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이반지하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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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is an orphan. A survivor."
그애는 고아야. 생존자라는 말이지.

나는 저 대사가 참 좋았다. 어린 여자 체스 상대에 대해 당대 최고의 마스터가 긴장해야 하는데, 그 이유가 ‘생존자‘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훅 흔들렸다.

피해자에서 생존자가 되는 것은 무척 존엄하게 느껴지지만, 이 사회가 실제로 생존했다고 해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보상을 주지는 않는지라, 그 생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피해자를 생존자라는 단어로 대치하는 것이 도리어 ‘정말 생존했는가‘를 되묻게만 하는 것 같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 말을 <퀸스 갬빗>에서 저런 맥락으로 들으니, ‘생존자’라는 말이 가슴 중간에 팍 꽂혀, 가슴을 펴고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또 생존자라는 말이 상대방을 이토록 위협할 수 있는 요소라는 것에 아주 천진한 쾌감을 느꼈다. 근원조차 알 수 없는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 그 자체로 살아남았다, 그 사람은 생존자야―라는 - P12

쓰임이 나에게 새삼 낯선 울림을 주었다.
세상아, 너는 두려워해야 할 거야. 나는 생존자거든―그런 태도.

그럼에도 〈퀸스 갬빗〉을 보는 내내 나는 주인공이 강간당할까봐 걱정했다. 미디어 시청자로 살아온 경험적 통계로 미루어보아 몇 번의 강간 모먼트가 있었기 때문에, 악― 이제 나온다 하며 그만 볼 준비를 하다가 말다 했다. 여러 명의 남성 체스 전문가 동료들이 주인공을 ‘돕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로 얘를 ‘실력자로 성장시켜주려는 의도‘였다는 게 놀라웠다. 재능 있는 여자를 진심으로 도우려고 하는, 재능 있는 우리 남성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화면에서 그것이 구현되는 장면을 본다는 건 딱 구태의연한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새삼 잊고 있었던 오랜 장롱 속 페미니즘의 먼지를 털며, 이렇게 강간당하지 않는 잘난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픽션/논픽션을 계속 보는 삶을, 도무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주인공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계속 실험해나가는 걸 보는 것도 좋았다. 성욕을 느끼고 표현하고 거절하고 이용하고 등등. 강간당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보통 이러면 - P13

사회로부터 성性적으로 크게 혼나곤 하는데, 이 시리즈에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니까 잘난 여자를 감히 혼내지 말자. 제발 좀 그르지 말자.
버릇이 나쁘다 싶어도 제발 좀 내버려두자. 구린 구석 없이 정정당당하게 도와도 주자.
이토록 심플한 메시지를 전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빨리 깨닫도록 하자.
생존자는 살아남은 자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She is an orphan. A survivor.
Losing is not an option for her."
그애는 생존자야. 애초에 질 생각이 없어.

아니, 러시아 체스마스터 보르고프도 무서워한다고, 이 양반들아. - P15

생존자 조심해라. - P17

검열을 당한다는 것은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대단히 생산적이거나 발전적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속의 장기와 세포 하나하나까지를 양말 까뒤집듯이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검열은 잔인하다. 검열하는 쪽은 간편하되 당하는 쪽에서는 정말로 내가 당당한 피해자인지를, 내 쪽에 정말로 한 점의 원인 제공도 없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잔인함의 핵심이다. 검열은 저쪽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그걸 지속하는 것은 이쪽, 나 자신이 된다는 것 말이다. - P47

잘라서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평생 살려고 하면 너무 힘들잖아요. 일 년만 살아보자, 한 달만 더 살아보자, 일주일만 더 살아보자. 하루만, 한 시간만, 십 분만, 일 분만…… 그렇게 가는 겁니다.
_<월간 이반지하> 4호 - P60

언제부터였을까. 미디어에 등장한 누군가를 보며 ‘저 사람, 저 정도 상황이면 죽고 싶겠다‘라고 생각하면, 별안간 그 사람이 정말로 죽은 채 떠올랐다. ‘죽을 만큼 괴롭겠다‘ 혹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면, 며칠 혹은 몇 달 후, 그는 정말로 죽음이 되어버리곤 했다. ‘어, 맞아‘라고 답하듯 곧 맥없이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죽을 만한 일에 실제로 죽어버리는 것‘을 이렇게 계속 목격해도 되는 걸까. 죽을 법한 일 다음에 죽음이 이어지는 것은, 왜 이토록 그럴 법하게 여겨지지 않는 걸까. 왜 이토록 그 인과가 부당하다 느껴지는 것일까. 죽을 법한 일들은 왜 계속 생기며, 왜 끝끝내 죽음까지 봐야 속이 시원한 듯 구는 것 - P70

퀴어 친구들은 일단 ‘살기‘부터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살았으면, 행복하게 살았으면, 이런 생각보다
일단 우리 생명 유지부터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1호 - P74

남들은 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못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1인분의 삶을 내가 온전하게 독립적으로 당당하게 살아낸다. 물론 중요한 이슈죠. 독립해야 한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잘살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 1인분을 다할 수 있었으면, 사회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때는 0.8인분, 또다른 상황에서는 내 깜냥으로 1.5인분을 할 때도 있는 거예요. 간병하거나 누군가를 돌볼 때는 자기 몫의 1인분을 더 할 때도 있고. 그렇게 얽혀서 사는 것이지, 지금 당장 내가 1인분인가 아닌가 꼭 그렇게 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순간순간 관계에 따라서 내 역할도 계속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요새 ‘당당‘ ‘독립‘ 이런 말들이 신자유주의랑 만나서 굉장히 자본의 기준에서만 해석되는 것 같거든요. 미디어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그 틀에만 비춰서 나를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11호> - P123

아직도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가 살아온 얘기가 궁금할 테니 그것을 쓰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읽혀야 할까. 살아온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근데 또 그 ‘어쩌라고‘가 예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승낙한다.
예전부터 제2차세계대전 이야기에 끌렸다. 책이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그때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내가 궁금한 것은 크고 작은 전투나 정치적 움직임이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낸, 여러 층위의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선정성에 대한 뒤틀린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나는 꼭 한 가지가 궁금했다. 도대체 왜 그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지. 그러니까 경험한 것만으로 충분히 고통이었을 그 일을 왜 또 꺼내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이 정말로 의미를 갖는지, 그들이 그 이야기를 마쳤을 때,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 떠나버린 시간을 이야기한 자 - P128

들은 또 버텨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인간이 버틸 수나 있는 것인지. - P129

이 말했다. 왜 자꾸 그 기억을 그리는 줄 아나요? 왜냐고 묻자 그는, 다룰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맞는 얘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종이 위에 기억을 잡아두려는 시도, 그 맹랑한 시도 자체가 마치 그 기억을 종이에 국한시키려는 행위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면 마치 그 기억이 그 종이만해지기라도 할 듯한, 그런 착각. 하지만 맹랑해서 그 나름대로 위대할 착각. 그런 착각 없이는 삶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어서.
확실히 그 말에 대해 생각하면서부터 내가 그날 밤을 그려대는 것에 대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다. 그리고 이후에 곱씹는 여러 행위들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씹다보면 씹힐 것 같아서, 오독오독 씹다보면 절단이라도 될 것 같아서, 나눠 삼킬 수가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런 착각을 하려고, 그렇게 그것을 보내버리고 새 착각을 맞이하려고, 착각 없이 환상 없이 살기에는 던져진 삶이 너무 가혹하다.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의 트라우마를 설득하는 글을 쓰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끌러놓자마자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든 것은 나의 망상이라고, 다 내가 지어낸 - P133

이야기라고 말할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것이 나의 경험과 감정에 대한 것이라면, 그런 것은 질리도록 겪어왔다. 말을 꺼내면, 그 말을 증명해야 할 것 같다. 증명하지 못하면 없었던 일이 되곤 했다. 나는 아마 그래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나보다. 최근 들어 사람들이 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냐고 많이들 물어왔는데, 나는 별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결국 이래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 P134

집에서 과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과거에 갇힐까봐 두려워진다. 그것이 아주 조금, 혹은 반 정도만 갇히는 것이라도. 그래서 자꾸 엄두가 안 났고, 엄두를 내지도 않았다. 쓰다가 잠깐 새로운 공기를 쐬어야 할 때, 그 순간 아무도 만날 수 없다면 어떡하나. 누구도 나를 과거에서 끌어올려주지 않고 말 그대로 각자의 상황에 격리되어 있다면, 나는 글에서 - P146

못 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하지만, 나올 것이다. 나오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건드리면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닐까.
위장에 껍질째 들어가 있는 성게를 꺼낸다고 생각해보자. 성게를 꺼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게는 꺼내지면서 끝끝내 위장부터 입안까지를 모조리 훑고 헐어내면서 나올 것이다. 그래, 꺼냈으니 이제 성게가 없다, 라고 하기에는 이미 내 속은 성게의 흔적이 완연하다못해 피를 펄펄 흘릴 것이다. 그 피는 왠지 철철보다는 펄펄이다. 끓어나오는 피일 것이고, 또 그 피는 피대로 내부 장기를 덮어 계속해서 안쪽 면을 태울 것이다.
애초에 성게가 껍질째 위장에 들어가는 일 같은 것이 없었다면 제일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나버린다. 원하고 원하지 않았고 따위는 처음에나 원망조로 따져보는 것이지, 나중이 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들어가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성게를 꺼냈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온몸은 성게에게 훑어진 후니까, 그 이전의 상황 같은 것은 다신 없는 것이다.
당신은 이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 P147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정말 있었던 일이라는 걸 스스로 전혀 의심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특히 끔찍한 기억일수록 나와 주변은 그것을 잊고자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마치 살 만한 삶들인 것처럼 착각할 - P159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잊힌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살고 견디고자 하는 가냘픈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내가 보라색 사람이었다는 것을 깜빡하거나, 정말로 그런 일이 나에게 있었나 생각할 때가 있다. 그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망각이기도 하고, 그 기억을 꿈처럼 여기려는, 삶에서 그런 일은 정말 드문 것이라고 믿어보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 P160

보라색은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 피부 표면에 머물렀다. 그날의 그 시간은 나의 일상과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어서, 완전히 잊혔다가도 샤워를 하거나 옷을 갈아입으려고 할 때면 나는 ‘아, 맞다‘ 했다. 엉덩이나 옆구리에서 새로운 보라 - P162

색을 갑자기 발견하기도 했다. 기억하는 것과 잊는 것, 그 어떤 것도 그 일과 완전히 걸맞지는 않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 사이에서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듯이. - P163

처음 살아보는 반지하방은 처음에는 처음이어서 딱히 대단한 불만이 생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웬만한 것은 다 그러려니 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어쨌든 정신적으로 학교나 집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대단찮게 느껴졌다.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곳이 작업실이 아닌 본격 생활공간이 되자, 괴로움이 갈수록 커져갔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화장실 타일과 벽지였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정말로 화장실 타일과 벽지였다. 왜 싫었나, 왜 견디지 못했는가 묻는다면, 사실 그것을 정확하게 어떤 이유다, 라고 설명하긴 힘들다. 당시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정확히 어떤 무늬와 색감, 텍스처가 미칠 것 같았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화장실 타일과 벽지가 나를 매일 절망하게 했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벽지와 타일에 둘러싸이게 된 이삶이, 집을 나온 것이, 정확히 나의 선택이었기에 나는 탓할 - P166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물론 나를 나오게 만든 상황에 대한 분노와 원망도 어마어마했지만, 결국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나와 가족의 조합이었다. 가족만, 혹은 나만 존재하면 됐을 텐데 왜 이렇게 묶여 나와서 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을까. 그런 조합, 소위 말하는 팔자, 그런 것들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화장실 타일과 벽지를 보면서 울곤 했다. 그리고 작게 딸려 있는 베란다에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차서 큰 캔버스 그림들이 젖을 때마다 몸에 차곡차곡 절망이 쌓이는 것을 느꼈다. 캔버스를 뽁뽁이로 싸두긴 했지만, 결국 이것이 그림에 곰팡이를 만들 거라는 생각에 비가 올 때마다 초조하고 화가 났다. 나는 그때 집을 관리한다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고, 미술 작가로서 작품을 이고 지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직 잘 몰랐다. 그 당시 알고 지내던 한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림에 핀 곰팡이를 보고 나서 정말 그것만은 막고 싶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려고 하다가 멈칫하게 되는 때가 있다. 왜냐면 그 그림들은 내 공간에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유통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려지지 않 - P167

은 이 그림이 유통되기 전까지 이고 지고 살 자신이 있는가, 그런 것을 스스로 되묻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 대단한 욕구가 각종 이성적 셈들을 이겨먹었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렸고, 악기를 샀고, 이사할 때마다 추가비용을 내야 하는, 이삿짐 아저씨들과 집주인에게 핀잔 듣는 ‘여자‘가 되었다. 삶은 계속 그림을 버리는 게 이치에 맞다고 귀에 대고 끊임없이 얘기해주긴 했다.
그다음에 살 집을 보러 다닐 때는, 이사를 나가 가구가 없는 집을 보면 그냥 다 넓고 깔끔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집 보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커튼은 너무 비싸서 화방에서 전지를 사다가 창문에 더덕더덕 붙였다. 덕분에 매일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웠다. 무엇에다 돈을 써야 삶이 만들어지는지, 삶의 질이라는 게 올라가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도 살아 있는 것임을 몰랐다. 집도 사람처럼 계속 관리해주고 부족한 부분은 집주인에게 요구해서든 내가 직접 수리해서든 써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걸 전혀 몰라서 마냥 견디거나 비참해했다. 으레 외부먼지가 쉴새없이 들어오고 으레 냄새가 나고 으레 빗물이 들어오고 으레 몸이 무거워지는 그런 상태.
그래도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정적이 너무 행복해서 - P168

가끔 현관에 주저앉아 한참 그 정적을 놓칠세라 음미하곤 했다. 고함과 비명이 없는 집은 정말로 큰 의미가 있었다. 집에 뭐가 있느냐보다 뭐가 없는지가 훨씬 중요했던 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으레 여자처럼 보이는 인간의 삶이 다 그렇듯, 밤마다 누군가가 집에 침입해서 나를 내려다보는 상상을 하고, 자주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런 두려움은 비싼 비용을 치르게 했다. 나의 건강이 되었든 집의 위치가 되었든, 문과 창문의 잠금장치가 되었든, 어쨌든 끊임없이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별별 희한한 구조의 집이 많이 있었다. 변기 위에서 샤워를 하는 집은 처음 봤을 때도 충격이 컸지만, 살아보니 삶의 질을 말도 못하게 망가뜨리는 구조였다. 샤워를 하기도 변기를 쓰기도, 또 당연히 그 공간을 청소하기에도 불편한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집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흔했다. 이런 집을 보여줄 때마다 부동산 아재들은 아 이거 그렇게 안 불편하다고, 괜찮다고들 주접을 떨곤 했다. 하긴 내가 갖고 있는 예산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안 불편해해야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고, 내가 이 돈을 갖고 와서는 매일 밤 샤워를 편히 하려고 했다니, 그래요, 미 - P169

안하게 됐습니다.

좋은 집은 콘센트가 필요한 곳에 딱딱 있는 집이었다. 컴퓨터 주변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많은 멀티탭이 필요하지 않은ㅊ집. 하지만 집을 쪼개고 쪼개서 월세방을 만든 집들은 대부분 뜬금없는 곳에 콘센트가 있어, 항상 멀티탭을 여기저기 대주어야 했다. 게다가 전자레인지는 멀티탭에 꽂으면 무조건 전기가 나가버리곤 해서, 온전한 콘센트 하나를 할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멀티탭은 언제나 몇 번의 곁가지를 치며 구석구석 배치되었다. 놀랍게도 멀티탭들은 전기도 공급하지만 먼지도 틈틈히 저장하는 매체였다. 하얀 선들은 또 얼마나 쉽게 꾀죄죄해지는지, 정말 그런 식으로 더러워져야만 하는 건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꽂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져만 갔고, 집안 곳곳에 뻗친 선들은 마치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결계처럼 집 전체를, 내 삶을 둘러싸 딱 여기까지다, 라고 외치는 듯했다. - P170

물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이 그렇게 문제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필요라는 건 상황 따라 적당히 창조해내거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으려면 그 비용을 정직하게 감당해야 할 뿐이다. 부동산이랄지 기억이랄지 뭐 그런 거 말이다. - P174

부모의 집을 나오며, 나는 다시는 내가 원목협탁에 걸맞은 - P175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불구덩이 같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그 많은 필요와 필수 중에 하필 협탁을 가져가기로 했을까. 집을 떠나면서 협탁을 들고 나오는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반복되는 플라스틱과 MDF 사이에 원목협탁이라도 하나 있어주면 내가 떠나온 것들에 대해, 지금이 아닌 삶에 대해, 딱 원하는 만큼만 감정적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뭔가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것이 존재한 적 없었던 나의 격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또 기능이 아닌 취향이나 추억으로 갖고 있는 가구 하나쯤은 삶이 허락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사치를 무리하게 누려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 P176

안분지족 같은 거 하지 마. 필요 없어.
존나 사치스러운 마음으로 살아.
_<월간 이반지하> 5호 - P177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내가헤테로인지 레즈인지 바이인지모르겠다. 그래서 제발 알고만 싶어, 내가 뭔지. 내가 무성애자인지, 로맨틱 에이섹슈얼인지 알고만 싶어. 그러니까 초조한 거예요. 이걸 내가 결정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누구한테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건 아니잖아요. 이것에 대해 초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다들 쪼금씩 이상한 데가 있고 남들과 다르잖아요. 기본적으로 사회가 말하는비정상성에 우리가 걸려 있어도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_<월간 이반지하> 6호 - P181

근데 이 코로나 상황이 참기 힘든 핵심적인 이유는 뭐냐면, 모든 사람들의 상황 해석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이 다른 데에 있다. 이것은 수년 전 내가 잠시 절에서 생활했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절에서도 속세처럼 각종 단속을 받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듣는 말은 바로 "절에서는 그러면 안 돼" 이다. 이 말은 약간 만능 문장처럼 모든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활용한다는 점이 백미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를 단속하고 무한히 배려하다가 결국 사람들은 돌아버리는데, 지금 코로나 상황도 좀 그렇다. 각자의 ‘안 돼‘가 많은데 그게 또 각각의 맥락으로는 합당해서 어쩌란 말이냐 분통이 터진다! 존나 통제! 근데 통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작금의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 - P235

고, 나는 그저 산다. 살아야 한다.
그 말인즉슨, 억지 휴식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앞에 뭐든 쓰고 ‘~시대‘라고 붙이면 꽤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주제에 시대를 꿰뚫는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시대는 동시대의 누구도 뚫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네가 맞이해야만 하는 뼈아픈 진실임을 인식하도록 하자. 부디 시대를 꿰뚫지 말자.
그러므로 어허 조금씩들 물러나서 억지 휴식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오늘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과 일 사이에 일어나는 휴식이 그냥 휴식이라면, 억지 휴식이란 굳이 뭘 만들어내서 휴식을 취한다 이 말이다. 집이 아닌 장소를 예약해서 낯선 곳에 굳이 굳이 가서 쉰다거나, 일처럼 휴식 스케줄을 미리미리 만들어놓는 일을 (내가)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 짓 없이는, 이 통제와 조심조심적 일상을 영위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한강에 가서 강을 보며 마스크를 벗고 앉아 있는 것 정도로는 더이상 쉬는 것 같지가 않아져버렸다. - P236

세월은 무섭지. 세월 그 새끼가 무섭지. 그런데 저는 나이 얘기는 이젠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옛날에는 이런 얘길 들으면, 어차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기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근데 진짜 별 의미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전염병의 시대를 살다보니깐 내가 젊든 늙든 당장 내일의 일을 알 수가 없잖아요.
내가 내일 죽을 거야? 그럼 나는 지금 존나 늙은 거지.
그런데 50년 후에 죽을 거야? 그럼 나는 존나 쌩쌩하지.
그런데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다? 없다!
만약 젊고 늙은 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일단 내 남은 삶에선 오늘이 제일 젊잖아요? 오늘 해라!
그러니깐 마음 가는 대로들 살어. 왜냐하면 내 맘이 뭔지 아는 것도 너무 힘들기 때문에.
_<월간 이반지하> 8호 - P244

나도 나 자신이 싫지, 그런데 나는 또 나잖아. 나를 견뎌야 되는 거지. 이 삶을 살아야 하잖아. 너는 니로 태어난 이상 너를 견뎌야 돼. 이런 너를 견디는 것이 너의 길이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어요. 관계의 다이내믹 속에서 누구나 당연히 잘못할 수 있죠. 다 다른 존재니까. 근데 나를 견뎌야 합니다. 항상 착한 일만 하지 않는 나 자신도 견뎌야 그것이 정말 ‘으른‘으로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_<월간 이반지하> 9호 - P250

저는 삶의 가변성, 랜덤성에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 같은 것도 우리가 전혀 예상한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저는 노후뿐만 아니라 미래라는 것이 과연 대비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의 유희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영속적인 것은 없고, 저는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코로나 록다운으로 힘든 시기에 자기계발하는 사람들 있거든요. 지금이 기회다! 취업 대비 공부하고…… 적당히 해. 이미 황인종으로 태어났으면 끝이야. 이미 경쟁에서 한참 뒤처졌으니까 우린 그냥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2호 - P261

우리 남성 친구들은 어떤 말을 해도 평생 누군가가 받아주고 들어줬거든요? 그래서 설득력이 약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요. 그냥 아무 말이나 뱉어도 다 들어줬거든요. 그런데 우리 여성 친구들은 어떻습니까. 목숨걸고 말을 해왔죠. 두드리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여성 친구들 언어 능력이 왜 발달하겠어요? 안 들어주니까. 그래서 여성 친구들 이야기가 조금 더 논리정연한 경향이 있죠.
_<월간 이반지하> 5호 - P265

하지만 결국 어떤 시대적 부름도 시대에 가려 결국 잘 안 들리기 마련이라, 어떻게 대충 잘 적당히 알아서 맘대로 나는 가려 하오. - P323

식물에게 마음을 주고 키우다보니, 이들은 식물원에서 데려올 때처럼 완벽하게, 허투루 자란 곳 하나 없이 그렇게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 P328

식물인지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기본 생장 이후부터의 생은, 어중간하고 뭐라 이름 붙이기 애매한, 그 못난 중닭의 연속인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잎과 줄기들을 보면서 무엇이 곁가지인지 고민하다 말다 했다. 전체 화분의 균형감을 생각하면서, 매일 가장 예쁜 단면을 찾아 입체인 화분을 빙글빙글 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깨닫고 만 것은 그냥 이 불완전함 자체가 너무나 완전한 아름다움 그 자체라서, 도저히 이대로 전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분을 약 30도씩 돌려보면서 어떻게 놓아야 가장 시각적 쾌감이 있는가를 혼자 조율하다보면, 다시 말해 화분을 멀리서 봤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조금 돌리고 또 나와서 보고를 무한히 반복하다보면, 결국은 그냥 항복이다! 지금 맞는 각도를 찾았다 싶더라도 내일이면 뭔가 또 미세하게 균형이 깨져 있다. 그래서 또다시 돌리고 돌리다보면, 아!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영원히 맞출 수 없는 것을 맞추려고 하는 무모함과 무용함. - P326

나는 분명 완연한 중닭이었다. 그리고 발레를 했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중닭스러움이 싫었기에 중닭의 아름다움시도 보지 못했다. 중닭은 너무 과하거나 모자라서, 가려지지 않지만 필시 가려야만 하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성의 다른 이름으 - P327

로서의 중닭이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 같은 것은 없으며 영원히 여기저기 삐걱거릴 것이라서, 그래서 이 시간 축에서 다시 오지 않을, 그 모든 나사 빠진 순간을 끌어안음이 중닭이라면, 그런 고유함과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 중닭이라면.
그 중닭의 아름다움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때부터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균형을 향한 몸부림은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연히 어떤 성장과 노화의 아귀가 들어맞아 몸이 클래식하게 써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가능한 완전함을 위해 도전하고 완전히 실패하는 것, 그런데 그 실패가 실은 모두 각각의 클래식임을 받아들이는 부분 말이다.

나는 예술에서 중닭의 아름다움이 진하게 느껴질 때 완전히 매혹된다. 영원히 도달하거나 완성하지 못할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앞에서 못난이를 숨기지 않은 채 대놓고 ‘나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소! 나는 중닭이오!‘ 하고 튀어나온 그 아름다움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다 바로 이런 중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식물 화분 돌리기를 지속하며 매번 가장 최고의 균형을 찾는 데 실패하고, 그 실 - P328

패에 대해 "아, 오늘도 역시"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중닭일 것이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매 순간의 중닭스러움에 대해 약간의 위로와 그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남겨보는 것이다. - P330

아무튼 얘네는 큰다. 내가 어떤 마음이든 간에 그냥 자기들이 태어난 대로, 생겨먹은 대로 제 속도로 그렇게만 자란다. 가끔은 약간 나한테 엿먹어라 하는 느낌으로, 여봐란듯이 큰다는 노낌도 있다. 하지만 우리집 식물들은 자신들의 그런 생장에 어떤 미안함이나 송구함도 내비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게 매력포인트인 것 같다.
처음엔 기가 막히지만, 너무나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다 깨부수면서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삶에서 나는 그냥 ‘보는 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나는 애초에 - P335

그 생에 관여할 자격이 없었으며 그저 보는 것 정도나 겨우 껴들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예고도 빚지지 않은 채, 어떤 껄끄러움도 없이 순정하게 지 할 일만 하고 사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순간들을 필연적으로 놓치게 되어 있다. 겨우 따낸 보는 자의 위치에서도, 실상 모든 순간을 보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환경적 세팅 이외에는 어떤 공유도 약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둘 수 있는 그들이 그곳에다. 식물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거친 성장을 하고 있는 그들의 에너지가 있다. - P336

작가로 사는 것은 평생을 희망고문에 시달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하고 적체되어만 가는 그림들을 목도하는 시간들은, 또 그것이 이사를 할 때마다 정확한 비용으로 환산되어 청구되는 일은, 창작으로 생산된 것들을 계속 이고 갈 것인지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까지가 내 몫임을 끊임없이 인지하게 되는 이 직업은. - P338

저는 기본적으로 ‘창작자라고 해서 미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그런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은 좀 얇고 길게 하면 됩니다. 관계든 직업이든 뭐든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저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창작자로 살다보면, 그게 마치 직업이라기보다는 소명이라든가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될 때가 있는데요. 저는 사실은그런 순간에는 좀더 직업적으로 생각해보면 좋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창작을 그만둔다는 게, 지금여기 사연에서도 너무 비장하게 그러잖아요. "친구가 진지하게 그만둘 생각을 한다. 물론 당연히 하던 걸 그만두면 일반 직장이든 뭐든 걱정도 되고 큰 변화이긴 한데, 제 생각은 그래요. ‘그.럴.수있.다‘라는 거죠.
그림을 그리다 붓을 꺾었다? 아니에요. 그냥 회사 다니다 때려치운 거예요.
기억해야 할 건, 근데 언제든지 또 그걸 다시 할 수 있다는 거. 힘들면 좀 쉴 수도 있고, 딴 일 좀 할 수도 있고, 그게 무슨 순수함을 - P342

더럽힌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사람들은 내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너무 어려서, 또 여러 가지 상황이 안 좋아서 새로운 걸 시작하지 못하겠다. 혹은 하던 걸 못 그만두겠다, 이런 말들을 하죠. 근데 그런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아요. 언제든 갈등도 있고 부딪치는 문제도 있고 그런 거죠. 창작이 힘들면 그냥 쉬면 되는 것 같아요..
일도 창작도 대단히 연속된 커리어를 쌓아야지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한국 사회에서는 고정된 커리어나 소속을 갖고 있는 걸 당연히 여기다보니까, 초등학교 다니면 중학교 가고, 중학교 다니면 고등학교 가고, 이 선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사실 그런 계단은 환상에 가깝잖아요. 사실은 다 지그재그고, 커브고. 그래서 저는 그냥 그만둘 수도 있고 하고 싶을 때 또 하면 되고 그러면 좋겠어요.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면서 상황이 객관화되는 게 있거든요.
죽을 때까지 해야 되는 일은 없어요. 죽을 것 같으면 안 해야 돼요.
한 사람의 창작 과정이나 삶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판단할 순 없어요. 그런데 저는 기본적으로 다 해도 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그게 이 사회가 우리에게 안 주는 메시지인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네 인생은 다 더럽다.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가지고 거기에 깃발 꽂고 이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이것저것 두드려보고. ‘아, 이거 아닌가?‘ 그럼 또 접었다가 딴 거 하고. 좀 - P343

치사하게 살아도 괜찮다 이 말이죠.
저는 존버의 시간도 고통이 담보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존버가 말 그대로 존나 버티는 건데 그 존나가 ‘존나‘ 아니고 그냥 ‘재밌게‘ 버틸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요소를 계속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우리, 오염된 상태로 같이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순수하지 않게. 다 섞이고.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_<월간 이반지하> 2호 - P344

정말 기묘한 외로움이었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만들자 존재는 더욱 존재하기 위해 떠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봄과 더불어, 남겨진 자기 자신을 견디는 것까지가 만든 자의 몫이 된다. - P350

그냥 나로 사는 건데, 퀴어로 산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운동적 측면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마음대로 살 거예요. 그게 포인트예요.
그냥 끝까지 재밌게 살고 싶어요.
_<으랏파파> 인터뷰 - P351

다 해도 됩니다. 페미니스트 종류 되게 많습니다. 슈퍼마켓 같은 거예요. 자유롭게 맘대로 사십시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괜찮아, 별일 아냐.
_<월간 이반지하> 4호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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