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
리단 지음, 하주원 감수 / 반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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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필연적으로 이 싸움은 우리가 지게 될 것이라는 걸.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노화보다 빠르게 진화하는 병을 보고 있노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그러나 사실은 생각한다. 병이 펼쳐주는 지평도 상상만큼 나쁘지 않다고, 가끔은 기꺼이 그의 움직임을 보조한다. 나는 많은 약을 먹고 있지만, 그것들이 병증을 공격하고 소멸시킨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약은 병을 좀 더 합리적인(병과 병자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준의) 크기로 조정하는 역할이다. 선두에서 씨름하는 건 자신이다. 그리고 전선의 선봉에 서야할 때 나는 가끔, 아니 종종, 아니 좀 더 자주 병에게 진두지휘를 양보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제 너무 섞이고 얽히고 휘말려버렸다. 무언가 하려 해도 그게 정말 자신을 위한 일인지, 병이 속삭여 하자고 조르는 일인지 구분하기도 모호하다. - P25

나는 정신병자들이 나을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낫는다는 것이 완전한 회복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 나아진다는 의미로, 과거 그 사람의 어떤 ‘맑았던‘ 시점으로 돌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똑똑하고 영리했던, 기민하고 총명했던, 꽤 괜찮았던 시기를 안다. 하지만 병은 그곳 그 정류장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다. 오히려 병의 힘을 빌려 우리가 그때보다 똑똑하고 영민할 수 있는 미래에 당도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가능성이 높다. - P26

병이 없는 사람은 병식을 가진, 병식을 가져야 한다는 괴로움을 모른다. 병식은 단순히 ‘나는 병이 있습니다.‘ 하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다. 병식은 병을 인정하고, 이 병을 관리하는 패턴을 만들며, 병적 상태에서 자신의 행위가 자신 또는 타인에게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나는 병이 있다.‘라고 생각하 - P40

기만 하는 ‘병식 없는‘ 환자 A와, 병식이 있는 환자 B는 똑같이 조증이 와도 그 사고와 행동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A에게 조증이 왔다. A에게도 자신의 상태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조증 상태가 점점 심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A는 여러 가지 딴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다음 주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조증을 밝혀야 하나? 2주 후에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데 그때까지 가만 있다가 ‘재미 좀 본‘ 다음에 하이텐션으로 놀고 나서 그때 의사에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조증은 규칙적인 속도로 역을 향해 들어오는 기차가 아니라 살얼음에 미끄러져 마구 회전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들이받는 자동차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측불가한 그 진행 속도에 그대로 올라타버려 그는 친구들과의 모임 전에 이미 사고를 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불쾌한 일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인식한 즉시 빠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증상이 악화된다는 것을 알고, 조증이 아무리 발버둥치며 달콤한 말을 해도 귀를 막고 자신을 병원에 끌고 가는 것. 후일을 대비하여 미리 조증의 퇴로를 차단하는 이 행동이 병식 있는 병자의 것이며 여러 가지 불상사로부터 병자를 지킨다.
병식을 가진 B의 경우, 조증을 눈치채면 단번에 불려간다. 이름하여 조증 법정으로. "조증 인정하십니까?", "최근 며칠간 50만 원 쓰셨죠? 당장 병원 갑시다.", "자이프렉사(항조증제로 체중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있음) 먹고 10킬로그램 찌겠네요.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라 - P41

고 말하는 검사와, "아니 아무 문제도 없으시잖습니까. 좋아 보이시는데?", "과장된 걱정을 하시는군요. 기분이 좀 나아지셨을 뿐입니다." 하며 정중하고 뻔뻔하게 부인하는 변호사 사이에 끼어 우왕좌왕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판결을 내린다. 그는 여러 수를 생각하지만 결국 머릿속 법정을 폐회하며 과거의 판례, 사고의 전적을 쭉 한번 읊고 ‘병원에 가라.‘라는 판결에 따라 버스에 몸을 싣는다.
당신이 병적 상태에서 아무리 계산하고 생각하고 예측해서 발걸음을 디뎌도 그 길은 당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당신을 안내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병이 침입한 상태로 병을 다루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라는 말처럼, "지금 병원에 가라."라는 말 또한 우리에게 언제든 실천할 수 있는 잠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옷을 꿰입은 후 병원에 가 고백한다. 이어지는 치료와 치료의 망망대해에 닻을 내린다. 우리는 병식을 가졌으니까. - P42

이런 맥락에서 나는 ‘병밍아웃‘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는 명백히 퀴어의 단어를 차용한 것이다. 그리고 정신병을 밝히는 일 역시 1) 반복해야 하고, 2) 말을 꺼낼 상대에 대한 사전 조사가 필요하며, 3) 밝힐 상대 그리고 자신에게 감정적 동요가 발생하여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 P45

자신의 병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화해야 하는 이들은 이 ‘정신병‘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다른 (비슷한 소수자의) 습속이라든지 문자를 베꼈다. 이에 관해 ‘퀴어의 소수자성을 지운다.‘라고 비판한다면 반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퀴어라는 집합의 여집합에 정병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두 집합의 교집합에 속한다. 피차 언어 없는 소수자들끼리, 기저도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이들끼리 누가 누구의 언어를 갖다 쓰고 말고 한다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울‘ 만큼 권력이 강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 P46

이를테면 누구에게나 "나 같은 사람이?", "내가 설마 그런 것까지 하겠어?" 싶은 행위들이 있을 것이다. 조증은 그런 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버린다. "조증은 뭐든지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언뜻 긍정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결코 그런 의미만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도, 동시에 어떤 범죄든 저지를 수 있다는 뜻도 된다. - P90

조증이 처음 발발한 사람들은 이것을 가히 신이 자신에게 내린 선물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들은 뭐든지 할 수 있고 또한 뭐든지 될 수 있었다. 조증을 딛고 솟아난 인생. 그러나 몇 차례 재발하게 됐을 때 조증 환자는 비로소 시름에 잠긴다. 아직 조증이 망칠 미래가 선명하지 않은 이들은 이 과정에서 조증을 숨긴다. 일이 터졌을 때야 조증을 재우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조증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벼랑으로 몬다는 걸 알게 된 조증 환자들은 솔직해진다. 그들은 증상이 생겨나기도 전에, 예감이 들었을 때 즉시 병원에 간다. 그리고 그전까지 먹던 모든 약들을 항조증 약으로 바꾸고, 거대한 데파코트와 줄줄이 이어지는 리튬과 라믹탈과 셀 수 없는 알프라졸람을 달고 돌아온다. 그렇게 돌아온 곳은 지옥이다. 조증에 정직한 사람들이 가는 지옥. - P73

나는 BPD는 사람들에게 좀 해를 끼쳐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살면서 그런 해를 좀 입으면 어때?‘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BPD의 존재가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듯 불가촉민인 양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말로 누군가 자신에게 해가 된다면 그를 내치는 방법도 배우고 해봐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 P107

한편에서는 로맨틱 코미디를 촬영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자살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이 BPD의 일상이며, 이 아이러니가 발각되어도 그는 상대가 왜 충격을 받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원래 극단이 당연하기 때문에. BPD의 감정이야말로 롤러코스터처럼 역동적이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고도도 모를 곳까지 끌려올라갔다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동댕이쳐지는 삶을 살아왔다. 만성적인 불안과 공허에 지속적으로 시달려 익숙해진 그들의 내면 세계에서는 파괴적인 생각과 실험 들이 연이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다분히 폭력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이로 인해 자살사고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울어도 이것을 ‘그렇게 해야 하는‘,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문제는 BPD들에게 생각(사고)이란 단순히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모범적인 역동이라는 데에 있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해 이는 고통은 BPD들에게 수족을 잘라낼 때 느끼는 것처럼 실제로 감각하는 고통과 다름없다. 그런 고통을 지우기 위해 무슨 수든 쓰는 BPD를 사람들은 언제나 오해할 뿐이다. - P109

정신이 망가진 사람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해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특히 자기 자신의 육체다. 많은 정신병자들 - P137

이 몸과 정신병을 분리하여 사고한다. 체력 저하, 체중 증감, 무기력증, 수면장애 같은 신체의 신호를 무시하고 자신이 분석한 정신병의 원인을 소거할 수 있으면 지금 봉착한 제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혹은 어떤 시점까지는 이런 전략이 먹혔을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하는 실수가 초발 삽화에서 약물 치료로 호전을 보이면 빨리 약을 끊고자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실수는 병을 치료할 기간을 이를테면 1~2년 정도로 잡고 그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만든 마지노선에 쫓기듯이 치료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섣불리 자의적으로 단약하게 되면 일이 힘들어진다. 단약 이후에 삽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므로 병이 다시 발발하게 되면 이들은 필연적으로 무너지며 재차 병의 이유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사실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다시 병원에 가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이미 이전에 먹었던 용량을 상회하는 약을 복용하게 되며, 이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병은 점진적으로 자라난다는 사실이다.
자라나는 정신병은 교묘하다. 임계점을 넘어선 정신병은 더는 우리 안의 타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긴밀하게 섞여버린다. 병에 오염되었다고 보든, 병과 혼합되었다고 보든 이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기분을 잃어버리고 병증이 호소하는 대로 사고하고 판단을 내릴 공산이 커진다. 병은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를 보다 - P138

확장하고, 우리가 인식을 마치면 그 속으로 재빨리 스며들어 자신의 몸집을 불린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병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상승하는데, 사실 제어가 가능했던 시기는 이미 놓쳤다. 이제는 확대되는 병의 지각을 쫓아가려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시도에 그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병이 내부에서 발발하는 느낌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려오는 느낌을 병이 내 내적 자양분을 먹으면서 자라나는 게 아니라 다 자란 성체로 불쑥 등장하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쯤되면 이제는 물을 수밖에 없다. 이 병을 낫게 하는 게 가능할까?
정신병을 앓는 이들 중 일부는, 의사가 당신이 정신과 약을 평생 먹어야 하고, 이 병은 죽을 때까지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고 말하면 실망감과 낭패감을 감추지 못한다. 한편, 일부는 덤덤히 받아들이고 자기도 당연히 그리 생각했음을 피력하는 경우도 있다. 더 이상 무엇을 좋아지게 하기 위해 치료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약을 복용하고, 생활 습관을 개선하고, 환경과 여건을 갖추는 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상상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떤 이들은 그 비용을 지불할 여력이 되지 못해 간신히 저공비행으로 버티거나 추락하고 다시 올라오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교착상태에 새로운 지평이 되어줄 신체 질환이 발발한다. 경증으로는 약물 부작용부터 근골격계 이상, 대사 질환, 각종 감염증, - P139

피부 질환, 자가면역 질환, 심지어 탈모에 이르기까지 더는 몸이 이전같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원인과 진단이 명확한 병증들은 비교적대처하기 용이하다.
약물 부작용이나 정신 흥분 상태가 유발하는 발작을 경험해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각과 육체를 완전히 제어할 수 없고 자기 멋대로 날뛰는 신체 말단들을 갉아대는 듯 기이한 통증을 겪으며 벗어날 수 없는 경험 말이다. 신경과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증상이 폭발할 때에 응급실에 내원해도 이유 없는 ‘액팅 아웃(acting out,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갈등을 분출하는 정신과적 증상)‘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고통들. 당신은 이제 고통이 불합리하게 배분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원인 불명의, 저절로 생기는 병(특발성 질환)을 병 - P140

자들이 홀로 이겨내기란 매우 어렵다. 이제껏 내 말을 잘 듣고, 내 편이라 여겨왔고, 함께 정신병과 맞서던 육체의 배반은 마치 누군가 나를 포기한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마음이 지각하는 시간의 흐름이 어떻든, 육체는 차곡차곡 나이 들어간다. 스무 살의 숙취와 서른 살의 숙취가 다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신체가 담보가 되기는커녕 신체의 병이 마음의 병과 손을 잡고 함께 행복의 나라로 가버리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당신의 사고장애, 정신증이 생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너덜너덜한 몸과 결합해 여러 이상 사고를 야기한다. 당신은 ‘내가 죽어야이 고통이 끝난다.‘ 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갖기도 하고, 얼마나 더 시달려야 구원받을 수 있을지 탐구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내몰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반대되는 상황, 즉 육체의 질병을 해결해야만 정신의 짐도 덜 수 있을 거라는, 정신병의 초기와 반대로 작용하는 생각을 키워나가는데, 문제는 육체의 고통이 사라지더라도(고통의 원인이나 고통스러운 요소를 제거·치료하더라도) 정신에 생겨난 얼룩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얼룩은 비단 자살사고나 자해 충동같은 자기파괴적이고 분명한 형태로 표출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자신을 돌볼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해 제대로 된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병이 어떻게 진행되든지 개의치 않는 무시일관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어쨌든 긴 투병, 투병과 투병들 사이의 중첩은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포 - P141

기하게 유도한다.
병이 낫지 않는 사람들은 울적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새로운 질병이 생긴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사소한 것, 이를테면 위장장애같은 것에도 쉽게 견디지 못해 한다. 입마름이나 오심 같은 사소한 증상을 겪을 때조차 마치 자기가 앉은 의자가 동댕이쳐졌다는 얼굴로 시름에 젖는다.
그러나 병이 펼쳐지는 장은 다른 나라의 월드컵경기장이 아니라 자기 몸이다. 그 연관성을 병이 낫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우울증으로 침대에 오래 누워만 있을 때 누워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습관이 생겼다면, 자연스럽게 팔꿈치에 체중을 싣는 자세가 되므로 테니스를 치지 않아도 테니스엘보가 생길 수 있다. 이처럼 오래 누워만 있으면 테니스엘보가 생길 수 있다는 것, 불규칙한 섭식 습관으로 역류성 식도염이나 만성적 위장장애를 얻게 될 수 있다는 것, 활동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 근육에만 부하가 가서 근육통이 생긴다는 것 등을 겪으며, 어쩌면 실은 모두 원인은 자신의 행동 양태에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이유를 찾고 그것을 해결하면 해소되는 일이 아닌, 병이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좌절이다.
병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병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날아왔지만, 이 병이 저 병에 어떻게 기대고 있고 저 병은 다시 다른 병이랑 손잡고 있으며, 경한 몇몇의 병증이 사실은 중대 - P142

한 질환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모두 함께 개선하는 것이 아니면 그다지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불규칙한 식습관과 폭식에서 온 섭식 문제, 활동 부족과 갑작스러운 체중 증가로 관절 이상을 겪어 이를 한번에 타개하고자 마음먹고 운동 계획을 세워 충실히 이행하고자 했고 며칠 실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이 유감스럽게도 갑자기 새로운 활동을 감당하지 못해 손을 들어버려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이처럼 여러 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노력한 사람도 종내에는 두 손 들고 말기 때문에, ‘질병 관리 프로젝트‘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와 핵심은 아주 아주 간단한 것으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절대 혼자서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주위의 도움이 꼭 필요한데, 도움을 받으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을 요청하기를 수치스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프로젝트와 관계 사이에서 당신의 병은 (그것이 정신병이든 육체의 병이든 오래된 병이든 신생 병이든) 언제든 심한 기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P143

정신병은 처음에는 증상이 양호하고 환자가 잘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도 한 번 균형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비가역적인 파괴를 거듭하다 고립을 맞기 쉽다. 리튬을 1200밀리그램, 토피라메이트를 300밀리그램 먹고, 쿠에티아핀을 800밀리그램 먹고, 그리고도 모자라서 리스페리돈을 8밀리그램, 클로르프로마진을 50밀리그램 먹어도 나아지기는커녕 지금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 않게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을 뿐이라는 비참함을 정신병이 없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고 그런 비참한 상태가 마치 질 좋은 양분인 양 혹처럼 돋아나는 새로운 질병들의 존재가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그것은 정말로 아무도 모른다. 다만 끝없는 병의 계주를 지켜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P145

은 다음과 같다. 설명하고 분석하는 데 힘을 쏟지 말 것.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은 절망의 상태로 버려두지 말고 충분히 치료할 것. 그리고 희망적일 것. 당신이 자신의 모든 기회가 끝났다고 생각하더라도, 악화일로라도, 가능성이 없더라도 희망적일 것.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예상치 못한 질병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이위중한 질병일 때, 당신을 위로하러 오는 사람들을 밀어내지 마시길 바란다. 고립을 두려워하라. 고립이 죽음으로 가는 티켓을 이미 끊어놓은 자의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어도 그 비장함을 두려워하고 언제나 연대를 구하라. - P146

이론적으로는 여러 가지 약을 써보며 집중 관찰하여 최적의 약물을 찾겠지만, 우리는 안다. 많은 환자들이 몇 주가 아니라 몇 개월, 심지어는 해가 지나도 ‘나한테 맞는 약!‘의 느낌을 알지 못하며, 지지부진한 통원 치료를 반복하며 부작용만 주렁주렁 달고 절망감만 쌓여가기 십상이라는 것을.
처음 정신과에 갔을 때, 나는 나를 이해하는 의사가 있는 병원에다녀야 당연히 좋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병원을 발견한 것은 5년이 지나서였다. 그전에 계속 다니던 병원은 단점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계속 다닌 이유는 그곳이 좀 더 퀴어 프렌들리하고(동성애에 유난을 떨지 않아서) 나와 애인이 같이 다니니 관계 문제 등에대해 이해도가 높을 것이고 그만큼 우수한 처방이나 조언을 받을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약물 치료에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의사와 대화가 통하는지’가 아니다. 의사가 자신이 처한 복잡한 상황이나 특수한 관계에 대해 아주 자세히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고 약을 잘 지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서사를 이해해줄 만한 정신과에서 진료받기 위해 집에서 매우 먼 곳까지 찾아가거나, 환자가 몰리는 곳이라 오랜 시간 대기해야 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 P149

서까지 내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만큼 내게 도움이 되는지를 꼭 따져봐야 한다. 만약 정신과에 가는 것만으로도 나의 많은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면 유익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충분히 재고해볼 만하다.
약물은 자신의 고민, 정체성, 관계, 갈등 등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마법의 도구가 아니다. 당연히 약을 먹는다고 즉각적으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약물 치료는 몇 가지로 나뉠 수 있는 자신의 증상, 이를테면 불안, 공황, 우울, 조증, 자살사고, 환각 등 병증의 구체적인 면면에 대응하려는 치료다. 그러므로 약물 처방 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의사를 찾는 것이 우리가 병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조건이다. - P150

그렇다면 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언제 정신과에 내원할지 결정하는 것, 대학병원에 갈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 병원을 바꿀 때에 들 이유를 찾는 것, 그리고 약이 자신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 무엇이 약물의 작용이고 무엇이 부작용인지 선을 그어놓는 것, 병원비를 마련하는 행위를 하는 것, 내원해 약물 치료를 받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것, 약물 치료의 조력 집단과 - P157

연결되어 있는 것, 약물 복용 시간과 용량을 지키는 습관을 만드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에 너무 많이 몰입하지 않을 것 등 너무나도 많아 다 쓰기 어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결론은 단순하다. 약물 치료는 약물의 영역이므로 약물 치료는 약이 하게 의 일게 맡기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하면 된다. - P158

의사와 이야기하는 것은 정신질환의 세계에 익숙지 않은 초심자에게는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자기가 어제 울며 죽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면서도 티슈를 다섯 장 쓴다. 하물며 의사의 약물 처방에 불만이나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분노와 슬픔으로 티슈가 50만 장쯤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사에게 그간의 불만족스러운 상담과 약 처방에 대해 확실히 이야기해야 한다. 광인이 된 자신과 대면하는 것보다야 덜 어려울 테니까. - P161

정신과 의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복잡한 까닭은, 처음 정신과 진료실에 들어가면 이제까지 쌓아놓았던 모든 이야기가 떼로 몰려들어 자기가 먼저 말하려고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맞은 것부터, 유치원 시절의 따돌림, 초등학생 때 집안의 파산, 중학생 때에는 일진들에게 구타당함,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었으나 우울하고 결국 입시에 실패하여 그동안의 가족 갈등이 폭발해 모두 동반 자살을 하자고 난리가 났던 일들, 가족을 떠나서 대학에 왔지만 연애는 실패하고 성적은 학사경고를 면할 수 없으며 돈은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모욕적인 상황을 마주하며 마음속에 살의가 일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라고 눈물을 훔치며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어느덧 상담 종료 시간이 다가와 의사는 슬슬 난처한 기색을 보이고 오늘은 약을 줄 테니 다음 주에 오시라며 내보내는데 그때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다. 내 말을 듣기는 한 건가? 내 말에 반응이 없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 내가 그 빌어먹을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가지고 온 건데…… 하는 마음으로 대기실에 다시 앉아 기다릴 적에 그래도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았나 스스로 자위한다. 이름이 불려 약을 타서 몰래 꺼내보니 이름 모를 약 두 알이 봉지 하나에 들어 있어, 드디어 정신과 약을 먹게 되었구나, 나는 이제 공인된 정신병자구나, 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 사람들을 보니 모두 정신이 멀쩡하고 나와는 다른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 느껴져 집에 오는 입맛이 쓰면서도 나는 이제 인정받은 병자라는 마 - P162

음에 몸이 단다. 곧이어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가방을 열고 약봉지를 꺼내서 물컵에 물을 따라 경건하게 약을 입에 넣고 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일주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과를 처음 찾은 초심자라면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1. 이것은 약물 치료를 위한 상담이다. 심리 상담을 받고자 한다면 따로 심리 상담을 신청하라. 너무 많은 정보를 의사에게 전달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2. 모든 의사가 이해심이 많고 온당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핵심(예를 들어 특정 가족에게 폭력을 당해온 것, 섹슈얼리티, 종교가 있는지 여부, 출신 지역, 학력 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라. 그런 의사와도 의사-환자와의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과 비용이 낭비되는 기분이 든다면 피하라.
3. 의사의 말에 일희일비하지 말라.
4. 의사의 언행에서 당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수치를 주는 기색이 느껴진다면 그 병원에다시 가지 않아도 괜찮다. 이것은 약물 치료를 - P163

위한 상담이므로.
5. 의사는 타격팀이 아니다. 약물이 타격팀이다. 의사의 말들에 나를 돌아보기보다 바뀐 약물이 주는 느낌을 조목조목 기록하는 편이 낫다.
6. 약물은 내 느낌으로 복용하는 것이 아니라, 통계로 따져 처방한다. 우울한 기분이 든다고 재깍 항우울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의사와의 충분한 상담을 통해 받는다. 고로 질문하지 않는 의사는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7. 어떤 특정 약을 타고 싶어 그 약을 타려고 연기하는 건 위험하고 병적이므로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하라.
8. 의사도 마찬가지로 당신이 너무 많은 정보를 제공하면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것이 어렵다. 이를테면 상담 때 내 정보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것보다 중요도나 항목순으로, 한 번에 하나씩 나열하자(가정/친구/학교/직장 등).
2. 할 말을 메모하되, 리스트 형식으로 - P164

두괄식으로 작성한다.
10. 하지 못한 말이 상담 뒤에 기억나면 카운터에 양해를 구하고 말한다. 특히 미처 진료실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 중 약 부작용이 있다면 꼭 말한다. 처방된 약물에 대해 의문이 있다면 이것도 꼭 말한다.
11. 진료실에 들어가서 약물에 관한 것을 우선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여, 약물 조정이 진료의 핵심이 되도록 습관을 들이자.
12. 상담의 많은 시간을 약에 관련하여 말한다. 잘 듣는 약, 보통, 안 듣는 약 하나하나 체크해 자신에게 맞는 약물군을 찾고 약물 지도를 함께 그려나간다.
13. 그다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한 내용을 주로 이야기한다. 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언행과 상태를 관찰할 수 있다. - P165

우울증 환자는 냉혹한 현실 인식의 달인이다. 가장 엄격한 기준을 먼저 자신에게 적용한다. 우울증이 심하거나 우울 삽화일 때에는 행복이나 기쁨이 생의 본질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좋은 일이 일어나 미소지어도 금세 무감하고 공허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길고 극심한 우울증을 겪어온 환자들은 최상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준점이 되어 마음을 차지하고 정신을 압도하는것은 ‘최악‘이다. 때문에 최악에서 살짝 벗어나거나 최악을 모면했을 때 만족을 느낀다. 이 중증 환자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자해나 사고 등)에 너무 익숙해져서 고통을 느끼는 상태를 ‘편안한‘ 것으로 느끼기도 한다. 어떤 우울증 환자는 삶에서 불행, 갈등이나 파국이 발생해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우울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무기력하고 침울한 것이 디폴트가 되고, 예측을 벗어나는 극적인 상황에 놓이면 그제야 분노와 증오를 겪으며, ‘뭔가 느껴진다=좋은 일이다’라는 순환을 학습하는 것이다. 결국 우울증 환자들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에서, 기분의 상승보다 기분의 바닥에서 사금을 찾는 자들이 되고 만다. 신체적으로도 그들은 구부정하다. 바닥을 보며 걸으며, 구석에 인접할수록 편안함을느낀다. - P170

우울증은 단절의 병이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할수록 지식과 정보가 누적되지만, 우울증 상태에서는 그것이 어렵다. 그들이 뭔가 해도 그것이 점을 찍듯 모여서 패턴을, 그 사람의 인생의 그림을 그려주지 못하고 점과 점 사이의 거리는 별처럼 멀고 분산된다. - P171

소위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상태에 돌입하면 아주 작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작은 정보들에도 긴 생각의 꼬리표가 생겨난다. 이것의 문제는 이미 병에 노출되어 사고의 왜곡이 심한 이들에게 왜곡된 사고가 활보할 수 있는 운동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자기에게 쏟아지는 정보에 둔감과 민감을 동시에 발휘한다. 동시에 우울증은 사고를 편집증적으로 빼곡하게 구성시킨다. 우울증 환자는 조용하고 정동이 둔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많은 생각과 의식으로 가득 차 있으며 때때로 이런 생각은 끝나지않고 며칠이고 계속되곤 한다. 자살사고라든지, 이 세상의 불합리라든지, 자신이 살아오며 받은 모든 상처들을 되새긴다든지 하는 부정적인 테마가 가득 차 사슬처럼 이어진다. 이런 연속된 사고들을 끊을 강경한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 꼬리를 잇는 생각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일단 주변 환경에 집중해보자. 눈에 보이는 사물의 개수를 세어보자. 색상은 어떻게 보이는가?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관심을 돌리고 주의를 환기하는 것은 비단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우울증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 적용할 수도 있고, 이처럼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나아가 자신의 공간을 더 안녕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당신은 자신의 병을 증명받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내릴 수도 있다. 혹은 정신병에 애정과 사랑을 느끼거나 헌신하기도 한다. 환자 - P172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병적인 우울이야말로 자신의 토대이자 전부 혹은 특기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병증의 일환이다. 우울증은 언제나 같은 모습, 같은 강도로 다가오리라는 법이 없다. 뿌리를 딛고 내릴 안정적인 형태의 토양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병에 초점을 맞춰 병의 존재에 일희일비하며 애정이든 증오든 필요 이상의 정념을 쏟는 것 자체로 병들은 기뻐 날뛰며 자란다. 그들이 기뻐할 일을 최대한 줄여보도록 하자.
만성적인 우울 상태에 놓이거나 우울증이 계속 재발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악화되기 쉽다. 악화가 누적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택지일 수 있다. 이전의 삽화 기간에 할 수 있었던 일을 다음 삽화에는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로 많은 일을 한 번에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되 아주 느리게 넓혀가야 한다. 그 기간에 언어 능력이 떨어지고 문해력이 낮아지는 것은 당신을 위협할지는 몰라도 당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런 ‘능력 저하‘가 자신을 괴롭히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면, 해당 능력의 영역에서 재활 프로그램을 시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능력‘의 회복이 아니라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회로의 회복이다. 또 능력 저하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 또한 한계가 있다.
는 것을 알아야 한다. - P173

우울은 생활반경과 할 수 있는 일들을 축소한다. 처음에는 직장또는 학교에 나가기 어렵게, 그러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렵게, 집 앞 편의점에 가기도 어렵게, 침대를 나서 화장실을 가기도 어렵게 줄여나가고 당신이 돌아다닐 수 있는 지도의 영역은 점점 어두워지고 작아질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당신에게는 퇴행성 관절염, 관절 이상, 대사증후군 등 각종 신체 질환이 발발하기 쉽다. 신체 질환이 발병하면 당신의 정신병의 지평이 순식간에 달라진다. 병은 당신의 모든 약해진 부분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 P174

우울증 환자에게도 자신의 삶을 챙기는 것 이상의 책무가 존재한다. 우울증 환자도 직장에 나가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돌봐야 - P179

할 동물 식구가 있을 수도 있고, 빚이 있을 수도 있다.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목표는 ‘남들처럼‘ 움직이고 비장애인의 습속을 모방함으로써 견뎌내는 것이 아니다. 이 실험 과정은 자신만 알 것이고, 자기만이 이 재활의 고충을 알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는 몇 배로 노력하는 데에 어려움과 억울함을 느끼기 쉽다. 남들이 쉬는 걸 당신은 쉬어줘야 할 것이며, 남들이 먹는 걸 당신은 먹어줘야 할 것이고 남들이 잠드는 걸 당신은 잠들려고 노력을 해야 이룰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비교하면 박탈감만 심해질 뿐이다. 링에 올라 싸우는 둘은 당신과 당신의 병이지 남들이 아니다. 타인과 겨루는 것은 기나긴 재활 실험 후의 일이다. 그러나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어떤 시점에는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우수해질 수도 있다. 당신의 지금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변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 P180

양극성장애인은 한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두 병증을 모두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조증에서는 병이 자신 - P183

을 장기 말 취급하면서 이래라저래라 요구하고 그에 대응해야 한다. 반면 우울증 상태에서는 도리어 환자가 직접 일궈야 하는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우울증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내리는 비와 같기에, 가랑비에 옷이 젖듯 점점 비가 내려 조증처럼 병증 자체에서 에너지를얻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 간수해내지 못하는 데다가 병든 자신도 돌봐야 하므로 그렇다.
조증은 얼마나 빨리 예측하는지가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맨 처음의 조증은 돌발하나 그다음은 이전 조증이 찾아왔던 시기 또는 계절에, 트라우마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스트레스가 높거나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때 등장한다. 흔히 간과하는 것이, 좋은 일, 축하할 만한 일이라도 양극성장애 환자에게는 절댓값이 큰 감정적 사건, 이른바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기나긴 우울증을 버텨낸 뒤 찾아오는 선물 같은 조증이다. 조증은 마치 위기에 등장하는 수퍼히어로처럼 몸과 마음이 피폐한 양극성장애인에게 앞날을 헤쳐나갈 기운과 좌표를 보여준다. 그러니 조증을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조증은 환자의 사고, 감각과 같은 내적 요인보다는 외적 요인에 의해 더욱 강력해진다. 동료의 위기나 죽음 등에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만화 주인공처럼. 물론 현실을 살면서 그런 만화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조증이 치밀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상황은 허를 찔린 듯 닥쳐오는 경우가 많다. 아주 사소한 일, 이를테면 - P184

카페 직원이 "다른 직원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라며 자신에게만 무료 리필 커피를 줬다든지, 아니면 택시를 탔는데 바닥에 1만 원권이 떨어져 있다든지, 다른 사람에게 감사, 호의, 친절, 칭찬을 받았다든지 한 후 난데없이 조증이 증폭되는 케이스를 몇 보았다. 불특정다수 중 예외적으로 선택을 받았고 이득을 얻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외부 요인‘의 상황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특별한‘, ‘선택받은‘, ‘뛰어난‘ 나의 유일성을 자극하는 상황이 많은 경우 조증이 심화되도록 작용할 수 있다. 개인을 겨냥한 언행이 아니더라도 정신질환 삽화가 발발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겐 충분히 커다란 자극으로 흡수되어 병이 증폭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조증의 발발과 증폭을 감지한다면, 바로 병원에 가서 변화된 상태를 말하고 다른 처방을 받아야 한다. 조증은 시간이 아주 중요하고, 특히 초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현재 기분조절제나 항조증제를 복용하고 있어도 의사와 상의해서 약물을 조절해야 한다. 많은 양극성장애인들이 조증 초기에 오는 ‘예외적으로 선택받은 나‘라는 느낌, ‘유능해진 나‘,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아 치료를 지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초기 진화에 실패한다면 보통 1주(DSM-5 기준)에 달하는 조증 삽화가 지속되는데, 조증이 기거할수록 그것을 앓는 사람은 빠르게 망가져간다. 조증자의 상승하는 기분은 반드시 동그랗고 예쁜 헬륨 풍선 모양이라는 법이 없다. 언제나 해피 벌룬이 올 거라고 기대 - P185

하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다. 때때로 찌그러지거나 접힌, 구겨져 있는 왜곡된 상태도 많다. 주의가 산만해져 집중을 하지 못하고, 성마르고 강팍해져 신경질을 내고, 수면과 식사가 불규칙해 엉망인 몸, 그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여기저기 돌진해 일어나는 수많은 충돌, 게다가 신체화 증상과 정신증이 계속되는 1주(혹은 그 이상). 조증은 당신을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기 위해 온 기회가 아니다.
양극성장애의 특징은 한쪽이 아닌 양쪽에서 일어나는 결함이라 할 수 있다. 양쪽에서 한 입씩 베어 무는 사과가 된 꼴이다. 양극성장애인 자신이 갖는 고유의 회복탄력성보다 언제나 그것을 상회하는 병의 침범이 존재한다. 이 땅따먹기는 초발한 이후 지지부진하게 힘 싸움을 계속하다가 결국 병이 진전되면 역전할 수 없는 오셀로처럼 진행된다.
조증과 우울증을 대립 구도로 설정하는 것은 양극성장애인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다.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처럼, 우울증일 때 마땅히 돌보고 보살펴야 할 부분은 삭제하고, 조증일 때 범하는 실수와 실패는 무시한다. 이것은 그들의 전장인 당신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 이외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양극성장애인에게 중요한 것은 성과를 내거나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정상적인‘ 수준의 생활을 해나가는 것도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조증은 ‘이용‘하고, 우울증은 ‘인내‘하고 싶을 터이지만, 중요한 건 성질이 다른 두 병을 앓는 사람은 자신 한 명으로, 양쪽 삽화에 다르게 반응할수록 자아만 - P186

분열한다는 점이다. 삽화가 올 때마다 우왕좌왕한다면 매번 삽화의 막강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양극성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질이 다른 두 가지의 손 쓸 수 없는 병이 신들의 전쟁을 일으켜도 부서지지 않는 강력한 자아를 갖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력한 자아라 함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신이 내다보는 미래를 포괄하는 일관적이고 연속적인 자아를 말하며, 생애를 거쳐 지속되는 성질의 것들을 말한다. 이들의 존재는 인생을 토막토막 내 그 시간을 증발시키는 삽화와 겨뤄야 할 때 유용하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으로 가질 수 있거나 이뤄지지는 않는다. 물론 자기 자신이 제 인생을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 서사 내의 연결고리들을 긴밀하고 단단하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각의 범주에서 하는 작업들은 생각에 스미어 왜곡을 일으키는 정신병에 취약한 점이 있다. 양극성장애인들은 반드시 생각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 물리적인 토대를 두고 있어야 한다. 설혹 생각이 병증에 지배되더라도 물리적인 것들까지 병이 가로챌 수는 없다.
두 가지 병증이 오가기 때문에 양극성장애인에게는 그에 지지않는 단단한 토대가 필요하다. 파도 한 번에 무너지는 모래성은 100개, 1000개를 쌓아봤자 노동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일관성을 담보해내야 한다.
만약 양극성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매번 더 높은 곳을 향해 지금보다 한 발 나아가는 서사로 구상하고 있다면, 그는 계단을 만났을 - P187

때 기꺼이 자신을 한 발짝 더 딛게 해줄 모든 에너지를 끌어올 것이며, 조증이 오고, 조증의 힘을 빌리고, 추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나아가고 발전한다는 이미지(상승하는 그래프)는 적절하지 못하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예를 들면 자기 집 뒤에 작은 뒷산이 있고 한 시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상상하는 편이 병에 이롭다. 일정한 시간, 적은 힘으로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수평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조증이든 우울증이든, 조증 때 가뿐히 해내든 우울증 때에 몇 시간을 걸려 힘겹게 달성하는 한 바퀴를 돈다는 완결성이 병을 진정시키고, 또 우울 상태일 때에는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다행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한 바퀴들이 누적되어 양극성장애인의 안정을 담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토대는 병과 별개로 존재한다. - P188

조증일수록 미래를 내다보려 하지 말고 하루하루 완결성을 충족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한 장 한 장 완결을 내자.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밤에 자기 위해 눕기까지를 한 페이지로 완성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다음에 그것의 연속성 아래에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지, A플랜, B플랜, 미래로 향하는 열차표를 잔뜩 끊어놓고 열차를 놓쳤다고 자기 인생이 망한 것처럼 느끼는(실제로 조증 시 좌절은 자신의 전부를 잃는 듯한 느낌이다.) 정동을 가지고 좌절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 - P191

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 P192

나는 조증은 결단코 사람이 견딜 수 있는 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때로는 생물 같고, 어떨 때는 고양이 같으며 어떨 때는 암흑이나 공기처럼 나를 감싸기도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정신병과 나만 덩그러니 남을 때도 있다. 그러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조증은 원래부터 너라는 존재는 가치가 없었다는 듯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리곤 한다. 그러면 나는 뭘 하느냐, 긴긴 우울증을 앓으면서 조증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얼마나 가소로운지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현실 세계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현실에 남기로 마음을 정한 뒤에는 조증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도 조증은 온다. 정해진 계절에, 예기치 않게, 여전히 돌발, 급성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우며 힘센 조증도 있지만 지리멸렬한 좀스러운 조증도 있고, 아무 역할도 못하는 것도 있다. 다만 이제는 어떤 열차도 타지 않는다. 적어도 내 어떤 부분은 언제까지고 기꺼이 열차에 올라타 끝까지 가려 하겠지만, 다른 부분은 언제고 내리는 손님 하나 없는 그 역 그 자판기 옆에 식은 종이컵을 들고 앉아 있을 것이다. - P195

정신병과 시간은 밀접한 관계다. 생활 공간, 조건과 환경이 정신병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시간은 정신병과 병자를 지배하고, 병자는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정신병은 단절의 병이다. 특히 삽화가 뚜렷한 이들, 중증 우울증의 환자들에게 정신병은 매일매일 잎이 나고 꽃을 피우고 하루 만에 지는 식물처럼 기이한 시간 감각과 더불어 절대적인 단절을 겪게 한다. 병이 없는 사람들은 자가 호흡을 하듯 아주 자연스럽게 시간의 시계와 발맞춰 가지만, 병자들에게는 그 속도가 몹시 느리거나 둔중하고 어떤 경우에는 굉장히 빨라 궤적을 쫓을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간 감각과 다른 일들이 왕왕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경합할 때 병자들은 그래도 아직 아침에 일어나려 하고, 씻으려 하고, 외출하고자 하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자 노력하지만 불행하게도 대개의 경우 병자들이 패배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패인은 사실 단순하다. 첫째로는 자신을 먹이고 씻기고 외출을나가게 하는 이른바 ‘일상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병자의 상황을 극적으로 달라지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이런 장벽에 부딪혔을 때 병자는 쉽게 단념하기 때문이다. 특히 언제나 내심 자신 - P199

을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혁신적‘으로 ‘단번에‘ 바꿀 수 있는 존재를 갈망하는 병자들은 더욱 상심에 빠진다. 그래서 정신병자들은 이사를 하더라도, 룸메이트를 들이더라도, 고양이를 기르더라도, 매일 카페에 가더라도, 학교를가더라도, 출근을 하더라도, 가사를 하더라도 자신의 기분이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만다. 또 이미 더는 생각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마음을 먹으면, 사고방식을 바꾸면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이것은 대단한 함정으로, 한번 ‘우울은 사고방식의 문제‘라는 늪에 빠져버리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홀로 집에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공상하고 있는 이들은 반드시 자신의 상태를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 내 주변의 정신질환자들 중 지나치게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 하고, 행동하기 이전에 거듭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통제력을 아득히 벗어나는 사고(accident)가 발생하자 10년 전 발병 이래로 가장 상태가 나빠지고 말았다. 우리는 분명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예방해야 하지만 셋 모두를 한번에 할 수 없을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보통은 현재에 충실한 상태로 출발하는 편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 P200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기 전에 핸드폰 등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다들 경험했을 것이다.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는 순간 시간은 새벽이 되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수면제의 약 기운도 이겨낸 채 서핑의 서핑과 SNS의 SNS를 거쳐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까지 갖가지 탐방을 하다가 어느덧 죽은 듯이 잠들어 오후 느지막이 깨어나는 쓰레기 같은 기분으로 망했네, 중얼거리는그 경험. - P203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는 이들을 위해 덧붙인다. 취미는 어떤 장면이고, 그 장면을 향해 뛰어드는 일이다. 그곳은 당신이 고민한다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아니고, 그토록 진절머리나는 시간을 이번에는 제 손으로 쌓아 만드는 성이다. 당신이 어떤 취미생활에 작은 만족감이라도 느꼈을 때, 그때 시간은 패배한다. 그러니 당신을 가로막는 시간의 행진을 토막 내버려라. 스스로 시간을 쥐고 운용하라. - P211

그가 평생 느껴왔던 결핍과 결여는 돈이 생기자 전부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는 전자책 100만 원어치, 전자책을 읽기 위한 이북리더기, 이북리더기를 감싸는 보호 케이스, 그것을 넣고 다닐 검은 가죽 가방, 이런 식으로 살 것들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그것은 그가 겪은 가난이 커다란 하나의 구덩이가 아니라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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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재밌게 읽으셨나 모르겠다. 이런 삶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다들 듣도 보도 못하셨을 건데, 입맛에 맞는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으셨나 모르겠다. 솔직히 이런 얘기, 사실 다 거짓말 아니겠는가. 나한테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던 얘기면 그게 거짓말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래서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이 책에 쓰여 있는 글은 다 거짓말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거짓말이라는 게 진짜 거짓말이다.
그래도 나는 세상에 기꺼이 거짓이 되어주려 한다. 진짜라고 말하는 것보다 네네 거짓 맞습니다, 라고 하는 게 속이 편 - P358

하다. 거짓이 되면 좋은 면도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잘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대충 살아도 괜찮다. 매번 증명해야 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에 질리더라도, 그것대로 좀 재수없게 굴어도 괜찮은 면도 있다. 물론 다 내가 살려고 하는 생각이다.

당신의 삶은 나와 얼마나 같고 다를 것인가. 어찌됐든 부디 평범하고 정상적인 일상에 감사하며 범사에 범사하길 바란다. 근데 사실은 안 바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느라 바쁘다. 당신도 바쁠 것 같다. 그러니까 가끔만 만나자. 다음에 또 만나자.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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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이반지하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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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is an orphan. A survivor."
그애는 고아야. 생존자라는 말이지.

나는 저 대사가 참 좋았다. 어린 여자 체스 상대에 대해 당대 최고의 마스터가 긴장해야 하는데, 그 이유가 ‘생존자‘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훅 흔들렸다.

피해자에서 생존자가 되는 것은 무척 존엄하게 느껴지지만, 이 사회가 실제로 생존했다고 해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보상을 주지는 않는지라, 그 생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피해자를 생존자라는 단어로 대치하는 것이 도리어 ‘정말 생존했는가‘를 되묻게만 하는 것 같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 말을 <퀸스 갬빗>에서 저런 맥락으로 들으니, ‘생존자’라는 말이 가슴 중간에 팍 꽂혀, 가슴을 펴고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또 생존자라는 말이 상대방을 이토록 위협할 수 있는 요소라는 것에 아주 천진한 쾌감을 느꼈다. 근원조차 알 수 없는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 그 자체로 살아남았다, 그 사람은 생존자야―라는 - P12

쓰임이 나에게 새삼 낯선 울림을 주었다.
세상아, 너는 두려워해야 할 거야. 나는 생존자거든―그런 태도.

그럼에도 〈퀸스 갬빗〉을 보는 내내 나는 주인공이 강간당할까봐 걱정했다. 미디어 시청자로 살아온 경험적 통계로 미루어보아 몇 번의 강간 모먼트가 있었기 때문에, 악― 이제 나온다 하며 그만 볼 준비를 하다가 말다 했다. 여러 명의 남성 체스 전문가 동료들이 주인공을 ‘돕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로 얘를 ‘실력자로 성장시켜주려는 의도‘였다는 게 놀라웠다. 재능 있는 여자를 진심으로 도우려고 하는, 재능 있는 우리 남성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화면에서 그것이 구현되는 장면을 본다는 건 딱 구태의연한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새삼 잊고 있었던 오랜 장롱 속 페미니즘의 먼지를 털며, 이렇게 강간당하지 않는 잘난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픽션/논픽션을 계속 보는 삶을, 도무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주인공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계속 실험해나가는 걸 보는 것도 좋았다. 성욕을 느끼고 표현하고 거절하고 이용하고 등등. 강간당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보통 이러면 - P13

사회로부터 성性적으로 크게 혼나곤 하는데, 이 시리즈에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니까 잘난 여자를 감히 혼내지 말자. 제발 좀 그르지 말자.
버릇이 나쁘다 싶어도 제발 좀 내버려두자. 구린 구석 없이 정정당당하게 도와도 주자.
이토록 심플한 메시지를 전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빨리 깨닫도록 하자.
생존자는 살아남은 자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She is an orphan. A survivor.
Losing is not an option for her."
그애는 생존자야. 애초에 질 생각이 없어.

아니, 러시아 체스마스터 보르고프도 무서워한다고, 이 양반들아. - P15

생존자 조심해라. - P17

검열을 당한다는 것은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대단히 생산적이거나 발전적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속의 장기와 세포 하나하나까지를 양말 까뒤집듯이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검열은 잔인하다. 검열하는 쪽은 간편하되 당하는 쪽에서는 정말로 내가 당당한 피해자인지를, 내 쪽에 정말로 한 점의 원인 제공도 없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잔인함의 핵심이다. 검열은 저쪽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그걸 지속하는 것은 이쪽, 나 자신이 된다는 것 말이다. - P47

잘라서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평생 살려고 하면 너무 힘들잖아요. 일 년만 살아보자, 한 달만 더 살아보자, 일주일만 더 살아보자. 하루만, 한 시간만, 십 분만, 일 분만…… 그렇게 가는 겁니다.
_<월간 이반지하> 4호 - P60

언제부터였을까. 미디어에 등장한 누군가를 보며 ‘저 사람, 저 정도 상황이면 죽고 싶겠다‘라고 생각하면, 별안간 그 사람이 정말로 죽은 채 떠올랐다. ‘죽을 만큼 괴롭겠다‘ 혹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면, 며칠 혹은 몇 달 후, 그는 정말로 죽음이 되어버리곤 했다. ‘어, 맞아‘라고 답하듯 곧 맥없이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죽을 만한 일에 실제로 죽어버리는 것‘을 이렇게 계속 목격해도 되는 걸까. 죽을 법한 일 다음에 죽음이 이어지는 것은, 왜 이토록 그럴 법하게 여겨지지 않는 걸까. 왜 이토록 그 인과가 부당하다 느껴지는 것일까. 죽을 법한 일들은 왜 계속 생기며, 왜 끝끝내 죽음까지 봐야 속이 시원한 듯 구는 것 - P70

퀴어 친구들은 일단 ‘살기‘부터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살았으면, 행복하게 살았으면, 이런 생각보다
일단 우리 생명 유지부터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1호 - P74

남들은 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못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1인분의 삶을 내가 온전하게 독립적으로 당당하게 살아낸다. 물론 중요한 이슈죠. 독립해야 한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잘살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 1인분을 다할 수 있었으면, 사회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때는 0.8인분, 또다른 상황에서는 내 깜냥으로 1.5인분을 할 때도 있는 거예요. 간병하거나 누군가를 돌볼 때는 자기 몫의 1인분을 더 할 때도 있고. 그렇게 얽혀서 사는 것이지, 지금 당장 내가 1인분인가 아닌가 꼭 그렇게 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순간순간 관계에 따라서 내 역할도 계속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요새 ‘당당‘ ‘독립‘ 이런 말들이 신자유주의랑 만나서 굉장히 자본의 기준에서만 해석되는 것 같거든요. 미디어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그 틀에만 비춰서 나를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11호> - P123

아직도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가 살아온 얘기가 궁금할 테니 그것을 쓰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읽혀야 할까. 살아온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근데 또 그 ‘어쩌라고‘가 예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승낙한다.
예전부터 제2차세계대전 이야기에 끌렸다. 책이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그때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내가 궁금한 것은 크고 작은 전투나 정치적 움직임이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낸, 여러 층위의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선정성에 대한 뒤틀린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나는 꼭 한 가지가 궁금했다. 도대체 왜 그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지. 그러니까 경험한 것만으로 충분히 고통이었을 그 일을 왜 또 꺼내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이 정말로 의미를 갖는지, 그들이 그 이야기를 마쳤을 때,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 떠나버린 시간을 이야기한 자 - P128

들은 또 버텨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인간이 버틸 수나 있는 것인지. - P129

이 말했다. 왜 자꾸 그 기억을 그리는 줄 아나요? 왜냐고 묻자 그는, 다룰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맞는 얘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종이 위에 기억을 잡아두려는 시도, 그 맹랑한 시도 자체가 마치 그 기억을 종이에 국한시키려는 행위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면 마치 그 기억이 그 종이만해지기라도 할 듯한, 그런 착각. 하지만 맹랑해서 그 나름대로 위대할 착각. 그런 착각 없이는 삶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어서.
확실히 그 말에 대해 생각하면서부터 내가 그날 밤을 그려대는 것에 대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다. 그리고 이후에 곱씹는 여러 행위들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씹다보면 씹힐 것 같아서, 오독오독 씹다보면 절단이라도 될 것 같아서, 나눠 삼킬 수가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런 착각을 하려고, 그렇게 그것을 보내버리고 새 착각을 맞이하려고, 착각 없이 환상 없이 살기에는 던져진 삶이 너무 가혹하다.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의 트라우마를 설득하는 글을 쓰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끌러놓자마자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든 것은 나의 망상이라고, 다 내가 지어낸 - P133

이야기라고 말할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것이 나의 경험과 감정에 대한 것이라면, 그런 것은 질리도록 겪어왔다. 말을 꺼내면, 그 말을 증명해야 할 것 같다. 증명하지 못하면 없었던 일이 되곤 했다. 나는 아마 그래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나보다. 최근 들어 사람들이 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냐고 많이들 물어왔는데, 나는 별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결국 이래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 P134

집에서 과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과거에 갇힐까봐 두려워진다. 그것이 아주 조금, 혹은 반 정도만 갇히는 것이라도. 그래서 자꾸 엄두가 안 났고, 엄두를 내지도 않았다. 쓰다가 잠깐 새로운 공기를 쐬어야 할 때, 그 순간 아무도 만날 수 없다면 어떡하나. 누구도 나를 과거에서 끌어올려주지 않고 말 그대로 각자의 상황에 격리되어 있다면, 나는 글에서 - P146

못 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하지만, 나올 것이다. 나오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건드리면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닐까.
위장에 껍질째 들어가 있는 성게를 꺼낸다고 생각해보자. 성게를 꺼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게는 꺼내지면서 끝끝내 위장부터 입안까지를 모조리 훑고 헐어내면서 나올 것이다. 그래, 꺼냈으니 이제 성게가 없다, 라고 하기에는 이미 내 속은 성게의 흔적이 완연하다못해 피를 펄펄 흘릴 것이다. 그 피는 왠지 철철보다는 펄펄이다. 끓어나오는 피일 것이고, 또 그 피는 피대로 내부 장기를 덮어 계속해서 안쪽 면을 태울 것이다.
애초에 성게가 껍질째 위장에 들어가는 일 같은 것이 없었다면 제일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나버린다. 원하고 원하지 않았고 따위는 처음에나 원망조로 따져보는 것이지, 나중이 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들어가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성게를 꺼냈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온몸은 성게에게 훑어진 후니까, 그 이전의 상황 같은 것은 다신 없는 것이다.
당신은 이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 P147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정말 있었던 일이라는 걸 스스로 전혀 의심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특히 끔찍한 기억일수록 나와 주변은 그것을 잊고자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마치 살 만한 삶들인 것처럼 착각할 - P159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잊힌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살고 견디고자 하는 가냘픈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내가 보라색 사람이었다는 것을 깜빡하거나, 정말로 그런 일이 나에게 있었나 생각할 때가 있다. 그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망각이기도 하고, 그 기억을 꿈처럼 여기려는, 삶에서 그런 일은 정말 드문 것이라고 믿어보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 P160

보라색은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 피부 표면에 머물렀다. 그날의 그 시간은 나의 일상과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어서, 완전히 잊혔다가도 샤워를 하거나 옷을 갈아입으려고 할 때면 나는 ‘아, 맞다‘ 했다. 엉덩이나 옆구리에서 새로운 보라 - P162

색을 갑자기 발견하기도 했다. 기억하는 것과 잊는 것, 그 어떤 것도 그 일과 완전히 걸맞지는 않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 사이에서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듯이. - P163

처음 살아보는 반지하방은 처음에는 처음이어서 딱히 대단한 불만이 생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웬만한 것은 다 그러려니 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어쨌든 정신적으로 학교나 집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대단찮게 느껴졌다.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곳이 작업실이 아닌 본격 생활공간이 되자, 괴로움이 갈수록 커져갔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화장실 타일과 벽지였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정말로 화장실 타일과 벽지였다. 왜 싫었나, 왜 견디지 못했는가 묻는다면, 사실 그것을 정확하게 어떤 이유다, 라고 설명하긴 힘들다. 당시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정확히 어떤 무늬와 색감, 텍스처가 미칠 것 같았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화장실 타일과 벽지가 나를 매일 절망하게 했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벽지와 타일에 둘러싸이게 된 이삶이, 집을 나온 것이, 정확히 나의 선택이었기에 나는 탓할 - P166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물론 나를 나오게 만든 상황에 대한 분노와 원망도 어마어마했지만, 결국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나와 가족의 조합이었다. 가족만, 혹은 나만 존재하면 됐을 텐데 왜 이렇게 묶여 나와서 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을까. 그런 조합, 소위 말하는 팔자, 그런 것들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화장실 타일과 벽지를 보면서 울곤 했다. 그리고 작게 딸려 있는 베란다에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차서 큰 캔버스 그림들이 젖을 때마다 몸에 차곡차곡 절망이 쌓이는 것을 느꼈다. 캔버스를 뽁뽁이로 싸두긴 했지만, 결국 이것이 그림에 곰팡이를 만들 거라는 생각에 비가 올 때마다 초조하고 화가 났다. 나는 그때 집을 관리한다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고, 미술 작가로서 작품을 이고 지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직 잘 몰랐다. 그 당시 알고 지내던 한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림에 핀 곰팡이를 보고 나서 정말 그것만은 막고 싶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려고 하다가 멈칫하게 되는 때가 있다. 왜냐면 그 그림들은 내 공간에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유통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려지지 않 - P167

은 이 그림이 유통되기 전까지 이고 지고 살 자신이 있는가, 그런 것을 스스로 되묻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 대단한 욕구가 각종 이성적 셈들을 이겨먹었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렸고, 악기를 샀고, 이사할 때마다 추가비용을 내야 하는, 이삿짐 아저씨들과 집주인에게 핀잔 듣는 ‘여자‘가 되었다. 삶은 계속 그림을 버리는 게 이치에 맞다고 귀에 대고 끊임없이 얘기해주긴 했다.
그다음에 살 집을 보러 다닐 때는, 이사를 나가 가구가 없는 집을 보면 그냥 다 넓고 깔끔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집 보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커튼은 너무 비싸서 화방에서 전지를 사다가 창문에 더덕더덕 붙였다. 덕분에 매일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웠다. 무엇에다 돈을 써야 삶이 만들어지는지, 삶의 질이라는 게 올라가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도 살아 있는 것임을 몰랐다. 집도 사람처럼 계속 관리해주고 부족한 부분은 집주인에게 요구해서든 내가 직접 수리해서든 써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걸 전혀 몰라서 마냥 견디거나 비참해했다. 으레 외부먼지가 쉴새없이 들어오고 으레 냄새가 나고 으레 빗물이 들어오고 으레 몸이 무거워지는 그런 상태.
그래도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정적이 너무 행복해서 - P168

가끔 현관에 주저앉아 한참 그 정적을 놓칠세라 음미하곤 했다. 고함과 비명이 없는 집은 정말로 큰 의미가 있었다. 집에 뭐가 있느냐보다 뭐가 없는지가 훨씬 중요했던 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으레 여자처럼 보이는 인간의 삶이 다 그렇듯, 밤마다 누군가가 집에 침입해서 나를 내려다보는 상상을 하고, 자주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런 두려움은 비싼 비용을 치르게 했다. 나의 건강이 되었든 집의 위치가 되었든, 문과 창문의 잠금장치가 되었든, 어쨌든 끊임없이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별별 희한한 구조의 집이 많이 있었다. 변기 위에서 샤워를 하는 집은 처음 봤을 때도 충격이 컸지만, 살아보니 삶의 질을 말도 못하게 망가뜨리는 구조였다. 샤워를 하기도 변기를 쓰기도, 또 당연히 그 공간을 청소하기에도 불편한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집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흔했다. 이런 집을 보여줄 때마다 부동산 아재들은 아 이거 그렇게 안 불편하다고, 괜찮다고들 주접을 떨곤 했다. 하긴 내가 갖고 있는 예산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안 불편해해야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고, 내가 이 돈을 갖고 와서는 매일 밤 샤워를 편히 하려고 했다니, 그래요, 미 - P169

안하게 됐습니다.

좋은 집은 콘센트가 필요한 곳에 딱딱 있는 집이었다. 컴퓨터 주변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많은 멀티탭이 필요하지 않은ㅊ집. 하지만 집을 쪼개고 쪼개서 월세방을 만든 집들은 대부분 뜬금없는 곳에 콘센트가 있어, 항상 멀티탭을 여기저기 대주어야 했다. 게다가 전자레인지는 멀티탭에 꽂으면 무조건 전기가 나가버리곤 해서, 온전한 콘센트 하나를 할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멀티탭은 언제나 몇 번의 곁가지를 치며 구석구석 배치되었다. 놀랍게도 멀티탭들은 전기도 공급하지만 먼지도 틈틈히 저장하는 매체였다. 하얀 선들은 또 얼마나 쉽게 꾀죄죄해지는지, 정말 그런 식으로 더러워져야만 하는 건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꽂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져만 갔고, 집안 곳곳에 뻗친 선들은 마치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결계처럼 집 전체를, 내 삶을 둘러싸 딱 여기까지다, 라고 외치는 듯했다. - P170

물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이 그렇게 문제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필요라는 건 상황 따라 적당히 창조해내거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으려면 그 비용을 정직하게 감당해야 할 뿐이다. 부동산이랄지 기억이랄지 뭐 그런 거 말이다. - P174

부모의 집을 나오며, 나는 다시는 내가 원목협탁에 걸맞은 - P175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불구덩이 같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그 많은 필요와 필수 중에 하필 협탁을 가져가기로 했을까. 집을 떠나면서 협탁을 들고 나오는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반복되는 플라스틱과 MDF 사이에 원목협탁이라도 하나 있어주면 내가 떠나온 것들에 대해, 지금이 아닌 삶에 대해, 딱 원하는 만큼만 감정적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뭔가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것이 존재한 적 없었던 나의 격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또 기능이 아닌 취향이나 추억으로 갖고 있는 가구 하나쯤은 삶이 허락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사치를 무리하게 누려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 P176

안분지족 같은 거 하지 마. 필요 없어.
존나 사치스러운 마음으로 살아.
_<월간 이반지하> 5호 - P177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내가헤테로인지 레즈인지 바이인지모르겠다. 그래서 제발 알고만 싶어, 내가 뭔지. 내가 무성애자인지, 로맨틱 에이섹슈얼인지 알고만 싶어. 그러니까 초조한 거예요. 이걸 내가 결정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누구한테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건 아니잖아요. 이것에 대해 초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다들 쪼금씩 이상한 데가 있고 남들과 다르잖아요. 기본적으로 사회가 말하는비정상성에 우리가 걸려 있어도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_<월간 이반지하> 6호 - P181

근데 이 코로나 상황이 참기 힘든 핵심적인 이유는 뭐냐면, 모든 사람들의 상황 해석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이 다른 데에 있다. 이것은 수년 전 내가 잠시 절에서 생활했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절에서도 속세처럼 각종 단속을 받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듣는 말은 바로 "절에서는 그러면 안 돼" 이다. 이 말은 약간 만능 문장처럼 모든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활용한다는 점이 백미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를 단속하고 무한히 배려하다가 결국 사람들은 돌아버리는데, 지금 코로나 상황도 좀 그렇다. 각자의 ‘안 돼‘가 많은데 그게 또 각각의 맥락으로는 합당해서 어쩌란 말이냐 분통이 터진다! 존나 통제! 근데 통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작금의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 - P235

고, 나는 그저 산다. 살아야 한다.
그 말인즉슨, 억지 휴식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앞에 뭐든 쓰고 ‘~시대‘라고 붙이면 꽤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주제에 시대를 꿰뚫는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시대는 동시대의 누구도 뚫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네가 맞이해야만 하는 뼈아픈 진실임을 인식하도록 하자. 부디 시대를 꿰뚫지 말자.
그러므로 어허 조금씩들 물러나서 억지 휴식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오늘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과 일 사이에 일어나는 휴식이 그냥 휴식이라면, 억지 휴식이란 굳이 뭘 만들어내서 휴식을 취한다 이 말이다. 집이 아닌 장소를 예약해서 낯선 곳에 굳이 굳이 가서 쉰다거나, 일처럼 휴식 스케줄을 미리미리 만들어놓는 일을 (내가)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 짓 없이는, 이 통제와 조심조심적 일상을 영위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한강에 가서 강을 보며 마스크를 벗고 앉아 있는 것 정도로는 더이상 쉬는 것 같지가 않아져버렸다. - P236

세월은 무섭지. 세월 그 새끼가 무섭지. 그런데 저는 나이 얘기는 이젠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옛날에는 이런 얘길 들으면, 어차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기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근데 진짜 별 의미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전염병의 시대를 살다보니깐 내가 젊든 늙든 당장 내일의 일을 알 수가 없잖아요.
내가 내일 죽을 거야? 그럼 나는 지금 존나 늙은 거지.
그런데 50년 후에 죽을 거야? 그럼 나는 존나 쌩쌩하지.
그런데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다? 없다!
만약 젊고 늙은 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일단 내 남은 삶에선 오늘이 제일 젊잖아요? 오늘 해라!
그러니깐 마음 가는 대로들 살어. 왜냐하면 내 맘이 뭔지 아는 것도 너무 힘들기 때문에.
_<월간 이반지하> 8호 - P244

나도 나 자신이 싫지, 그런데 나는 또 나잖아. 나를 견뎌야 되는 거지. 이 삶을 살아야 하잖아. 너는 니로 태어난 이상 너를 견뎌야 돼. 이런 너를 견디는 것이 너의 길이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어요. 관계의 다이내믹 속에서 누구나 당연히 잘못할 수 있죠. 다 다른 존재니까. 근데 나를 견뎌야 합니다. 항상 착한 일만 하지 않는 나 자신도 견뎌야 그것이 정말 ‘으른‘으로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_<월간 이반지하> 9호 - P250

저는 삶의 가변성, 랜덤성에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 같은 것도 우리가 전혀 예상한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저는 노후뿐만 아니라 미래라는 것이 과연 대비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의 유희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영속적인 것은 없고, 저는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코로나 록다운으로 힘든 시기에 자기계발하는 사람들 있거든요. 지금이 기회다! 취업 대비 공부하고…… 적당히 해. 이미 황인종으로 태어났으면 끝이야. 이미 경쟁에서 한참 뒤처졌으니까 우린 그냥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2호 - P261

우리 남성 친구들은 어떤 말을 해도 평생 누군가가 받아주고 들어줬거든요? 그래서 설득력이 약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요. 그냥 아무 말이나 뱉어도 다 들어줬거든요. 그런데 우리 여성 친구들은 어떻습니까. 목숨걸고 말을 해왔죠. 두드리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여성 친구들 언어 능력이 왜 발달하겠어요? 안 들어주니까. 그래서 여성 친구들 이야기가 조금 더 논리정연한 경향이 있죠.
_<월간 이반지하> 5호 - P265

하지만 결국 어떤 시대적 부름도 시대에 가려 결국 잘 안 들리기 마련이라, 어떻게 대충 잘 적당히 알아서 맘대로 나는 가려 하오. - P323

식물에게 마음을 주고 키우다보니, 이들은 식물원에서 데려올 때처럼 완벽하게, 허투루 자란 곳 하나 없이 그렇게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 P328

식물인지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기본 생장 이후부터의 생은, 어중간하고 뭐라 이름 붙이기 애매한, 그 못난 중닭의 연속인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잎과 줄기들을 보면서 무엇이 곁가지인지 고민하다 말다 했다. 전체 화분의 균형감을 생각하면서, 매일 가장 예쁜 단면을 찾아 입체인 화분을 빙글빙글 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깨닫고 만 것은 그냥 이 불완전함 자체가 너무나 완전한 아름다움 그 자체라서, 도저히 이대로 전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분을 약 30도씩 돌려보면서 어떻게 놓아야 가장 시각적 쾌감이 있는가를 혼자 조율하다보면, 다시 말해 화분을 멀리서 봤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조금 돌리고 또 나와서 보고를 무한히 반복하다보면, 결국은 그냥 항복이다! 지금 맞는 각도를 찾았다 싶더라도 내일이면 뭔가 또 미세하게 균형이 깨져 있다. 그래서 또다시 돌리고 돌리다보면, 아!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영원히 맞출 수 없는 것을 맞추려고 하는 무모함과 무용함. - P326

나는 분명 완연한 중닭이었다. 그리고 발레를 했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중닭스러움이 싫었기에 중닭의 아름다움시도 보지 못했다. 중닭은 너무 과하거나 모자라서, 가려지지 않지만 필시 가려야만 하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성의 다른 이름으 - P327

로서의 중닭이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 같은 것은 없으며 영원히 여기저기 삐걱거릴 것이라서, 그래서 이 시간 축에서 다시 오지 않을, 그 모든 나사 빠진 순간을 끌어안음이 중닭이라면, 그런 고유함과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 중닭이라면.
그 중닭의 아름다움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때부터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균형을 향한 몸부림은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연히 어떤 성장과 노화의 아귀가 들어맞아 몸이 클래식하게 써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가능한 완전함을 위해 도전하고 완전히 실패하는 것, 그런데 그 실패가 실은 모두 각각의 클래식임을 받아들이는 부분 말이다.

나는 예술에서 중닭의 아름다움이 진하게 느껴질 때 완전히 매혹된다. 영원히 도달하거나 완성하지 못할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앞에서 못난이를 숨기지 않은 채 대놓고 ‘나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소! 나는 중닭이오!‘ 하고 튀어나온 그 아름다움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다 바로 이런 중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식물 화분 돌리기를 지속하며 매번 가장 최고의 균형을 찾는 데 실패하고, 그 실 - P328

패에 대해 "아, 오늘도 역시"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중닭일 것이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매 순간의 중닭스러움에 대해 약간의 위로와 그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남겨보는 것이다. - P330

아무튼 얘네는 큰다. 내가 어떤 마음이든 간에 그냥 자기들이 태어난 대로, 생겨먹은 대로 제 속도로 그렇게만 자란다. 가끔은 약간 나한테 엿먹어라 하는 느낌으로, 여봐란듯이 큰다는 노낌도 있다. 하지만 우리집 식물들은 자신들의 그런 생장에 어떤 미안함이나 송구함도 내비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게 매력포인트인 것 같다.
처음엔 기가 막히지만, 너무나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다 깨부수면서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삶에서 나는 그냥 ‘보는 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나는 애초에 - P335

그 생에 관여할 자격이 없었으며 그저 보는 것 정도나 겨우 껴들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예고도 빚지지 않은 채, 어떤 껄끄러움도 없이 순정하게 지 할 일만 하고 사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순간들을 필연적으로 놓치게 되어 있다. 겨우 따낸 보는 자의 위치에서도, 실상 모든 순간을 보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환경적 세팅 이외에는 어떤 공유도 약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둘 수 있는 그들이 그곳에다. 식물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거친 성장을 하고 있는 그들의 에너지가 있다. - P336

작가로 사는 것은 평생을 희망고문에 시달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하고 적체되어만 가는 그림들을 목도하는 시간들은, 또 그것이 이사를 할 때마다 정확한 비용으로 환산되어 청구되는 일은, 창작으로 생산된 것들을 계속 이고 갈 것인지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까지가 내 몫임을 끊임없이 인지하게 되는 이 직업은. - P338

저는 기본적으로 ‘창작자라고 해서 미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그런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은 좀 얇고 길게 하면 됩니다. 관계든 직업이든 뭐든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저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창작자로 살다보면, 그게 마치 직업이라기보다는 소명이라든가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될 때가 있는데요. 저는 사실은그런 순간에는 좀더 직업적으로 생각해보면 좋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창작을 그만둔다는 게, 지금여기 사연에서도 너무 비장하게 그러잖아요. "친구가 진지하게 그만둘 생각을 한다. 물론 당연히 하던 걸 그만두면 일반 직장이든 뭐든 걱정도 되고 큰 변화이긴 한데, 제 생각은 그래요. ‘그.럴.수있.다‘라는 거죠.
그림을 그리다 붓을 꺾었다? 아니에요. 그냥 회사 다니다 때려치운 거예요.
기억해야 할 건, 근데 언제든지 또 그걸 다시 할 수 있다는 거. 힘들면 좀 쉴 수도 있고, 딴 일 좀 할 수도 있고, 그게 무슨 순수함을 - P342

더럽힌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사람들은 내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너무 어려서, 또 여러 가지 상황이 안 좋아서 새로운 걸 시작하지 못하겠다. 혹은 하던 걸 못 그만두겠다, 이런 말들을 하죠. 근데 그런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아요. 언제든 갈등도 있고 부딪치는 문제도 있고 그런 거죠. 창작이 힘들면 그냥 쉬면 되는 것 같아요..
일도 창작도 대단히 연속된 커리어를 쌓아야지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한국 사회에서는 고정된 커리어나 소속을 갖고 있는 걸 당연히 여기다보니까, 초등학교 다니면 중학교 가고, 중학교 다니면 고등학교 가고, 이 선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사실 그런 계단은 환상에 가깝잖아요. 사실은 다 지그재그고, 커브고. 그래서 저는 그냥 그만둘 수도 있고 하고 싶을 때 또 하면 되고 그러면 좋겠어요.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면서 상황이 객관화되는 게 있거든요.
죽을 때까지 해야 되는 일은 없어요. 죽을 것 같으면 안 해야 돼요.
한 사람의 창작 과정이나 삶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판단할 순 없어요. 그런데 저는 기본적으로 다 해도 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그게 이 사회가 우리에게 안 주는 메시지인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네 인생은 다 더럽다.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가지고 거기에 깃발 꽂고 이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이것저것 두드려보고. ‘아, 이거 아닌가?‘ 그럼 또 접었다가 딴 거 하고. 좀 - P343

치사하게 살아도 괜찮다 이 말이죠.
저는 존버의 시간도 고통이 담보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존버가 말 그대로 존나 버티는 건데 그 존나가 ‘존나‘ 아니고 그냥 ‘재밌게‘ 버틸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요소를 계속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우리, 오염된 상태로 같이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순수하지 않게. 다 섞이고.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_<월간 이반지하> 2호 - P344

정말 기묘한 외로움이었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만들자 존재는 더욱 존재하기 위해 떠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봄과 더불어, 남겨진 자기 자신을 견디는 것까지가 만든 자의 몫이 된다. - P350

그냥 나로 사는 건데, 퀴어로 산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운동적 측면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마음대로 살 거예요. 그게 포인트예요.
그냥 끝까지 재밌게 살고 싶어요.
_<으랏파파> 인터뷰 - P351

다 해도 됩니다. 페미니스트 종류 되게 많습니다. 슈퍼마켓 같은 거예요. 자유롭게 맘대로 사십시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괜찮아, 별일 아냐.
_<월간 이반지하> 4호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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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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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질환을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현재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다면, 누가 치료비를 지급해야 하느냐에 관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 P184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 보장은 아픈 사람들을 인정하는 일의 시작일 뿐 아픈 사람들이 갖는 가치를 표현하는 일은 아니다.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치료를 제공하면서도 여전히 아픈 사람들을 주변부로 밀어낼 수 있다.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들, 즉 아동, 장애인, 노인, 직업 훈련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그곳에 놓인다. 치료 자체는 치료를 받는 개인이 가치 있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아픈 사람이 미래에 보여줄 생산성에 투자하는 일이다. 아픈 사람은 수리가 필요한 고장 난 몸 안에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물어야 하는 어려운 질문은, 우리가 아픈 사람들을 나머지 사람들이 사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통찰을 주는 이들로서 가치 있게 볼 수 있느냐다.
건강한 사람들이 자기 삶을 평가하는 생산성이라는 기준을 의심해본다면, 이는 질병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의 시작이될 수 있다. 나는 다시 ‘생산성 있게‘ 되었지만 아팠던 때보다 더 잘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암은 없는 채로 그때처럼 - P187

살 수 있길 종종 바라기도 한다. 아플 때, 아마도 오직 아플 때만, 우리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암처럼 치명적인 병을 앓았기에 그저 가만히 앉아 오후의 빛을 바라볼 수 있었고, 16년 동안 봐온 야곱의 그림을 마주하고 마침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제대로 사는 법을 익힐 만큼 충분히 아프지는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주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내가 가치 있다.
고 여기는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는지 묻는 대신, 또 사회나 조직의 요구보다는 사람들의 필요에 맞추고 있는지 묻는 대신, 이력서에서 무엇이 중요하냐에 따라 선택을 가늠한다.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들의 질환과 고통에 두려움을 느낀다. 다시 그들처럼 될까 봐 두려울 뿐 아니라, 하던 일을 멈추고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할까 봐 두렵다. 고통도 무섭지만 속도를 늦추는 것도 무섭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느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광기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속도가 늦어질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며, 이들은 조직이라는 생산 기계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겁낸다.
화학요법 치료 이후 몇 년이 지난 지금, 아팠을 때는 너무도 하고 싶었지만 체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며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나는 제대로 감각을 느 - P188

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문득 음악이 들려올 때 느꼈던 기쁨이 그립다. 산책을 할 때, 내 집에서 밤새 잘 때 느꼈던 기쁨이 그립다. 아팠을 때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했다. 요즘 나는 사람들이 내 일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그 밖의 모든 일을 전부 몰아내야 할 만큼 그렇게 엄청나게 중요한지 자문하길 잊곤 한다.
건강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분리해두는 대신,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를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하는 기본 권리 중에서도 특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경험할 권리를 짚고 싶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내달리면서 살아가느라 사람들에겐 자신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반추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더 많이 생산하는 법, 몸을 생산 도구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인생을 보낸다.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우리는 몸을 생산 도구로 사용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만, 우리 자신을 생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이런 종류의 생산은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여야 한다. - P189

아픈 사람의 권리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한 인간이 자신을 생산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질문해봐야 한다. 여기에는 먼저 다른 사람이 해주는 돌봄이 필요하고, 다음으론 시간, 공간, 기본적인 생필품 그리고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또 최종적으로는 삶의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서 우리가 받은 돌봄을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 모두가 필요하다. 이 권리 중 어느 것도 특별한 권리여서는 안 된다.
질병의 궁극적인 가치는, 질병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동정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 죽음은 삶의 적敵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또 질병을 계기로, 삶을 당연시하며 상실했던 균형 감각을 되찾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 P190

위해 우리는 질병을 존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 - P191

아픈 사람의 권리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아주 단순한 질문들에 도달한다. 우리를 인간으로서 하나로 묶는 경험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에 고통이 포함된다면, 우리 각자는 바로 자신도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강인한가? 만일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아주 현실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세금을 낼 이유로 의료 서비스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죽어가고 있는 사랑하는 이와 시간을 보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현실적인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인간으로서 생산할 수 있느냐다. 인간인 우리를 생산하는 일은 질병이 가져오는 고통을 목격하고 공유하는 데서 시작한다. 또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고통을 공유 - P192

함으로써 배우고, 이 배운 바에 따라 살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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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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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질병은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본다. 경계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보도록 허락 - P7

받는다. 여전히 살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는 멀어져 있기에 마침내 멈춰 서서 생각해볼 수 있다. 왜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살아왔는가, 미래가 있을 수 있다면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질병은 삶 일부를 앗아가지만 기회 또한 준다. 우리는 그저 오랫동안 살아왔던 대로 계속 사는 대신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
(...)
회복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에 심장마비 이후의 회복이란 아팠던 경험 전체를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면 암은 이런 식으로 회복할 수 없었다. 아직도 진찰을 받을 때마다, 보험 서류를 작 - P8

성할 때마다 암에는 차도가 있을 뿐이지 ‘완치‘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암이라는 질환의 생리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암 경험이 미친 영향이다.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다.
회복이 질병의 이상적인 결말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어떤 이들은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받던 암 치료가 끝나자마자 아내와 나는 장모님이 입원한 암 병동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고, 장모님의 경우 결말은 쉰아홉 살의 죽음이었다. 만일 회복이 이상적으로 여겨진다면 계속 만성으로 남는 질병이나 죽음으로 결말나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어떻게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답은 회복보다는 ‘새롭게 되기‘에 초점을 맞추는 일인 듯싶다. 계속 아프다 해도,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질병 안에는 새롭게 될 기 - P9

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질병이 제공하는 기회를 붙잡으려면 질병을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질병에 관해 생각해야 하고 이야기해야 하며 어떤 사람들, 곧 나 같은 사람들은 질병을 주제로 써야 한다. 생각하고 말하고 씀으로써 우리는 개인들이자 한 사회로서 질병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 그때야 질병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 아프다는 것은 그저 다른 방식의 삶이고, 질병을 전부 살아냈을 즈음에 우리는 다르게 살게 된다. 질병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도 자명하지도 않은 이유는 질병이 우리를 다르게 살도록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 P10

손으로 편지를 만지듯이, 접고 또 접어서 답장을 보내듯이, 내가 쓰는 이 글에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닿길 바란다. 아픈 사람들이 이 글에 응답하길 바란다. 여기서 응답이란 다른 이가 쓴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이다. - P11

나는 내 이야기를 할 뿐이지만, 독자들은 내 이야기에 자기 삶을 더할 수 있으며 각자의 상황에 맞게 내 글을 고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쳐 쓰기‘가 모여 우리 사이의 대화가 된다.
대화할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아픈 사람이 너무도 많다. 자기 질병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질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진단명을 말하거나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 설명하는 일 이상이다. 아픈 사람이 자기 질병에 관해 하는 말들은 대부분 자신에게서 나온다기보다는 의사라든지 그 밖의 의료진에게서 온다. 이런 경우 아픈 사람은 환자로서 말하고 있을 뿐으로, 그저 다른 곳에서 나온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의학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한다.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써서 말하려고 애쓰면서 아픈 사람은 개인의 경험이라는 자신만의 드라마를 스스로 부정한다.
아픈 사람들은 할 말이 많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어떤 희망과 공포를 품고 있는지 듣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통증 속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아픈 사람이 자신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사람들은 당황하며, 그래서 연습할 기회를 놓친다. - P12

또 연습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들은 질병이 이야기할 만한 주제가 아니라고 믿게 되며, 다른 이와 함께 질병을 경험하고 배울 기회를 놓친다. 하지만 새롭게 되어가는 과정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할 때 더 쉽다. - P13

어떻게 하면 모범적으로 아플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혼자일 필요는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 문제를 맞닥뜨렸고 또 어디에서 가치 있는 순간을 발견했느냐다. 아픈 사람들은 아픈 동안 겪는 모든 일이 이야기할 만한 소재라는 증거로 이 글을 가족과 친구와 의료진에게 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병을 고통과 상실 너머로 고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가장 쉽게 의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 P14

심각한 질병은 삶의 모든 면을 건드린다. 아픈 사람을 수 - P15

용하기 위해 지어놓은 병원과 의료 시설들은 환상을 만들어왔다. 아픈 사람을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떨어뜨려 가둬놓음으로써 질병 자체도 아픈 사람의 삶 안에 가둬놓을 수 있다는 환상이다. 이 환상은 위험하다. 아프게 되면 관계에도 직업에도 변화가 온다. 자신이 누구며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삶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다르게 느낀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무섭다. 심하게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번의 경험에서 나는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압도되었다.
그리하여 이 글은 질병에 압도되기 전의 젊은 나에게, 몇 년 더 젊을 뿐이지만 경험의 심연 건너편에 있는 나에게 쓰는 것이기도 하다. (...) 이제 이어질 글에서 아프기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두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두려움에 차서 인생을 보낸다면 바보 같은 일일 거라고, 미래의 너는 고통받고 많 - P16

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 P17

어느 날 몸이 고장 났다. 공포와 절망 속에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리가 아플 때 묻게되는 질문이다. 이때 문제는, 몸이 정신에게 질문을 던지자마자 의사들이 답한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질환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답한다. 이들의 답은 의술을 펼치는 데는 유용하지만 한계도 있다.
(...) 몸이 고장 나면 삶도 고장 난다. 의학 - P22

이 몸을 고칠 수 있다고 해도 언제나 삶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학은 고장 난 부분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지만, 때로 아픈 사람 안에서 피어오르는 공포와 절망은 너무나 커서 고장 난 부분을 고쳐도 가라앉지 않는다. 이런 때 질병 경험은 의학의 한계 밖에 있다. - P22

우리는 잘못된 결과를 뱉어내는 컴퓨터 문제를 상의하는 것처럼 내 심장 문제를 두고 이야기했다. ‘그것‘에 문제가 있네요. 우리의대화는 내가 자동차 정비공과 나누는 대화보다 대체로 더 고상했지만, 고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의사와 내가 모호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정비공처럼 구체적으로 말하질 않았으며, 나는 손상이 얼마나 심한지 자세하게 듣고 싶지가 않았다. 자동차보다는 심장에 관해 더 많이 알았지만 이 심장이라는 엔진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듣기가 꺼려졌다. - P24

경험은 살아야 하는 것이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몸 또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관리자가 나라도 그렇다. 몸은 삶의 수단이며 매개체다. 나는 몸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몸을 통해서 산다. 정신을 몸에서 떼어내라고, 그러고는 몸이 어디 바깥에 놓여 있는 사물인 양 이야기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몸이 고장 났다는 말을 들으면서 여전히 냉정하고 전문가답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의학의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언제나 냉철하게 행동하라고 요구받는다. 몸이 고장 났지만 공포와 절망은 고장 난 일부가 아닌 것처럼 대해야 하고, 삶 전체가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듯이 행동해야 한다. - P25

심장마비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필요했던 것은 일종의 축하였다. 축하는 어떤 사건에 대단히 기뻐하기 위해서 하기도 하지만, 사건의 중요성을 표시하기 위해서도 한다. 장례식은 삶을 축하한다. 입맞춤과 악수가 그렇듯 눈물과 침묵은 특별한 때를 축하할 수 있다. 하지만 주치의와 나는 내게 일어나고 있던 일을 축하할 수 있는 말을 찾는 대신 그 경험을 인정하길 회피했다. 우리는 기계를 두고 말하듯 질환만을 논했다. 질병을 축하하는 법은 나 혼자서 배워야 했다. - P26

의학의 한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질환disease과 질병 illness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의학의 이야기는 질환 용어를 사용한다. 질환 용어는 몸을 생리학으로 환원하며, 측정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체온, 감염 여부, 혈액 및 체액의 순환과 구성, 피부 상태 등등을 측정하고 검사한 결과가 질환 용어에 포함된다. 질환 이야기에서 이런 결과들은 지금 일어나고 - P27

있거나 곧 발생할 어떤 고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질환 용어는 측정된 값을 참조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다. 내 몸은 살아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주체지만, 질환 이야기에서는 그 몸, 측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객관화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질환을 논할 때 ‘객관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의학의 이야기다. 환자는 질환 용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재빨리 배우지만, 의학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아픈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내가 경험하는 내 몸은 다른 누군가가 측정하는 그 몸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환자가 되어 질환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자신의 몸을 외부에 존재하는 장소로, 질환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으로 언급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환자는 의사와 자신을 같은 장소에 두지만, 의사에게는 환자의 몸 자체가 외부의 장소다. 아픈 사람은 의사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훨씬 더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사실을 안다. 이 같은 정체성의 혼란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래도 잘못됐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면서 아픈 사람은 대가를 치른다. 바로 자기 존재가 ‘그 몸‘의 일부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 - P28

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말한다. 질병은 의학이 멈추는 지점에서,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히 측정값들의 집합이 아님을 인식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삶에도 일어난다. 내 삶에는 체온과 순환도 있지만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질병 이야기에 그 몸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내가 경험하는 내 몸만이 있다. 질환 이야기는 어떤 측정값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기록한다. 질병 이야기는 완벽하게 편안했던 몸이 다른 몸이 되어가는 변화에 관해 말한다. 이 다른 몸은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것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 P29

그렇지만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내가 원하는 도움은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름의 방식으로 질병을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의료진 또한 지켜봐주는 것이다. 답을 받기보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 이야기를 꺼내는 데 필요한 시간을 기다려주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없을 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즉시 말로 표현이 안될 때가 가장 절박하게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때인 경우가 많다. 질문이 없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심장마비가 있 - P30

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 말이 별로 없고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이 풀어야 하는 문제는 어떤 용어를 사용해 표현할지 고심할 때 도울 사람을 찾는 것이다.
(...)
질병이 삶에 가져온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서 나는 말해야 했다. 이야기함으로써 변화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 P31

계속 찾아낼 수 있었다. 심각하게 아픈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인정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들은 자신을 위해서 이야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직 아프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질병은 어떻게 더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병은 삶을 위협하지만 살아갈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얼마나 고통스럽든 얼마나 아픈 것을 피하고 싶어 하든 상관없이 우리에겐 질병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 책의 과제는 바로 이 필요를 표현하는 것, 그리하여 질병을 축하할 수 있는 말들을 찾는 것이다. - P32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지 배웠어야 했지만, 취약함을 부인함으로써 나는 오히려 더욱 취약한 상태로 남았다.
우리는 취약한 생물이고, 인간들은 바로 이 취약함을 공유함
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희망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취약함을 부정하기보다는 받아 안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취약함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을 때만 또렷하게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또렷하게 분별한다는 것은 저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돌아다니길 선택하는 일 이상이고,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희망하는 일 이상이고,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사랑하길 선택하는 일 이상이다. 또렷하게 분별한다는 것은 어디서, 무엇을, 누구를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 모든 활동의 한가운데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돌아다니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런저런 선택을 좇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일 때 더는 건강에 - P39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심장전문의의 진료실에서 나올 때의 나는 어떻게 혹은 왜 그러한지를 이해할 만큼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해가 미처 다 가기도 전에 나는 배우게 된다. 충만한 삶을 산다는 측면에서는 아픈 사람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의지를 발휘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하고 증명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건강이 필요하다. 반면 아픈 사람은 자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의지를 전혀 행사하지 않아도 세계가 이미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은 자유롭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다른 회복을, 사고에서의 회복이 아니라 질병에서의 회복을 배워야 했다. - P40

정치인과 의사들은 ‘의사 쇼핑‘ 같은 말을 써가며 여러 의사를 전전하는 행동을 지탄하지만, 신경을 긁는 비난이며 표현 자체도 모욕적이다. 내가 세 번째 의사를 ‘쇼핑‘해서 다른 의견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 P46

암이라는 말을 듣는 경험은 어땠을까? 미래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들은 다시는 못 볼 얼굴들로 변했다. 비현실적이지만 완전히 현실인 악몽 속을 걷고 있는 듯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리 없어. 하지만 일어나고 있었고, 계속 일어날 것이었다. 내 몸은 바닥이 없는 모래 수렁으로 변했고 나는 자신 안으로, 질병 안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P49

내 병은 통증을 밤과 연결했다. 종양이 몸을 장악하면서 통증은 정신을 장악했다. 통증이 빚어낸 고립과 외로움은 어둠 속에서 더 커진다. 아픈 사람이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한밤중, 통증 속에 있는 사람의 세계는 더는 하나로 붙어 있지 못하고 조각나 떨어져 나온다.
통증 때문에 조각나는 듯한 경험을 쓰다 보면 모든 것이 부서지는 듯하던 느낌이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언어는 쉬이 빗나간다. 앞에서 나는 통증 속에서 보낸 밤들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질병을 알게 됐다고 썼다. 하지만 이 비유는 경험을 왜곡한다. 내가 얼마나 질병에 얼굴을 주고 싶었든 간에, 다시 말해 얼마나 질병을 일관성 있게 표현하고 싶었든 간에 질병은 어떤 존재가 아니다. 질병에 얼굴을 주고 싶은 마음이 어둠 속에서는 더욱 커지기 때문에 나온 비유일 뿐, 질병에 얼굴이 있다는 말은 경험을 더 조각내고 뒤섞는다. 내가 한밤중에 마주한 것은 나 자신이었을 뿐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에 장악됐다고 느낄 때 인간이 흔 - P53

히 보이는 반응은, 위협이 되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통증을 ‘그것‘으로, 신으로, 싸워야 하는 적으로 만든다. ‘그것‘이 사악해서든 아니면 우리 잘못으로 ‘그것‘이 진노를 일으켜서든 우리는 통증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저주하고 그것이 자비를 베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통증에는 얼굴이 없다. 통증은 밖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통증은 바로 내 몸,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신호를 보내는 내 몸이다. 통증은 몸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몸이지, 외부에 있는 어떤 신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통증과 씨름하는 일은 몸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몸이 몸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통증을 전부 내 몸 안에 있는 내 것으로만 본다면 몸 안에 고립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고립은 조각나 부서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건강할 때 몸은 질서정연하고 주위 환경에 조응하며, 몸 부위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작동한다. 누웠을 때 몸은 편안함을 느끼면서 휴식하고, 깨어날 때는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휴식과 활동이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리듬은 통증 속에서 사라지고, 그러면서 계획과 전망도 사라지며, 과거와 미래가 서로 맞물려 있을 - P54

때는 이해할 수 있었던 삶 또한 사라진다. 조화는 붕괴하고 조각난다.
조화란, 한밤중 다른 사람들이 잘 때 함께 자고 함께 휴식하는 것이다. 함께 쉬지 못하고 불려 나오면서 아픈 사람은 조각나 떨어져 나오며, 무엇보다 삶의 자연스러운 주기라는 온전함을 상실한다. 하지만 여기서 또다시 나의 언어는 삐끗한다. 아무것도 나를 잠에서 불러내지 않았다. 몸의 통증 때문에 일어났고, 통증을 의식하며 혼자 깨어 있으면서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아픈 사람이 겪는 추방당하는 듯한 경험은 통증과 함께 시작한다.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감각 안에서만 통증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수 있다. 이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아픈 사람은 자신이 떨어져 나온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통증 때문에 깨어 있던 밤들에 아내를 깨울 수도 있었다. 아내를 불러내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하고, 그래서 혼자 외로워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캐시를 깨웠다면 자연스러운 주기에 맞춰 흘러가기에 조화로운 그녀의 일상을 훼손했을 것이다. 캐시는 여전히 낮 동안 일하고 밤에는 잤다. 그녀의 삶에는 내 삶에서는 사라진 질서가 있었 - P55

다. 자연스러운 주기 바깥에 있던 나는 낮에는 너무 피곤해서 일할 수가 없었고, 밤에는 등을 망치로 치는 듯한 통증 때문에 잘 수가 없었다. 야행성도 주행성도 아니고 어느 쪽의 존재도 되지 못한 채로 일상의 바깥에 머물렀다.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부재하고 있었지만 부재하는 이유를 전부 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제자리가 아닌 곳에서 삶을 살고 있었다. - P56

왜 캐시를 깨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아직 절반만 답했다. 다른 절반의 이유는 캐시의 잠이 내게 유일하게 남은 질서였기 때문이다. 더는 다른 사람들이 휴식할 때 함께 쉴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족의 휴식이 소중했다. 나는 잘 수 없었지만 여전히 아내의 잠은 아껴줄 수 있었다. 그녀의 수면을 방해했다면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중에 더 심하게 아프게 되었을 때는 밖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움직일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그들 몸 안의 자유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소중히 여기길 바랐다. - P57

중요한 것은 통증이 할 일을 했다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의사를 만나보게 했다는 것이다. 주치의가 잡아놓은 비뇨기과 진료일이 됐을 때는 이미 수술도 받고 화학요법도 한 차례 받은 후였다. 통증은 원래 나를 돕기 위해 생겨났다.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내 몸, 그것이 바로 통증이다. - P58

표현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아픈 사람은 고립되며, 입을 다물면서 추방되었다고 느낀다. 어떤 형태로 표현되는 일단 표현된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한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라도 그렇다.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평화롭게 잠자고, - P59

나는 내 집에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았다. 여전히 혼자였지만 나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조각나는 듯한 경험을 쓰기가 어려운 것처럼 다시 조화속에 있다고 느꼈던 경험도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 말이 조화로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통하고자 하는 시도만으로도 아픈 사람은 조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시의 단어 하나하나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로, 표현이 조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시를 ‘보기‘ 위해 창문이 필요했다. 그리고 본 것을 다른 사람들의 세계 안에 두기 위해,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세계 안에 내가 있을 자리를 되찾기 위해 나에게는 그 시가 필요했다.
소중히 하는 마음에 관해서는 좀 더 쉽게 쓸 수 있다. 가족들은 잠들어 있었고 그들의 잠은 내게 소중했다. 통증 때문에 깨어 있던 밤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가족의 휴식은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런 마음 때문에 통증은 견딜 만해졌다. 질병과 통증은 삶을 조각내지만, 사는 이유를 모두 빼앗겼다고 혹은 사는 이유가 막 사라질 참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다시 조화를 발견하곤 하며, 그렇기에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본 그 밤에 통증은 덜 중요했다. 내 몸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이 아 - P60

니라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잠도, 그 창도 소중했다. 이렇게 아끼는 마음이 다시 모든 것을 조화롭게 했고, 그래서 나 자신도 계속 소중히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창문에서 본 것을 모두 이해할 만큼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언어는 오직 나중에야 경험을 따라잡는다. 하지만 그 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소중하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 P61

사람들이 애도와 관련해 겪는 문제는 대부분 상실이 겹쳐서 생기기보다는 상실한 사람이 그만 슬퍼하길 주변에서 바라기 때문에 생긴다. 의료진, 가족, 친구 등 모두가 질병에서 비롯된 상실이든 죽음에서 비롯된 상실이든 아픈 사람이나 돌보는 사람이 최대한 빨리 상실에 적응하길 바란다. 아픈 사람이 슬퍼하다 보면 치료가 늦어질 수도 있고, 한편으로 슬퍼하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상실을 그리 대단치 않은 일로 정리하고 잊은 다음, 건강한 보통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가한다.
전문가들은 적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나는 애도가 ‘긍정하는 일‘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질병이나 죽음 때문에 사라진 것을 애도하는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 상실이 그저 뒤돌아 나오면 되는 사건인 양 단순하게 다룰 때만 ‘신속한 적응‘을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실 - P68

한 무언가를, 상실한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이 그때껏 함께 살아온 자기 몸과 헤어질 때, 또 돌봄을 주던 사람이 돌봄을 받던 사람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울 때 시간을 두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애도한 후에야 한 사람은 상실을 통과하여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프기 전의 젊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고 앞에서 썼다. 나는 젊은 나에게 전하고 싶다.
상실을 충분히 슬퍼하고, 당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찾으세요. 당신이 잃어버린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피해요. 이런 사람들은 당신이 느끼는 상실을 사소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상실과 비교하거나 곧 익숙해질 거라고 말하죠. 많은 것이 당신에게서 사라지고 있을 때 아무도 이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실은 당신 경험의 일부이고, 당신에겐 슬퍼할 권리가 있어요. 질병은 삶의 모든 부분이, 상실조차, 경험할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슬퍼하는 일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소중히 하는 일과도 같아요. 상실감마저 소중히 여길 때 삶 자체를 소중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다시 살기 시작할 거예요. - P69

스포츠의학 전문의와 초음파검사를 한 의사가 마침내 내가 얼마나 아픈지 확진을 내렸을 때, 두 의사의 태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한 사람은 내게 힘을 주고 돕고자고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진단은 거의 같았지만, 스포츠의학 의사는 내게 상황을 전해주면서 자신도 그 상황 안에 함께 있었던 반면 초음파검사 의사는 평결을 내리듯 진단을 선고했다. 차이들은 증식한다. 똑같은 메시지라고 해도 환자마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 똑같은 내용이 두 개의 다른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 P74

차이가 인식되어야 돌봄이 가능하다. ‘암 환자에게 해주기 적당한 말‘ 같은 것은 없다. ‘암 환자‘는 포괄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다른 시작 지점을 갖고 각자의 질환에서 비롯되는 사건들을 따라가면서 다른 경험을 할 뿐이다. 의학이 환자를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진단 범주는 질환에 쓰이는 것이지 질병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이런 범주는 치료에는 유용하지만 돌봄에는 방해가 된다.
아픈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차이와 독특함을 인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구별하는 데는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차이를 파악하려면 아픈 사람과 맺는 관계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야 한다. 반면 일반론은 시간을 아껴준다. 사람들을 범주 안에 집어넣으면 효율적이며, 범주 개수가 적을수록 더 효율적이다. 모두에게 다 맞는 ‘원 사이즈‘의 옷처럼, 같은 범주에는 같은 치료법을 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료는 돌봄과 똑같지 않다. 치료 제공자들은 효율성과 돌봄 사이에 균형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환자에게 마음쓰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어 책임을 모면한다. 이 환상은 ‘단계 이론‘ 같은 것에 기반을 둘 때가 많다. 이런 이론에 나오는 핵심 용어들은 환자의 심리 상태를 기술하면서 환자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치료 제공자에게 알려준다. - P75

가장 유명한 단계 이론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이론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이 겪는 경험을 설명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죽어가는 사람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단계를 거쳐간다. 퀴블러 - 로스의 원래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이론은 사람들이 경험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경험을 분류하는 데 사용된다. 이 이론에 나오는 용어들은 개인의 질병 경험에서 어떤 점이 특별한지 보게 하는 대신, 사람들이 거리를 둔 채 "예상대로 환자분은 지금 분노를 겪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또 아픈 사람이 왜 분노하는지 묻는 대신 분노를 ‘그저 지나가는 단계‘로 여기게 한다. 그리고 이미 예상한 대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픈 사람의 분노를 ‘모두들 겪는 무엇‘으로 일축할 수 있다.
어떤 경험을 진짜로 만드는 것은 경험의 특수하고 세세한 부분들이다. 한 사람의 분노나 슬픔은 다른 사람의 분노나 슬픔과는 너무도 달라서, 이 감정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 각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오히려 덮인다. ‘분노‘든 ‘슬픔‘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말이든 이 단어들은 한 사람의 경험을 알려주기보다는 가린다. 이런 식의 이론이 인기를 끄는 현상은 놀랍지 않다. 실제 경험은 수없이 많은 모 - P76

습으로 나타나며 각기 다른 결을 갖지만, 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산 경험에 자신이 연결되지 않고도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해하고 있다는 이러한 환상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 오기까지한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단계 이론은 대단한 가치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귀중할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은 아픈 사람에게 의미 깊다. 나는 암 진단을 받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공포가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알자 위안이 됐다. 혼란스럽고 우울했을 때도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 역시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내가 겪는 공포, 혼란, 우울함이 특별하다는 느낌, 또 나만의 것이라는 느낌이 덜해졌다. 하지만 돌봄공자의 입장은 다르다. 돌보는 사람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공포가 전부 그만의 것이며, 어떤 ‘단계‘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공포 단계를 지나고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마 아픈 사람이 가장 원치 않는 일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겪는 일임을 - P77

알 때 개인이 느끼는 공포는 줄어들지만, 예상되는 단계라는 이유로 공포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공포가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한 번 일어난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는다.
위중한 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후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움은 지구 상의 인간들이 모두 다른 만큼이나 각기 다르다. 주위에 가족들이 모여 있길 원하는 사람도 있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즉각 의학의 도움을 받길 바라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치료받을지 시간을 두고 결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환자의 경우는 치료를 서두르는 것이 의사로서 돕는 일이고, 또 다른 환자의 경우는 의사가 뒤로 물러나 있는 게 돕는 일일 때도 있다. 돌봄 제공자에게는 아픈 사람이 자기 필요를 표현할 방법을 찾도록 지원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결국엔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과 돌봄 제공자가 줄 수 있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픈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알아내도록 돌봄 제공자가 도와야 한다. 돌봄 제공자가 전문가든 가족이든 친구든 마찬가지다. 그래야만 돌보는 사람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절충할 수 있다. - P78

아픈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돌봄 제공자가 "무엇이 필요하세요?"라고 묻는다고 해서 답이 나오지는 않으며, 일관된 답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진단받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삶은 이미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여러 면에서 바뀌었고, 위중한 질병을 앓는 동안 변화는 계속된다. 그리고 변화가 계속된다는 점이 ‘위중함‘의 일부이기도 해서, 심하게 아픈 사람은 변해가는 자기 자신의 필요조차 따라잡기 힘들어한다. 아픈 사람은 분명 무언가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다. 환자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전부 다 실수였다는 말, 이것 하나일지도 모른다. 환자분 검사 결과에 이름이 잘못 붙어 있었네요. 오, 전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 P79

어쩌면 아픈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예 말로 표현하려 애쓰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필요를 발견할 때까지 아픈 사람은 자신을 그저 놔두고 주위 사람들은 아픈 사람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닌가 한다.
나는 ‘돌봄 제공자caregiver‘라는 이름을, 아픈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며 아픈 사람 개개인의 경험에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에 한정해서 쓰려고 한다. 돌봄은 분류하기 위한 범주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제대로 된 돌봄은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다른 점이나 특별한 점을 인식하며, 그래서 돌봄을 받는 사람은 자기 삶이 귀중히 여겨진다고 느낀다. 우리에게 사람들 - P80

을 분류할 권리는 없지만 특권이 하나 있다. 바로 각자가 얼마나 고유한지 이해하는 특권이다. 돌봄 제공자가 이 고유함에 마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든 전할 때 아픈 사람의 삶은 의미 있어진다. 나아가 아픈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돌보는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되면서 돌보는 사람의 삶도 의미 있어진다. 돌봄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에서 분리할 수 없으며, 이해가 쌍방향으로 일어나야 하듯 돌봄도 대칭을 이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우리는 자신 또한 돌본다. 그렇지 않다면 소진되거나좌절하고 말 것이다.
의료인 대부분에게는 돌보는 사람이 될 시간이 없다. 또 그럴 의향이 없는 사람도 많다. 의료진은 치료를 제공하며 치료 제공은 돌봄 제공만큼이나 중요하지만, 둘은 아주 다르다. 아픈 사람을 저버리지 않고 곁에 남는 가족조차 돌보는 사람이기보다는 서비스 공급자가 될 때가 너무도 많다.
돌보는 사람이 마주하는 질병 경험은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질병 경험이란 오히려 공포, 불확실함, 두려움, 부정, 혼란을 뒤섞은 다음, 여기에 ‘거래하기‘를 급히 첨가한 잡탕 같은 것이다. 캐시는 내가 어떤 진단 가능성이나 치료 가능 - P81

성을 다른 가능성과 저울질해보고 혼자 거래하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며칠이고 들어야 했다. "그걸 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걸 해도 괜찮겠어."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아픈 사람은 사실 거래할 거리도 없으며 거래할 상대도 없음을 깨닫는다. 또 외로움도 찾아오고, 그다음에 자신이 누구고 자기 인생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의심이 찾아오고, 우울과 뒤섞인 희망이, 다른 사람들과 닿아 있고 싶다는 욕망과 뒤섞인 분노가, 자기 일을 스스로 해내고 싶은 마음과 뒤섞인 의존 상태가 찾아온다.
앞에서 말한 내용은 어느 아픈 사람 한 명이 느꼈던 감정의 ‘잡탕‘을 보여줄 뿐이지만, 그래도 내 요점을 다시 확인해준다. 바로 경험을 몇몇 범주로 나누는 말들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고통이나 상실 같은 용어는 이 말이 아픈 사람 자신의 경험으로 채워질 때까지는 실체가 없다.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고유함을 목격하고 차이를 전부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돌봄이다. - P82

아픈 사람은 자기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둘 모두에 잘 대처하려 애쓴다. 하지만 환자가 되어 의사들이 몸을 접수하면 의사들은 그 몸을 환자의 삶에서 분리해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의학이 이해하는 통증은 아픈 사람의 경험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통증을 겪는 사람은 모든 것이 조각나고 뒤죽박죽되고 있다고 느낀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려워지고 일도 하기 힘들다. 자기가 있을 자리가 어디인지 감각이 희미해지기 때문에 다시 제자리를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 반면 의학은 통증이 삶에서 갖는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통증은 질환의 증상일 뿐이다. 의학은 아픈 사람의 통증 경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치료법이나 관리법에만 관심을 둔다. 의학은 분명 몸에서 통증을 줄여주지만, 그러면서 몸을 식민지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학의 도움을 구하면서 맺는 거래 조건이다.
치료 경과가 좋을 때는 수동적인 환자로 있을 만한 가치가 있다. 병이 난다면 나는 환자가 되고 싶다. 의사를 피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질병이라는 드라마에서 의사들이 무대 중앙을 독차지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위험하다. 의사를 거부 - P87

하면 당장 몸이 위험해질 것이고, 의사들이 드라마를 차지하도록 둔다면 그들은 질환이 이야기의 전부가 되도록 각본을 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의사는 "이건 조사가 있어야겠네요"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이후 이어질 드라마의 각본을 짰다. 내 몸 안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그저 수동적으로 관람만 하도록 객석으로 보내졌다. - P88

의사와 간호사들이 환자에게 감정을 보이고 친밀하게 대하길 바란다기보다는 그들이 인정하길 바란다. 질병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과거의 내가 힘든 경험을 통과하며 배운 소중한 사실이다. 이 과거의 나는 말해주었다. 암을 앓는다는 건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질병을 겪고 죽음을 무릅쓰는 것, 거의 죽어가다가 삶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아는 채로 삶을 다시 시작하는 - P89

것 모두,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처음엔 병 때문에 몸이 변하고, 다음엔 병을 낫게 하려고 받는 수술과 화학요법 때문에 몸이 변하는 것 또한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심각한 질병은 여행자를 인간 경험의 가장자리로 데려간다. 한 발짝만 더 내디뎌도 아픈 사람은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 나는 이 여행이 인정받길 원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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