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대부분 뻔한 구도에서 장애인 당사자와 비장애인 조력자를 구분한다. 노들처럼 그것을 설명하기 좋은 곳도 없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강력한 자장 안으로 빨려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차별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차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그 경계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모두는 저항의 주체일 뿐이다. ‘노들과 같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노들을 그저 차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와 같은 구호는 수십 년 차별받아온 장애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이들은 그저 해가 지고 달이 지듯 버스를 풍경의 일부로 - P11
여길 뿐 자신이 ‘탈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싸우려는 자, 저항하는 인간만이 ‘발명‘해낼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까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노들이 궁금하여 찾아온 사람들은 약속한 듯 물었다. ‘무엇이 가장 보람되는가‘, 혹은 ‘이 공동체의 비결은 무엇인가‘로 요약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어떤 날은 ‘학생들이 한글을 깨우칠 때‘라고 대답하고 어떤 날은 ‘교사회의‘, 어떤 날은 ‘평등하기 위해 노력하는 관계‘라고 대답했지만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답들은 어딘가 조금 부족했던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틀린 답에 가깝다. 사람들의 진부한 질문이 싫었으면서도 나 또한 이 작업을 하는 내내 그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의도한 것이 아닌데, 실은 의도했던 것을 정확히 실패했기 때문인데, 나는 ‘노들야학을 하는 보람은 이거다‘라고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 ‘노들의 비결은 이거다‘라고 못박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다시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심술궂게도 ‘수많은 하루들‘이라고 대답하겠다. - P12
‘오늘 일어난 일: 아무런 특별한 별일이 없었다. 웃긴 했는데 무슨일로 웃었는지 모르겠다.‘
절묘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노들야학을 한다‘는 것이 깜빡거리는 형광등을 갈고 사라진 걸레를 찾아 돌아다니는 일처럼 사소할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웃을 일이 더많았으니 충분히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비록 정든 이들이 자주 떠나갔고 때로는 함께 공부하던 이가 사라지는 참담한 일도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날, 아무런 특별한 별일이 없었으므로 견딜 만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노들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눈에 밟혔던 것도 바로 그 사소한 일상이 아니었나요? ‘누군가는 노들을 지켜주었으면‘ 했던 당신의 이기적인 마음도 실은 누군가 남아서 형광•등을 갈고 칠판지우개를 털어주길 바랐던 것이라고 나는 짐작합니다. - P28
야학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공간이었지만 누구도 남으려 하지 않고, 남을 수도 없는 가난하고 외로운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도 누군가의 등을 떠밀지 못했으리라. 그때 박경석이 겸연쩍게 손을 들고 나섰다. 그가 야학을 사랑하는 방식은 ‘남아서키우는 것‘이었다. 그는 노들야학의 세 번째 교장이 되었다.
노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자
1997년 6월 10일, 별 준비 없이 초라하게 진행된 박경석 교장의 취임식은 단언컨대 노들야학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떠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에 야학을 자신의 인생에 묶은 최초의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청춘의 한 마디를 끊어서 야학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길 위에 야학을 얹어 보았다. - P59
이제부터 노들이 굴러간 모든 곳에 그가 있다. - P60
"작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것이 모래 위에 디딘 것인지 반석 위에 디딘 것인지 지금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흔적도 없이 바람에 날려 사라질지 모른다. 기억해야 한다. 조금씩 눌러주지 않으면 또다시 잊혀져버릴 흔적들을 기억하자. 우리에겐 세상 모든 길을 갈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다." 노들바람 - P75
운동이 사라져가는 시대였다. 야학은 장애인의 학력을 높여서 차별을 가리는 데에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저항의 가치를 실천하는 공간이 되어야 했다. 노들은 그 저항이 이름 있는 정치인의 힘찬 연설로서가 아니라, 방구석에 갇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수많은 중증장애인들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고 믿었다. 꽁꽁 숨어 있는 그들을 집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야 했다. 그러기 위해 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이 높고 - P79
고립된 정립회관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이 일들을 꾸준히 추진해나갈 사람이 있어야 했다. 2000년 7월, 한 청년이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아차산 언덕을 올라 야학의 문을 열었다. 에바다 투쟁에서 노들과 인연을 맺은 김도현이었다. 그는 활동비 5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야학에 ‘취직‘한 첫번째 상근활동가였다. - P80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 P88
권리는 법전에 있지 않았다. ‘배운‘ 사람들이 먼저 찾아서 하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권리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당연한‘ 저상버스와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바로 그 증거다. - P95
누군들 충돌이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시기 몇몇 교사들에게는 고통을 견디며 끝까지 밀고나가는 어떤 힘이 있었다. 두려움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일상 속에서 묵묵히 실천으로 증명했다. 어떤 교육파 교사는 어떤 운동파 학생과 함께 살며 그의 자립생활을 지원했고, 어떤 운동파 교사는 연극 수업에 들어가 ‘데모‘라면 기겁을 하는 학생의 삶에 오랫동안 귀 기울였다. 운동파가 교육파에게, 교육파가 운동파에게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교육이 절대 눈감지 말아야 할 것과 운동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참된 교육도, 진정한 운동도 지극한 정성으로 파내려가다 보면 그 뿌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지지. - P101
교육과 운동은 그들의 실천 속에서 이어졌고, 갈등을 대하는 그들의 성실했던 태도는 이후 충돌의 순간마다 회자되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교육과 운동 중 어느 하나가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단절이다.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교육과 운동 중 어느 하나가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삶에서 분리되어 홀로 내달리는 것이다. 노들야학이 이 시기에 어떤 질적인 변화를 겪고 거듭났다면 그것은 이동권 투쟁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다. 치열했던 갈등을 견뎌낸 사람들이 온몸을 떨면서 피워낸 꽃이다. 가장 진실한 배움이 설 자리는 바로 그런 곳이다. - P102
만약 전장협이 DPI와 통합하던 시기에 한국사회에 투쟁을 통해서, 당사자의 주체적 힘을 통해서 장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단체가 단 한 곳이라도 있었다면 노들은 이렇게 홀로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조직과 자금력을 가진 수많은 단체들이 있지만 그들은 이동권 투쟁의 현장에, 에바다 투쟁의 현장에, 그리고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죽어간 최옥란 열사를 보내는 길에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P107
정부에서 지급하는 예산에 사활을 걸고 상급 관료들의 기득권과 출세의 길이 침해받지 않는 한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 단체 또한 그 나름의 긍정적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 문제를 투쟁을 통해 권리로서 쟁취하고자 하는 단위와 그들과의 균형은 참혹할 만치 비대칭적이다. 이 척박한 지형 위에서 노들은 장애인운동의 딜레마와 가능성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담고 있는 유일한 공간일지 모른다. 그 무게감이 우리를 때때로 힘들게 한다. (...) 김도현 - P108
활동보조는 자원봉사와 달라서 행위의 주체는 장애인이고 보조인은 대신 수행할 뿐이다. 노동의 대가를 받으며 급여는 국가가 지급한다. 활동보조인은 이렇듯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전혀 새로운 관계‘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야학 교사가 아무리 자신의 활동은 ‘봉사‘가 아니라 ‘연대‘라고 주장해도 그 무게중심은 철저히 교사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장애인의 입장에선 이 비장애인이 언제 사정이 생겨 그 ‘연대‘를 중단하게 될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활동보조인이 없는 중증장애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몇 시간이든 오줌을 참는 일이고 눈앞에 밥을 두고도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에겐 가혹하게도 너무나 흔한 일상이어서 그것을 특별히 ‘문제‘라고도 인식하지 못했다. - P110
2003년부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활동보조인 파견 사업을 시행했다. 그즈음 전동휠체어도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활동보조서비스와 전동휠체어의 결합은 장애인의 일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걸을 수 없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걷게 된 격이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중증장애인이라도 전동휠체어를 운전할 수만 있다면 방구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일찍 누군가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앉기만 한다면 온전히 ‘하루‘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30년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상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은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 P113
한 시절 모든 악의 근원이 ‘이동할 수 없어서‘였다면 이제 모든 불행의 씨앗은 ‘활동보조서비스의 부족‘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새로운권리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 P115
2005년 말, 그가 노동부에 제출한 사업 기획안이 선정되면서 꿈은 급작스럽게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 열 명의 급여를 3년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 2006년 3월 세 번째 노들, 현수막 공장 ‘노란들판‘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이알찬과 퇴임한 교사들, 그리고 야학 학생 몇 명이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들야학이라는 공통분모를 믿었지만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 배움을 주고받던 관계와 직장 동료가 되어 함께 일을 하는 관계는 몹시 달랐다. 수업은 쉬웠지만 함께 일하기는 어려웠다. 현수막 주문을 받기로 한 노동자 J는 길이를 재는 단위인 미터(m)와 센티미터(cm)를 변환할 줄 몰랐다. 출력기를 다루어야 하는 노동자 Y는 기계가 표시하는 영어를 읽지 못했다. 학생일 때는 문제될 게 없었지만 노동자일 때는 사정이 달랐다. 버 - P118
려지는 현수막이 속출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학교가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야학이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을! 작업 지시서를 앞에 두고 즉석에서 수학 수업이 벌어지고 출력기 옆에서 알파벳 특강이 이루어졌다. 배움의 속도는 마음과 달리 속 터지게 더뎠다. ‘이알찬들‘이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었다. 그들 역시 현수막이라고는 대학 시절 볕 좋은 날 천을 펼쳐 놓고 붓으로 쓰는 모습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회사를 찾아다니며 연수를 청하고 듣도 보도 못했던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다. 보조금이 중단되는 3년 뒤에도 살아남아야 했다. 살인적 노동 강도에 피를 말리는 긴장까지 더해졌다. 장애인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그들이 차별받은 역사까지를 보듬는 일이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한다고 누가 돈을 줄 리 없었다. 당장 장애인이 할 수 없는 일들은 비장애인이 모두 메워야 했다. ‘이알찬들‘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다. ‘장애인의 속도를 인정하고 노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기계가 되고 총알이 되어야 했던 나날이었다. 늦은 밤 현수막을 ‘디자인‘해서 ‘출력‘을 걸어놓은 후, 기계 아래서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자다가, 출력이 끝나면 그것을 ‘마감‘하여, 새벽이 되면 사다리를 들고 ‘시공‘을 하러 나갔다. 야학에서 수업 마치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실천하기 위해서 ‘장애인도 일하고 싶다‘는 정당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은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아니라 협력과 연대의 정신으로도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 P120
2001년 이후 시간은 참으로 역동적으로 흘렀다.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장애인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외침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2003년에는 교육권을 보장하라는 부모들의 폭발적인 투쟁이 시작되었고, 2004년에는 정립회관 민주화를 위한 점거 농성이 231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2006년에는 장애인 수용시설이었던 성람재단의 비리를 해결하라고 종로구청 앞에서 153일 동안 농성을 했다. 또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교육지원법을 제정하라고,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하라고 농성에 농성에 농성을 거듭하였고, 무시로 집회를 하고, 도로를 막고, 단상을 점거하고, 토론회를 개최하고, 문화제를 열었다. 그사이 노들야학 사무국과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현수막 공장 ‘노란들판‘이 새롭게 문을 열었고 지역마다 우후죽순으로 자립생활센터들이 생겨났다. 이동권연대와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과 장애인교육권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결성되어 눈부신 활동을 펼쳤고, 다수의 노들야학 사람들이 그 활동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겨울이면 여의도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국회를 향해 소리질렀고, 여의도 윤중로에 벚꽃이 만개할 즈음에는 광화문에서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었고 저상버스가 의무화 - P131
되었다. 2007년에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도화되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장애인등의특수교육법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학습(學習)‘. 배우고 익힌다는 뜻. 우리는 ‘차별에 저항하라‘는 과제를 학습할 무궁무진한 기회 속에 놓여 있었다. 차별이 무엇인지, 저항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인권의식과 연대의식을 몸에 익혀 나갔다. 바야흐로 저항의 봄, 투쟁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은 그대로인데 불가능했던 많은 것이 다만 시간 속에서 가능해졌다. 혁명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시시각각 딛고 선 땅이 요동을 쳤다. 우리는 그 위에서 흔들리며 뒤섞였다. 부딪치고 넘어졌으며 균형을 잡고 일어서기 위해 서로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말했다. 당신들의 자식이 노들을 만난 후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고. 몰랐을 땐 그것이 삶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숨만 쉰다고 모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직 죽지 않은 존재‘로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20년을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제 우리는 단 하루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 P132
"조기 축구회에 비유하면 박경석 대표는 선수로 뛰면서 감독까지 하는 플레잉 코치였다. 이동권 투쟁은 엄청나게 커지고 있었고 그 속도는 참 빨랐다. 투쟁이란 타이밍이 중요해서 몰아쳐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급하게 먹어 치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꼭꼭 씹어 먹어야 피도 되고 살도 되는데 허겁지겁 먹다 보니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음식도 다 흘렸다. 투쟁하는 주체들이 그렇게 열의가 넘칠 때 자신들의 내용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더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김도현 - P138
‘장애인의 속도를 인정하라‘고 외쳤던 장애인운동의 속도는 역설적이게도 몹시 빨랐다. 너무 오랜 세월 허기져 살았으므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장애인운동을 먹어치운‘ 사람들은 빠르게 몸집이 불었다. 곧이어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와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갑자기 큰 키에 살이 트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 P139
한편 비장애 활동가들 역시 말 못할 고충을 속으로 삭여야 했다. ‘느린 사람‘과 함께 활동하기 위해 자신은 더 빨라져야 하는 현실 - P139
을 긍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장애인의 교육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것은 쉽지만,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과 당장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보장하라‘고 외치는 것은 쉽지만, 당장 활동보조인이 없는 중증장애인과 함께 일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이렇듯 둘의 고민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러한 관계는 장애인운동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했다. 그들은 반쪽의 성장통을 나누어 가지며 함께 성장했다. 그들이 그렇게 서로에게 몸을 맞대고 있었기에, 그래서 서로의 고민이 엉켜 붙어 있었기에 어쩌면 장애인운동은 그토록 활활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 P140
노들의 힘은 이 치열한 일상성에서 왔다. 보통 ‘일상‘이라는 말은 ‘흘러가는 시간 속의 그렇고 그런 날들 중 하루‘를 뜻하지만 노들에서 말하는 일상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중증장애인에게 일상이란 가져본 적 없는 어떤 하루들, 그러니까 그들의 빼앗긴 인생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외출을 하고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사귀는 일이 그저 평범한 일상이지만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제 몸을 던져 싸워야 겨우 얻을까 말까 한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일들이었다. 노들의 가장 중요한 투쟁은 바로 이 일상을 만들고 지키는 일이었다. 이 작고 사소한 일상이 우리들의 인생을 끌고 나간다. 노들의 일상을 이끌었던 것은 바로 수업이었다. 수업이 우리를 만나게 했고 거기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수업이 아니었다면 30년간 서울 노유동의 작은 방과 창동 작은 집이 각자의 우주 전체였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장애 문제라면 명왕성만큼이나 멀리 있는 것으로 알았던 나 같은 사람이 그들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차산 기슭 작은 교실에서 만난 우리는 아득하게 달랐고 서로에게 모두 처음인 존재들이었다. - P144
그때 우리들은 몰랐다. 우리가 얼마나 긴 레이스의 시작점에 서 있었는지. 1년이 지나도 크게 진전되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칠 때에도 교사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한 사람이 기역니은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한지를. 상대방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로도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 P145
노들야학의 수업은 교실 속에만 있지 않았다. 배움의 자리는 사람들의 다양하고 끝없는 차이들 사이 어디에나 있었다. 사십여 명의 장애인은 모두 다른 몸을 가졌고, 이십여 명의 비장애인 역시 걸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큰 공통점이 없었다. 그들의 사이사이에 배움이 필요했다. 제도권 교육을 받은 교사와 제도권 교육에서 밀 - P147
려난 학생들 사이, 다양한 몸들 사이,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 사이, ‘교육‘을 하고 싶은 교사와 ‘운동‘을 하고 싶은 교사와 ‘봉사‘를 하고 싶은 교사들 사이, 노들이 딛고 선 땅과 노들이 살고 싶은 세상 사이, 노들이 외치는 구호와 노들이 만드는 일상 사이, 신임교사와 교장 사이, 그리고 막 희망을 갖기 시작한 사람과 이제는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 사이. 그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노 저어가던 모든 과정이 노들의 수업 아니었을까. 구성원이 고작 육십여 명밖에 안 되는 이 작은 학교는 그러나 무수한 회의와 행사와 교육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이 그들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이‘들을 대하는 노들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구석에 갇힌 사람들을 야학으로 데려오기 위해 매일매일 봉고가 돌았고, 교사와 교사의 사이를 잇기 위해 토요일 저녁마다 교사회의를 했다. 교사와 학생들을 잇기 위해 신임교사 길라잡이 교육을 했고, 야학과 세상을 잇기 위해 한강대교 위를 기었으며,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소식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노들은 끊어져 있는 수많은 ‘사이‘들을 잇기 위해 분투했다. 지하철 선로를 점거했고 모꼬지를 떠났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삭발을 했고 현수막 공장을 만들었고 단식을 했다. 춤을 추었고 토론을 했고 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다. 돈을 벌었고 가족들과 싸웠고 술을 마셨다. 활동보조를 했고 버스를 탔고 천막을 쳤다. 노래를 불렀고 구구단을 외웠고 활동가가 되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어김없이 1교시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무한히 변주되었다. 그 과정에서 노들의 삶은 일상도, 교육도, 운동도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 P148
복도는 참으로 불편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진 신경전 혹은 냉전, 복도는 그 전선이었다. 상근자들은 학생들이 매일 겪는 날것의 일상을 마주했다. 그나마도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 삶. 누구도 복도에서 함부로 안부를 묻지 못했다. 이쪽에서 경쾌하게 ‘식사하셨어요?‘라고 던지면 저쪽에서 무겁게 ‘아니!‘ 하고 받았다. 저쪽에서 조심스럽게 ‘바빠?‘ 하고 물으면 이쪽에선 재빠르게 ‘네!‘ 하고 응답했다. 모두가 ‘안녕‘하지 못했으므로 복도에서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설 자리가 없었다. - P187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 생활시간 보장‘을 요구하며 싸우는 노•들의 비장애 활동가들에게 그것은 연대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평화로운 밥상을 위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박한 밥상에 둘러앉아 그저 죄책감 없이 저녁식사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노들의 뜨거운 밥상‘을 주제로 한 연간 기획이 끝나갈 무렵인 2011년 말에는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이 최대 360시간(하루 12시간)으로 확대되어 있었고, 늘어난 시간만큼 노들의 밥상도 조금은 식어 있었다. - P188
평생을 시설에서 살아온 사람이 그 시설을 나온다는 것은 결코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립은 사회적 환경이 만든다. 오직 옷과 밥과 집만이 인간을 자립시킨다. ‘마음‘이 필요한 때는 어떤 시기, 어떤 반찬, 어떤 스타일, 어떤 동네를 고를 때뿐이다. - P205
시설장애인은 활동보조서비스라는 개념을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잘 모른다. 활동보조인을 시설에서 일하던 직원 정도로 생각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거나 작은 행동 하나에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초기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 그 자리에서 서로의 호칭부터 정한다. 활동보조인에게도 시설이 어떤 곳인지 알려드리고 서로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 P206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그리하여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장애인을 격리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 먼저다. 장애인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소통하는 것이 먼저다. 그들을 밀어내고 빼앗은 자리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먼저다. 어렵지만 그것이 먼저다. 깨달음과 질문은 만나고 부딪치고 섞이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이다. 정신장애를 가졌던 교사 B도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자신은 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저 자주 꾸준히 만나면 저절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익숙해지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면 모든 인간이 장점과 단점을 가진 채로 어울려 살아가듯, 장애가 격리와 배제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러다 보면 특별한 기술 따위 없이도 함께 살아가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키워진 자신을 보게 된다. 야학은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안으며 점점 함께 살 능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 힘이 강해질수록 노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자립 능력도 강해졌다. 누구나 처음에는 타인을 붙들고 일어서야 하므로. - P209
‘함께 놀기‘란 ‘함께 투쟁하기‘보다 어려웠다. 모든 놀이기구의 출구를 빠짐없이 기프트샵으로 연결시켜놓은 영악한 자본이 산도 깎고 강도 덮는 능력을 가지고도 기어이 휠체어 하나 들어갈 통로를 열어놓지 않았다. A와 함께라면 더딘 속도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고, J와 함께라면 놀이 자체를 포기함으로써 놀이의 연대를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나를 분리하여 내 옹졸한 놀이의 영역을 확보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돌이켜보면 ‘함께 놀기‘는 모꼬지를 떠난다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의 과정 속에서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 같은 것이었고, 우리가 ‘함께 산다‘는 문제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어지는 조건은 계속 달라졌지만 작은 차이를 들추어 우리의 분리를 부추기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유혹 앞에서 갈등했고 고개 돌렸고 분열했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실패를 시인하는 것, 그 조건 위에서는 결코 함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일지 몰랐다. 우리는 함께 노는 것에도 실패했고 함께 사는 - P242
것에도 실패했다. 오직 그렇게 고백할 때만이 함께 진실하다. 우리가 나누어 가진 분열의 추억만이 진실하다. 사랑과 봉사의 환상이 깨어지고 진정한 연대가 시작되는 곳은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진실을 대면할 때이다.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다. 분열의 책임은 우리에게 없다. 다만 그 조건이 틀렸음을 말할 책임만 있을 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분열의 추억이 쌓인다. 함께 싸워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진정한 모꼬지는 아직 가보지 않았다. - P243
저녁 6시, 야학이 소란스럽다. 여자가 추석 선물로 양말을 한 켤레씩 돌린다. 어른이 된 소년은 동료의 기침 소리를 듣고는 감기 - P248
약을 사러 간다. 남자는 엊그제 부인의 속을 뒤집어놓은 것이 미안했던지 "그래도 너밖에 없다"며 음흉하게 웃어 보인다. 이렇게 착하고 평범하고 정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살았다. 1987년 내가 가족들과 물놀이를 갔을 때 소년은 목숨을 걸고 산속으로 탈출했다. 1997년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 남자는 진창 속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2009년 내가 장애인운동 활동가가 되어 탈시설 농성장에 불을 밝힐 때 여자는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산 속의 시멘트 길 위를 네발로 기어 도망쳤다. "받아쓰기는 너무 어려워." 여자가 무심히 웃을 때 가슴에 바람 같은 것이 지나갔다. 너는 누구냐. 내가 놀고 꿈꾸고 성장하는 동안 손발을 묶이고 울음조차 짓이겨진 너는 도대체 누구냐. 누가 너를 가두어 이득을 취했고 이렇게 너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또 누구인 것이냐. - P249
2007년 야학이 정립회관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교육청은 ‘야학을 지원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30년 전 자신들이 보낸 취학통지서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면서도 그들은 미안함을 몰랐다. 더 이상 밀려날 곳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던 사람들은 벼랑 - P252
끝에서 회관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대신 종로 한복판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종로 한복판에 교실 100평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산이 아니라 평지에서, 변두리가 아니라 도심의 한가운데서 교육받을 권리. 15년을 공짜로 얹혀살다 쫓겨난 신세들치고는 그 요구가 발칙했을까. 고작 마흔 명의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그 많은‘ 국민세금을 달라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 교육청이 코웃음을 쳤다. 그 지당하신 경제관념 덕에 수많은 K들이 학교와 동네에서 밀려나 눈부신 성장의 시간을 놓쳤다. 우리는 묻고 싶었다. 장학관님께서 다닌 초등학교는 ‘평당 얼마‘였는지, ‘비싼 땅‘에 있는 저 수많은 학교들은 도대체 누가 다니고 있는 것인지. 왜 어떤 이에게는 물을 필요조차 없는 질문에 누군가는 평생을 걸고 답을 해야 하는지. 그 답을 듣기 위해 노들야학 사람들은 80일간 농성을 했고, 마침내 종로 한복판에 교실 100평을 ‘쟁취‘했다. 이제 이곳에서 버티고 살아남아야 했다. 호시탐탐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밀어내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먼저 이곳의 토양이 바뀌어야 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변화해야 하는 곳, K들을 추방했던 최초의 그곳, 학교로 가자. 장애인 인권 교육 사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P253
그러다 K가 입을 떼는 순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반응‘을 한다. 이 교실에서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장면이 아이들의 눈과 귀를 붙든다. 잘 들리지 않는 말을 들으려고 귀를 갖다 대고 놓친 이야기의 빈틈을 채우려고 미간을 찌푸리고 눈동자를 굴린다. 아이들의 오감이 활짝 열린 이런 틈을 타고! ‘장애인이라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같은 오묘하고 멋있는 말로 뒤통수를 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K가 내 뒤통수를 더 자주 친다. 자기 차례인데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천장만 바라보거나 간신히 입을 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예상에 없던 질문을 받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늘어놓는 대답이 줄줄이 반인권적일 때. 나는 밤샘노동의 본전생각이 난다. K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지만 기억력은 비상하게 뛰어나고 차별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인권의식만은 기가 막히게 균형잡힌 그런 사람이면 좋았으련만. K는 그저 범상하다. 내가 그러하듯이.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생고생을 몇 년간 사서 했다. 그것은 이 인권 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차별받은 당사자를 교육자의 위치에 세우는 것‘ 그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 P256
약자를 배려하고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은 익숙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 관계를 깨야 한다. 약자에게 주어야 할 것은 권력이고 주변인에게 필요한 것은 중심의 자리, 자기 울음을 우는 주체의 자리이다. 오래전 밀려나고 사라진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조합은 낯설다. 그것을 기획하는 것은 상상력이지만 현실로 만드는 것은 용기 있는 실천이다. 낯선 조합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것이 말보다 더 크게 말하는 인권의 힘이다. 대학로 한복판의 장애인야학은 아름답다. 그리고 중증장애인 인권 강사 K는 힘이 세다. - P257
2014년 5월, 장애등급제 ·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서울 광화문역 농성장에는 여덟 개의 영정이 들어섰다. 2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중 세 명은 이 농성장에서 서명운동을 펼치던 사람들이었다. 지병이 있었던 것도, 돌연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 그들이 한 해에 한 명씩 거짓말처럼 저쪽 죽은 자들의 자리로 건너갔다. 삶과 죽음의 거리 고작 3m. 그러나 나는 그 거리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뇌병변장애인이 아니므로 가벼운 화재쯤 재빨리 피할 수 있고, 돈 30만 원이 없어서 맹장이 터진 것을 끌어안고 지내다가 복막염으로 키우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가족에게서 버려진 지적장애인이 아니므로 사회사업가를 사칭한 어느 미치광이의 손에 평생을 능멸당한 것도 모자라 죽은 뒤에까지 차가운 냉동고에 갇혀 12년이나 방치될 가능성이 없으며, 나는 간질장애인도 아니므 - P258
로 장애등급 심사에서 ‘장애인 아님‘으로 판정받았다고 생계비 지원이 중단돼 자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형적인 장애인의 죽음이다. 바쁘게 지나가는 비장애인들의 발걸음이 저리도 무심한 것을 나는 쉽게 이해해버린다. 사람들은 어쩌면 제단 위의 저 죽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저들은 이사회의 ‘안녕‘을 위해 바쳐지는 제물 같은 존재라고. (...) 2014년 5월, 나는 안산 세월호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놓인 300여명의 영정 앞에 섰다. 이렇게 압도적인 죽음 앞에 서본 것은 광주 5·18 묘역 이후 처음이다. 나는 단지 ‘300‘이라는 숫자의 무게뿐 아니라 그들의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는 사실에 압도당했다. 그 짧은 거리가 거대한 음모와 탐욕 속에 주도면밀하게 끊어져 있음을 영화처럼 생생히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이즈음 나는 그 배를 탔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1년 동안 하던 작업이 마무리되면 꼭 배를 타고 제주로 여행을 가리라 다짐하고 배편을 검색하기도 했었다. 지난해 10월, 10만 권의 책을 싣고 제주 강정마을로 향하는 세월호를 타지 못해 아쉬워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러니 저 영정 하나에 내 얼굴을 넣어보는 것은 대단한 과대망상도 아니다. 그 앞에서 한참을 울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묻는다. "당신은 혹시 ‘죽음‘이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이 슬픈 것은 아닌 - P259
가? 나머지는 그저 ‘감수할 수 있는 정도‘의 ‘숫자‘인 것은 아닌가? 생명은 중요한가? 몇 사람부터 그러한가?" 그제야 나는 광화문 농성장의 영정들을 떠올렸다. 일곱 개의 영정이 이제 막 여덟 개로 늘어났을 때였다. 나조차 광화문의 저 많은영정들을 ‘남의 죽음‘ 보듯 했음을, 장애인의 죽음은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숫자‘로 보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내 순서는 오지 않을 줄 알고 죽음의 행렬을 관조하고 있던 나는 별안간 배가 뒤집히고 순번이 흐트러져버리자 당황하고 있었다. 나의 안전이 위협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당신들에게 이 사회는 언제나 참사였구나. 당신들은 평생을 세월호에 갇혀 구조되길랐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느라 생을 다 써버린 사람들이 더는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의 바다에 뛰어들었던 거구나. 나는 또 누군가에게 미안해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 P260
"이렇게 위험한데도 시설 바깥의 삶이 정말 좋은 건가요?" 사람들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뒤집혔다고 수학여행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그는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 P263
ב농성 초반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금방 무언가 바꿔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애등급제 폐지에 대한 자신감, 부양의무제 폐지에 대한 정당함. 사람들을 만나 친절하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완전 폐지될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말이 이런 의미인 줄 왜 몰랐을까. 그렇다고, 뭐,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무엇이 달라졌다고. 550일이 넘는 동안 달라진 건 늘어난 영정, 죽은 자들의 얼굴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벽의 위치와 단단함을 더 크게 느낀다. 농성장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우릴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불편하겠지. 그냥 지나가기도 쳐다보기도 말을 걸기도. 마음만큼 세상은 움직이지 않고. 사람들이 죽고, 춥고, 살아 있는 나는 고작 발이 시리다. - P268
누구는 가산점 1점을 위해 각종 자격증을 따는데 누구는 아직 제 이름 석자도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어떤 이는 평생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는데 어떤 이는 평생 같은 자리에 누워 창밖만 바라보았다고 했다. 처음엔 그저 연민이나 분노인 줄 알았다. 나를 잠시 - P290
멈춰 서게 한 그 힘은.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이 벼랑 끝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길을 만드는 것을 본 뒤 나는 깨달았다. 그것이 아름다움임을. 인간이란 존재는 어떠한 조건 위에서도 존엄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러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을 믿어도 좋다는 사실을.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 안달했던 것은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연약해서 더 날카롭게 빛나던 그 아름다움을 지켜주고 싶어서 누구는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들었고 누구는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극단을 만들었다. 어떤 날은 구청 앞에 불을 피우고 ‘활동보조서비스 더 있었더-라면‘을 끓여 먹었고, 어떤 날은 제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간 교장이 외로울까봐 구치소 앞으로 몰려가 수업을 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제 몸으로 지하철을 막겠다는 학생 하나를 선로에 내려주었고 그 죄로 구속되었다. 노들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유치한 연서를 읊어대기 시작한 이들이 벌이게 될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일들을. 그 폭발적 힘이 오직 그 자신들 속에서 나오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노들은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너희 안에는 이미 게바라도 있고 프레이리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너희 자신을 믿어도 좋다는 사실을. - P292
‘숨쉬는 것 빼고는 모든 게 차별‘이라고, 30년을 집 안에만 갇혀서 수인(人)처럼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나서 했던 첫 번째 일은 바로 일상을 만드는 것이었지요.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그런 평범하고 눈부신 일상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얼마나 지켜내기가 버겁던지요. 우리는 차별의 백만 가지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하루하루들은 정말이지 온몸으로 밀어야만 겨우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말했었지요. "일상의 모든 현장이 교실이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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