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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홍
노자와 히사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죄의 댓가로 잘못을 저른 당사자의 처벌로 마무리되는 사건들을 보며 그래도 되는 것일까? 피해자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야하기에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온갖 범죄와 사건들을 보며 죄를 저지른 당사자에 대한 처벌만을 관심있게 읽으며 범죄자에 분노하지만 한편으론 피해자가 내가 아니어서, 내 가족이 아니어서 천만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리곤 한다. 또다른 피해자인 양측의 남겨진 가족에 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에 관해선 쉽게 잊어버리거나 애당초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인간 내면의 증오와 죄책감, 외로움, 고독감... 이 모든 복합적인 감정을 한 가족의 살인 사건과 남겨진 가족들이 겪어야만 했던 세월의 아픔을 통해 고스란히 전하고 있는 조금은 특별한 내용의 책이 있다. '심홍'.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한 핏빛 고통. 가족을 처참하게 죽인 살인자의 딸과 남겨진 피해자의 딸, 악연으로 얽힌 양자 간의 증오와 끊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두 소녀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운명이란 자신의 의도하는 바대로 살아 갈수는 없는 건지...
수학여행 중이던 초등학교 6학년 가나코에게 가족의 사고 소식이 전해지고 사건 현장에 없었기에 유일하게 목숨은 건진 그녀는 일가족이 무참히 살해되었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마음의 씻을수 없는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아 가게 된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된 20살의 가나코에게는 여전히 8년전 가족들이 겪었을 공포와 고통이 떠오르면 그녀가 가족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선생님과 함께 병원을 향해 택시를 타고 달려가던 그날밤의 ‘네 시간’이 계속 되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고통의 나날을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에게 흉기를 휘두른 범인에게도 자신과 같은 또래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정체를 숨기고 범인의 딸, 미호에게 접근한다. 그녀의 말이 실린 한 줄의 기사로 인해.
'나도 죽이면 돼'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그 말을 했을까.
피해자와 가해자가 각각 남기고 간 아이들이 비슷한 막다른 골목에서 신음하고 있다. 죽임을 당한 측과 죽인 측이 실은 같은 고통으로 이어져 있다고 한다면…….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 p.182
그러나 가해자의 딸인 미호 또한 살인자의 딸이란 이유로 가나코 보다 더하 고통과 가해자들에 대한 죄책감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지 모를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무척이나 닮아 있다. “나만 살아남아서 미안해”라며 살아도 산게 아닌 가나코의 처절한 절규가 가슴아프게 맴돈다. “나도 죽이면 돼”라며 분노와 괴로움속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학대하는 미호. 그 둘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슬프다.
가해자의 딸인 미호를 찾아가 살인의 죄를 되물림하여 죄의식 속에 살아가게 만들고 싶었던 가나코는 미호 역시 같은 피해자임을 깨닫게 된다. 미호의 아버지 역시 자신의 가족을 향해 쇠메를 휘두르며 무참하게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동기는 다름아닌 가나코의 아버지에 있기에 그 역시 가해자이며 동시에 피해자인 것이다. 법률의 심판으로 인간의 죄를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진실과 거짓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몸이 아닐까, 정의란 이름하에 인간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지, 사형에 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한 사건으로 인해 각기 다른 마음의 상처가 드러나게 되고 서로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며 자신을 고통속에 가둬 혼자만 살아있음을 죄스러워하는 가나코와 아버지가 휘두른 쇠메에 피흘리며 죽어간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생각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통해 자신을 학대하며 살고 있는 미호는 서로를 위로하고 이해하게 된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마적인 폭력성과 잠재되어 있는 본성을 이토록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작가의 능력에 감탄해 가며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다. 책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두 소녀의 갈등과 심리묘사가 뛰어나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핏빛 기억에서 헤어 나오길, 그녀들의 인생을 오롯이 자신들의 의지로 살았으면 한다. 그녀들이 가족의 몫까지 행복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며 왠지 무거운 마음과 아쉬움으로 책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