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비사이드 콜렉티브 외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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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트랜스 정치는 애당초 페미니즘의 의제가 아니고, 또한 퀴어 연구의 의제도 아니라고 인식하는 이들에게 페미니즘과 퀴어, 그리고 트랜스 정치학은 어떤 관련도 없다. 그저 자격도 없는 트랜스가 ‘우리도 끼워달라‘며 징징거리는 것일 뿐이며, 페미니즘-퀴어-트랜스 사이의 불화는 트랜스의 불필요한 징징거림과 끼어들기로 야기된 것일 뿐이다. 트랜스만 없다면 불화도, 갈등도, 긴장도 생기지 않으며 여성 범주는 문제가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퀴어-트랜스의 중첩 지대에서 사유하고 활동하는 이들에게 이 불화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정동이며 불화 자체가 역사적 기록이다. 그렇기에 불화는 트랜스페미니즘을 첨예하게 고민하도록 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불화, 갈등, 경합으로 기술하는 논의는 무엇을 페미니즘으로, 퀴어 연구로, 트랜스 연구로 규정하는가를 질문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며 이론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에서 경합의 역사를 쓰고 있지만, 이것은 트랜스페미니즘의 역사, 혹은 페미니즘의 많은 논의 지형 중 하나의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단 한 번도 단일한 의제로 논의를 전개한 적 없듯 페미니즘이 퀴어 이론, 트랜스 연구와 교차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어떤 퀴어 연구나 트랜스 연구는 페미니즘과 무관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페미니스트가 지적했듯, 가부장제는 이성애 이원젠더 체제를 토대로 여성을 동질하고 단일하고 획일한 형태의 범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작동한다. 페미니즘 연구의 중요한 관심 주제 중 하나가 가부장제를 재/해석하는 작업일 때 이 작업은 여성 범주를 단일하지 않은 범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퀴어 연구 - P109

및 트랜스 연구와 동시적으로 사유될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트랜스를 통해 여성 범주에 위기가 발생하거나 불화가 등장한다고 인식된다면 이것은 단순히 페미니즘의 주체, 페미니스트의 주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동‘ 행위가 아니다. 페미니즘과 여성 범주를 매우 복잡하고 불화하는 것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가부장제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퀴어 연구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퀴어 연구에 혹은 LGBT/퀴어 범주에 트랜스가 포함되고 트랜스가 퀴어 연구나 커뮤니티에서 중요한 의제라고 인식된다면 이것은 지금까지 안정적 정체성 범주라고 인식한 여러 범주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전면 재검토하는 작업을 동반한다. 이것은 동성애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라기보다 동성애(그리고 반대의 성으로 구성된 이성애)와 같은 정체성 범주가 우발적이고 우연히 형성된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며 때로 정말로 불가능한 범주라는 이해를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랜스와 페미니즘의 관계가 지금까지 지속되는 역사적 불화를 계속해서 사유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라면, 트랜스와 퀴어의 관계는 은폐되거나 누락된 불화를 적극 사유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 범주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는 작업이다. 다른 말로 경합, 중첩, 불화를 사유하는 일은 서로의 긴밀한 관계를 적극 사유하며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 P110

이 ‘낫거나 아니면 죽거나‘ 어느 쪽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 P118

명명하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Arthur Frank가 제시한 ‘잠정적 (미)회복인 모remission sociey‘이라는 개념이다. 프랭크는 이 집단에 포함되는 사람들로 "암을 앓았던 사람들, 심장회복치료 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당뇨병 환자, 알레르기와 환경적 민감함 때문에 식이요법이나 다른 자기관리를 해야 하는 사람들, 인공기관과 기계적 신체조율기와 함께 사는 사람들, 만성질환자, 장애인, 폭력과 중독으로부터 ‘회복 중인‘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걱정과 또 하루를 잘 지냈다는 기쁨을 공유하는 가족"을 예로 든다. - P119

퀴어 장애 활동가이자 작가인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자긍심』의 2부 1장에서 장애인을 가리키는 여러 단어의 의미와 역사를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양쪽에서 검토하면서 이 용어들이 ‘퀴어‘처럼 당사자를 위한 이름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 바 있다. 클레어는 핸디캡, 장애인, 병신, 절름발이, 지진아, 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 프릭 등의 용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어왔는지, 다양한 시대와 맥락에서 어떤 용어들이 당사자 용어로 받 - P120

아들여지고 어떤 용어들이 차별과 혐오의 용어로 차용되거나 거부되었는지, 그러한 취사선택에 사회적 차원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어떤 역사가 얽혀 있는지를 탐구한다. 또한 각 용어마다 어떤 정동이 결부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면서 당사자 용어가 반드시 자긍심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용어를 자긍심으로만 새로이 덮어버리고자 할 때 그 용어에 담긴 차별과 억압과 수치심과 슬픔의 역사를 당사자들에게서 지워버릴 위험을 경고한다. 이러한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병리화와 낙인의 역사를 완전히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당사자 이름으로 기능할 수 있는 용어, 단지 자긍심의 이름으로서만이 아니라 자긍심과 수치심의 복잡한 얽힘을 품을 이름을 찾으려는 시도로서, 그리고 나의 경험을 서사화하는 이름으로서 ‘아픈 사람‘이라는 이름에 주목한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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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비사이드 콜렉티브 외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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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퀴어로 정체화했거나 퀴어에 적대적이지 않은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독자들에게 ‘장애는 - P20

퀴어다‘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전복적이고 해체적이고 이론의 첨단을 달리고 규범성에 저항하는 선언처럼 들린다면, 그 반대는 어떠한가? ‘퀴어는 장애다.‘
(...)
이런 불편함의 원인은 장애와 퀴어의 관계가 공통된 억압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낙인을 짊어지지 않기 위한 갈등과 반목의 복잡한 역사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가지를 꼽자면 첫째,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에서 성행했던 프릭 쇼freak show는 인종 · 국적 · 성별 · 성차 · 섹슈얼리티 · 비장애 등에 대한 당대의 규범을 바탕으로 구축된 외양의 정상성에서 어긋나는 모든 차이를 ‘인간이 아닌 괴물‘로 전시하였고, 퀴어와 장애 또한 이 타자성의 표식 아래 묶여 수집되고 볼거리 취급당해왔다. 둘째, 역사적으로 퀴어와 장애는 둘 다 병리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감시와 통제를 받아왔다. 동성애는 1973년이 되어서야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에서 빠지게 되었다. 트랜스젠더는 1980년 DSM 3판에 성별정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GID란 명칭으로 정신장애 항목에 추가되어 2012년 DSM 5판에서 ‘성별위화감 Gender Dysphoria‘으로 명칭이 한 차례 바뀌 - P21

었고, 1990년 세계보건기구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의 『국제질병분류Interm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ICD』 제10차 개정판에서는 ‘성별정체성장애‘, ‘성전환증Transsexualism‘이라는 이름으로 정신장애에 포함되어 있었다가 2018년 11차 개정판에 이르러서야 30여 년 만에 정신장애 항목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장애를 치료 또는 제거해야 할 생물학적 결함 내지 병리학적 상태로만 간주하는 사회에서 많은 장애인이 시설에 격리되어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해왔듯, 많은 퀴어들은 ‘전환 치료‘라는 명목 하에 감금과 고문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어왔다.
셋째, 이처럼 유사한 억압의 역사를 지나왔음에도 일반적으로 퀴어 진영과 장애 진영은 서로의 낙인을 기피하느라 껄끄러운 관계였다. 한편으로 주류 장애 운동의 남성 중심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인 경향으로 인해 퀴어이자 장애인인 사람들 및 퀴어 의제는 장애 정치에서 소외되어왔다. 한편, 다른 사회 영역과 마찬가지로 퀴어 학계와 운동판도 비장애 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다. 퀴어 이론에서 장애에 관심을 가질 때는 비주류에 일탈적 특성을 보이는 유형의 장애만이 퀴어함의 은유로서 소비될 때, 혹은 가장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인 비체의 은유로 신체적 · 정신적 장애가 소비될 때일 뿐, 장애와 장애인이 퀴어 이론 및 정치의 전면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무엇보다, 퀴어와 장애가 껄끄러운 관계를 맺게 만든 주된 요인은 병리화의 낙인이다. 정체성의 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주류 장애 운동은 장애인들이 장애가 있는 것만 빼면 모든 면에서 ‘남들과 같은 정상‘임을 주장하는 태도를 자주 취해왔다. 그 과정에서 사회에서 병리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특성들과 거리를 두곤 했는데 거기엔 동성애나 젠더 위반 등 퀴어에 - P22

속하는 특성도 포함되어 있다. 주류 성소수자 운동 또한 성소수자들의 특성이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인간 다양성에 속함을 강조하면서 장애 및 질환과 거리를 두어왔다. 이러한 대립은 퀴어와 장애 양쪽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더욱 주변부적인 존재로 만들 뿐만 아니라 때로 이들의 생존까지도 위협한다. 일례로 HIV/AIDS 이슈는 퀴어 이슈인 동시에 장애 및 만성질환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운동 및학계에서는 이를 언급하길 꺼려하며 HIV/AIDS를 가진 사람들을 장애 정체성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HIV/AIDS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요양 및 보건의료 지원이 절실하고 인터섹스와 트랜스젠더들에게는 지속적으로 호르몬제를 지원하는 등의 건강 서비스가 필요하기 때문에 퀴어 진영과 장애 진영 간의 거리 두기는 퀴어와 장애 양쪽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사회의 가장 위태로운 가장자리까지 내몰 수 있다. 그러므로 병리화의 낙인을 부수는 것이 장애와 퀴어의 생산적 연대의 발판을 마련하는 첫번째 과업이 될 것이다. - P23

병리화pathologization 개념은 의료화 medicalization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의료화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어떤 것이 병리적인 문제인지, 즉 의학의 대상인지를 정의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의료사회학자 피터 콘래드Peter Conrad는 의료화를 "의료적이지 않은 문제들이 의료적인 문제로―보통 병과 장애ilness and disorders로―정의되고 취급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의료화의 첫 번째 문제점은 일상의 거의 모든 영역이 의학의 대상으로 접수되어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건강과 질병의 문제로 환원된다는 점이다. 콘래드보다 앞서 의료사회학자이자 장애운동가인 어빙 K. 졸라Irving K. Zola는 의료화를 "의학을, 그리고 ‘건강‘과 ‘병‘이라는 이름표를 인간 존재의 점점 더 많은 부분과 관련되게 만드는" 현상으로 정의하면서 일상생활이 전부 의료화되는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더욱이 무엇을 의료적 틀에서 해석하고 기술하며 의료적으로 치료해야 할 문제로 정의할 것인가 하는 사안에서, 그러한 정의와 해석을 내릴 권한을 가진 의료전문가들은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을 지나치게 좌우해왔다. 의사들은 진단을 내리고 치료법을 처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운전능력을 평가하고 휠체어를 처방하고 재정 혜택의 할당을 결정하고 교육 설비를 선택하고 노동할 능력과 잠재력을 측정하는 일에도 관여한다." 물론 병을 근절해야 할 해악이 아니라 평생 더불어 살아가는 다양성의 문제로 접근하는 의사들도 있고, 당면한 증상의 제거에 집중하느라 환자의 전반적인 건강이 관심 사안 - P24

이 아닌 의사들도 있다. 그러나 의료전문가들이 이처럼 광범위한 영역에 개입할 권한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엔 분명하게 답할 수 없는데도 의학이 관할하는 영역이 계속 확장되고 의사들이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이익과 불이익, 특권과 배제를 둘 다 수여하는 사회적 기능에 문지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의료화의 ‘정의하는 능력‘은 실제로 그 대상자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 심각한 만성질환과 더불어 사는 페미니즘 장애학자 수잔 웬델Susan Wendell이 지적했듯이, 아픈 사람이 진단명을 얻지 못하는 경우, 즉 아프다는 본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대해 "의학적 승인"을 받지 못할 경우 아픈 사람은 아픈 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끊길 위험에 처한다. "보험금 청구, 보조금, 복지 수당과 장애 수당 모두가 공식적인 진단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병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프다고 거짓말하면서 제대로 일도 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는 인간으로 낙인찍혀 결국 "가족, 친구로부터 버림받는" 일이 드물지 않은 것이다.
의료화의 두 번째 문제점은 건강과 질병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는 것이다. 질병과 장애가 산업재해나 지속적인 폭력에의 노출 등 사회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의학에서는 그러한 맥락을 무시한 채 질병과 장애를 개인적인 불행이자 결함으로 간주하고 개인적인 층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우세하다. 이는 세번째 문제와 연결되는데, 질병과 장애를 개인화하는 관점은 건강을 좋은 것이자 나아가 보편적인 선으로 규정하는 건강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관점에서는 건강의 반대편에 있는 질병과 장애는 - P25

나쁘고 심지어 악한 것으로 간주되어 건강의 문제는 도덕적인 가치판단의 문제가 된다. 건강을 절대 선으로 놓고 질병과 장애를 개인화하는 관점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을 때 질병과 장애를 가진 개인의 행실은 모조리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비난받고 감시당한다. 트집 잡을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당신이 아픈 이유는 담배를 피워서, 술을 마셔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놀러 다녀서, 너무 문란해서 혹은 너무 엄격하게 자신을 단속하며 살아서 생긴 스트레스로, 너무 아무거나 먹어서 혹은 너무 가려 먹어서, 너무 못되게 굴어서 혹은 너무 소심해서 속에 있는 말도 못 하고 살아서, 심지어 페미니즘 같은 거 하느라 사회의 모든 것을 삐딱하게 받아들이다보니 병을 자초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무슨 이유 때문에 병을 얻었든 간에 질병과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은 개인화된 의료적 치료와 예방이라고 여겨진다. 이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다시 그 이유로 비난을 받으며 질병과 장애의 책임을 개인적으로 짊어지게 된다. 또한 건강 이데올로기의 견지에서는 질병과 장애는 곧 고통과 동의어처럼 여겨지는데, 바로 이 ‘고통‘이 질병과 장애를 계속해서 치료라는 의료적 과정 안에 속박하는 근거로, 나아가 완치가 불가능할 경우 그 장애인의 ‘근절‘을 지지하는 근거로 쓰인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고통이나 다름없다는 이유로 장애가 발견된 태아의 낙태는 물론 살아있는 장애인의 안락사가 대중적인 공감과 지지를 받는 것이다.
넷째, 장애 및 기타 소수자 특성의 의료화가 문제인 또 다른 이유는, 의학이 그러한 특성을 가진 이들을 병리적인 문젯거리로 규정하는 관점이 대중의 문화적 인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주류 집단의 구성원 - P26

이 그 소수자 집단의 구성원과 상호작용하는 방법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의료 전문가들이 장애를 결함으로, 만약 태아일 때 발견되었다면 낙태시켜야 하고 장애아동이 태어났다면 하나 더 낳으면 되는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은 장애아동이 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비장애인들에게 학대받을 위험을 증가시킨다. 또한 이런 관점은 퀴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치료‘랍시고 정당화하는 근거로도 동원된다.
장애학자 및 활동가들은 이러한 문제점에 ‘병리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반적으로 의료계에서는 병리화라는 현상 자체를 부인하거나 병리화와 의료화는 무관하다는 입장인 반면, 장애학계에서는 의료화가 적어도 장애 몸과 장애인의 병리화에 기여했다고 본다. - P27

더 중요한 것은 병리화의 작동 방식이다. 강제불임시술을 받았던 정신장애인과 한센인, 교정치료라는 이름의 고문을 받았던 자폐인과 정신장애인과 퀴어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병리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아파서 병을 치료하는 문제가 아니다. 병리화는 정상성normalcy을 생산하고 강화하는 기제다. 생물학적 다양성을 정상/병리의 차등적인 위계질서 안에 촘촘하게 줄 세워 배치하면서 ‘정상적인 몸‘을 구성하는 외부constitutive outside(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개념을 빌리자면)로서 병리적인 몸을 생산하는 것이다. 특정 몸이 정상적인 몸의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반대되는 비정상으로서 병리화된 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상성과 장애는 동전의 양면이다. 버틀러가 이분법적 젠더 규범 체계가 인간을 "좀 더 인간적인 것, 좀 덜 인간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 그리고 인간으로 생각되어질 수 없는 것"을 차별적으로 생산한다고 분석했듯, 병리화의 규범 또한 인간을 차별적으로 생산해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내가 쟤보다는 낫지‘ 이런 식의 줄 세우기를 통해 병리화가 그 자체로 피지배계층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 병리화는 장애인뿐 아니라 다양한 - P30

권력범주의 위계에서 하위로 밀려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낙인으로 소수자들이 겪는 공통된 억압을 표상하지만, 다른 한편 그 소수자들끼리 ‘나만‘ 병리화에서 벗어나자고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정상성 체계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역사적으로 장애와 거리 두기는 인종 · 여성 · 퀴어 · 이민자 · 재소자 등 다양한 위치에서 나온 사회운동들이 취해온 전략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결함 있는 존재로 형상화된다는 점을 비판하고 여성이 겪은 억압과 타자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장애를 은유로 동원함으로써 장애 몸에 대한 병리화를 묵인 내지 재생산하곤 했다. 비장애인 중심의 퀴어 공동체들도 병리화의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자신들도 건강하고 정상적인 시민임을 어필하면서 병리화의 짐을 장애에 떠넘겨왔다.
지배 담론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타자의 이름으로 호명되었을 때 ‘나는 정상이다‘를 주장하는 태도는 나를 제외한 다른 타자를 ‘비정상‘이라는 낙인 속에 내버려 두거나 처넣는다는 점에서 정상/비정상의 위계를 계속해서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소수자 집단끼리 서로에게 낙인을 떠넘기는 식으로 병리화를 벗어나려고 할 때, 병리화라는 틀 자체는 건드려지지 않고 계속 재생산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병리화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또한 병리화되는 집단 간의 이러한 거리두기는 양쪽에 속한 사람들을 더욱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있다. 이 난국에서 빠져나오려면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 P31

썩은 동아줄을 잘라내기 위해, 즉 기존에 만들어진 틀을 깨부수고 다 같이 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장애와 퀴어 연구자 및 활동가들은 각자 정상성을 해체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정상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당연시되고 어쩔 수 없다고 간주되었던 것들이 사실상 강제적인 규범으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냥 우리도 ‘정상인‘에 끼워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페미니즘이 기울어진 운동장 자체를 문제시하듯, 퀴어 장애 정치는 인간, 인간의 몸, 인간의 정신, 사회관계 모두를 정의하고 해석하고 재현하는 그 모든 방식에 특정 몸 · 정신 · 인간만 ‘정상‘으로 인식/인정하고 그 외의 것들은 열등하고 일탈적이고 병리적인 것으로 배제하는 위계가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음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
정상성을 깨기 어려운 이유는 특정 존재나 관습이나 규범이 자연의 섭리인 양 당연하게 받아 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주요한 정치적 실천전략으로 채택해왔던 정체성의 정치학은 가시성의 정치를 기반으로 한다. 즉 억압받아왔던 이들이 더 많은 가시 - P32

성을 획득하면 더 큰 힘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가시성과 힘의 상관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 그러나 사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는 단지 차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이 점을 지적하기 위해 페미니즘 장애학자 로즈메리 갈런드-톰슨Rosemarie Garland-Thomson은 ‘the normate‘라는 신조어를 제안한다. normate는 normal + -ate의 조합으로, -ate는 ‘어떤 직무, 임무, 신분, 지위, 직능을 가진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따라서 normate는 ‘정상인이라는 지위를 차지하는 자‘로 해석될 수 있다(물론 이 긴 설명은 개념 번역어로 적합하지 않기에 한글판에서는 작은따옴표를 사용하여 ‘정상인‘으로 표기했다). 갈런드-톰슨은 이 사회가 ‘정상인‘이라고 부르며 당연시하는 존재 형식이 그 자체로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상‘의 지위에 오 - P33

르도록 구성된 주체 위치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개념을 만들었다. the normate는 타고나길 정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신체적 외형과 그것이 쥐고 있는 문화 자본을 통해 권위 있는 위치를 수월히 차지할 수 있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들을 구성하는 정체성"으로 정의된다. 특정 존재들이 ‘정상인‘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른 부류의 존재들이 인간 주체가 될 수 없는 몸으로 규정되고 배척되어야 한다. 이 ‘정상인‘의 위치를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구성적 외부로서 갈런드-톰슨이 ‘보통이 아닌 몸extraordinary bodies‘이라 부른 몸들도 함께 생산되는 것이다. 갈런드-톰슨은 기준의 위치를 차지하여 너무도 당연시되는 나머지 눈에 띄지도 않고 굳이 표식을 붙일 필요도 없었던 기득권층에게 the normate라는 표식을 부여함으로써 누가 타자의 이름과 위치와 가치를 규정하고 판을 지배하는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로버트 맥루어Robert McRuer가 제시한 강제적 비장애-신체성compulsory able-bodiedness 개념 또한 정상성을 해체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맥루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생산하는 체계를 이렇게 명명한다.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은 인간의 특정 몸 형태 및 기능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물의 질서의 위상에 올려놓고 이 규범적 이상에 맞춰 몸들을 인식하고 명명하고 해석하고 식별하고 차별화하고 훈육하는 강제적 인식 체계라 할 수 있다. 건강하고 장애 없는 몸이야말로 정상성의 신화를 깨뜨리기 너무 힘든 영역이다. 일단 정상/비정상을 나누는 구분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강제가 있다는 증거지만, 비장애-신체는 이성애보다도 훨씬 더 당연시되어왔기에 그 강제성을 규명하기가 훨씬 - P34

어렵다. 만성질환 및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너도 사실은 장애가 없었으면(또는 안 아팠으면) 하고 바라잖아?" "이 빨간약을 먹으면 장애가 한 번에 사라진다고 하면 너는 먹을 거야?" 이런 무례한 질문들을 아는 사람에게서든 모르는 사람에게서는 끝없이 받는다. 이 질문들은 모든 사람이 건강한 비장애 몸을 선호하고 그것을 목표로 하리라고 전제한다. 권력이 지속적인 반복과 인용을 통해서만 권력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논증했던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를 가져와서 맥루어는 장애인들에게 이런 질문이 집요하리만큼 반복적으로 도처에서 쏟아진다는 것 자체가 그 질문이 기준 삼는 비장애 몸이 결코 자연스러운 몸이 아니라 그러한 집요한 반복을 통해 그 규범적 위치를 보장받는 구성되고 강제된 허구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분석한다.
나아가 정상성을 구축하는 강제적 체계들은 서로 긴밀히 공조한다. 이성애를 당연시하고 모든 사람에게 강제하는 이성애 중심주의와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서로를 뒷받침하고 의존하며 작동한다. 맥루어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강제성의 커넥션에 두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 첫 번째 체계는 젠더 이원론이다. 퀴어 · 페미니즘 · 장애 · 환경운동가이자 저술가인 일라이 클레어Eli Clare가 지적했듯, 젠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비장애 몸을 토대로 한다. ‘진짜‘ 남자나 ‘진짜‘ 여자로 여겨지려면 움직이고 걷고 서고 말하고 발성하는 특정한 코드를 수행해야 하지만 이러한 수행은 많은 장애인에게는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러한 코드들을 수행할 수 없는 장애인들은 섹스도 젠더도 없는 무성적 존재로 간주된다. 이는 장애인을 이중으로 병리화한다. 두 번째 강제적 체계는 건강 중 - P36

심주의다. 앞서 말했듯 건강은 단순히 몸이나 정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다. 건강은 건강/건강하지 않음을 좋음/나쁨, 심지어 선/악으로 재단하는 도덕적 가치 체계로서, 거의 성역이나 다름없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에 그 강제성을 알아차리기가 더 어렵다. 건강관리 담론은 병리화 담론과 맞물려 ‘정상성‘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강제적이고 규범적이다. 사실 ‘아픈 사람‘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라도 완벽하게 건강한 건 아니다. 건강은 어느 정도는 항상 상대적인 특성을 띤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은 철저히 자본주의적 노동생산성을 기준으로 구성된다. 건강관리 담론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이상에 맞춰 규범적 정상성에 자신을 맞추라고 사람들에게 끝없이 강요한다.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평가에 평생 시달리면서 모두가 생명력을 쏟아 부어 초과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는 건강의 ‘성공‘이란 평생 노력한들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은폐하기 위해서는 몸을 관리하라는(특정 규범에 맞게, 자본주의에 쓸모 있는 존재-부속품이 되게) 정언명령을 따르는 데 실패한 사람들을 본보기로 처벌하고 낙인찍을 필요가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병리화의 낙인이 찍힌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이라는 구성적 외부가 있어야만 ‘정상인thenormate‘의 지위를 차지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퀴어에 병리화의 낙인을 찍는 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은 퀴어는 이중으로 비난받는 위치에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병을 당 사자 탓으로 돌리는 온갖 비난 담론에 평생 시달리는데, 아픈 사람이 퀴어라면 ‘네가 퀴어라서 병에 걸렸다‘는 비난도 추가되는 것이다(이때 - P36

병은 천벌이나 인과응보의 의미로 해석된다). - P37

정리하자면, 오랫동안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자 모든 인간이 갖추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본능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모든 섹슈얼리티가 그런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누구의 섹슈얼리티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인간다운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누구의슈얼리티는 불편하거나 역겹고 있어서는 안 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것이 되는가를 따져볼 때,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아니라 누가 "이상적이고 규범적인 시민"인지를, 나아가 누가 ‘진짜 인간‘인지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규범적인 강제로 작동한다는이 드러난다. 모든 인간 존재는 성적인 본능을 갖는다는 전제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탈성애화는 장애인이 성적 존재로 있을 가능성도 자 - P44

격도 부인함으로써 장애인의 인간성을 박탈하는 ‘탈인간화‘의 형식인것이다.
장애인과 섹슈얼리티의 관계를 탐구함에 있어 탈성애화란 틀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외부에서 부과되는 에이섹슈얼리티와 당사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탐색하고 받아들이는 에이섹슈얼리티를 구분할 수 있다. 뒤에서 논하겠지만 이는 무성애자 당사자 단체와 장애 공동체 간의 갈등을 구조적인 층위에서 풀어나갈 방법을 제공해준다. 둘째, 장애인이 무성적 존재로 취급되는 것과 과잉성애화된 존재로 취급되는 것 둘 다를 설명하고 문제시할 수 있다. 셋째, 탈성애화를 프로세스로 본다면 성애화sexualization 또한 프로세스임을 드러낼수 있다. 성애화 또한 특권을 가진 비장애인 위치에 적용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장치를 통해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구축하고 가능케 하는 하나의 프로세스이자 역사적인 형성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P45

퀴어 이론가 주디스/잭 핼버스탬Judith/Jack Halberstam은 사회를 직조하는 규범적인 시간성의 서사가 있으며 그것이 이성애 - P47

적 각본에 맞춰 구성되었음을 폭로한다. 출생 시 여성으로 성별을 지정받은 아이는 어렸을 땐 선머슴처럼 굴더라도 자랄수록 여성성을 체득해야 하고, 반드시 남자를 좋아해야 하고, 이성애 섹스를 하고, 결혼을 하고, 가족 제도에 들어온 다음에는 임신-출산-양육을 차례로 완수한 뒤 마지막으로 자손에게 유형 · 무형의 유산을 상속하는 재생산 코스를 따라가야 한다는 강제가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Lee Edelman은 ‘재생산 미래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성애 규범적사회에서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고 규정하고 정치 담론의 틀을 짜는 내적 논리를 형성하는 기준은 ‘아이‘라는 이미지이고, ‘아이‘를 기준으로 구축된 인식 틀은 퀴어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즉 사회정치 영역의 철저한 외부로 상정함으로써 이성애 규범성에 절대적인 특권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에델만과 핼버스탬은 이성애 규범적인 재생산 시간성에 대항하는 다른 시간성이 퀴어들에게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이러한 시간성에 맞서는 모든 이들을 퀴어라고 명명한다. 장애학자들은 이런 견지에서는 장애인도 퀴어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말했듯 비장애 중심적 사회는 장애인의 재생산을 탄압한다. 재생산 미래주의에서 원하는 ‘아이‘는 건강한 비장애인 아동이고 젠더이원론과 이성애체계에도 부합하는 아이다. 때문에 장애인들은 퀴어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가 재생산 미래주의의 수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배제해야 할 비체로서 사회정치 영역의 바깥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 다음엔 쫓겨난 존재로서 이성애 규범적 시간성을 따를 수 없다는 점이 다시금 사회가 이 추방을 정당화하는 근 - P48

거로 쓰인다. 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장애인은 이성애 규범적이지 않은 대안적인 시간성을 살아가고 대안적인 성적 실천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 P49

미국의 역사학자며 트랜스젠더 이론가인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는 「트랜스젠더 연구: 퀴어 이론의 사악한 쌍생아Transgender Studies: Queer Theory‘s Evil Twin」라는 논문에서, 최소 1950년대부터 트랜스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활발한 사회 저항 운동 및 시민권 운동의 일부로 트랜스 운동이 진행되었음에도 1990년대 들어 트랜스 이론이 구성될 수 있었던 배경을 네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그 중 중요하게꼽히는 배경 중 하나는 1990년대 출판된 주디스 버틀러의 책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이다. 버틀러는 그 책에서 태어날 때 ‘여성‘으로 지정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젠더범주를 필연적으로 ‘여성‘으로 가정할 이유는 없으며 만약 태어날 때 - P79

지정받은 젠더와 그 개인의 젠더 범주 사이의 강제적 일치를 가정한다면 이는 섹스가 아니라 젠더가 타고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버틀러는 그의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의 젠더 재구성 및 몸 변경 경험, 드랙킹과 드랙퀸의 무대 공연 실천을 예로 들기도 하며 젠더를 수행성으로, 트러블로 재개념화했다.
버틀러가 젠더를 트러블로, 불안정하고 우발적 범주로 재개념화하는 작업은 1990년대 이후 젠더 논의에 있어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고 젠더를 중요한 의제로 만들었다. 한편으로 버틀러가 젠더를 트러블로, 수행성으로 재개념화한 작업은 트랜스젠더퀴어 이론가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개념은 그 자체로 트랜스젠더퀴어의 일상 경험으로 독해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P80

트랜스젠더퀴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거나, 트랜스젠더퀴어 인식론을 모색하는 연구는 젠더 연구가 아닌가? 트랜스젠더의 젠더와 페미니즘의 젠더는 다른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인가? 트랜스젠더퀴어와 관련한 글은 젠더 연구가 아니라(!) 트랜스젠더 연구며, 트랜스젠더의 젠더와 페미니즘의 젠더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인식은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팽배하다. 2015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대중화되고 그 과정에서 트랜스를 향한 혐오가 폭발적으로 가시화되면서, 젠더는 트랜스젠더퀴어를 부르는 은어일 뿐이고 그렇기에 젠더는 폐기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발언도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여성의 ‘진짜‘ 삶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을 설명할 수 없게 하는 개념이라는 비판을 받기도한다.
그런데 버틀러의 젠더 논의에 대해 페미니즘의 논의라기보다는 - P81

퀴어 논의에 더 가깝다, 혹은 페미니즘 논의가 아니라 퀴어 연구다라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제2물결 페미니즘이 등장하고 여성 주체 개념 혹은 젠더 개념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트랜스젠더퀴어가 지속적으로 경계 분쟁을 일으켰고 이 분쟁은 여성 범주를 구성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이 역사가 누락된다. 둘째, 버틀러 이전부터 이미 젠더를 트러블로 이해하거나 젠더를 여성 아니면 남성의 합으로만 다룰 수 없음을 지적한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적 계보를 망각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마치 버틀러 이전의 페미니즘 논의는 젠더를 여성의 관점, 여성과 남성의 관계로만 다루고 있었고 따라서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버틀러가 ‘여성 문제‘를 등한시 하도록 망쳤다는 식이다. 바로 이 두 가지 문제점을 꼼꼼하게 살피는 작업은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퀴어 정치학 사이의 긴장과 불화를 살피는 작업이기도 하다.
1960년대 즈음 제2물결 페미니즘이 등장한 이후 mtf/트랜스여성의 존재는 페미니즘에서 지속적으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대표적 사건을 언급할 수 있다. 하나는 레즈비언-페미니즘 단체에서 활동했던 레즈비언 트랜스섹슈얼 가수인 베스 엘리엇Beth Eliott이 페미니즘 공동체에서 추방된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만을 위한 운동에 참가해서 활동하던 트랜스섹슈얼 샌디 스톤Sandy Stone이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떠났던 사건이다. - P82

트랜스젠더 혹은 mtf/트랜스여성이 인공물이라는 인식은 트랜스젠더가 성전환 수술을 통해 몸의 형태를 바꾸고 젠더화된 외형을 갖춘다는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이해는 인공물인 트랜스젠더퀴어와 자연스러운 진짜 여성이라는 이항 대립 구도를 구축한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퀴어의 젠더 실천은 부자연스럽고 무엇을 해도 과잉이거나 부족해서 의심스러운 반면 비트랜스의 젠더 실천은 성역할 규범을 위 - P84

반하거나 전복할 수는 있어도 과잉으로 독해되지는 않으며, 성역할 규범에 부합할 때도 그 삶은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구조를 말해주는 것으로 설명되지, 성역할에 부합한다는 점이 가부장제의 최전선에서 여성 억압을 재생산하는 존재라고 설명되지는 않는다. 엘리엇과 스톤이 겪은 추방 사건은 페미니즘의 주체 구성에서 트랜스젠더퀴어가 매우 중요한 의제였음을 역설한다. 제2물결 페미니즘은 여성을 생물학적 본질로 규정하는 본질주의 해석에 도전하며 등장했다. "여성은 원래 가사 노동을 잘 하고 아동 양육에 적합하며, 남성은 원래 가사 노동을 못하고 성욕을 못 참는다"와 같은 언설은 여성과 남성을 본질화하고 이는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전형적 논리였다. 페미니즘은 바로 이런 본질주의를 문제 삼으며 등장했다. 그렇기에 여성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고 가부장제가 주장하는 그런 여성의 본질적 속성, 본질적 역할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질문하는 데에선 논쟁적이었다.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는 당연한 본질이라고 생각했으며 단지 사회적 성역할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이었다. 트랜스는 인공물이라는 언설은 바로 이처럼 여성 범주를 질문하지 않는 흐름에 토대를 둔다.
반-트랜스 입장을 취한 일군의 페미니스트 진영(적극적으로 반-트랜스 입장을 취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을 포함한다)은 트랜스를 끊임없이 추방하고 트랜스여성은 여성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다시 동원하며 경험을 본질적 공통 토대로 만들고 이 토대를 근거로 여성을 규정하고자 했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권력자이자 가해자며, 여 - P85

성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받은 피해와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남성 없는 세상, 남성 없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곳에서 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본질주의 페미니즘(때로 영성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형태로 등장함)은 여성만의 공간을 구성하고 여성의 진정한 자아, 가부장제에 상처받지 않은 본질을 되찾고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가부장제에 오염되지 않은 진정한 여성의 본질을 가정한 결과였다. 여성만의 공간, 여성의 진정한 본질 회복이라는 아이디어에서 mtf/트랜스여성은 즉각 논쟁거리가 되었다. 누가 여성인가? 누가 여성일 수 있는가? 누가 분리주의 공간에 참여할 수 있는 여성인가? 만약 여성은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여성과 동일시 하는 여성woman-identified woman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때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여성과 동일시하는 mtf/트랜스여성은 분리주의 공간에 참가할 자격을 갖는가? 만약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것만으로는 여성 공간에 참여할 자격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태어날 때 의사가 여성이라고 지정/인정한 사람만이 분리주의 공간에 참여할 수 있는가? 현재의 신분증이 보장하는 성별 표기가 아니라 출생신고서가 보장하는 성별 표기가 유일하게 권위있는 참가 자격증인가? 그렇다면 여성 분리주의 공간에 참가할 자격은 사실상 의사가 결정하는가? ftm/트랜스남성은 분리주의 공간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인가? 참가할 수 있다면 남성임에도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인가, 남성이라서인가? 이런 일련의 질문을 야기하는 여성 분리주의 정치학은 섹스를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성, 젠더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으로 구분하는 설명 방식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제2물결 페미니즘이 등장하고 이론의 기틀을 잡기 시작할 당시 섹 - P86

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논의는 페미니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여성이라는 성역할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주장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즉 여성이라는 섹스로 태어난다고 해도 여성 성역할이라는 젠더는 사회문화적 특징을 반영하지 그것이 여성의 타고나는 특징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성역할을 근거로 여성을 억압하는 많은 논리를 비판할 근거가 되었다. 예를 들어 앤 오클리Ann Oakley 같은 페미니스트는 1970년대 섹스의 불변성을 인정하듯 젠더의 가변성도 인정해야 하며, 섹스는 내용물을 담는 그릇이며 젠더는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섹스와 젠더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여성이 겪는 여러 억압 중 특정 형태의 억압은 설명할 수 있기에 유의미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트랜스젠더퀴어의 섹스변형 가능성을 부인하는 해석이기도 하다. 섹스는 변하지 않는다는 해석은 신체는 변할 수 없지만, 그 신체에 부여되는 의미/성질은 다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mtf/트랜스여성이라면 신체는 변하지 않기에 여성일 수 없으며 기껏해야 여성스러운 남성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섹스와 젠더를 구분할 때 등장하는 흔한 설명인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그것이 해방 정치와 비판 이론의 중요한 분석 도구로 등장했다고 해도 여성을 생물학적 결정론에 복속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로 이것이 버틀러가 섹스-젠더 구분 공식에 따른 이원젠더 체제에서는 섹스뿐만 아니라 젠더도 본질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이유다.
페미니즘에서 트랜스의 추방과 배제는 트랜스 없는 페미니즘을 - P87

구축하는 작업이 아니라 트랜스를 통해 페미니즘 젠더 정치의 경계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물론 누가 여성인가, 어떤 여성인가라는 정치적 논쟁은 페미니즘에서 늘 존재했고 이 논쟁은 페미니즘이 정치적 지형을 확장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인종이나 장애와 같은 범주는 ‘결국 여성‘이라고 할 때의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서구 사회에서 비백인(피부색 혹은 인종)은 ‘인간‘으로 ‘인정‘받고 ‘대우‘받는 데 오랜 시간의 투쟁이 필요했지만, 현재 흑인 여성을 비롯한 비백인 여성 역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말이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페미니스트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가 한 인터뷰에서 mtf/트랜스여성과비트랜스여성은 결코 동일한 경험을 하지 않았기에 mtf/트랜스여성은 ‘여성‘일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인종이나 장애가 ‘여성으로 태어났음‘을 부정하는 범주로 기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인종이 여성 범주를 의심하는 권력 장치로 작동한다면, 한국 여성은 한국이라는 상상적 국경 내부에서는 ‘여성‘이라는 범주를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전지구적 차원에서는 그 어떤 ‘한국 여성‘도 결코 ‘여성‘일 수 없다. 인종이나 장애가 여성 범주를 다시 사유하도록 하지만 여성 범주 자체를 완전히 흔들지는 않는다면, mtf/트랜스여성은 여성 범주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확신하고 단언할 수 없는 범주로 재구축한다. 이 사회에서 작동하는 많은 권력 작동 장치 중 거의 유일하게 젠더/젠더 정체성이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문구를 부정하는 데 쓰인다.
젠더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섹스에 근거하여 결국 변하지 않는 여성이라는 개념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방식에 강 - P88

력히 문제제기하는 이론들이 트랜스에만 의지해서 젠더 개념을 수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제제기가 버틀러가 젠더를 트러블로 재개념화한 작업 이전부터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논의가 축적된 성과이기도 했음을 이제 살펴보고자 한다.
섹스와 젠더의 관계 자체를 재규정하려한 시도는 제인 플랙스Jane Flax의 1987년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플랙스는 페미니즘의 근본 목적이 젠더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플랙스는 우리가 젠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질문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하길 회피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방법도 같이 질문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젠더를 어떻게 생각하고 겪는지를 분석하는 작업에서는 젠더를 어떻게 오직 둘 뿐인 것으로 생각하는가, 어떻게 젠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젠더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거나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가를 분석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플랙스는 당시의 페미니즘에서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던 질문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는 해부학적 성차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젠더는 오직 둘 뿐인가?"와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89

젠더가 상호 관계적이라는 측면에만 주목하면 이 언설은 결국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상호 관계라고 수렴될 수 있다. 하지만 젠더가 상호 관계적이라는 측면을 생각하는 동시에 젠더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측면도 같이 생각한다면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 범주는 또한 그것으로 수렴될 수 없는 다른 많은 젠더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비규범적 젠더와의 관계를 통해 ‘여성‘과 ‘남성‘이라는 범주가 구성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플랙스는 트랜스젠더퀴어를 직접 언급하거나 논하지는 않고 있다. 당시 트랜스 정치학에서 주류 용어인 트랜스섹슈얼 역시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플랙스의 주장은 최소한 젠더를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사유하는 방식에 문제제기를 하고 젠더를 통해 사유하지 않는 측면을 생각하도록 요청했다는 점에서 트랜스 논의와 어떤 접점을 형성한다. 남성과 여성의 위계 질서 및 여성성에 모든 부정적 속성을 귀속시키는 가부장제의 작동 양상은 한편으로 여성성을 확장시키고 여성성을 퀴어하게 만드는 역설을 낳지만 동시에 여성/여성성에 모든 비규범적 속성, 부정적 속성을 귀속시키면서 트랜스를 삭제하고 사유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 전자는 퀴어함 혹은 비규범적 실천이 비규범적 속성을 정당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언제나 규범 자체를 문제 삼고 규범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의가 흐를 수 있도록 한다. 후자는 남성성-여성성(혹은 남성성-비남성성)이 결국 이원젠더 체계를 강화하고 트랜스 등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명명 - P90

할 수 없는 많은 실천을 사유와 인식의 가능성에서 삭제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즉 트랜스나 퀴어가 별개의 정치학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을 때도 그 필요가 무시된다. 그런데 전자와 후자는 서로 무관하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며 언제나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트랜스는 젠더를 논함에 있어 언제나 사유와 인식의 외부로 추방되고 이 추방을 통해 여성과 남성을 자연스러운 젠더 범주로 구축한다. 여성과 남성을 자연화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트랜스/퀴어가 이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라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 플랙스는 섹스 젠더 구분 공식 역시 다시 사유하고자 한다. 만약 섹스가 해부학적 차이이자 생물학적으로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면 이때 생물학은 "전-사회pre-social" 혹은 "비-사회non-social" 현상이 된다. 이럴 경우 ‘성차란 과학적 사실이다‘ 혹은 ‘성차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는 주장은 결국 성차를 여성과 남성의 해부학적 운명으로 만든다. 무엇보다 섹스를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언설을 반복하고 강조하는 행위는 많은페미니스트 과학자가 과학적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과학적 사실, 객관적 사실이 부분적 진실, 당파적 사실이라고 지적했다는 점을 전적으로 부정할 위험이 있다. 생물학과 같은 과학의 부분성, 당파성을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왜 근대 사회는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범주를 필요로 했는가를 질문할 수 있음에도, 생물학적 여성과 같은 섹스 본질주의 논의에서 이 질문은 가당찮은 헛소리가 될 뿐이다. 섹스-젠더 구분 공식을 반복할 때, 젠더 배치를 바꾸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으며 인간 활동에서 젠더 경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 - P91

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젠더 개념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페미니스트의 시도는 플랙스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는 1991년 발표한 논문에서 젠더를 이야기할 때 "섹스의 언어로 젠더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질문하며 우리가 정말 섹스와 젠더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보다 훨씬 앞서 조안 스콧Joan W. Scott은 젠더 분석을 여성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역사를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분석틀, 인식론으로 사유할 것을 주장했다. 페미니스트 생물학자 앤 포스터-스털링 Anne Fausto-Stering은 아예 인간은 오직 둘 중 하나로만 태어나는 것이 생물학적 사실이라는 가정 자체에 문제제기하면서 생물학적 사실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가지 섹스로 태어나지 않음을 지적한다. 즉 인간은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오직 둘 뿐인 섹스로 태어난다는 해석, 인간이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게 사실이니 의문시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인식은 그 자체로 인간은 남성 아니면 여성이어야 한다는 젠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생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대한 지속적 문제제기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했던 여러 페미니스트가 각자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제기했던 질문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섹스-젠더 개념을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논의는 버틀러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에 팽배한 논의였다. 즉, 버틀러 한 명을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퀴어 이론가로 추방하면 페미니즘 내부에서 발생한 여성 범주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는 사라지고 여성의 몸을 본질화할 수 있다는 인식은 크나큰 착각이자 페미니즘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일일 - P92

뿐이다. 물론 최근 들어 델피가 젠더는 가부장제나 성차별주의를 은폐하기에 폐기되어야 할 용어라는 주장에 동조하고, 포스터-스털링이 트랜스 혐오 발화에 동의하는 발언을 하여 많은 이들을 실망시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 섹스와 젠더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한 역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페미니즘은 한두 명의 유명한 이론가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1990년대 트랜스젠더퀴어 이론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젠더 개념 논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과 함께 페미니즘에서 젠더 개념을 구성하고 여성 범주를 사유할 때 트랜스젠더퀴어가 상상적 경계, 구성적 외부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앞서 나는 스트라이커가 트랜스 연구를 퀴어 이론의 쌍생아로 표현한 논문을 언급했다. 그런데 쌍생아는 부모 혹은 어떤 조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부모 혹은 조상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은 퀴어 이론과 트랜스 이론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런데 트랜스 이론을 페미니즘의 사악한 쌍생아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젠더 개념 논쟁에 있다. 만약 트랜스를 기본 인식론으로 삼는다면, 젠더를 논함에 있어 타고나는 여성을 가정하지 않고 여성 범주 자체를 우발적이고 우연한 사건/행위라는 점을 분명하게 재인식한다면, 이때 페미니즘의 주체인 여성은 임의로 가정할 수 없는 특성이 된다. 무엇보다 여성의 어떤 공통점을 함부로 구성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리하여 페미니즘의 주체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뿐이다. 바로 이것이 트랜스 연구가 사악한 이유다. 트랜스를 사유하기 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혹은 트랜스만 추방하면 된다고 여겼던 여 - P93

성 범주가 가장 논쟁적이고 문제가 많은 범주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분리주의 페미니스트가 트랜스를 그토록 추방하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트랜스 연구는 페미니즘의 사악한 쌍생아(자식?)일 뿐만아니라 퀴어 이론의 사악한 쌍생아(형제자매남매?)이기도 하다. 퀴어이론의 토대 역시 흔들기 때문이다. - P94

퀴어 이론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이론적 축적은 무시할 수 없는 큰 역할을 하지만 그럼에도 퀴어 이론은 그 자체로 독자적 연구 분야를 형성하고 있다고 인식된다. 무엇보다 퀴어 이론을 하나의 단독 학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몇몇 연구자는 퀴어 연구에서 젠더 연구를 분리시키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가장 대표적 논의는 헨리 아벨로브Henry Abelove, 미셸 에이나 버레일Michele Aina Barale, 데이비드 할퍼린David Halperin이 함께 편집하고 1993년 처음 출판된 책 『레즈비언과 게이 연구 선집Lesbian and Gay Studies Reader』의 서론이다. 이 책 서론에서 세 편저자는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혹은 퀴어 연구)의 목적을 선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페미니즘이 젠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혹은 퀴어 연구)는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혹은 퀴어 연구)를 하나의 연구 분야로, 분과 학문으로 설정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페미니즘 연구와 퀴어 연구의 성격 및 한계를 모두 규정하는 주장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에일로브 등이 편집한 책의 서론은 출간 이후, 페미니즘은 젠더만 연구하는 학제인가라는 비판, 섹스는 단지 성행위, 성관계만 지칭하는가라는 비판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퀴어 연구는 섹슈얼리티를 주로 다룬다는 - P95

인식은 만연하고 게일 루빈을 퀴어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는 인식 역시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퀴어 연구는 섹슈얼리티만 혹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다룬다는 인식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퀴어 이론과 젠더의 관계는 퀴어 이론이 등장한 이후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일단 퀴어 이론은 동성애와 같은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정체성이나 다른 여러 범주로 구획하는 권력 작동 양식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다. 그렇기에 퀴어 이론의 등장 배경을 설명하는 많은 논의는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등을 계속해서 언급한다. 하지만 퀴어 이론이 하나의 이론으로, 연구 분야로 등장한 이후 그 논의가 실제 전개되는 방식은 상당 부분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특히 동성애 정체성을 중심에 두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초반 진행한 행사의 경우, 행사 제목에는 퀴어 이론이라고 적혀 있는데 행사 부제는 레즈비언과 게이만 적시되는 식이었다. 이것은 퀴어 이론이 단순히 섹슈얼리티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는다는 주장과도 충돌하는데 왜냐면 섹슈얼리티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정말로 섹슈얼리티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는다면 섹슈얼리티의 주요 의제인 낙태, 임신과 출산, 성폭력 등도 중요하게 논의해야 하지만 이러한 의제는 퀴어 연구에서 주로 다루지 않으며 소수의 연구자만이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퀴어 이론이 등장한 초기부터 퀴어 이론의 한계, 즉 백인 중산층 중심의 논의라는 지적, 섹슈얼리티가 동성애와 거의 등치된다는 비판 등을 담은 많은 글이 등장했다. - P96

퀴어 이론의 연구 대상에서 젠더 논의를 삭제하는 것은 레즈비언과 게이 사이의 차이를 삭제하는 것과 같은 익히 알려진 의제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논쟁은 트랜스젠더퀴어와 퀴어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다.
(...)
트랜스를 환영하지 않거나 꺼리는 퀴어 커뮤니티에서 퀴어와 트랜스의 관계를 가장 첨예하게 논의한 트랜스 이론가는 수잔 스트라이커다. 1998년 퀴어 학술지 『GLQ』의 트랜스젠더 연구 특집호를 책임 편집한 스트라이커는 서문에서 당시까지 등장한 트랜스 연구의 다양한 주제를 소개하는 동시에 ‘트랜스젠더는 퀴어인가‘라는 주제를 논했다. 만약 퀴어 연구가 섹슈얼리티를 주요 연구 주제로 삼는 연구라면, 젠더 정치학을 가장 첨예하게 논하는 트랜스 연구는 퀴어 연구의 - P97

일부일 수 있을까? 이 주제를 논하기 위해 스트라이커는 그 자신의 생애 경험을 통해 설명하며, 많은 트랜스젠더가 퀴어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그 자신을 퀴어로 설명하는 트랜스 역시 상당했음을 지적한다. 즉 트랜스젠더는 퀴어 커뮤니티의 구성원이었지만 퀴어 이론의 연구 영역이 섹슈얼리티 연구로 재/규정될 때 퀴어 이론은 트랜스 연구를 다룰 필요가 없어지고 트랜스는 퀴어가 아니라는 인식을 생산하게 된다.
하지만 퀴어 이론과 트랜스 이론의 중첩을 중요하게 논하는 이유는 단순히 퀴어 커뮤니티에 트랜스가 있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한편으로 퀴어 커뮤니티나 연구에서 퀴어함은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라는 질문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퀴어와 트랜스를 구분하는 것 혹은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명징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전자를 살펴보자. 스트라이커가 퀴어 커뮤니티에 트랜스는 언제나 존재했고 적극 활동했다고 지적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지분을 요구하고 존재의 가시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주장이 아니다. 이것은 퀴어 정치학에서 퀴어함, 즉 권력에 저항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기존 권력 작동이 자연 질서로 구축되었다는 점을 드러내는 실천에 어떤 위계가 존재하는가와 관련한 질문이기도 하다. 트랜스는 퀴어가 아니라는 식의 언설에서, 퀴어는 권력에 저항하고 권력 작동 양상 자체를 질문하는 실천인 반면 트랜스는 그렇지 않다는 구분이 만들어진다. 즉 동성애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적 실천은 이성애규범성을 질문하고 문제 삼는 행동이지만, 트랜스가 젠더를 재구성하는 실천은 기존 - P98

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행동이라는 식이다(이런 식의 논의에서 양성애자는 이성애규범성을 질문하는 실천이 아니라 이성애규범성을 강화하는 실천으로 취급된다). 트랜스를 규범의 재생산 행위로 이해할 때 ‘인간은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태어나고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일평생 유지하고 각 젠더에 부여된 불균형하고 불평등한 위계 관계가 자연스럽다‘는 지배 규범적 인식은 질문의 대상이되기 어렵다. 여성은 남성스러울 수 있고 남성은 여성스러울 수 있지만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자연 질서로 남는다. 그리하여 퀴어 커뮤니티에 트랜스가 있다는 말은 권력이 자연 질서로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고자 할 때 무엇을 권력 작동으로 인식하고 사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무엇을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인간은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태어나지 않으며, 태어날 때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지정받았다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 진리나 숙명은 아니다. 만약 태어날 때 지정받은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것은 이성애가 아닌 다른 성적 지향 역시 불가능해짐을 의미한다. 인간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지정하는 규범은 단순히 젠더 정체성만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이성애자여야만 하고 이성애 관계에서 임신과 출산을 통한 인구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 질서라고 규정한다. 트랜스는 퀴어인가, 퀴어 연구는 트랜스를 어떤 식으로 사유하는가와 관련한 질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후자의 질문은 주로 범주를 둘러싼 경계 분쟁 논의로 많이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트랜스를 둘러싼 경계 분쟁은 크게 여성 범주를 둘러 - P99

싼 논쟁과 트랜스 및 비트랜스-비이성애자 사이의 범주를 둘러싼 논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트랜스와 비트랜스-비이성애자 사이의 범주를 둘러싼 논의만 다룰 것이다. 흔히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별개의 정치적 분석 범주이자 연구 분야라는 이해가 있다. 이것이 앞서 아벨로브 등이 페미니즘은 젠더,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는 섹슈얼리티를 연구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 혹은 퀴어 연구가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때 그럼 트랜스는 어떻게 될까? 흔히 트랜스는 젠더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를 전개하는 범주며 비이성애자는 성적 지향 혹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논의를 전개하는 범주라는 이해가 만연하다. 물론 (특히 한국의) 많은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속한 일부에게 트랜스젠더퀴어는 또 다른 성적 지향, 동성애와는 다른 새로운 성적 지향으로 인식되고 그리하여 젠더 의제로 인식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적어도 LGBT 혹은 퀴어 의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트랜스 의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이들 사이에서 트랜스와 비트랜스-비이성애자는 구분되는 실천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트랜스와 동성애자 양성애자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범주일까?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예를 들어 mtf/트랜스여성과 게이 남성, ftm/트랜스남성과 레즈비언 부치는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범주일까? 예를 들어 어떤 부치는 레즈비언 분리주의 커뮤니티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다 자신을 남성으로 재정체화하고 ftm/트랜스남성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물론 어떤 부치는 평생 부치로 살아가고 어떤 ftm/트랜스남성은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남성으로 인식했다고 말한다. 또한 - P100

어떤 게이 남성은 오랜 시간 게이로 살다가 mtf/트랜스여성으로 재정체화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mtf/트랜스여성으로 인식하며 살아가다 게이로 재정체화하기도 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흔한(하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경험이기도하다.
다른 한편 게일 루빈이 자세하게 논했듯 부치의 실천은 그것이 온전히 섹슈얼리티 실천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부치 젠더를 실천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 자신의 정체성을 재현한다. 여성스러운 게이 역시, 그 실천은 섹슈얼리티 혹은 성적 지향을 표현하는 방식인 동시에 젠더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얼마나 분명하게 구분되는 분석 범주일까? 이것을 지속적으로 구분하는 태도가 트랜스를 퀴어 커뮤니티에서 추방하고 트랜스를 사유할 필요가 없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트랜스를 퀴어 커뮤니티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트랜스의 경험과 비트랜스-비이성애자의 경험 사이에 상당히 다른 지점이 존재하지만 트랜스와 비트랜스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는 어떤 중첩지점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젠더와섹슈얼리티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 실천과 젠더 실천 사이의 경계가 중첩되어 있으며 정체성 범주를 경험하는 방식은 매우 모호하지만 명확하다고 여기는 서사 형식을 통해 구성된다는 지적이다. 이를 통해 퀴어 연구에 트랜스젠더퀴어 연구를 배치하고 퀴어와 트랜스 사이의 중첩 지대를 그려나가고자 했다.
그런데 스트라이커를 비롯한 일군의 트랜스 연구자들이 트랜스 연구를 퀴어 연구의 일부로 배치하려고 했다면 비비안 나마스테 - P101

Viviane Namaste나 제이 프로서Jay Prosser는 퀴어 이론이 트랜스섹슈얼을 부정적 대상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이었다. 나마스테와 프로서는 모두 트랜스섹슈얼, 즉 의료적 조치를 통해 몸의 형태를 바꾼 mtf/트랜스여성이라면 여성으로 통하는 삶을 살고자 하고, ftm/E랜스남성이라면 남성으로 통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이것은 1990년대 초반 트랜스젠더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후, 이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지만 트랜스젠더 중에서도 의료적 조치를 겪은 이들의 경험을 누락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트랜스섹슈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측면과 관련이 있다. 아울러 트랜스 중 일부의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체제 순응이라고 비난하는 비트랜스 페미니스트나 비트랜스-퀴어 활동가 및 연구자의 언설에 반발하고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트랜스섹슈얼이라는 용어를 채택하기도 했다. 체제 순응이다, 체제 저항이다와 같은 판단은 그 자체로 매우 체제 순응적이고 기존의 지배 권력을 재강화하고 기존 지배 규범을 자연질서로 만드는 행위임에도 이 사실은 언제나 은폐된다.
나마스테와 프로서는 퀴어 이론이 전복과 저항만 강조하면서 트랜스섹슈얼의 욕망은 기존 질서에 부합하고자 하는 동화 실천이라는 이분법 구도를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퀴어 이론이 트랜스젠더를 진보와 저항에 포함시키고 트랜스섹슈얼을 퇴보와 보수에 배치시킨다며, 바로 이런 구분을 문제 삼는다. 트랜스섹슈얼의 욕망을 동화주의로 설명하는 방식, 트랜스가 여성성을 강화하고 여성을 억압한다는 식의 논의는 일상에서 더욱 빈번하게 만날 수 있고 최근 한국에선 트랜스 혐오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이고 있기도 하다. 물론, 나마스 - P102

테나 프로서의 비판 작업은 퀴어 이론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도식적 이항 대립으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치명적 문제를 안고 있다. 퀴어 이론은 정말로 이분법에 기반한 논의인가? 기존의 이분법 자체를 문제삼는 논의는 언제나 기존의 이분법으로 수렴되어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버틀러의 몸 논의는 몸 자체를 부정하며 초월적 주체를 강조한다는 식의 비판을 받거나,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이 젠더를 옷장에서 꺼내 입을 수 있는 것이라는 논의의 근거로 쓰이는 식이다.
그럼에도 나마스테와 프로서가 트랜스섹슈얼을 중심에 둔 논의는 매우 중요한데, 기존 질서에 동화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실천이 기존 질서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섹슈얼의 욕망이 동화주의 욕망이라면 이 욕망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 범주를 더욱 불안하고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만약 여성으로 통하는 사람이 비트랜스여성인지 트랜스여성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이때 여성이라는 범주는 어떻게 될까? 남성으로 통하는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있으며 여성으로 통하는 외모로 살기 위한 방법을 이제 막 채택한 단계에 있다면, 그 사람의 젠더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남성으로 통하는 사람이 트랜스여성인지, 비트랜스남성인지, 트랜스남성인지 확정할 수 없다면 남성이라는 범주는 어떻게 그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트랜스섹슈얼의 욕망이 동화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한들 그 동화주의 실천은 동화하고자 하는 바로 그 규범을 위기에 몰아 넣으며 규범이 자연 질서가 되는 인위적 과정을 폭로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일부 사람들이 트랜스를 지독하게 혐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103

퀴어 이론은 트랜스 이론과 젠더라는 범주를 통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고, 꽤나 오랫동안 트랜스 연구를 퀴어 연구의 일부로 구성하고자 하는 흐름이 있었다. 이런 흐름은 최근 변하고 있는데 그것은 트랜스 연구가 퀴어 이론의 사악한 쌍생아라는 바로 그 표현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때 사악함은 퀴어 이론, 더 정확하게는 게이와 레즈비언이라는 범주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통상 비트랜스를 전제하는 레즈비언과 게이 같은 동성애 정체성은 그 범주가 성립되기 위해 동성 혹은 같은 젠더라는 젠더 범주가 성립되어야 한다. 게이 남성이라면 나의 젠더 범주가 남성인 동시에 상대의 젠더 범주 역시 남성이며, 레즈비언이라면 나의 젠더 범주가 여성인 동시에 상대의 젠더 범주 역시 여성이어야 한다. 이것은 나와 상대의 젠더가 동성일 - P104

수 있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이 인식은 이성애에서도 비슷한데 나와 상대의 젠더가 반드시 이성이어야 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나의 반대 성이 존재한다는 이성애적 상상력, 나와 같은 성이 존재한다는 (관습적)동성애적 상상력은 모두 성적 지향과 관련한 논의지만 성적 지향이 성적 지향만으로 존립할 수 없으며 젠더 정체성을 통해 비로소 성적 지향이 성립하게 됨을 말해준다.
그런데 나와 타인의 젠더가 동성이거나 이성(반대의 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명한 범주일까? 예를 들어 동성이나 이성의 ‘성‘이 섹스를 지칭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섹스가 생물학적 특질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만약 염색체가 XXY로 태어난 사람의 동성은 누구고 이성 혹은 반대의 성은 누구일까? 염색체는 XY인데 안드로겐 불감증 증후군Androgen Insensitivity Syndrome, AIS이어서 여성으로 통하는 몸으로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의 동성은 누구고 이성/반대의 성은 누구일까? 혹은 다른 예를 들어 동성이나 이성의 ‘성‘이 젠더를 지칭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젠더가 자신의 젠더 인식 혹은 젠더 정체성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자신을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로만 설명하는 사람에게 동성은 누구고 이성/반대의 성은 누구일까? 젠더가 없다고 말하는 에이젠더agender인 사람의 동성은 누구고 이성은 누구일까? 이런 질문은 동성이나 이성/반대의 성이라는 범주가 자명하다기보다 모든 사람은 당연하게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태어나고 이것이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식에서 비롯함을 폭로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자신의 젠더 정체성은 오랜 시간 고민의 결과로 혹은 그냥 당연히 그런 것이라는 결과로 분명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 - P105

지만 ‘성‘이 섹스 혹은 생물학적 성을 지칭할 때 이것은 얼마나 분명할까? 트랜스를 혐오하고 트랜스 범주를 부정할 때 가장 많이 동원하는 근거는 염색체다. 그렇다면 자신의 염색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특별한 목적으로 염색체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은 자신의 염색체를 정확하게 모르고 지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염색체를 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이 가정을 근거로 자신이 ‘생물학적 여자다‘와 같은 발언을 자신있게 한다. 혹여 자신의 염색체는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럼 내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의 염색체는 알고 있을까? 같은 화장실, 같은 목욕탕을 사용하는 사람의 염색체는 모두 알고 있거나 어떤 근거를 가지고 확신하는 것일까? 염색체는 누구도 질문하지 않고, 알 필요도 없고,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기는 정보다. 누구도 모르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인식을 통해 염색체는 지배 규범으로 작동한다. 질문할 필요가 없고,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염색체는 자연 질서, 지배 규범의 지위를 유지한다. 이성/반대의 성이나 동성과 같은 젠더 범주는 자명한 범주가 아니라 우발적이고 임의로 선택된 범주이며 우연한 사건에 가깝다. 그리하여 트랜스를 하나의 분석 범주이자 인식론으로 이해한다면 트랜스 연구는 퀴어 연구와 완전히 별개의 다른 연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퀴어 연구 혹은 레즈비언과 게이 연구의 어떤 특정 토대, 페미니즘의 어떤 특정 토대를 근본적으로 허물고 완전히 다른 사유를 요구하는 이론이 된다. 이 지점에서 트랜스 연구는 퀴어 이론의 일부거나 젠더 연구의 일부라기보다는 트랜스 연구라는 별도의 연구로 구성된다.
트랜스 연구가 트랜스라는 분석틀, 인식론을 토대로 독자적 연구 - P106

를 구성하는 측면은 이른바 LGBT라는 용어를 다시 사유하는 작업과 괘를 같이 한다. LGBT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그리고 트랜스전더퀴어의 축약어인데 이런 방식의 축약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트랜스젠더퀴어는 동성애나 양성애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성적 지향인가? 둘째, 트랜스젠더퀴어는 트랜스젠더퀴어이기만 하거나 모든 트랜스는 이성애자인가? 실제, 나는 어느 자리에서 강의를 하고 질의응답을 진행하던 중,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자가 되려고 수술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 하는 이 질문은 다양한 판본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어떤 트랜스는 이성애자로 정체화하지만, 다른 어떤 트랜스는 동성애자거나 바이섹슈얼, 판섹슈얼 혹은 무성애자 등 다른 여러 성적 지향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한다. 그런데 LGBT라는 명명 방식은 트랜스와 동성애, 양성애가 각각 별개의 성적 지향이나 성적 실천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동성애와 양성애, 트랜스젠더퀴어는 마치 ‘성소수자의 의제‘라고 불리는 어떤 의제가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만들기도 한다. 트랜스젠더퀴어는 동성애 운동이나 이론과 어떤 공통의 의제가 있을까? 예를 들어 미국에서 9.11 사건 이후 국경이나 주 경계를 이동할 때 많은 제약이 발생했다. 이 제약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과 미국으로 입국하고자 하는 외국인이 주 타겟이었지만, 트랜스젠더퀴어 역시 제약의 대상이 되었다. 신분증이 보장하는 젠더/외모와 트랜스젠더퀴어가 실천하는 젠더/외모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인지될 때, 항공기를 이용하는 등 신분증이 필요한 일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때로 시민권 자체를 박탈하거나 부정하는 사건 - P107

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또한 트랜스젠더퀴어가 여전히 정신병 진단 편람(DSM)에 속해 있는 질병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을 때, 트랜스 연구는 동성애 연구보다는 장에 연구나 정신 질환 관련 연구와 더 많은 접점을 형성한다. 이럴 때 LGBT라는 용어는 어떤 측면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LGBT라는 명명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고 유의미할까?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일까? 이 질문과 문제 의식은 트랜스 연구와 퀴어 연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도록 하고 트랜스 정치학, 트랜스페미니즘을 모색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
트랜스 연구는 페미니즘의 젠더 연구를 구성하고 젠더와 여성 범주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면서 등장했고, 퀴어 이론의 일부로 그 논의가 전개되길 바라는 이론적 시도를 하며 논의를 전개해왔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연구에서 강조점이 젠더에서 트랜스로 이동하고, 트랜스젠더퀴어의 복잡한 젠더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다양한 범주를 다시 사유하기 시작하면서 논의는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트랜스 연구가 더 이상 페미니즘과 무관하거나 퀴어 이론과 무관한 연구라는 뜻이 아니다. 트랜스 연구에서 젠더 연구 및 퀴어 연구는 여전히 중요한 논의 의제이며 강한 교차성을 형성한다. 바로 이러한 교차점 혹은 겹침은 젠더 개념, 퀴어 개념, 트랜스 개념 자체를 완전히 다시 사유할 것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은 삶의 복잡성을 복잡하게 사유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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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을 권리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생활동반자
황두영 지음 / 시사IN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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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아니면 결혼, 내키지 않는 두 선택지를 넘어서기 위해서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하다. 생활동반자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결혼에 이르기 전에 서로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연인일 수도 있다. 또 이혼과 사별 후에 더 이상 친족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는 사람도, 노인과 장애인처럼 특히 돌봄이 필요한 이들도 긴요하게 쓸 수 있는 제도다. 흔히 ‘동거‘를 무책임하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사연으로 함께 살고 있고, 또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활동반자법은 혼인과 혈연 이외의 사람들이 함께 살 때 필요한 사회복지혜택과 제도적 권리를 보장하고, 둘이 동거생활을 시작하고 해소할 때 필요한 공정한 절차를 규정하는 법이다. - P8

생활동반자법 논의의 핵심은 ‘고독‘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외롭다. 국가는 국민이 외롭게 살도록 방치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폭증하는 1인 가구를 자유와 낭만을 갖춘 새로운 생활방식처럼 꾸미지만 실제로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 누구와 같이 사는 게 민폐가 되는 여러 환경, 너무 높은 결혼의장벽, 가부장적 가족문화 등으로 ‘어쩌다 보니‘ 비자발적으로 1인 가구가 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가족 간에 물리적, 감정적으로 서로 돌보지 못하거나 돌봄을 거부하는 상황도 빈번해 가족과 함께 살아도 외로운 경우가 많다.
‘고독‘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개인의 기분이 아니라 실재한다. 객관적 조건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이 고독한 상태가 되면 그건 사회적 문제이자 정책적 과제다. 지속적인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돌봄을 제공하는 자원이 필요하다.
나는 고독이, 외로움이, 돌봄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많은 - P10

사람이 어쩌면 한국의 가장 큰 정책적 과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고독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기껏해야 상담을 해주고 정신과 치료에 대한 보험수혜를 늘려주는 정도다. 물론 경제 정책, 복지 정책, 노동 정책을 통해 사회적 고독을 만드는 요소를 줄여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외로움 자체를 해소하려면 더욱 직접적인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생활동반자법은 고독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돌봄‘에 대한 법이다. 우리는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 화장실에서 넘어졌을 때 구급차를 불러줄 사람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 않은가. 돌봄은 좁은 의미의 간호나 가사노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험난한 세상에 맞서기 위해 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바쁜 친구와 밖에서 만나 얘기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내일의 건강한 출근을 위해서 오늘 털고 가야 할 이야기도 있다. 치킨을 주문하거나 라면을 끓일 핑계가 되어줄 사람도 필요하다. 눈송이만한 외로움이 밤새 몸을굴려 눈사태가 되지 않도록 그저 누군가의 잠자는 숨소리가 필요할 때도 있다.
물론 누군가와 같이 산다 해도 내 몫의 돌봄은 내가 해야 한다. 하지만 품앗이는 할 수 있다. 내가 힘들고 바쁠 땐 상대가 도와주고, 아플 땐 서로 보살피고 집안일도 대신 해출 수 있어야 한다. 피곤하고 아파도 어쩔 수 없이 출근은 해야 하는데, 빨아놓은 셔츠가 한 장도 없을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된다. 우리에겐 연대와 협동, 상호돌봄이 필 - P11

요하다.
한국은 돌봄을 이미 상당 부분 공공서비스와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많은 복지비용을 들여 공공산후조리원, 아이 돌보미부터 치매 간병까지 일생에 걸쳐 돌봄 서비스를 지원한다. 물론 돈이 있다면 시장에서 더 좋은 서비스를 구입할 수도 있다. 시장에서 제공하는 돌봄은 청소, 아이 보기, 간호하기 등 구체적 행위뿐 아니라 감정노동까지 포함한다. 외로운 사람은 누군가 나를 아껴주는 기분을 느끼고자 적지 않은 돈을 쓴다.
이러한 돌봄을 정부와 시장이 다 해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가족 대신 정부와 시장이면 충분할까? 돌봄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인격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 전인적이고 감정적인 부분이다. 아무리 많은 자원을 들여 각종 서비스를 지원한다고 해도 채울 수 없는 여지가 있다.
가령 노인 1인 가구가 오늘도 건강히 잘 지내는지, 영양가 있는 식사를 했는지, 사회적으로 단절된 곳에서 인지기능이 떨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회복지비용을 들여야 한다. 더구나 이런 서비스는 해당 노인을 연명시킬 수 있을지언정 외롭지 않게 하기는 어렵다. 이 노인이 믿을 수 있는 친구와 살아갈 수 있는 제도가 있고, 이를 장려하기 위해 임대주택과 수당도 준다면 어떨까? 우리 사회는 ‘특별한 한 사람‘만 내 옆에 있으면 되는 간단한문제를 너무 어렵게 풀어가고 있다. - P12

일부에서는 생활동반자법이 가족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동거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면 더더욱 결혼을 안 할 것이고, 출산율이 떨어지며, 우리 사회의 근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한다. 우리 법이 허용한 동거의 방식이 결혼뿐이라 누군가와 같이 살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결혼하는 것이라면 정말로 진지하게 가족법의 재건축이 필요하다.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가족의 위기가 아니라 ‘가족법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가족을 이루도록 장려하는 법, 서로에게 더 책임을 갖고 정착하도록 독려하는 법, 가족의 믿음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법인 생활동반자법은 당연히 ‘보수적인 법‘이다. 우리 사회를 더욱 안정시킨다는 의미에서 보수적이다. 생활동반자법은 기존의 경직된 가족제도를 떠난 사람들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법이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탈락하지 않고 사회를 더 신뢰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우리가 만들어 온 사회복지제도에 더 많은 사람을 포함시키고, 개인으로서, 또 가족구성원으로서 보장받아야 한다고 여겨온 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하는 법이다. - P15

한국 사회의 아들딸로 사는 우리에게 ‘부모에 대한 부담감‘이 보편적 - P27

으로 와닿기 때문인 것 같다. 부모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고,
부모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 한국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모셔서 정신건강 특강을 듣고 싶다. 경연 프로그램에서 인순이의 〈아버지〉, 자이언티(Zion.T)의 〈양화대교〉, 라디(Ra.D)의 〈엄마〉 같은 노래가 필승카드로 쓰이는 한 이 원망과 미안함의 이중적 감정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용돈을 드리고 자주 찾아가서 뵈어도 부모님에 대한 감정은 밑 빠진 독과 같다. 쓰고 넘칠 정도로 돈이 많아서부모님께 경제적 지원을 충분히 해드리면 괜찮을까? 그럴정도로 돈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녀의 경제력이 충분하다면 아마 부모의 경제력은 넘치게 충분할 가능성이 크고, 한국 사회의 효도는 단순히 경제적 부양을 넘어서 감정적 충만함이라는 좀처럼 완성되기 어려운 목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처럼 관직을 버리고 3년상을 치르는 게 현대식 효도는 아니다. 우리 사회의 효도는 자랑할 만한 아들딸이 되는 것이다. 해외로 효도여행을 보내서 동창들이모여 있는 네이버 밴드에 자랑할 사진을 찍게 해주고, 면세점에서 세상을 덮을 만한 샤넬 로고가 박힌 핸드백과 아버지 손목 관절에 무리를 줄 만큼 무거워 보이는 롤렉스 시계를 사드리는 것이다. 부모님 지인이 듣고 단박에 알 만한 직업을 갖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효도가 될 만한 직장을 잡으려면 부모님의 노후자금을 털어 지원을 받아야 한다. 효도 - P28

를 하려면 불효를 해야 하는 딜레마다. 지금의 불효를 만회하기 위해 더 큰 성공을 이뤄 부모님의 노후까지 책임져야한다. 이렇게 한국 사회 청춘들은 효도를 향한 피의 레이스를 진행하고 있다.
미안하다가도 가끔은 화가 난다. ‘좋은 직장도 못 갖고 돈도 못 버는 게 누구 탓인데‘ 생각하다가도 죄스러운 마음에 얼른 지운다. 미안하다가 원망했다가 잘 해야지 하다가 부담스럽다가 부모에 대한 감정이 널뛴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부모 덕으로 사장이네 대표네 갑질을 할 때면 더 좋은 위치에 나를 올려다주지 못한 부모가 원망스럽다. 재벌기업까진 물려주지 않더라도 그때 내게 조금 더 투자를 해줬더라면, 딸이라고 학원비를 아끼지 않았더라면, 내게도 학자금 대출이 없었다면, 전세금만 보태줬다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자식을 좋은 위치에 보내기 위해 과잉 투자한 부모에 대한 원망도 있다. 학업 성취만 요구하고 내 마음에 귀기울여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원망이다. - P29

결국 자식에게 ‘올인‘한 후 부양을 받는 게 이들의 노후대책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후 악화된 노동 환경에서 자녀는 부모를 부양할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 한다. 정부는 기초노령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등 사회복지제도를 급히 만들었지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 역시 국민연금처럼 돈을 미리 쌓아 놓지 않은 상황에서 노인 대상자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이중고에 시달린다. 굶어 죽지 않을 수준의 노인 복지, 그나마 잘 갖춰진 의료제도와 기술로 한국의 노인은 아프고 가난하게 오래 산다. 그 결과 한국의 노인은 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많이 일하는데도 가장 가난하고 압도적으로 많이 자살한다.
노인일자리 사업을 나가거나 폐지를 주워 돈을 벌고, 기초노령연금을 적게나마 받고, 자녀가 조금이라도 용돈을 - P32

주면 간신히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조그만 돌부리도 너무나 버거운 절벽이 된다. 국민건강보험이 허락하지 않는 병을 오래 앓는 것, 노인복지센터나 경로당을 가지 못할 정도로 다쳐 밥과 여가를 해결할 수ㅠ없는 것, 오랫동안 살던 동네가 재개발 되는 것, 자녀가 실직을 하는 것 모두 준비되지 않은 돌부리다. 노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자녀의 생활도 도미노처럼 함께 무너진다. - P33

현재의 부양의무제는 착하고 가난한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원망하고 미안해하도록 한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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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결혼 - 여자들 사이의 섹스 없는 사랑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
에스더 D. 로스블럼 & 캐슬린 A. 브레호니 지음, 알.알 옮김 / 이매진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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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결혼‘은 미국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존재한 여성들 간의 동거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성애적 결혼이 여성을 완성시킨다는 남성 중심적 여성관이 팽배하던 시절 결혼은 여성에게 유일한 ‘승인‘의 장이며, 동시에 영원한 족쇄였다. 결혼은 남성의 경제력과 여성의 출산력을 교환하는 제도였고, 그 결과물인 ‘가정‘은 냉담함과 엄격함에 따라 지배됐다. 그러나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살아갈 만한 전문직 일자리들이 생겨나면서 여성은 결혼하지 않으면서도 잘 살 ‘궁리‘를 해냈다. 청교도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혼이면 당연히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와 여성들 간의 친밀성을 결합해낸 여성의 문화적 능력이 바로 ‘보스턴 결혼‘이었다. 여성들은 마치 친밀한 부부처럼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지만, ‘섹스‘가 없는, 또는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관계로 함께 살았다. 물론 이것은 19세기 미국의 현상만은 아니다. 보스턴 결혼 같은 관계로 사는 여성들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이를 낳아줘야 한다는 강박도, 남편의 감정과 성적 충동을 일방적으로 헤아려줘야 하는 불평등도 존재하지 않는 여성들 간의 동거 관계는 평온하고 장기적이었다. 그러나 보스턴 결혼은 그뒤 ‘성적인‘ 것을 강조하고, 비혼 동거 여성을 낙인찍고 비정상화하는 사회적 변화에 밀려 더는 언어화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성관계를 뜨거운 ‘열정‘의 산물로, 여성 간의 친밀성을 레즈비어니즘으로 ‘낙인‘ 찍는 사회에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 사이의 친 - P8

밀성은 서둘러 자매애와 우정으로 정의 내려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레즈비언으로 규정하는 여성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레즈비언은 ‘성적으로 여성에게 끌리는 존재‘라는 존재론적 속박에 눌려 헌신적이지만 섹스가 부재한 관계를 ‘위기‘로 여기기 시작했다.
《보스턴 결혼》은 이런 인식의 혼란을 해결하려 한 레즈비언 여성들이 쓴 책이다. 로맨틱하면서도 성적이지 않은 여성들 간의 관계, 격한 감정을 성기 섹스로 환원시키지 않는 관계에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지은이들은 선조 언니들의 지혜와 현대 레즈비언 여성의 자부심을 복원해 ‘신 보스턴 결혼‘을 창조해내고 있다. - P9

얼마 전 어느 워크숍에서 마니 홀은 레즈비언 관계에서 섹스가관계를 정의하는 변수가 되는 까닭을 설명했다. 홀에 따르면 우리 레즈비언들은 자신의 관계를 외부에서 거의 승인받지 못한다. 그런데 섹스를 하지 않으면, 내부의 인증조차 없어져버린다. 홀이 레즈비언들에게 추천하는 방법은 관계의 "참고서Cliff Notes"들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섹스 서사sex narrative보다는 친밀함 서사intimacy narative가 될 만한 것을. 가부장제가 좋은 관계는 섹스를 포함한다고 간주한다면, 섹스를 뒤집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 홀은 "세상에 섹스 같은 것은 없다. 로맨스니 환상이니 절정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없다.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것은 남성 발기다. 우리는 이제 때려치겠다고 맹세를 해야 한다"라고 썼다. - P34

관계란, 집단이 합의한 이름이 있든 없든, 관계다. 우리는 관계를 범주화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관계의 한 양태를 병리 현상으로 취급하려고 보스턴 결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 언어로는 기술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무형의 관계들까지 레즈비언 문화의 어휘를 확장해보려는 뜻이다.
내 의견으로는, 보스턴 결혼이(아니면 다른 어떤 류의 관계든지) 상대적으로 바람직하고 건강한지는 결국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지의 문제다. 그런 관계에서 성적이지 않으려는 자신의 욕구와 동기들을 자각하고 있는가? 자기 본능과 본성을 막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성적 본능을 가로막으면서 다른 본능들까지 막고 있는가? 자신의 성애적인 본성에 수반된 에너지를 다른 통로로 이끌어주고 있는가? 이것이 자신에게 좋고 건강한 선택인가?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자각과 의식이 동반된 선택인가? - P47

‘보스턴 결혼‘이라는 명칭의 시발점이 된 헨리 제임스의 소설《보스턴 사람들The Bostonians》(1885)은 19세기 후반 미국 도시 지역에 이런 관계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 소설에서 헨리 제임스는 서로 헌신적인 여성 커플을 여럿 등장시킨다. 제임스는 자기 소설을 "뉴잉글랜드에서 아주 흔하던 여자들의 우정 가운데 하나[에 관한] …… 아주 ‘미국적인American‘ 이야기"로 특징지었다. 그런 관계는 ‘보스턴 결혼‘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아직 여성 동성 관계female same-sex relationship가 ‘레즈비언‘으로 널리 낙인찍히는 시대가 아니던 19세기 후반, 자기 일을 가진 여성들에게 그런 ‘결혼‘은 굉장히 그럴듯한 것이었다. 그런 관계는 여성에게 동지애companionship, 돌봄nurturance, 마음 맞는 이들끼리 나누는 연대감, 로맨스(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관계는 아니라도 일부에서는, 섹스)를 가능하게 해줬다. 자기 삶에 ‘중요한 타자‘가 가져다 주는 모든 이점을 주면서, 이성애에 따라붙는 짐들, 그러니까 자기 직업을 가진 앞서 나가는 여성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짐은 없었다. 한 세기가 지나도록 이런 관계는 많은 중산층 여자들에게 합리적인 선택지로 남아있었다.
19세기 후반, 여성에게 새로이 열리고 있던 직업군에서 일하려고 진지하게 고려하던 여자라면 여러 번 임신하고 대가족을 꾸릴 책무를 지는 상황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어 - P51

렵지 않게 이해했다. 남아 있는 선택지 가운데서 제일 나은 것은
‘노처녀‘였다. 노처녀로서 이성 간 내연 관계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는 일은 도덕 규범에 어긋났으나, 가까운 여성 친구와 나누는 동지애를 굳이 멀리할 이유는 없었다.
과거 긴밀한 여성 간 우정은 고귀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로맨틱한 우정이라는 관례가 서구권에서 보인 발전을 추적했는데,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서구 관례와 비슷한 것들을 비서구 세계, 예를 들어 중국, 인도, 아프리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성과학자들이 ‘레즈비언‘이라는 종種으로 정의해버리고 자기들이 내린 정의를 대중의 의식에 퍼트려놓기 전까지, 로맨틱한 우정은 다른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가능하고 또 널리 흥했다. ‘레즈비언‘은 로맨틱한 우정 관계에 전제되고 높이 찬양받던 ‘고귀한 순수성‘을 수상쩍게 만드는 성 정체성을 의미했다. 또한 ‘레즈비언‘이라는 범주의 출현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에게 자기 애정을(따라서 자기 자신까지)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분류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면서 이 여성들을 나머지 여성들로부터 갈라놓았다.
그러나 여성들의 강렬한 애정이 언제나 수상하게 비춰지지는 않았다는 증거는 압도적이다. 역사적으로 젊은 여자들에게는 종종 다른 여자들과 키스할 수 있고, 서로 아껴주고, 함께 잠을 자고, 넘치는 사랑을 표현하고, 영원한 믿음을 약속하는 관계가 허용됐다. 이런 관계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로 성적이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개인의 성적 취향이 가지는 스펙트럼을 고려하면, 실제 성기 성애genitally erotic가 그중 전혀 없었다고 믿기는 어려우며, 역사적인 기록도 일부는 확실히 그런 성애를 나눴다고 입증한다. 하지만 나는 대 - P52

부분 그렇지 않았다고 본다. 위에 제시했듯이, 저 로맨틱한 친구들과 동시대에 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믿은 것과 같은 까닭에서다. 성욕의 잠재력에 관한 일반적인 생물학적 설명 방식도 있다. 그러나 개인이 사회와 나누는 상호작용과 개별 환경이 성욕의 표현 범위를 결정짓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1950년대에는 킨제이가 면담한 여자들 가운데 20퍼센트가 19세 무렵에 삽입 성교를 해봤다고 했는데, 1971년에는 대조군 표본 수치가 거의 50퍼센트에 가깝게 올랐다. 변한 것은 명백히 성욕의 생물학이 아니라, 더 많은 여자들이 욕망을 의식하고 그 욕망에 따라 행동하도록 허용(때로는 심지어 강요)한 사회인 것이다. 이성애 행위와 동성애 행위 사이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는 1950년대보다도 훨씬 심하게 여자들이 섹슈얼리티를 부정하게 만드는 시대였다. 이 시대 여성들은 좋은good 여자한테는 자발적인 성욕이 없다고 믿게끔 자랐다. 단순히 부부 관계와 출산의 의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남편의 욕구를 고려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지 않는다면, 여자들은 성적이지 않은 존재였다. 이성애 경향이 있든 동성애 경향이 있든, 섹슈얼리티에 가해지는 이런 제재에 맞서 싸운 여자들보다는 이것을 내면화한 여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대개 성적이지 않게끔 사회적으로 구성됐다. - P53

다른 시대에는 이런 관계가 허용됐는데, 어째서 지금은 낙인이 찍혔는가? 아마 ‘여러 세기에 걸쳐 남자들이 이런 관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가 하나의 대답이 될 것이다. 이런 관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불가침이자 보편적인 남성 우월주의(여자는 남자로부터 독립된 존재일 수 없다는 관념을 강요하는)에 타격이 될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로맨틱한 우정이 사회 조직에 주요한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은 까닭은 이 로맨틱한 우정을 주로 찾아볼 수 있던 중간 계급과 상류층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여자는 다른 이유를 제쳐두고서라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살아남으려면 결혼을 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해 그런 관계는 한시적이거나 적어도 결혼에 견줘 부차적으로 비춰진 것이다.
또한 그런 관계는 사회적 요구에도 부응했다. ‘정숙한‘ 여자는 결혼 말고는 남자와 관계를 맺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평판에 흠이 나지 않게 하려면 자기 애정을 어디다 둘지 조심해야만 했다. 여자의 정조에는 어떤 오명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가 한 여자에게 남편의 가정으로 옮겨갈 때까지 아무도 사랑하지 말라고, 감정이든 희열이든 무엇이든 느끼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다른 여자와 나누는 로맨틱한 우정은 그런 감정적 요구들을 충족시켜줄 수 있었고 또한 이미 말했듯 죄가 되지 않고 무해하다고 간주됐다. 젊은 여자의 순결(보통 엄청 - P55

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에 그런 관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여자가 결혼할 때까지 여러 가지 문제에 말려들지 않게 지켜준다고 여겨졌다. - P56

‘로맨틱한 우정‘, ‘보스턴 결혼‘ 같은 용어가 ‘변태‘, ‘도착‘, ‘동성애‘, ‘레즈비어니즘‘이라는 용어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갔다.
이 태도 변화는 성적 가능성을 사람들이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못한다. 여성-여성 관계의 관례가 전에는 사회적 위협이 될 수 없었지만 1920년대쯤에는 그 위상이 변했다. 여성주의 운동이 거둔 다양한 성공은 이제 노동 인구로서 더 많은 여자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했다. 앞서나가는 극소수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여자들이 더는 생존을 위한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경제 문제가 여자들을 결혼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여자들이 다른 여자들하고 맺는 관계를 통해 완벽하게 만족한다면, 오랫동안 여성주의의 공격에 버텨온, 이성애 결혼이라는 위기에 처한 제도는 뭐가 되겠는가? 여성-여성 관계를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것이 이성애를 변호하는 무기가 됐다.
낙인찍기가 여성-여성 관계에 끼친 영향은 복합적이다. 한쪽에서는 그 영향이 매우 파괴적이었다. ‘레즈비언‘이라는 이름표로 낙인찍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던 여자들에게는 수세기에 걸쳐 여자들이 누려온 강렬한 동성 간 감정적 결속의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레즈비언‘만이 다른 여 - P59

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자신은 레즈비언이 아니라 한다면, 이 여성들은 다른 여자를 향해 그 어떤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 게 되더라도 그것을 억눌러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1920년대 여자들에게는 그 선조 격인 여자들보다 훨씬 허용되는 범위가 좁았다.
한편으로는 ‘레즈비어니즘‘이 소개돼 여자들이 자기의 동성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훨씬 큰 자유가 생겼다. 자기네 관계를 영속 가능성이 있는 관계로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들 스스로 ‘레즈비언‘ 이라는 이름표를 받아들이면 다른 여자를 향한 사랑을 단초로 하나의 생활 양식이나 나아가 하위문화까지도 구축할 수 있게 됐는데, 예전에는 대체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번 여자가 ‘레즈비언‘이라는 이름표를 받아들이고 레즈비언 하위문화 속에 자리를 잡으면, 다른 여성들을 향한 사랑과 관련한 전에 없던 또 다른 압력들, 자기 정체성이 낙인찍히는 것하고는 다른 차원의 압력들에 시달렸다. 근대에 등장한 새로운 통설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심지어 여자나 아이까지도 성적인 존재였다(이것은 앞에서 썼듯, 유럽과 미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격렬히 부정돼온 사고방식이다). 바로 전 세기나 더 앞선 시대의 가정을 완전히 뒤엎고, 마담 드 스탈과 세라 오언 주엣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그런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관계는 예외 없이 성적 요소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추측이 널리 퍼졌다. 또한 관련 당사자인 여자들이 종종 그런 전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신의 충동이 자기를 에로틱한 방향으로 이끌었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즉 스스로 다른 여성과 강력한 결속을 경험했다고 인정하면 ‘레즈비언‘이라는 - P60

이름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레즈비언‘은 여성-여성 간 ‘성적‘ 관계를 암시하므로, 이 여자들은 그렇게 보이게끔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내면화된 압력을 받았다(단지 자신에 관해 감정적으로 일관성 있는 시각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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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아가기 - 비혼여성, 임대주택, 민주화 이후의 정동
송제숙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한국 싱글남성의 노동과 비교했을 때 한국 싱글여성 노동의 유일하게 다른 혹은 더 강조할만한 지점은, 여성 대다수가 제조업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에마저 학위에 대한 보상을 안정된 일자리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데 있다. - P27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싱글여성들이 제대로 고용되지 못하는 상황은 노동시장의 두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첫째,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노동시장 신자유주의화를 통해 시간제 일자리가 지배적인 고용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시간제 일자리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며, 전일제 일자리를 차지한 남성들의 비율도 줄어들고 있다. 둘째,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양질의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에게 안정적인 직업시장에 진입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산업예비군, 잉여인구, 혹은 한국에서 신빈곤층이 된 젊은이들을 일컫는 표현인 ‘백수‘가 되었다. - P28

전세와 재테크를 각각 퇴적된 금융화와 월스트리트식 금융화의 창으로 설명하는 2장은 비혼여성들의 주택과 경제적 독립, 삶의 안정성을 규율하는 데 전세와 재테크가 가진 함의를 도출한다. 자산증식 메커니즘의 젠더화되고 계급화된 규율은 분명 싱글가정을 차별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을 이해하려면 (전세를 통한, 이후에는 공식적인 금융시장에서 투자의 확대를 통한) 이 같은 금융투자 기교들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주로 한국이라는 국가와 재벌이 산업생산을 통해 국가적인 이익의 증식을 주도해왔다는 ‘발전주의 [자본주의] 국가‘의 틀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스케일에서 (하위주체들의 생존전략에서 출발한) 비공식적인 금융화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 이론적 기여를 할 수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경제 수준에서 소득이 불규칙한 사람이 (대체로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통해) 삶의 안정성과 자산증식을 어떤 식으로 관리하는지 더 세밀하게 이해하고, 이들이 거시경제 수준에서 국가 및 전 세계 수익 창출과 자본주의 시스템의 재생산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공식 경제를 정량화하기 어렵다고 해서 이 같은 분석의 중요성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 P39

이어지는 1장에서는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인 성적 통제와 결혼 압력이라는 차별적이고 당혹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집을 어떻게 떠나 자기만의 장소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다양한 비혼여성들의 설명을 소개한다. 그리고 2장에서는 혼자 살고자 하는 비혼여성들 앞에 놓인 제도적·경제적 도전들의 맥락을 살펴보고, 퇴적된 금융화와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라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비혼여성들의 재정적 불안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비혼여성들의 삶과 환경에 구현된 향유라는 규범을 중심으로 - P42

구舊학생운동 세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동 영역을 살핀다. 이는 반체제적인 정동으로서의 향유와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관리의 속성으로서의 향유가 역설적으로 수렴되는 현상을 특징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4장은 자유화 이전 시대부터 지속된 정동의 영향이 정치 및 사회조직에 몸담고 있는 비혼여성들의 활동에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책을 마무리한다. - P43

따라서 스스로를 비혼여성이라고 여기는 내 연구참여자들은 여성의 주거 해방을 개인적인 실천으로서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의식과 공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투쟁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사회적 규범에 맞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이 특수한 사회역사적 순간들(미디어와 여행을 통 - P54

한 코즈모폴리턴적 문화의 영향과 성평등의 주류화)을 거쳐왔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시기에 학생운동가로 활동했었으며 사회운동의 자유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점차 여성과 다른 사회정의 문제로 정치적 관심을 옮겨간 시대적 변화의 장본인들이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자기만의 주거지에서 살기 위한 여정과 사회운동과 관계 맺기 위한 노력은 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좌파적인 인간상의 증표라 할 수 있다. - P55

내 연구참여자들도 결혼을 하지 않으면 가난을 면치 못하거나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에게 그 무엇보다 거주 독립의 동기를 부여한 것은 가족들의 결혼 압력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혼시장을 염두에 두고 퍼부어지는 외모에 대한 간섭의 말들과 꾸준한 중매 제의를 경험했다. - P56

제가 감정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그분들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다는 거죠. 무엇보다 결혼 압력은 부모님과 제 사이의 골을 깊게 만들었어요. - P62

전 진짜 해방된 기분이에요.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을 때도 부모님이 제 삶에 많이 개입했던 건 아니지만, 보는 눈이 있을 때랑 없을 때랑 자유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 P66

호선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평화롭게 사는 것)를 알게 된 순간 망설이지 않고 집을 떠났다. 어쩌면 호선은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젖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예외적‘인지 모른다. 하지만 가족에 대해 감정적으로 민감하고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전혀 예외적이지 않다. 엄마의 동정과 걱정은 호선에게 압박감을 주어 결혼에 대한 감정을 바꾸도록 했다. 자신이 외로운지 아닌지 자문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 어떻게 낭만적인 관계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이 욕망을 결혼에 대한 재고와 뒤섞이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집에서 독립함으로써 확보된 물리적 거리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가족으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가족에 대한 감정적 민감성은 여전히 숙제로 남게 된다. - P69

가족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추억마저도 죄책감이 들거나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그렇게 큰 고생을 했다, 우리 아빠가 날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했다, 뭐 그런 식으로요. 가족에 대한 추억을 건드리게 되면 가족구성원의 희생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같은 장소에서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1차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생활양식과 관점을 공유해야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가족 안에는 단지 혈연과 지연 때문에 억압적인 기대 같은 게 있어요. 생물학적 가족은 ‘순리‘ 같은 걸 따르는 것 같아요. - P73

가정 안에서, 그리고 결혼을 하려고 할 때 이루어지는 비혼여성에 대한 성적 규제는 단순한 감정적 지원의 문제를 넘어선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불안한 경제적 상황은 결국 자신의 거처를 얻기 위해 가족의 재정적 지원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낳는다.
이 장에서 되풀이된 진술들은 사회적 자본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로서 화폐자본이 갖는 힘을 확인시켜준다. 가족과 친족 내에서 호혜성의 원칙으로 오가는 사회적 자본을 대체할 유일한 힘은 화폐자본으로 귀결된다(자세한 내용은 2장을 참조할 것).
어머니로부터 몸매에 대한 잔소리와 저임금 일자리에 대한 부당한 지적과 함께 데이트와 결혼에 대한 압력을 받았던 보희는 어머니의 관점을 이렇게 전한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거면 돈이나 넉넉하게 벌든가." 역시 가족들과 따로 떨어져 사는 소정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돈을 더 번들 그분들이 더 이해해주실지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부모와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집을 나와 따로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비혼여성 중 하나인 지수는 가족의 압력을 진정시키는 화폐의 힘을 이렇게 설명한다. "특히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벌이가 좋다는 걸 부모님이 아시고 난 다음부터 제가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 결혼 얘기를 별로 안 꺼내세요." - P83

라파비차스Lapavitsas(2009)는 신용거래와 금융서비스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필요로 하는 개별 가정을 발판으로 신자유주의 안에서 30년간 켜켜이 쌓인 금융자본주의를 "일상생활의 금융화"라고 정의한다. 그는 최근의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등이 주목했던 금융자본이 있던 초기 자본주의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금융화의 상황이 더 복잡하다. 이는 한국이 최근에 발전하여 뒤늦게 세계자유시장에 뛰어들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기 훨씬 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부터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은 공식적인 금융투기의 규모와 양태에 비교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본의 생산보다는 화폐자본의 순환을 우선시함으로써 (특히 이자에서 이윤을 남김으로써) 자산을 마련하는 자산증식의 논리와 욕망이라는 측 - P89

면에서 양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엘리어카Elyachar(2010)의 간명한 지적처럼 비공식 시장은 친족구성원이나 이웃 같은 1차적인 사회적 네트워크에 크게 의지한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착취 과정은 훨씬 복잡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월스트리트식 금융화global financialization‘라는 라파비차스의 맥락과 구별 짓기 위해 가정경제의 뿌리 깊은 토대를 이루고 있는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퇴적된 금융화sedimented financialization‘라고 부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젠더화된 노동빈곤층을 살펴보는 창이라는 의미에서 월스트리트식 금융화과 퇴적된 금융화의 개념적, 역사적 차이를 개괄하고 이 두 금융 시스템이 비혼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퇴적된 금융화가 어떻게 심지어 ‘포드주의적인 생산양식‘ 혹은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로 알려진 시기에 이미 화폐자본이 주도적으로 자산증식을 꾀하는 데 이용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화폐자본을 가지지 못한 노동빈곤층은 어떻게 배제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금융자본은 전부터 존재했다. 그리고 퇴적된 금융화는 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통해 만들어진 월스트리트식 금융화와 그저 나란히 공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퇴적된 금융화는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실천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라는 이름의 이 새로운 금융화를 (순환의) 속도와 (불안의) 강도, (금융 계급의 양극화라는) 영향 면에서 더욱 가속화시킨다.
우리가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을 이해하려면 (전세주택과 비공 - P90

식적인 대출, 그리고 나중에는 전 지구적인 시장을 통한) 이 같은 금융투자 기법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는 산업생산을 통해 국가적인 이윤의 축적을 주도하는 양대 기둥을 국가와 재벌로 바라보는 ‘발전주의 [자본주의] 국가‘의 틀에서 주로 설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가계경제의 수준에서 대체로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통해 삶의 안정성과 자산을 관리하는 불안정한 소득계층에 대한 보다 세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 P91

임대 시스템과 대출 정책은 한국의 부동산경제와 금융시장의성격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변동성이 큰 한국의 도시 부동산시장은 자산축적과 계급양극화의 주된 근원이다(H. B. Shin 2008). 한국전쟁(1950~1953년)과 군사쿠데타 및 독재의 시기(1960~1987년)를 거치며 한국의 경제적 중심은 농업에서 산업생산으로 급속히 바뀌었고, 이와 함께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유입되었다. 사람들은 특히 수도인 서울로 몰려들었는데, 그 결과 오늘날 서울은 전체 인구의 1/4을, 수도권 지역까지 고려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같은 대대적인 이주와 함께 도시 지역의 아파트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부동산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는데, 서울의 경우 1986년과 2002년 사이에 - P100

300% 이상이 올랐다(신광영 2003, 줄레조 2007, 하의도 2008).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른 1970년대 말, 1980대 말, 그리고 1990년대 말 세 시기는 특히 주목할만하다. 이 세 시기를 거치면서 비공식적인 현금시장과 결합한 부동산시장은 비공식적인 현금시장을 위해 완전히 활용되었고, 화폐자본을 통한 부의 양극화를 가속화시켰다(김용창 2004),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부동산 소유는 부와 계급이동성을 결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상황에서 특이한 점은 공식적인 임대금융 부문이 거의 개발되지 않다보니 부동산자산 거래(매매뿐만 아니라 임대도)가 현찰 목돈시장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택담보대출시장은 2003년에야 도입되었고, 지금도 일반적으로는 고소득의 정규직 종사자에게만 가능하다. 은행의 주택대출 시스템과 주택보험기관들 역시 최근까지도 정부가 운영하는 주택기금에 국한된 미개발 상태였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과거 주택 구입 비용을 조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파트에 청약할 수 있는 저축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채택된 북미식의 주택담보대출mortgage과는 달리, 주택 구입을 위한 한국의 은행 대출은 부동산 소유권이 확정된 이후에야 가능했고, 구입한 주택을 위해 대출할 수 있는 최대치는 북미의 주택담보대출(95%)보다 낮은 70%였다.
수년에 걸친 군사독재와 국가의 경제정책을 통한 성장의 유산들은 대체로 은행 융자 관행과 관련된 규제에 영향을 미쳤다.
1960~1997년까지 중소기업과 개별 가구는 심한 제약 때문에 은 - P101

행 대출을 받기가 어려웠다. 발전주의 국가의 성격이 강했던 한국은 은행을 통제하여 대기업(재벌)이 생산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이에 대부분의 대출(90%)은 대기업의 몫이었다.
이 같은 한국 대기업들은 미국이나 다른 선도적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정부의 총애를 받는 정도가 달랐다. 한국에는 삼성, LG, 현대 등 약 열 개 정도의 재벌이 있는데, 각각의 재벌들이 족벌주의를 통해 재생산한 자회사들은 자동차·전자·첨단기술상품·섬유·의류·제과·요식업·식료품업·백화점 등거의 모든 산업 및 서비스 상품을 망라한다. 좀 더 최근에는 벤처캐피털 회사와 여타 제2금융기관들도 재벌의 네트워크에 속하게되었다. 아시아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이들 재벌이 양적인 면에서나 속도의 면에서나 월등한 생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신용거래로 상품의 생산과 유통 사이의 시간적 격차를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우호적이었던 발전주의 국가 한국은 개별 가정에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저축을 하라고 장려했고, 이를 토대로 은행에는 대기업에 저리로 돈을 빌려주라는 압력을 넣었다.
따라서 개별 가정에서는 비공식적인 대출업과 계가 은행보다 훨씬 접근 가능하고 수익성이 좋으며 더 나은 선택지로 각광받았다. 비공식적인 대출의 이자율은 연 60%가 넘었지만(은행 대출 이자는 연 20% 미만이었다) 중소기업과 개별 가정들은 규제 밖에 놓인 비공식 화폐시장의 단골고객이 되었다. 이는 한국인들 - P102

이 치솟는 주택 가격을 어떻게든 감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주택 가격을 치를 때 목돈의 현금을 선불로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을 해내는 한 방법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창의적으로 비공식 대출 시스템을 부풀리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주택 구매에 필요한 목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주요한 방법은 주택임대 시스템을 목돈의 현금을 냈다가 돌려받는 전세라고 하는 일종의 신용 시스템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Dongchul Cho 2006, Nelson 1991, Renaud 1989).
부동산시장이 연구 분야에서뿐만 아니라(공공주택에 대한 정책 지향적인 연구의 일환으로서) 정치에서도 뜨거운 주제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또한 도시 주거의 가혹한 상황에 대한 우려가 전반적으로 확산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전세에 대한 역사적·정치경제학적 연구가 드물다는 점은 뜻밖이다. 부동산과 주택 문제를 다루는 사회학자, 도시계획가, 경제학자 그 누구도 전세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지 못하고, 전세가 금융시장 및 화폐자본의 축적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비중 있는 정치경제학적 분석도 흔치 않다. 연구자들은 공공주택의 형태를 바꾸고 좀 더 완화된 대출 정책을 개발할 것을 권고해왔다. 하지만 이런 정책 제안들은 목돈이 요구되는 보증금의 관습 자체에 대해서는 별 문제를 삼지 않는 듯하다. 이 원인은 한국에서 전세 시스템이 집 장만 과정에 완벽하게 침투해버린 데다, 문화 속에 워낙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서 대안적인 메커니즘을 상상하는 것마저 불가능해 - P103

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연구참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 중 누구도 많은 현금과 고소득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이 고통스러운 전세 시스템을 비판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목돈 마련의 어려움을 개인적 실패 혹은 세대의 실패로 인식한다. - P104

(주로 남성이 수행하는) 임금노동과 (주로 여성이 참여하는) 비공식 화폐시장 간의 이 같은 젠더화된 분업은 정규직일자리시장에서 여성고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학교를 다니는 자녀가 하나 이상 되는) 규범적인 가정의 일원인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의 주 관심사인 자녀 교육과 자녀의 초기 경력개발을 관리하는 일과의 관계에서 가정의 재정적 안정성에 대한 책임을 맡는다. (부모에게는 딸의 결혼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큰 손실일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아들이든 딸이든) 자녀의 결 - P107

혼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에도 목돈의 현금이 들어간다. 학원비도 대야 하고 교사, 군 복무와 대학입학 관련 기관의 인사, 그리고 자녀의 고용주에게 뇌물도 줘야 하기 때문이다(S. J. Park and Abelmman 2004).
현대적인 계가 젠더화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부관계나 모계, 사돈관계를 통해 삶의 경로와 패턴이 연결된 주부와 아이 어머니들에게만 허용된다. (계주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순번이 다 돌 때까지 돈을 유지하지 못해) 발생할 수 있는 분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성원의 모집은 주로 가족·결혼·고향·학교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진다. 결혼과 가정에서 멀리 떨어진 여성들은 이런 종류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약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적인 신용시장에서 주변화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고등학교나 대학 동창들과 같이 어떤 계를 만든다 해도(재정관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이 중 결혼해서 부모가 되는 구성원이 생기기 시작하면 결혼한 동료들이 싱글들을 낙인찍듯 대할 뿐만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가 사라지기 때문에 싱글들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가령 내 연구참여자인 자경은 그녀가 결함 있는 성인이라는 암시를 주는 남성 동료의 모욕적인 언행에 발끈한 뒤 대학 동창들로 구성된 사회적 네트워크의 모임자리에 더 이상 초대받지 못했다. 또 다른 연구참여자인 호선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정기적인 친척 모임에서 점점 발을 뺐다. - P108

이처럼 계가 결혼과 모성을 가지고 여성의 입지를 제한하는 젠더화되고 가족/결혼 중심적인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계급과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생존과 사회적 비용 때문에 모두가 목돈의 현금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계는 단지 돈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목돈의 용도는 주거(구입과 임대 모두), 교육(공교육과 사교육 비용 모두), 결혼(결혼식을 직접 치르는 하객으로 참여하든), 모든 종류의 경조사 비용 등 다양하다. 현금 선물이 필요한 경조사로는 생일(특히 아기의 백일과 돌, 어른의 경우 환갑, 칠순, 팔순), 기념일, 시험(행정고등고시, 사법시험, 외무고등고시 같은 전문직 시험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시험과 대기업 입사시험), 졸업, 그 외 중요한 성취 등이 있다. 화폐자본이 많은 사람일수록 화폐 선물을 거래하기가 더 좋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계급화된 관행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참여 방식은 계층을 넘어서 누구나 다 받으면 줘야 한다는 호혜성의 원리를 토대로 삼고 있다. 가령 민서는 아버지가 예상보다 빨리 은퇴하시고 이를 계기로 부모가 농촌으로 이사를 가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그만둔다는 것은 자녀의 결혼이나 부모의 장례식 같은 가정의 경조사가 발생했을 때 동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부조금, 즉 호혜적인 화폐 선물을 포기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결혼은 목돈을 이용해 자녀 결혼 비용을 상쇄하고, 신혼여행·가구·주택 등의 형태로 신혼가정을 지원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다. 현금 선물인 축의금은 신랑과 신부 가족들이 가장 신뢰하 - P110

는 사람(주로 가족구성원)이 결혼식장이나 교회에서 걷는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을 때는 돈을 낸 사람의 이름과 액수를 대체로 기록하여 이를 돌려줘야 할 때 최소한 어느 정도의 금액이어야 하는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종류의 화폐 선물은 계에 투자할 수 있는 종잣돈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한국에서 현찰 목돈에 대한 필요와 그 공급은 계급과 관계없이 보편적이며 정상화되어 있다. 즉, 사람들은 화폐시장을통해 소득을 창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략, 다시 말해 (이자를 통해) 돈 버는 돈에 이미 익숙하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는 임대 시스템이 수익을 남기기가 좋다는 인식이 생겼다. 집주인의 입장에서는 전세보증금을 받아 이자를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쏠쏠한 돈벌이가 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금융위기 이전에는 정부가 은행을 규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주인(혹은 현금을 가진 사람중에 이자 낳는 자본 혹은 돈 버는 돈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은 전세보증금을 비공식 대출시장에 투자하거나 더 수익이 높은 아파트를 구입하는 데 썼다. 중산층은 두 번째 집을 다른 사람에게 임대할 수 있고, 노동계급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일부를 임대하여 얻은 목돈을 굴려 나중에 자녀가 태어나거나 성장했을 때 더 큰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세보증금은 모두에게 유리했다(Nelson 2000). 목돈의 보증금 확보는 주택이나 아파트 현금 구입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전략이다. 한국의 많은 중산층이 이런 보증금을 잘 굴려서 노동계급에서 중산층으로 계층이 - P110

동을 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집주인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거의 없다. 임대가 종료되었을 때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돌려줄 보증금이 없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와 나가는 세입자, 그리고 집주인이 부동산 중개소에서 함께 만나, 들어오는 세입자의 보증금을 나가는 세입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주인이 원래의 보증금을 손실고 새로운 세입자도 찾지 못한 데다가 비공식 대출로 부채를 메우지도 못했을 경우에는, 부채 때문에 자신의 부동산을 잃을 위험에 놓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입자를 제때 찾는 문제는 집주인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전세의 교환가치가 높긴 하지만(부동산 구매가의 절반 이상), 한국 세입자들은 앞서 지적했다시피 월세는 돈을 날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직업이 불안정하고 소득이 불규칙한 세입자들은 월세를 낮추기 위해 보증금을 높이고 싶어 한다. 이는 어째서 내 연구참여자들이 룸메이트가 이사를 가버리고 나면 전세보증금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빌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들은 월세를 내는 것보다는 목돈의 전세금을 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세 제도는 세입자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노동빈곤층을 위해서는 월세 제도를 채택하는 게 더 낫다.
는 제안도 있었다 (Nelson 1991). 노동계급 세입자 역시 목돈의 현금을 동원하여 더 큰 거주공간을 획득하는 방편으로 전세 제도 - P111

를 활용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집을 소유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넬슨의 주장에 동의한다. 특히 소득이 제한적이고 결혼과 가족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자본이 한정된 사람의 경우, 통상적으로 주거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목돈을 만들 수가 없다. 이들에게 임대주택은 자신이 가진 한정된 자금으로 얻을 수 있는 영구적인 주거지라는 지속 가능한 형태여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연령과 결혼을 우선시하는 조항을 없애 전세대출 정책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산층 부동산시장에 종속되지 않고 안정적인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을 늘리고 전세대출을 확대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는 한국의 맥락이라는 창을 통해 전 지구화되고 있는 금융 관행이라는 더 넓은 주제로 연결된다. 공식적인 금융시장이 전 지구적 규모로 폭발하기 전부터 이미 발달해있었던 화폐자본을 통한 자산증식은 화폐자본이 (일반적으로는 이자 발생과, 포인트카드 같은 현물 보상을 통해) 어떻게 그리고 왜 노동빈곤가정과 불안정노동자들의 삶에서 중요한 생존수단으로 편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더 깊은 (부정적인) 함의를 가질수 있다. - P112

이처럼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장은 화폐자본(이자 낳는 자본)의범위와 형태를 전방위적으로, 특히 포인트카드 같은 유사현금 제도의 창출을 통해 확대했다. 좀 더 안정된 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주식시장과 공식적인 신용대출시장을 이용할 수 있으며, 포인트카드 제도는 가처분소득이 많지 않은 청년, 학생, 어린이들까지도 공략한다. 금융자본주의의 중심부가 젊은 층으로부터 그 광대한 인프라의 씨를 뿌리면서, 이런 식으로 이자 낳는 자본의 논리, 즉 이자를 통해 혹은 포인트와 마일리지를 쌓아 비록 공짜일지언정 화폐자본력을 늘릴 수 있다는 신화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반이 있으며, 이 현상은 포인트카드 같은 금융상품을 이용하여 자산을 축적하는 작은 규모의 관행에 의해 도전받기보다는 오히려 정당화된다.
이런 종류의 금융상품과 선택지를 이용하는 ‘재테크‘라고 하는 행위는 사회경제적 안정을 얻고자 한다면 일반인에게도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개인들은 더 이상 평생고용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국가관료주의가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평판 때문에 새롭게 발족한 국민연금 역시 신뢰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내 연구참여자들은 자신이 이런 자산증식 기법들을 제대로 이용하고 있는지 - P116

걱정스러워했다. 대부분은 미래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사적인 금융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비용에 관계없이 모두가 이런 기법들을 이용할 수 있고, 유일한 변수는 정보를 관리하는 개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듯 싶었다. 이 장의 첫머리에 있는 인용구에서 원이가 밝히고 있듯, 이들이 이런 기술을 갖추지 못했을 때 이를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 P117

이 대화는 금융위기 이후의 금융 불안이 자산을 축적하고 현재와 미래의 불안정에 맞서는 최상의 방법이었던 금융위기 이전의 소소한 돈 불리기와 목돈 거래라는 금융 습관을 어떻게 증폭시키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요컨대 한국의 임대 제도는 집주인이 집세만 받는 시스템이 아니라 목돈의 현금을 비공식적으로 손에 넣어 돈놀이를 할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세입자는 목돈을 집주인에게 맡겨놔도 아무런 이자를 받지 못하지만, 집주인은 목돈의 현금을 받아 낮은 위험으로 이를 다른 곳에 투자하여 이자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금융 기법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의 일상생활 곳곳으로 침투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이용된 자산증식 수단의 중추인 임대주택의 중요도가 더욱 확대되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퇴적된 금융화와 월스트리트식 금융화가 한국 신자유주의 속에서 융합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공식적인 금융시장이 자유화되면서 등장한 신용카드, 주택담보대출, 사보험 및 연금, 고금리 저축상품 등 이자 낳는 자본을 굴릴 수 있는 추가적인 기회가 나타났고, 이는 한국에서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를 이루고 있다. 산업자본가와 금융시장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결합한 금융자본이 출현한 증거로, 경제학자들은 대기업이 금융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비은행 금융기관들의 지분을 상당히 소유하게 된 점을 거론한다(C. H. Lee, Lee, and Lee 2002), 비은행 금융기관은 전세를 통해 상당한 보증금을 - P121

받는 집주인, 계에 참여하는 사람, 심지어는 고리대금업자 같은개인들에게 중요한 채널이다. 내 연구참여자들의 경험에는 이보다 훨씬 소박한 방식으로 이런 종류의 월스트리트식 금융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리대금업과 계, 그리고 전세라는 보편적인 주택 임대 시스템을 통한 비공식적인 금융자본축적과 목돈의 현금 기반 거래에 의존하는 사회적인 맥락을 고려했을 때, 재벌 주도의 산업자본주의를 통한 현대 한국 경제의 등장과 관련된 지배적인 이론은 한국 자본주의를, 특히 가계경제의 측면에서 완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산업자본이 등장하면 효율성 증대를 위해 순환과 축적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민간 대부자들을 제도화된 은행으로, 그다음에는 공식적인 금융자본 시스템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고리대금업 같은 비공식적 금융 관행이 사라진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한국의 비공식 대출과 신용시장은 산업자본 레짐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도, 절정인 동안이나 그 후에도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비공식 금융자본, 그중에서도 특히 계는 산업자본이 점점 우세해지는 동안 금융자본의 제도화 속으로 자취를 감추기보다는 자산축적의 핵심 요소로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례를 토대로 생각했을 때, 주택금융 영역에서는 구매뿐만 아니라 독특하게도, 임대 제도 역시 이자 낳는 자본을 축적하는 핵심 요소이며 이는 자본주의 축적 과정에 노동계급의 의도하지 않은 동참을 통해 실행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 - P122

요한 점은 금융자본을 허구적이라고 일반화시켜버릴 경우 임금과 목돈의 현금 운용 모두가 한국의 맥락에서 계급을 막론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중요한 양식이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한국 자본주의 역사(자본주의의 축적 과정과 위기), 그리고 국가 및 재벌 주도 경제발전의 위기라는 큰 그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강력한 금융시장(주식시장이 부각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사채나 큰손 같은 다양한 고리대금업과 계 같은 비공식 대출업)이 없었다면 그 무엇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초기에는 (이자 낳는 혹은 허구적인) 주택 호황이 자본축적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월스트리트식 자본은 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을 통해서야 보편화되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주택과 금융시장의 연관성은 최근 주택시장과 금융시장이 붕괴해 크게 피해를입은 북미와 유럽국가의 상황과 유사해 보일 수 있다(Panitch andGindin 2008).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행 시스템에 의한 주택시장 투기가 주택과 (공식적인) 금융시장의 불안정으로 이어지게 된)은 한국의 상황과 다르다. 한국에서는 주로 비공식 금융시장을 통해 가계자산의 관리가 이루어졌고, 이렇게 관리된 가계자산이 주택(및 임대) 시장에 투기되면서 아시아금융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국가경제의 몰락을 초래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경제를 지탱함으로써 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크게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이같은 비교는 투기를 자본주의적 축적의 믿음직한 방법으로 옹호 - P123

하는 월스트리트 은행가 등의 견해를 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융화와 금융시장이 주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로에 좌우된다는 솔깃한 일반화에 도전하기 위함이다.
요컨대 이제까지 나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주거안정성 및 금융안정성을 저해하는 다섯 가지 구조적 제약의 집합을 다루었다. 첫째, 한국전쟁 이후 경제는 목돈의 현금과 그 이자를 개별 가정의 자산축적을 위한 주요 수단이자 원천으로 활용하는 독특한 금융시장을 발달시켰다. 둘째, 전세를 이용하는 보편적인 관행은 목돈 순환의 핵심 고리다. 셋째, 임대주택의 경우 까다로운 요건과 관료적인 평가절차 때문에 임대주택에 맞는 금융상품과 대출 기회가 제한적이다. 넷째, 금융법과 은행조례는 특히 임대주택대출 신청 자격요건에 정규직 일자리 규정과 연령 규정을 넣음으로써 결혼한 부부와 규범적인 가정이 당연히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듯이 명시해놓았다. 다섯째, 일반적으로 여성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비혼여성들은 대출 자격요건인 정규직 근무 기록을 제시할 수 없었다. 앞의 세 가지 맥락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네 번째 사항은 대출 신청 전에 혼자 살았음을 증명할 수 없거나 나이가 어린 싱글(젠더를 막론하고)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사항은 혼자 혹은 비가족구성원과 함께 살고 싶은 비혼여성 같은, 재정적으로 주변화된 집단의 주택 필요에 젠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 중요하다. 관습법 관계에 있는 이성커플도 네 번째 사항의 영향을 - P124

받을 수 있지만, 이 경우 주택 문제는 남성 쪽의 자원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고용 상태가 안정적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전세대출 등의 융자 신청요건에 부합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비혼여성, 여성 동성커플, 가족관계나 성적인 관계가 아닌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정이, 특히 정규직 시장에 진입했던 경력이 없거나 그런 경력을 쌓을 수 없는 젊은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있을 경우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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