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개정증보판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상가족의 문제점에 대한 공감은 눈에 띄게 확산되었지만 가족 단위 총력전으로 사회의 거친 경쟁을 헤쳐나가는 양상은 더 치열해졌다. - P8

나는 이 모든 문제들을 연결하는 단어로 ‘가족’을 꼽겠다. 한국만큼 "모든 사회문제는 가족문제"라는 말이 잘 들어맞는 곳도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겼 - P13

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가족 총력전‘이 되다시피 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의 자율성은 무시됐으며 가족주의의 극단이라 할 마음가짐, 즉 아이를 소유물처럼 바라보고 통제하는 행동은 여전하다. 가족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배척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화됐다. 그러는 동안 국가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저만치 물러나 각 가족의 ‘각자도생‘만 부추겼다.
늘어나는 비혼과 저출산으로 가족 해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나는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형태가 급변하는 현실과 달리, 사람들의 의식과 제도에는 여전히 가족주의와 그것의 강력한 작동방식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깊게 스며들어 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바깥으로는 이를 벗어난 가족 형태를 ‘비정상‘이라 간주하며 차별하고, 안으로는 가부장적 위계가 가족을 지배한다. 정상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가족이 억압과 차별의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P14

‘정상가족‘ 안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성차별적 위계구조 못지않게 아이들을 억압하는 것은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고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드는 부모라는 권력이다. 또한 ‘정상가족‘의 바깥에서 비정상으로 간주되는 가족관계에 속한 아이들은 차별을 넘어 종종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까지 놓이기 십상이다.
아이들은 문자 그대로 ‘작은 인간‘이다. 그저 작을 뿐 성인과 다르지 않은 사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초대받아 성인과 종류만 다를 뿐인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여린 생명체다. 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가 그 사회의 수준을 드러내 보여준다면 작은 단위의 사회라 할 가족도 아이를 중심에 놓고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가족을 다룬 책들도 거의 성인의 문제들만을 다뤘을 뿐 아이를 중심에 둔 책은 찾을 수 없었다. - P15

「아이에 대한 체벌을 부모와 양육자가 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사회는 학대에 대해서도 민감성이 떨어진다. 체벌을 해도 된다고 보는 태도가 뿌연 안개처럼 사회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아동학대를 뿌리 뽑을 방법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구성원의 절반가량이 특정 연령층에 대해 특정한 조건하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수용하는 사회에서는 체벌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폭력이 더 높은 수위의 폭력으로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 P27

그러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아동학대는 극히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고의적 폭력이라기보다 보통 사람들의 우발적 체벌이 통제력을 잃고 치달은 결과라는 것이 그간 숱한 분석과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 P30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정할 때, 아동을 성인과 달리 대해서는 안 된다. 폭력은 더욱 그렇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이유로 또는 타인의 행동 교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없는데 오직 아이들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용인되는 유일한 대상이다. 체벌은 엄연히 별개인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고 폭행인데도, 자녀를 소유물로 바라보는 부모의 관점에서 지속된다.
부모의 훈육적 체벌은 의도가 선하기 때문에 신체의 온전성 및 인간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상 부모 중심, 성인 중심인 해석일 뿐이다. 체벌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 - P32

르치는지에 대해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 P33

‘체벌 덕분에 오늘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 역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체벌금지가 사회적 의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체벌 옹호의 논리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은 『런던통신』에서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
어릴 때 회초리를 맞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아마 지금과 비슷하거나 폭력에 민감한 감수성을 장착한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기성세대는 그 시대의 제한된 문화적 환경에서 자녀를 가르쳤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체벌의 유해성을 연구해온 발달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를 자동차 안전벨트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성인의 상당수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없던 시절에 자랐다. 하지만 누구도 안전벨트가 없었던 덕분에 내가 잘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전벨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 자랐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체벌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 P41

체벌이 훈육 방법으로 효과적이지 않으며 해롭다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더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 P42

‘글로벌 이니셔티브‘로부터 받은 답신의 골자는 "이전보다 상당히 진전된 것은 맞지만, 가정 내 체벌금지로 볼 수 없다"라는 거였다. ‘금지인 듯 금지 아닌 법‘이라는 말이다.
첫 번째 이유는 법안에 ‘체벌‘이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체벌에 관용적인 사회에서는 누구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폭력‘, ‘학대‘라는 표현에 체벌이 포함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설령 법원이 이 개정안을 가정 내 체벌금지로 해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체벌금지는 해석이 아니라 법률 그 자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이니셔티브‘의입장이었다. ‘체벌‘이라는 두 글자가 법안에 금지의 대상으로 명백히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두 번째 이유는 <민법> ‘친족편‘ 제915조의 ‘징계권‘ 조항 - P56

때문이다. 이 조항은 "친권자는 자녀를 보호 또는 교양하기 위해 필요한 징계를 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다. ‘글로벌 이니셔티브‘는 부모나 양육자가 자녀에게 가하는 징계에는 일반적으로 체벌이 포함되므로 ‘가정 내 체벌금지‘를 달성하려면 이 징계권 조항을 삭제하거나 "징계를 할 때 체벌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