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가 충분히 여자로 보이지 않아서 ‘남자‘로 결론이 나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면, 탈코르셋을 하더라도 여자로 식별되어야 하는 더 지독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감출수 없는 큰 가슴이나 화장하지 않아도 희고 부드러운 피부와 같은 특징이 더 강력한 성별 구분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니 탈코르셋은 눈에 보이는 화장, 치마, 긴 머리를 벗어던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범주를 - P52
확장하고 여성에 대한 상상력을 넓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기본값을 여성도 가져올 수 있고, 인간은 두 개의 성별이 아니라 더 다양한 인간으로 살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태어나는 순간에 모두가 입을 모아 남성이라 지정했고, 정성껏 아들로 키워진 사람이 스스로 여성임을 밝히며, 자신의 의지로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고 하이힐을 신는 것은 코르셋 강화가 아니라 ‘코르셋 엿먹이기‘다. 트랜스젠더는 시스젠더 지정성별 여성들 중심의 탈코르셋 운동의 방해꾼이 아니라 지원군이다. - P53
탈코르셋 운동을 하면서 트랜스젠더 혐오를 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일이다. 그럼에도 트렌스젠더를 자신들이 벗어던진 코르셋을 주워서 입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그려 트랜스젠더를 조롱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그림은 누구나 코르셋을 입고 벗을 수 있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미 실패한 분석이다. 사회가 여성에게 입히려는 코르셋은 쉽게 입고 쉽게 벗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머리를 짧게 잘라도, 바지만 입어도, 화장하지 않아도 바로 그런 점이 신경 쓰여서 여성으로 보이도록 말하고 행동하려 애쓰게 만든다.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에게 ‘겉은 저래도 속은 천상여자‘라는 수식어를 붙이는걸 숱하게 보지 않았는가. 탈코르셋 운동을 더 대범하게 펼쳐야 한다. 성별 경계를 가지고 노는 여유를 갖고 여성임을 의심당하는 걸 즐길 필요가 있다. 수많은 시스젠더 여성들이 코르셋을 입어왔고 지금도 입고 있듯이, 트랜스젠더 여성이 코르셋을 입는다고 해서 새삼 더 강화될 것도 없다. 또 많은 시스젠더 여성이 탈코르셋의 길을 찾았듯이트랜스젠더 여성도 탈코르셋을 도모할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탈코르셋을 넘어 사회가 코르셋을 작동시키는 걸 멈추게 해야 한다.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막대기를 꽂아 멈추게 할 투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는가. 그러니 손을 잡자.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탈코르셋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 P54
트럭을 버리라는 요구, 조용히 걸어가라는 요구는 모두 우리를 춤추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존재를 즐겁게 축하하는 걸 막고 싶은 거다. 길을 걷는 것조차 큰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구는데 타협할 여지는 없었다. 우리가 준비한 음악과 사람들의 흥겨운 춤과 환호와 박수도 없이 좁은 길을 우회해서 신촌을 한바퀴 도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 P98
나는 혐오와의 싸움은 결코 단일 승패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 - P99
각한다. 한두판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어차피, 이 싸움은 누가 더 끈질기고 진심인가의 문제다. 이날 퍼레이드 차량의 운전기사님들은 계약된 시간이 지났다고 퇴근할 수도 있었지만, 대기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은 상황에서도 불평은커녕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며 오히려 기획단을 응원해줬다. 무대 음향을 맡은 회사 직원 중에는 애인과 1,000일 기념일이어서 데이트 약속이 있었던 분, 예비 며느리와 첫인사를 나누는 약속이 있었던 분도 계셨는데 약속을 미루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셨다. 성소수자든아니든 혐오를 목도했을 때 같이 싸워야겠다고 주먹을 쥔 이런 분들이 있으셨기에 밤 10시에 퍼레이드가 가능했던 것이다. 퀴어문화축제의 정신이 무엇일까. 퀴어퍼레이드는 무엇을 위해 열리는 걸까. 2000년에 50여 명으로 시작했던 퀴어퍼레이드였지만, 단지 참가자가 많아지고 규모가 커지는 것만이 퀴어퍼레이드의 목표일 수는 없다. 우리는 퀴어문화축제를 통해 이 세상의 그 어떤 시선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광장에 모이고, 거리를 누비고, 서로의 존재를 축하하고 즐거워하는것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큰 저항인지를 표현하고 느껴왔다. 나는 이토록 선명한 방식의 투쟁을 사랑한다. 우리는 차별과 혐오에 상처받고 슬프고 화도 나겠지만, 광장으로 나와 춤을 출것이다. 그것이 가장 강력한 저항,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 퀴어라고 생각하니까.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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