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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평점 :
결혼전까지 한 번도 이사를 가보 적이 없는 내게 어린시절 이사는 신천지와도 일맥 상통하는 말이였고 전학 온 아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였다. 하긴 부모님이 결혼하기전 집터를 장만하 손수 지으셨기에 근사한 이 층 양옥집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각별한 애정을 갖고 계셨다. 30년을 넘게 사시다 어쩔 수 없이 집앞에 도로가 뚫리는 바람에 신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바로 옆집에 짐을 맡기고 그곳에 방 한 칸 얻어서 기거하였다. 짐정리하다 여태 본 적이 없는 낡은 나무괴짝을 발견하고 보물상자라도 되듯 열어 보았다. 먼지와 함께 해묵은 아버지의 추억을 하나하나 펼쳐 든다. 박물관에서나 봄직한 오래된 LP판. 초등학교 교과서, 편지, 증명서 등을 조심스레 세상밖으로 꺼내 놓으며 난 그때 처음으로 아빠에도 어린시절이 있었다는 걸 그리고 기억할 추억이 있다는 걸 알게돼었다.
윤대녕의 '이 모든 극적이 순간들'을 읽다보니 문득 아버지의 상자를 열며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나 그리움에 울컥해져 온다. 그때의 아바지 나이만큼 된 그가 차곡차곡 쌓여 있던 그의 추억과 주변 이야기들을 세상밖으로 꺼내 놓는다. 사십의 끄트머리에서 바라본 세상, 소설가를 꿈꾸던 픗픗한 고교 때 이야기, 신춘문예에 여러 차례 낙선 후 문단에 등단하던 설레임과 벅찬 감동, 가족과 부모님, 첫사랑, 이사,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 등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 놓았다. 덤으로 끝머리에 그가 읽어온 책 중에서 골라 뽑은 스물아홉 권의 독서일기를 통해 작가 윤대녕의 문학적 취향을 만나볼 수 있다.
한창 젊었을 때 만나본 그의 소설에 비해 나이가 듦에 따라 그의 글도 진솔하고 단백하니 편안함이 묻어 난다. 세상을 바라보던 날선 시선이 한층 유해지고 일상의 아름다움과 가족들이 소중함을 깨닫게 된 그는 나뭇가지에 연둣빛 새싹이 돋고 산마다 진달래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좀처럼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다며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것인가?" 라고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산문은 작가의 개인적인 일상의 소소함을 담고 있어 그의 내면을 들여다 보며 내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말하던 아홉수가 뜻하는 바를 이제야 어렴픗 알게 된다.
"문학으로 뜨거운 국과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그래, 그것뿐이다. 지금껏 아비에게도 단 한 번 굽히지 않았던 내가 기어이 문학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남자나이 마흔이 됐으니 이 일을 숙명처럼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 며 그것이 자신의 삶을 구속하고 있음을 깨닫고 벗어나려 애써봐도 글쓰는 일이 운명이라 말하는 그는 영락 없는 글쟁이다. 그에게 글쓰는 일은 세상과의 만남이며 소통이며 그가 세상에 속해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기에 여전히 책상앞을 떠날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이십 여년 간이나 글을 써온 그도 소화도 제대로 되지 않고 울렁증에 구토감을 동반한 '글 복통'을 앓는단다. 글쓰는 일이 힘든 작업임을 알았지만 보통 고된 일이 아닌가 보다. 여전히 철따라 보따리를 꾸리던 방랑벽은 못버렸어도 지천명을 앞둔 그가 이제 기다림의 삶보다 더 힘든 삶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자신의 자리에서 더 이상 길을 잃지 말고 살아가겠다 다짐한다. 마흔아홉의 그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 보며 기억의 상자를 열어 그의 과거를 비워낸나. 새로이 가득채울 미래의 계획들과 새로운 만남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