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노동자를 만나러 가면, 인터뷰 장소에 아르바이트·계약직·정규직 직원이 나와 있었다. 청년이라 불리는 세대를 만났고, 고졸 학력 취득자와 대학원생, 서울 사람과 ‘지방‘에서 올라온 사회초년‘생‘을 보았다. 오직 자신의 성정체 - P12
성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외적인 몸의 형태를 말하다가 질환 이야기가 나왔고, 직장 문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나이와 서열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노동을 말할 때, 여자와 남자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자가 아니어도, 남자가 아니어도, 다른 무엇이거나 그 무엇도 아닐지라도 세상은 그들을 여자/남자로 호명했다. 치마를 입었을 뿐인데 세상은 ‘여자 옷‘을 입었다고 했다. 이들은 맞지도 않는 여자/남자 옷을 입고 일터로 갔다. 그 모습이 눈에 밟히면서도 반가웠다. 마피아 게임에서 고개를 들어 또 다른 마피아와 눈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밤이 되었습니다.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 - P13
나를 둘러싼 규범이 언제 어디에서든 내 몸에 꼭 맞을까. 퀴어를 경계에 선 사람 혹은 경계 밖에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기 전에 그 경계가 대체 어디에 그어졌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 곳에 서야 ‘정상인‘일까.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다. 또한 ‘정상‘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무수히 많은 정체성이 내 몸에 겹쳐 삶으로 표현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쪽과 저쪽을 철저하게 나눈다. - P14
"애인 있습니까?" 단 여섯 글자로 이뤄진 질문이 이토록 힘을 갖는다. 질문 하나 받았을 뿐인데 누군가(남성)는 한 가정의 부양-책임자로서 책무를 되새긴다. 누군가(여성)는 출산과 육아라는 자신의 역할을 떠올린다. ‘본래‘의 자리를 두고 ‘잠시‘ 일터로 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 P37
나는 다르구나. 그는 동성애자(게이)였다. 이제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 - P46
다. 동시에 ‘다르지 않음‘도 연기하는 중이다. - P47
외모지상주의 사회라 하지만, 외모는 고움과 미움만으로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다. 얼마나 잘 관리하고 계발했는지가 가치의 기준이 된다. 관리된 외모는 그 자체로 경쟁력이 있을뿐 아니라 다른 자원들 또한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는 보증으로 여겨진다. 다이어트 성공이 절제, 성실, 끈기를 상징하는 반면, 살찐 몸의 동의어는 의지박약인 것처럼 말이다.
탈락을 거듭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여자처럼’ 입고 말하고 행동하는데도 성별에 적합한 외모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젊음이 없다.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젊음을 전제로 한다. 여자가 꾸민다고 해서 ‘여자 꾸밈‘이 될 수는 없다. 여성(꾸밈)이라는 범주는 좁다. 가부장제 사회는 그 범주를 좁히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여성‘이라는 표준 상에 어긋난 이들은 쉽게 ‘여성‘이란 이름을 빼앗긴다. 여성 장애인은 이 사회에서 여성일까. ‘아줌마‘도 여자가 아니라는 사회다. - P77
지하 세계 저 아래쪽에는 ‘이모님‘ 혹은 ‘고모님‘이 있다. 십수 년이 흘러 이모님 호칭이 붙는 나이가 되면 그제야 세상은 외모 압력에서 이들을 놓아준다. 대신 다른 것을 내놓으라 한다. 여자가 아닌 ‘어머니‘의 역할(이성애 대상이 될 수 없는 여자는 친족 관계로 강제 편입된다). 후덕함의 상징인 살집이 허용된 이에게는 돌봄노동이 적합하다고 한다. ‘모성을 가진 여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에 더 낮은 임금이 주어진다. 마치 외모 규범의 중력이 작용하듯 고용 시장은 ‘그녀‘들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 P78
수화기 너머의 고객은 오직 자신을 응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평가를 내놓는다. 돌이켜보면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실시간 고객평가가 도입될 때, 노동조합 등 노동계가 얼마나 반발했는가. 일하는 사람을 옥죄는 일상적 업무평가는 비난받을 만하다. 그러나 겉모습을 두고 색안경 낀 평가를 수시로 - P79
당해온 마늘 입장에서 수화기 너머 고객평가는 공정함의 상징 ‘블라인드 테스트‘와 다를 바 없다. - P80
라인이 멈추면, 남성 정규직 관리자와 친하게 지내던 하청업체 직원들이 움직인다. 이들은 여자다. 업체에서 가장 ‘어린‘ 채연도 "끌려간다. 웃어주고 비위 맞춰주다보면 라인 멈춘 것이 없던 일이 된다. 좋은 말로 하면 이것도 능력이다. 사회성이고 인맥이다. 노동 현장에서 성별화는 단지 누가 볼트를 조이고 누가 무거운 짐을 드는가로 정해지지 않는다. 말하고 웃는 모든 순간이 이성애 규범에 따른 노동이 된다. - P103
마음껏 소진시킬 수 없어 ‘무능력‘이란 타이틀을 얻은 몸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소진시키기 좋은 몸이 있다. 쓸모를 증명받기 위해 계속적으로 제 몸을 소진해야 하는(그것을 기대받는) 성별, 효율 좋은 노동자를 원하는 기업은 어떠한 질환도 없는 신체 건강한 노동자를 선별해(채용 건강검진) 입사 - P109
시킨다. ‘가슴도, 호르몬도, 육체도 없는‘ 노동자는 기본값이 된다. 병가나 임시휴직 등 보장제도가 단발성이거나 현실에서 무용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남성 노동자는 ‘육체가 없다고‘ 취급할 수 있어서 선호된다. 그러나 육체 없는 노동자는 없다. ‘건강한‘ 남성 직원이 열 정적으로 쓸모를 증명해도 쉽게 소진되지 않는 까닭은 그가 타인의 노동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를 먹이고 입히는 ‘집안의 노동자‘, 아내, 어머니, 여자 형제가 있다. 취업 면접장에서 여성들이 ‘여자 냄새‘를 지우겠다고(비혼, 비출산) 답해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기업에게도 ‘집안의 노동자‘는 소중하다. 기업은 누가 최종적으로 비용을 부담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 P110
여성들은 대표적인 공적 공간이라는 일터에 꾸준히 진출하지만, 그곳마저 끝내 공적 영역이 되지 않는 경험을 한다. ‘본디 여자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말이 그녀들의 발목을 잡는다. 반면 남성이 존재하는 곳은 그 어디건 공적 영역이 된다. 심지어 그곳이 은밀하고 사적인 장소일지라도, 접대의 향연이 벌어지는 룸살롱도, 사내 흡연 구역도 마치 비밀 장소처럼 보이지만,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이 이뤄지는 일은 빈번하다("회의에서 결정된 게 없는데도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면 다 결정된 것처럼 이야기 나오는 거"), ‘출입금지‘를 붙인 것도 아닌데 특정 성별만의 공간이 된다. 사내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는 여성조차 찾을 수 없다. 여성 흡연 인구가 100만 명이라는 통계가 무색하다. - P114
여성의 노동은 보이지 않음에도 어디에나 존재해야 했다. 노동시장은 여자들을 필요에 따라 내쫓거나 비정규직으로 만들기는 해도 아예 내몰진 않는다. 여성 노동은 ‘쓸모‘가 있다. 문제는 그 쓸모가 ‘하위‘ 노동으로서의 쓸모라는 것. 집안의 노동자이자 경제 상황에 따라 임시노동으로 사용되는 편리한 쓸모는 산업예비군(실업군이자 예비노동력)으로 존재해, 사장님들에게 "너 말고 일할 사람 많아" 같은 대사를 선사한다. 노동의 위계란 쓸모에 따라 나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위계가 먼저 존재하고 거기 맞춰 쓸모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 - P117
다. 위계를 나누기 위해 쓸모의 차이를 부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설 보수/정비 기능이나 고객 서비스 업무가 부차적인 일로 인식된 것은 기업들이 ‘아웃소싱(외주화)’ 할 업무를 선별하면서부터였다. "박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박해일 뿐이네, 고문의 목적도 고문이고 말일세." 조지 오웰이 말한 대로다. "권력의 목적도 권력 그 자체"이고 위계의 목적도 위계다. 위계에 따라 쓸모가 나뉜다. 그러므로 여자/남자로 구분되지 않은 몸은 쓸모가 없다. 다양한 색을 가진 몸은 위계와 비용을 매기는 데 혼란을 줄 뿐이다. 혼란을 주는 몸은 입장 자체가 차단된다. - P118
누군가를 배제하고, 누군가를 위계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유지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최면 걸린 삶을 살아낸다. 잘 버틸 수 있다고 믿는 당신 옆에,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쓸모와 ‘정상‘의 문턱을 넘어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성소수자들이 있다. 이들은 ‘퀴어‘로서 지니는 빨강, 주황, 노랑……의 색을 버리고 세상이 칠한 색으로 존재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다. 존재하기 때문이다. - P119
하늘은 자신을 여자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읽어내지 않는 회사에 다닌다. ‘성별‘에 따른 기대와 역할이 고스란히 하늘 - P123
의 업무로 치부된다. 그 노동에는 남자 직원보다 더 친절하게 말해야 하고 성을 뗀 이름으로 불리고 손님이 오면 다과를 내오는 싹싹함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을 ‘읽어내는 방식‘에는 ‘성별‘이 있다. 그런 읽어냄이 우리의 노동을 규정한다. - P124
어리게 취급받는 주요한 이유가 ‘여자‘라는 성별 자체임을 알기에 ‘여자 모습‘을 털어내려 한다. 성공한 상사의 표준 모델은 남성이다. - P127
여성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모른다 해도, 또는 알게 된 후 어떤 감정을 갖게 될지는 몰라도, 둘 사이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주로 사무직 이야기겠지만) 일터에서 생존하기 위해 비슷한 방법을 사 - P130
용한다는 점이다. ‘쇼잉showing‘ 하고, ‘적응‘하고, ‘경계‘에 선다. ‘쇼잉‘이란 "일을 ‘열심히 하고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래야 성과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남성 동료에게 밀리지 않는다. 의욕적인 모습만 보여서는 안 된다. 여성 직원에게 기대하는 품성인 친밀과 배려까지 제공해야 한다. 세심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명랑한 모습으로 연출이 필요하다. "○○ 씨가 오니까 사무실이다 밝아지네" 같은 말을 듣는 노동이다. 과장된 노동은 성소수자들의 전략이기도 하다. 존재를 숨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일만 해서는 안 된다. 성과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 "자를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일하는 티를 낸다. 누군가의 표현으로는 ‘나댄다‘. 나서는 동시에 정체성을 들킬까봐 움츠린다. 애매하고 모순적인 상황에 자신을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누군가 전력질주를 해서 80을 하면 나는 최소한 100이나 그 이상은 하자라는 주의로 해요. 그러니 항상 피곤해요. 왜냐면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단지 ‘잘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밤이 되면 자리에 누워 떠올린다. 혹시라도 ‘존재‘가 밝혀졌을 때 사람들이 자신에게 지을 표정을, 다음 날 회사에서 더 꼼꼼히 일을 챙긴다. "일을 더 잘하려는 게 있는 거 같아요. 나중에 제 정체가 - P131
밝혀졌을 때, ‘쟤가 그거라서...…‘라는 생각은 무의식적으로라도 눈곱만큼도 안 들게 하고 싶어요." (...) 이들은 온전히 적응하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채 ‘경계에 선다‘. 동료이자 ‘꽃‘이면서 ‘여자애‘이고 ‘꼬맹이‘인 ‘여자‘, 그러나 동시에 ‘여자‘여서는 안 되는 여자(사내 스캔들, 성폭력 피해자인 여자). 이 많은 이름들 사이를 헤매는 여성 직원들 옆에, 패싱으로 ‘퀴어‘와 ‘정상‘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성소 - P132
수자들이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라는 무게를 모두 짊어진 채 일해야 하는 이도 있다. 어쨌거나 모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 P133
상사는 ‘또라이‘로 치부되는 동시에 ‘형님‘이 된다. 형님 연대가 굳건해지는 사이 여성들은 배제된다. 그 위계의 밑바닥에 ‘어린 여자‘ 직원이 있다. 그 옆에서 말 못할 비밀을 가진 성소수자는 자신이 선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쓴다. - P134
프리터로 살아간다는 규원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말하고 잘리면 그만이니까". 무엇을 말하면 잘리나? ‘나란 사람‘이다. - P154
정체성으로 인해 빚을 진다. 밥벌이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는 내내 자주 들은 단어는 ‘빈곤‘이 아니었다. 진짜 빈곤하면 인터뷰조차 할 수 없다. 빈곤에 갇힌다. 마음 내서 인터뷰를 한다 해도 가난이라는 것은 남에게 쉽게 보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대신 자주 들은 단어는 ‘운‘이었다. "운이 너무 작용하는 거 같아요",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지인 덕에 직장을 구하게 된 것도, 커밍아웃 후에도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는 것도 ‘운이 좋아‘라고 표현됐다. 운이 자꾸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시스템의 부재를 말해준다. "운이 너무 작용한다"는 말을 처음 들은 건 청소년 성소수자에게서 - P156
였다. 학교에서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폭력과 징계의 대상이 될지, 그냥 넘어갈지, 이해받을지 알 수 없다. 오직 ‘운‘에 달렸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떤 교사와 친구를 만날지는 복불복이다. 학교가 성소수자 학생을 대하는 매뉴얼을 갖고 있지 않기에, 모든 것을 ‘운‘이 결정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을 내세운 차별을 금지하는 법적 제도가 우리 사회에 없다. 커밍아웃 이후 발생하는 일터 괴롭힘을 예방할 수 있는 교육이나 내부 규약도 없다. 해고, 괴롭힘, 불이익을 피했다면 그것은 ‘운‘의 작용이다. 제도와 안전망이 없을 때 운이 거론된다. 그리고 또 하나. ‘운‘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운이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정성별이 남성이거나 표현성별과 지정성별이 일치해 패싱이 가능한 몸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운‘은 운이 아니다. 운이라 표현되는 또 하나의 자원이다. - P157
생의 모든 비용이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취업 준비 기간은 ‘적합한 노동력‘이 되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시간의 비용을 오롯이 개인이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사회에 입장하려면 성별 정정은 필수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수술비 전부를 개인이 지불하는 일은 당연한가. 우리 삶의 다른 무수한 비용들도 마찬가지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본다. 무엇이 삶을 지원받을 ‘자격‘을 만드는가. - P161
지금도 인생이 우울한 시기에는 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자격을 묻는 쌀밥앞에 당당할 만큼의 기운이 없을 땐 굶는다고 했다. 혐오의 세상에서 자신을 긍정하고 사는 일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요한다. 도대체 살아갈 ‘자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 자격이 ‘존재‘ 자체는 아닌게 분명하다. ‘정상‘으로 태어나자마자 ‘공동체‘에 속해 공짜성원권을 받을 것 같은 이들도 사실은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사회는 존재할 자격을 자꾸 쓸모로 증명하게 했다.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공들여 사들인 것을 우리는 ‘스펙’이라 부른다. 모든 것이 비용으로 치환되는 시대. 면접장 입장권 하나를 얻기 위해 20~30대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너무 크다. 젊음을 갖다 바쳐야 한다. - P162
마늘은 말했다. "내 나름대로 삶을 살 거고, 상황에 맞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내 모습을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살 거"라고. 비슷한 말을 몇 번이나 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마늘이 아무리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살 것이라 이야기해도, 이득을 보는 쪽은 그 자신이 아닌 것 같다. 마늘이 덧붙인 말 때문이다. "회사는 이익이 우선인 곳이고, 내가 회사에 이익이 되는 사람이라면 나를 자르거나 하진 못할 거예요." 마늘은 ‘내가 잘했다면‘ 같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해고될 위험을 염두에 둔 채 일한다. - P170
마늘과 또래들은 고용 절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라는 자본(상품성)을 확대해 위기를 극복하는 중이다. 배워온 대로.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발생할 (고용)불안마저 유용성으로 극복하려 한다. - P171
능력은 성소수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고 - P174
용을 유지하고, 협상력을 발휘하고, 동료와 관계를 맺게 하는 숨쉴 구멍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터는 진공 상태가 아니다. 몸의 자산에 영향받지 않은 능력이란 없다. - P175
하나의 경제 주체로, 선택도 성취도 실패도 모두 개인의 몫이라 하는 사회지만 아무래도 밑지는 기분이다. 마늘이 왜 자신에게 그런 선택(콜센터 취업)을 했는지 묻지 않느냐고 했지만, 물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선택‘이라 말하기에 의심스러운 지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마늘에게 콜센터 일밖에 주지 않으면서, 콜센터 안팎에서 개인의 능력을 활용해 살아보라 한다. 마늘이 감당하게 된 결과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자신을 기계로 대하는 직장에 마늘은 ‘공정‘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기계는 가동만이 존재의 이유. 가동은 점점 빨라지고 기계는 고장났다. 마늘은 야간근무를 하다가 건강을 해쳤다. 노동은 중단됐다. 마늘이 그곳에서 능력으로 승부를 보려 했을 때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콜센터 업체는 능력주의를 가동할 자원이 없다. 2000년대 이후 기업들은 고객서비스 - P175
업무를 외주화했고, 그 덕에 크고 작은 콜센터 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15년 사이 생겨난 콜센터만 1,000여 개, 3만여명에 달한다는 종사자 대부분은 여성,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할 수 없다. 콜센터 업체가 원하는 것은 능력자가 아니다. 일회용 노동을 원한다. - P176
잦은 이직은 자칫하면 실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도 퇴사를 선택한다. ‘일반‘ 세계에서 도무지 행복하지 않아서다. - P179
문식의 진짜 삶은 회사 바깥에 있다. 주말이면 지방 도시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일이 잦다. 사람들한테는 대학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문식은 주말이면 퀴어 행사에 참석한다.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하고 있다. 인권활동을 하려면 업무와 책임이 늘어나선 곤란하다. 이직으로 낮은 지위를 유지할 생각이다. 그러나 만년 대리로 있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몇 년단위로 회사를 옮겨 다닌 이력을 면접관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재취업할 때마다 경쟁력은 계속 낮아질 것이다. - P180
쉬운 일은 아니다. 수연은 스트레스로 인해 협심증까지 앓았다. 직장 동료들과의 적대와 화해 과정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해당 논문의 연구자는 트랜스여성 노동자인 수연이 "고통을 감내하며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젠더실천의 범위를 협상적으로 확장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성소수자들은 숨어 있거나 피해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일터와 사회에서 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협상하고, 적응하고, 요구한다. "상황에 맞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변모시킬 것이라 했던 마늘의 말 또한 어쩌면 회사에 돈 벌어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를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져오는 ‘협상‘의 주체로 살겠다는 말. 적어도 이를 시도해볼 시간은 확보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 P184
"지금 성소수자 노동자들이 가는 곳은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이직률 높은 곳. 수틀리면 떠난다는 생각이 강해요. 이들도 노조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해요. 그런데도 자기 인생에 노조는 없을 거라 생각해요. 주변에서 노조를 본 적이 없어. 노조가 있으면 좋지만, 자기 인생과는 별개 문제이고." - P189
비정규직이 노동조합 문을 두드리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짧게 머물 직장에서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는다.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할 때 사람은 관계를 맺고 무언가를 한다. 인터뷰를 한 성소수자들에게 자신의 노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쓰는 어휘는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의 답은 결국 "없는 노동"이었다. 없으니 성소수자들은 해고되지 않는다. 다만 불안정 노동자 한 명이 오늘도 직장을 잃을 뿐이다. - P190
성소수자들이 항상 겁에 질린, 불쌍한, 어딘가 문제가 있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일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만 그렇다고 숨죽여 일하지만은 않는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분투한다. 그렇게 고용을 지키고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협상력을 높이는 방법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 수도, 더 ‘정상‘ 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진짜 사나이‘의 질서에 뛰어드는 것일 수도, 퇴준생의 길을 선택하는 것일수도 있다. - P190
현실은 복합적인 장치로 구성된 무대라, 무엇이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고 무엇이 정체성에서 비롯된 차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직장인 남성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여성은 능력이나 책임감이 없다고 말하고, 직장인 여성은 육아와 직장일을 분리할 수 없는 성 역할의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불평등과 무능력은 현실에서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그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평등하지 않은 구조를 인식하는 힘이다. 공정에 대한 감각만으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성소수자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성소수자로 차별받은 적 없는데요. 회사에는 숨기고 다녀서요" 정도의 답변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제 성소수자 직장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퀴어인 걸 사람들이 모르잖아요. 그게 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차별을 자각할 때 차별적 요소를 없앨 수 있다. 지난 시기 차별을 제기하고 제도로 규제하려는 움직임(그것을 운동이라 부른다)이 차별을 자각시켰다. 차별을 제재하는 행동들이 동 - P192
등함을 만든다.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동등한 자격, 능력을 인정받을 자격, 해고되지 않을 자격 등 그 어떤 자격도 공정한 평가로만은 얻어지지 않는다. 직장 내 구성원들을 동등하게 하는 여러 장치들이 마련될때, 협상력은 현실적 힘을 가진다. 법과 제도, 조직 등 어떤 장치를 이용하는 개별적이지 않은 대응, 동등한 지위하에서의 협의만이 협상자로서 온전한 힘과 위치를 갖게 할 것이다. 이제 평등과 공정은 서로 구분되지 않을뿐더러 평등 역시 어딘가 낡은 단어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평등하지 않은 개별의 너와 나는 존재조차 인정받기 힘들다. - P193
"잘 사는 나이 든 트랜스젠더 한 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회에서 좋은 삶이라고 상상하는 여지가 넓어져야 하는 거 - P197
지요. 60대의 좋은 삶이라고 하면 돈 많은 삶밖에 안 떠오르잖아요. 살 만한 좋은 삶에 대한 이 사회의 상상력이 너무 좁은 거예요." 세상의 상상력은 빤하다. ‘비성소수자‘라 하더라도 흔히 떠오르는 노년의 모습은 파고다공원을 서성이는 외로운 노인이다(여성 노인이라면 손주를 돌보거나 박스를 줍는 모습이 떠오른다). 노년은 보통 두 글자로 상상된다. ‘빈곤‘ 또는 부양‘, 부양할 사람이 없으면 빈곤해지는 거다. 그러니 노년의 다른 이름은 ‘부담‘이다. 특정 나이대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부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떠올리는 좋은 노년은 ‘돈 많은 삶‘일 수밖에 없다. ‘건강한 노후‘라는 주제를 달고 나오는 잡지를 펼치면 연금/보험 정보만 가득하다. 빈곤한 상상이 노년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생애주기 전반이 빈곤함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는 보호받고, 청소년은 학습하고, 성인은 결혼 적령기에 가정을 꾸려, 자녀를 낳아 키우고, 노년이 되면 그 자녀에게 부양을 받는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생애주기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일탈이다. - P198
3포는 누구의 기준에서 포기인가. "지금 20대 불안정 노동자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것‘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혼-육아의 포기는 기성세대가 안타까워하기 좋은 소재일 뿐이다. "좋은 직장을 얻은 후, 연애하고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은 전통적인 중산층 남성의 가치관이다." 지금의 20대는 ‘사랑만 있다면‘을 외칠 만큼 순진하진 않다. ‘낳으면 저절로 큰다‘는 말에 코웃음 친다. ‘즐거운 나의 집’은 강남 등지에 제법 평수 있는 아파트로 신혼을 시작할수 있는 이들의 로망일 뿐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에게 가장 큰 고통이 ‘3포’란 이야기는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연애-결혼-출산으로 대표되는 ‘가족‘은 ‘안정‘의 동일어이기 때문이다. - P200
우리 사회는 안정과 가족을 혼동해 사용해왔다("결혼해서 얼른 정착해야지). 모든 정서적 지원과 돌봄, 복지가 이뤄지는 곳을 ‘안정‘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딱히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섣불리 혼인신고서를 작성하지 않는다. 결혼에는 이 질문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소는 누가 키우냐." 자녀를 낳아 키우고, 부모를 부양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 모든 돌봄이 이뤄지는 공간에는 누군가의 노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 P201
문제는 자신의 삶을 다르게 서사화할 자원이 이들에게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몇 살 때쯤 결혼하고 육아하고 은퇴하고 저축하고 이런 계획이라는 게 있고 그것에 맞춰 사회적 제도들이 있고. 그에 따라 지원제도를 신청하고 포기하고, 이런 선택지들. 우리(퀴어)는 선택지 앞에서 막히는 부분이 많죠."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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