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살아가기 - 비혼여성, 임대주택, 민주화 이후의 정동
송제숙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한국 싱글남성의 노동과 비교했을 때 한국 싱글여성 노동의 유일하게 다른 혹은 더 강조할만한 지점은, 여성 대다수가 제조업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에마저 학위에 대한 보상을 안정된 일자리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데 있다. - P27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싱글여성들이 제대로 고용되지 못하는 상황은 노동시장의 두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첫째,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노동시장 신자유주의화를 통해 시간제 일자리가 지배적인 고용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시간제 일자리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며, 전일제 일자리를 차지한 남성들의 비율도 줄어들고 있다. 둘째,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양질의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에게 안정적인 직업시장에 진입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산업예비군, 잉여인구, 혹은 한국에서 신빈곤층이 된 젊은이들을 일컫는 표현인 ‘백수‘가 되었다. - P28

전세와 재테크를 각각 퇴적된 금융화와 월스트리트식 금융화의 창으로 설명하는 2장은 비혼여성들의 주택과 경제적 독립, 삶의 안정성을 규율하는 데 전세와 재테크가 가진 함의를 도출한다. 자산증식 메커니즘의 젠더화되고 계급화된 규율은 분명 싱글가정을 차별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을 이해하려면 (전세를 통한, 이후에는 공식적인 금융시장에서 투자의 확대를 통한) 이 같은 금융투자 기교들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주로 한국이라는 국가와 재벌이 산업생산을 통해 국가적인 이익의 증식을 주도해왔다는 ‘발전주의 [자본주의] 국가‘의 틀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스케일에서 (하위주체들의 생존전략에서 출발한) 비공식적인 금융화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 이론적 기여를 할 수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경제 수준에서 소득이 불규칙한 사람이 (대체로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통해) 삶의 안정성과 자산증식을 어떤 식으로 관리하는지 더 세밀하게 이해하고, 이들이 거시경제 수준에서 국가 및 전 세계 수익 창출과 자본주의 시스템의 재생산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공식 경제를 정량화하기 어렵다고 해서 이 같은 분석의 중요성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 P39

이어지는 1장에서는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인 성적 통제와 결혼 압력이라는 차별적이고 당혹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집을 어떻게 떠나 자기만의 장소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다양한 비혼여성들의 설명을 소개한다. 그리고 2장에서는 혼자 살고자 하는 비혼여성들 앞에 놓인 제도적·경제적 도전들의 맥락을 살펴보고, 퇴적된 금융화와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라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비혼여성들의 재정적 불안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비혼여성들의 삶과 환경에 구현된 향유라는 규범을 중심으로 - P42

구舊학생운동 세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동 영역을 살핀다. 이는 반체제적인 정동으로서의 향유와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관리의 속성으로서의 향유가 역설적으로 수렴되는 현상을 특징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4장은 자유화 이전 시대부터 지속된 정동의 영향이 정치 및 사회조직에 몸담고 있는 비혼여성들의 활동에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책을 마무리한다. - P43

따라서 스스로를 비혼여성이라고 여기는 내 연구참여자들은 여성의 주거 해방을 개인적인 실천으로서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의식과 공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투쟁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사회적 규범에 맞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이 특수한 사회역사적 순간들(미디어와 여행을 통 - P54

한 코즈모폴리턴적 문화의 영향과 성평등의 주류화)을 거쳐왔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시기에 학생운동가로 활동했었으며 사회운동의 자유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점차 여성과 다른 사회정의 문제로 정치적 관심을 옮겨간 시대적 변화의 장본인들이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자기만의 주거지에서 살기 위한 여정과 사회운동과 관계 맺기 위한 노력은 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좌파적인 인간상의 증표라 할 수 있다. - P55

내 연구참여자들도 결혼을 하지 않으면 가난을 면치 못하거나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에게 그 무엇보다 거주 독립의 동기를 부여한 것은 가족들의 결혼 압력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혼시장을 염두에 두고 퍼부어지는 외모에 대한 간섭의 말들과 꾸준한 중매 제의를 경험했다. - P56

제가 감정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그분들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다는 거죠. 무엇보다 결혼 압력은 부모님과 제 사이의 골을 깊게 만들었어요. - P62

전 진짜 해방된 기분이에요.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을 때도 부모님이 제 삶에 많이 개입했던 건 아니지만, 보는 눈이 있을 때랑 없을 때랑 자유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 P66

호선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평화롭게 사는 것)를 알게 된 순간 망설이지 않고 집을 떠났다. 어쩌면 호선은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젖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예외적‘인지 모른다. 하지만 가족에 대해 감정적으로 민감하고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전혀 예외적이지 않다. 엄마의 동정과 걱정은 호선에게 압박감을 주어 결혼에 대한 감정을 바꾸도록 했다. 자신이 외로운지 아닌지 자문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 어떻게 낭만적인 관계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이 욕망을 결혼에 대한 재고와 뒤섞이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집에서 독립함으로써 확보된 물리적 거리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가족으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가족에 대한 감정적 민감성은 여전히 숙제로 남게 된다. - P69

가족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추억마저도 죄책감이 들거나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그렇게 큰 고생을 했다, 우리 아빠가 날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했다, 뭐 그런 식으로요. 가족에 대한 추억을 건드리게 되면 가족구성원의 희생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같은 장소에서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1차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생활양식과 관점을 공유해야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가족 안에는 단지 혈연과 지연 때문에 억압적인 기대 같은 게 있어요. 생물학적 가족은 ‘순리‘ 같은 걸 따르는 것 같아요. - P73

가정 안에서, 그리고 결혼을 하려고 할 때 이루어지는 비혼여성에 대한 성적 규제는 단순한 감정적 지원의 문제를 넘어선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불안한 경제적 상황은 결국 자신의 거처를 얻기 위해 가족의 재정적 지원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낳는다.
이 장에서 되풀이된 진술들은 사회적 자본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로서 화폐자본이 갖는 힘을 확인시켜준다. 가족과 친족 내에서 호혜성의 원칙으로 오가는 사회적 자본을 대체할 유일한 힘은 화폐자본으로 귀결된다(자세한 내용은 2장을 참조할 것).
어머니로부터 몸매에 대한 잔소리와 저임금 일자리에 대한 부당한 지적과 함께 데이트와 결혼에 대한 압력을 받았던 보희는 어머니의 관점을 이렇게 전한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거면 돈이나 넉넉하게 벌든가." 역시 가족들과 따로 떨어져 사는 소정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돈을 더 번들 그분들이 더 이해해주실지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부모와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집을 나와 따로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비혼여성 중 하나인 지수는 가족의 압력을 진정시키는 화폐의 힘을 이렇게 설명한다. "특히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벌이가 좋다는 걸 부모님이 아시고 난 다음부터 제가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 결혼 얘기를 별로 안 꺼내세요." - P83

라파비차스Lapavitsas(2009)는 신용거래와 금융서비스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필요로 하는 개별 가정을 발판으로 신자유주의 안에서 30년간 켜켜이 쌓인 금융자본주의를 "일상생활의 금융화"라고 정의한다. 그는 최근의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등이 주목했던 금융자본이 있던 초기 자본주의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금융화의 상황이 더 복잡하다. 이는 한국이 최근에 발전하여 뒤늦게 세계자유시장에 뛰어들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기 훨씬 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부터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은 공식적인 금융투기의 규모와 양태에 비교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본의 생산보다는 화폐자본의 순환을 우선시함으로써 (특히 이자에서 이윤을 남김으로써) 자산을 마련하는 자산증식의 논리와 욕망이라는 측 - P89

면에서 양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엘리어카Elyachar(2010)의 간명한 지적처럼 비공식 시장은 친족구성원이나 이웃 같은 1차적인 사회적 네트워크에 크게 의지한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착취 과정은 훨씬 복잡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월스트리트식 금융화global financialization‘라는 라파비차스의 맥락과 구별 짓기 위해 가정경제의 뿌리 깊은 토대를 이루고 있는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퇴적된 금융화sedimented financialization‘라고 부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젠더화된 노동빈곤층을 살펴보는 창이라는 의미에서 월스트리트식 금융화과 퇴적된 금융화의 개념적, 역사적 차이를 개괄하고 이 두 금융 시스템이 비혼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퇴적된 금융화가 어떻게 심지어 ‘포드주의적인 생산양식‘ 혹은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로 알려진 시기에 이미 화폐자본이 주도적으로 자산증식을 꾀하는 데 이용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화폐자본을 가지지 못한 노동빈곤층은 어떻게 배제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금융자본은 전부터 존재했다. 그리고 퇴적된 금융화는 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통해 만들어진 월스트리트식 금융화와 그저 나란히 공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퇴적된 금융화는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실천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라는 이름의 이 새로운 금융화를 (순환의) 속도와 (불안의) 강도, (금융 계급의 양극화라는) 영향 면에서 더욱 가속화시킨다.
우리가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을 이해하려면 (전세주택과 비공 - P90

식적인 대출, 그리고 나중에는 전 지구적인 시장을 통한) 이 같은 금융투자 기법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는 산업생산을 통해 국가적인 이윤의 축적을 주도하는 양대 기둥을 국가와 재벌로 바라보는 ‘발전주의 [자본주의] 국가‘의 틀에서 주로 설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가계경제의 수준에서 대체로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통해 삶의 안정성과 자산을 관리하는 불안정한 소득계층에 대한 보다 세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 P91

임대 시스템과 대출 정책은 한국의 부동산경제와 금융시장의성격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변동성이 큰 한국의 도시 부동산시장은 자산축적과 계급양극화의 주된 근원이다(H. B. Shin 2008). 한국전쟁(1950~1953년)과 군사쿠데타 및 독재의 시기(1960~1987년)를 거치며 한국의 경제적 중심은 농업에서 산업생산으로 급속히 바뀌었고, 이와 함께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유입되었다. 사람들은 특히 수도인 서울로 몰려들었는데, 그 결과 오늘날 서울은 전체 인구의 1/4을, 수도권 지역까지 고려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같은 대대적인 이주와 함께 도시 지역의 아파트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부동산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는데, 서울의 경우 1986년과 2002년 사이에 - P100

300% 이상이 올랐다(신광영 2003, 줄레조 2007, 하의도 2008).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른 1970년대 말, 1980대 말, 그리고 1990년대 말 세 시기는 특히 주목할만하다. 이 세 시기를 거치면서 비공식적인 현금시장과 결합한 부동산시장은 비공식적인 현금시장을 위해 완전히 활용되었고, 화폐자본을 통한 부의 양극화를 가속화시켰다(김용창 2004),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부동산 소유는 부와 계급이동성을 결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상황에서 특이한 점은 공식적인 임대금융 부문이 거의 개발되지 않다보니 부동산자산 거래(매매뿐만 아니라 임대도)가 현찰 목돈시장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택담보대출시장은 2003년에야 도입되었고, 지금도 일반적으로는 고소득의 정규직 종사자에게만 가능하다. 은행의 주택대출 시스템과 주택보험기관들 역시 최근까지도 정부가 운영하는 주택기금에 국한된 미개발 상태였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과거 주택 구입 비용을 조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파트에 청약할 수 있는 저축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채택된 북미식의 주택담보대출mortgage과는 달리, 주택 구입을 위한 한국의 은행 대출은 부동산 소유권이 확정된 이후에야 가능했고, 구입한 주택을 위해 대출할 수 있는 최대치는 북미의 주택담보대출(95%)보다 낮은 70%였다.
수년에 걸친 군사독재와 국가의 경제정책을 통한 성장의 유산들은 대체로 은행 융자 관행과 관련된 규제에 영향을 미쳤다.
1960~1997년까지 중소기업과 개별 가구는 심한 제약 때문에 은 - P101

행 대출을 받기가 어려웠다. 발전주의 국가의 성격이 강했던 한국은 은행을 통제하여 대기업(재벌)이 생산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이에 대부분의 대출(90%)은 대기업의 몫이었다.
이 같은 한국 대기업들은 미국이나 다른 선도적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정부의 총애를 받는 정도가 달랐다. 한국에는 삼성, LG, 현대 등 약 열 개 정도의 재벌이 있는데, 각각의 재벌들이 족벌주의를 통해 재생산한 자회사들은 자동차·전자·첨단기술상품·섬유·의류·제과·요식업·식료품업·백화점 등거의 모든 산업 및 서비스 상품을 망라한다. 좀 더 최근에는 벤처캐피털 회사와 여타 제2금융기관들도 재벌의 네트워크에 속하게되었다. 아시아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이들 재벌이 양적인 면에서나 속도의 면에서나 월등한 생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신용거래로 상품의 생산과 유통 사이의 시간적 격차를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우호적이었던 발전주의 국가 한국은 개별 가정에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저축을 하라고 장려했고, 이를 토대로 은행에는 대기업에 저리로 돈을 빌려주라는 압력을 넣었다.
따라서 개별 가정에서는 비공식적인 대출업과 계가 은행보다 훨씬 접근 가능하고 수익성이 좋으며 더 나은 선택지로 각광받았다. 비공식적인 대출의 이자율은 연 60%가 넘었지만(은행 대출 이자는 연 20% 미만이었다) 중소기업과 개별 가정들은 규제 밖에 놓인 비공식 화폐시장의 단골고객이 되었다. 이는 한국인들 - P102

이 치솟는 주택 가격을 어떻게든 감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주택 가격을 치를 때 목돈의 현금을 선불로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을 해내는 한 방법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창의적으로 비공식 대출 시스템을 부풀리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주택 구매에 필요한 목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주요한 방법은 주택임대 시스템을 목돈의 현금을 냈다가 돌려받는 전세라고 하는 일종의 신용 시스템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Dongchul Cho 2006, Nelson 1991, Renaud 1989).
부동산시장이 연구 분야에서뿐만 아니라(공공주택에 대한 정책 지향적인 연구의 일환으로서) 정치에서도 뜨거운 주제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또한 도시 주거의 가혹한 상황에 대한 우려가 전반적으로 확산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전세에 대한 역사적·정치경제학적 연구가 드물다는 점은 뜻밖이다. 부동산과 주택 문제를 다루는 사회학자, 도시계획가, 경제학자 그 누구도 전세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지 못하고, 전세가 금융시장 및 화폐자본의 축적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비중 있는 정치경제학적 분석도 흔치 않다. 연구자들은 공공주택의 형태를 바꾸고 좀 더 완화된 대출 정책을 개발할 것을 권고해왔다. 하지만 이런 정책 제안들은 목돈이 요구되는 보증금의 관습 자체에 대해서는 별 문제를 삼지 않는 듯하다. 이 원인은 한국에서 전세 시스템이 집 장만 과정에 완벽하게 침투해버린 데다, 문화 속에 워낙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서 대안적인 메커니즘을 상상하는 것마저 불가능해 - P103

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연구참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 중 누구도 많은 현금과 고소득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이 고통스러운 전세 시스템을 비판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목돈 마련의 어려움을 개인적 실패 혹은 세대의 실패로 인식한다. - P104

(주로 남성이 수행하는) 임금노동과 (주로 여성이 참여하는) 비공식 화폐시장 간의 이 같은 젠더화된 분업은 정규직일자리시장에서 여성고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학교를 다니는 자녀가 하나 이상 되는) 규범적인 가정의 일원인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의 주 관심사인 자녀 교육과 자녀의 초기 경력개발을 관리하는 일과의 관계에서 가정의 재정적 안정성에 대한 책임을 맡는다. (부모에게는 딸의 결혼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큰 손실일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아들이든 딸이든) 자녀의 결 - P107

혼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에도 목돈의 현금이 들어간다. 학원비도 대야 하고 교사, 군 복무와 대학입학 관련 기관의 인사, 그리고 자녀의 고용주에게 뇌물도 줘야 하기 때문이다(S. J. Park and Abelmman 2004).
현대적인 계가 젠더화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부관계나 모계, 사돈관계를 통해 삶의 경로와 패턴이 연결된 주부와 아이 어머니들에게만 허용된다. (계주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순번이 다 돌 때까지 돈을 유지하지 못해) 발생할 수 있는 분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성원의 모집은 주로 가족·결혼·고향·학교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진다. 결혼과 가정에서 멀리 떨어진 여성들은 이런 종류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약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적인 신용시장에서 주변화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고등학교나 대학 동창들과 같이 어떤 계를 만든다 해도(재정관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이 중 결혼해서 부모가 되는 구성원이 생기기 시작하면 결혼한 동료들이 싱글들을 낙인찍듯 대할 뿐만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가 사라지기 때문에 싱글들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가령 내 연구참여자인 자경은 그녀가 결함 있는 성인이라는 암시를 주는 남성 동료의 모욕적인 언행에 발끈한 뒤 대학 동창들로 구성된 사회적 네트워크의 모임자리에 더 이상 초대받지 못했다. 또 다른 연구참여자인 호선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정기적인 친척 모임에서 점점 발을 뺐다. - P108

이처럼 계가 결혼과 모성을 가지고 여성의 입지를 제한하는 젠더화되고 가족/결혼 중심적인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계급과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생존과 사회적 비용 때문에 모두가 목돈의 현금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계는 단지 돈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목돈의 용도는 주거(구입과 임대 모두), 교육(공교육과 사교육 비용 모두), 결혼(결혼식을 직접 치르는 하객으로 참여하든), 모든 종류의 경조사 비용 등 다양하다. 현금 선물이 필요한 경조사로는 생일(특히 아기의 백일과 돌, 어른의 경우 환갑, 칠순, 팔순), 기념일, 시험(행정고등고시, 사법시험, 외무고등고시 같은 전문직 시험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시험과 대기업 입사시험), 졸업, 그 외 중요한 성취 등이 있다. 화폐자본이 많은 사람일수록 화폐 선물을 거래하기가 더 좋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계급화된 관행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참여 방식은 계층을 넘어서 누구나 다 받으면 줘야 한다는 호혜성의 원리를 토대로 삼고 있다. 가령 민서는 아버지가 예상보다 빨리 은퇴하시고 이를 계기로 부모가 농촌으로 이사를 가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그만둔다는 것은 자녀의 결혼이나 부모의 장례식 같은 가정의 경조사가 발생했을 때 동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부조금, 즉 호혜적인 화폐 선물을 포기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결혼은 목돈을 이용해 자녀 결혼 비용을 상쇄하고, 신혼여행·가구·주택 등의 형태로 신혼가정을 지원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다. 현금 선물인 축의금은 신랑과 신부 가족들이 가장 신뢰하 - P110

는 사람(주로 가족구성원)이 결혼식장이나 교회에서 걷는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을 때는 돈을 낸 사람의 이름과 액수를 대체로 기록하여 이를 돌려줘야 할 때 최소한 어느 정도의 금액이어야 하는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종류의 화폐 선물은 계에 투자할 수 있는 종잣돈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한국에서 현찰 목돈에 대한 필요와 그 공급은 계급과 관계없이 보편적이며 정상화되어 있다. 즉, 사람들은 화폐시장을통해 소득을 창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략, 다시 말해 (이자를 통해) 돈 버는 돈에 이미 익숙하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는 임대 시스템이 수익을 남기기가 좋다는 인식이 생겼다. 집주인의 입장에서는 전세보증금을 받아 이자를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쏠쏠한 돈벌이가 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금융위기 이전에는 정부가 은행을 규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주인(혹은 현금을 가진 사람중에 이자 낳는 자본 혹은 돈 버는 돈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은 전세보증금을 비공식 대출시장에 투자하거나 더 수익이 높은 아파트를 구입하는 데 썼다. 중산층은 두 번째 집을 다른 사람에게 임대할 수 있고, 노동계급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일부를 임대하여 얻은 목돈을 굴려 나중에 자녀가 태어나거나 성장했을 때 더 큰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세보증금은 모두에게 유리했다(Nelson 2000). 목돈의 보증금 확보는 주택이나 아파트 현금 구입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전략이다. 한국의 많은 중산층이 이런 보증금을 잘 굴려서 노동계급에서 중산층으로 계층이 - P110

동을 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집주인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거의 없다. 임대가 종료되었을 때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돌려줄 보증금이 없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와 나가는 세입자, 그리고 집주인이 부동산 중개소에서 함께 만나, 들어오는 세입자의 보증금을 나가는 세입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주인이 원래의 보증금을 손실고 새로운 세입자도 찾지 못한 데다가 비공식 대출로 부채를 메우지도 못했을 경우에는, 부채 때문에 자신의 부동산을 잃을 위험에 놓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입자를 제때 찾는 문제는 집주인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전세의 교환가치가 높긴 하지만(부동산 구매가의 절반 이상), 한국 세입자들은 앞서 지적했다시피 월세는 돈을 날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직업이 불안정하고 소득이 불규칙한 세입자들은 월세를 낮추기 위해 보증금을 높이고 싶어 한다. 이는 어째서 내 연구참여자들이 룸메이트가 이사를 가버리고 나면 전세보증금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빌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들은 월세를 내는 것보다는 목돈의 전세금을 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세 제도는 세입자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노동빈곤층을 위해서는 월세 제도를 채택하는 게 더 낫다.
는 제안도 있었다 (Nelson 1991). 노동계급 세입자 역시 목돈의 현금을 동원하여 더 큰 거주공간을 획득하는 방편으로 전세 제도 - P111

를 활용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집을 소유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넬슨의 주장에 동의한다. 특히 소득이 제한적이고 결혼과 가족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자본이 한정된 사람의 경우, 통상적으로 주거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목돈을 만들 수가 없다. 이들에게 임대주택은 자신이 가진 한정된 자금으로 얻을 수 있는 영구적인 주거지라는 지속 가능한 형태여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연령과 결혼을 우선시하는 조항을 없애 전세대출 정책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산층 부동산시장에 종속되지 않고 안정적인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을 늘리고 전세대출을 확대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는 한국의 맥락이라는 창을 통해 전 지구화되고 있는 금융 관행이라는 더 넓은 주제로 연결된다. 공식적인 금융시장이 전 지구적 규모로 폭발하기 전부터 이미 발달해있었던 화폐자본을 통한 자산증식은 화폐자본이 (일반적으로는 이자 발생과, 포인트카드 같은 현물 보상을 통해) 어떻게 그리고 왜 노동빈곤가정과 불안정노동자들의 삶에서 중요한 생존수단으로 편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더 깊은 (부정적인) 함의를 가질수 있다. - P112

이처럼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장은 화폐자본(이자 낳는 자본)의범위와 형태를 전방위적으로, 특히 포인트카드 같은 유사현금 제도의 창출을 통해 확대했다. 좀 더 안정된 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주식시장과 공식적인 신용대출시장을 이용할 수 있으며, 포인트카드 제도는 가처분소득이 많지 않은 청년, 학생, 어린이들까지도 공략한다. 금융자본주의의 중심부가 젊은 층으로부터 그 광대한 인프라의 씨를 뿌리면서, 이런 식으로 이자 낳는 자본의 논리, 즉 이자를 통해 혹은 포인트와 마일리지를 쌓아 비록 공짜일지언정 화폐자본력을 늘릴 수 있다는 신화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반이 있으며, 이 현상은 포인트카드 같은 금융상품을 이용하여 자산을 축적하는 작은 규모의 관행에 의해 도전받기보다는 오히려 정당화된다.
이런 종류의 금융상품과 선택지를 이용하는 ‘재테크‘라고 하는 행위는 사회경제적 안정을 얻고자 한다면 일반인에게도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개인들은 더 이상 평생고용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국가관료주의가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평판 때문에 새롭게 발족한 국민연금 역시 신뢰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내 연구참여자들은 자신이 이런 자산증식 기법들을 제대로 이용하고 있는지 - P116

걱정스러워했다. 대부분은 미래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사적인 금융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비용에 관계없이 모두가 이런 기법들을 이용할 수 있고, 유일한 변수는 정보를 관리하는 개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듯 싶었다. 이 장의 첫머리에 있는 인용구에서 원이가 밝히고 있듯, 이들이 이런 기술을 갖추지 못했을 때 이를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 P117

이 대화는 금융위기 이후의 금융 불안이 자산을 축적하고 현재와 미래의 불안정에 맞서는 최상의 방법이었던 금융위기 이전의 소소한 돈 불리기와 목돈 거래라는 금융 습관을 어떻게 증폭시키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요컨대 한국의 임대 제도는 집주인이 집세만 받는 시스템이 아니라 목돈의 현금을 비공식적으로 손에 넣어 돈놀이를 할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세입자는 목돈을 집주인에게 맡겨놔도 아무런 이자를 받지 못하지만, 집주인은 목돈의 현금을 받아 낮은 위험으로 이를 다른 곳에 투자하여 이자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금융 기법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의 일상생활 곳곳으로 침투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이용된 자산증식 수단의 중추인 임대주택의 중요도가 더욱 확대되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퇴적된 금융화와 월스트리트식 금융화가 한국 신자유주의 속에서 융합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공식적인 금융시장이 자유화되면서 등장한 신용카드, 주택담보대출, 사보험 및 연금, 고금리 저축상품 등 이자 낳는 자본을 굴릴 수 있는 추가적인 기회가 나타났고, 이는 한국에서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를 이루고 있다. 산업자본가와 금융시장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결합한 금융자본이 출현한 증거로, 경제학자들은 대기업이 금융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비은행 금융기관들의 지분을 상당히 소유하게 된 점을 거론한다(C. H. Lee, Lee, and Lee 2002), 비은행 금융기관은 전세를 통해 상당한 보증금을 - P121

받는 집주인, 계에 참여하는 사람, 심지어는 고리대금업자 같은개인들에게 중요한 채널이다. 내 연구참여자들의 경험에는 이보다 훨씬 소박한 방식으로 이런 종류의 월스트리트식 금융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리대금업과 계, 그리고 전세라는 보편적인 주택 임대 시스템을 통한 비공식적인 금융자본축적과 목돈의 현금 기반 거래에 의존하는 사회적인 맥락을 고려했을 때, 재벌 주도의 산업자본주의를 통한 현대 한국 경제의 등장과 관련된 지배적인 이론은 한국 자본주의를, 특히 가계경제의 측면에서 완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산업자본이 등장하면 효율성 증대를 위해 순환과 축적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민간 대부자들을 제도화된 은행으로, 그다음에는 공식적인 금융자본 시스템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고리대금업 같은 비공식적 금융 관행이 사라진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한국의 비공식 대출과 신용시장은 산업자본 레짐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도, 절정인 동안이나 그 후에도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비공식 금융자본, 그중에서도 특히 계는 산업자본이 점점 우세해지는 동안 금융자본의 제도화 속으로 자취를 감추기보다는 자산축적의 핵심 요소로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례를 토대로 생각했을 때, 주택금융 영역에서는 구매뿐만 아니라 독특하게도, 임대 제도 역시 이자 낳는 자본을 축적하는 핵심 요소이며 이는 자본주의 축적 과정에 노동계급의 의도하지 않은 동참을 통해 실행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 - P122

요한 점은 금융자본을 허구적이라고 일반화시켜버릴 경우 임금과 목돈의 현금 운용 모두가 한국의 맥락에서 계급을 막론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중요한 양식이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한국 자본주의 역사(자본주의의 축적 과정과 위기), 그리고 국가 및 재벌 주도 경제발전의 위기라는 큰 그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강력한 금융시장(주식시장이 부각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사채나 큰손 같은 다양한 고리대금업과 계 같은 비공식 대출업)이 없었다면 그 무엇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초기에는 (이자 낳는 혹은 허구적인) 주택 호황이 자본축적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월스트리트식 자본은 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을 통해서야 보편화되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주택과 금융시장의 연관성은 최근 주택시장과 금융시장이 붕괴해 크게 피해를입은 북미와 유럽국가의 상황과 유사해 보일 수 있다(Panitch andGindin 2008).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행 시스템에 의한 주택시장 투기가 주택과 (공식적인) 금융시장의 불안정으로 이어지게 된)은 한국의 상황과 다르다. 한국에서는 주로 비공식 금융시장을 통해 가계자산의 관리가 이루어졌고, 이렇게 관리된 가계자산이 주택(및 임대) 시장에 투기되면서 아시아금융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국가경제의 몰락을 초래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경제를 지탱함으로써 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크게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이같은 비교는 투기를 자본주의적 축적의 믿음직한 방법으로 옹호 - P123

하는 월스트리트 은행가 등의 견해를 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융화와 금융시장이 주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로에 좌우된다는 솔깃한 일반화에 도전하기 위함이다.
요컨대 이제까지 나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주거안정성 및 금융안정성을 저해하는 다섯 가지 구조적 제약의 집합을 다루었다. 첫째, 한국전쟁 이후 경제는 목돈의 현금과 그 이자를 개별 가정의 자산축적을 위한 주요 수단이자 원천으로 활용하는 독특한 금융시장을 발달시켰다. 둘째, 전세를 이용하는 보편적인 관행은 목돈 순환의 핵심 고리다. 셋째, 임대주택의 경우 까다로운 요건과 관료적인 평가절차 때문에 임대주택에 맞는 금융상품과 대출 기회가 제한적이다. 넷째, 금융법과 은행조례는 특히 임대주택대출 신청 자격요건에 정규직 일자리 규정과 연령 규정을 넣음으로써 결혼한 부부와 규범적인 가정이 당연히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듯이 명시해놓았다. 다섯째, 일반적으로 여성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비혼여성들은 대출 자격요건인 정규직 근무 기록을 제시할 수 없었다. 앞의 세 가지 맥락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네 번째 사항은 대출 신청 전에 혼자 살았음을 증명할 수 없거나 나이가 어린 싱글(젠더를 막론하고)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사항은 혼자 혹은 비가족구성원과 함께 살고 싶은 비혼여성 같은, 재정적으로 주변화된 집단의 주택 필요에 젠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 중요하다. 관습법 관계에 있는 이성커플도 네 번째 사항의 영향을 - P124

받을 수 있지만, 이 경우 주택 문제는 남성 쪽의 자원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고용 상태가 안정적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전세대출 등의 융자 신청요건에 부합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비혼여성, 여성 동성커플, 가족관계나 성적인 관계가 아닌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정이, 특히 정규직 시장에 진입했던 경력이 없거나 그런 경력을 쌓을 수 없는 젊은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있을 경우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 P12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