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질환을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현재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다면, 누가 치료비를 지급해야 하느냐에 관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 P184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 보장은 아픈 사람들을 인정하는 일의 시작일 뿐 아픈 사람들이 갖는 가치를 표현하는 일은 아니다. 사회가 모든 사람에게 치료를 제공하면서도 여전히 아픈 사람들을 주변부로 밀어낼 수 있다.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들, 즉 아동, 장애인, 노인, 직업 훈련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그곳에 놓인다. 치료 자체는 치료를 받는 개인이 가치 있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아픈 사람이 미래에 보여줄 생산성에 투자하는 일이다. 아픈 사람은 수리가 필요한 고장 난 몸 안에 있는 건강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물어야 하는 어려운 질문은, 우리가 아픈 사람들을 나머지 사람들이 사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통찰을 주는 이들로서 가치 있게 볼 수 있느냐다. 건강한 사람들이 자기 삶을 평가하는 생산성이라는 기준을 의심해본다면, 이는 질병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의 시작이될 수 있다. 나는 다시 ‘생산성 있게‘ 되었지만 아팠던 때보다 더 잘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암은 없는 채로 그때처럼 - P187
살 수 있길 종종 바라기도 한다. 아플 때, 아마도 오직 아플 때만, 우리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암처럼 치명적인 병을 앓았기에 그저 가만히 앉아 오후의 빛을 바라볼 수 있었고, 16년 동안 봐온 야곱의 그림을 마주하고 마침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제대로 사는 법을 익힐 만큼 충분히 아프지는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주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내가 가치 있다. 고 여기는 무언가를 생산하고 있는지 묻는 대신, 또 사회나 조직의 요구보다는 사람들의 필요에 맞추고 있는지 묻는 대신, 이력서에서 무엇이 중요하냐에 따라 선택을 가늠한다. 여전히 나는 다른 사람들의 질환과 고통에 두려움을 느낀다. 다시 그들처럼 될까 봐 두려울 뿐 아니라, 하던 일을 멈추고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할까 봐 두렵다. 고통도 무섭지만 속도를 늦추는 것도 무섭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느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광기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속도가 늦어질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며, 이들은 조직이라는 생산 기계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겁낸다. 화학요법 치료 이후 몇 년이 지난 지금, 아팠을 때는 너무도 하고 싶었지만 체력이 부족해서 할 수 없었던 일을 하며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나는 제대로 감각을 느 - P188
낄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문득 음악이 들려올 때 느꼈던 기쁨이 그립다. 산책을 할 때, 내 집에서 밤새 잘 때 느꼈던 기쁨이 그립다. 아팠을 때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했다. 요즘 나는 사람들이 내 일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그 밖의 모든 일을 전부 몰아내야 할 만큼 그렇게 엄청나게 중요한지 자문하길 잊곤 한다. 건강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분리해두는 대신,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를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하는 기본 권리 중에서도 특히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경험할 권리를 짚고 싶다. 이 순간에서 저 순간으로 내달리면서 살아가느라 사람들에겐 자신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반추할 시간이 없다. 우리는 더 많이 생산하는 법, 몸을 생산 도구로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면서 인생을 보낸다.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우리는 몸을 생산 도구로 사용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만, 우리 자신을 생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이런 종류의 생산은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여야 한다. - P189
아픈 사람의 권리라는 말의 뜻을 이해하려면 한 인간이 자신을 생산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질문해봐야 한다. 여기에는 먼저 다른 사람이 해주는 돌봄이 필요하고, 다음으론 시간, 공간, 기본적인 생필품 그리고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또 최종적으로는 삶의 여러 조건이 갖추어져서 우리가 받은 돌봄을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줄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 모두가 필요하다. 이 권리 중 어느 것도 특별한 권리여서는 안 된다. 질병의 궁극적인 가치는, 질병이 살아 있다는 것의 가치를 가르쳐준다는 점에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동정받아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 죽음은 삶의 적敵이 아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삶의 가치를 다시 확인한다. 또 질병을 계기로, 삶을 당연시하며 상실했던 균형 감각을 되찾는다. 무엇이 가치 있는지, 균형 잡힌 삶이 어떤 것인지 배우기 - P190
위해 우리는 질병을 존중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존중해야 한다. - P191
아픈 사람의 권리를 생각하다 보면 결국 아주 단순한 질문들에 도달한다. 우리를 인간으로서 하나로 묶는 경험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에 고통이 포함된다면, 우리 각자는 바로 자신도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큼 강인한가? 만일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아주 현실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세금을 낼 이유로 의료 서비스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죽어가고 있는 사랑하는 이와 시간을 보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무엇보다 가장 현실적인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인간으로서 생산할 수 있느냐다. 인간인 우리를 생산하는 일은 질병이 가져오는 고통을 목격하고 공유하는 데서 시작한다. 또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고통을 공유 - P192
함으로써 배우고, 이 배운 바에 따라 살아가는 데서 시작한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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