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이연숙 지음 / 난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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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엄마의 외로움을 외면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보상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엄마를 볼 때면 그래서 무력해진다. 나는 엄마의 환상(또는 망상)을 공유할 수 없는 ‘딸‘이기에 기꺼이 그녀를 방치하면서 그녀의 이해자인 척한다. 엄마는 이런 집에 사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지겹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치욕스럽다고 말했다. 최근에 사귄 친구가 자기와 ‘급‘이 안 맞는다고 느끼는 것 같아 더 다가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것은 엄마의 오랜 열등감이고 자존심이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나아질 거라고,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 - P16

일단 몸을 일으켜서 씻어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그런 장면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고 결국 포기했다. 나는 씻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지 알고 있고 그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된 성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삶이 천천히 망가진다. 망가진다는 것을 안다. 처음에는 이렇게 머리를 감지 못하거나 옷을 입지 못하는 일로 시작해서 살아가는 것에 흥미를 잃게 된다. 나는 분명히 내가 매듭짓지 못하고 벌여놓기만 한 일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한 일들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그것들을 모두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미루는 것이 아니라 방치하게 되면서 나는 나를 주워담는 것 역시 포기한다. 도처에 내가 굴러다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언젠가는 주워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 P17

무엇도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로 끔찍스럽다. 나는 내가 정말로는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의 피로하고 아픈 얼굴을 본다면 결국 눈물을 쏟아낼 것이라는 사실을 참아낼 수 없다. 나는 그를 저주할 권리가 있다. 그를 죽일 권리가 있다. 그를 고문하고, 그의 손목을 자르고, 그의 눈알을 찌르고, 그를 거세하고, 그를 수십 번 난도질할 수 있는, 적어도 그런 음모를 꾸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죽어가는 소식을 들으면서 모든 것이 다 내 탓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내가 그를 죽으라고 사주한 탓이라 느낀다.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비극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 느낀다. 속죄하기. 수치 없이 살기. 그런데 어떻게 가능하지? 아빠 없이 어 - P34

떻게 내가 수치 없이 살지? 아니 왜 그렇게 살아야 하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 P35

일상적인 곤궁에 대해 쓰는 일.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쓴다. - P36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를 하루에 열 번 정도 말한다. 그런데 물론 그러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아니고 싶지 않다. - P37

<나르코스>라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파블로가 어릴 때 우린 찢어지게 가난했어. 그애가 어느 날 신발이 낡았다고 학교에서 놀림받고 왔지. 나는 밤중에 신발가게에서 신발을 하나 훔쳤다. 그리고 그애는 다음날 새 신을 당당하게 신고 갔어.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존엄이란 그런 거야. 이런 말들이 나를 지탱해준다. 가난이 나를 추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나를 추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게 신발을 훔치자는 구호로 들린다면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음.)
슈퍼에서 물건을 사다가 내가 내 가난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동정을 사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고 더이상 가난에 대해 쓰지 말자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멈출 수 있을까? 이게 내 당당함이 아니라면, 비참함 속에서 굴러다니는 말들을 주워 삼키는 게 내존엄이 아니라면, 뭐가 내 말이 될 수가 있을까? - P76

죽은 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느낀다. 죽은 자들의 말과 글 속에서 견딜 만한 우정을 찾고 또 그 속에 몸을 숨긴다. - P83

(배운 여자들에게 경고. 아빠를 이미 죽였다고 생각할 때조차 그는 충분히 죽지 않았습니다.) - P120

꿈은 비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반물질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어서 어딘가에 기록이라도 할라치면 그 의도를 눈치채곤 비웃듯이 녹아서 사라진다. 여기 적히느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버리겠다는 태도다. 만약 꿈이 스스로 뭔가를 결정하고 있다면 말이다. 꿈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때로는 분하고 이가 갈린다. 이런 끔찍한 일을 자고 있는 동안에 당했는데 그 내용을 기억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남아 있는 것은 그저 ‘당했다‘는 감각뿐이다. 꿈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시간을 충격받은 채로 지냈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고 해도 여전히 짜증은 난다. 성가시다. 나는 꿈을 꾸라고 내게 말한 적이 없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책임질 수 있다. 그러나 밤에 일어난 일. 우리가 잠들었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는 그저 수치스러워하며 얼굴을 감싸쥔 채 깨어나야만 한다. 십계명에서는 ‘남의 아내를 원하지 말라고한다. 하지만 어떻게 원한 것만으로 죄가 될까? 저지르지도 - P122

않은 죄에 대해 우리는 속죄해야 할까? 이야기가 너무 멀리 왔다. 중요한 것은 어떤 꿈은 정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인정하건 말건 꿈은 내게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꿈의 기록을 필요로 하는데, (물론 지금처럼 잘되지는 않는다. 꿈이 반항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꿈이 번역을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모든 꿈의 완전한 기록을 원할까? 그런 장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걸 사용하게 될까? 실제로 그런 장치가 있다고 한다면 처음에는 혐오스럽고 이후에는 실망스럽다가 연민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많은 현대의 매체들이 그러한 장치를 꿈꿨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P123

요즘 말이랑 울음이 동시에 경쟁하듯이 쏟아져나온다. - P145

근데 알리기 위해 말해야 할까?
알리다니 무엇을? 입을 여는 순간 분리된다. 말하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들이 입 밖으로 굴러떨어진다. 그걸 보고 있다. - P146

나는 재가 될 때까지 타는 것을 지켜보거나 그게 아니면 시작도 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에 가까운 것 같다. 정신과 선생님은 그 중간을 자꾸 찾으라고 하는데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아는데 그냥 못하는 거다. - P216

반성하는 게 너무 좋아서 반성 그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들・・・ 인신공격이 대단한 인권운동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 지가 말하는 건 당사자성이고 남이 말하는 건 인권침해(?)인 사람들・・・ 인권 인권 외치면 인권이 자동으로 생기는 줄 아는 사람들・・・ 자기집 개 이름도 인권으로 지을 사람들・・・ 어제까지는 남 욕하는 농담에 웃다가 오늘은 갑자기 정신 차린 사람들・・・ 지가 그렇게 하는 게 대단한 사회개혁인 줄 아는 사람들・・・ 반성은 집에 가서 혼자 하고 일기장에 쓰면 되는데 굳이 동네방네 죄송하다고 떠드는 사람들・・・ 전자렌지에 햇반 데우는 시간보다 빨리 반성하고 빨리 죄송한 사람들・・・ 하여튼 어떻게든 인간을 분류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사람들・・・ 남들이랑 자기랑 똑같지 않으면 세상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사람들・・・ 트윗 몇 개로 인권이 나아졌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사람들・・・ - P257

어젯밤에는 내내 아빠 생각만 했다. 아빠처럼 죽으면 어떡하지? (나는 장례식을 떠올리고 있다.) 아니면 내가 아빠처럼 - P259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빠는 친구 하나 없이 죽었다.) 나는 아빠가 아니었다고 변명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다. 변명이 끝나지를 않는다. - P260

레즈비언 부럽다고 한 그 부분이 문젠 거죠. 레즈비언이 어떻게 부러울 수가 있겠어요? 물론 레즈비언이 부럽다고 한 맥락은 이해가 가지만요(남자랑 권력 싸움도 안 해도 되고 내가 여자라 이런가?
가 남자라 이런가? 이런 생각 안 해도 되고 더치페이 하면 되고 기타 등등). 근데 레즈비언들 입장에서는 어떻겠어요, 자기들은 결혼도 못하고 어디 나가서 레즈비언이라고 하면 과잉 성애화된 이미지를 부여받고 스리섬 하자는 소리 듣고 너 여자 역할이니 남자 역할이니 그런 말 듣고 너무 피곤하겠죠? 그런데 누가 레즈비언이라 부럽다, 이런 말을 하면 미친놈 아닌가 생각이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겠죠.
그치만 전 다른 이유로 레즈비언이 부럽다는 말이 존나 이해가 안 갔는데요. 왜냐면 그 트윗을 쓴 사람도 여자들이랑 조금만 있어보면 알겠지만 도대체 이 미친 여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 여자들은 다 미쳤는데 어떻게 이 여자들과 연 - P262

애를 한다는 것인지? 제가 레즈비언 연애를 하고 레즈비언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사회의 시선이 아니라 그냥 여자들이 미쳤다는 사실 자체였거든요. 여기 적을 수도 없는 별의별 미치광이 같은 여자들이 다 있었고 그녀들도 절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런 것들은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게 뭐였을까? 그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건 그냥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의 증상이었을까? 그 여자는 왜 미쳤을까? 왜나였을까? 지금은 잘살고 있을까? 그 여자는 여자라서 미친 걸까 그냥 미친 걸까? 이게 다 우리가 여자라서 벌어지는 일인걸까? 왜 나는 여자들을 만나나?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죠. 결국에는 나는 동성애자조차 못 되고 그냥 미친 여자에 중독됐다는 결론이 나와요. 이걸 부러워한다는 거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가요. 그냥 하는 말이었겠지만 이미 미친 여자 중독에 빠지고 난 뒤에는 답도 없거든요. 그냥 미친 여자들이 하자는 대로 흘러가는 겁니다. 제가 너무 레즈비언들을 미쳤다고만 단정하고 있나요? 이것이 일종의 중독 증상이 아니라면 어떻게 님들이 동성만을 연인으로 고집하는 걸 설명할 수 있죠? 그냥 님들은 미친 겁니다・・・
그리고 여자를 대상화하는 것도 몹시 피곤한 일이죠. 이젠 저는 이빨 다 빠져서 그렇게까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떤 여자를 보고 일초 만에 자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은 아니죠. 어떻게 해도 정상은 아니죠. 그리고 그걸 고 - P263

치려고 해도 고칠 수가 없죠. 그걸 고친다면 당신은 더이상 동성애자가 아니게 되니까요・・・ - P264

오늘도 면접 가서
원래 뭐하시는 분인가요? 하길래
웃으면서 아 네 저 글써요 이랬는데
내면에서 엄청나게 죽어갔음
글쓰는 게 뭐
직업입니까?
그거는 고급 취미겠죠
면접 가서 누워 있다고 말할 셈이에요?
진심이야?
물론 누워 있죠
그것도 글쓰기의 일부예요 - P268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건 유년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또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억들이다. 대부분 가족과 관련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쩌면 평생을 그 기억과 싸워야 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그 기억을 잊지 않음으로서, 마치 부담스러운 식사를 먹어치워 소화해내듯 그들을 극복한다는 생각도 든다. - P282

이건 다 계절 탓이다. 추워지면 혼자일 땐 더욱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고 여럿일 땐 더욱 여럿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둘 사이의 온도 차이가 너무 커서 나는 자주 누굴 사랑하거나 그리워하거나 한다. 입김이 떠오르고 풍경은 창백하다. 어떤 뒷모습은 쓸쓸하고 어떤 뒷모습은 싸늘하다. 혼자서 사 - P283

랑하거나 사랑받았던 기억. 쏟아지는 화살처럼 박히던 말들, 목도리 사이로 비져나오는 폭소들, 그러다 돌처럼 굳어버린 입술들. 모두 겨울에 일어났다. 나는 흉터처럼 겨울을 기억한다. - P284

무수히 작 - P294

고 사소한 결심들이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떤 시절의 사진들은 너무 반짝거려서 쳐다보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졌다. 나는 망가지고 있고 부패하고 있다. 나는 내 친구들이 일찌감치 청산한 이십대 시절의 악습들을 끌어안고 익사하고 있다. 모두에게서 버려졌다고 느낀다. 혹은 내가 모두를 버렸다고 느낀다. 나는 내게서 풍기는 악취를 숨길 수 없어서 가장 어둡고 축축하고 낮은 곳에서만 기어다닌다.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장면들이 보여요. 나는 어제 죽은 사람들이 머물다 간 장소에 있어요. 언젠가는 산채로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멋진 무용담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295

최고의 복수는 용서다 vs 최고의 용서는 복수다
"최고의 복수는 용서다. 가해한 대상을 잊어버리고 승천시킴으로써 복수."
"최고의 복수는 용서다. 용서함으로써 그 사람의 세속적인 치졸함을 감싼다. 최고의 디그레이딩."
"최고의 용서는 복수다. 가해자의 가해 행위보다 십퍼센트 정도 증량된 가해를 가해자에게 되돌려줌으로써 동시에 가해자가 됨 =용서."
"최고의 용서는 복수다. 복수함으로써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중요한 존재임을 컨펌."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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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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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가족의 문제점에 대한 공감은 눈에 띄게 확산되었지만 가족 단위 총력전으로 사회의 거친 경쟁을 헤쳐나가는 양상은 더 치열해졌다. - P8

나는 이 모든 문제들을 연결하는 단어로 ‘가족’을 꼽겠다. 한국만큼 "모든 사회문제는 가족문제"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겼 - P13

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가족 총력전‘이 되다시피 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의 자율성은 무시됐으며 가족주의의 극단이라 할 마음가짐, 즉 아이를 소유물처럼 바라보고 통제하는 행동은 여전하다. 가족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배척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화됐다. 그러는 동안 국가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저만치 물러나 각 가족의 ‘각자도생‘만 부추겼다.
늘어나는 비혼과 저출산으로 가족 해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나는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형태가 급변하는 현실과 달리, 사람들의 의식과 제도에는 여전히 가족주의와 그것의 강력한 작동방식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깊게 스며들어 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바깥으로는 이를 벗어난 가족 형태를 ‘비정상‘이라 간주하며 차별하고, 안으로는 가부장적 위계가 가족을 지배한다. 정상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가족이 억압과 차별의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P14

‘정상가족‘ 안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성차별적 위계구조 못지않게 아이들을 억압하는 것은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고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드는 부모라는 권력이다. 또한 ‘정상가족‘의 바깥에서 비정상으로 간주되는 가족관계에 속한 아이들은 차별을 넘어 종종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까지 놓이기 십상이다.
아이들은 문자 그대로 ‘작은 인간‘이다. 그저 작을 뿐 성인과 다르지 않은 사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초대받아 성인과 종류만 다를 뿐인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여린 생명체다. 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가 그 사회의 수준을 드러내 보여준다면 작은 단위의 사회라 할 가족도 아이를 중심에 놓고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가족을 다룬 책들도 거의 성인의 문제들만을 다뤘을 뿐 아이를 중심에 둔 책은 찾을 수 없었다. - P15

「아이에 대한 체벌을 부모와 양육자가 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사회는 학대에 대해서도 민감성이 떨어진다. 체벌을 해도 된다고 보는 태도가 뿌연 안개처럼 사회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아동학대를 뿌리 뽑을 방법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구성원의 절반가량이 특정 연령층에 대해 특정한 조건하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수용하는 사회에서는 체벌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폭력이 더 높은 수위의 폭력으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 P27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동학대는 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고의적 폭력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우발적 체벌이 통제력을 잃고 치달은 결과라는 것이 그간 숱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 P30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정할 때, 아동을 성인과 달리 대해서는 안 된다. 폭력은 더욱 그렇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이유로 또는 타인의 행동 교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없는데 오직 아이들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용인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체벌은 엄연히 별개인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고 폭행인데도, 자녀를 소유물로 바라보는 부모의 관점에서 지속된다.
부모의 훈육적 체벌은 의도가 선하기 때문에 신체의 온전성 및 인간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상 부모 중심, 성인 중심인 해석일 뿐이다. 체벌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 - P32

르치는지에 대해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33

‘체벌 덕분에 오늘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 역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체벌금지가 사회적 의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체벌 옹호의 논리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은 『런던통신』에서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
어릴 때 회초리를 맞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아마 지금과 비슷하거나 폭력에 민감한 감수성을 장착한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기성세대는 그 시대의 제한된 문화적 환경에서 자녀를 가르쳤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체벌의 유해성을 연구해온 발달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를 자동차 안전벨트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성인의 상당수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없던 시절에 자랐다. 하지만 누구도 안전벨트가 없었던 덕분에 내가 잘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전벨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 자랐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체벌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 P41

체벌이 훈육 방법으로 효과적이지 않으며 해롭다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더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P42

‘글로벌 이니셔티브‘로부터 받은 답신의 골자는 "이전보다 상당히 진전된 것은 맞지만, 가정 내 체벌금지로 볼 수 없다"라는 거였다. ‘금지인 듯 금지 아닌 법‘이라는 말이다.
첫 번째 이유는 법안에 ‘체벌‘이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체벌에 관용적인 사회에서는 누구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폭력‘, ‘학대‘라는 표현에 체벌이 포함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설령 법원이 이 개정안을 가정 내 체벌금지로 해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체벌금지는 해석이 아니라 법률 그 자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이니셔티브‘의입장이었다. ‘체벌‘이라는 두 글자가 법안에 금지의 대상으로 명백히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두 번째 이유는 <민법> ‘친족편‘ 제915조의 ‘징계권‘ 조항 - P56

때문이다. 이 조항은 "친권자는 자녀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해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글로벌 이니셔티브‘는 부모나 양육자가 자녀에게 가하는 징계에는 일반적으로 체벌이 포함되므로 ‘가정 내 체벌금지‘를 달성하려면 이 징계권 조항을 삭제하거나 "징계를 할 때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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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춤추면서 싸우지
한채윤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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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충분히 여자로 보이지 않아서 ‘남자‘로 결론이 나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면, 탈코르셋을 하더라도 여자로 식별되어야 하는 더 지독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감출수 없는 큰 가슴이나 화장하지 않아도 희고 부드러운 피부와 같은 특징이 더 강력한 성별 구분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니 탈코르셋은 눈에 보이는 화장, 치마, 긴 머리를 벗어던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범주를 - P52

확장하고 여성에 대한 상상력을 넓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기본값을 여성도 가져올 수 있고, 인간은 두 개의 성별이 아니라 더 다양한 인간으로 살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태어나는 순간에 모두가 입을 모아 남성이라 지정했고, 정성껏 아들로 키워진 사람이 스스로 여성임을 밝히며, 자신의 의지로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는 것은 코르셋 강화가 아니라 ‘코르셋 엿먹이기‘다. 트랜스젠더는 시스젠더 지정성별 여성들 중심의 탈코르셋 운동의 방해꾼이 아니라 지원군이다. - P53

탈코르셋 운동을 하면서 트랜스젠더 혐오를 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그럼에도 트렌스젠더를 자신들이 벗어던진 코르셋을 주워서 입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그려 트랜스젠더를 조롱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그림은 누구나 코르셋을 입고 벗을 수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미 실패한 분석이다. 사회가 여성에게 입히려는 코르셋은 쉽게 입고 쉽게 벗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머리를 짧게 잘라도, 바지만 입어도, 화장하지 않아도 바로 그런 점이 신경 쓰여서 여성으로 보이도록 말하고 행동하려 애쓰게 만든다.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에게 ‘겉은 저래도 속은 천상여자‘라는 수식어를 붙이는걸 숱하게 보지 않았는가.
탈코르셋 운동을 더 대범하게 펼쳐야 한다. 성별 경계를 가지고 노는 여유를 갖고 여성임을 의심당하는 걸 즐길 필요가 있다. 수많은 시스젠더 여성들이 코르셋을 입어왔고 지금도 입고 있듯이, 트랜스젠더 여성이 코르셋을 입는다고 해서 새삼 더 강화될 것도 없다. 또 많은 시스젠더 여성이 탈코르셋의 길을 찾았듯이트랜스젠더 여성도 탈코르셋을 도모할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탈코르셋을 넘어 사회가 코르셋을 작동시키는 걸 멈추게 해야 한다.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막대기를 꽂아 멈추게 할 투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러니 손을 잡자.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탈코르셋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 P54

트럭을 버리라는 요구, 조용히 걸어가라는 요구는 모두 우리를 춤추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존재를 즐겁게 축하하는 걸 막고 싶은 거다. 길을 걷는 것조차 큰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구는데 타협할 여지는 없었다. 우리가 준비한 음악과 사람들의 흥겨운 춤과 환호와 박수도 없이 좁은 길을 우회해서 신촌을 한바퀴 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P98

나는 혐오와의 싸움은 결코 단일 승패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 - P99

각한다. 한두판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어차피, 이 싸움은 누가 더 끈질기고 진심인가의 문제다. 이날 퍼레이드 차량의 운전기사님들은 계약된 시간이 지났다고 퇴근할 수도 있었지만, 대기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은 상황에서도 불평은커녕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며 오히려 기획단을 응원해줬다. 무대 음향을 맡은 회사 직원 중에는 애인과 1,000일 기념일이어서 데이트 약속이 있었던 분, 예비 며느리와 첫인사를 나누는 약속이 있었던 분도 계셨는데 약속을 미루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셨다. 성소수자든아니든 혐오를 목도했을 때 같이 싸워야겠다고 주먹을 쥔 이런 분들이 있으셨기에 밤 10시에 퍼레이드가 가능했던 것이다.
퀴어문화축제의 정신이 무엇일까. 퀴어퍼레이드는 무엇을 위해 열리는 걸까. 2000년에 50여 명으로 시작했던 퀴어퍼레이드였지만, 단지 참가자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는 것만이 퀴어퍼레이드의 목표일 수는 없다. 우리는 퀴어문화축제를 통해 이 세상의 그 어떤 시선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광장에 모이고, 거리를 누비고, 서로의 존재를 축하하고 즐거워하는것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큰 저항인지를 표현하고 느껴왔다. 나는 이토록 선명한 방식의 투쟁을 사랑한다.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상처받고 슬프고 화도 나겠지만, 광장으로 나와 춤을 출것이다. 그것이 가장 강력한 저항,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 퀴어라고 생각하니까.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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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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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P8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카프카, 울프, 카뮈, 베유, 톨스토이, 플라스, 니체, 아렌트・・・・・・ 여기서 다룬 저자들은 다 그렇다.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소송이거나 400년 내내 분투한 뒤에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소망,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윗돌, 보상 없이 행하는 사랑, 끝없이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겨울 숲 같은 것이다. 또는 내 속에 울음이 사는 시간, 경멸을 통해서 극복되는 운명의 시간, 사회가 찍어내는 자동인형 같은 삶에 맞서는 시간이다.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 - P9

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고,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 P10

그러나 카프카는 이 중 어느 버전도 택하지 않는다. 당혹감은, 거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쾌감을 제공하기 위해 소설가가 의도한 문학적 효과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그는 삶 자체를 식초에 절여진 오이피클처럼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독자는 읽는 내내 난처함에 푹푹 절여지는 기분이 든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는데도 주인공의 죄목조차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K가 체포되었으나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점이다. K는 직 - P21

접 변론을 시도하지만 무죄 입증을 위해 크게 애쓰는 것 같지도 않다. 그가 도움을 받으러 찾아간 화가 티토렐리는 세 가지 해결책을 알려준다. 완전한 무죄방면, 표면상의 무죄방면, 판결의 무한한 연기. 이 중 K에게 가장 유리한 건 세 번째라는 조언도 덧붙인다.
사실 삶은 기나긴 소송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성별, 인종, 계급 등의 사회문화적 규정들 속에 던져진다. 사회는 그 규정들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하며 늘 우리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려고 대기 중이다. 규정 하나를 잘 지켜도 다른 규정들로 인한 소송들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누구나 사는 동안 사회적 ‘정상상태‘에 있을 것을 명하는 법 앞에서 계속 무죄를 입증하거나 유죄를 인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완전한 무죄방면은 불가능하다. - P22

400년이 흐르도록 올랜도는 사샤를 떠올리고, 여성의 육체에 더 끌리고 여성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늘 사랑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올랜도 역시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여러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소중하지만 자신이 짜 넣을 인생의 무늬들이 모두 관계로만 환원된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랜도는 고독을 사랑하는 실존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전기작가는 그가 굼뜬 것이 그가 종종 고독을 사랑하는 성향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랍 상자 따위에 걸려 넘어지는 올랜도는 당연히 고독한 장소나 광활한 전망들을 좋아했고, 자기가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혼자라고 느끼기를 좋아했다." - P34

400년 내내 시인을 꿈꿀 것 같은 이들은 시인이 되면 되고, 400년 내내 남성이 되기를 꿈꾸거나 혹은 여성이 되기를 꿈 - P37

꿀 만큼 열망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성이 되면 된다. 아무도 혐오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수술보다 힘들다는 성확정 수술도 올랜도의 7일 밤 마술처럼 신비롭고 고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다른 이가 400년 내내 원했을 법한 소망을 방해하는가? 아무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다. 올랜도에게서 여성이 되고 싶었고 또 좋은 군인이 되고 싶었던 한 청년의 맑은 얼굴이 떠오른다. - P38

세계가 불확실하고 미결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특정 대상을 위험한 것으로 지정해서 모호한 고통을 확실한 고통으로 바꿔버린다. 명확한 경계의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것만 제거하면 세계는 다시 확실하고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저 동양인은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야.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하고 이들만 사라지면 사회가 안전하고 건강해질 거라는 감정 - P52

적 방어책을 만들어내면서 타인에 대한 잔혹한 반응을 정당화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각종 학살은 대부분 불안 회피용 방어책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 심오한 통찰은 정작 통찰을 제공했던 철학자에게서는 망각된 것 같다. 하이데거는 유대인들을 기술 진보에 앞장서며 현대인의 자기소외를 만들어내는 범죄행위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기술문명이 주는 막연한 불안을 유대인이라는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함으로써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는 고향과 같은 대지를 만들기 위해 나치즘에 동조했고 유대인 학살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하이데거의 출석부에 적힌 이름의 주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선생의 입을 통해 세상에서 추방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이데거 이후의 현대철학은 이 젊은이들이 깊은 고통과 환멸에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절망적인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P53

우리는 자기의 죽음을 상상하면서도 죽음 자체가 아니라 타자들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더 고통스러워한다. 때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를 구하려고 죽음을 불사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살린 사람이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타자를 ‘위해서‘, 즉 ‘대신해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력함을 넘어서, 인간은 타자를 ‘향해서‘ 죽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나의 죽음이 내가 아닌 것이 되는 비인칭의 죽음이라면 타자의 죽음은 내게 가장 격렬하게 닥쳐오는 비인칭의 경험이다. 타자의 죽음과 마주한 순간 우리는 근원적 전복에 처하게 된다. 고통을 통과하며 지금까지의 나와 달라지고, 다른 존재로 바뀐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이 이런 비인칭성의 경험들로 붐비는 곳이라고 여겼다. - P60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읽는단 말인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종종 사는 데 지쳐 힘이 빠질 때 바닥에서 나를 다시끌어 올리는 것은 언젠가 죽을 존재라는 유한성의 자각이 아니라 오래된 죽음에 대한 기억들이다. 학생 시위가 연일 계속되던 1991년 5월의 어느 토요일,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한 학생이 시위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성균관대 불문과 3학년 김귀정. 나와 내 친구들이 있던 데서 가까운 윗골목이었다. 영정 사진으로 처음 봤던 여학생의 말간 얼굴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나는 그 불문과 여학생의 영원히 앳된 얼굴을 떠올리며, 그 애와 함께 블랑쇼를 읽고 문학의 공간을 힘내서 서성거린다. - P61

1970년 첼란이 추격 망상에 시달리다 센강에 몸을 던져 죽은 1년 뒤, 그녀는 소설 『말리나』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썼다. "내 삶은 끝났다. 압송 도중 그가 그만 강에 빠져 죽었으니까. 그가 내 삶이었으니까. 나는 그를 - P67

내 삶보다 더 사랑했다." 이것은 개인적 고백인 동시에 문학적 고백이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위로할 길 없는 슬픔을 한 사람에게서 감지하고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바로 문학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안간힘이 사라질 때 문학은 끝난다. 그래서 문학은 한없이 다정한 일이지만, 또 비명이 나올 만큼 끔찍한 일이다. "달이 터진 쓸개를 담은 항아리를 들고서 찾아온다 그러나그대의 몫을 마시어라. 쓰디쓴 밤이 내린다."(「진실한 것은」) - P68

사람을 멀리하는 외로운 사람, 괴짜라는 일부 설명과 달리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은 다정하고 심오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찾아다니는 이의 모습은 "음악을 다 연주할 때까지/ 건반을 더듬는 연주가"(「그이는 그대의 영혼을 찾아다닌다」)를 닮았다고 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녀의 여러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보고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에밀리는 친구들에게 천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고 특히 여자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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