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질병은 우리를 삶의 경계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삶이 어디에서 끝나버릴 수도 있는지 본다. 경계에서 삶을 조망하면서 우리는 삶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혹은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해보도록 허락 - P7
받는다. 여전히 살아 있긴 하지만 일상에서는 멀어져 있기에 마침내 멈춰 서서 생각해볼 수 있다. 왜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살아왔는가, 미래가 있을 수 있다면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질병은 삶 일부를 앗아가지만 기회 또한 준다. 우리는 그저 오랫동안 살아왔던 대로 계속 사는 대신 살고 싶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 (...) 회복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에 심장마비 이후의 회복이란 아팠던 경험 전체를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건강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면 암은 이런 식으로 회복할 수 없었다. 아직도 진찰을 받을 때마다, 보험 서류를 작 - P8
성할 때마다 암에는 차도가 있을 뿐이지 ‘완치‘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지만 암이라는 질환의 생리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암 경험이 미친 영향이다. 암을 앓고 난 후에는 예전에 있던 곳으로 전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변화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너무도 많은 고통을 보았고, 특히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은 갖기 어려울 수도 있는 어떤 관점에서 고통을 보았다. 삶이라는 게임을 이전과 같은 조건으로 계속할 수는 없었다. 예전의 나를 회복하기보다는 앞으로 될 수 있는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그리고 글쓰기는 이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다. 회복이 질병의 이상적인 결말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 어떤 이들은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받던 암 치료가 끝나자마자 아내와 나는 장모님이 입원한 암 병동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고, 장모님의 경우 결말은 쉰아홉 살의 죽음이었다. 만일 회복이 이상적으로 여겨진다면 계속 만성으로 남는 질병이나 죽음으로 결말나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의 경험에서 어떻게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답은 회복보다는 ‘새롭게 되기‘에 초점을 맞추는 일인 듯싶다. 계속 아프다 해도, 심지어는 죽어간다 해도 질병 안에는 새롭게 될 기 - P9
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질병이 제공하는 기회를 붙잡으려면 질병을 적극적으로 살아내야 한다. 질병에 관해 생각해야 하고 이야기해야 하며 어떤 사람들, 곧 나 같은 사람들은 질병을 주제로 써야 한다. 생각하고 말하고 씀으로써 우리는 개인들이자 한 사회로서 질병을 받아들일 수 있다. 또 그때야 질병이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님을 배울 수 있다. 아프다는 것은 그저 다른 방식의 삶이고, 질병을 전부 살아냈을 즈음에 우리는 다르게 살게 된다. 질병을 받아들이기가 쉽지도 자명하지도 않은 이유는 질병이 우리를 다르게 살도록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 P10
손으로 편지를 만지듯이, 접고 또 접어서 답장을 보내듯이, 내가 쓰는 이 글에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닿길 바란다. 아픈 사람들이 이 글에 응답하길 바란다. 여기서 응답이란 다른 이가 쓴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이다. - P11
나는 내 이야기를 할 뿐이지만, 독자들은 내 이야기에 자기 삶을 더할 수 있으며 각자의 상황에 맞게 내 글을 고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고쳐 쓰기‘가 모여 우리 사이의 대화가 된다. 대화할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아픈 사람이 너무도 많다. 자기 질병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질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진단명을 말하거나 어떤 치료를 받고 있는지 설명하는 일 이상이다. 아픈 사람이 자기 질병에 관해 하는 말들은 대부분 자신에게서 나온다기보다는 의사라든지 그 밖의 의료진에게서 온다. 이런 경우 아픈 사람은 환자로서 말하고 있을 뿐으로, 그저 다른 곳에서 나온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의학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반복한다. 전문적인 의학 용어를 써서 말하려고 애쓰면서 아픈 사람은 개인의 경험이라는 자신만의 드라마를 스스로 부정한다. 아픈 사람들은 할 말이 많지만, 그럼에도 이들이 어떤 희망과 공포를 품고 있는지 듣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통증 속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아픈 사람이 자신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 사람들은 당황하며, 그래서 연습할 기회를 놓친다. - P12
또 연습한 적이 없으므로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들은 질병이 이야기할 만한 주제가 아니라고 믿게 되며, 다른 이와 함께 질병을 경험하고 배울 기회를 놓친다. 하지만 새롭게 되어가는 과정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할 때 더 쉽다. - P13
어떻게 하면 모범적으로 아플 수 있는지 나는 모른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혼자일 필요는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 문제를 맞닥뜨렸고 또 어디에서 가치 있는 순간을 발견했느냐다. 아픈 사람들은 아픈 동안 겪는 모든 일이 이야기할 만한 소재라는 증거로 이 글을 가족과 친구와 의료진에게 내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병을 고통과 상실 너머로 고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가장 쉽게 의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 P14
심각한 질병은 삶의 모든 면을 건드린다. 아픈 사람을 수 - P15
용하기 위해 지어놓은 병원과 의료 시설들은 환상을 만들어왔다. 아픈 사람을 건강한 사람들에게서 떨어뜨려 가둬놓음으로써 질병 자체도 아픈 사람의 삶 안에 가둬놓을 수 있다는 환상이다. 이 환상은 위험하다. 아프게 되면 관계에도 직업에도 변화가 온다. 자신이 누구며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삶이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다르게 느낀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무섭다. 심하게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번의 경험에서 나는 변화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압도되었다. 그리하여 이 글은 질병에 압도되기 전의 젊은 나에게, 몇 년 더 젊을 뿐이지만 경험의 심연 건너편에 있는 나에게 쓰는 것이기도 하다. (...) 이제 이어질 글에서 아프기 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두려울 수밖에 없겠지만 두려움에 차서 인생을 보낸다면 바보 같은 일일 거라고, 미래의 너는 고통받고 많 - P16
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고통과 상실은 삶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많은 것을 잃겠지만 그만큼 기회가 올 겁니다. 관계들은 더 가까워지고, 삶은 더 가슴 저미도록 깊어지고, 가치는 더 명료해질 거예요. 당신에게는 이제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된 것들을 애도할 자격이 있지만, 슬퍼만 하다가 당신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느끼는 감각이 흐려져선 안 돼요. 당신은 위험한 기회에 올라탄 겁니다. 운명을 저주하지 말길, 다만 당신 앞에서 열리는 가능성을 보길 바랍니다. - P17
어느 날 몸이 고장 났다. 공포와 절망 속에서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리가 아플 때 묻게되는 질문이다. 이때 문제는, 몸이 정신에게 질문을 던지자마자 의사들이 답한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질환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답한다. 이들의 답은 의술을 펼치는 데는 유용하지만 한계도 있다. (...) 몸이 고장 나면 삶도 고장 난다. 의학 - P22
이 몸을 고칠 수 있다고 해도 언제나 삶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학은 고장 난 부분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지만, 때로 아픈 사람 안에서 피어오르는 공포와 절망은 너무나 커서 고장 난 부분을 고쳐도 가라앉지 않는다. 이런 때 질병 경험은 의학의 한계 밖에 있다. - P22
우리는 잘못된 결과를 뱉어내는 컴퓨터 문제를 상의하는 것처럼 내 심장 문제를 두고 이야기했다. ‘그것‘에 문제가 있네요. 우리의대화는 내가 자동차 정비공과 나누는 대화보다 대체로 더 고상했지만, 고상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의사와 내가 모호하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정비공처럼 구체적으로 말하질 않았으며, 나는 손상이 얼마나 심한지 자세하게 듣고 싶지가 않았다. 자동차보다는 심장에 관해 더 많이 알았지만 이 심장이라는 엔진은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듣기가 꺼려졌다. - P24
경험은 살아야 하는 것이지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몸 또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관리자가 나라도 그렇다. 몸은 삶의 수단이며 매개체다. 나는 몸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몸을 통해서 산다. 정신을 몸에서 떼어내라고, 그러고는 몸이 어디 바깥에 놓여 있는 사물인 양 이야기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몸이 고장 났다는 말을 들으면서 여전히 냉정하고 전문가답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의학의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언제나 냉철하게 행동하라고 요구받는다. 몸이 고장 났지만 공포와 절망은 고장 난 일부가 아닌 것처럼 대해야 하고, 삶 전체가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듯이 행동해야 한다. - P25
심장마비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필요했던 것은 일종의 축하였다. 축하는 어떤 사건에 대단히 기뻐하기 위해서 하기도 하지만, 사건의 중요성을 표시하기 위해서도 한다. 장례식은 삶을 축하한다. 입맞춤과 악수가 그렇듯 눈물과 침묵은 특별한 때를 축하할 수 있다. 하지만 주치의와 나는 내게 일어나고 있던 일을 축하할 수 있는 말을 찾는 대신 그 경험을 인정하길 회피했다. 우리는 기계를 두고 말하듯 질환만을 논했다. 질병을 축하하는 법은 나 혼자서 배워야 했다. - P26
의학의 한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질환disease과 질병 illness의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의학의 이야기는 질환 용어를 사용한다. 질환 용어는 몸을 생리학으로 환원하며, 측정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체온, 감염 여부, 혈액 및 체액의 순환과 구성, 피부 상태 등등을 측정하고 검사한 결과가 질환 용어에 포함된다. 질환 이야기에서 이런 결과들은 지금 일어나고 - P27
있거나 곧 발생할 어떤 고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질환 용어는 측정된 값을 참조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다. 내 몸은 살아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주체지만, 질환 이야기에서는 그 몸, 측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객관화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질환을 논할 때 ‘객관적‘인 이야기는 언제나 의학의 이야기다. 환자는 질환 용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재빨리 배우지만, 의학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아픈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 내가 경험하는 내 몸은 다른 누군가가 측정하는 그 몸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환자가 되어 질환 이야기를 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자신의 몸을 외부에 존재하는 장소로, 질환이 발생하고 있는 ‘현장‘으로 언급한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환자는 의사와 자신을 같은 장소에 두지만, 의사에게는 환자의 몸 자체가 외부의 장소다. 아픈 사람은 의사와 자신을 동일시할 때 훨씬 더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사실을 안다. 이 같은 정체성의 혼란은 이해할 만하지만 그래도 잘못됐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면서 아픈 사람은 대가를 치른다. 바로 자기 존재가 ‘그 몸‘의 일부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 - P28
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말한다. 질병은 의학이 멈추는 지점에서, 내 몸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단순히 측정값들의 집합이 아님을 인식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삶에도 일어난다. 내 삶에는 체온과 순환도 있지만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질병 이야기에 그 몸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내가 경험하는 내 몸만이 있다. 질환 이야기는 어떤 측정값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기록한다. 질병 이야기는 완벽하게 편안했던 몸이 다른 몸이 되어가는 변화에 관해 말한다. 이 다른 몸은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그것에게가 아니라 나에게. - P29
그렇지만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다. 내가 원하는 도움은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름의 방식으로 질병을 살아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의료진 또한 지켜봐주는 것이다. 답을 받기보다는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 이야기를 꺼내는 데 필요한 시간을 기다려주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이 없을 때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보호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즉시 말로 표현이 안될 때가 가장 절박하게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때인 경우가 많다. 질문이 없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심장마비가 있 - P30
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할 말이 별로 없고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수 있을까. 아픈 사람이 풀어야 하는 문제는 어떤 용어를 사용해 표현할지 고심할 때 도울 사람을 찾는 것이다. (...) 질병이 삶에 가져온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서 나는 말해야 했다. 이야기함으로써 변화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 P31
계속 찾아낼 수 있었다. 심각하게 아픈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인정해주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들은 자신을 위해서 이야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아직 아프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질병은 어떻게 더 또렷한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병은 삶을 위협하지만 살아갈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얼마나 고통스럽든 얼마나 아픈 것을 피하고 싶어 하든 상관없이 우리에겐 질병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 책의 과제는 바로 이 필요를 표현하는 것, 그리하여 질병을 축하할 수 있는 말들을 찾는 것이다. - P32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지 배웠어야 했지만, 취약함을 부인함으로써 나는 오히려 더욱 취약한 상태로 남았다. 우리는 취약한 생물이고, 인간들은 바로 이 취약함을 공유함 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희망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취약함을 부정하기보다는 받아 안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취약함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을 때만 또렷하게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또렷하게 분별한다는 것은 저곳이 아니라 이곳에서 돌아다니길 선택하는 일 이상이고,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희망하는 일 이상이고, 저것이 아니라 이것을 사랑하길 선택하는 일 이상이다. 또렷하게 분별한다는 것은 어디서, 무엇을, 누구를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 모든 활동의 한가운데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돌아다니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런저런 선택을 좇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일 때 더는 건강에 - P39
의존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심장전문의의 진료실에서 나올 때의 나는 어떻게 혹은 왜 그러한지를 이해할 만큼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해가 미처 다 가기도 전에 나는 배우게 된다. 충만한 삶을 산다는 측면에서는 아픈 사람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음을,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의지를 발휘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하고 증명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건강이 필요하다. 반면 아픈 사람은 자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의지를 전혀 행사하지 않아도 세계가 이미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은 자유롭다. 하지만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다른 회복을, 사고에서의 회복이 아니라 질병에서의 회복을 배워야 했다. - P40
정치인과 의사들은 ‘의사 쇼핑‘ 같은 말을 써가며 여러 의사를 전전하는 행동을 지탄하지만, 신경을 긁는 비난이며 표현 자체도 모욕적이다. 내가 세 번째 의사를 ‘쇼핑‘해서 다른 의견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 P46
암이라는 말을 듣는 경험은 어땠을까? 미래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들은 다시는 못 볼 얼굴들로 변했다. 비현실적이지만 완전히 현실인 악몽 속을 걷고 있는 듯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리 없어. 하지만 일어나고 있었고, 계속 일어날 것이었다. 내 몸은 바닥이 없는 모래 수렁으로 변했고 나는 자신 안으로, 질병 안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P49
내 병은 통증을 밤과 연결했다. 종양이 몸을 장악하면서 통증은 정신을 장악했다. 통증이 빚어낸 고립과 외로움은 어둠 속에서 더 커진다. 아픈 사람이 평화로이 몸을 눕힌 사람들에게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한밤중, 통증 속에 있는 사람의 세계는 더는 하나로 붙어 있지 못하고 조각나 떨어져 나온다. 통증 때문에 조각나는 듯한 경험을 쓰다 보면 모든 것이 부서지는 듯하던 느낌이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언어는 쉬이 빗나간다. 앞에서 나는 통증 속에서 보낸 밤들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질병을 알게 됐다고 썼다. 하지만 이 비유는 경험을 왜곡한다. 내가 얼마나 질병에 얼굴을 주고 싶었든 간에, 다시 말해 얼마나 질병을 일관성 있게 표현하고 싶었든 간에 질병은 어떤 존재가 아니다. 질병에 얼굴을 주고 싶은 마음이 어둠 속에서는 더욱 커지기 때문에 나온 비유일 뿐, 질병에 얼굴이 있다는 말은 경험을 더 조각내고 뒤섞는다. 내가 한밤중에 마주한 것은 나 자신이었을 뿐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에 장악됐다고 느낄 때 인간이 흔 - P53
히 보이는 반응은, 위협이 되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통증을 ‘그것‘으로, 신으로, 싸워야 하는 적으로 만든다. ‘그것‘이 사악해서든 아니면 우리 잘못으로 ‘그것‘이 진노를 일으켜서든 우리는 통증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저주하고 그것이 자비를 베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지만 통증에는 얼굴이 없다. 통증은 밖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통증은 바로 내 몸,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신호를 보내는 내 몸이다. 통증은 몸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몸이지, 외부에 있는 어떤 신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니다. 통증과 씨름하는 일은 몸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몸이 몸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통증을 전부 내 몸 안에 있는 내 것으로만 본다면 몸 안에 고립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리고 고립은 조각나 부서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건강할 때 몸은 질서정연하고 주위 환경에 조응하며, 몸 부위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작동한다. 누웠을 때 몸은 편안함을 느끼면서 휴식하고, 깨어날 때는 활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휴식과 활동이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리듬은 통증 속에서 사라지고, 그러면서 계획과 전망도 사라지며, 과거와 미래가 서로 맞물려 있을 - P54
때는 이해할 수 있었던 삶 또한 사라진다. 조화는 붕괴하고 조각난다. 조화란, 한밤중 다른 사람들이 잘 때 함께 자고 함께 휴식하는 것이다. 함께 쉬지 못하고 불려 나오면서 아픈 사람은 조각나 떨어져 나오며, 무엇보다 삶의 자연스러운 주기라는 온전함을 상실한다. 하지만 여기서 또다시 나의 언어는 삐끗한다. 아무것도 나를 잠에서 불러내지 않았다. 몸의 통증 때문에 일어났고, 통증을 의식하며 혼자 깨어 있으면서 자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아픈 사람이 겪는 추방당하는 듯한 경험은 통증과 함께 시작한다. 조화롭게 통일되어 있다는 감각 안에서만 통증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수 있다. 이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아픈 사람은 자신이 떨어져 나온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 통증 때문에 깨어 있던 밤들에 아내를 깨울 수도 있었다. 아내를 불러내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하고, 그래서 혼자 외로워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캐시를 깨웠다면 자연스러운 주기에 맞춰 흘러가기에 조화로운 그녀의 일상을 훼손했을 것이다. 캐시는 여전히 낮 동안 일하고 밤에는 잤다. 그녀의 삶에는 내 삶에서는 사라진 질서가 있었 - P55
다. 자연스러운 주기 바깥에 있던 나는 낮에는 너무 피곤해서 일할 수가 없었고, 밤에는 등을 망치로 치는 듯한 통증 때문에 잘 수가 없었다. 야행성도 주행성도 아니고 어느 쪽의 존재도 되지 못한 채로 일상의 바깥에 머물렀다.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역할을 다하지 못했고, 부재하고 있었지만 부재하는 이유를 전부 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제자리가 아닌 곳에서 삶을 살고 있었다. - P56
왜 캐시를 깨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아직 절반만 답했다. 다른 절반의 이유는 캐시의 잠이 내게 유일하게 남은 질서였기 때문이다. 더는 다른 사람들이 휴식할 때 함께 쉴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족의 휴식이 소중했다. 나는 잘 수 없었지만 여전히 아내의 잠은 아껴줄 수 있었다. 그녀의 수면을 방해했다면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나중에 더 심하게 아프게 되었을 때는 밖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움직일 수 있는 그들의 능력과 그들 몸 안의 자유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소중히 여기길 바랐다. - P57
중요한 것은 통증이 할 일을 했다는 것, 다시 말해 다른 의사를 만나보게 했다는 것이다. 주치의가 잡아놓은 비뇨기과 진료일이 됐을 때는 이미 수술도 받고 화학요법도 한 차례 받은 후였다. 통증은 원래 나를 돕기 위해 생겨났다.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내 몸, 그것이 바로 통증이다. - P58
표현할 수 없는 통증 속에서 아픈 사람은 고립되며, 입을 다물면서 추방되었다고 느낀다. 어떤 형태로 표현되는 일단 표현된 말은 다른 사람을 향한다. 곁에 아무도 없을 때라도 그렇다.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표현함으로써 아픈 사람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각자의 집에서 평화롭게 잠자고, - P59
나는 내 집에서 아름다운 무언가를 보았다. 여전히 혼자였지만 나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함께였다. 조각나는 듯한 경험을 쓰기가 어려운 것처럼 다시 조화속에 있다고 느꼈던 경험도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 말이 조화로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통하고자 하는 시도만으로도 아픈 사람은 조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시의 단어 하나하나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표현하고자 했을 뿐이로, 표현이 조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시를 ‘보기‘ 위해 창문이 필요했다. 그리고 본 것을 다른 사람들의 세계 안에 두기 위해,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세계 안에 내가 있을 자리를 되찾기 위해 나에게는 그 시가 필요했다. 소중히 하는 마음에 관해서는 좀 더 쉽게 쓸 수 있다. 가족들은 잠들어 있었고 그들의 잠은 내게 소중했다. 통증 때문에 깨어 있던 밤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가족의 휴식은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런 마음 때문에 통증은 견딜 만해졌다. 질병과 통증은 삶을 조각내지만, 사는 이유를 모두 빼앗겼다고 혹은 사는 이유가 막 사라질 참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다시 조화를 발견하곤 하며, 그렇기에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창에 비친 아름다움을 본 그 밤에 통증은 덜 중요했다. 내 몸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이 아 - P60
니라 내 몸 밖으로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잠도, 그 창도 소중했다. 이렇게 아끼는 마음이 다시 모든 것을 조화롭게 했고, 그래서 나 자신도 계속 소중히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창문에서 본 것을 모두 이해할 만큼 심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언어는 오직 나중에야 경험을 따라잡는다. 하지만 그 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소중하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 P61
사람들이 애도와 관련해 겪는 문제는 대부분 상실이 겹쳐서 생기기보다는 상실한 사람이 그만 슬퍼하길 주변에서 바라기 때문에 생긴다. 의료진, 가족, 친구 등 모두가 질병에서 비롯된 상실이든 죽음에서 비롯된 상실이든 아픈 사람이나 돌보는 사람이 최대한 빨리 상실에 적응하길 바란다. 아픈 사람이 슬퍼하다 보면 치료가 늦어질 수도 있고, 한편으로 슬퍼하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는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이 상실을 그리 대단치 않은 일로 정리하고 잊은 다음, 건강한 보통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라고 압력을 가한다. 전문가들은 적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나는 애도가 ‘긍정하는 일‘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 질병이나 죽음 때문에 사라진 것을 애도하는 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긍정한다. 상실이 그저 뒤돌아 나오면 되는 사건인 양 단순하게 다룰 때만 ‘신속한 적응‘을 말할 수 있다. 이 말은 상실 - P68
한 무언가를, 상실한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는다. 아픈 사람이 그때껏 함께 살아온 자기 몸과 헤어질 때, 또 돌봄을 주던 사람이 돌봄을 받던 사람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울 때 시간을 두고 충분히 애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충분히 애도한 후에야 한 사람은 상실을 통과하여 다른 편에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어떤 의미에서는 아프기 전의 젊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도 하다고 앞에서 썼다. 나는 젊은 나에게 전하고 싶다. 상실을 충분히 슬퍼하고, 당신이 슬퍼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찾으세요. 당신이 잃어버린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피해요. 이런 사람들은 당신이 느끼는 상실을 사소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상실과 비교하거나 곧 익숙해질 거라고 말하죠. 많은 것이 당신에게서 사라지고 있을 때 아무도 이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상실은 당신 경험의 일부이고, 당신에겐 슬퍼할 권리가 있어요. 질병은 삶의 모든 부분이, 상실조차, 경험할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슬퍼하는 일은 당신이 잃어버린 것을 소중히 하는 일과도 같아요. 상실감마저 소중히 여길 때 삶 자체를 소중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다시 살기 시작할 거예요. - P69
스포츠의학 전문의와 초음파검사를 한 의사가 마침내 내가 얼마나 아픈지 확진을 내렸을 때, 두 의사의 태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한 사람은 내게 힘을 주고 돕고자고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진단은 거의 같았지만, 스포츠의학 의사는 내게 상황을 전해주면서 자신도 그 상황 안에 함께 있었던 반면 초음파검사 의사는 평결을 내리듯 진단을 선고했다. 차이들은 증식한다. 똑같은 메시지라고 해도 환자마다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떻게 전달되느냐에 따라 똑같은 내용이 두 개의 다른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 P74
차이가 인식되어야 돌봄이 가능하다. ‘암 환자에게 해주기 적당한 말‘ 같은 것은 없다. ‘암 환자‘는 포괄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다른 시작 지점을 갖고 각자의 질환에서 비롯되는 사건들을 따라가면서 다른 경험을 할 뿐이다. 의학이 환자를 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진단 범주는 질환에 쓰이는 것이지 질병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이런 범주는 치료에는 유용하지만 돌봄에는 방해가 된다. 아픈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차이와 독특함을 인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구별하는 데는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차이를 파악하려면 아픈 사람과 맺는 관계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야 한다. 반면 일반론은 시간을 아껴준다. 사람들을 범주 안에 집어넣으면 효율적이며, 범주 개수가 적을수록 더 효율적이다. 모두에게 다 맞는 ‘원 사이즈‘의 옷처럼, 같은 범주에는 같은 치료법을 쓰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료는 돌봄과 똑같지 않다. 치료 제공자들은 효율성과 돌봄 사이에 균형을 찾으려 애쓰기보다는 환자에게 마음쓰고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내어 책임을 모면한다. 이 환상은 ‘단계 이론‘ 같은 것에 기반을 둘 때가 많다. 이런 이론에 나오는 핵심 용어들은 환자의 심리 상태를 기술하면서 환자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치료 제공자에게 알려준다. - P75
가장 유명한 단계 이론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이론으로, 죽음을 앞둔 사람이 겪는 경험을 설명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죽어가는 사람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단계를 거쳐간다. 퀴블러 - 로스의 원래 의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이론은 사람들이 경험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경험을 분류하는 데 사용된다. 이 이론에 나오는 용어들은 개인의 질병 경험에서 어떤 점이 특별한지 보게 하는 대신, 사람들이 거리를 둔 채 "예상대로 환자분은 지금 분노를 겪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또 아픈 사람이 왜 분노하는지 묻는 대신 분노를 ‘그저 지나가는 단계‘로 여기게 한다. 그리고 이미 예상한 대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픈 사람의 분노를 ‘모두들 겪는 무엇‘으로 일축할 수 있다. 어떤 경험을 진짜로 만드는 것은 경험의 특수하고 세세한 부분들이다. 한 사람의 분노나 슬픔은 다른 사람의 분노나 슬픔과는 너무도 달라서, 이 감정들을 같은 이름으로 부르면 각 사람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오히려 덮인다. ‘분노‘든 ‘슬픔‘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말이든 이 단어들은 한 사람의 경험을 알려주기보다는 가린다. 이런 식의 이론이 인기를 끄는 현상은 놀랍지 않다. 실제 경험은 수없이 많은 모 - P76
습으로 나타나며 각기 다른 결을 갖지만, 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산 경험에 자신이 연결되지 않고도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해하고 있다는 이러한 환상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 오기까지한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단계 이론은 대단한 가치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귀중할 수 있다.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은 아픈 사람에게 의미 깊다. 나는 암 진단을 받고 두려움에 떨었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공포가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알자 위안이 됐다. 혼란스럽고 우울했을 때도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 역시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내가 겪는 공포, 혼란, 우울함이 특별하다는 느낌, 또 나만의 것이라는 느낌이 덜해졌다. 하지만 돌봄공자의 입장은 다르다. 돌보는 사람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공포가 전부 그만의 것이며, 어떤 ‘단계‘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공포 단계를 지나고 있을 뿐‘이라는 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마 아픈 사람이 가장 원치 않는 일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겪는 일임을 - P77
알 때 개인이 느끼는 공포는 줄어들지만, 예상되는 단계라는 이유로 공포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공포가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도 한 번 일어난 감정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는다. 위중한 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후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움은 지구 상의 인간들이 모두 다른 만큼이나 각기 다르다. 주위에 가족들이 모여 있길 원하는 사람도 있고,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즉각 의학의 도움을 받길 바라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 치료받을지 시간을 두고 결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환자의 경우는 치료를 서두르는 것이 의사로서 돕는 일이고, 또 다른 환자의 경우는 의사가 뒤로 물러나 있는 게 돕는 일일 때도 있다. 돌봄 제공자에게는 아픈 사람이 자기 필요를 표현할 방법을 찾도록 지원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결국엔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과 돌봄 제공자가 줄 수 있는 것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픈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알아내도록 돌봄 제공자가 도와야 한다. 돌봄 제공자가 전문가든 가족이든 친구든 마찬가지다. 그래야만 돌보는 사람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과 아픈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절충할 수 있다. - P78
아픈 사람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돌봄 제공자가 "무엇이 필요하세요?"라고 묻는다고 해서 답이 나오지는 않으며, 일관된 답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진단받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삶은 이미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여러 면에서 바뀌었고, 위중한 질병을 앓는 동안 변화는 계속된다. 그리고 변화가 계속된다는 점이 ‘위중함‘의 일부이기도 해서, 심하게 아픈 사람은 변해가는 자기 자신의 필요조차 따라잡기 힘들어한다. 아픈 사람은 분명 무언가가 필요하지만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다. 환자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전부 다 실수였다는 말, 이것 하나일지도 모른다. 환자분 검사 결과에 이름이 잘못 붙어 있었네요. 오, 전 괜찮습니다, 정말로요. - P79
어쩌면 아픈 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예 말로 표현하려 애쓰지 말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필요를 발견할 때까지 아픈 사람은 자신을 그저 놔두고 주위 사람들은 아픈 사람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닌가 한다. 나는 ‘돌봄 제공자caregiver‘라는 이름을, 아픈 사람의 말을 듣고자 하며 아픈 사람 개개인의 경험에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에 한정해서 쓰려고 한다. 돌봄은 분류하기 위한 범주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제대로 된 돌봄은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다른 점이나 특별한 점을 인식하며, 그래서 돌봄을 받는 사람은 자기 삶이 귀중히 여겨진다고 느낀다. 우리에게 사람들 - P80
을 분류할 권리는 없지만 특권이 하나 있다. 바로 각자가 얼마나 고유한지 이해하는 특권이다. 돌봄 제공자가 이 고유함에 마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픈 사람에게 어떻게든 전할 때 아픈 사람의 삶은 의미 있어진다. 나아가 아픈 사람의 인생 이야기가 돌보는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되면서 돌보는 사람의 삶도 의미 있어진다. 돌봄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일에서 분리할 수 없으며, 이해가 쌍방향으로 일어나야 하듯 돌봄도 대칭을 이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우리는 자신 또한 돌본다. 그렇지 않다면 소진되거나좌절하고 말 것이다. 의료인 대부분에게는 돌보는 사람이 될 시간이 없다. 또 그럴 의향이 없는 사람도 많다. 의료진은 치료를 제공하며 치료 제공은 돌봄 제공만큼이나 중요하지만, 둘은 아주 다르다. 아픈 사람을 저버리지 않고 곁에 남는 가족조차 돌보는 사람이기보다는 서비스 공급자가 될 때가 너무도 많다. 돌보는 사람이 마주하는 질병 경험은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질병 경험이란 오히려 공포, 불확실함, 두려움, 부정, 혼란을 뒤섞은 다음, 여기에 ‘거래하기‘를 급히 첨가한 잡탕 같은 것이다. 캐시는 내가 어떤 진단 가능성이나 치료 가능 - P81
성을 다른 가능성과 저울질해보고 혼자 거래하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며칠이고 들어야 했다. "그걸 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걸 해도 괜찮겠어."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아픈 사람은 사실 거래할 거리도 없으며 거래할 상대도 없음을 깨닫는다. 또 외로움도 찾아오고, 그다음에 자신이 누구고 자기 인생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의심이 찾아오고, 우울과 뒤섞인 희망이, 다른 사람들과 닿아 있고 싶다는 욕망과 뒤섞인 분노가, 자기 일을 스스로 해내고 싶은 마음과 뒤섞인 의존 상태가 찾아온다. 앞에서 말한 내용은 어느 아픈 사람 한 명이 느꼈던 감정의 ‘잡탕‘을 보여줄 뿐이지만, 그래도 내 요점을 다시 확인해준다. 바로 경험을 몇몇 범주로 나누는 말들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고통이나 상실 같은 용어는 이 말이 아픈 사람 자신의 경험으로 채워질 때까지는 실체가 없다. 아픈 사람의 경험에서 고유함을 목격하고 차이를 전부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돌봄이다. - P82
아픈 사람은 자기 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둘 모두에 잘 대처하려 애쓴다. 하지만 환자가 되어 의사들이 몸을 접수하면 의사들은 그 몸을 환자의 삶에서 분리해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의학이 이해하는 통증은 아픈 사람의 경험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통증을 겪는 사람은 모든 것이 조각나고 뒤죽박죽되고 있다고 느낀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려워지고 일도 하기 힘들다. 자기가 있을 자리가 어디인지 감각이 희미해지기 때문에 다시 제자리를 찾기 위해 애써야 한다. 반면 의학은 통증이 삶에서 갖는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통증은 질환의 증상일 뿐이다. 의학은 아픈 사람의 통증 경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치료법이나 관리법에만 관심을 둔다. 의학은 분명 몸에서 통증을 줄여주지만, 그러면서 몸을 식민지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의학의 도움을 구하면서 맺는 거래 조건이다. 치료 경과가 좋을 때는 수동적인 환자로 있을 만한 가치가 있다. 병이 난다면 나는 환자가 되고 싶다. 의사를 피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질병이라는 드라마에서 의사들이 무대 중앙을 독차지하게 내버려두는 것도 위험하다. 의사를 거부 - P87
하면 당장 몸이 위험해질 것이고, 의사들이 드라마를 차지하도록 둔다면 그들은 질환이 이야기의 전부가 되도록 각본을 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의사는 "이건 조사가 있어야겠네요"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무대 중앙을 차지하고 이후 이어질 드라마의 각본을 짰다. 내 몸 안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그저 수동적으로 관람만 하도록 객석으로 보내졌다. - P88
의사와 간호사들이 환자에게 감정을 보이고 친밀하게 대하길 바란다기보다는 그들이 인정하길 바란다. 질병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과거의 내가 힘든 경험을 통과하며 배운 소중한 사실이다. 이 과거의 나는 말해주었다. 암을 앓는다는 건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질병을 겪고 죽음을 무릅쓰는 것, 거의 죽어가다가 삶으로 다시 돌아와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아는 채로 삶을 다시 시작하는 - P89
것 모두,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처음엔 병 때문에 몸이 변하고, 다음엔 병을 낫게 하려고 받는 수술과 화학요법 때문에 몸이 변하는 것 또한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심각한 질병은 여행자를 인간 경험의 가장자리로 데려간다. 한 발짝만 더 내디뎌도 아픈 사람은 돌아오지 못할 수 있다. 나는 이 여행이 인정받길 원한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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