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 당신이 모르는,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3
희정 지음 / 오월의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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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노동자를 만나러 가면, 인터뷰 장소에 아르바이트·계약직·정규직 직원이 나와 있었다. 청년이라 불리는 세대를 만났고, 고졸 학력 취득자와 대학원생, 서울 사람과 ‘지방‘에서 올라온 사회초년‘생‘을 보았다. 오직 자신의 성정체 - P12

성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외적인 몸의 형태를 말하다가 질환 이야기가 나왔고, 직장 문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나이와 서열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노동을 말할 때, 여자와 남자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자가 아니어도, 남자가 아니어도, 다른 무엇이거나 그 무엇도 아닐지라도 세상은 그들을 여자/남자로 호명했다. 치마를 입었을 뿐인데 세상은 ‘여자 옷‘을 입었다고 했다.
이들은 맞지도 않는 여자/남자 옷을 입고 일터로 갔다. 그 모습이 눈에 밟히면서도 반가웠다. 마피아 게임에서 고개를 들어 또 다른 마피아와 눈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밤이 되었습니다.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 - P13

나를 둘러싼 규범이 언제 어디에서든 내 몸에 꼭 맞을까. 퀴어를 경계에 선 사람 혹은 경계 밖에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기 전에 그 경계가 대체 어디에 그어졌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 곳에 서야 ‘정상인‘일까.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다. 또한 ‘정상‘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무수히 많은 정체성이 내 몸에 겹쳐 삶으로 표현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쪽과 저쪽을 철저하게 나눈다. - P14

"애인 있습니까?" 단 여섯 글자로 이뤄진 질문이 이토록 힘을 갖는다. 질문 하나 받았을 뿐인데 누군가(남성)는 한 가정의 부양-책임자로서 책무를 되새긴다. 누군가(여성)는 출산과 육아라는 자신의 역할을 떠올린다. ‘본래‘의 자리를 두고
‘잠시‘ 일터로 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 P37

나는 다르구나. 그는 동성애자(게이)였다. 이제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 - P46

다. 동시에 ‘다르지 않음‘도 연기하는 중이다. - P47

외모지상주의 사회라 하지만, 외모는 고움과 미움만으로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다. 얼마나 잘 관리하고 계발했는지가 가치의 기준이 된다. 관리된 외모는 그 자체로 경쟁력이 있을뿐 아니라 다른 자원들 또한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는 보증으로 여겨진다. 다이어트 성공이 절제, 성실, 끈기를 상징하는 반면, 살찐 몸의 동의어는 의지박약인 것처럼 말이다.

탈락을 거듭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여자처럼’ 입고 말하고 행동하는데도 성별에 적합한 외모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젊음이 없다.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젊음을 전제로 한다. 여자가 꾸민다고 해서 ‘여자 꾸밈‘이 될 수는 없다. 여성(꾸밈)이라는 범주는 좁다. 가부장제 사회는 그 범주를 좁히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여성‘이라는 표준 상에 어긋난 이들은 쉽게 ‘여성‘이란 이름을 빼앗긴다. 여성 장애인은 이 사회에서 여성일까. ‘아줌마‘도 여자가 아니라는 사회다. - P77

지하 세계 저 아래쪽에는 ‘이모님‘ 혹은 ‘고모님‘이 있다. 십수 년이 흘러 이모님 호칭이 붙는 나이가 되면 그제야 세상은 외모 압력에서 이들을 놓아준다. 대신 다른 것을 내놓으라 한다. 여자가 아닌 ‘어머니‘의 역할(이성애 대상이 될 수 없는 여자는 친족 관계로 강제 편입된다). 후덕함의 상징인 살집이 허용된 이에게는 돌봄노동이 적합하다고 한다. ‘모성을 가진 여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에 더 낮은 임금이 주어진다. 마치 외모 규범의 중력이 작용하듯 고용 시장은 ‘그녀‘들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 P78

수화기 너머의 고객은 오직 자신을 응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평가를 내놓는다. 돌이켜보면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실시간 고객평가가 도입될 때, 노동조합 등 노동계가 얼마나 반발했는가. 일하는 사람을 옥죄는 일상적 업무평가는 비난받을 만하다. 그러나 겉모습을 두고 색안경 낀 평가를 수시로 - P79

당해온 마늘 입장에서 수화기 너머 고객평가는 공정함의 상징 ‘블라인드 테스트‘와 다를 바 없다. - P80

라인이 멈추면, 남성 정규직 관리자와 친하게 지내던 하청업체 직원들이 움직인다. 이들은 여자다. 업체에서 가장 ‘어린‘ 채연도 "끌려간다. 웃어주고 비위 맞춰주다보면 라인 멈춘 것이 없던 일이 된다. 좋은 말로 하면 이것도 능력이다. 사회성이고 인맥이다. 노동 현장에서 성별화는 단지 누가 볼트를 조이고 누가 무거운 짐을 드는가로 정해지지 않는다. 말하고 웃는 모든 순간이 이성애 규범에 따른 노동이 된다. - P103

마음껏 소진시킬 수 없어 ‘무능력‘이란 타이틀을 얻은 몸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소진시키기 좋은 몸이 있다. 쓸모를 증명받기 위해 계속적으로 제 몸을 소진해야 하는(그것을 기대받는) 성별, 효율 좋은 노동자를 원하는 기업은 어떠한 질환도 없는 신체 건강한 노동자를 선별해(채용 건강검진) 입사 - P109

시킨다. ‘가슴도, 호르몬도, 육체도 없는‘ 노동자는 기본값이 된다. 병가나 임시휴직 등 보장제도가 단발성이거나 현실에서 무용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남성 노동자는 ‘육체가 없다고‘ 취급할 수 있어서 선호된다. 그러나 육체 없는 노동자는 없다. ‘건강한‘ 남성 직원이 열
정적으로 쓸모를 증명해도 쉽게 소진되지 않는 까닭은 그가 타인의 노동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를 먹이고 입히는 ‘집안의 노동자‘, 아내, 어머니, 여자 형제가 있다. 취업 면접장에서 여성들이 ‘여자 냄새‘를 지우겠다고(비혼, 비출산) 답해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기업에게도 ‘집안의 노동자‘는 소중하다. 기업은 누가 최종적으로 비용을 부담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 P110

여성들은 대표적인 공적 공간이라는 일터에 꾸준히 진출하지만, 그곳마저 끝내 공적 영역이 되지 않는 경험을 한다.
‘본디 여자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말이 그녀들의 발목을 잡는다. 반면 남성이 존재하는 곳은 그 어디건 공적 영역이 된다. 심지어 그곳이 은밀하고 사적인 장소일지라도, 접대의 향연이 벌어지는 룸살롱도, 사내 흡연 구역도 마치 비밀 장소처럼 보이지만,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이 이뤄지는 일은 빈번하다("회의에서 결정된 게 없는데도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면 다 결정된 것처럼 이야기 나오는 거"), ‘출입금지‘를 붙인 것도 아닌데 특정 성별만의 공간이 된다. 사내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는 여성조차 찾을 수 없다. 여성 흡연 인구가 100만 명이라는 통계가 무색하다. - P114

여성의 노동은 보이지 않음에도 어디에나 존재해야 했다. 노동시장은 여자들을 필요에 따라 내쫓거나 비정규직으로 만들기는 해도 아예 내몰진 않는다. 여성 노동은 ‘쓸모‘가 있다. 문제는 그 쓸모가 ‘하위‘ 노동으로서의 쓸모라는 것. 집안의 노동자이자 경제 상황에 따라 임시노동으로 사용되는 편리한 쓸모는 산업예비군(실업군이자 예비노동력)으로 존재해, 사장님들에게 "너 말고 일할 사람 많아" 같은 대사를 선사한다.
노동의 위계란 쓸모에 따라 나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위계가 먼저 존재하고 거기 맞춰 쓸모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 - P117

다. 위계를 나누기 위해 쓸모의 차이를 부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설 보수/정비 기능이나 고객 서비스 업무가 부차적인 일로 인식된 것은 기업들이 ‘아웃소싱(외주화)’ 할 업무를 선별하면서부터였다. "박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박해일 뿐이네, 고문의 목적도 고문이고 말일세." 조지 오웰이 말한 대로다. "권력의 목적도 권력 그 자체"이고 위계의 목적도 위계다. 위계에 따라 쓸모가 나뉜다. 그러므로 여자/남자로 구분되지 않은 몸은 쓸모가 없다. 다양한 색을 가진 몸은 위계와 비용을 매기는 데 혼란을 줄 뿐이다. 혼란을 주는 몸은 입장 자체가 차단된다. - P118

누군가를 배제하고, 누군가를 위계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유지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최면 걸린 삶을 살아낸다. 잘 버틸 수 있다고 믿는 당신 옆에,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쓸모와 ‘정상‘의 문턱을 넘어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성소수자들이 있다. 이들은 ‘퀴어‘로서 지니는 빨강, 주황, 노랑……의 색을 버리고 세상이 칠한 색으로 존재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다. 존재하기 때문이다. - P119

하늘은 자신을 여자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읽어내지 않는 회사에 다닌다. ‘성별‘에 따른 기대와 역할이 고스란히 하늘 - P123

의 업무로 치부된다. 그 노동에는 남자 직원보다 더 친절하게 말해야 하고 성을 뗀 이름으로 불리고 손님이 오면 다과를 내오는 싹싹함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을 ‘읽어내는 방식‘에는 ‘성별‘이 있다. 그런 읽어냄이 우리의 노동을 규정한다. - P124

어리게 취급받는 주요한 이유가 ‘여자‘라는 성별 자체임을 알기에 ‘여자 모습‘을 털어내려 한다. 성공한 상사의 표준 모델은 남성이다. - P127

여성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모른다 해도, 또는 알게 된 후 어떤 감정을 갖게 될지는 몰라도, 둘 사이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주로 사무직 이야기겠지만) 일터에서 생존하기 위해 비슷한 방법을 사 - P130

용한다는 점이다. ‘쇼잉showing‘ 하고, ‘적응‘하고, ‘경계‘에 선다.
‘쇼잉‘이란 "일을 ‘열심히 하고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래야 성과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남성 동료에게 밀리지 않는다. 의욕적인 모습만 보여서는 안 된다. 여성 직원에게 기대하는 품성인 친밀과 배려까지 제공해야 한다. 세심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명랑한 모습으로 연출이 필요하다. "○○ 씨가 오니까 사무실이다 밝아지네" 같은 말을 듣는 노동이다.
과장된 노동은 성소수자들의 전략이기도 하다. 존재를 숨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일만 해서는 안 된다. 성과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 "자를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일하는 티를 낸다. 누군가의 표현으로는 ‘나댄다‘. 나서는 동시에 정체성을 들킬까봐 움츠린다. 애매하고 모순적인 상황에 자신을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누군가 전력질주를 해서 80을 하면 나는 최소한 100이나 그 이상은 하자라는 주의로 해요. 그러니 항상 피곤해요. 왜냐면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단지 ‘잘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밤이 되면 자리에 누워 떠올린다. 혹시라도 ‘존재‘가 밝혀졌을 때 사람들이 자신에게 지을 표정을, 다음 날 회사에서 더 꼼꼼히 일을 챙긴다.
"일을 더 잘하려는 게 있는 거 같아요. 나중에 제 정체가 - P131

밝혀졌을 때, ‘쟤가 그거라서...…‘라는 생각은 무의식적으로라도 눈곱만큼도 안 들게 하고 싶어요."
(...)
이들은 온전히 적응하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채 ‘경계에 선다‘. 동료이자 ‘꽃‘이면서 ‘여자애‘이고 ‘꼬맹이‘인 ‘여자‘, 그러나 동시에 ‘여자‘여서는 안 되는 여자(사내 스캔들, 성폭력 피해자인 여자). 이 많은 이름들 사이를 헤매는 여성 직원들 옆에, 패싱으로 ‘퀴어‘와 ‘정상‘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성소 - P132

수자들이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라는 무게를 모두 짊어진 채 일해야 하는 이도 있다. 어쨌거나 모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 P133

상사는 ‘또라이‘로 치부되는 동시에 ‘형님‘이 된다. 형님 연대가 굳건해지는 사이 여성들은 배제된다. 그 위계의 밑바닥에 ‘어린 여자‘ 직원이 있다. 그 옆에서 말 못할 비밀을 가진 성소수자는 자신이 선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쓴다. - P134

프리터로 살아간다는 규원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말하고 잘리면 그만이니까". 무엇을 말하면 잘리나? ‘나란 사람‘이다. - P154

정체성으로 인해 빚을 진다. 밥벌이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는 내내 자주 들은 단어는 ‘빈곤‘이 아니었다. 진짜 빈곤하면 인터뷰조차 할 수 없다. 빈곤에 갇힌다. 마음 내서 인터뷰를 한다 해도 가난이라는 것은 남에게 쉽게 보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대신 자주 들은 단어는 ‘운‘이었다. "운이 너무 작용하는 거 같아요",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지인 덕에 직장을 구하게 된 것도, 커밍아웃 후에도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는 것도 ‘운이 좋아‘라고 표현됐다. 운이 자꾸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시스템의 부재를 말해준다. "운이 너무 작용한다"는 말을 처음 들은 건 청소년 성소수자에게서 - P156

였다. 학교에서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폭력과 징계의 대상이 될지, 그냥 넘어갈지, 이해받을지 알 수 없다. 오직 ‘운‘에 달렸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떤 교사와 친구를 만날지는 복불복이다. 학교가 성소수자 학생을 대하는 매뉴얼을 갖고 있지 않기에, 모든 것을 ‘운‘이 결정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을 내세운 차별을 금지하는 법적 제도가 우리 사회에 없다. 커밍아웃 이후 발생하는 일터 괴롭힘을 예방할 수 있는 교육이나 내부 규약도 없다. 해고, 괴롭힘, 불이익을 피했다면 그것은 ‘운‘의 작용이다. 제도와 안전망이 없을 때 운이 거론된다.
그리고 또 하나. ‘운‘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운이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정성별이 남성이거나 표현성별과 지정성별이 일치해 패싱이 가능한 몸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운‘은 운이 아니다. 운이라 표현되는 또 하나의 자원이다. - P157

생의 모든 비용이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취업 준비 기간은 ‘적합한 노동력‘이 되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시간의 비용을 오롯이 개인이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사회에 입장하려면 성별 정정은 필수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수술비 전부를 개인이 지불하는 일은 당연한가. 우리 삶의 다른 무수한 비용들도 마찬가지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본다. 무엇이 삶을 지원받을 ‘자격‘을 만드는가. - P161

지금도 인생이 우울한 시기에는 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자격을 묻는 쌀밥앞에 당당할 만큼의 기운이 없을 땐 굶는다고 했다. 혐오의 세상에서 자신을 긍정하고 사는 일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요한다. 도대체 살아갈 ‘자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 자격이 ‘존재‘ 자체는 아닌게 분명하다. ‘정상‘으로 태어나자마자 ‘공동체‘에 속해 공짜성원권을 받을 것 같은 이들도 사실은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사회는 존재할 자격을 자꾸 쓸모로 증명하게 했다.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공들여 사들인 것을 우리는 ‘스펙’이라 부른다. 모든 것이 비용으로 치환되는 시대. 면접장 입장권 하나를 얻기 위해 20~30대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너무 크다. 젊음을 갖다 바쳐야 한다. - P162

마늘은 말했다. "내 나름대로 삶을 살 거고, 상황에 맞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내 모습을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살 거"라고.
비슷한 말을 몇 번이나 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마늘이 아무리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살 것이라 이야기해도, 이득을 보는 쪽은 그 자신이 아닌 것 같다. 마늘이 덧붙인 말 때문이다.
"회사는 이익이 우선인 곳이고, 내가 회사에 이익이 되는 사람이라면 나를 자르거나 하진 못할 거예요."
마늘은 ‘내가 잘했다면‘ 같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해고될 위험을 염두에 둔 채 일한다. - P170

마늘과 또래들은 고용 절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라는 자본(상품성)을 확대해 위기를 극복하는 중이다. 배워온 대로.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발생할 (고용)불안마저 유용성으로 극복하려 한다. - P171

능력은 성소수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고 - P174

용을 유지하고, 협상력을 발휘하고, 동료와 관계를 맺게 하는 숨쉴 구멍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터는 진공 상태가 아니다. 몸의 자산에 영향받지 않은 능력이란 없다. - P175

하나의 경제 주체로, 선택도 성취도 실패도 모두 개인의 몫이라 하는 사회지만 아무래도 밑지는 기분이다. 마늘이 왜 자신에게 그런 선택(콜센터 취업)을 했는지 묻지 않느냐고 했지만, 물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선택‘이라 말하기에 의심스러운 지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마늘에게 콜센터 일밖에 주지 않으면서, 콜센터 안팎에서 개인의 능력을 활용해 살아보라 한다. 마늘이 감당하게 된 결과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자신을 기계로 대하는 직장에 마늘은 ‘공정‘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기계는 가동만이 존재의 이유. 가동은 점점 빨라지고 기계는 고장났다. 마늘은 야간근무를 하다가 건강을 해쳤다. 노동은 중단됐다.
마늘이 그곳에서 능력으로 승부를 보려 했을 때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콜센터 업체는 능력주의를 가동할 자원이 없다. 2000년대 이후 기업들은 고객서비스 - P175

업무를 외주화했고, 그 덕에 크고 작은 콜센터 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15년 사이 생겨난 콜센터만 1,000여 개, 3만여명에 달한다는 종사자 대부분은 여성,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할 수 없다. 콜센터 업체가 원하는 것은 능력자가 아니다. 일회용 노동을 원한다. - P176

잦은 이직은 자칫하면 실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도 퇴사를 선택한다. ‘일반‘ 세계에서 도무지 행복하지 않아서다. - P179

문식의 진짜 삶은 회사 바깥에 있다. 주말이면 지방 도시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일이 잦다. 사람들한테는 대학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문식은 주말이면 퀴어 행사에 참석한다.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하고 있다. 인권활동을 하려면 업무와 책임이 늘어나선 곤란하다. 이직으로 낮은 지위를 유지할 생각이다. 그러나 만년 대리로 있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몇 년단위로 회사를 옮겨 다닌 이력을 면접관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재취업할 때마다 경쟁력은 계속 낮아질 것이다. - P180

쉬운 일은 아니다. 수연은 스트레스로 인해 협심증까지 앓았다. 직장 동료들과의 적대와 화해 과정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해당 논문의 연구자는 트랜스여성 노동자인 수연이 "고통을 감내하며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젠더실천의 범위를 협상적으로 확장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성소수자들은 숨어 있거나 피해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일터와 사회에서 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협상하고, 적응하고, 요구한다. "상황에 맞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변모시킬 것이라 했던 마늘의 말 또한 어쩌면 회사에 돈 벌어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를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져오는 ‘협상‘의 주체로 살겠다는 말. 적어도 이를 시도해볼 시간은 확보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 P184

"지금 성소수자 노동자들이 가는 곳은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이직률 높은 곳. 수틀리면 떠난다는 생각이 강해요. 이들도 노조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해요. 그런데도 자기 인생에 노조는 없을 거라 생각해요. 주변에서 노조를 본 적이 없어. 노조가 있으면 좋지만, 자기 인생과는 별개 문제이고." - P189

비정규직이 노동조합 문을 두드리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짧게 머물 직장에서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는다.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할 때 사람은 관계를 맺고 무언가를 한다.
인터뷰를 한 성소수자들에게 자신의 노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쓰는 어휘는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의 답은 결국
"없는 노동"이었다. 없으니 성소수자들은 해고되지 않는다.
다만 불안정 노동자 한 명이 오늘도 직장을 잃을 뿐이다. - P190

성소수자들이 항상 겁에 질린, 불쌍한, 어딘가 문제가 있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일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만 그렇다고 숨죽여 일하지만은 않는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분투한다. 그렇게 고용을 지키고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협상력을 높이는 방법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 수도, 더 ‘정상‘ 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진짜 사나이‘의 질서에 뛰어드는 것일 수도, 퇴준생의 길을 선택하는 것일수도 있다. - P190

현실은 복합적인 장치로 구성된 무대라, 무엇이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고 무엇이 정체성에서 비롯된 차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직장인 남성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여성은 능력이나 책임감이 없다고 말하고, 직장인 여성은 육아와 직장일을 분리할 수 없는 성 역할의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불평등과 무능력은 현실에서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그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평등하지 않은 구조를 인식하는 힘이다. 공정에 대한 감각만으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성소수자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성소수자로 차별받은 적 없는데요. 회사에는 숨기고 다녀서요" 정도의 답변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제 성소수자 직장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퀴어인 걸 사람들이 모르잖아요. 그게 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차별을 자각할 때 차별적 요소를 없앨 수 있다. 지난 시기 차별을 제기하고 제도로 규제하려는 움직임(그것을 운동이라 부른다)이 차별을 자각시켰다. 차별을 제재하는 행동들이 동 - P192

등함을 만든다.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동등한 자격, 능력을 인정받을 자격, 해고되지 않을 자격 등 그 어떤 자격도 공정한 평가로만은 얻어지지 않는다.
직장 내 구성원들을 동등하게 하는 여러 장치들이 마련될때, 협상력은 현실적 힘을 가진다. 법과 제도, 조직 등 어떤 장치를 이용하는 개별적이지 않은 대응, 동등한 지위하에서의 협의만이 협상자로서 온전한 힘과 위치를 갖게 할 것이다. 이제 평등과 공정은 서로 구분되지 않을뿐더러 평등 역시 어딘가 낡은 단어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평등하지 않은 개별의 너와 나는 존재조차 인정받기 힘들다. - P193

"잘 사는 나이 든 트랜스젠더 한 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회에서 좋은 삶이라고 상상하는 여지가 넓어져야 하는 거 - P197

지요. 60대의 좋은 삶이라고 하면 돈 많은 삶밖에 안 떠오르잖아요. 살 만한 좋은 삶에 대한 이 사회의 상상력이 너무 좁은 거예요."
세상의 상상력은 빤하다. ‘비성소수자‘라 하더라도 흔히 떠오르는 노년의 모습은 파고다공원을 서성이는 외로운 노인이다(여성 노인이라면 손주를 돌보거나 박스를 줍는 모습이 떠오른다). 노년은 보통 두 글자로 상상된다. ‘빈곤‘ 또는 부양‘, 부양할 사람이 없으면 빈곤해지는 거다. 그러니 노년의 다른 이름은 ‘부담‘이다.
특정 나이대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부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떠올리는 좋은 노년은 ‘돈 많은 삶‘일 수밖에 없다. ‘건강한 노후‘라는 주제를 달고 나오는 잡지를 펼치면 연금/보험 정보만 가득하다.
빈곤한 상상이 노년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생애주기 전반이 빈곤함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는 보호받고, 청소년은 학습하고, 성인은 결혼 적령기에 가정을 꾸려, 자녀를 낳아 키우고, 노년이 되면 그 자녀에게 부양을 받는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생애주기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일탈이다. - P198

3포는 누구의 기준에서 포기인가. "지금 20대 불안정 노동자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것‘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혼-육아의 포기는 기성세대가 안타까워하기 좋은 소재일 뿐이다.
"좋은 직장을 얻은 후, 연애하고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은 전통적인 중산층 남성의 가치관이다."
지금의 20대는 ‘사랑만 있다면‘을 외칠 만큼 순진하진 않다. ‘낳으면 저절로 큰다‘는 말에 코웃음 친다. ‘즐거운 나의 집’은 강남 등지에 제법 평수 있는 아파트로 신혼을 시작할수 있는 이들의 로망일 뿐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에게 가장 큰 고통이 ‘3포’란 이야기는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연애-결혼-출산으로 대표되는 ‘가족‘은 ‘안정‘의 동일어이기 때문이다. - P200

우리 사회는 안정과 가족을 혼동해 사용해왔다("결혼해서 얼른 정착해야지). 모든 정서적 지원과 돌봄, 복지가 이뤄지는 곳을 ‘안정‘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딱히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섣불리 혼인신고서를 작성하지 않는다. 결혼에는 이 질문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소는 누가 키우냐." 자녀를 낳아 키우고, 부모를 부양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 모든 돌봄이 이뤄지는 공간에는 누군가의 노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 P201

문제는 자신의 삶을 다르게 서사화할 자원이 이들에게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몇 살 때쯤 결혼하고 육아하고 은퇴하고 저축하고 이런 계획이라는 게 있고 그것에 맞춰 사회적 제도들이 있고. 그에 따라 지원제도를 신청하고 포기하고, 이런 선택지들. 우리(퀴어)는 선택지 앞에서 막히는 부분이 많죠."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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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유성원 지음 / 난다 / 2020년 7월
평점 :
품절


그 게이들의 게이스러움을 보면서 저들이 완전히 다른 종족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구나. 옷차림, 손동작, 목소리 등에서 이질감을 느꼈다는 게 아니고 그들이 여럿이라는 점, 그들은 누군가와 어울려 있는 상태라는 게 나는 해결할 수 없는, 풀지 못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 P17

나는 중년 남자들 좆을 빨거나 남자와 항문으로 섹스해서 죽고싶은 게 아니다. 그런 일들은 누구라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선택에 불과하다. 죽고 싶어지는 것은 이런 일을 모르고 살 수 있거나 사람들과 함께여서 ‘외로워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이들을 볼 때다. - P18

나는 ‘행복하다‘ ‘건강하다‘라는 단어가 도무지 실감 안 난다. 그것보다 라면의 조리예나 광고 속 다듬어진 이미지들이 더 진짜 같다. 실제로 그것들은 거의 달성 가능하다. 노력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노력에는 뭔가 빠져 있다. 노력이 아니고 애초에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뿐인데, 해낸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노력하니까 행복해지고 건강해졌는데 다른 무슨 비결이 있냐고 물으면 뭐라 하지? 의문을 품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없고 건강해질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다. 그는 ‘건강해진‘ ‘행복해진‘ 사람을 흉내내보려 그의 방법을 따라 하지만 그에게 맞는 방법이 아니다. 그는 실패하고 실패를 반복한다. 그 실패 중에도 성공 사례는 있다. 그게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자신을 의심하게 한다. - P27

사람과 만나면 화가 난다. 상대방에 의해 내 말이 교정되어서다. - P40

누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의 내용을 바꾸고 화법을 바꾸게 되듯이 어떤 위치에 누군가가 일시적으로 놓여 있었다는 것, 눈 감거나 잊었으면 되는데 거기에 영향받는 순간이 생긴다. 영향받는다.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 - P41

자살 안 하고 싶다. 안 자살이 나를 찾아서 나를 자살 안 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안 자살은 구리지도 않고 백화점에서 파는 물건처럼 고급일 것이다. 자살은 뭔가? 경기 지방 휴게텔의 목 부분이 해진 가운, 거기에 코를 대었을 때 나는 구린내다. 뽀뽀하고 싶어, 하고 다정하게 네게 코를 갖다댈 때 풍기는. - P50

나도 잘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겠지? 그게 어떤 느낌이냐면 출발선이 나는 전주쯤이고 다른 사람은 대전이거나 수원인데 서울까지 같은 시간에 도착하자! 도착지가 같으니 공평하지? 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서울에 도착한 사람들 말고 서울에 안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 P55

자살하고 싶다라는 말은, 아저씨들의 좆을 빨아주고 그들의 정액을 먹고 항문에 사정되고 나서도 제정신이거나 나를 견딜 수있느냐? 가끔씩 그 사실이 힘이 들며 자살하고 싶다는 말이다.
감정은 내가 찜방이나 사우나에서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그 행위를 나무라는 게 아니고 네가 바라는 일 중에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술을 마시고 이렇게 아무나와 하는 것 말고도 혼자이지 않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는 신호다. 내가 혼자이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박살났고 파괴당했으며 물에 적셔졌고 종이였다면 찢어졌다는 느낌이 ‘죽고 싶다‘ 이다. - P56

견딘다는 건 아주 뜨거운 걸 맨손으로 잠깐 잡는 거다. 충분히 쥐고 있을 수 없다. 화상을 입는 일이니까. 하지만 저걸 놓칠 수 없다는 느낌, 이걸 손에서 놓아버릴 수 없다는 느낌이 견딘다이다. - P59

안 견디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것도 안 견디고 싶다. 하면 하는 사람, 안 하면 안 함을 이해하는 사람, 이해할 필요도 없이 바로 수행해버리는 사람이고 싶다. 생각 안 함을 이중으로 생각할 필요 없이, 아무것도 안 보는 사람, 본 것도 안 본 사람이 되고 싶다. 기억을 선택해서 보관하고, 보관한 기억은 영영 떠오르지 않기로 했으면 좋겠다.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인데, 그 기억 속 상황이 재현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상상뿐인데 상상은 일어날 수 없는 일들만을보여주니까. - P68

자살 충동에 저항하게 하는 건 억울함이다. 주변의 누구와 연결되기라도 했어야 죽음이 뭔가를 파열시킨다든지 일시적으로든 충격을 주든지 할 텐데 도무지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없고 가족이라고 해봐야 내가 무얼 겪고 뭘 느끼고 무엇에 고통받는지 모르는 이들뿐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죽을 수가 없다. - P78

나는 내가 부끄럽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까지 느낀다. 지금은 밖에서 남자들이 큰 소리로 와하하 웃으면서 술 마시고 있다. 나는 저런 자리에 있고 싶어하면서도 그럴 수 없음만을 느낀다. 다들 맨몸으로 달리기를 하는데 나만 모래주머니를 덕지덕지 달고 달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누구도 내게 모래주머니를 차라고 한 적 없고 모래주머니를 달고 있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기에 나는 이 기분을 해결해야 하며 이 문제에 고립되어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달리기‘라면 나는 달리기를 하고 싶지만 몸에 달고 있는 이 모래주머니를 떼어내기 전까지는 달리지 못하겠어, 안 되겠어, 왜냐면 이건 부당하며 이 부당함은 공감받을 수 없는 것이니까.
흑흑이다. 나는 정말 흑흑 운다고 자판을 두들겨서 친다. 안 울면서! 하지만 내겐 이게 흑흑 우는 것이야. 감정을 참았고 안 표현 - P81

하였지만 그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란다. 정말 흑흑 운다, 흑흑 안 울었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운다, 안 운다와 상관없이 나는 흑흑 하였다. 흑흑중이었기 때문이다. - P82

나는 혼자이고 혼자라면 아무것이나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사람들에게 나를 판단할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혼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저는 혼자입니다. 혼자라고 생각하면 덜 부끄럽다. 나는 ‘나‘라고 생각되지 않는 내가 ‘나‘로 전시되어 있는 상황이 힘이 든다. 나는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싶고 늘 ‘아닌데요‘라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 P102

하고 싶은 것은 목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만질 수 있는 실물 호모를 만나 그의 손을 잡거나 몸을 껴안는 것이다. 후자는 찜방 가 - P102

면 할 수 있지만 목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는 그보다 좀더 어렵다. - P103

나는 말하고 싶다. 성대를 사용해 목소리를 내고 싶다. 내 목소리를 눈앞에 있는 상대의 귀에 전달시키고 싶다. 항문섹스나 오랄섹스, 정액 먹기 같은 건 얼마든지 한다. 그런 건 얼마든지 해. 그런데 말해진 적이 없다. 말해진 지 오래되었다. 말없이 자판을 두드리며 생각할 뿐이다. 말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서로 말할 수 있고 들을 상대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마주보고 있는, 엇갈렸더라도 한 테이블에 있는,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러면 나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 P105

회복해도 이전과 같을 순 없다, 그건 건강한 삶도 뛰어난 삶도 아니다, 라는 말을 책에서 읽을 땐 기뻤다. 회복하면 너는 뛰어나지고 건강해져, 라는 말을 했더라면 더 깊은 실망과 벽을 느꼈을것이다. - P128

안녕하세요. 천 줄의 문장을 왜 쓰나요? 그 사이사이에 있는 한 줄, 세 줄의 문장을 가리기 위해서다. 보여주려고 쓰는 게 아니고 감춰주려고 쓴다. 어떤 한 문장만 읽으면 되는데 그걸 허락할 수는 없고 읽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믿음으로. - P143

안 건강이의 문제는 마치 그가 노력할 수 있다면 건강이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고 싶어서 생긴다. 안녕하세요? 세상엔 건강이가 있고 건강이가 안 건강이가 될 순 있지만 안 건강이가 건강이가 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당신이 안 건강이라면 너는 안 건강이입니다. 죽을 때까지. 왜냐면 너는 건강이였던 적이 없었거나 건강이여본 적이 없고 안 건강이로 존재하는 법밖에 몰라서 안 건강이로 있을 수밖에 없어요. 여보세요?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돈이 많아지겠죠. 그 정도라고요.
살아 있음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 이걸 스스로 과소평가했거나 측정해본 적 없으니까 상상 속에서, 나는 에너지가 백있으니까 그중 삼십이나 사십 정도를 나를 수정하는 데 사용할수 있을 거야, 믿고 싶어지죠. 하지만 대부분의 안 건강이들은 존 - P157

재하는 것에 백을 다 써버려서 남은 힘이 없어요. 여보세요? 내가 어떤 재질의 옷을 구입하거나 착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라고요. 제가 살아 있음에 에너지를 덜 써도 되게 살아왔다면(컴플렉스 관리, 기억 관리, 생활 관리, 감정 관리 등) 당연히 그 여분의 에너지를 곳곳에 투자하면서 지내왔겠죠. 그런 경험 자체가 전무하다고요. 해왔던 대로밖에 살 수가 없어요. 뭘 바꿀 수가 없다고요. 왜냐면 자신이 바뀌는 게 아니고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어서. 생활을 저 혼자 감당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도움이 생긴다, 같은 거라고요, 그걸 바라는 순간 감정은 악화되니까 관리 비용이 늘어나겠죠.
물에 사는 참치랑 땅에 사는 염소는 친구할 수 없어요(해도 되겠죠. 상상 속에서는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결감을 가지며) 혼자 뭘 해내는 것과 (고립감을 느끼며 고립된 채로) 혼자 뭘 해내는 건 정말 다르다고요. 살아간다는 건 타인과 감정적 신호를 끊임없이 주고받는 일인데 그것이 가능한 사람과 그게 거듭 벽에 부딪힌다고 느끼는 사람의 현실은 다르겠죠. 계속해서 고립 비용을 지불해야 하니까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간다는 행위도 안 고립된 사람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비용만 발생하지만 고립된 사람은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감정 비용이 줄줄 새고 있는 것이죠. - P158

나도 모른다. 몰라도 행동할 순 있으니까. 내 행동에 왜, 하고 물으면 할말이 없다. 상대방이 어떤 답을 듣길 원하는지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다퉈서. 누군가를 좋아할수록 이 다툼이 세지고 나는 후회한다. - P165

............
안녕하세요? 점 오천 개 찍을 수 있지만 안 찍는 것처럼 살고 있다.
.......................................... 키보드로 점 오천 개 찍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죽을 때까지 아마 할 기회 없을 것이다. 내가 안 할 테니까. 인생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 같다. 점오천 개 찍기. - P181

안녕하세요? 용기는 작은 구슬이고요. 그것들은 쌓아올려지지않는답니다. 수시로 퍼지고 흩어지는 감정에 불과하다. 한데 모아놓아도 높이 쌓을 순 없다. 늘 굴러다니기만 한다. 나는 그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쌓으려 했다. 그걸 노력이라고도 생각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인데…… - P203

외로움이 뭘까?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알고 싶고 그 ‘어떻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인생 뭔지 알 수 없는 중에서 혼자 노력했지만 그건 정말 어리둥절 속에서의 노력이었다. - P219

외로움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요? 일단 외로움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럼 외로움이 해결됩니다. 외로움을 해결하려면 외로움을 해결해야 한다라고 써보면 알 수 있다. 외로움을 해결하려변 고추 빨아야 한다가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외로움을 해결하려면 외로움을 해결해야 한다. 여기서 이 문장을 어떻게 실천할수 있는지는 고민 말아야 한다. 나는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제발 해야 하는 일은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동어반복을 외움으로써 가능해진다. 그것이나에게 책상이 책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가 책상을 다른 것이라 믿고 싶을 때에도 말이다. - P230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속상한 것, 그리고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가 기분이 좋고 고통이 없을 때 남에게 친절하기가 얼마나 쉬운가다. - P240

타인을 대하는 건 쉽다. 내가 아니니 무시해도 되고 상관없는데 나를 대하는 것이 어렵다. 내가 나에게 하는 요구들(나를 위험하게 하지 마라, 슬프게 하지 마라, 외롭게 두지 마라, 나를 십 년 뒤에도 살아 있게 해라)의 방향이 사실 괄호 안에 열거한 내용과 대립하는 경우가 있어서다. 내가 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달달 외워서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이러한 이유로 사랑받을 만합니다 하며 다가오더라도, 심지어 그것이 내가 그렇게 보여지고 싶었던 모습이더라도 사랑은, 존재는, 자격의 문제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살다가 어느 날 정말 더 못하겠네 싶으면 거기까지 하면 된다. - P242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걸 오늘 하면서 산다. 이를테면 고추 오십 개 빨기. 정액 받아먹기. 노콘으로 항문섹스하기. 하고 싶지 않은데 할 수 있어서 해야 한다고 느낀다. 아무도 나처럼 이렇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내 감정은 없는 것처럼 나는 판단하지 않는 것처럼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나는 안 건강한데 달리 방법이 없으니 안 건강하다는 사실을 최선을 다해 잊어버리거나 아파가지고 팔짝 뛰고 하는 수밖에다. 할 수 있을 때 안 하기가 정말 어렵다. 쓰레기를 버려도 되고 욕해도 되고 죽여도 되고 때려도 될 때 안 그러기가 안 쉽다. - P256

언젠가는 폭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건강‘해지겠죠. 지금은 방법이 없다고 느끼지만요. 다른 행동을 안 하려면 이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느끼는 상황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을까? 도와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통제하려는 노력은 그 시도만으로도 나를 곤경에 빠뜨린다. 그간의 경험으로 나는 뭘 해야 한다(하고 싶다가 아니라)고 느낀다면 그걸 하지 않을 방법이 혼자서는 없고 (나에게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혼자가 아닐 방법이 없어서 결국 해야한다고 느끼는 일들을 하게 된다. 이것을 혼자 막아보려고 하거나 스스로 속이려 하면(한 시간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 반드시 보복당했다. 뭘 해야 한다고 느끼면 빨리 해야 한다. 그후에도 감정이 진정 안 되면 빨리 뭘 먹어서 몸을 마비시킬 필요가 있다. 외로움보다는 폭식 후 겪는 불쾌감과 깨달음(나는 폭식했구나!)이 좀더 견딜 만해서? - P258

더 많은 사람이 읽는다면 좋겠죠. 그게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나를 위해서만 쓴다. 누구에게 이걸 봐! 하는 게 아니고 내게 보여주는 것이 첫째 목적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글은 이미 많다. 그들은 그걸 보면 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써야 한다.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고추 빨고 - P268

정액 먹고 싶은 마음과 여러 남자와 노콘으로 항문섹스하고 싶은마음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야겠죠. 그것이 저에겐 ‘행복‘이니까요. - P269

왜 어떤 사람들은 이런 감정이나 충동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누군가는 그러한 감정이나 충동에 ‘시달려야‘ 할까. - P276

사람들이 많이 있는 모습을 보면 왜 힘이 들까? 그들이 여럿이고 나는 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들이 멍청해 보인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어서? 그 사람들이 왜 멍청하냐? 모를 뿐이다. 어떤 걸 알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산다. 나도 모르는 게 있으니까 알아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홍대에 - P284

젊은이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을 보니까 그 사실이 무섭고 겁이 났고 내가 확실하게 잘못 살고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파주에 산다는 사실이 얼마나 많은 자극으로부터 나를 떨어뜨려두었는지 새삼 느꼈다. 종로는 괜찮은데 영등포는 괜찮은데 홍대는 안 괜찮은 이유가 뭘까요? 이들이 나와 다르다고 느껴서.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이 그 어느 곳에서도 교차할 일 없이 죽는 날까지 보내지리라고 예감해서. 나는 어떤 것이 싫어서 그게 싫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지 않아야 하는 게 규칙일 때, 그래야 돈을 (더 많이) 벌 수있을 때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얼 직업으로 삼아야 할까? 어떤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끔찍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자신감이 생기고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분에서 잠시라도 떨어져나오면 이건 다 거짓말이고 내 판단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느낌에 충실하려면 우울해져야 하고 그걸 감당하는 것이 불편하니까 포기한다. 최대한 피해야 해요. 자극하는 것들을 상대하거나 맞서면 안 되고 피해야 합니다. - P285

나는 ‘변태‘고 문제가 있고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사랑이 아닌 사람. 욕정뿐이고 지저분하고 더럽고 욕할 수 있고 침 뱉고 자기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속고 있는 거야.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주변에서 혼내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막 사는 거야. 망하고 있는 거야. 완전히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러다가도 그것은 생각의 영역이고 나는 생각만으로 살 수 없다. 생각 가지고 밥 먹을 수 없고 생각만 가지고 행복할 수 없다. 나한테는 몸이 있고 고추가 있고 입이랑 항문이 있고 남자를 껴안고 싶다. 남자의 정액을 먹고 싶고 그것이 나인데 내가 아닐 방법이 없다고요. - P293

내가 누군지 잊어버릴까봐 무섭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떠하다 느끼는지 그 실감을 외부를 통해 설계하거나 상상하고 싶지 않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나인데 어째서 그 얼굴을 비출 거울이 필요한가. 누군가가 너 아프구나 라고 말해야만 고통이 승인되는 것도 아니고 외부의 평가나 반영 없이도 그것은 있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신체 일부를 어딘가에 부딪혔을 때 듣는 사람이 없어서 신음할 수도 없이 입 다물고을 때의 통과가 있다. 반드시. - P294

편견 없이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건 그 상황에 놓이지 않았거나 아직 그런 대상을 못 마주쳤을 뿐이지 그러한 상황에 놓이고 그런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가 누구라도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될걸!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일을 당해도 호소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고 그런 일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 행위자에게 같은 수준의 고통을 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있다. - P323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폭식하지 말고 밤에 일찍 자고 야채 많이 먹고 이런 건 알고 있지만 우리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폭식을 하고 뭔가 나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게 어디서 오는 걸까. 만약에 이 위험을, 열 가지 위험 중에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면 방법은 뭘까. 저는 그중 하나로 게이들이 사회에서 받고 있는 차별이나 이런 걸 일시에 없앨 순 없지만 그런 것이 개인에게 위험 행동으로 나타날 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지금 트루바다나 프렙이 등장했다고 생각하거든요." - P328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내가 그 일에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보여준 합리성으로 사람들이 설득되리라고 낙관적인 착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일은 막상 겪고나면 회복이 안 되고 뭐가 부러졌으면 부러진 채로 살아야 한다.
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는. - P341

멀리 무대의 그애를 휴대폰 줌으로 잡아당기면서 액정 속 흐릿한 얼굴을 손끝으로 문질러보았다. 얘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나 하는 마음과 그것이 얼마나 나만의 것인지 생각하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남에게 책임져달라고 할 수 있어? 없으니까… 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P344

남자랑 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왜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그만 사는 걸 선택하는지 알 것 같다. 무엇이든 지속되는 건 없고 끝난다는 사실이 가르쳐주는 것.
희망하고 소망하는 게 있다면 좋겠지. 살아 있는 데에는 도움이 될 테니까.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가 지긋지긋하지만 이걸 견뎌야 한다. 나는 아무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보이는 상태를 참기 힘들다. 뭐가 잘된다면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운이 좋았을 뿐이다. 듣기 좋은 말 하기는 쉽다. 옳은 말 하기도 쉽다. 그렇게 살기 어려운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내가 겪은 일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점에서 탈출하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지나가야 할 것들이 지나갈 때까지는. 작은 것은 작고 큰 것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는 알고 있어야 한다.
다 흘러가는 중이고 흘러가는 중이다. 바라는 건 뭘까? 스스로
‘너는 이런 걸 원하지?‘ 물을 때마다 나한테는 입이 없다고 느낀다. - P348

노콘 항문섹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으나 어떤 젊은이들, 아름다운 청년들을 인스타 등에서 목격하면 저들이 정말 게이구나 나와는 다르구나, 하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동성애자, 양성애자, 이성애자 이렇게 있는 게 아니라 신체나 외모 조건, 삶의 양식에 따른 분류를 더 강하게 느낀다. 나는 동성애자로서 남성과 섹스하는 남성이라 생각하고 있으나 그러한 나의 성행동, 내가 섹스하는 것과, 저 미청년이나 젊은이들이 동성과 관계맺는 것은 다른 질감이라 느낀다. 나의 질문은 어디로 발전해야 할까? 회의에서는 이제 정해주자고, 우리가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 안에 싸도 돼요?라는 말에는 안에 싸도 된다, 이런 식으로 불필요한 논쟁은 과학적인 합의에 도달했다면 그 논의의 출발선을 그어주자고 한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오는 게 뭘까. 누가 늙은, 늙어간 혹은 외모 자원이 부족한 내 입에 싸줄 것인가 혹은 자기 입에 싸게 해줄 것인가, 이것은 정말 다음 질문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들. 내가 다르게 경험하는 특정 형태의 만남들, 관계들, 사람들을 어떻게 언어로 정의해야 할지 오늘 어렴풋하게나마 어쩌면 이것이 ‘안개‘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게 되었던 거 같다. 뒤늦게 글로 쓰면서. - P364

내가 폭식을 할 때 양배추나 샐러리를 먹진 않았던 것처럼 항문섹스 역시 기호가 반영된 행동이다. 인간으로서 누구나 지니고 있는 외로움과 관계맺기의 어려움의 결과로 위험행동을 했다는 인과관계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더라도 그것만이 행동을 결정하진 않는다. 모든 게이 남성이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여 다른 남성의 정액을 먹거나 다른 남성의 성기를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진 않으니까. 이성애자라고 하여 똑같은 생애각본을 따르진 않듯 게이 남성으로 정체화했어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욕구에 대한 차이가 나를 만든다. 동시에 이러한 욕구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게 가려지며 나아가 과잉대표되고 왜곡당한다. 어떤 행동이나 말들은 세상에 없는 것처럼 숨겨져 있다. 나는 공적 공간에서 항문섹스, 노콘 섹스 등의 단어가 노출돼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혐오세력이 아닌 당사자의 경험과 언어로. 어떤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취급당할 때, 그의 얼굴을, 표정을 상상할 수 없을 때 그 삶의 토대와 조건은 취약해지기 쉽다.
일부 게이 남성에게 만남의 통로가 되는 어플 혹은 사우나 등의 공간에서의 문법은 그에게 관계의 형태와 질을 결정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성애자와 달리 아직은 제한적인 선택지 안에서 친밀함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시대와 사회, 공간의 한계를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바라보게끔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이렇듯 차별과 - P369

불평등은 개인의 특성이나 문제행동의 결과처럼 보이도록 강제된다. 구조적 취약성을 소수자 개인이 떠안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세계에서 그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다수에게 늘 ‘비용‘이라는 부담으로 인식되어 변화를 저지시킨다. 소수자 개인이 처한 환경의 선택지를 다양하게 만들지 못하면 그는 동일한 선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 P370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나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그리고 나에게 친구가 있다면 누구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편안함을 느낀 곳은 남자와 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이 모이는 공원 화장실 같은 곳이었다. 거기는 상대를 인격적으로 기대하지도 않고 이 사람의 이름이 뭔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오로지 싸고 싶어서 오거나 싸려고 가는 곳.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오는 곳이었다. 거기를 이용하는 사람들, 다니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비난하는 방식은 질병 혐오였다. 저렇게 하면 병 걸려, 우릴 욕먹게 하는 걸레 같은 애들.
공원 화장실에서 섹스하면 성병에 걸리고 집이나 호텔에서 섹 - P370

스하면 성병에 걸리지 않는가? 성병을 비롯한 여러 위험을 감소시키는 일과 내가 섹스하는 상대가 누구인가라는 관계성, 해당 공간에 대한 낙인은 다른 결의 문제임에도 이것들을 한데 섞어 사고하는 적극적인 무지는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게 ‘더러운‘ 사람을 낙인찍음으로써 ‘건강한‘ 사람을 분리해내려는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영역이 HIV/AIDS였다. 나는(예)비감염인으로 언제든 HIV감염인(이하 감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성관계를 하는 이상 성정체성이나 성행동의 형태에 관계없이 HIV에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P371

남자와 섹스하는 남자를 뜻하는 MSM은 HIV 감염취약군으로 분류된다. 이 말은 기존 주류질서에 맞게 설계된 사회에서 배제되고 드러나지 않아서 이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구조적인 취약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HIV감염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해당 집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이유가 아니라 이에 걸맞은 접근법과 정책을 세워야 할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해당 집단을 낙인찍고 주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특성에 맞는 의료 조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동성애자라고 자신을 정체화했거나 표현하는 사람만이 동성과 섹스하는 게 아니라 이성애자, 혹은 나의 남편도 남자와 섹스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 나온 용어이기도 하다. 성행동의 결과인 HIV감염을 이성애/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의 문제로 환원하는 혐오세력의 선동은 정작 사람들을 HIV감염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 HIV는 동성애, 혹은 항문섹스를 한다고 자연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라 하여 모두 동일한 형태로 성관계를 맺고 살아가진 - P376

않는다. 관계의 형태와 질감은 개개인에게 다르게 경험된다. 이성애, 동성애 등은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하는 한 조건일 뿐이다. 두군가는 성적 끌림을 적게 느끼고, 누군가는 활발한 성적 실천을 한다. 불특정 다수와 무수히 ‘위험한 섹스를 하였어도 HIV에 감염되지 않을 수 있고, 단 한 번의 성관계로도 HIV에 감염될 수 있다. 이때 이 ‘위험‘을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 접근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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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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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 P12

‘물음: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 시간의 길이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것. 방법: 치과 병원 대기실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 여러 나절을 보낼 것. 일요일 오후를 자기 방 앞의 발코니에서 보낼 것.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하는 강연을 경청할 것. 가장 길고 가장 불편한 철도의 코스를 골라 가지고 물론 입석으로 여행할 것. 공연장의 매표구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오면 표를 사지 - P40

말 것 등.‘ - P41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믿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 - P54

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 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 P55

리샤르는 주저하다가 리유를 건너다보았다.
"솔직하게 당신 생각을 말해 주시오. 당신은 이것이 페스트라고 확신합니까?"
"질문을 잘못하셨습니다. 이건 어휘 문제가 아니고 시간 문제입니다."
"선생의 생각은 결국" 하고 지사가 말했다. "이것이 설령 페스트가 아니라 해도,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취하는 예방 조치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겠군요."
"기어코 제 의견을 필요로 하신다면 사실 제 의견은 그겁니다."
의사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리샤르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그 병이 페스트인 것처럼 대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표현은 열렬한 동의를 얻었다.
"당신도 같은 의견이시죠, 동업자 양반?" 하고 리샤르가 물 - P73

었다.
"표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고 리유가 말했다.
"다만 시민의 반수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머지않아 실제로 그렇게 될 테니까요." - P74

평상시에 우리들은 누구나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사랑이란 예상 밖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또한 우리들의 사랑이 보잘것없다는 것도 다소 담담한 태도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추억이란 더 까다로운 것이다. - P102

피로해진 탓도 있고 해서 그는 무심한 사람이 되었고, 점점 더 말이 적어졌으며, 젊은 아내가 자기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계속 이끌어 나가지 못했다. 일하는 남자, 가난, 서서히 막혀 가는 장래, 식탁에 앉아도 할 말이 없는 저녁때의 침묵, 그러한 세계에 정열적 사랑이 파고들 여지란 없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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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상한 몸 - 장애여성의 노동, 관계, 고통, 쾌락에 대하여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6
장애여성공감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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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상한(queer) 몸을 가지고 있다. ‘모든 몸은 아름답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때때로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서 채택하는 선언이지만 각자가 가진 차이들을 쉽게 지우거나 고유한 삶의 방식들을 질문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너무 뭉뚝하고 얄팍하다. 장애여성들은 정상성의 기준을 해체하고 사회의 규범에 도전하는 퀴어한 사람들이며 각기 다른 몸을 가지고 고유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퀴어함은 성소수자를 ‘이상하다‘며 비하하는 말이었지만, 사회와 불화하는 그 이상함이 사회가 추구하는 정상성의 폭력을 알아차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하는 정신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사회와 국가는 온전하지 못한 기능이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 P20

불구의 정치가 피어난다. 불구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불구의 정치를 통해서 단지 사회질서에 통합되기 위한 장애 극복을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이상한 몸은 불구의 정치를 위한 우리의 힘이다. 이런 우리의 퀴어함이 자랑스럽고, 퀴어한 존재들과 동료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 P21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 남아서 운동을 해야 하는 걸까? 우리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런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져본다. 비장애 사회와 장애 사회가 같은 꿈을 꾸나? 어떤 세상을 꿈꾸지? 행복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이라는 게 뭘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도 이어진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정말 평등해질 수 있을까? - P59

"나는 장애가 있는 그대로를 원해. 이 자체로서 행복하기를 바라지. 근데 가끔 내가 모르겠는 것이 정말 그게 다인가? 계단이 하나도 없고 평평하고 그런 데서 막 전동휠체어로다닌다고 하면 내가 행복한가? 가끔은 나도 두 발로 걷고 싶지 않을까?"
이런 불경스러운 질문을 해본다. "내가 가끔 두 발로 걸고 싶다는 욕구가 있을 때, 두 발로 걷게 만들어준다면, 그게 평등한 건가?" 올해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패럴림픽이 시작됐을 때 패럴림픽 개막식에는 어떤 척수장애인이 걸을 수 있게 해주는 로봇을 입고 성화 봉송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장애인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좋은 기술로 보이지만 그 기술에 투자하는 자본의 욕망은 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손상을 ‘보조‘하기 위해서 개발되는 기술의 한계는 모호하다. 예컨대 인간의 팔을 대체하는 인공지능의 팔은 슈퍼인간이며, 인간의 능력을 수백 배 능가하는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할 수도 있다. 무언가가 실현된다고 할 때 그것이 누구의 욕망이고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해 집요한 질문과 날카로운 시선이 필요한 이유를 알려주는 장면이다.
지금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인권과 평등의 담론 속에서도 장애인은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미 규범이 된 인권과 평등은 충분하지 않다는 감각도 동시에 생긴다.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있 - P60

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라고 말하는 것. 무척 쉬운 말 같지만 나의 모든 욕망과 욕구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실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나의 욕구와 욕망은 변화무쌍하다"는 영희의 일갈은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구분, 공적인 가치와 사적인 가치를 나누는 기준을 다시 보게 만들고 장애인 해방의 지향과 목표를 확장하고 수정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자유롭고 평등해진다는 해방은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P61

장애를 가진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일은 여전히 몇 가지 주제로 한정되어 있다. 아니 사실은 한 가지다. 장애 극복 서사를 보여주거나 의료적 도움을 주는 일이나 경제적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들의 주제는 다 같다. 그건 흔히 동기부여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영감 포르노다. 영감 포르노는 호주의 코미디언으로 활약한 장애여성 스텔라 영(1982~2014)을 - P67

통해 알려진 말이다. 그는 장애인의 몸과 고난, 노력이 비장애인에게 삶의 동기부여로만 활용됨으로써 장애인의 이미지가 착취된다고 주장했다. ‘장애를 극복한 사나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엄마‘ 등으로 소개되는 장애 극복 이야기와 사지 없이도 훌륭하게 과업을 수행하고 환히 웃는 얼굴 이미지들은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낙담하고 실패한 비장애인들에게 동기부여하기 위해서만 사용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오기로 결심한 장애인들의 동기는 다양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프로그램 진행자의 코멘트, 내레이션, 자막은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작동되고 장애인의 삶은 프로그램의 목적에 맞게 배치된다. 그리고 대부분 텔레비전에 나온 이후의 삶은 완전히 잊힌다.
(...) 그 프로그램에는 수술 후 - P68

초기 재활 치료를 받는 과정까지 담겼는데, 레드는 발음이 예전보다 또렷해졌고, 보조기를 차고 걷는 연습까지 할 수 있었다. 항상 혼자 바닥에서 땅을 보고 밥을 먹다가 누군가와 함께 마주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레이터는 "바로 자신의 잃어버렸던 삶의 새로운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죠. 제2의 인생,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OOO 씨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라는 멘트를 하면서 프로그램은 끝났다.
레드는 사실 인생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레드는 앉아서 밥을 먹게 되어 ‘사람답다‘라고 했지만 ‘사람답지 못했던‘ 시절에도 밥을 먹고, 대학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고, 누군가와 섹스를 했다. 영감 포르노의 주인공이 반드시 영감 포르노의 피해자는 아니다. 텔레비전에 출현했던 많은 장애인이 그랬듯이 레드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술 비용을 해결했고(TV에 출현해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도 있고, 성형수술 프로그램에 출현해 ‘새 삶을 찾은‘ 사람도 많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수술 방법에 대한 공신력을 확보했다. 텔레비전에 사생활이 노출되고 자신의 삶이 프로그램의 목적에 맞게 배치되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또 하나의 극복 서사로 사용될 뿐이겠지만 수술을 하고 난 뒤 레드의 삶은 조금 달라졌다. 이 삶의 변화는 텔레비전에 출현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인지, 아니면 수술과 재활을 통해 기 - P69

능이 회복된 것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수술 후 찾은 자신감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사실 수술을 통해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엄밀히 말해 운전을 하게 된 것밖에 없다. 레드는 수술 이후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출퇴근하는 것과 운전하기라고 말했다. 프로그램은 힘겨운 일상을 살다가 수술이 성공한 후 재활을 시작하는 레드의 모습으로 끝났지만, 레드의 삶은 여전히 레드가 저지르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 P70

전형화는 소수자의 삶을 차별하는 손쉬운 방법이다. 치료, 극복, 불행, 불편 등의 부정적 서사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혐오와 차별로 구성된다. 많은 장애인들은 자신이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물론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은 비장애인과 완전히 똑같은 삶을 산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생의 과정에서 겪는 감정, 관계의 역동, 실패와 성공, 변화들을 겪어내면서 사는 것은 누구나 비슷하다. 그 보편성과 장애라는 고유성 사이에 일어나는 복합적인 삶의 모습을 설명하며,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경순은 쉽지 않았다. - P117

장애여성 양육 서사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장애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아이를 낳아 키웠거나, 장애를 그대로 물려받아 힘든 삶이 대물림된다거나, 장애를 가졌지만 평범하고 밝게 살아간다거나. 이런 극복과 감동 서사를 벗어나기 힘들다.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세대를 걸쳐 삶의 방식을 이어가면서도 해당 시대의 사회 문화와 관계를 맺고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오랫동안 우리는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오지 않았다. 다음 세대의 한 구성원으로서 장애인을 그리지 못하는 것은 지금 세대에 장애인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살아가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경순은 힘주어 말한다. "혼자선 되게 약해요. 사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강하게 나갔지"라며 자신을 지탱하는 딸들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장애가 유전된다는 걸 발견하면, 불행의 대물림만을 우려한다. 그러나 경순과 딸들이 서로 의존하며 만든 연대는 샤르코 마리 투스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도 살아가는 방식과 지혜로 이어졌다. 우리는 세 모녀 덕에 의학 서적에 나오지 않는 지식과 삶의 방식을 얻게 되었다. 불행이 아닌 질병과 장애가 있는 몸으로 서로를 지원하며,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원칙을 경순은 대물림해주었다.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그녀가 버텼던 시간과 세웠던 원칙들을 세상이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 P122

당시 조화영이 경험한 성인 발달장애인 직업교육훈련은 참여자가 자신의 몸을 자발적으로 움직여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일에 자신의 몸을 기계처럼 맞추는 과정이었다. 그곳에선 몸을 자유롭게 쓴 적이 별로 없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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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김성우.엄기호 지음 / 따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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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정리하면, 글을 쓰고 읽는 것이 말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것과 달리 인간의 사유하는 역량을 비약적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추상성이 높아짐으로써 보다 본질적인 것을 사유하게 되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본질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그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체계적이고 치밀해야 합니다. 따라서 내 이야기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치밀한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바로 이것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인간의 사유역량을 비약적으로 높였다고 말하는 이유겠죠. 말로는 이 치밀함과 체계성을 도저히 담을 수 없거든요. - P101

물론 문자와 읽기의 추상성과 기호성이 너무 높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오자와 마키코가 얘기한 것처럼,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 에게 너무 일찍이 추상적이고 기호학적인 것을 다루게 함으로써 현실을 망각시킨다는 점입니다. 삶의 구체성은 놓치게 되는 것이에요. 소위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보편성을 생각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구체성을 망각하는 형태로 가면 반쪽밖에 못 취하는 것이 되겠죠.
맥루언을 비롯해 미디어학자들이 얘기했다시피, 어떤 미디어를 장착해서 그것에 연결된다는 것은 그 미디어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이 할 수 없는 것까지 받아 안는 것이거든요. 보통 자원(affordance)과 제약(constraint)이라는 개념을 많이 쓰는데, 특정한 매체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고, 이를 얻는 동시에 어떤 제한이 생긴다는 거죠. - P102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여러 교과뿐 아니라 매체들 간의 관계, 다양한 리터러시 사이의 균형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봐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삶과 어떻게 접속하느냐죠. 각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잘 알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매체를 활용하는 경험이 많아져야 합니다.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책 속이나 문제집 안에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말글을 사용하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경험을 통해 텍스트라는 기술을 유연하게 다루는 역량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그런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잘 키워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어요. - P105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결국읽기의 문제와 결합돼 있다고 봐요. 예전보다 독서를 안 한다고 한탄 - P110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읽는 양으로 보면 지금 훨씬 많이 읽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든요. 양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읽는데, 한 이벤트의 길이라는 면에서 보면 굉장히 짧아졌어요. 길이가 짧아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가 볼 때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이 짧아지고 작아진 것입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글쓰기가 대유행입니다만, 저는 좀 냉소적입니다. 읽기가 기반되어 있지 않은데 쓰기가 가능할 것인가 싶거든요.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이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글은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글을 쓸 때는 그 글이 당대를 넘어 후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질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글은 말과 달리 기록이잖습니까. 그 - P111

러니 글을 쓰는 것은 추상성을 높여 치밀하게, 체계적으로 구축함으로써 한편에서는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한 권의 책이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세계 내의 정합성과 논리성과 인과성과 핍진성을 다 맞춰내야 하는 거죠.
그런 걸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쓸 수가 있느냐?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쓰게 하더라고요. 매뉴얼이 있어요. 공장에서 제품이 나오는 것처럼 매뉴얼에 맞춰서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매뉴얼에 맞춰 썼을 때 그 사람이 과연 저자(author)가 되는 거냐, 아니죠. 그 글에 무슨 독창성(authenticity)이 있겠어요. 자기 사유가 없는데 독창성이 있을 리 없죠. - P112

선생님이 텍스트성의 역사를 말씀하시며, 초텍스트성 문화에서는 더 이상 정전이라는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정전은 없고, 주석으로서의 지식, 의견의 세계로 넘어갔어요. 의견의 세계에서 내 의견을 보태기 위해서는 이미 제시되어 있는 의견‘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듣기로 되는 게 아니고 읽기로만 가능해요. 듣는 것은 단수성이거든요. 이걸 듣고 다음 걸 들을 때는 and로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거고 그다음에 저건 저거, 이렇게 단수성이 죽 연결되는 거죠. 단수성이 연결된다고 해서 복수성의 세계가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복수성의 세계란 시간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시간을 공간화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한 공간에 여러 개가 있어야 복수성이라고 인지되니까요. 어찌 보면 기록이라는 것, 읽기라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해놓은 거죠.
한 공간에서 죽 읽게 되는⋯⋯. 글을 쓴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써놓는 순간 책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수성이 - P113

텍스트와 읽기가 가져다주는 역량이라는 면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다시, 책으로》에서 매리언 울프는 텍스트와 읽기가 공감능력을 키워준다는 얘기를 합니다. 마키아벨리의 사례를 드는데, 마키아벨리는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옷을 입고 책을 읽었다고 해요. 예를 들자면, 12세기에 쓰인 책을 읽으면 12세기 때 옷을 입고 영국 사람이쓴 책을 읽으면 영국 옷으로 바꿔 입고 읽었다는 거죠. 책을 읽는 것은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지함과 흥분을 유지하기위해서라고 합니다. - P123

울프는 이걸 공감능력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이 책과 책 읽기가 제공하는 고유의 역량이라고 하죠. 그런데 사유라는 측면에서는 공감능력이라기보다는 역지사지의 사유역량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변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그리스 신화가 ‘변신 이야기‘ 이지 않습니까. 변신은 인간의 오랜 꿈입니다. 하지만 신이나 천사 같은 존재와 달리 인간은 변신을 할 수가 없죠.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고, 이런 점에서 인간은 가능성을 빼앗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되는 가능성을 빼앗긴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통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언어예요. 우리가 뭔가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할 때를 한번 생각해보죠.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만 그 이미지들이 다 언어적이죠. 말과 글입니다. 다른 존재에 공감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게 하는 것, 생각에서라도 남이 되어보는 것, 그것이 역지사지이며, 아렌트는 그것을 사유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사유역량을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최근에 발간된 《공감의 배신》의 저자 폴 블룸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공감이라는 게 다른 존재의 입장이나 처지가 되어보는 것, 즉 역지사지하는 사유를 자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게 폴 블룸의 시각입니다. 그의 주장처럼 저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능력이 아니라 역지사지하는 사유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 P124

반복합니다만, 인간의 사유역량의 스케일을 획기적으로 키운 것이 읽기죠. 이론적으로 보면 내가 아직 읽지 못한 무한대의 텍스트가 있습니다. 그 무한대의 텍스트가 나의 어떤 상상력을 자극할지 모릅니다. 변신의 폭이라는 점에서 글은 시공간을 넘어 무한대의 경험을 지금 이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로 끌어오죠. 말의 세계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이에요.
그럼, 과연 이렇게 사유역량을 확장시키는 것이 읽기만의 특권일까요? 물론 저는 읽기가 일으킨 혁명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읽기만의 특권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고 봐요. 오히려 읽기를 이렇게 특권화하는 것이 사유에 진입하는 장벽을 높이 쌓는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P125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리터러시 교육을 제대로 해왔는가를 반성할 때,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진입장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읽기가 혁명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진입장벽이 높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진입장벽의 핵심이 추상성이에요. 텍스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추상성 때문에,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과는 달리 자기 머릿속에서 그 추상적인 개념들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텍스트는 읽어봤자 시각화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계속 읽어낼 수가 없죠. 그에 반해 영화는, 예술영화는 통속영화는 보이는 게 있으니까 보려고만 하면 계속 갈 수 있는 거죠. 이게 무얼 의미하냐면, 이 추상적인 글을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나한테 개념, 명제, 배경지식, 이런 자원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영상과 비교하면 현격하게 높은 자원이 필요한 거예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영화 〈매트릭스〉의 공간 이름인 컨스트럭트-건설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요소가 읽기를 굉장히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사유역량이 만들어지며 유지되는지는 아예 못 보고, 비문자적인 것은 천박하고 저급한 방식이라고 일축하며 읽기를 통한 것만이 고상하고 고급한 것인 양 평가하게 만들죠.
그래서 저는 읽기의 사유역량을 특권화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 P130

고 생각해요. 오히려 읽기의 진입장벽이 무엇인지를 첫 번째로 봐야 해요. 두 번째는 그 진입장벽을 낮추거나 뛰어넘으려는 교육을 해왔느냐, 이것이 성찰의 지점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교육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원을 대중적으로 만들어왔는가를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 P131

진입장벽을 통과하는 게 특히 어려운 영역이 ‘쓰기‘죠. 어렵기 때문에 갖게 되는 쓰기에 대한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텍스트의 아우라가 있는 거죠.
요즘 들어 사람들이 다 책을 쓰고 싶어하는 게 그 아우라 때문이죠. - P132

리터러시의 문제를 그저 개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안이하고도 위험합니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묻히는 상황에 터하고 있어요. 한 사회가 자신의 이슈를 발굴해내고 이를 사회문화적인 공론장으로, 나아가 제도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 - P133

량을 갖추었는가, 이것이 리터러시의 척도인 겁니다. 말해야 할 것에 침묵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말할 수있는 자‘에게서 리터러시의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죠.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문해력을 갖춘‘ 이들, ‘말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이들, 나아가 이들을 운용할 자본을 가진이들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빈곤이 가지지 못한 자의 책임이 아니듯, 비문해는 문해력 습득에 실패한 자의 책임이 아니죠. 오히려 그반대 아닐까 싶어요. ‘배운 놈들이 더한다‘는 말은 리터러시를 철저히 사유화한 이들에 대한 이 사회의 경고일지도 몰라요. - P134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리터러시를 개인의 역량으로만 보고 그 개인의 역량을 비판하는 것은 사회의 책임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읽기와 쓰기는 다른 매체와 달리 진입장벽이 분명히 높습니다. 그리고 그 높은 진입장벽에 의해 엘리트주의적인 요소가 있죠. 저는 이것은 읽기의 - P135

장점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진입장벽을 넘을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것이겠죠. 저는 읽기와 쓰기가 어렵다는 것, 재밌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P136

리터러시 역량의 개인화에 대해 제가 더욱 우려하는 것은, 소위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되는 거예요. 지금 한국사회에서나타나는 많은 혐오, 그게 여성 혐오든 노인 혐오든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든, 그 바탕에는 리터러시 문제가 깔려 있거든요. 만날 하는말이 "노인네들 유튜브 그만 보고 책 좀 읽어라, 신문 좀 읽어라."인 이유 또한 그들의 지적 능력에 대한 비하를 통해서 혐오를 정당화하 - P138

기 위해서죠. 그 뿌리에 리터러시의 개인화가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터러시가 개인적 역량이지만 그 역량을 키우는 것은 사회적 역량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사회적 역량이 되었을 때만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는 혐오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어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노인 혐오는 대표적으로 리터러시를 무기로 삼은 혐오예요. 무지하고 무식하다는 혐오죠. 이들은 무지하고 무식하여 자기 생각이 없으니 선동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자들은 공론장을 오염시키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위험한자들이기에 배제되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리터러시의 이름으로 혐오가 정당화되는 겁니다. 여성이나 소수자,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혐오도 여기에 뿌리를 둔 것이 많습니다. - P139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읽기에서 보기로의 전환은 몸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 보기 중심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중심으로 현재의 리터러시에 관해 말해보는 것이 어떨까 해요. 긍정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인 부분도 있을 테니까요.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만, 미디어의 변화 속에서 가르치는 일을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긴 글을 읽지 못하고 너무 지겨워한다는 말입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는 저도 많이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글을 좋아하는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면 대부분 긴 글을 읽지 못하고, 대하소설은 엄두도 못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사들도 학생들이 책 한 권 전체를 다 읽은 경험이 너무 없다고 걱정합니다.
읽기가 주는 역량에 대해 다시 얘기하면, 긴 글을 읽는 게 지루하고 재미도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에게 중요한 능력이,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며, 단순화되지도 않을뿐더러 단순화하는 게 좋은 것도 아니에요. 단순하게 인식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선악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등의 문제가 얽혀 있어요. 학문의 세계에서는 복잡성의 과학 등이 등장하면서 진리는 단순하다는 인식을 경계하는 분위기인데,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진리는 단순하다느니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복잡 - P143

한 현상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이것은 한 사람의 역량으로 볼 때도 문제지만, 한 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서도 문제적인 일이 되죠. - P144

딱 세 단계로 나눌 수는 없지만 단계성이 있는 것 같아요. 격식을 갖춘 책의 정보와 일반 웹문서의 정보, 다음에 동영상의 정보, 각각의 영역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고 했을 때 책, 위키피디아 등의 웹문서, 동영상의 차례로 지식의 호흡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제기되는데, 가짜뉴스는 완전히 틀린 정보를 주는 거지만 요약본은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정보를 준다는 거예요. 가짜라고 볼 수는 없지만 굉장히 주관적으로 요약될 수밖에 없어요. - P146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단편적인 정보를 담은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그렇게 요약되고 편집된 동영상을 기본 미디어로 삼아서 지식과 정보를 얻다 보면 일종의 관성, 아비투스가 생긴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걸 빨리,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건 소화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미디어를 접하면 지루해서 끝까지 볼 엄두가 안 나죠. 이런 변화 속에서 미디어를 편식하게 되고요. 몸은 점점 특정한 길이와 포맷의 영상에 익숙해지죠. - P147

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미디어도 중립적일 수 없죠. 특정한 매체 또한 단지 연결통로로만 기능하지는 않아요. 어떤 면에서는 연결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분리하고 단절시키는 거예요. 웹툰을 통해 정보를 접할 때와 영상을 통해 정보를 접할 때, 인지나 정서가 반응하는 방식은 다르죠. 라디오 청취에서의 정보 처리와 소설 읽기에서의 정보 처리 또한 다르고요. 비슷한 내용을 서로 다른 매체로 접한다고 할 때 우리 뇌는 단지 ‘비슷한 내용‘만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매체성‘을 경험합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매체에 따라 우리 뇌의 활성화 패턴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어요. 패턴이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뇌가 달라진다는것, 우리 몸의 습속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든 동영상이든 당장 필요한 지식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몸과 매체가 맺는 관계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고, 매체의 강점과 한계, 매체가 우리 머릿속에서 일으키는 변화, 매체의 사회적 영향 등을 무시하는 것이죠. 처리 과정 없이 산출물이 나올 수는 없잖아요. 매체를 사용할 때 수반되는 경험을 무시하고 써먹을 수 있는 지식만 결과로 보는 것도 위험하고요.
다매체 시대의 리터러시 교육을 고민할 때 ‘메타인지(metacognition)‘를 한 축으로 설정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미디어를 무색무취하고 중립적인 도구로 보는 게 아니라, 개별 매체의 성격을 따져보면서 어떤 면에서 강점이 있고 어떤 면에서 약점이 있는지 명확하게알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랬을 때 내가 책을 읽거나 웹툰을 보거나 - P151

영상을 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거든요. 그러지 않으면 그냥 보는 거죠. 뇌는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고요.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영상은 우리 뇌에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라고요. - P152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실 읽기와 보기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요새 많이 하는 말로 ‘어디서 읽고 보는가‘라는 플랫폼의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파일을 다운받아서 보는 것, 혹은 넷플릭스를 보는 것 등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읽는 것과 보는 것 중에서 어떤 것에 익숙해져 있는가라는 문제가 하나 있고, 어디에서 읽고 보는가라는 문제가 또 하나 있을 것 같습니다.
플랫폼, 매체, 그리고 인간의 행위 사이에 어떤 순환이 있는 것 같아요. 먼저 어떤 특정한 플랫폼, 공간에서 매체의 변화가 세계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게 세계를 대하는 몸의 변화를 일으키죠. 그러고 나면 그 변화된 몸으로 다른 매체들을 사용해 세계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세계를 만나는 공간, 즉 플랫폼의 특성이 또 매체의 특성을 넘어 주체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점에서, 아무래도 인터넷이라는 플랫폼 혹은 공간의 특성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공간의 읽기와 쓰기 사이에 아이러니한 비대칭성이 있다고 보는데, 쓰는 양과 길이는 무한대로 늘어나는 반면, 읽는 호흡은 점점 짧아지거나 요약적으로 되는 거죠. 인터넷에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시시콜콜하게, 별 쓸데없는 것까지 다 쓰고 있어요. SNS를 보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공간에 왜 쓰지 싶은 글이 많습니다. 이전 같으면 화장실에 익명으로 쓰던 글들이죠.
그러다 보니,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뭘 이런 걸 쓰냐." 또 "뭘 이 - P156

렇게 길게 쓰냐." 하면서 휙휙 넘기며 확인만 하려고 하죠. 쓰는 사람은 길게 쓰는데 읽는 사람은 촘촘하게 읽지 않아요. 그렇게 긴 글, 짜임새가 촘촘하지 못한 글을 다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거죠. 그 결과 그 사람이 글을 이끌어가고 구성하는 방식, 방법론 등은 간과하고 결론과 핵심만 봐요. 이건 깊이 있게 글을 읽는 것이 아니죠.
쓰는 사람은 무한대로 길게 쓰고, 읽는 사람은 가급적 결론만 요약해서 보려고 하는 이 비대칭성에 의해 독자의 죽음과 저자의 죽음이 모두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독자는 그저 글을 읽는 사람,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 깊이 있게 읽는 사람을 의미하는데요. 단순하게 읽는 사람이 아니에요.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복잡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깊이 있게 읽는 독자입니다. 글을 촘촘하게 읽으며 그 사람이 글을 구성해가고 논증해가는 방식, 즉 방법론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독자입니다. 이런 독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또한 이 비대칭성에 의해 저자도 죽어갑니다. 문자매체 중에서도 인쇄매체의 시대에 저자는 한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저자에게 무한대의 지면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칼럼은 200자 원고지 10장에서 20장, 단행본에 들어가는 한 꼭지는 100장 이내, 논문은 책으로 제본했을 때 100쪽에서 200쪽 등 글의 길이에서 한계가 주어지죠. 그렇기에 저자는 이 한계 내에서 어떻게 해야 자기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무엇보다 글의 짜임새, 구조, 글쓰기의 방법론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죠. 그런데 인터넷에 글을 쓰게 되면서, 쓰는 사람은 ‘장황하게‘ 글을 쓰고 난 다음에 ‘간략 - P157

하게‘ 명료한 메시지와 정보를 전달하게 되었어요. 한계 내에서 글을다루기 위해 짜임새를 만들어야 하는 저자의 죽음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터러시 교육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너무 많은 걸 읽어요. 짧고 난삽한 글들을 너무 많이 읽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걸 다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세상의 그 많은 지식을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알아야 될 것에 대해서만 알면 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 국민이 전문가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 사건을 알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인지식까지 죄다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내가 전문가나 준전문가적인 앎에 이를 수 있는가, 그건 아니거든요.
저는 이게 교육이나 리터러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고 생각해요. 근대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매개체가 있어야 하거든요. 의사를 비롯해 어떤 직능단체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논쟁이 생길 때 굳이 내가 그 내용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돼요. - P158

이와 관련해 ‘내재화(internalization)‘라는 개념을 살필 필요가 있어요. 러시아의 심리학자이자 교육이론가인 비고츠키의 생각을 기반으로 한 개념인데요. 어떤 기능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내면화되지 않아요. 30년 동안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고 해서 계산 능력이 - P164

키워지지는 않는 거죠. 그런데 30년간 주판으로 주산을 했다면 머릿속에서 웬만한 계산은 넉넉히 해낼 수 있거든요. 계산 능력이 내면화되어서 암산이 가능해지는 거죠. 우리가 검색을 하면 필요한 지식이 바로 나온다는 것은 내재화의 가능성, 내재화 이후 숙성되는 과정의 가치를 생각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봐요. 세상의 그 많은 ‘찾으면 나오는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는가, 그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 지식들을 내 머릿속에 가져온 뒤 기존의 경험과 지식, 또 새로 들어올 지식과 버무리고 숙성시키고 발효시켜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또 내 삶에서 어떤 상황에 닥치든 그걸 끄집어내서 맥락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역량, 이걸 보통 지혜라고 부르잖아요. 그 지난한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찾으면 나온다고 하는 건 배움과 발달의 본질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검색의 시대, 또 쉽게 이해되는 지식의 시대로 조금씩 가고 있고, 초등학생의 경우엔 조금 더 심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지금 리터러시 교육에서 추구해야 할 바는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내가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에 있는 지식을 엮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무엇을 새롭게 나의 지식과 지혜로 버무려 발효해내는가를 강조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걸 제가 다른 책에서 강조했던 표현으로 바꾸면, 리터러시가 앎의 문제가 아니라 다룸의 문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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