위주로 정리하며 내가 이해한 바를 기반으로 다른 감상도 추가해보고자 한다.


*인용구의 굵은 체는 책을 그대로 따랐으며, 배경색은 내가 넣은 것이다.


"저는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겠다는 말인가?"

"안 하는 쪽을 택한다는 말입니다."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는 정형어구


특징


○ 미규정성

→ 바틀비는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대체로 대상어(목적어) 없이 이야기한다. 거부의 대상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현재 변호사가 지시한 업무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결정들을 포함한 모든 대상이 된다.


○ 선호의 논리

→ 변호사는 고용주이며 정당한 세입자인 자신의 명령에 바틀비가 당연히 복종할 것이라 가정하며 그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사무실을 떠나달라고 간청/회유/호소한다. 하지만 바틀비는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자신의 선호를 표현하고 변호사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

→ 변호사가 하는 가정은 자본주의의 가정 그 자체다.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하는 업무지시는 비상식적이지 않은 이상 당연히 따를 것이라 생각하며 정당한 권리를 가진 세입자가 다른 사람이 그 장소에 함부로 들어온다면 나가라고 했을 때 당연히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틀비가 '안 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변호사의 지시를 거부했을 때 변호사는 당황하게 되고 나 또한 충격을 받았다. 이는 단순히 바틀비가 지시를 거부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만약 바틀비가 '안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면 그저 '통쾌하다' 정도의 감정만 생겼을 것이다. 나(그리고 아마도 변호사)를 당황하게 한 것은 피고용인에게도 '선호'가 있으며 그 '선호'가 위에서 '가정'이라고 표현한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규칙과 규정을 무시하며 겉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피고용인의 '선호' 따위만으로 고용인의 업무 지시를 거부하다니? 정말 당황스러운 일이다. 피고용인으로서만 살아왔던 나에게는 바틀비의 정형어구가 '그래 맞아, 피고용인인 나에게도 선호라는 게 있다고!'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주었으며 그래서 그 선호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게 했다.


호모 탄툼은 사회가 허락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가진 존재, 그런 이유 때문에 사회에서 배제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들뢰즈는 이런 호모 탄툼이 역설적으로 어떤 정치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호모 탄툼은 사회를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이분법,  '복종' 아니면 '저항'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호모 탄툼(Homo tantum)으로서의 바틀비


◇ 호모 탄툼


○ 'Homo'는 '인간', 'tantum'은 '오직'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다. 이를 의역하면 '인간이기만 한 존재', '인간 이외의 다른 규정이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 (어떤 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여성'이라는 젠더가 '남성 아닌 것'이라고 정의된다는 얘기에 많은 감명을 받았었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속성에 '남성적' 성격을 부여하고, 그렇지 않은 속성에 대해 '여성적' 성격을 부여했다는 얘기도 그러했고 말이다. 그렇다 보니 나에게 있어 '타자'라는 개념은 '무엇이 아닌 것'과 비슷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모든 규정에서 벗어난 '호모 탄툼'이라는 개념과 '절대적 타자'라는 개념이 비슷하다고 느껴져서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 중에 이 부분에 대해 질문했다. 교수님이 아주 이해가 쏙쏙 되게 설명해주셨는데 한 사람을 나타내는 '규정'이라는 건 한 사람을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제약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 '호모 탄툼'은 어쩌면 무척 자유롭고도 위험한 상태의 존재다. 그리고 호모 탄툼이 내 앞에 나타날 때 바로 '절대적 타자'의 모습으로서 나타난다고 하셨다. 나와 공유하는 규정이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호모 탄툼' 그 자체로의 정의가 있고, 호모 탄툼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이 '타자'가 된다는 것을 잘 구별해서 알 수 있어서 개념에 대해 좀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 그리고 강의 중에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책에서는 위에 인용한 부분이 나온다. 호모 탄툼이 '복종' 아니면 '저항'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존재라면 사이보그와도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이해한 바로는 호모 탄툼은 어떻게 타자를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더 가까운 개념인 것 같고 사이보그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더 가까운 개념인 듯 싶긴 하다. 하지만 둘 다 이미 내가 살고 있는 이분법적 세계의 너머를 생각해야 한다는 지점에서 비슷하게 묶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 [필경사 바틀비]와 [폭풍의 언덕]


○ 학교 수업에서 [폭풍의 언덕]을 다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망령에게 종종 자극을 받는 중이다. 그래서 강의 초반에 비틀비는 그에 대해 아무런 정보가 나오지 않는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얘기를 듣고 히스클리프가 떠올랐다. 히스클리프가 워더링 하이츠에 오기 전의 생활과 워더링 하이츠를 떠나 있던 3년의 생활에 대한 정보가 아무 것도 없는 지점이 비틀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필경사 바틀비]와 [폭풍의 언덕] 둘 다 서술자와 주인공이 다르다는 점도 둘을 묶어주는 연결고리라고 생각했다.


○ 프레임

→ 나는 관찰자 시점의 소설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도대체 그 주인공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궁금한 건데 관찰자 시점의 소설은 그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폭풍의 언덕]과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면서 관찰자 시점의 소설일 경우 주인공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독자가 직접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또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구나 하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에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도 원래 질문이 정해져 있던 것이었나? 싶을 만큼 교수님이 대답을 잘해주셨는데 그 중에 변호사가 바틀비를 서술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변호사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의 서술 방식에 대한 윤리적 비평 또한 존재한다고 하셨다. 특히 마지막에 변호사가 언급한 비틀비의 소문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며, 그가 그 소문을 언급한 것이 바틀비가 원래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쓴 것인지 고민하며 해석해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하셨다.

→ [폭풍의 언덕]은 무려 이중의 프레임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수업 중에 이 이중 프레임을 통해 우리는 '문명'이 보는 왜곡된 '야생성'을 포착할 수 있다고 배웠다. 그래서 [폭풍의 언덕]을 단순한 로맨스만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문명이 야생성에 행하는 폭력, 즉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런 해석에 아주 동의하는 바였고 말이다. 그리고 [필경사 바틀비]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호사로 대변되는 자본주의가 바틀비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 자체가 이 글의 핵심인 것이다. '저항'에 대한 얘기였다면 오히려 분노의 감정을 바틀비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변호사를 통해 바틀비를 바라보면서 '당신이라면 바틀비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변호사는 바틀비에 대해 온전히 얘기하고 있는가?', '변호사의 개인적인 호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정답인가?'라는 질문 또한 같이 가져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미규정성

 위에서 얘기했듯 비틀비와 히스클리프 모두 그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다는 점에서 비슷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바틀비는 본인 스스로 규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이고,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위해) 규정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지만 거절당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규정이 없고 이는 그들을 완전한 타자로 존재하게 만든다.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연민을 느끼긴 하지만 바틀비를 끝내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폭풍의 언덕]의 서술자들 또한 히스클리프에게 어느 정도 연민을 느끼긴 하지만 그를 '악',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는 일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어떤 규정도 없었기에 에드거를 택하려고 했다. 그래서 워더링 하이츠를 떠난 3년은 히스클리프가 '규정'을 얻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워더링 하이츠로 돌아오고 얼마 있지 않아 캐서린은 어떤 규정도 없던 히스클리프를 그리워한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 '문명이 아닌 것', 타자로서 존재하던 캐서린 그 자체였으나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규정'을 박탈해버린 인물들에게서 '규정'을 빼앗아온다. 그는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된다. 하지만 타자 그 자체였기 때문에 무엇이든 그에게 투영할 수 있었던 과거의 히스클리프도, 이미 에드거와 결혼하였기에 워더링 하이츠가 되어버린 현재의 히스클리프도 가질 수 없던 캐서린은 결국 죽게 되고 그 죽음은 히스클리프를 더욱 미치게 만든다.

 히스클리프가 가지는 감정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것으로 그는 바틀비보다는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히스클리프의 행동은 받아들이기 힘든 비현실적인 악행이었다. 바틀비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인물이고 말이다. 그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정말로 현실에 존재하기 힘든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타자'는 이상하기보다는 낯선 존재라는 얘기이기도 한 것 같다.


○ [필경사 바틀비]에서도 결국 변호사가 바틀비를 잊지 못하고 글을 썼으며 [폭풍의 언덕] 또한 2세대의 캐서린과 헤어튼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시도가 좌절로 끝났지만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호모 탄툼으로 변해 가는 바틀비의 모습은 꼬리칸 사람들의 반란과 같은 저항, 즉 기성의 체제가 허용하고 또 때로는 조장하는 그런 저항이 아닙니다. 호모 탄툼은 기성의 체제가 감당할 수 없는 지점,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체제를 대변하는 인물인 변호사가 감당할 수 없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호모 탄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성의 체제와 그것을 운영하는 사회적·경제적 규범들너머 나아가야 하며, 변호사가 주저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보편적 형제애'


◇ 강의에서 교수님이 마지막으로 정리해준 [필경사 바틀비]가 던지는 물음은 세 가지다. '우리 앞의 바틀비(호모 탄툼)는 누구인가?', '그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그 관계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잡이로 떠올라 잘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선 한번 써보도록 하겠다.


◇ 사실 책을 읽으면서 변호사가 나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정말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며 때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어느 정도 포기할 줄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 여기서 나는 기분 좋은 자기만족을 값싸게 살 수 있어. 바틀비와 친구가 되고, 이상한 고집이 있는 그의 비위를 맞춰 주면 나는 거의, 또는 전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서 결국 감미로운 양심 한 조각으로 입증될 것을 내 영혼에 비축해 둘 수 있지."라는 변호사의 서술을 보고 어떤 한계를 느꼈다. 자기 만족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하는 얘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에서 짚고 싶은 건 그 부분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는 지점에서 변호사가 자신을 무결하게 '선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서술을 통해서 내가 새삼 깨달은 부분은 '고용주-피고용인', '세입자-불법 점거자'라는 자본주의적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변호사는 바틀비를 자신과 평등한 존재로 생각할 수 없으며 변호사는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고 바틀비는 도움을 받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바틀비는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도움일 수 있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인이 그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틀비가 생각하는 자신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약자'가 아닌 듯하다.


◇ "호모 탄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기성의 체제와 그것을 운영하는 사회적·경제적 규범들 ‘너머’로 나아가야" 한다는 글을 보고 타자화된 집단으로서의 '장애인'이 떠올랐다. (장애학에 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고 맨날 공부해야지 해놓고 미루기만 하는 나지만 그래도 글을 적어놓으면 누군가가 보고 그 생각은 틀렸다고 피드백해줄 수도 있으니 한번 적어보겠다. 괄호 속에 이런저런 변명을 써서 글이 길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장애인'이 떠오른 이유는 '장애인' 중에는 정말 생산적 활동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애인'이 아닌 사람 중에서도 정말 생산적 활동이 불가능한 사람이 있겠지만 우선 그들을 포섭하는 단어를 찾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우선 '장애인'에 대해서만 얘기해보겠다.) 장애인들도 생산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선인가? 물론 현재 체제 안에서 그 방법조차 쉽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런 노력을 하는 장애인, 비장애인 분들에게 정말 진심 어린 존경과 감사함을 보낸다. 하지만 그런 노력만으로 포섭할 수 없는, 위에서 말한 생산적 활동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장애인은? 자본주의 내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규정'에서 배제된 채 정말 인간이기만 한 존재들과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당위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능력에 대한 질문이다. '보편적 형제애'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 '보편적 형제애'라는 걸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기성 체제 '너머'에서 생각해야만 할 거라고 생각한다.


○ 극단적으로 아예 생산 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도 '장애인'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의 생산성이 낮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다. '보편적'이라는 말이 철학에서 쓰일 때는 예외가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보편적 형제애'를 가지기 위해서는 '생산성'으로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자본주의의 맥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 국가에서는 장애인을 위해 분배를 통한 복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복지 혜택이 제도적으로 성립되려면 아무에게나 주어선 안 되기 때문에 장애에 대한 명시적인 기준이 필요하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체제 안에서의 생각만으로는 '보편적 형제애'를 달성할 수 없다.


○ 부끄럽게도 내가 장애학에 관해 읽은 책은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뿐이다. 읽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반성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만든 책이었다. 그리고 특히 장애인의 경험과 감정 등이 비장애인과는 다른 새로운 지식이 될 수도 있다고 한 부분이 나를 부끄럽게 했고 좀더 확장된 생각을 가지게 했다. 유전자 기술 등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 행복한 미래라는 듯이 말하는 얘기들을 여전히 접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모든 상황을 포섭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장애를 제거할 수 있을까? 그런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장애를 가진 사람의 다르고 다양한 경험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확장시킬 수 있지 않은가? 장애는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인가?


결론


  오늘도 역시 결론은 이런저런 질문만 많아졌다~~입니다. 겨스님이 바틀비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라고 했다고요!! 여튼 체제 바깥에서 하는 생각과 시도가 때로는 무의미하고 좌절될 수도 있겠고 체제가 전복되는 일은 힘들 것이고 만약 체제가 전복된다고 해도 새로운 규정들이 생겨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생각과 시도는 전복을 낳을 수도 있고, 아니면 조금이라도 많은 호모 탄툼들을 포섭할 있는 세계의 확장을 가져올 수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딴소리지만 나는 강아지풀에 강아지풀이라는 이름을 붙인 인간들의 귀여움을 때로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고민하며 다들 화이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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