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퀴어하다 - 장소에 토박이가 된다는 것, 속한다는 것, 그리고 자연의 온갖 퀴어함에 관하여
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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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라는 낱말의 일상적 쓰임에는 많은 의미가 담겼다. 자연은 인간 종과, 그리고 우리의 일상 세계와 구별되는 공간을 뜻한다. 이 낱말은 ‘거대한 분리‘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자연이라는 말은 인간이 자신의 원천인 원시적 오물보다 숭고하고 동떨어진 존재임을 뜻한다. 하지만 이 칸막이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문화적 선택이다. 생물학과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자연이고 자연이 인간이다. 둘을 별개의 영역으로 규정해야 하는 필요성은 다른 종과의 관계에 점차 균열이 생긴 결과다. 상상 속 틈새에 쐐기가 박혔다.
내게 ‘자연‘은 나무와 다람쥐 같은 밋밋하고 상투적인 이미지를 뛰어넘는다. 자연은 나무와 다람쥐의 ‘관계‘에 더 가깝다. 부분의 합보다 큰 생명력을 그들에게 불어넣는 활기찬 펄럭임처럼. 자연은 살아 있는 것뿐 아니라 바람, 물, 흙, 불 같은, 살아 있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아우른다. 자연은 ‘새‘가 아니다. 바다를 가로질러 연인에게 돌아가는 앨버트로스의 날개를 들어올리는 더운 바람이다. 모래 속에서 겨울잠을 자다 따뜻한 봄비가 내리면 뛰쳐나와 먹이와 짝을 찾으려고 밤새요란하게 우는 쟁기발두꺼비다. 자연은 당신이다. 갓 태어난 조카를 보고서 울먹이는. - P22

나는 인간과 자연을 가르는 선을 뭉개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인류가 제 스스로 강요한 고립 속에서 지독히 외로워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구의 생물 다양성이 무지막지하게 훼손되고 있다. 나에게 가장 큰 우정, 확신, 영감을 선사한 종들이 인간 사회에서 가장 멀찍이 내쫓기고 있다. 인간의 ‘바람직한‘ 특질(똑바로 설 것, 논리적일 것, 두 발로 걸을 것, 이분법적 성별을 가질 것)과 가장 거리가 멀다는 이유에서다. 이 생물들과 개인적으로 맺어지면서 나는 가장 힘겨운 시기에 기이한 소속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그 보답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주어 작으나마 내 몫을 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당신도 땅의 친밀함, 우리 세포들 사이의 가까움, 서로에 대한 기억을 느끼길 바란다.
내가 자라면서 겪은 지배적 미국 문화는 대부분의 생물에게 지독한 폭력을 가한다. 인간은 땅과 그곳에 깃든 온갖 존재들을 마음대로 다룰 능력뿐 아니라 자격까지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나머지 종이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터무니없게 들린다. 심지어 내가 어릴 적 들은 환경주의적 메시지조차 지구의 파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다른 종에게 미치는 영향에는 무심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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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물
홍은전 지음 / 봄날의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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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건 고양이 카라로부터 시작되었다.
2019년 카라를 입양하고 그와 함께 보낸 첫여름을 생각하면, 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100일을 견딘 곰이 마침내 인간이 되었다는 어떤 신화적 시간을 통과한 기분이다. 인간이 된 곰의 후손인 나는 수천 년 뒤 작은 맹수와 함께 살며 동물을 먹지도 입지도 쓰지도 않으며 100일을 견딘 결과 다시 동물이 되었다.
세상에, 동물이 되었다니.
오버하지 말라고 누군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이다. 나는 동물이 되었다. 곰이 인간이 됐다는 것만큼 황당한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도 동물‘이라는 지루할 만큼 사실인 그것을 비로소 자각한 ‘인간 동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인간의 확장이 - P9

아니라 인간밖에 모르던 세계의 무너짐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인간이 동물을 이용하고 죽이는 것은 자연의 섭리‘라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짐으로써, 나의 세계는 빛의 속도로 확장되었다. 이전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던 목소리들이 쓰나미처럼 나를 덮쳐 왔다. 20여년 전 장애인권운동을 만났을 때처럼, 나는 동물권운동을 만나 이전과 다르게 보고 다르게 듣고 다르게 말한다. 다른 근육과 감각을 쓰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다시 태어났다는 뜻이다. - P10

하지만 나는 카라와 함께 살며 내가 인간다운 것이라 여겼던 것들이 실은 동물다운 것임을 깨달았다. 자유롭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연대하고 저항하고 싶은 열망과 투쟁 말이다. 인간이 독점해버린 아름다운 가치들을 동물이란 이름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 모두를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자리에서 세상을 다시 정의하는 것, 그것이 내가 저항하는 장애인들로부터 배운 일이었다. - P11

이제 나에겐 ‘인간‘보다 ‘동물‘이 더 해방적인 단어처럼 느껴진다. 때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이 좋은비장애인이나 좋은 이성애자가 되고 싶다는 말처럼 낯설게 들린다. 나는 좋은 동물이 되고 싶다. - P12

하지만 이 가슴 시린 이야기의 끝에 테일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왜 수어를 모르는 침팬지는 외롭게 감금되고, 그렇지 않은 침팬지는 대중적 항의를 불러일으키는가. 언어는 어떻게 그런 권력을 갖게 되었나. 우리가 케이지에서 꺼 - P20

내고 싶은 것은 침팬지가 아니라 언어라는 인간적 능력이 아닌가."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힌 채 몇 개월을 보냈다.
나는 인권이 짓밟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장애인이나 부랑인 수용소의 생존자 같은 이들을 만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어이 말하게 하고 그것을 글로 바꾸는 일이다. 삶이 부서진 사람들의 말은 갈가리 찢기고 조각나 있기 일쑤였다. 장애 때문이기도 하고 낮은 교육 수준이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했다. 그 파편들을 모아 거기에 논리와 서사를 부여하는 일,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게 내 역할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기록한 글을 보며 자주 공허함을 느꼈다. 현실의 그들은 ‘짐승처럼‘ 울었는데 글 속엔 ‘인간‘만 보일 때 그랬다.
출구가 필요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인간의 공감을 얻으려면 인간의 언어를 써야 했다. 인간이란 비장애인이고 그 언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서울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파우츠 같다고 생각했다. 언 - P21

어를 통해 누군가의 해방을 도우려는 인간의 모순과 번뇌를 알 것 같다고.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나는 내가 부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갇힌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기록하면서 나는 언어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알아갔다. 그리고 그만큼 두려움도 커져갔다. 내가 만난 인간들은 내가 가진 언어보다 언제나 훨씬 더 복잡했고 거대했기 때문이다. 항상 출구를 찾아 헤매는 기분이었고 제대로 된 언어만이 그 열쇠라고 믿었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고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해방은 벼락같이 찾아왔다. 단어와 문장, 이성과 공감 같은 것들로 꽉 차 있던 나의 감옥에 작은 고양이가 사뿐사뿐 걸어 들어온 날이었다.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내가 추구했던 모든 인간적인 것들의 권위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언어가 자라났다. 몸으로 말하고 현재를 살며 서로의 작은 몸짓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동물적 언어. 그것이 미치도록 좋았다.
불안으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엔 고양이를 쓰다듬 - P22

는다. 그는 몸통 어딘가를 울려 그르렁 그르렁 낮은 진동소리를 낸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고 언어가 흉내 낼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며 잠이 든다. 동물의 해방을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마음은 공감이나 죄책감 같은 인간적인 것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내가 너무 인간인 것에 지쳤고 동물적인 관계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해방감을 느낀다. 기쁨만큼 슬픔을 바라볼 힘이 생기고 해방감만큼 책임감이 생긴다. 나는 동물인 것이다. (2020. 10. 11) - P23

그들은 인간이 동물을 감금하고 강간하고 새끼를 빼앗고 살해하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며 그것을 ‘종차별‘이라 불렀다. 몹시 충격적이면서도 익숙한 말이었다. 아니, 익숙했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다. ‘동물‘의 자리에 ‘장애인‘을 넣으면 그것은 내가 무수히 반복해온 말이었다. 나는 이 놀라운 존재들을 나의 동료들에게 달려가 알려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한 마리 짐승처럼 말도 함께 잃은 기분이었다. 그날의 기억이 걸리는 것이다.
3년 전 장애인들은 ‘나는 개가 아니다, 나는 ○○○(이름)이다‘라는 선언을 장애심사센터 건물의 외벽에 붉은 페인트로 커다랗게 쓰는 시위를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퍼포먼스가 동물을 차별했다며 문제를 제기했고, 온라인상에서 동물권 옹호자와 장애 인권옹호자 사이에 격렬한 설전이 벌어졌다. 장애인들의 시위 방식이 ‘불법‘이라는 비난은 익숙했지만 우리들의 구호가 개와 - P25

돼지를 무시하고 있다는 공격은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없던 사람들에게 불행히도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짐승 취급‘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지금 개, 돼지에 밀린 거야?‘ 하면서.
그럼에도 나는 이 새로운 적들이 그저 신기했다. 인간이 아니라 ‘개, 돼지‘에게 감정이입 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과, 그런 입장을 ‘우리를 개, 돼지 취급하지 말라‘ 외치는 장애인들 앞에 드러내는 용기가 놀라웠기 때문이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 싸움을 관전했던 나와 달리이 위험한 전장에 뛰어든 양측 선수들은 그날 밤몹시 진지했고 그만큼 상처 입었다.
이제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개와 돼지들이 어떻게 살고 살해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그들의 편에 서지는 못할 것 같다. 장애인이 어떻게 살고 죽는지 잘 알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를 정말로 어렵게 하는 건 내가 비장애인이라는 사실이다. 한 번도 ‘짐승 취급‘ 당해본 적 없는, 인간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번 생을 다 쓰지 - P26

않아도 되는 이미 충분한 인간 말이다.
그의 문제 제기는 옳았지만 나는 그를 옹호할 수 없다. 동시에 나는 우리를 옹호하면서도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다. 아니, 나는 둘 모두를 옹호하는 법을 찾고 싶다. ‘장애인도 인간이다‘라고 외치는 인간들과 ‘인간도 동물이다‘라고 외치는 동물들의 사이는 내가 경험한 가장 가깝고도 먼 거리다. 한마디를 꺼내기도 조심스럽다. 장애인들이 수십 년간 싸워서 얻은 자그마한 성과를 짓밟게 될까 봐, 무엇보다 나의 동료들에게 미움받을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짐을 끄는 짐승들》은 이렇게 시작하는 책이다.
"동물 산업 곳곳에 장애화된 몸이 있다. 또한 동물과 장애인이 억압당하는 방식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동물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
책을 펼치자마자 신이 나서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관절굽음증이라는 장애가 있는 수나우라 테일러는 어떤 몸들을 열등하다고 낙인찍고 감금하고 때리고 죽일 수 - P27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한 동물해방도 장애해방도 이뤄질 수 없음을 치열하게 보이며, ‘짐‘과 ‘짐승‘으로 제시되어온 이들이 서로를 끌어주며 함께 나아가자고 손을 내민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외치는 인간들과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외치는 동물들이 함께 둘러앉아 이 책을 읽고 싶다. 경쟁과 효율, 이성과 언어를 중심에 두지 않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하며 서로가 꿈꾸는 세계가 놀랍도록 닮아 있음을 기쁘게 확인하고 싶다. (2020. 11. 8) - P28

자기 고통의 주체가 되어야만 기쁨도 희열도 선명하게 움켜쥘 수 있다고 명애의 삶이 말하는 것 같다. 그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러 가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더 많은 일상을 원한다"라고 외치며 아스팔트 바닥을 맨몸으로 기어가는 투쟁을 벌이고 노숙을 하고 밥을 굶고 오줌을 참는다. 사람들의 삶은 언제나 짐작과 다르고 짐작보다 더 복잡하고 미묘해서 고유하게 근사하다. (2021. 2. 1) - P46

선을 넘는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모욕과 멸시가 화살처럼 빗발치고 거대한 동물이 백주 대로에서 총을 맞 - P50

고 살해된다. 그러나 진실을 본 존재는 반드시 선을 넘는다. 그리고 선을 넘은 존재들만이 볼 수 있는 어떤 세계가 있다. 나는 그들로부터 더 아름답고 위험한 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목숨을 걸고 탈주하는 비인간 동물과 짐승 취급을 거부하며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하는 장애인, 그리고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동물이 되기 위해 싸우는 어떤 인간 동물들 사이에서 나는 이 세계를 다르게 감각하는 법을 배운다. (2021. 2. 28) - P51

낮에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야학에서 수업을 했다. 낮과 밤의 세계가 너무 달라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어떤 이는 평생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는데, 어떤 이는 평생 같은 자리에 누워 창밖만 바라보았다고 했다. 모두가 전력 질주하는 낮의 세계는 강한 사람들로 가득찬 황폐하고 허약한 세계였다. 그와 달리 둥글게 둘러앉은 밤의 세계에는 눈부신 생기와 에너지로 가득했다. 약한 사람들이 단단하게 연결된 아름답고 강한 세계가 나에게 속삭였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이곳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 P59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봅시다."
몇 달 뒤 나는 선착순 달리기의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임용시험은 보지 않았다. 아무도 이기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면 내가 좀 근사해 보이는데 실은 그 반대였다.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질 것이 분명한 싸움이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과 싸우는 일을 그만하고 싶었다. 싸워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억압하는 세상이라고, 노들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 P60

사람들은 비장애인인 내가 장애인운동을 하는 것을 ‘연대‘라고 하거나 다른 이의 해방을 돕는 것이라 여긴다.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장애인운동이란 이 세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목소리이자 이 사회의 설계를 완전히 바꾸는 운동이다. 버스를 점거하고 달리는 자동차를 향해 뛰어든 그들은 내 인생도 아름답게 망쳐놓았고, 그것이 나를 구원했다. (2021. 4. 26) - P61

장애인을 공동체의 짐으로 간주하여 가스실로 몰아넣고 단종을 시행하던 그 과학은 여전히 건재한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산업이 되었고 그 위에서 풍요로운 문명과 인권이 꽃피었다. 어떤 인간도 ‘짐승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며 떠나온 그 자리에 인간은 ‘짐승들‘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역사상 유례없는 학살이 자행되었다. 거대한 학살보다 끔찍한 것은 거대한 출생이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이 불의와 폭력이 그들의 숫자만큼 태어난다. - P65

중증 장애를 가졌어도 사랑과 지지를 듬뿍 받고 자라 - P88

면 영희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나 보다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영희는 이렇게 말했다.
"밤마다 울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더라고."
살아 있는 인간에게 그 이상의 고통이 있냐는 듯이 영희는 벌써 몇 번째 그 ‘방법이 없다‘는 소리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비장애인으로 살아온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채 물었다.
"낮엔 동생들의 숙제를 그렇게 열심히 해주던 언니가 밤만 되면 죽고 싶어서 울었다고요?"
나는 영희의 동생도 아니면서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영희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건 내 것이 아니잖아요."
그 말은 뜨겁고도 서늘했다.
"나는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존재와 쓸모를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 P89

억압과 통제가 싫어서 제도 바깥으로 끊임없이 탈주하던 그는 이제 방향을 바꿔 제도 안으로 난입한다. 철로로 내려가 지하철을 막고 도로로 뛰어들어 버스를 세운다. 자신을 밀어내는 세상 속으로 불청객처럼 들이닥치는 것이다. 전반전의 목표가 자유라면 후반전의 목표는 평등, 전반전의 생존 기술이 담치기였다면 후반전의 그것은 점거 농성이다. 경석은 그런 방식으로 많은 제도를 만들어왔지만 그가 정말로 바라는 건 제도 안의 한 자리가 아니라 안과 밖의 경계를 뒤흔드는 것이다. 누가 한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규정해 격리하는가. 무엇이한 인간을 능력 없는 존재로 낙인찍어 추방하는가. - P95

먹고사는 일이 불법인 그는 존재 자체가 범죄였다. 돈을 벌 방법이 없는 사회에서 돈을 벌겠다고 나선 장애인은 어떻게 해도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병신‘들에게 허락된 노동은 구걸뿐이었다.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불태우기로 마음먹는 어떤 밤을 생각한다. 그의 저항을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은 이 고통스러운 의식을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져 더욱 무섭고 슬프다. 고백하건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기가 버거운데 죽은 사람들의 얘기까지 꼭 들어야 할까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게 시장 바닥에 엎드려 수세미를 팔던 최정환이 기어서 다가왔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2022년 출근길 지하철 바 - P133

닥을 기며 장애인 권리 예산을 요구하는 장애인 활동가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건 당신들 사정이고 왜 우리가 피해를 입어야 돼요?" 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죄 없는‘ 시민들의 자리에 나는 앉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특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2022. 6. 5) - P134

2005년 소연은 한국 최초로 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인권 실태를 조사했다. 소연을 압도한 건 이런 것이었다. 누워서 생활하는 중증 장애인에게 뭐가 제일 힘드냐고 물었을 때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 P155

대답했다.
"나한테만 주스를 안 줘요."
소연이 다시 물었다.
"뭘 안 준다고요?"
그가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간식이 나올 때 혼자 화장실에 갈 수 있는 사람들한테는 빵도 주고 주스도 주는데,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줘요."
소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또 다른 남성에게 직원들이 어떻게 부르냐고 물었을 때였다. ‘반말‘ 정도를 예상했으나 돌아온 답은 이것이었다.
"모르겠어요. 20년 동안 한 번도 이름을 불려본 적이 없어요."
현재의 소연이 17년 전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진 채 내 이름을 불렀다.
"은전아, 그런 삶이 상상이 가니?"
그해 겨울 소연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전남 영광의 시설에서 만났던 꽃님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말했다. - P156

"나, 나갈랜다. 네가 도와줘야겠다."
꽃님은 누워서 생활하는 중증 장애인이었고 바깥엔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아무런 사회적 환경도 마련되지 않았다. 소연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뭐, 뭐, 뭘 도와요?"
꽃님이 주저 없이 말했다.
"일단 집이 있어야지. 나 밥 먹고 화장실 가려면 네가 도와줘야지. 그리고 나 먹고살려면 네가 돈도 줘야지."
소연은 꽁꽁 얼어붙은 채로 솔직하게 말했다.
"언니, 집, 없어요. 나오셔도 누가 도와줄 수도 없어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면 돈이 나오는데요, 그것도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런데도 언니가 나오시겠다면요......."
소연은 침을 꿀꺽 삼킨 뒤 말했다.
"최선을 다해 알아볼게요."
꽃님이 생각해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한 달 후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래도 나 나갈랜다." - P157

6개월 뒤 꽃님은 서울에 도착했다. 활동 지원 서비스가 없던 시절이었다. 소연은 꽃님의 활동 지원을 할 사람을 구하느라 사돈의 팔촌까지 전화를 돌렸다. 그럼에도 공백은 생겼고 그 공백은 꽃님에게 커다란 공포였다. 혼자 있다 불이라도 나면 바로 죽을 것이다. 소연은 "언니, 24시간 다 채워주지 못해 미안해" 하면서 울었다. 꽃님은 "그럼 네가 오늘 자고 가면 안 돼?" 하면서 울었고, 소연은 "언니, 나도 집에 가야지, 만날 같이 잘 순 없잖 - P158

아" 하면서 울었다. 꽃님이 신경질을 버럭 내며 "네가 나오라고 했잖아!" 하면서 울면 서운해진 소연도 "우리가 다 해줄 수 없다고 했는데 언니가 나왔잖아" 하면서 울었다.
두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해 부둥켜안고 우는 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면서도 뜨거워진다. 모든 탈시설엔 눈물이 녹아 있다. 탈시설운동은 지역사회에 존재할 권리조차 빼앗긴 이들의 존재 투쟁이고, 그 투쟁이 한국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장애인은 무능하며 그런 이들의 탈시설을 ‘범죄‘라고 모욕하는 이들에 맞선 그 모든 탈시설은 그래서 혁명이고, 탈시설한 장애인 한 명 한 명이 모두 혁명가다. 그 어렵고 대단한 일을 해낸 이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소연을 나 역시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2022. 11. 6) - P159

비대칭의 몸 위로 모욕과 혐오가 빗발친다.
"병신이 벼슬이야?"
"이러니까 동정을 못 받지!"
문명인들이 이토록 거칠어진 이유는 지각을 하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이렇게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죠!"
20분을 늦은 여자가 20년을 갇혀 산 여자에게 자신이 - P169

입은 피해를 보상하라고 핏대 세우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 또 다른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눈물 흘린다. 다른 쪽에선 경찰과 실랑이하다 넘어진 장애인을 어떤 남자가 쇼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며 가차 없이 끌어당긴다. 그리고 어른들의 아수라장 속에서 한 소년이 휴대전화를 꺼내 높이 치켜든다. 화면엔 "장애인의 시위를 지지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전장연은 지하철이라는 일상의 공간을 단번에 한국 사회의 가장 논쟁적인 무대로 만들었고 놀랍게도 시위는 1년 동안 지속되었다. - P171

"자기 인생이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높은 자신감은 어떻게 생기는 거예요?"
뜻밖에 규식의 대답은 ‘자기 인생이 얼마나 특별했는지‘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언어 장애가 있다는 건 단지 남들보다 느리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규식이 입을 열면 노인들은 혀를 끌끌 찼고 식당 주인들은 밥을 주지 않고 쫓아냈다. 20여 년 동안 온갖 투쟁을 이끌어온 대표적 활동가였음에도 그에게 마이크를 잡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규식은 생애 내내 이야기를 억압당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권리인지 뼈저리게 알았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타인과 관계 맺는 일이고 우정을 나누는 일이며 그들로부터 날마다 배우고 성장하는 일이라고, 규식 - P180

이 말했다.
작년에 규식의 동료들이 그의 자서전을 함께 쓰기 위해 팀을 꾸렸다. 그들은 규식과 끝없이 이야기하면서 마침내 규식의 생애를 완성했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중증 뇌병변 장애인의 생애사이면서 동시에 ‘이야기할 권리‘의 탄생을 알리는 아름다운 이야기책이다. 2023. 3. 5) - P181

"장애인도 인간이다. 이동권을 보장하라!"
내가 충격을 받은 건 장애인의 열악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 때문이었 - P184

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라는 언뜻 소박해 보이는 구호는 실은 장애인을 배제한 이 문명 전체를 문제 삼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고작 버스‘조차 탈 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거대한 세상에 맞선다는 건 얼마나 답이 없는 일인가. 그러니 사람들은 문제를 보고도 문제를 덮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며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2001년 내가 만난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을 문제 삼고 실패할 것이 분명한 싸움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저항하는 장애인들에게 둘러싸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우리는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웠다. 당장 가야 할 길이 막힌 사람들이 길길이 날뛰며우리가 법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참 이상한 말이었다. 장애인은 어길 법조차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벼랑 끝인 이들에게 이 사회는 신호를 지키라고 했다. 그러나 선을 넘지 않고서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열차를 막았고, 동시에 어떤 죽음을 막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동을 방해했고, - P185

동시에 차별과 배제를 방해했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들의 발목을 잡았고, 아프고 늙고 가난한 사람들을 버리고 폭주하는 야만적인 사회의 발목을 잡았다.
수억의 벌금을 내고 누군가는 구속되었지만 그렇게 우리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의 법과 제도를 만들어왔다. 그 기록을 묶어 책 《전사들의 노래—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오월의봄)를 냈다. 전장연의 일원으로 살았다는 게 인생의 자부심인 내가 우리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어 큰 영광이었다. 많은 사람이 읽어주길 바란다. 기록되었으므로 잊히지 않을 것이다. (2023. 4. 2) - P186

"여기 너무 싫어요, 화가 나요"라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기어이 "여기 좋아요. 내가 다녀본 병원 중에 제일 좋아요"라는 말만 들었다. 나는 속으로 ‘여기 병원 아니에요. 당신은 15년이나 갇혀 있었고, 여기서 죽을지도 몰라요. 정신을 차려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건 실행 가능성이 전혀 없는 희망고문일 뿐이었다. 1년에 한 번 카드를 내주고선 돈을 뽑게 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두고 ‘사회 적응 훈련‘이라고 말하는 요양원 측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빠르게 깨달은 나는 압도적 무기력에 투항해 그녀의 희로애락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래,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이 안에도 기쁨이 있고, 불안이 있고, 슬픔이 있고, 또 희망도 있겠지. 바깥세상의 잣대로 이들의 삶을 평가하는 건 부당하고 무례하고 오만한 일이라고 짐짓 반성도 하면서. 언제 희망을 느끼냐는 질문에 우쿨렐레를 어제보다 잘하게 되었을 때라거나 언제 고마움을 느끼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면회‘를 - P203

와줄 때라는 대답을 들으며 그 안의 삶에서도 일말의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을 존중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내가 몰입에 실패하고 정신이 번쩍 든 순간은 김진숙 씨의 동생들이 찾아오지 않는다기에 내가 별 뜻 없이 동생들 보고 싶으세요, 하고 물었을 때였다. 그녀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꿰뚫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지는가 싶더니 한순간 눈물이 차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럼, 내가 맏이인데, 동생들이 안 보고 싶겠어요?"
나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태도 변화에 당황해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말엔 슬픈 분노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시설병‘*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해서 시설병을 맞닥뜨리는 순간에 그것이 시설병인 - P204

줄 바로 알아챌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그녀가 엄청난 비극을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하게 읊조리는 그 이상한 불일치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그녀의 말과 표정이 처음으로 일치한 순간, 뒤늦게 그것이 시설병이란 걸 깨달았다. 시설병은 생각보다 훨씬 기괴해서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나가고 싶으세요?"
마지막 질문이었다. 그녀가 여전한 평온함으로 주저없이 네, 하고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그만 울고 싶어졌다. 그녀가 조금 지친 듯 말했다.
"나가고 싶다고 계속 말했어요. 그런데 여기 오래 살아야 한대요. 아버지는 늙었고 동생들하고는 같이 살 수 없대요."
그렇게 듣고 싶은 말이었는데 막상 듣고 나니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한마디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205

농업혁명의 일부로서 인간 진보의 핵심이라고 여겨졌던 가축화의 디테일을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차별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동물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이 사회의 토대가 되고 자연적 질서로 인식되면서 어떤 폭력과 무자비함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동물뿐 아니라 인간까지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다루게 된다. 바로 인간 노예제이다. 노예제는 동물을 예속화하는 가축화가 인간으로 확장된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이 미개한 동물을 지배하는게 마땅하듯 동물처럼 미개한 인간을 지배하는 것도 마땅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정복하고 싶은 인간들이 생기면 그들을 동물로 칭했다. 인간을 동물로 부르는 것 - P229

은 언제나 불길한 징후, 대량 학살의 징후다.
(...)
동물의 가축화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종차별로 이어지고 그것은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동물 같다‘고 낙인찍어 지배하는 인종차별로 이어진다. 이 책의 1부를 읽는 동안 1만 년이 흘렀다. 족쇄를 차고 새끼 - P230

를 빼앗기고 낙인찍히고 거세당하고 도살되는 동물의 모습과, 동물이라 칭해진 인간들이 동물처럼 낙인찍히고 거세되고 도륙당하는 모습이 마치 릴레이 달리기를 하듯 계속 이어진다. 어느샌가 그 순서와 구분이 모호해진다. 모욕과 도륙을 당하는 존재들을 보며 그 끔찍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내가 충격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죽음인지 동물의 죽음인지 헷갈리는 혼돈, 인간과 동물이 계속 겹쳐 보이는 환시를 느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저자가 원하는 일일 것이다.
(...)
산업화 이후 이 착취는 그야말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동물 착취와 인간 착취는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피는 2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도살장에서 시작되었다." - P231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 역사에 동물이 포함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 - P242

어떤 앎은 나에게 들어와 차곡차곡 쌓이고 어떤 앎은 내가 쌓아온 세계를 한 방에 무너뜨린다. 전자는 나를 성장시키고 후자는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을 때 나는 연신 감탄하며 동시에 이렇게 읊조린다.
"온통 잘못 알고 살아왔군."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거야."
나에겐 이런 이동의 순간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19년 전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났을 때이고, 두 번째는 1년 전 고양이 카라를 만났을 때이다. 두 사건은 18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지만 나에겐 거의 똑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몸의 반응이 그것을 말해준다. 멀미가 날 것 같은 상태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노들장애인야학을 만난 후 나는 줄곧 장애 인권의 현장에 있었 - P243

다. 그리고 요즘 두 세계 사이를 오간다. 하나는 ‘장애인도 인간이다‘라고 외치는 인간들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도 동물이다‘라고 외치는 동물들의 세계이다. 이것은 내가 경험한 가장 가깝고도 먼 이동이다. - P244

몇 년 전 장애인들은 ‘나는 개가 아니다, 나는 OOO(이름)이다‘라는 구호를 장애등급심사센터 건물의 외벽에 커다랗게 쓰는 시위를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질병수당을 받지 못했던 주인공이 지원기관에 항의하며 했던 행동을 오마주한 것이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와 함께 이 퍼포먼스는 제법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이 시위 기사 아래에 동물권을 옹호하는 어떤 사람이 불쾌함을 표현하며 ‘개와 소, 돼지는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겁니까?‘라고 공격적인 문제 제기를 하면서 댓글 창에서 격렬한 논 - P246

쟁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상대편에 있는 사람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니라 개와 소, 돼지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런 자신의 입장을 ‘우리를 개, 돼지처럼 취급하지 말라‘고 외치는 장애인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차별받는 존재들 앞에서 드러내는 저 용기가 그저 놀라웠다.
몇 년이 지나 이제 나는 그의 마음을 안다. 개와 소, 돼지들이 어떻게 살고 또 살해되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장애인이 어떻게 살고 죽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나를 정말로 어렵게 하는 건 내가 ‘그냥 인간‘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는 사실이었다. 한 번도 짐승 취급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문제 제기는 정당하지만 나는 그를 옹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동시에 나는 우리를 옹호하면서도 우리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십년간 싸워서 만들어낸 자그마한 성과를 짓밟게 될까 두려웠다.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두 세계 사이를 - P247

연결할 언어가 나에겐 아주 절실하게 필요했다.
(...)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동물산업 곳곳에 장애화된 몸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또한 동물의 몸이 오늘날 미국에서 장애를 가진 몸과 마음이 억압당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
"비인간화된 사람들(장애인들을 포함해)에게는 동물화에 맞서면서 자신들이 인간임을 주장해야 하는 절박한 욕구가 있다. 이런 도전은 절박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어떻게하면 인간의 동물화라는 잔인한 현실과 동물 멸시에 맞 - P248

설 필요성이 양립할 수 있는지 묻는 것,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자각할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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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들판의 꿈 - 그들의 배움, 그들의 투쟁, 그들의 일상
홍은전 지음, 노들장애인야학 / 봄날의책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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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훌륭한 교과서다. 기역니은을 가르치기 위해 때로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그 인생에 휘말려들 준비가 되었는가. 노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가."
‘일상‘이란 말은 내가 노들에서 배운 가장 멋진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단단한 말이었습니다. 나는 이 근사한 학교의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억눌린 게 많았던지 당신은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고 나는 ‘괜찮다‘는 말을 달고 살았었지요.
"소리 질러도 괜찮아요. 울어도 괜찮아요. 싸워도 괜찮아요. 무서우면 같이해요."
우리의 대화 끝에 항상 마침표를 찍던 ‘같이해요‘라는 말, 그건 또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 말이던지요. 열 번 스무 번 고민하고 나서야 겨우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말은 입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누군가를 조직한다는 것이 결국 나 스스로를 조직하는 일이었음을 시간이 한참 더 흐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가장 많이 변한 건 바로 나 자신이었으니까요.
우리에겐 할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한 존재이다. 세상에는 그 머릿수만큼 다양한 몸의 차이가 있고, 그것이 모욕과 멸시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우리에게도 지키고 싶은 삶이 있고, 그것을 다 빼앗긴 존재들에게 필요한 건 적응이 아니라 저항이다." - P296

당신을 따라 그 말을 외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따라 사느라고 조금 고단했습니다.
스무 해.
잡히지 않는 희망을 망연히 바라보면서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온몸으로 밀면서 온 시간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어서 걷고 달리고 굴려서 온 그 20년. 나는 우리의 역사가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이 버텨주었으므로 나도 버틸 수 있었고, 내가 버텼으므로 어느 날의 당신도 버틸 힘을 얻었겠지요. 우리 모두에게 수고했다고칭찬해주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지극한 것들은 다른 길을 걷더라도 같은 길에서 만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앞으로도, 오래,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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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들판의 꿈 - 그들의 배움, 그들의 투쟁, 그들의 일상
홍은전 지음, 노들장애인야학 / 봄날의책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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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대부분 뻔한 구도에서 장애인 당사자와 비장애인 조력자를 구분한다. 노들처럼 그것을 설명하기 좋은 곳도 없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강력한 자장 안으로 빨려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차별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차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그 경계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모두는 저항의 주체일 뿐이다. ‘노들과 같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노들을 그저 차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와 같은 구호는 수십 년 차별받아온 장애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이들은 그저 해가 지고 달이 지듯 버스를 풍경의 일부로 - P11

여길 뿐 자신이 ‘탈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싸우려는 자, 저항하는 인간만이 ‘발명‘해낼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까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노들이 궁금하여 찾아온 사람들은 약속한 듯 물었다. ‘무엇이 가장 보람되는가‘, 혹은 ‘이 공동체의 비결은 무엇인가‘로 요약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어떤 날은 ‘학생들이 한글을 깨우칠 때‘라고 대답하고 어떤 날은 ‘교사회의‘, 어떤 날은 ‘평등하기 위해 노력하는 관계‘라고 대답했지만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답들은 어딘가 조금 부족했던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틀린 답에 가깝다. 사람들의 진부한 질문이 싫었으면서도 나 또한 이 작업을 하는 내내 그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의도한 것이 아닌데, 실은 의도했던 것을 정확히 실패했기 때문인데, 나는 ‘노들야학을 하는 보람은 이거다‘라고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 ‘노들의 비결은 이거다‘라고 못박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다시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심술궂게도 ‘수많은 하루들‘이라고 대답하겠다. - P12

‘오늘 일어난 일: 아무런 특별한 별일이 없었다. 웃긴 했는데 무슨일로 웃었는지 모르겠다.‘

절묘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노들야학을 한다‘는 것이 깜빡거리는 형광등을 갈고 사라진 걸레를 찾아 돌아다니는 일처럼 사소할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웃을 일이 더많았으니 충분히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비록 정든 이들이 자주 떠나갔고 때로는 함께 공부하던 이가 사라지는 참담한 일도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날, 아무런 특별한 별일이 없었으므로 견딜 만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노들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눈에 밟혔던 것도 바로 그 사소한 일상이 아니었나요? ‘누군가는 노들을 지켜주었으면‘ 했던 당신의 이기적인 마음도 실은 누군가 남아서 형광•등을 갈고 칠판지우개를 털어주길 바랐던 것이라고 나는 짐작합니다. - P28

야학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공간이었지만 누구도 남으려 하지 않고, 남을 수도 없는 가난하고 외로운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도 누군가의 등을 떠밀지 못했으리라. 그때 박경석이 겸연쩍게 손을 들고 나섰다. 그가 야학을 사랑하는 방식은 ‘남아서키우는 것‘이었다. 그는 노들야학의 세 번째 교장이 되었다.

노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자

1997년 6월 10일, 별 준비 없이 초라하게 진행된 박경석 교장의 취임식은 단언컨대 노들야학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떠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에 야학을 자신의 인생에 묶은 최초의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청춘의 한 마디를 끊어서 야학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길 위에 야학을 얹어 보았다. - P59

이제부터 노들이 굴러간 모든 곳에 그가 있다. - P60

"작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것이 모래 위에 디딘 것인지 반석 위에 디딘 것인지 지금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흔적도 없이 바람에 날려 사라질지 모른다. 기억해야 한다. 조금씩 눌러주지 않으면 또다시 잊혀져버릴 흔적들을 기억하자. 우리에겐 세상 모든 길을 갈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다." 노들바람 - P75

운동이 사라져가는 시대였다. 야학은 장애인의 학력을 높여서 차별을 가리는 데에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저항의 가치를 실천하는 공간이 되어야 했다. 노들은 그 저항이 이름 있는 정치인의 힘찬 연설로서가 아니라, 방구석에 갇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수많은 중증장애인들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고 믿었다. 꽁꽁 숨어 있는 그들을 집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야 했다. 그러기 위해 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이 높고 - P79

고립된 정립회관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이 일들을 꾸준히 추진해나갈 사람이 있어야 했다.
2000년 7월, 한 청년이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아차산 언덕을 올라 야학의 문을 열었다. 에바다 투쟁에서 노들과 인연을 맺은 김도현이었다. 그는 활동비 5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야학에 ‘취직‘한 첫번째 상근활동가였다. - P80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 P88

권리는 법전에 있지 않았다. ‘배운‘ 사람들이 먼저 찾아서 하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권리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당연한‘ 저상버스와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바로 그 증거다. - P95

누군들 충돌이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시기 몇몇 교사들에게는 고통을 견디며 끝까지 밀고나가는 어떤 힘이 있었다. 두려움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일상 속에서 묵묵히 실천으로 증명했다. 어떤 교육파 교사는 어떤 운동파 학생과 함께 살며 그의 자립생활을 지원했고, 어떤 운동파 교사는 연극 수업에 들어가 ‘데모‘라면 기겁을 하는 학생의 삶에 오랫동안 귀 기울였다. 운동파가 교육파에게, 교육파가 운동파에게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교육이 절대 눈감지 말아야 할 것과 운동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참된 교육도, 진정한 운동도 지극한 정성으로 파내려가다 보면 그 뿌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지지. - P101

교육과 운동은 그들의 실천 속에서 이어졌고, 갈등을 대하는 그들의 성실했던 태도는 이후 충돌의 순간마다 회자되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교육과 운동 중 어느 하나가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단절이다.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교육과 운동 중 어느 하나가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삶에서 분리되어 홀로 내달리는 것이다. 노들야학이 이 시기에 어떤 질적인 변화를 겪고 거듭났다면 그것은 이동권 투쟁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다. 치열했던 갈등을 견뎌낸 사람들이 온몸을 떨면서 피워낸 꽃이다. 가장 진실한 배움이 설 자리는 바로 그런 곳이다. - P102

만약 전장협이 DPI와 통합하던 시기에 한국사회에 투쟁을 통해서, 당사자의 주체적 힘을 통해서 장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단체가 단 한 곳이라도 있었다면 노들은 이렇게 홀로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조직과 자금력을 가진 수많은 단체들이 있지만 그들은 이동권 투쟁의 현장에, 에바다 투쟁의 현장에, 그리고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죽어간 최옥란 열사를 보내는 길에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P107

정부에서 지급하는 예산에 사활을 걸고 상급 관료들의 기득권과 출세의 길이 침해받지 않는 한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 단체 또한 그 나름의 긍정적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 문제를 투쟁을 통해 권리로서 쟁취하고자 하는 단위와 그들과의 균형은 참혹할 만치 비대칭적이다. 이 척박한 지형 위에서 노들은 장애인운동의 딜레마와 가능성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담고 있는 유일한 공간일지 모른다. 그 무게감이 우리를 때때로 힘들게 한다. (...) 김도현 - P108

활동보조는 자원봉사와 달라서 행위의 주체는 장애인이고 보조인은 대신 수행할 뿐이다. 노동의 대가를 받으며 급여는 국가가 지급한다. 활동보조인은 이렇듯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전혀 새로운 관계‘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야학 교사가 아무리 자신의 활동은 ‘봉사‘가 아니라 ‘연대‘라고 주장해도 그 무게중심은 철저히 교사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장애인의 입장에선 이 비장애인이 언제 사정이 생겨 그 ‘연대‘를 중단하게 될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활동보조인이 없는 중증장애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몇 시간이든 오줌을 참는 일이고 눈앞에 밥을 두고도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에겐 가혹하게도 너무나 흔한 일상이어서 그것을 특별히 ‘문제‘라고도 인식하지 못했다. - P110

2003년부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활동보조인 파견 사업을 시행했다. 그즈음 전동휠체어도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활동보조서비스와 전동휠체어의 결합은 장애인의 일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걸을 수 없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걷게 된 격이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중증장애인이라도 전동휠체어를 운전할 수만 있다면 방구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일찍 누군가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앉기만 한다면 온전히 ‘하루‘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30년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상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은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 P113

한 시절 모든 악의 근원이 ‘이동할 수 없어서‘였다면 이제 모든 불행의 씨앗은 ‘활동보조서비스의 부족‘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새로운권리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 P115

2005년 말, 그가 노동부에 제출한 사업 기획안이 선정되면서 꿈은 급작스럽게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 열 명의 급여를 3년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 2006년 3월 세 번째 노들, 현수막 공장 ‘노란들판‘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이알찬과 퇴임한 교사들, 그리고 야학 학생 몇 명이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들야학이라는 공통분모를 믿었지만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 배움을 주고받던 관계와 직장 동료가 되어 함께 일을 하는 관계는 몹시 달랐다. 수업은 쉬웠지만 함께 일하기는 어려웠다. 현수막 주문을 받기로 한 노동자 J는 길이를 재는 단위인 미터(m)와 센티미터(cm)를 변환할 줄 몰랐다. 출력기를 다루어야 하는 노동자 Y는 기계가 표시하는 영어를 읽지 못했다. 학생일 때는 문제될 게 없었지만 노동자일 때는 사정이 달랐다. 버 - P118

려지는 현수막이 속출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학교가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야학이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을! 작업 지시서를 앞에 두고 즉석에서 수학 수업이 벌어지고 출력기 옆에서 알파벳 특강이 이루어졌다. 배움의 속도는 마음과 달리 속 터지게 더뎠다.
‘이알찬들‘이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었다. 그들 역시 현수막이라고는 대학 시절 볕 좋은 날 천을 펼쳐 놓고 붓으로 쓰는 모습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회사를 찾아다니며 연수를 청하고 듣도 보도 못했던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다. 보조금이 중단되는 3년 뒤에도 살아남아야 했다. 살인적 노동 강도에 피를 말리는 긴장까지 더해졌다. 장애인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그들이 차별받은 역사까지를 보듬는 일이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한다고 누가 돈을 줄 리 없었다. 당장 장애인이 할 수 없는 일들은 비장애인이 모두 메워야 했다.
‘이알찬들‘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다. ‘장애인의 속도를 인정하고 노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기계가 되고 총알이 되어야 했던 나날이었다. 늦은 밤 현수막을 ‘디자인‘해서 ‘출력‘을 걸어놓은 후, 기계 아래서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자다가, 출력이 끝나면 그것을 ‘마감‘하여, 새벽이 되면 사다리를 들고 ‘시공‘을 하러 나갔다. 야학에서 수업 마치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실천하기 위해서 ‘장애인도 일하고 싶다‘는 정당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은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아니라 협력과 연대의 정신으로도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 P120

2001년 이후 시간은 참으로 역동적으로 흘렀다.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장애인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외침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2003년에는 교육권을 보장하라는 부모들의 폭발적인 투쟁이 시작되었고, 2004년에는 정립회관 민주화를 위한 점거 농성이 231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2006년에는 장애인 수용시설이었던 성람재단의 비리를 해결하라고 종로구청 앞에서 153일 동안 농성을 했다. 또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교육지원법을 제정하라고,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하라고 농성에 농성에 농성을 거듭하였고, 무시로 집회를 하고, 도로를 막고, 단상을 점거하고, 토론회를 개최하고, 문화제를 열었다.
그사이 노들야학 사무국과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현수막 공장 ‘노란들판‘이 새롭게 문을 열었고 지역마다 우후죽순으로 자립생활센터들이 생겨났다. 이동권연대와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과 장애인교육권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결성되어 눈부신 활동을 펼쳤고, 다수의 노들야학 사람들이 그 활동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겨울이면 여의도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국회를 향해 소리질렀고, 여의도 윤중로에 벚꽃이 만개할 즈음에는 광화문에서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었고 저상버스가 의무화 - P131

되었다. 2007년에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도화되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장애인등의특수교육법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학습(學習)‘. 배우고 익힌다는 뜻. 우리는 ‘차별에 저항하라‘는 과제를 학습할 무궁무진한 기회 속에 놓여 있었다. 차별이 무엇인지, 저항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인권의식과 연대의식을 몸에 익혀 나갔다. 바야흐로 저항의 봄, 투쟁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은 그대로인데 불가능했던 많은 것이 다만 시간 속에서 가능해졌다. 혁명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시시각각 딛고 선 땅이 요동을 쳤다. 우리는 그 위에서 흔들리며 뒤섞였다. 부딪치고 넘어졌으며 균형을 잡고 일어서기 위해 서로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말했다. 당신들의 자식이 노들을 만난 후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고. 몰랐을 땐 그것이 삶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숨만 쉰다고 모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직 죽지 않은 존재‘로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20년을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제 우리는 단 하루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 P132

"조기 축구회에 비유하면 박경석 대표는 선수로 뛰면서 감독까지 하는 플레잉 코치였다. 이동권 투쟁은 엄청나게 커지고 있었고 그 속도는 참 빨랐다. 투쟁이란 타이밍이 중요해서 몰아쳐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급하게 먹어 치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꼭꼭 씹어 먹어야 피도 되고 살도 되는데 허겁지겁 먹다 보니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음식도 다 흘렸다. 투쟁하는 주체들이 그렇게 열의가 넘칠 때 자신들의 내용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더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김도현 - P138

‘장애인의 속도를 인정하라‘고 외쳤던 장애인운동의 속도는 역설적이게도 몹시 빨랐다. 너무 오랜 세월 허기져 살았으므로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장애인운동을 먹어치운‘ 사람들은 빠르게 몸집이 불었다. 곧이어 뒤늦은 사춘기가 찾아와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갑자기 큰 키에 살이 트고 무릎이 시큰거렸다. - P139

한편 비장애 활동가들 역시 말 못할 고충을 속으로 삭여야 했다. ‘느린 사람‘과 함께 활동하기 위해 자신은 더 빨라져야 하는 현실 - P139

을 긍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장애인의 교육권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것은 쉽지만,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과 당장 활동을 함께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활동보조서비스를 보장하라‘고 외치는 것은 쉽지만, 당장 활동보조인이 없는 중증장애인과 함께 일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었다.
이렇듯 둘의 고민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러한 관계는 장애인운동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기도 했다. 그들은 반쪽의 성장통을 나누어 가지며 함께 성장했다. 그들이 그렇게 서로에게 몸을 맞대고 있었기에, 그래서 서로의 고민이 엉켜 붙어 있었기에 어쩌면 장애인운동은 그토록 활활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 P140

노들의 힘은 이 치열한 일상성에서 왔다.
보통 ‘일상‘이라는 말은 ‘흘러가는 시간 속의 그렇고 그런 날들 중 하루‘를 뜻하지만 노들에서 말하는 일상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중증장애인에게 일상이란 가져본 적 없는 어떤 하루들, 그러니까 그들의 빼앗긴 인생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외출을 하고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사귀는 일이 그저 평범한 일상이지만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제 몸을 던져 싸워야 겨우 얻을까 말까 한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일들이었다. 노들의 가장 중요한 투쟁은 바로 이 일상을 만들고 지키는 일이었다. 이 작고 사소한 일상이 우리들의 인생을 끌고 나간다.
노들의 일상을 이끌었던 것은 바로 수업이었다. 수업이 우리를 만나게 했고 거기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수업이 아니었다면 30년간 서울 노유동의 작은 방과 창동 작은 집이 각자의 우주 전체였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장애 문제라면 명왕성만큼이나 멀리 있는 것으로 알았던 나 같은 사람이 그들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차산 기슭 작은 교실에서 만난 우리는 아득하게 달랐고 서로에게 모두 처음인 존재들이었다. - P144

그때 우리들은 몰랐다. 우리가 얼마나 긴 레이스의 시작점에 서 있었는지. 1년이 지나도 크게 진전되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칠 때에도 교사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한 사람이 기역니은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한지를. 상대방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로도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 P145

노들야학의 수업은 교실 속에만 있지 않았다. 배움의 자리는 사람들의 다양하고 끝없는 차이들 사이 어디에나 있었다. 사십여 명의 장애인은 모두 다른 몸을 가졌고, 이십여 명의 비장애인 역시 걸을 수 있다는 것 외에는 큰 공통점이 없었다. 그들의 사이사이에 배움이 필요했다. 제도권 교육을 받은 교사와 제도권 교육에서 밀 - P147

려난 학생들 사이, 다양한 몸들 사이,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 사이, ‘교육‘을 하고 싶은 교사와 ‘운동‘을 하고 싶은 교사와 ‘봉사‘를 하고 싶은 교사들 사이, 노들이 딛고 선 땅과 노들이 살고 싶은 세상 사이, 노들이 외치는 구호와 노들이 만드는 일상 사이, 신임교사와 교장 사이, 그리고 막 희망을 갖기 시작한 사람과 이제는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 사이. 그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노 저어가던 모든 과정이 노들의 수업 아니었을까.
구성원이 고작 육십여 명밖에 안 되는 이 작은 학교는 그러나 무수한 회의와 행사와 교육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것이 그들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이‘들을 대하는 노들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구석에 갇힌 사람들을 야학으로 데려오기 위해 매일매일 봉고가 돌았고, 교사와 교사의 사이를 잇기 위해 토요일 저녁마다 교사회의를 했다. 교사와 학생들을 잇기 위해 신임교사 길라잡이 교육을 했고, 야학과 세상을 잇기 위해 한강대교 위를 기었으며,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소식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노들은 끊어져 있는 수많은 ‘사이‘들을 잇기 위해 분투했다. 지하철 선로를 점거했고 모꼬지를 떠났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삭발을 했고 현수막 공장을 만들었고 단식을 했다. 춤을 추었고 토론을 했고 자립생활센터를 만들었다. 돈을 벌었고 가족들과 싸웠고 술을 마셨다. 활동보조를 했고 버스를 탔고 천막을 쳤다. 노래를 불렀고 구구단을 외웠고 활동가가 되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어김없이 1교시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무한히 변주되었다. 그 과정에서 노들의 삶은 일상도, 교육도, 운동도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 P148

복도는 참으로 불편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진 신경전 혹은 냉전, 복도는 그 전선이었다. 상근자들은 학생들이 매일 겪는 날것의 일상을 마주했다. 그나마도 많이 나아졌다고 하는 삶. 누구도 복도에서 함부로 안부를 묻지 못했다. 이쪽에서 경쾌하게 ‘식사하셨어요?‘라고 던지면 저쪽에서 무겁게 ‘아니!‘ 하고 받았다. 저쪽에서 조심스럽게 ‘바빠?‘ 하고 물으면 이쪽에선 재빠르게 ‘네!‘ 하고 응답했다. 모두가 ‘안녕‘하지 못했으므로 복도에서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설 자리가 없었다. - P187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 생활시간 보장‘을 요구하며 싸우는 노•들의 비장애 활동가들에게 그것은 연대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평화로운 밥상을 위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박한 밥상에 둘러앉아 그저 죄책감 없이 저녁식사를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노들의 뜨거운 밥상‘을 주제로 한 연간 기획이 끝나갈 무렵인 2011년 말에는 활동보조서비스 시간이 최대 360시간(하루 12시간)으로 확대되어 있었고, 늘어난 시간만큼 노들의 밥상도 조금은 식어 있었다. - P188

평생을 시설에서 살아온 사람이 그 시설을 나온다는 것은 결코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립은 사회적 환경이 만든다. 오직 옷과 밥과 집만이 인간을 자립시킨다. ‘마음‘이 필요한 때는 어떤 시기, 어떤 반찬, 어떤 스타일, 어떤 동네를 고를 때뿐이다. - P205

시설장애인은 활동보조서비스라는 개념을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잘 모른다. 활동보조인을 시설에서 일하던 직원 정도로 생각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거나 작은 행동 하나에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한다. 초기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 그 자리에서 서로의 호칭부터 정한다. 활동보조인에게도 시설이 어떤 곳인지 알려드리고 서로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 P206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그리하여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장애인을 격리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 먼저다. 장애인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 소통하는 것이 먼저다. 그들을 밀어내고 빼앗은 자리를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먼저다. 어렵지만 그것이 먼저다. 깨달음과 질문은 만나고 부딪치고 섞이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이다.
정신장애를 가졌던 교사 B도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자신은 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저 자주 꾸준히 만나면 저절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익숙해지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다 보면 모든 인간이 장점과 단점을 가진 채로 어울려 살아가듯, 장애가 격리와 배제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러다 보면 특별한 기술 따위 없이도 함께 살아가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키워진 자신을 보게 된다.
야학은 다양한 사람들을 끌어안으며 점점 함께 살 능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 힘이 강해질수록 노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자립 능력도 강해졌다. 누구나 처음에는 타인을 붙들고 일어서야 하므로. - P209

‘함께 놀기‘란 ‘함께 투쟁하기‘보다 어려웠다. 모든 놀이기구의 출구를 빠짐없이 기프트샵으로 연결시켜놓은 영악한 자본이 산도 깎고 강도 덮는 능력을 가지고도 기어이 휠체어 하나 들어갈 통로를 열어놓지 않았다. A와 함께라면 더딘 속도를 감수해야 했을 것이고, J와 함께라면 놀이 자체를 포기함으로써 놀이의 연대를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나를 분리하여 내 옹졸한 놀이의 영역을 확보했다. 몸은 자유로웠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돌이켜보면 ‘함께 놀기‘는 모꼬지를 떠난다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의 과정 속에서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 같은 것이었고, 우리가 ‘함께 산다‘는 문제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어지는 조건은 계속 달라졌지만 작은 차이를 들추어 우리의 분리를 부추기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유혹 앞에서 갈등했고 고개 돌렸고 분열했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실패를 시인하는 것, 그 조건 위에서는 결코 함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일지 몰랐다. 우리는 함께 노는 것에도 실패했고 함께 사는 - P242

것에도 실패했다. 오직 그렇게 고백할 때만이 함께 진실하다. 우리가 나누어 가진 분열의 추억만이 진실하다.
사랑과 봉사의 환상이 깨어지고 진정한 연대가 시작되는 곳은 고통스럽지만 정직하게 진실을 대면할 때이다.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다.
분열의 책임은 우리에게 없다. 다만 그 조건이 틀렸음을 말할 책임만 있을 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분열의 추억이 쌓인다. 함께 싸워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진정한 모꼬지는 아직 가보지 않았다. - P243

저녁 6시, 야학이 소란스럽다. 여자가 추석 선물로 양말을 한 켤레씩 돌린다. 어른이 된 소년은 동료의 기침 소리를 듣고는 감기 - P248

약을 사러 간다. 남자는 엊그제 부인의 속을 뒤집어놓은 것이 미안했던지 "그래도 너밖에 없다"며 음흉하게 웃어 보인다. 이렇게 착하고 평범하고 정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살았다.
1987년 내가 가족들과 물놀이를 갔을 때 소년은 목숨을 걸고 산속으로 탈출했다. 1997년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 남자는 진창 속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2009년 내가 장애인운동 활동가가 되어 탈시설 농성장에 불을 밝힐 때 여자는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산 속의 시멘트 길 위를 네발로 기어 도망쳤다.
"받아쓰기는 너무 어려워."
여자가 무심히 웃을 때 가슴에 바람 같은 것이 지나갔다. 너는 누구냐. 내가 놀고 꿈꾸고 성장하는 동안 손발을 묶이고 울음조차 짓이겨진 너는 도대체 누구냐. 누가 너를 가두어 이득을 취했고 이렇게 너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는 나는 또 누구인 것이냐. - P249

2007년 야학이 정립회관에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교육청은 ‘야학을 지원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말했다. 30년 전 자신들이 보낸 취학통지서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면서도 그들은 미안함을 몰랐다. 더 이상 밀려날 곳도,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던 사람들은 벼랑 - P252

끝에서 회관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대신 종로 한복판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종로 한복판에 교실 100평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산이 아니라 평지에서, 변두리가 아니라 도심의 한가운데서 교육받을 권리. 15년을 공짜로 얹혀살다 쫓겨난 신세들치고는 그 요구가 발칙했을까. 고작 마흔 명의 중증장애인들을 위해 ‘그 많은‘ 국민세금을 달라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는 듯 교육청이 코웃음을 쳤다.
그 지당하신 경제관념 덕에 수많은 K들이 학교와 동네에서 밀려나 눈부신 성장의 시간을 놓쳤다. 우리는 묻고 싶었다. 장학관님께서 다닌 초등학교는 ‘평당 얼마‘였는지, ‘비싼 땅‘에 있는 저 수많은 학교들은 도대체 누가 다니고 있는 것인지. 왜 어떤 이에게는 물을 필요조차 없는 질문에 누군가는 평생을 걸고 답을 해야 하는지. 그 답을 듣기 위해 노들야학 사람들은 80일간 농성을 했고, 마침내 종로 한복판에 교실 100평을 ‘쟁취‘했다.
이제 이곳에서 버티고 살아남아야 했다. 호시탐탐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밀어내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먼저 이곳의 토양이 바뀌어야 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변화해야 하는 곳, K들을 추방했던 최초의 그곳, 학교로 가자. 장애인 인권 교육 사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P253

그러다 K가 입을 떼는 순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반응‘을 한다. 이 교실에서한번도 일어난 적 없는 장면이 아이들의 눈과 귀를 붙든다. 잘 들리지 않는 말을 들으려고 귀를 갖다 대고 놓친 이야기의 빈틈을 채우려고 미간을 찌푸리고 눈동자를 굴린다. 아이들의 오감이 활짝 열린 이런 틈을 타고! ‘장애인이라서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같은 오묘하고 멋있는 말로 뒤통수를 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K가 내 뒤통수를 더 자주 친다. 자기 차례인데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천장만 바라보거나 간신히 입을 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예상에 없던 질문을 받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늘어놓는 대답이 줄줄이 반인권적일 때. 나는 밤샘노동의 본전생각이 난다.
K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지만 기억력은 비상하게 뛰어나고 차별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지만 인권의식만은 기가 막히게 균형잡힌 그런 사람이면 좋았으련만. K는 그저 범상하다. 내가 그러하듯이.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생고생을 몇 년간 사서 했다. 그것은 이 인권 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차별받은 당사자를 교육자의 위치에 세우는 것‘ 그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 P256

약자를 배려하고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은 익숙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그 관계를 깨야 한다. 약자에게 주어야 할 것은 권력이고 주변인에게 필요한 것은 중심의 자리, 자기 울음을 우는 주체의 자리이다.
오래전 밀려나고 사라진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조합은 낯설다. 그것을 기획하는 것은 상상력이지만 현실로 만드는 것은 용기 있는 실천이다. 낯선 조합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것이 말보다 더 크게 말하는 인권의 힘이다. 대학로 한복판의 장애인야학은 아름답다. 그리고 중증장애인 인권 강사 K는 힘이 세다. - P257

2014년 5월, 장애등급제 · 부양의무제 폐지를 위한 서울 광화문역 농성장에는 여덟 개의 영정이 들어섰다. 2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중 세 명은 이 농성장에서 서명운동을 펼치던 사람들이었다. 지병이 있었던 것도, 돌연한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 그들이 한 해에 한 명씩 거짓말처럼 저쪽 죽은 자들의 자리로 건너갔다. 삶과 죽음의 거리 고작 3m. 그러나 나는 그 거리를 실감하지 못했다. 그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뇌병변장애인이 아니므로 가벼운 화재쯤 재빨리 피할 수 있고, 돈 30만 원이 없어서 맹장이 터진 것을 끌어안고 지내다가 복막염으로 키우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가족에게서 버려진 지적장애인이 아니므로 사회사업가를 사칭한 어느 미치광이의 손에 평생을 능멸당한 것도 모자라 죽은 뒤에까지 차가운 냉동고에 갇혀 12년이나 방치될 가능성이 없으며, 나는 간질장애인도 아니므 - P258

로 장애등급 심사에서 ‘장애인 아님‘으로 판정받았다고 생계비 지원이 중단돼 자살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전형적인 장애인의 죽음이다. 바쁘게 지나가는 비장애인들의 발걸음이 저리도 무심한 것을 나는 쉽게 이해해버린다. 사람들은 어쩌면 제단 위의 저 죽음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저들은 이사회의 ‘안녕‘을 위해 바쳐지는 제물 같은 존재라고.
(...)
2014년 5월, 나는 안산 세월호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놓인 300여명의 영정 앞에 섰다. 이렇게 압도적인 죽음 앞에 서본 것은 광주 5·18 묘역 이후 처음이다. 나는 단지 ‘300‘이라는 숫자의 무게뿐 아니라 그들의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는 사실에 압도당했다. 그 짧은 거리가 거대한 음모와 탐욕 속에 주도면밀하게 끊어져 있음을 영화처럼 생생히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이즈음 나는 그 배를 탔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1년 동안 하던 작업이 마무리되면 꼭 배를 타고 제주로 여행을 가리라 다짐하고 배편을 검색하기도 했었다. 지난해 10월, 10만 권의 책을 싣고 제주 강정마을로 향하는 세월호를 타지 못해 아쉬워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러니 저 영정 하나에 내 얼굴을 넣어보는 것은 대단한 과대망상도 아니다. 그 앞에서 한참을 울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묻는다.
"당신은 혹시 ‘죽음‘이 아니라 ‘아이들‘의 죽음이 슬픈 것은 아닌 - P259

가? 나머지는 그저 ‘감수할 수 있는 정도‘의 ‘숫자‘인 것은 아닌가? 생명은 중요한가? 몇 사람부터 그러한가?"
그제야 나는 광화문 농성장의 영정들을 떠올렸다. 일곱 개의 영정이 이제 막 여덟 개로 늘어났을 때였다. 나조차 광화문의 저 많은영정들을 ‘남의 죽음‘ 보듯 했음을, 장애인의 죽음은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숫자‘로 보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내 순서는 오지 않을 줄 알고 죽음의 행렬을 관조하고 있던 나는 별안간 배가 뒤집히고 순번이 흐트러져버리자 당황하고 있었다. 나의 안전이 위협받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당신들에게 이 사회는 언제나 참사였구나. 당신들은 평생을 세월호에 갇혀 구조되길랐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느라 생을 다 써버린 사람들이 더는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의 바다에 뛰어들었던 거구나. 나는 또 누군가에게 미안해서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 P260

"이렇게 위험한데도 시설 바깥의 삶이 정말 좋은 건가요?"
사람들은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수학여행을 가다가 배가 뒤집혔다고 수학여행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그는 그저 사람답게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 P263

ב농성 초반에는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금방 무언가 바꿔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애등급제 폐지에 대한 자신감, 부양의무제 폐지에 대한 정당함. 사람들을 만나 친절하게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완전 폐지될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말이 이런 의미인 줄 왜 몰랐을까. 그렇다고, 뭐,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다, 무엇이 달라졌다고. 550일이 넘는 동안 달라진 건 늘어난 영정, 죽은 자들의 얼굴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벽의 위치와 단단함을 더 크게 느낀다.
농성장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우릴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불편하겠지. 그냥 지나가기도 쳐다보기도 말을 걸기도. 마음만큼 세상은 움직이지 않고. 사람들이 죽고, 춥고, 살아 있는 나는 고작 발이 시리다. - P268

누구는 가산점 1점을 위해 각종 자격증을 따는데 누구는 아직 제 이름 석자도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어떤 이는 평생 죽을힘을 다해 달려왔는데 어떤 이는 평생 같은 자리에 누워 창밖만 바라보았다고 했다. 처음엔 그저 연민이나 분노인 줄 알았다. 나를 잠시 - P290

멈춰 서게 한 그 힘은.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이 벼랑 끝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길을 만드는 것을 본 뒤 나는 깨달았다. 그것이 아름다움임을. 인간이란 존재는 어떠한 조건 위에서도 존엄함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러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을 믿어도 좋다는 사실을.
우리가 지켜주지 못해 안달했던 것은 아마 그것이었을 것이다. 연약해서 더 날카롭게 빛나던 그 아름다움을 지켜주고 싶어서 누구는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공장을 만들었고 누구는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극단을 만들었다. 어떤 날은 구청 앞에 불을 피우고 ‘활동보조서비스 더 있었더-라면‘을 끓여 먹었고, 어떤 날은 제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간 교장이 외로울까봐 구치소 앞으로 몰려가 수업을 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제 몸으로 지하철을 막겠다는 학생 하나를 선로에 내려주었고 그 죄로 구속되었다.
노들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유치한 연서를 읊어대기 시작한 이들이 벌이게 될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일들을. 그 폭발적 힘이 오직 그 자신들 속에서 나오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노들은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너희 안에는 이미 게바라도 있고 프레이리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너희 자신을 믿어도 좋다는 사실을. - P292

‘숨쉬는 것 빼고는 모든 게 차별‘이라고, 30년을 집 안에만 갇혀서 수인(人)처럼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나서 했던 첫 번째 일은 바로 일상을 만드는 것이었지요.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다니고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그런 평범하고 눈부신 일상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얼마나 지켜내기가 버겁던지요. 우리는 차별의 백만 가지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하루하루들은 정말이지 온몸으로 밀어야만 겨우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말했었지요.
"일상의 모든 현장이 교실이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이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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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
캔디(윤다림) 지음 / 들녘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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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날 ‘진정한 보호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우자도, 가족도, 친인척도 아닌 ‘그냥 친구‘니까. 그래서 이후 나는 ‘환자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친구‘라 답했던 일을 내내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호자의 자격은 무엇인가?‘ - P33

다시 거슬러가 생각해보면 나는 썩 좋은 보호자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치료 과정에 함께했지만, 치료 방향을 제시하거나 어떻게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환자가 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 후회가 없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력사는 워낙 고집이 강한 사람이니까, 괜히 그런 문제를 두고 대립하면 스트레스를 받을 테니까. 하지만… 어쩌면 나는 두려웠던 게 아닐까? 내가 주장하고 선택한 방법으로 치료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원망을 듣게 될까봐?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가 원하는 당근 주스를 만들고 레몬즙을 짜냈다. 환자의 질병을 낫게 해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적극적으로 따르고 소극적으로 주장했다. 력사는 이제 환자니까 서울에 올라와 있어야 한다고 강권했을 뿐,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병원에 다니고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 P43

토론하지 않았다. 막연히 병원을 신뢰했던 것이라고, 력사의 결정을 믿었던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두려워서 회피했던 것 같다. - P44

력사에게 말했다. 이제는 요양병원을 나와서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고. 그래도 력사는 듣지 않았다. 아니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에게 요양병원은 마지막 선택,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었다. 력사에게 요양병원에서 퇴원한다는 것은 곧 그 선택이 실패했음을, 더 이상 삶에 남은 희망이 없음을 의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와 친구들은 끈질기게 마음을 다해 력사를 설득했고, 결국 력사는 요양병원에서 퇴 - P47

원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그것이 력사가 세상을 떠나기 삼 주 전의 일이다. - P48

그리고 그 모든 것과 별개로, 그러한 상황에서도 환자를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한 인간으로 대하고, 여전히 소중한 친구이며 가족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그 목소리들이 환자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력사의 마지막 순간 우리 친구들은 줌(zoom)으로 모였다. 그때 그들이 건네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력사가 존엄을 가진 한인간으로서 사망할 수 있게 했다. 정말로 큰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각자 생각하는 존엄과 품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자기 신체를 통제하는 것, 어떤 이에게는 효능감과 유능감, 어떤 이에게는 또 다른 것이겠지. 이것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처한 상황마다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명확한 한 가지는, 이 존엄이라고 하는 것을 나 혼자 만들어낼 수는 - P70

없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삶이 존엄할 수 있도록 바라봐주고 말 걸어주는, 기댈 수 있는 옆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 P71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내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가 나서 력사는 친구들로부터 환송받으며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당시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병원은 간호·간병을 엄격히 관리하고 제한했고, 보호자는 최대 한 명만 상주할 수 있다고 했다. 이전까지는 어디든 내가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이번 보호자의 권리는 력사의 어머니가 가져가셨다.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자식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키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어머니께 힘들면 언제든 교대해드릴 수 있다고 거듭거듭 말씀드리고, 매일매일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며 병동에 들어갈 수 있기를, 가서 력사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력사는 이미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이따금 전화 통화를 할 때조차 력사가 엄마랑 24시간 붙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용건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눈치가 보여 둘만의 이야기 같은 건 거의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과 력사의 상황을 알 수 없었기에, 이때부터 나는 - P79

갈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공간에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매일 전전긍긍했다. 화도 났다. 내가 력사의 배우자였다면, 저 병동에 보호자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나였을 텐데. 어머니께서도 비록 자식의 죽음이 슬프지만, 자신이 아니라 력사의 배우자가 보호자로 동행하는 게 맞다고 동의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배우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아니었고, 력사가 가족에게 커밍아웃하지도 않았기에 어머니는 우리 관계를 전혀 알지 못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다행히 력사는 호스피스 병동에 오래 있고 싶어 하지 않았고 력사의 막내 이모가 집을 내주신 덕분에 첫 번째 호스피스 생활은 길지 않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은 두고두고 나의 권리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력사가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호스피스 임종실에 들어가던 날, 응급실을 통해 력사를 입원시키는데 보호자 한 명만 동행할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어머니께서 자연스럽게 함께 들어가셨다. 그렇게 력사와 - P80

어머니를 응급실에 들여보내고, 병원 로비에 앉아 한•참 울었다. 이젠 정말로 마지막일 것만 같은데, 나는 력사와 함께할 수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너무나 무력했고, 두렵고 또 두려웠다. 력사를 떠나보내는 것만도 두려운데, 력사에게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멀리서 사망 소식을 듣게ㅍ될까 봐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친구들이 찾아와 넋 놓고 있는 나를 근처 숙소에 집어넣어 주었다. 그렇게 자는 것도 안 자는 것도 아닌 밤을 보낸 다음 날, 력사의 어머니에게 연락이왔다.
"내가 간호사 선생님께 말해서 너도 같이 있어도된다고 허락받았어. 얼른 와!"
하늘의 도움인지 인간의 측은지심인지 아니면 그간 동고동락한 나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 때문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력사에게 갈 수 있으니 되었다. 나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 P81

6월 9일 저녁, 친구들이 연락해 와 력사와 함께 줌 미팅을 하자고 했다. 나는 전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다. 력사는 그냥 자고만 있다고,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다고, 그냥 안 하는 게 낫다고. 친구는 그래도 단호했다. "누가 반응해주길 바란다니. 그래도 력사가 우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말하며 력사에게 이어폰이나 꽂아주라고 했다.
그렇게 열린 회의실 제목은 ‘줌으로 ASMR_력사에게‘, 그 소개에는 "력사는 계속 잠을 자고 있어요. 그러나 들을지도 몰라요, 친구들의 목소리를 력사에게 꼭 들려주고픈 친구들의 말을 나지막하게 나누어요. - P86

력사 곁에 있는 캔디가 력사에게 이어폰을 꽂아주고 호스피스실에서 함께 들을 거예요"라고 적어두었다. 속속들이 모인 친구들은 력사에게 안심하라고 이야기하며 편지를 읽어주기도 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우리가 이렇게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력사에게 건네주는 마음들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날 늦은 시간 나도 어머님이 잠드신 틈을 타서 력사에게 소근소근 귓속말을 건넸다.
"너를 만나는 동안 나는 정말로 행복했어. 너와 함께한 시간들은 언제까지나 나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거야.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마. 사랑해."
답변도 미동도 없는 력사였지만, 분명 내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간은 이토록 차분하고 처절했다. 마지막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왜 난 그깟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 눈치 보고 숨죽여가며 해야 하는 걸까. 서글펐다. 이건 행운인가, 불행인가. 그냥, 지금 주어진 상황에 그저 감사하면 되는 걸까. 한순간도 평온할 새 없이 끝이 오고 있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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