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바위보
앨리스 피니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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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실인증이 있는 남편인 애덤과 함께 어밀리아는 폭설이 내리는 날 외진 곳의 예배당으로 휴가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가 밖에서 창문 안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침실은 부부가 살고 있는 침실과 똑같이 꾸며져 있다. 어밀리아와 애덤은 서로를 의심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으스스한 상황을 보낸다.

고립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뻔한 내용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과연 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읽다 보니 술술 읽혔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음! 단순한 추리 소설이 아니라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어서 더 재밌었던 것 같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상되는 부부생활의 권태도 잘 느낄 수 있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노력하는 게 오히려 관계를 망치게 할 때도 있다는 지점도 느꼈다.

그리고 조금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연출적인 지점에서 영화 양들의 침묵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느꼈는지는 다 읽고 나면 다들 알 수 있을 듯ㅎㅎ


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제공 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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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보다 Vol. 1 얼음 SF 보다 1
곽재식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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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소결합을 하는 물은 고체인 얼음이 되면 부피가 더 커진다. 관계도 그렇지 않은가? 가까워지려 할수록 어떤 식으로든 더 몸집을 늘리곤 한다.


■얼어붙은 이야기


인생이 길지 않잖아요. 수십억 년 된 행성과 별들이 지내오는 시간에 비하면 백 년쯤은 잠깐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나마 넓디넓은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수십억 명이나 되는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보내는 삶이거든요. 그런데도 굉장히 귀중하다는 생각은 또 있어요.

곽재식, 얼어붙은 이야기


죽기 직전에는 살아온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들 한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지 그 말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이 소설은 죽기 직전 시간이 얼어붙는 이야기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원자화된 개인으로 연속된 시공간 속을 걸어간다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무질서 속에서도 원자들은 결국 서로 들러붙어 무언가를 만들곤 하지 않는가? 원자들이 연결될 때 규칙들은 이미 다 정해져 있지 않은가? 영화 <매트릭스>와 비슷한 결을 가진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인간보다 고차원에 있는 존재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 존재들이 어쩌면 인간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메타적으로 인생을 들여다보면서 의미를 찾아보는 일. 의미도 모른 채 하루를 살아가는 건 정부와 사회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재밌게 읽었다.


■채빙


그 이름을 다 알지 못하여 열거하기 어려운 신들에게 자신의 안전과 영화를 위탁하는 일이 도대체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며, 자신이 추구하는 바는 스스로가 해결해야 한다는 이치를 깨달은 자의 몸짓과 표정이, 그에게 깃들어 있다. 신은 없거나, 있더라도 자신들에게 무관심하며 그저 있기만 할 뿐임을 아는 태도가 엿보인다. 그러니 기도 대신 꽃을 건네는 것이다. 꽃도 신만큼이나 아무 까닭도 목적도 없이 피어 있는 것이기에.

구병모, 채빙


구병모 작가님이 참여하셨다고 해서 서평단에 참여 신청을 했다. 사실 읽어본 건 <파과>뿐이지만 <파과>를 너무 재밌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는 역시. 사한-현명의 시각으로만 쓴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풍성하다.

한 문명이 파괴되어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가질까? 내가 재밌게 읽거나 본 소설과 영화에서는 대체로 새로운 문명은 또 다시 새로운 '신'을 만들어낸다. 무력함을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신에게 기대는 것을, 혹은 신을 협박하는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신 대접을 받는 것은 진짜 신인가? 완전한가? 그는 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능력도, 마음도 불완전한 인간에 더 가까운가. 신은 불변하는가? 영원에 가까운 것은 신인가, 사랑인가.

좋은 이야기는 질문을 많이 던져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채빙은 그런 이야기였다. 소재 자체가 매우 특이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그 소재를 다루는 시각이 신선했고 문장이 정말 멋지다고 해야 할까, 그 마음과 그 풍경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기억을 다루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과 만화 <츠바사>도 떠올랐다. 기억은 단지 정신에만 종속되는 것일까 아니면 체화되는 것일까. 특히 사랑이란 강렬한 기억은 단순히 시간이 지난다고 잊혀지지는 않을 거라는 낭만과 같은 믿음이 사람들에게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런 낭만 같은 믿음 따위는 없는 현대의 차가운 인티제라고 생각해왔으나 채빙을 읽고 나서는 그런 믿음을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고 차가운 얼음 위의 따뜻한 노랑, 그것이 사랑이라면.


■얼음을 씹다


나는 그것을 차마 뱉지 못하고, 오래도록 입 안에서 굴린다.

남유하, 얼음을 씹다


'식인'이라는 주제에 잠깐 골몰했던 때가 있다. 왜 우리는 다른 생명체의 고기는 '맛있게' 먹으면서 인육을 먹는 행위에는 그렇게 치를 떠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과학적으로 인육을 먹으면 유전병이 생겨서 먹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어느 정도 그 질문을 지워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마주한 주제였다. 인육을 먹는 게 정당화되는 경우는 다른 먹을 게 없는 상태에서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였을 때일 것이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도덕적으로 인육을 먹는 행위를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였어도 인육을 먹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체 왜일까?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른 존엄성이 있다고 생각해서인가, 아니면 그저 동족이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인간은 다른 이의 살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며 생존해야 할 만큼 고귀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글 속의 말처럼, 인간이 그리 고귀하지 않아서인가. 고인에 대해 예우를 다하려는 인간의 태도는 도덕적인 일인가, 그저 멍청한 짓일까.

이 소설은 인육을 먹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육을 먹지 않으려는 유리아에게도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그 상황이 됐을 때 나는 유리아처럼 신념을 고수할 수 있을까? 과거의 사람들이 지녔던 도덕적 가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읽으면서 좀 역겨웠고, 그래서 재밌었다.


■귓속의 세입자


"제가 얻는 건 뭔데요?"

반투명체가 잠시 침묵했다.

"시시하고 쓸데없는 아름다움이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확인이 필요하다면 거기서 잠시 관찰해주십시오."

박문영, 귓속의 세입자


귓속의 세입자. 너 인티제냐?ㅋ 우선 해빈의 기본적인 성정과 세입자에게 매우 공감할 수 있었다. 시끄러운 거 싫어. 혼자이고 싶어.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것들에 대해 열광하며 집착하지 마. 이런 마음? 하지만 결국 나도 요즘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처럼 해빈도 재언을 통해 조금이나마 함께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세입자는 인간이 아니니까, 혼자서 완전하게 살길 바란다.


■차가운 파수꾼


"나오지 말았어야지!"

이제트가 분노와 울음을 애써 붙든 소리로 말했다.

"어떡해. 목소리가 들리는 걸."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걸 모르는 척할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나오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나갈 수밖에 없는 거야."

연여름, 차가운 파수꾼


하.. 진짜 너무 좋다... 진짜.. 사랑이... 사랑이 이런 거지.... 진짜 가슴 먹먹해져서 한참을 여운에 젖어 있었다.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벅차오르는 중. 어쩜 그래!!

나는 사랑이란 감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자꾸 멍청한 결정을 내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근데 사랑이어서, 나에게는 최악이지만 상대에게는 최선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면. 그건 너무 너무하잖아! 더 이상 말하면 스포가 될 것 같으므로 더 적지 않겠다 (이 정도도 스포일 것 같아서 걱정). 그냥.. 꼬옥 읽어주면 되.


■운조를 위한


너는 왜 나에게 다정한가.

천선란, 운조를 위한


인용하고 싶은 구절이 많았지만 열심히 절제해서 가장 짧은 구절을 골라보았다. 언어를 뛰어 넘는 다정. 우리가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언어가 같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다정할 수 있기 때문일까? 우리가 지금 다른 나라 언어를 알고 배울 수 있는 건 결국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끼리 서로 다정했기 때문에, 서로 알고 싶어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죽음에 관해 쓰려고 하면 결국 삶에 대해 쓰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삶에 있어서야 의미를 가지니까. 결국 죽음이란 남겨진 생들에 관한 이야기니까. 아파할 바에야 죽는 낫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시간이 있다. 이제는 아파하는 자체가 삶임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그리고 아픔 속에서 다정함들을 마주하고, 다정함들에 기대서 아픔을 살아가고. 그래도 좀더 원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삶에 가까운 삶을 살아보려고 삶을 내던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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