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코 엄마의 외로움을 외면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보상해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엄마를 볼 때면 그래서 무력해진다. 나는 엄마의 환상(또는 망상)을 공유할 수 없는 ‘딸‘이기에 기꺼이 그녀를 방치하면서 그녀의 이해자인 척한다. 엄마는 이런 집에 사는 것이 너무나 부끄럽고 지겹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치욕스럽다고 말했다. 최근에 사귄 친구가 자기와 ‘급‘이 안 맞는다고 느끼는 것 같아 더 다가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것은 엄마의 오랜 열등감이고 자존심이다. 내가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나아질 거라고,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았다. - P16
일단 몸을 일으켜서 씻어야 한다고 생각은 했다. 그런 장면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고 결국 포기했다. 나는 씻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지 알고 있고 그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된 성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삶이 천천히 망가진다. 망가진다는 것을 안다. 처음에는 이렇게 머리를 감지 못하거나 옷을 입지 못하는 일로 시작해서 살아가는 것에 흥미를 잃게 된다. 나는 분명히 내가 매듭짓지 못하고 벌여놓기만 한 일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한 일들에 대해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그것들을 모두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미루는 것이 아니라 방치하게 되면서 나는 나를 주워담는 것 역시 포기한다. 도처에 내가 굴러다니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언젠가는 주워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 P17
무엇도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처분만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로 끔찍스럽다. 나는 내가 정말로는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의 피로하고 아픈 얼굴을 본다면 결국 눈물을 쏟아낼 것이라는 사실을 참아낼 수 없다. 나는 그를 저주할 권리가 있다. 그를 죽일 권리가 있다. 그를 고문하고, 그의 손목을 자르고, 그의 눈알을 찌르고, 그를 거세하고, 그를 수십 번 난도질할 수 있는, 적어도 그런 음모를 꾸밀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죽어가는 소식을 들으면서 모든 것이 다 내 탓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내가 그를 죽으라고 사주한 탓이라 느낀다. 나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비극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 느낀다. 속죄하기. 수치 없이 살기. 그런데 어떻게 가능하지? 아빠 없이 어 - P34
떻게 내가 수치 없이 살지? 아니 왜 그렇게 살아야 하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 P35
일상적인 곤궁에 대해 쓰는 일.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쓴다. - P36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를 하루에 열 번 정도 말한다. 그런데 물론 그러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아니고 싶지 않다. - P37
<나르코스>라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파블로가 어릴 때 우린 찢어지게 가난했어. 그애가 어느 날 신발이 낡았다고 학교에서 놀림받고 왔지. 나는 밤중에 신발가게에서 신발을 하나 훔쳤다. 그리고 그애는 다음날 새 신을 당당하게 신고 갔어. 나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존엄이란 그런 거야. 이런 말들이 나를 지탱해준다. 가난이 나를 추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나를 추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게 신발을 훔치자는 구호로 들린다면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음.) 슈퍼에서 물건을 사다가 내가 내 가난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동정을 사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했고 더이상 가난에 대해 쓰지 말자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말을 멈출 수 있을까? 이게 내 당당함이 아니라면, 비참함 속에서 굴러다니는 말들을 주워 삼키는 게 내존엄이 아니라면, 뭐가 내 말이 될 수가 있을까? - P76
죽은 자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느낀다. 죽은 자들의 말과 글 속에서 견딜 만한 우정을 찾고 또 그 속에 몸을 숨긴다. - P83
(배운 여자들에게 경고. 아빠를 이미 죽였다고 생각할 때조차 그는 충분히 죽지 않았습니다.) - P120
꿈은 비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반물질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어서 어딘가에 기록이라도 할라치면 그 의도를 눈치채곤 비웃듯이 녹아서 사라진다. 여기 적히느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버리겠다는 태도다. 만약 꿈이 스스로 뭔가를 결정하고 있다면 말이다. 꿈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때로는 분하고 이가 갈린다. 이런 끔찍한 일을 자고 있는 동안에 당했는데 그 내용을 기억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남아 있는 것은 그저 ‘당했다‘는 감각뿐이다. 꿈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많은 시간을 충격받은 채로 지냈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했다고 해도 여전히 짜증은 난다. 성가시다. 나는 꿈을 꾸라고 내게 말한 적이 없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우리는 책임질 수 있다. 그러나 밤에 일어난 일. 우리가 잠들었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는 그저 수치스러워하며 얼굴을 감싸쥔 채 깨어나야만 한다. 십계명에서는 ‘남의 아내를 원하지 말라고한다. 하지만 어떻게 원한 것만으로 죄가 될까? 저지르지도 - P122
않은 죄에 대해 우리는 속죄해야 할까? 이야기가 너무 멀리 왔다. 중요한 것은 어떤 꿈은 정말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인정하건 말건 꿈은 내게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꿈의 기록을 필요로 하는데, (물론 지금처럼 잘되지는 않는다. 꿈이 반항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꿈이 번역을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모든 꿈의 완전한 기록을 원할까? 그런 장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걸 사용하게 될까? 실제로 그런 장치가 있다고 한다면 처음에는 혐오스럽고 이후에는 실망스럽다가 연민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많은 현대의 매체들이 그러한 장치를 꿈꿨으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 P123
요즘 말이랑 울음이 동시에 경쟁하듯이 쏟아져나온다. - P145
근데 알리기 위해 말해야 할까? 알리다니 무엇을? 입을 여는 순간 분리된다. 말하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들이 입 밖으로 굴러떨어진다. 그걸 보고 있다. - P146
나는 재가 될 때까지 타는 것을 지켜보거나 그게 아니면 시작도 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에 가까운 것 같다. 정신과 선생님은 그 중간을 자꾸 찾으라고 하는데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아는데 그냥 못하는 거다. - P216
반성하는 게 너무 좋아서 반성 그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들・・・ 인신공격이 대단한 인권운동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 지가 말하는 건 당사자성이고 남이 말하는 건 인권침해(?)인 사람들・・・ 인권 인권 외치면 인권이 자동으로 생기는 줄 아는 사람들・・・ 자기집 개 이름도 인권으로 지을 사람들・・・ 어제까지는 남 욕하는 농담에 웃다가 오늘은 갑자기 정신 차린 사람들・・・ 지가 그렇게 하는 게 대단한 사회개혁인 줄 아는 사람들・・・ 반성은 집에 가서 혼자 하고 일기장에 쓰면 되는데 굳이 동네방네 죄송하다고 떠드는 사람들・・・ 전자렌지에 햇반 데우는 시간보다 빨리 반성하고 빨리 죄송한 사람들・・・ 하여튼 어떻게든 인간을 분류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사람들・・・ 남들이랑 자기랑 똑같지 않으면 세상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사람들・・・ 트윗 몇 개로 인권이 나아졌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사람들・・・ - P257
어젯밤에는 내내 아빠 생각만 했다. 아빠처럼 죽으면 어떡하지? (나는 장례식을 떠올리고 있다.) 아니면 내가 아빠처럼 - P259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빠는 친구 하나 없이 죽었다.) 나는 아빠가 아니었다고 변명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다. 변명이 끝나지를 않는다. - P260
레즈비언 부럽다고 한 그 부분이 문젠 거죠. 레즈비언이 어떻게 부러울 수가 있겠어요? 물론 레즈비언이 부럽다고 한 맥락은 이해가 가지만요(남자랑 권력 싸움도 안 해도 되고 내가 여자라 이런가? 가 남자라 이런가? 이런 생각 안 해도 되고 더치페이 하면 되고 기타 등등). 근데 레즈비언들 입장에서는 어떻겠어요, 자기들은 결혼도 못하고 어디 나가서 레즈비언이라고 하면 과잉 성애화된 이미지를 부여받고 스리섬 하자는 소리 듣고 너 여자 역할이니 남자 역할이니 그런 말 듣고 너무 피곤하겠죠? 그런데 누가 레즈비언이라 부럽다, 이런 말을 하면 미친놈 아닌가 생각이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겠죠. 그치만 전 다른 이유로 레즈비언이 부럽다는 말이 존나 이해가 안 갔는데요. 왜냐면 그 트윗을 쓴 사람도 여자들이랑 조금만 있어보면 알겠지만 도대체 이 미친 여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이 여자들은 다 미쳤는데 어떻게 이 여자들과 연 - P262
애를 한다는 것인지? 제가 레즈비언 연애를 하고 레즈비언 관계를 맺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건 사회의 시선이 아니라 그냥 여자들이 미쳤다는 사실 자체였거든요. 여기 적을 수도 없는 별의별 미치광이 같은 여자들이 다 있었고 그녀들도 절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런 것들은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게 뭐였을까? 그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건 그냥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의 증상이었을까? 그 여자는 왜 미쳤을까? 왜나였을까? 지금은 잘살고 있을까? 그 여자는 여자라서 미친 걸까 그냥 미친 걸까? 이게 다 우리가 여자라서 벌어지는 일인걸까? 왜 나는 여자들을 만나나?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죠. 결국에는 나는 동성애자조차 못 되고 그냥 미친 여자에 중독됐다는 결론이 나와요. 이걸 부러워한다는 거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가요. 그냥 하는 말이었겠지만 이미 미친 여자 중독에 빠지고 난 뒤에는 답도 없거든요. 그냥 미친 여자들이 하자는 대로 흘러가는 겁니다. 제가 너무 레즈비언들을 미쳤다고만 단정하고 있나요? 이것이 일종의 중독 증상이 아니라면 어떻게 님들이 동성만을 연인으로 고집하는 걸 설명할 수 있죠? 그냥 님들은 미친 겁니다・・・ 그리고 여자를 대상화하는 것도 몹시 피곤한 일이죠. 이젠 저는 이빨 다 빠져서 그렇게까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어쨌든 어떤 여자를 보고 일초 만에 자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은 아니죠. 어떻게 해도 정상은 아니죠. 그리고 그걸 고 - P263
치려고 해도 고칠 수가 없죠. 그걸 고친다면 당신은 더이상 동성애자가 아니게 되니까요・・・ - P264
오늘도 면접 가서 원래 뭐하시는 분인가요? 하길래 웃으면서 아 네 저 글써요 이랬는데 내면에서 엄청나게 죽어갔음 글쓰는 게 뭐 직업입니까? 그거는 고급 취미겠죠 면접 가서 누워 있다고 말할 셈이에요? 진심이야? 물론 누워 있죠 그것도 글쓰기의 일부예요 - P268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건 유년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또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억들이다. 대부분 가족과 관련되어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어쩌면 평생을 그 기억과 싸워야 할 것이다. 때때로 나는 그 기억을 잊지 않음으로서, 마치 부담스러운 식사를 먹어치워 소화해내듯 그들을 극복한다는 생각도 든다. - P282
이건 다 계절 탓이다. 추워지면 혼자일 땐 더욱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고 여럿일 땐 더욱 여럿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 둘 사이의 온도 차이가 너무 커서 나는 자주 누굴 사랑하거나 그리워하거나 한다. 입김이 떠오르고 풍경은 창백하다. 어떤 뒷모습은 쓸쓸하고 어떤 뒷모습은 싸늘하다. 혼자서 사 - P283
랑하거나 사랑받았던 기억. 쏟아지는 화살처럼 박히던 말들, 목도리 사이로 비져나오는 폭소들, 그러다 돌처럼 굳어버린 입술들. 모두 겨울에 일어났다. 나는 흉터처럼 겨울을 기억한다. - P284
고 사소한 결심들이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떤 시절의 사진들은 너무 반짝거려서 쳐다보는 것조차 죄악처럼 느껴졌다. 나는 망가지고 있고 부패하고 있다. 나는 내 친구들이 일찌감치 청산한 이십대 시절의 악습들을 끌어안고 익사하고 있다. 모두에게서 버려졌다고 느낀다. 혹은 내가 모두를 버렸다고 느낀다. 나는 내게서 풍기는 악취를 숨길 수 없어서 가장 어둡고 축축하고 낮은 곳에서만 기어다닌다. 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장면들이 보여요. 나는 어제 죽은 사람들이 머물다 간 장소에 있어요. 언젠가는 산채로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멋진 무용담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본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295
최고의 복수는 용서다 vs 최고의 용서는 복수다 "최고의 복수는 용서다. 가해한 대상을 잊어버리고 승천시킴으로써 복수." "최고의 복수는 용서다. 용서함으로써 그 사람의 세속적인 치졸함을 감싼다. 최고의 디그레이딩." "최고의 용서는 복수다. 가해자의 가해 행위보다 십퍼센트 정도 증량된 가해를 가해자에게 되돌려줌으로써 동시에 가해자가 됨 =용서." "최고의 용서는 복수다. 복수함으로써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중요한 존재임을 컨펌."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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