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6.4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며 중국 톈안먼 광장에서 발생한 유혈사태와 그들이 꿈꾸었던 개혁과 민주주의를 되돌아 보며 6ㆍ4 운동의 희생양이 된 자오쯔양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생각하지 않ㅇㄹ 수 없다. 우리의 5ㆍ18 광주 학생운동을 떠올리게하는 중국의 6.4운동은 중국이 개혁의 길로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라지만 6.4운동의 원인과 발생 과정에 관해서는 아직도 확실히 알려진바가 거의 없다. 중국도 여전히 '학생과 시민들의 폭동'으로 여기고 대포화 총 등 무력 진압에 의해 목숨을 잃은 학생과 인민의 수가 얼마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 영원히 복직되지 못했는지, 가해자와 책임자는 누구인지 공개된 자료도 없다. '국가의 죄수'는 텐안문 광장에 모인 학생들을 독려하고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 덩샤오핑에게 숙정된 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6.4와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당과 국가를 경영해본 사람으로서 생각한 바를 써 후대에 남기기 위해 당시 톈안먼 운동을 기억하는 지식인들의 도움으로 그의 구술을 녹음한 후 문자화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게 되었다. 자오쯔양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덩샤오핑을 보필하며 중국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톈안먼 사태 후 무려 16년간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후야오방의 죽음으로 불붙은 6 4 자오쯔양과 함께 양쪽에서 덩샤오핑을 보필하던 후야오방의 사망으로 톈안먼 광장에 학생들이 모여 그를 애도했다. 이는 당의 부패와 개혁개방의 후퇴에 대해 쌓였던 불만을 후야오방을 추도하는 형식을 빌려 나타낸 것이였다. 일부 과격한 학생들은 공식적인 추도식이 끝났지만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이에 보수파는 상황을 무력 통제하지 않으면 전국적인 동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덩샤오핑에게 보고했고 덩샤오핑은 '반당ㆍ반사회주의 동란'으로 시위대를 규정짓고 4ㆍ26 사설을 발표한다. 사설 발표 후 중도 입장이었던 사람들까지도 급진적인 쪽으로 변했고, 자신들의 요구가 묵살되자 분개한 시위대는 가두시위와 연좌단식 농성에 돌입했고 이들을 지켜보던 도로변의 군중들과 가두행진을 저지할 책임을 맡고 있던 경찰조차도 사실상 이들의 가두행진을 허용하고 지지했다. 군대가 동원되다 뒤늦게 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자오쯔양은 4ㆍ26 사설을 정정하는 보도를 내보내 학생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했으나 덩샤오핑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내란 진압 정책을 밀어붙여 군대 동원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자오쯔양은 톈안먼 광장으로 달려가 학생들에게 단식을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갈 것을 설득했지만 학생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4·26 사설의 정정 발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5·4 연설마저 당의 비난을 받게 되자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집에서 열린 계엄 결정 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반대의사를 밝히며 스스로 역사적 사명 다한다. 공식적인 투표조차 없이 계엄이 결정되고 자오쯔양은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하고 덩샤오핑에게 계엄 결정을 번복해줄 것을 편지로 청원하였으나 결국 6월 4일 인민들을 향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자오쯔양은 이 책에서 6·4의 배경이 되었던 당내 정치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즉 개혁개방을 주장하며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자 했던 자신과 보수 세력 간의 갈등에서 사태의 원인을 찾고 있다. 자오쯔양은 당과 국가가 농민과 기업에게 양보하기를 원했다. 그는 해안에 가깝고 교통인 편리한 연해 지역을 전략적으로 대외형 경제 발전 특구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한다. 이처럼 경제개혁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지지만 당내 반대세혁에 부딫치게 된다. 그러던 중 6·4 사태가 일어나고 그는 반대 세력과 덩샤오핑과도 다른 노선을 걷게 된다. 자오쯔양은 덩에게 정책의 중요사항을 통보하고 자문을 구하고, 덩의 집에서 회의를 통헤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로인해 의도적으로 자오쯔양이 학생시위의 책임을 회피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덩샤오핑을 매도했다는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자오쯔양은 비록 가택 연금되었지만 보수파와의 갈등과 대립의 순간마다 자신 편에 서주었고 자신을 지지해 주던 덩샤오핑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는 오해를 풀기 위해 진심을 담은 편지를 수차례 덩샤오핑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나 답장은 없었으며 끝내 둘의 만남은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덩은 그렇게 오해를 안은 채 1997년 2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가 이러한 오해를 가지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나는 진실로 원치 않았다. 6ㆍ4 민주화 운동 이면에 정부와 학생들 간의 이념의 갈등, 이데올로기적 논쟁, 정치적 대립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글에서 자오쯔양 총서기가 되지 않고 국무원 총리로 남아 계속해서 연해 발전을 이끌었더라면 좀더 빨리 개방 정책이 시행 될 수도 있었을것이란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중국식 사회주의’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 사회주의국가에서 실행한 민주제도는 완전히 형식에 치우쳐 있고 인민이 주인 되지 못하며 소수, 심지어 개인이 통치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이 실시한 것은 이러한 의회 민주주의재도 였다. ....이는 한 국가가 근대화를 이루고 현대적인 시장경제, 햔대문명을 실현하려면 정치체제는 반드시 의회민주주의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본문 중- 서구식 민주주의가 인민이 주인 되는 제도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그의 솔직한 말이다. 이성적이며 간결한 그의 말 속에 그의 진심이 담겨있다.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그는 6ㆍ4 이후 죽어서도 국가의 죄수로 남았다.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6ㆍ4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 톈안먼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더불어 자오쯔양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때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