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P8

좋은 작가는 아첨하지 않는다. 오랜 친구처럼 우리에게 진실의 차가운 냉기를 깊이 들이마시라고 무심한 얼굴로 짧게 말한다. 카프카, 울프, 카뮈, 베유, 톨스토이, 플라스, 니체, 아렌트・・・・・・ 여기서 다룬 저자들은 다 그렇다.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는 소송이거나 400년 내내 분투한 뒤에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소망,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윗돌, 보상 없이 행하는 사랑, 끝없이 헤매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겨울 숲 같은 것이다. 또는 내 속에 울음이 사는 시간, 경멸을 통해서 극복되는 운명의 시간, 사회가 찍어내는 자동인형 같은 삶에 맞서는 시간이다. 이들은, 내 책을 읽는다면 넌 아침에 슬펐어도 저녁 무렵엔 꼭 행복해질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너는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겠지만 그래도 너 자신의 삶과 고유함을 포 - P9

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고,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 P10

그러나 카프카는 이 중 어느 버전도 택하지 않는다. 당혹감은, 거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쾌감을 제공하기 위해 소설가가 의도한 문학적 효과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그는 삶 자체를 식초에 절여진 오이피클처럼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독자는 읽는 내내 난처함에 푹푹 절여지는 기분이 든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는데도 주인공의 죄목조차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K가 체포되었으나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점이다. K는 직 - P21

접 변론을 시도하지만 무죄 입증을 위해 크게 애쓰는 것 같지도 않다. 그가 도움을 받으러 찾아간 화가 티토렐리는 세 가지 해결책을 알려준다. 완전한 무죄방면, 표면상의 무죄방면, 판결의 무한한 연기. 이 중 K에게 가장 유리한 건 세 번째라는 조언도 덧붙인다.
사실 삶은 기나긴 소송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성별, 인종, 계급 등의 사회문화적 규정들 속에 던져진다. 사회는 그 규정들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하며 늘 우리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려고 대기 중이다. 규정 하나를 잘 지켜도 다른 규정들로 인한 소송들이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누구나 사는 동안 사회적 ‘정상상태‘에 있을 것을 명하는 법 앞에서 계속 무죄를 입증하거나 유죄를 인정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완전한 무죄방면은 불가능하다. - P22

400년이 흐르도록 올랜도는 사샤를 떠올리고, 여성의 육체에 더 끌리고 여성들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늘 사랑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올랜도 역시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여러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소중하지만 자신이 짜 넣을 인생의 무늬들이 모두 관계로만 환원된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랜도는 고독을 사랑하는 실존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전기작가는 그가 굼뜬 것이 그가 종종 고독을 사랑하는 성향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랍 상자 따위에 걸려 넘어지는 올랜도는 당연히 고독한 장소나 광활한 전망들을 좋아했고, 자기가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혼자라고 느끼기를 좋아했다." - P34

400년 내내 시인을 꿈꿀 것 같은 이들은 시인이 되면 되고, 400년 내내 남성이 되기를 꿈꾸거나 혹은 여성이 되기를 꿈 - P37

꿀 만큼 열망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성이 되면 된다. 아무도 혐오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수술보다 힘들다는 성확정 수술도 올랜도의 7일 밤 마술처럼 신비롭고 고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다른 이가 400년 내내 원했을 법한 소망을 방해하는가? 아무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다. 올랜도에게서 여성이 되고 싶었고 또 좋은 군인이 되고 싶었던 한 청년의 맑은 얼굴이 떠오른다. - P38

세계가 불확실하고 미결정적인 것으로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불안을 느낀다. 우리는 이 기분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특정 대상을 위험한 것으로 지정해서 모호한 고통을 확실한 고통으로 바꿔버린다. 명확한 경계의 대상이 생기는 순간 그것만 제거하면 세계는 다시 확실하고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범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저 동양인은 걸어 다니는 바이러스야. 이처럼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하고 이들만 사라지면 사회가 안전하고 건강해질 거라는 감정 - P52

적 방어책을 만들어내면서 타인에 대한 잔혹한 반응을 정당화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 등장했던 각종 학살은 대부분 불안 회피용 방어책의 결과였다. 그런데 이 심오한 통찰은 정작 통찰을 제공했던 철학자에게서는 망각된 것 같다. 하이데거는 유대인들을 기술 진보에 앞장서며 현대인의 자기소외를 만들어내는 범죄행위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기술문명이 주는 막연한 불안을 유대인이라는 두려움의 대상을 고안함으로써 해소하려 한 것이다. 그는 고향과 같은 대지를 만들기 위해 나치즘에 동조했고 유대인 학살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하이데거의 출석부에 적힌 이름의 주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했던 선생의 입을 통해 세상에서 추방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이데거 이후의 현대철학은 이 젊은이들이 깊은 고통과 환멸에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절망적인 노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P53

우리는 자기의 죽음을 상상하면서도 죽음 자체가 아니라 타자들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더 고통스러워한다. 때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를 구하려고 죽음을 불사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살린 사람이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타자를 ‘위해서‘, 즉 ‘대신해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력함을 넘어서, 인간은 타자를 ‘향해서‘ 죽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나의 죽음이 내가 아닌 것이 되는 비인칭의 죽음이라면 타자의 죽음은 내게 가장 격렬하게 닥쳐오는 비인칭의 경험이다. 타자의 죽음과 마주한 순간 우리는 근원적 전복에 처하게 된다. 고통을 통과하며 지금까지의 나와 달라지고, 다른 존재로 바뀐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이 이런 비인칭성의 경험들로 붐비는 곳이라고 여겼다. - P60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만일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질로 두개골을 깨우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읽는단 말인가? (...)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 같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숲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들이지, 책이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종종 사는 데 지쳐 힘이 빠질 때 바닥에서 나를 다시끌어 올리는 것은 언젠가 죽을 존재라는 유한성의 자각이 아니라 오래된 죽음에 대한 기억들이다. 학생 시위가 연일 계속되던 1991년 5월의 어느 토요일,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한 학생이 시위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성균관대 불문과 3학년 김귀정. 나와 내 친구들이 있던 데서 가까운 윗골목이었다. 영정 사진으로 처음 봤던 여학생의 말간 얼굴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나는 그 불문과 여학생의 영원히 앳된 얼굴을 떠올리며, 그 애와 함께 블랑쇼를 읽고 문학의 공간을 힘내서 서성거린다. - P61

1970년 첼란이 추격 망상에 시달리다 센강에 몸을 던져 죽은 1년 뒤, 그녀는 소설 『말리나』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썼다. "내 삶은 끝났다. 압송 도중 그가 그만 강에 빠져 죽었으니까. 그가 내 삶이었으니까. 나는 그를 - P67

내 삶보다 더 사랑했다." 이것은 개인적 고백인 동시에 문학적 고백이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위로할 길 없는 슬픔을 한 사람에게서 감지하고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바로 문학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안간힘이 사라질 때 문학은 끝난다. 그래서 문학은 한없이 다정한 일이지만, 또 비명이 나올 만큼 끔찍한 일이다. "달이 터진 쓸개를 담은 항아리를 들고서 찾아온다 그러나그대의 몫을 마시어라. 쓰디쓴 밤이 내린다."(「진실한 것은」) - P68

사람을 멀리하는 외로운 사람, 괴짜라는 일부 설명과 달리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은 다정하고 심오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찾아다니는 이의 모습은 "음악을 다 연주할 때까지/ 건반을 더듬는 연주가"(「그이는 그대의 영혼을 찾아다닌다」)를 닮았다고 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녀의 여러 건반을 하나하나 눌러보고 그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에밀리는 친구들에게 천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고 특히 여자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나눴다. - P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