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요즘은 부모 돌봄의 책임이 며느리에서 딸에게로 이전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며느리는 딸이든 여성이 전담한다는 게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함께한 추억이나 애정이 없는 시부모를 며느리가 의무적으로 돌봐야 했던 나쁜 관습이 사라져 가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2000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은숙 박사의 학위 논문을 보면 2003년 일본 내각부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고령자가 희망하는 바람직한 돌봄자 1위는 배우자, 2위는 딸, 3위는 아들이었다. 며느리는 이 순위에 없었다. 한국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보 - P216
건복지부의 「노인실태조사」 결과 독립생활이 어려운 부모(또는 배우자)를 돌보는 가족 중 큰며느리의 비율이 2011년 12.3%에서 2020년 10.7%로, 작은며느리는 3.8%에서 1.8%로 줄었다. 같은 기간 딸은 10.3%에서 18.8%로 크게 늘었다. 10여 년 전에는 주 수발자가 배우자·며느리·아들·딸 순이었는데, 2020년에는 배우자·딸·아들·며느리 순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부모 돌봄을 전담하는 비혼 딸들 특히 자녀 가운데 비혼인 딸이 있으면 그가 부모 돌봄을 전담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비혼 딸에 대해 "결혼 적령기가 지나면 개호(돌봄) 적령기가 온다"라는 속설이 나돌 정도라고 한다. 일본에서 독신인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실상을 다룬 르포 『나 홀로 부모를 떠안다』의 저자 야마무라 모토키는 이를 "초고령 사회에서 만혼화와 비혼화가 진행된 결과"라고 진단했다. 초고령자인 부모의 자녀가 결혼을 통해 자신의 가족을 꾸리지 않았을 경우 부모의 돌봄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그렇게 강요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진해서 부모 돌봄 - P217
사실 비혼이 원가족의 남아도는 노동력처럼 인식되고, 결혼한 형제자매가 떠난 자리에서 온갖 집안일과 부모 간병을 도맡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가 유구하다. 리베카 트레이스터Rebecca Traister의 『싱글 레이디스』에 따르면 19세기 미국 목사 조지 버냅은 "부부가 세상에 나가 인생의 쾌락을 즐길 때 독신 여성들은 즐거움과 무지에 빠진 구성원들이 잊어버린 집안일의 의무를 감당해야 하고, 고통과 질병과 죽음의 침상 곁을 지켜야 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저자가 이 구절 인용 끝에 적어둔 것처럼, 정말 ‘으악!‘이다. - P218
부모와 함께 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부모가 자신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점점 커진다는 걸 느낀다. 어머니가 아프지만 상대적으로 건강한 아버지는 돌봄에 무심하다. 이주원은 "나이 들면 서로 돌봐줄 사람이 필 - P221
요하니 결혼하라는 말은 철저히 남성 입장에 선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를 보면 남편이 있다고 해서 내가 아플 때 돌봐줄지 의문"이라고 했다. 그는 어머니 돌봄을 분담할 필요성을 가족에게 제기했고, 논의 끝에 다른 형제들과 어머니 돌봄을 나눠서 하고 있지만, 여전히 어머니의 1번 보호자로는 비혼인 그가 호명된다. 그는 "자기 가족을 이룬 사람은 그 가족이 더 중요하다고 인정해 주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비혼은 계속 원가족에 묶인 사람 취급을 해서 그런 것 같다"라고 했다. - P222
비혼 딸의 부모 돌봄을 연구한 한림대학교 사회복지학부 석재은 교수는 논문"에서 "가족 중 누군가는 돌봄을 맡아야 하는 상황에서 비교적 홀가분하게 개인의 선택과 결정으로 돌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비혼 딸" - P225
이라 자타에 의해 비혼 여성이 돌봄 역할을 받아들이지만,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독박 돌봄이 되고,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스러운 돌봄의 늪이 된다"라고 진단했다. 그의 연구에서 비혼 여성들은 수고를 인정받지 못하는 독박 돌봄으로 인해 상처를 받고, 돌봄과 병행할 수 없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한 과정에서 돌봄 제공자의 경제생활은 어려워지고, 그들 자신의 노후는 방치된다. 『나 홀로 부모를 떠안다』에서도 저자는 부모 돌봄을 떠맡은 솔로들의 가장 큰 문제로 고립감을 꼽았다. ‘패러사이트 싱글‘, 즉 부모에게 기생충처럼 얹혀살면서 살림을 축낸다는 부정적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것과 부모를 돌보면서 겪는 갈등이 중첩되는데, 여기에 사회생활이 단절되면서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고통까지 더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돌봄 부담으로 결국 일을 그만두게 되고, 한번 그만둔 일에는 좀처럼 복귀하기 어렵다. - P226
돌봄을 정부와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돌봄의 사회화는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돌봄의 사적인 영역이 있다. 아무리 외부의 도움을 받아도 가족의 누군가가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남는다. 몸과 정신의 상태 변화를 관찰하고 의사, 간병인과 소통하는 일에서부터 병원을 고르고 옮기고 시설을 알아보는 사무적인 일까지, 눈에 띄지는 않지만 상당한 시간을 쓰고 노력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나는 아무리 미화해도 돌봄은 진이 빠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부모 돌봄은 아이 돌봄과 달리 끝나는 기한을 알 수 없고, 생명의 성장 대신 소멸을 향해 가는 긴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라 심리적으로도 버겁다. 좋고 나쁨으로 양분되지 않는 복잡한 마음을 납덩이처럼 안고 사는 게 일상이 된다. 딸이든 아들이든 비혼이든 기혼이든 누가 되었든 그 책임을 한 사람이 혼자 짊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 P227
돌봄을 마치 여성의 일인 듯 여기는 통념은 오랜 세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요되어 온 성별 분업화의 결과다. 설령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더 돌봄 친화적이라는 기상천외한 연구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여성이 돌봄을 전담해서는 안 된다. 돌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기본 조건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당면해야 하는 일을 특정 성별이 전담하고 다른 성별은 ‘무임승차‘해 온 오래된 불공정을 바로잡아야 한다. 연세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김현미는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에서 북유럽 등에서 논의되는 1인 ‘일-돌봄 시민worker-carer 모델‘을 소개했다. 이 모델에서는 일 패러다임과 돌봄 패러다임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 - P228
다. 누구나 일하다가 1~3년간 돌봄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 기간을 보내고 돌아와도 절대 엉뚱한 데 배치하거나 해고하지 않는다. 당연히 돌봄은 남자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규정도 강화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시간과 생활을 일에 온통 헌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을 필요할 때 돌볼 수 있도록 일과 시간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개념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취약하고 서로에게 기대어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 P229
선배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기본적인 생리 현상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상태를 존엄이 훼손된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간의 존엄이 생리 현상과 위생에 좌우되는, 그렇게 하찮은 가치인가?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이미 상당히 많은 중증환자, 노인, 장애인들이 배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에서는 존엄이 다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중도 장애인이 되어가는 과정이고, 그 중도 장애 안에는 불편한 몸뿐만 아니라 불편한 머리와 마음, 그 전부 또는 일부가 존재한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치매에 대한 공포의 대안으로 안락사를 제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런 생각의 배후에는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생명과 없는 - P233
생명을 구별하는 생각이 깔려 있고" 이것이야말로 "우생 사상 그 자체"라고 비판했다. 우생 사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발병이후 ‘기-승-전-스위스‘를 들먹여 오던 것에 대해 살짝 죄책감을 느낀 적이 있다. 안락사를 원한다고 거침없이 말해온 내 마음속에는 인지증이나 다른 질병 등으로 자기 결정권을 잃어버린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보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나, 하는 자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인지능력의 상실은 자아의 상실, 곧 삶을 잃어버리는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아버지를 보니 그렇지 않았다. 영구적 뇌 손상이 확정되고 가족들도 아버지의 의식을 현실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포기할 무렵, 아버지의 두서없는 말과 행동에 깃든 희미한 질서가 눈에 띄었다. 자기 삶의 역사에 대한 일관된 서술은 잃어버렸을지언정 몸에 밴 습관과 특징들은 그대로였다. 아버지답게 끊임없이 사람들의 밥을 챙겼고, 일방적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 했다. 때로는 가족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병실 밖에 호랑이가 있다고 안절부절못하는 황당한 걱정에도 자식들에 대한 염려가 묻어났다. 내가 좋아했던 유머 감각, 참기 힘들었던 고집불통은 아버지의 고장 난 - P234
뇌가 만들어 낸 기묘한 세계 안에서도 여전했다. 책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에서 공동 저자 이지은은 오랫동안 치매 돌봄의 현장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발견을 소개하며 "자아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어떤 것들은 치매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전의 삶의 흔적들을 가진 몸의 사소한 행동들이 사실은 그 사람의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의 몸은 그저 손상된 뇌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에는 미국의 인류학자 저넬 테일러Janelle Taylor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겪으며 깨달은 통찰이 실려 있다. 딸을 알아보지 못해도 친근한 방문객으로 맞이하고 체화된 습관이 여전히 남아 있는 어머니를 대하며 테일러는 "앞뒤가 맞지 않지만 어떻게든 이어지는 어머니와의 대화 속에서 대화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의사소통‘이 아니라 서로 말을 ‘주고받는‘ 제스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누군가를 하나의 인격 혹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인지능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그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 사람과 내가 주고받는 제스처들에 대해 내가 기울이는 관심, 무의미해보이는 그 사람의 몸짓들이 의미를 갖게 하는 관계와 - P235
돌봄의 제스처"라고 말한다. 존엄은 그렇게 이어지는 삶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이전과 같은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졌지만 서로 어긋나는 문답으로라도, 끄덕이는 고갯짓이나 눈빛, 손을 잡고 살짝 힘을 주는 것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 아버지의 혼란에 맞추어 반응하고 뜬금없는 ‘아무 말‘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아버지와 함께 웃거나 슬퍼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런 상호작용이 아버지의 현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게 아닐까. - P236
그런데 호스피스병동을 미리 알아두려고 검색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버지에게는 생애 말기에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연명의료결정법은 호스피스를 이용할 수 있는 질환을 암,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 만성호흡부전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래야만 하는 별다른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한국 호스피스·완화의료학회도 법 제정 이후 6년이 지나도록 호스피스 이용 가능 질환이 이렇게 제한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학회에 따르면 그마저도 인프라가 부족해, 대상이 되는 환자 중 21.3%만이 호스피스 돌봄을 받고 있다고 한다. 2022년 6월에는 말기 환자의 의사 조력 자살을 가능하게 하자는 내용이 포함된 연명의료결정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되었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도 의사 조력 자살 또는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하지만, 호스피스에 대한 접근성이 현재와 같은 수준인 상태에서 의사 조력 자살을 도입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호 - P237
스피스의 인프라 부족과 이용 가능한 질병의 제한을 그대로 둔 채 의사 조력 자살을 도입한다면, 죽음의 부익부 빈익빈만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존엄한 죽음에 대한 접근성이 지금처럼 협소한 상태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 P238
지은숙 박사는 나이 들어 죽음을 앞둔 솔로인 나를 누가 대리해 줄 것인가의 문제는 "계급 문제"라고 말했다.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개인이 이 문제의 대책을 세울 때 경제적·사회적 계급 차이가 확연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재산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솔로는 양녀를 들이거나 도와주는 사람을 구해요. 공식적인 양녀의 지위가 있어서, 자원이 많은 솔로는 대부분 양녀를 두고 업적과 재산을 관리하게 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의탁하죠. 한국은 그런 게 활발하지 않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고 돈이 있는 솔로는 어떤 식으로든 대책 마련이 가능해요." - P240
죽음을 앞둔 삶의 마지막 시기에 누가 나를 대리하 - P241
며 뒷정리를 해줄지 하는 문제가 지 박사의 말대로 계급 문제인 건 맞지만, 나는 한국 사회의 완고한 가족 중심적 제도의 문제도 크다고 본다. 앞에서 살펴봤듯 병원에서는 환자에게 어떤 치료, 입원, 수술이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받을 대상으로 거의 늘 가족을 요구한다. 아무리 환자와 친밀하고 환자에게 중요한 사람이어도 그가 가족이 아니면 배제되기 쉽다.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는 어떤가. 몇 년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위한 필수교육을 받다가 씁쓸해졌던 대목이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가 연명 의료를 결정할 의사능력이 없을 때 환자를 대신해 의사결정을 하려면 배우자와 1촌 이내의 직계가족 전원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없으면 2촌 이내의 직계가족, 형제자매 등 혈연으로 연결된 가족만이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정해두었다. 같이 교육을 받던 이는 "가족이 없으면 죽기도 어렵구나" 하고 한탄했다. 또 현재의 후견인제도나 신탁은 인정받기 까다롭고, 권리가 제한되어 있거나 자산이 없는 사람에게는 접근 불가능해서 별 효용이 없다. 뒤에서 더 살펴보겠지만, 1인 가구가 의지할 수 있는 인생 마지막의 대리인 또는 - P242
후견인의 문제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입법과 정책적 개입이 절실한 사안이다. - P243
우에노 지즈코는 혼자 사는 노인이 혼자서 죽는 게 뭐가 나쁘냐면서 고독사 대신 "재택사"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는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에서 "자기 집에서 살면서 방문 간병, 방문 간호, 방문 의료 3종 세 - P246
트를 추가하면 충분히 혼자 살고 혼자 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의 간병보험(개호보험)은 전담 케어 매니저가 돌봄 플랜을 짜고, 요양보호사·간호사·의사의 가정 방문 서비스를 포함한 통원 서비스를 포괄 제공하고 있어서 이 제도에 기대어 자기 집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 한국에서보다 수월해 보인다. 한국에도 장기요양보험이 있지만 재택 간병에 활용하기에 턱없이 불충분하다. 요양보호사 서비스와 요양용품 대여·구매, 주간보호시설과 요양원 이용이 전부다. 전담 케어 매니저가 없어서 각각의 서비스를 교차해 이용하려면 각자 알아서 준비하는 수밖에 없다. 의사의 가정 방문 서비스도 현재 일부 시범지역을 제외하고는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현재 상황에서는 집에서 죽으면 의사의 사망 선고를 받을 수 없어서 경찰에 변사 사건 신고를 해야 한다. 어떨 때는 국내의 장기요양보험은 돌봄이 필요한 노인들을 시설에 보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보험이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재택근무‘처럼 ‘재택사‘라고 부르면 고독사의 불길하고 처연한 기운은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가능하면 살던 집에서 죽기를 바라지만, 그렇 - P247
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꼭 나에게 불행한 일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도 어쩌다 혼자 죽는 일이 일어날 수 있고,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지내도 누가 지켜보지 않을 때 혼자 죽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을 때 고립되지 않고 생의 마지막까지 인간적 돌봄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의료인류학자 송병기는 "누구는 집에서(시설에서도) 빈틈없는 돌봄을 받으며 임종하고, 다른 누구는 집에(시설에서도) 고립되어 사망한다. 생애 말기 돌봄이 환자와 돌봄 제공자의 ‘삶의 조건‘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과거 집안에서 여성이 도맡아 온 생애 말기 돌봄은, 이제 주로 여성인 간병인과 요양보호사에게 이전되고 여전히 전문성이 필요 없는 허드렛일로 간주된다. 국내의 생애 말기 돌봄 시장은 거의 조선족 중노년 여성 간병인이 떠받치고 있는 실정이다. 돌봄이 이렇게 ‘젠더화, 시장화‘되고, 장기요양제도가 있어도 여전히 미흡한 상황에서 존엄한 돌봄과 인생의 마무리는 돈이 얼마나 많은가와 어떤 간병인을 만나는가 하는 운에 좌우된다. 송병기는 이를 각자도생에 빗대어 "각자도사各自圖死"라 불렀다. 삶의 마지막까지 자기 - P248
능력껏 알아서 잘 죽을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비참을 피할 수 없는 현실. 이는 단지 1인 가구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오늘날 한국 사회의 죽음의 풍경이다. - P249
"공간비비가 마을회관 같은 역할을 하면서 가까이에 모여 살고 함께 활동하는 현재의 방식이 중년 때까지는 가능하겠죠. 그런데 우리가 더 나이 들어 공간비비를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면 어떻게 될까, 비혼으로 늙는 것이 어떤 경험일까를 고민하게 됐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노년에 가능하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면서 노인 공동체주택을 떠올렸지요. 가족 같은 개념으로 같이 살면서 병구완해 주는 걸 상상한 게 아니라, 노인이 되어서도 내가 나로서 잘 살 수 - P251
있는 물리적인 공간과 인적 네트워크를 갖고, 뭔가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기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인 거죠." - P252
그는 거주를 함께하는 공동체, 그것도 노년의 공동체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이유가 느슨한 공동체인 비비를 해오면서 알게 된 "견디는 힘"에 대한 신뢰 덕택이라고 했다.
"서로서로 견디는 힘만 있으면 다른 건 헤쳐나갈 수 있어요. 누군가를 견디지 않고 가능한,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관계가 있나요? 그런 건 없어요. 그런데 좋으니까 견디는 거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좋으니까 그만큼 어떤 부분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거죠. 누군가가 나를 감당해 주기 때문에 나도 누군가를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본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 P257
이혜옥은 "내 인생에 크게 지장이 없다면 거슬리는 것을 봐도 못 본 척 그냥 넘어가 주는 게 나이 들면서 생긴 기술"이라고 거들었다.
"거슬린다고 말해봤자 싸움밖에 안 되잖아요. 남을 어떻게 이겨먹어요. 참는 것과 포기하는 것이 무슨 차이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 나이에 혼자 살아서 뭐 하겠나, 그래도 혼자보다 셋이 나으니 지나가자, 하는 거죠. 저 친구가 나와 다르다는 거를 무심히 보면 되거든요. 그걸 무심히 보면 다툼이 안 일어나요." - P262
"우리가 이제 70이에요.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계획이에요. 직장 다닐 때 쓰는 보고서 100% 실행하는 거 없잖아요. 마찬가지죠. 이 마당도 처음엔 텃밭이었는데 지금은 잔디밭이 되어 여기서 놀고 있잖아요.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우리는 정말로 계획이 없어요. 그냥 뭐 ‘한번 해보자‘ 같은 당장의 희망 사항만 있는 거죠. 여기서 노는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것도 없고, 그냥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옛날에 시골 동네 세 할머니가 우리에게 잘해줬는데 우리도 남한테 잘하자, 뭐 그런 작은 기억만 남으면 되는 거죠. 그냥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고, 뭐든 닥치면 하고, 할 수 있으면 하고. 그뿐이에요." (심재식) - P266
‘싱글리즘 Singlism‘이라는 단어가 있다. 사회심리학자 벨라 드파울루가 처음 사용한 말인데, 사전적 정의는 "결혼이 비혼보다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비혼자에게 편견을 갖는 것"을 뜻한다. 벨라 드파울루는 결혼한 부부에게 우위를 두고 혼자 사는 사람을 낮추어 보는 싱글리즘이 단지 태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법률·제도 등 모든 구조에 스며들어 있어서 일상에서 차별을 겪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싱글들도 피해 갈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그가 열거한 구조적 싱글리즘의 리스트는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이를테면 결혼한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고 그들만 보호하는 모든 법률은 싱글리즘에 해당한다. 결혼한 사람들만 보험, 통신 서비스, 패키지 여행, 멤버십, 대여 서비스, 문화예술시설 등에서 할인을 받고 싱글은 정가를 내야 한다면? 싱글리즘이다. 결혼한 사람만 배우자나 가족을 돌보기 위해 일터에서 휴가를 쓸 수 있고, 싱글은 가까운 친구나 형제자매를 돌보기 위한 휴가를 쓸 수 없다면? 싱글리즘이다. - P271
병원에서 싱글에게 보호자로서 법적 가족의 동행을 요구한다면? 건강보험이 커플보다 싱글에게 더 비싸다면? 싱글리즘이다. 전·월세를 구할 때 집주인이 결혼한 사람만 선호한다면? 싱글이 살 만한 충분한 주거공간이 없다면? 싱글리즘이다. 대학 강의나 교과서가 결혼이나 가족을 다루면서 싱글은 다루지 않는다면? 학자들이 결혼과 전통적 가족, 낭만적 애정 관계는 연구하면서 싱글의 우정이나 싱글이 선택한 가족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싱글리즘이다. 벨라 드파울루는 "이 모든 구조화된 싱글리즘은 싱글의 삶이 커플의 삶보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메시지를 주입한다"라고 지적했다. "싱글은 커플과 같은 정도로 법과 제도에 의해 보호받고 시장에서 대우받을 가치가 없다는 메시지,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법률로 보호되는 배우자만큼 중요하지 않기에 돌보고 애도할 시간을 허락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 커플들이 누리는 할인이나 혜택 없이 싱글은 모든 비용을 다 내야 마땅하다는 메시지" 말이다. 오랜 세월 사회구조에 스며들어 관행이 되어버린 구조적 싱글리즘은 한국 사회에서도 혼자 사는 사람이 - P272
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느껴봤을 일들이다. 구조적 싱글리즘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사회적 표준이고, 인간의 행복은 이 표준 경로를 통해서만 구현된다는 오래되고 낡은 믿음을 간신히 떠받치고 있는 골조다. 내가 만난 에이징 솔로들도 여러 유형의 싱글리즘을 이야기했는데, 가장 많이 거론한 것은 앞에서 다뤘던 주거 문제, 그리고 병원에서의 보호자와 돌봄 문제였다. - P273
1인 가구와 다인 가구의 세율 격차보다 되레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인 가구의 각종 공제 항목이 법적 가족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함께 살면서 혈연가족보다 더 긴밀하게 서로를 부양하며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비혼 동거 가구나 생활공동체는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지금은 소득세의 인 - P280
적공제 대상도 본인과 배우자, 직계존비속 등에 한정되어 있고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도 가입자의 배우자, 직계존비속 등 법적 가족으로 제한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주택청약에서 부양가족 수 가점을 계산할 때도 같은 세대별 주민등록표에 등재된 직계존비속만을 대상으로 한다.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김순남의 책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 따르면 호주의 경우 국세청이 세금공제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경제적인 상호협조 관계의 범위가 넓어서 실질적 돌봄의 관계망도 포함된다고 한다. 즉, "배우자를 정의하는 데도 제도적 결혼 여부를 따지지 않고, 자녀의 경우에도 생물학적인 자녀, 입양한 자녀, 의붓자녀, 실질적으로 자녀 관계인 대상까지 폭넓게 포함"하며 "실제 삶에서의 다양한 상호의존 관계망이 주거 비용이나 생활비 지출 증빙 등을 통해 제도적 관계망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 P281
사실 내가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 주로 떠올리는 요소들은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며 삶의 지향은 어떠한지 같은 조각들이다. 혼자 사는 문제를 나 자신의 정체성에 포함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떤 특질에 대한 자의식이 약한 상태로 살아오다가도 다른 사람들과 제도가 나를 그 특질로 정의하면, 내가 원치 않아도 그 특질이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큰 조각이 되어버리는 듯하다. 내가 여성이라는 점이 그러했고, 혼자 사는 사람이라는 점이 그 뒤를 이었다. - P284
현행법에는 유언과 관계없이 유족이 일정한 유산을 상속할 권리를 정해둔 유류분제도가 있다. 부모를 여의고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솔로가 함께 살던 친구에게 재산을 주겠다고 유언을 남겨도 형제자매가 권리를 주장하면 유류분제도에 따라 3분의 1을 줘야 한다. 정부는 이 조항이 1인 가구가 늘고 형제자매가 각자 독립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보고, 유류분 조항에서 형제자매를 삭제하는 민법개정안을 2022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민법개정안에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도 친양자를 입양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포함되었다. 이 글을 쓰는 2023년 1월 현재 해당 개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다. 이 개정안이 확정되리라 장담할 수 없지만, 변화의 필요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루어진 셈이다. - P289
박인주의 말마따나 장사葬事 등에 관한 법률은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순서를 정해두었는데, 배우자·자녀·부모·형제자매 등 법적 가족에 집중되어 있어서 혈연관계와 법적 관계를 서류로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장례를 치를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무연고 장례를 지원해 온 사단법인 ‘나눔과나눔‘ 등이 꾸준히 노력해 온 결과 보건복지부는 2020년 지침을 수정했다. 사실혼 관계, 친구, 지역공동체 등 삶의 동반자였던 사람도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한 것이다. 2022년에는 제삼자가 가족 대신 장례를 치르려 할 때 지방자치단체의 심의를 거치게 했던 규정도 삭제했다. 이제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조카·며느리 같은 친족, 장기간 혹은 지속적으로 동거·부양·돌봄 관계에 있는 사람도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선된 방침이 법 개정이 아니라 행정부 지침 변경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 - P290
앞서 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면서 연명의료에 대한 환자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가족관계증명서에 나오는 가족 전원의 동의에 의해서만 연명의료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규정을 알게 된 경험을 소개했다. 국내법은 혈족만이 그런 권리를 갖는게 마땅하다고 정해놓았지만, 미국·영국·일본 등의 경우 환자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대리인의 범위를 혈연관계에 놓인 법적 가족으로만 국한하지 않는다. 김순남은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서 미국 ‘연명의 - P293
료결정법‘에 대한 연구를 소개했다. 책에 따르면 미국 연명의료결정법에서 대리인은 법적 혈연가족이 아니어도 친구, 가까운 친척, 존경하는 지인 등 환자가 지정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서면 신청으로 대리인 변경도 가능하다. 대리인은 환자의 의료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담당 의사와 의료에 관한 사항을 의논할 수 있으며, 검사·시술·치료 등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뉴욕주의 대리인 지정 서식에는 대리인에게 위임하고 싶지 않은 결정의 상세 내용, 결정을 위임하는 기간 또는 요건, 대리인이 결정할 때 따라주기를 원하는 사항을 명시할 수있다고 한다. - P294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위해 일하는 가족구성권연구소는 생활동반자법 제정뿐 아니라 ‘내가 지정한 1인‘이 가족으로 인정되도록 하는 제도적 변화를 촉구해 왔다. 생활동반자와 동성결혼 등 법적으로 관계를 등록하는 제도가 필요한 사람들만큼이나 혼자서 살아가고 있고 계속 그렇게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순남의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 따르면 ‘내가 지정한 1인‘이란 의료결정권과 연명의료결정권은 물론이고 가족돌봄휴가를 신청할 수 있는 권리, 강제입원 등의 상황에서 법원에 구제를 신청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규정된 해외재난 시 안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권리 등에서 법적 가족이나 동거인뿐 아니라 ‘내가 지정한 1인‘을 포함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 P299
통계청의 「2021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가족이 아닌 친구나 애인과 함께 사는 비非친족 가구원이 2021년 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을 돌파했다. 통계청은 일반 가구 가운데 남남으로 구성된 5인 이하가구를 비친족 가구로 정의하는데, 2016년까지만 해도 26만여 가구에 그쳤던 비친족 가구가 5년 만인 2021년에는 2배 가까이 늘어 47만여 가구가 되었다. 결혼하지 않았고 법적인 가족을 구성하지 않았어도 생계와 돌봄을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가장 긴밀한 사이인 사람들이 이미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제도는 여전히 법적 가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현실에 뒤처져 있다. 병원에 급하게 가야 할 일이 생기거나 주거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해도 함께 사는 이가 혈연가족이 아니면 무연고자가 되고, 서로의 권리를 보장할 수 없는 남이 된다. 소득세의 인적공제도 법적 가족에게만 적용되고, 주택 공급도 부부와 법적 가족을 상정해 이루어진다. 가족에 대한 현행법 규정을 살펴보면 협소하기 짝이 없다. 민법 제779조는 가족을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 또는 (생계를 같이 하는 경우) 직계혈족의 배우자, - P302
배우자의 직계혈족 및 배우자의 형제자매"로 정의한다. 건강가정기본법도 가족을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정의한다. 두 법 모두 가족을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2세대의 핵가족으로 협소하게 바라보는데, 현실에서 이런 가족은 전체 가구의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그 나머지는 현행법의 기준을 엄격히 들이대면 가족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예컨대 위탁 가정에서 위탁 부모와 아이가 서로를 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도 민법에 따르면 가족이 아니다. 부양이나 상속처럼 가족 관계의 다른 양상을 정의하는 조문들이 민법 각각의 조항에 다 있어서 사실 이 가족 조항은 없어도 무방하다. 되레 가족을 협소하게 정의해 놓은 이 조항은 정상가족의 틀을 벗어난 다양한 가족에 대한 제도적 차별의 토대가 된다. 가족구성권연구소가 조사한 결과 1,400여 개의 한국현행법 조항 중 ‘가족‘을 언급하는 조항 240개가 민법 제779조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 조항을 중심으로 주거·의료·돌봄·연금·상속·재난 시 보호 등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보호받을 수 있는지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 P303
생활동반자법은 일부 기독교계의 ‘동성혼 합법화‘ 반대 주장에 밀려 법안 발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나는 에이징 솔로를 인터뷰하면서 성적 지향을 묻지 않았는데,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밝힌 에이징 솔로도 생활동반자법이 있으면 이용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일부 기독교계의 주장과 달리 이 법이 성 소수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 소수자든 아니든, 성애적 관계에 기반하든 아니든 함께 생활하면서 서로 돌보는 관계라면 생활동반자가 될 수 있다. 생활동반자법을 소개한 책 『외롭지 않을 권리』의 저자 황두영은 보수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가족 해체‘ 운운하면서 반대하는데 생활동반자법은 "보수적인 법"이라고 썼다. "기존의 경직된 가족제도를 떠난 사람들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법"이고 "가족을 이루라고 장려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성애적 관계에 기반하지 않더라도 생활·돌봄을 함께하는 관계를 이미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해외 사례들이 있다. - P306
해외 사례들을 살펴보다가 문득, 현재의 결혼은 전적으로 배타적인 성행위를 한다고 간주하는 합의에 기반한 제도인데, 성행위보다는 사람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돌봄이 가족을 이루는 결합의 요건으로 더합리적인 기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산이 제 - P307
도의 틀 안팎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든 상관없이 서로 돌보는 사이라면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는 개념이 가족의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더 타당하지 않은가. 생활동반자처럼 2인 관계뿐만 아니라 다수가 돌봄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경우도 제도적 지원을 받을수 있어야 한다. - P308
"생활동반자법뿐만 아니라 생활공동체 지원법까지 포함해서 새로운 가족 구성에 대한 논의가 좀 더 활발하게 이뤄져야 해요. 생활동반자는 결혼과 유사하니까 입법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것도 안 되는 걸 보면, 그보다 확장된 생활공동체가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건 더 어려울 것 같기는 해요. 그렇지만 돌봄의 측면에서 본다면 1명이 다른 1명을 오롯이 책임지는 것보다 생활공동체에서 여럿이 함께 책임질 수 있다면 돌봄이 더 가벼워지지 않겠어요? 가족 같은 정도의 결속력과 의무를 가져야만 서로의 보호자가 될 권리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가족의 방임도 꽤 많고 법적으로 복잡해서 그렇지 가족이 깨지기도 하잖아요. 그보다는 오히려 개인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제도가 생긴다면 돌봄의 관계가 훨씬 더 유연하고 개인이 짊어지는 짐이나 죄책감의 무게도 덜하지 않을까요?" - P309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중요도는 왜 이렇게 줄어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까. 가족의 어깨 위에 놓인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막중할수록 결혼과 출산의 비율이 더 떨어질 것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협소하게 정의된 가족의 중요도가 커질수록, 가족의 역할이 확대될수록 가족을 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도 꺾이기 마련이다. 원가족의 풍부한 지원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가족이 사회보장과 복지의 기본 단위인 한, 이미 부유한 가족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가족은 점점 더 가난해질 것이다. 그렇게 가족 계급사회가 가속화할수록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해질 것이다. 가족이 짊어진 짐을 덜어내고 사회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사회복지학자 김진석은 - P311
책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에서 현재의 ‘국가-가족-개인‘ 복지국가에서 중간의 ‘가족‘을 뺀 ‘국가-개인‘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국가-가족-개인 모델은 가족-개인 사이에 부양과 돌봄이라는 가족 기능을 전제하고, 그 기능이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에만 국가가 보충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반면, 국가-개인 모델은 개인의 사회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개입이 가족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개인에게 직접 작용하는 방식이다. 김진석은 "가족이 있어야만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구현할 기회와 수단을 보장받는다면 이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개인의 실현이라 볼 수 없다"라고 짚었다. - P312
각자 독특한 에이징 솔로와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 때마다 나는 종종 ‘홀로이면서 함께Alone Together‘라는 말을 떠올렸다. 내가 만난 에이징 솔로는 모두 자신의 가족을 구성하지 않고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상태로 혼자 나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삶이 혼자인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홀로이면서 함께‘인 조건을 만들었다. 느슨하게 연결된 네트워크를 만 - P315
들기도 하고, 친구랑 같이 살거나 공동체를 구성하기도 하고, 원가족이나 친밀한 파트너, 때로는 낯선 사람들과 함께 내가 나로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물리적 공간과 연결망을 만들었다. 혼자 나이 들면 비참해지고 외로워진다는 예언은 혼자 사는 사람의 증가를 막으려는 사회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내가 만난 에이징 솔로에게서 그런 면모는 보지 못했다. 고백하자면 ‘홀로이면서 함께‘는 내가 오래 붙들고 있는 인생의 화두다. 온전히 ‘홀로‘도 아니고 늘 ‘함께‘도 아닌, ‘홀로이면서 함께‘하기. 단독자로서의 영역을 지키면서 연결의 감각을 잃지 않기. 이는 삶을 꾸리고 관계를 맺을 때 늘 나의 태도를 결정하는 방향키와도 같다. -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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