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어서 먹선으로 지워진 넉줄의 문장들을 그녀는 기억했다. - P95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 - P102
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꽃은 양초 불꽃들이.
뜨거운 고름 같은 눈물을 닦지 않은 채 그녀는 눈을 부릅뜬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소년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 P103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P114
내가 함께 올라탄 트럭이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두차례 길을 잘못 들었고, 겨우 도착한 예비군 훈련소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총을 가져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가전에서 희생되었는지 난 알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 P115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겁니다. 그 양심의 보석을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총을 메고 창 아래 웅크려앉아 배가 고프다고 말하던 아이들, 소회의실에 남은 카스텔라와 환타를 얼른 가져와 먹어도 되느냐고 묻던 아이들이, 죽음에 대해서 뭘 알고 그런 선택을 했겠습니까? 계엄군이 십분 안에 도청에 다다를 거라는 무전이 들어왔을 때, 김진수는 자신이 맡은 창을 등지고 서서 말했습니다. 우리는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 죽을 거지만, 여기 있는 어린 학생들은 그래선 안된다. 마치 자신이 스무살이 아니라 서른이나 마흔쯤 되는 사내인 것처럼 그는 말했습니다. 항복해야 돼. 만약 모두 죽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총을 버리고 즉시 항복해. 살아남을 길을 찾아.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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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 기억하라고 나에게 말할 권한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아니요, 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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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 P117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 방금 전까지 눈을 마주치며 대화했던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피를 곁눈으로 보며, 누가 죽고 누가 남았는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나는 복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습니다. 그들이 매직으로 내 등에 무엇인가 글씨를 쓰는 것을 느꼈습니다. 극렬분자. 총기 소지. 그렇게 썼다는 것을 상무대 유치장에서 다른 사람이 알려주었습니다. - P118
김진수와 나는 여전히 식판 하나를 받아 한줌의 식사를 나눠 먹었습니다. 몇시간 전에 조사실에서 겪은 것들을 뒤로하고, 밥알 하나, 김치 한쪽을 두고 짐승처럼 싸우지 않기 위해 인내하며 묵묵히 - P118
숟가락질을 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식판을 내려놓고 소리쳤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어. 그렇게 네가 다 처먹으면 난 어쩌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그들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한 남자애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그, 그러지 마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 늘 주눅 든 듯 조용한 아이였기에 나는 놀랐습니다. 우, 우리는...... 주, 죽을 가, 각오를 했었잖아요. 김진수의 공허한 눈이 내 눈과 마주친 것은 그때였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원한 게 무엇이었는지. 우리를 굶기고 고문하면서 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너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게 얼마나 웃기는 일이었는지, 우리가 깨닫게 해주겠다.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몸, 상처가 문드러지는 몸, 굶주린 짐승 같은 몸뚱어리들이 너희들이라는 걸, 우리가 증명해주겠다. - P119
두살 많은 외사촌형을 따라 시민군에 들어갔는데, 형은 마지막 새벽 YMCA에서 죽고 혼자 잡혀왔다고 했습니다. 카, 카스테라가 제, 제, 제일 머, 먹고 싶어요. 사, 사이다하고 가, 같이. 외사촌이 죽던 이야기를 하면서도 울지 않던 그 아이는, 뭐가 먹고 싶으냐는 말에 주먹으로 눈언저리를 문지르며 대답했습니다. 눈을 문지르지 않는 그 아이의 왼 주먹, 꽉 움켜쥔 그 손가락들 사이에 약솜이 끼워져 있는 것을 나는 묵묵히 바라봤습니다. - P120
그후 우리는 이따금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서로가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고, 교통사고를 내고, 빚이 생기고, 다치거나 병을 얻고, 정 많고 서글서글한 여자를 만나 잠시 모든 고통이 끝났다고 믿고,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무너뜨려 다시 혼자가 되는 비슷한 경로를 거울 속 일그러진 얼굴처럼 지켜보는 사이 십년이 흘렀습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뼈가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 P126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 P130
다섯명의 어린 학생들이 이층에서 두 손을 들고 내려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계엄군이 대낮같이 조명탄을 밝히며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소회의실 캐비닛에 숨으라고 명령했던 네명의 고등학생과, 소파에서 김진수와 짧은 실랑이를 벌였던 중학생이었습니다. 더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들은 김진수의 말대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러 내려온 것이었습니다. 저 새끼들 봐라, 김진수의 등을 밟고 있던 장교가 여전히 흥분한 채 소리쳤습니다. 씨팔 빨갱이들, 항복이다 이거냐? 목숨은 아깝다 이거냐? 한발을 여전히 김진수의 등에 올린 채 그는 M16을 들어 조준했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학생들에게 총을 갈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봤습니다. 씨팔, 존나 영화 같지 않냐. 치열이 고른 이를 드러내며 그가 부하를 향해 말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진에서 이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건, 이렇게 가지런히 옮겨놓은 게 아닙니다. 한줄로 아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 P133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P135
어용노조를 큰 표차로 꺾고 뽑힌 노조 간부들을 구사대와 경찰들이 끌고 가던 날, 2교대를 하려고 기숙사를 나와 출근하던 여공들 수백명이 사람의 벽을 만들었다. 많아야 스물한두살, 대부분이 십대인 여자애들이었다. 제대로 된 구호도 노래도 없었다. 잡아가지마요. 잡아가면 안돼요. 소리치는 그녀들을 향해 각목을 든 구사대가 달려들었다. 헬멧과 방패로 중무장한 경찰 백여명을, 차창마다 철망이 쳐진 전경차들을 당신은 보았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무장했을까, 얼핏 생각했다. 우린 싸움을 못하고 무기도 없는데. 성희 언니가 큰 소리로 외친 것은 그때였다. 옷을 벗어. 우리 다 - P155
같이 옷을 벗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녀들은 옷을 벗었다. 잡아가지 마요, 소리치며 블라우스와 치마를 벗어 흔들었다. 그녀들이 지닌 가장 은밀한 것, 모든 사람들이 귀중하다고 말하는 것, 처녀들의 벗은 몸을 그들이 만질 수 없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브래지어 차림의 여자애들을 흙바닥에 끌고 갔다. 등허리의 맨살이 모래에 긁혀 피가 흘렀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속옷이 찢겼다. 안돼, 잡아가면 안돼. 고막이 터질 듯 쨍쨍한 울부짖음 사이로, 그들은 수십명의 노조원들을 곤봉과 각목으로 때려 닭장차에 집어넣었다. - P156
양장점 주인이 대학생 아들을 데리고 영암의 동생네로 내려가버린 화창한 봄날이었다. 낮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서름서름 거리를 걷던 당신의 눈에 그 시내버스가 들어왔다. 계엄 해제. 노동삼권 보장. 차창 아래 길게 걸어놓은 흰 현수막에 파란 매직으로 쓴 글씨가 보였다. 작업복 차림의 전남방직 여공 수십명이 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햇빛을 못 봐 데친 버섯같이 얼굴이 창백한 여자애들이 나무 막대들을 들고, 차창 밖으로 팔을 내밀어 차체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기억하는 쨍쨍한 목소리, 무슨 새나 어린 짐승들이 한꺼번에 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좋다 좋다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 P158
기에 서 있는 대학병원 건물을 당신은 올려다본다. 쨍쨍 울리는 여자애들의 노랫소리가 이 밤으로부터 아득히 먼 버스에서 울려오는 것을 듣는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단다 먼저 가신임들을 위해 다 같이 묵념합시다, 먼저 가신 임들을 따라 끝까지 싸웁시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귀하니까. - P160
성희 언니가 소모임에 신입 회원을 받자고 해서 당신이 말을 꺼내봤던 아이였다. 당신처럼 중학교를 마치기 전에 나이를 속이고 공장에 들어온, 키가 자그마하고 웃음이 송글송글하던 그애는 거절했다. 저는 조합 활동 적극적으로 못해요. 해고되면 안되거든요. 동생 학비도 보내야 하고, 언젠가 저도 공부를 할 거니까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장파열로 당신이 입원해 있었을 때였다.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다 잠깐 문병 온 동료가 말했다. ……사방에 흩어진 우리 신발을, 정미가 전부 모아서 노조 사무실에 갖다놨다. 쪼그만 게 그렇게 서럽게 울더란다. 연행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벗겨진 신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 열여섯살 난 그애는 무엇이 자신을 울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 신들을 가슴에 안고 이층 노조 사무실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빈방으로 걸어올라갔을 것이다. 그날 오후 회진을 온 말쑥한 얼굴의 의사와 레지던트와 인턴들을 당신은 유심히 올려다봤다. 그애는 그들 같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그때 생각했다. 동생을 대학 졸업시키면 이십대 중반이 될 것이고, 그때부터 중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해도…… 아니, 그애는 그때까지 공장에서 버티지도 못할 것이다. 그애는 자주 코피를 쏟았고 깊은 기침을 했다. 발육이 덜 돼 열무처럼 가는 종아리로 - P164
방직기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기둥에 기대서서 의식을 잃듯 깜박 졸았다. 어떻게 이렇게 시끄러워요? 아무 말도 안 들려요. 처음 일을 배우던 날엔 방직기 소음에 놀라, 겁에 질린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당신에게 외쳤다. - P165
썰물처럼 잠이 밀려나가며 고통의 윤곽이 뚜렷해지는 순간, 어떤 악몽보다 차가운 순간이 다시 왔다. 당신이 겪은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 - P166
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 P167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 P173
스스로가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쪽이었다. 경찰의 발에 아랫배를 밟혔을 때 노조를 떠났다. 교도소에서 나온 뒤 성희 언니를 따라 얼마간 노동운동에 몸담았지만, 성희 언니와 달리 온건한 실무만을 맡았다. 그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격이 다른 단체로 옮겨왔고, 깊이 상처 입히는 길이란 것을 알면서 다시 그녀를 찾지 않았다. 지금 당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에 담긴 휴대용 녹음기와 테이프를, 결국 월요일 아침 우체국에 들러 윤에게 반송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안다. 그해 봄과 같은 순간이 다시 닥쳐온다면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초등학교 때 피구 시합에서, 날쌔게 피하기만 하다 결국 혼자 남으면 맞서서 공을 받아안아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것처럼. 버스에서 터져나오는 여자애들의 쨍쨍한 노래에 이끌려 광장으로, 총을 든 군대가 지키는 광장으로 걸었던 것처럼. 끝까지 남겠다고 가만히 손을 들었던 마지막 밤처럼. - P175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 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아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 P207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 - P212
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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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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