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사진첩이나 풍경화 속에 갇힌 서울을 본다. 서울 토박이는 아니어도 유난히도 손재주가 좋으셨던 아빠 손을 꼭 잡고 이름 모를 온갖 공구들이 빼곡히 자리한 손바닥 보다 좁은 가게를 신기한듯 쭈빗거리며 들여다 보던 세운상가. 어린 내겐 그곳은 들어가는 길은 있어도 도저히 빠져 나올 길이 없는 미노스궁처럼 여겨져 실타레 대신 꼬옥쥔 아빠의 손을 행여 놓칠 세라 땀이 베어 나도록 힘주어 잡았 더랬는데.. 그 든든하고 거친 아빠 손의 감촉과 어린시절 그 골목은 이젠 기억속에만 볼수 있게 되었다. 아빠, 이젠 보고 싶어도 뵙지 못하지만 골목 마져도 없어진다니 마음이 먹먹하다. 새롭고 화려한 것이 반드시 좋을 수 만은 없다는 걸 왜 높으신 양반들은 알지 못하는 걸까?
사진기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빛바랜 흑백사진이 옛 서울을 담고 있는 전부였는데, 서울 토박이며 건축가 부부가 북촌, 예지동 골목, 서울의 물길, 청진동, 피맛길, 화신과 종로타워, 종로, 을지로, 숭례문, 지하철, 세종로, 경복궁, 칠궁, 운현궁, 서울의 밤, 명동, 남산, 문화의 거리, 홍대 앞, 여의도, 뉴타운, 조계사, 통의동, 통의동, 효자동, 서촌으로 이어지는 풍경과 정겹게 다닥다닥 붙은 집과 골목들, 엉성하지만 제각기 특색있는 간판들, 전봇대 위로 뒤엉킨 전선들 마저 사랑스럽게 점차 사라져가는 풍경들을 스케치해 두었다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을 통해 사라지고 새롭게 지어진 서울의 변화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내겐 이 책이 앨범 대신이리라.
높으신 양반님네들이 말을 타고 다니던 길이 종로통 이였다면 그뒤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이 피해 다니던 길이 피맛길이다. 이길 역시 구불구불 뱀이 지나간 자리같이 그 끝을 좀처럼 종잡을 수 없기에 길을 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촌스럽다는 서울 친구들의 핀찬과 애정어린 구박을 받아도 그길이 좋았다. 재수하던 여학생이 흔치 않던 시절, 종로학원, 대성학원 다니러 유학 아닌 유학 생활을 하며 몇 안되던 여학생들과 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매콤한 떡복기 먹으며 수다로 스트레스를 풀곤 했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곳을 못잊어 가끔 빈대떡, 파전에 막걸리 마시며 젊은 호기를 부리던 추억이 서린 곳 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죄지은 것도 없지만 골목에만 서면 마음이 놓이고 푸근해짐을 느낀다. 마치 엄마의 치맛자락처럼...
건물은 없어져도 복원이 가능하단다. 굳이 건축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문화재 복원이나 불타 버린 유적지나 숭례문을 복원한 것을 보면 가능한가 보다. 하지만 길은 복원하기가 쉽지 않단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데 자꾸만 사라져 가는 옛길이 그리울 때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지.
지금은 볼수 없는 건물로 화신 백화점이 있다. 1988년 철거되어 그곳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백화점하면 지금도제일 먼저 떠오른다. 처음 타본 움직이는 계단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지금은 아파트 현관문만 나서면 있는 엘리베이터가 우주선의 최첨단 장비인듯 그저 경이롭기만 했다. 내게 백화점 물건은 견물생심 꿈도 꾸지 못했고 백화점을 나설때 빈손임을 보상하듯 남대문 시장에 들러 비슷한 옷이며 물건들을 사주시며 가격을 비교 하시던 엄마의 음성 너머 다른 세계를 넘나들던 아련한 추억, 그러고 보니 내게 서울에 관한 추억이 꽤 많은것 같다. 서울에서 단한번도 둥지를 튼적 없지만 그곳을 그리워하는 이유인가 보다. 서울 구석구석을 이책을 따라 가다 보니 서울처럼 작은 땅덩어리에 이다지도 많은 역사와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곳이 또 있을까 싶다.
어쩌다 한번씩 갈때 마다 너무 많이 바뀌어 버린 도심의 풍경, 서울은 지금도 개발과 보존을 반복하며 그렇게 변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개발이며 누구를 위한 발전인지 도무지 모를일이다. 집이나 길은 사람이 살고 다녀서 사람냄새 풍기는 곳이여야 하지 않을까? 다소 불편해도 오래 살던 내집이 편안하듯, 오래 신어 닳았어도 제일 편한 신발같은, 추억을 곱씹으며 편안함을 맛보던 기억의 창고속 옛모습이 몹시도 그립다. 아빠의 체온이 생각나 눈물 나도록 보고 싶어 부부의 수채화 풍경을 다시금 펼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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