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상한(queer) 몸을 가지고 있다. ‘모든 몸은 아름답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때때로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서 채택하는 선언이지만 각자가 가진 차이들을 쉽게 지우거나 고유한 삶의 방식들을 질문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너무 뭉뚝하고 얄팍하다. 장애여성들은 정상성의 기준을 해체하고 사회의 규범에 도전하는 퀴어한 사람들이며 각기 다른 몸을 가지고 고유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퀴어함은 성소수자를 ‘이상하다‘며 비하하는 말이었지만, 사회와 불화하는 그 이상함이 사회가 추구하는 정상성의 폭력을 알아차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하는 정신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사회와 국가는 온전하지 못한 기능이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 P20
불구의 정치가 피어난다. 불구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불구의 정치를 통해서 단지 사회질서에 통합되기 위한 장애 극복을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이상한 몸은 불구의 정치를 위한 우리의 힘이다. 이런 우리의 퀴어함이 자랑스럽고, 퀴어한 존재들과 동료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 P21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 남아서 운동을 해야 하는 걸까? 우리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런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져본다. 비장애 사회와 장애 사회가 같은 꿈을 꾸나? 어떤 세상을 꿈꾸지? 행복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이라는 게 뭘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도 이어진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정말 평등해질 수 있을까? - P59
"나는 장애가 있는 그대로를 원해. 이 자체로서 행복하기를 바라지. 근데 가끔 내가 모르겠는 것이 정말 그게 다인가? 계단이 하나도 없고 평평하고 그런 데서 막 전동휠체어로다닌다고 하면 내가 행복한가? 가끔은 나도 두 발로 걷고 싶지 않을까?" 이런 불경스러운 질문을 해본다. "내가 가끔 두 발로 걸고 싶다는 욕구가 있을 때, 두 발로 걷게 만들어준다면, 그게 평등한 건가?" 올해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패럴림픽이 시작됐을 때 패럴림픽 개막식에는 어떤 척수장애인이 걸을 수 있게 해주는 로봇을 입고 성화 봉송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장애인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좋은 기술로 보이지만 그 기술에 투자하는 자본의 욕망은 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손상을 ‘보조‘하기 위해서 개발되는 기술의 한계는 모호하다. 예컨대 인간의 팔을 대체하는 인공지능의 팔은 슈퍼인간이며, 인간의 능력을 수백 배 능가하는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할 수도 있다. 무언가가 실현된다고 할 때 그것이 누구의 욕망이고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해 집요한 질문과 날카로운 시선이 필요한 이유를 알려주는 장면이다. 지금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인권과 평등의 담론 속에서도 장애인은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미 규범이 된 인권과 평등은 충분하지 않다는 감각도 동시에 생긴다.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있 - P60
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라고 말하는 것. 무척 쉬운 말 같지만 나의 모든 욕망과 욕구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실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나의 욕구와 욕망은 변화무쌍하다"는 영희의 일갈은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구분, 공적인 가치와 사적인 가치를 나누는 기준을 다시 보게 만들고 장애인 해방의 지향과 목표를 확장하고 수정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자유롭고 평등해진다는 해방은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P61
장애를 가진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일은 여전히 몇 가지 주제로 한정되어 있다. 아니 사실은 한 가지다. 장애 극복 서사를 보여주거나 의료적 도움을 주는 일이나 경제적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들의 주제는 다 같다. 그건 흔히 동기부여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영감 포르노다. 영감 포르노는 호주의 코미디언으로 활약한 장애여성 스텔라 영(1982~2014)을 - P67
통해 알려진 말이다. 그는 장애인의 몸과 고난, 노력이 비장애인에게 삶의 동기부여로만 활용됨으로써 장애인의 이미지가 착취된다고 주장했다. ‘장애를 극복한 사나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엄마‘ 등으로 소개되는 장애 극복 이야기와 사지 없이도 훌륭하게 과업을 수행하고 환히 웃는 얼굴 이미지들은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낙담하고 실패한 비장애인들에게 동기부여하기 위해서만 사용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오기로 결심한 장애인들의 동기는 다양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프로그램 진행자의 코멘트, 내레이션, 자막은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작동되고 장애인의 삶은 프로그램의 목적에 맞게 배치된다. 그리고 대부분 텔레비전에 나온 이후의 삶은 완전히 잊힌다. (...) 그 프로그램에는 수술 후 - P68
초기 재활 치료를 받는 과정까지 담겼는데, 레드는 발음이 예전보다 또렷해졌고, 보조기를 차고 걷는 연습까지 할 수 있었다. 항상 혼자 바닥에서 땅을 보고 밥을 먹다가 누군가와 함께 마주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레이터는 "바로 자신의 잃어버렸던 삶의 새로운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죠. 제2의 인생,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OOO 씨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라는 멘트를 하면서 프로그램은 끝났다. 레드는 사실 인생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레드는 앉아서 밥을 먹게 되어 ‘사람답다‘라고 했지만 ‘사람답지 못했던‘ 시절에도 밥을 먹고, 대학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고, 누군가와 섹스를 했다. 영감 포르노의 주인공이 반드시 영감 포르노의 피해자는 아니다. 텔레비전에 출현했던 많은 장애인이 그랬듯이 레드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술 비용을 해결했고(TV에 출현해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도 있고, 성형수술 프로그램에 출현해 ‘새 삶을 찾은‘ 사람도 많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수술 방법에 대한 공신력을 확보했다. 텔레비전에 사생활이 노출되고 자신의 삶이 프로그램의 목적에 맞게 배치되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또 하나의 극복 서사로 사용될 뿐이겠지만 수술을 하고 난 뒤 레드의 삶은 조금 달라졌다. 이 삶의 변화는 텔레비전에 출현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인지, 아니면 수술과 재활을 통해 기 - P69
능이 회복된 것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수술 후 찾은 자신감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사실 수술을 통해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엄밀히 말해 운전을 하게 된 것밖에 없다. 레드는 수술 이후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출퇴근하는 것과 운전하기라고 말했다. 프로그램은 힘겨운 일상을 살다가 수술이 성공한 후 재활을 시작하는 레드의 모습으로 끝났지만, 레드의 삶은 여전히 레드가 저지르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 P70
전형화는 소수자의 삶을 차별하는 손쉬운 방법이다. 치료, 극복, 불행, 불편 등의 부정적 서사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혐오와 차별로 구성된다. 많은 장애인들은 자신이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물론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은 비장애인과 완전히 똑같은 삶을 산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생의 과정에서 겪는 감정, 관계의 역동, 실패와 성공, 변화들을 겪어내면서 사는 것은 누구나 비슷하다. 그 보편성과 장애라는 고유성 사이에 일어나는 복합적인 삶의 모습을 설명하며,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경순은 쉽지 않았다. - P117
장애여성 양육 서사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장애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아이를 낳아 키웠거나, 장애를 그대로 물려받아 힘든 삶이 대물림된다거나, 장애를 가졌지만 평범하고 밝게 살아간다거나. 이런 극복과 감동 서사를 벗어나기 힘들다.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세대를 걸쳐 삶의 방식을 이어가면서도 해당 시대의 사회 문화와 관계를 맺고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오랫동안 우리는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오지 않았다. 다음 세대의 한 구성원으로서 장애인을 그리지 못하는 것은 지금 세대에 장애인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살아가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경순은 힘주어 말한다. "혼자선 되게 약해요. 사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강하게 나갔지"라며 자신을 지탱하는 딸들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장애가 유전된다는 걸 발견하면, 불행의 대물림만을 우려한다. 그러나 경순과 딸들이 서로 의존하며 만든 연대는 샤르코 마리 투스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도 살아가는 방식과 지혜로 이어졌다. 우리는 세 모녀 덕에 의학 서적에 나오지 않는 지식과 삶의 방식을 얻게 되었다. 불행이 아닌 질병과 장애가 있는 몸으로 서로를 지원하며,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원칙을 경순은 대물림해주었다.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그녀가 버텼던 시간과 세웠던 원칙들을 세상이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 P122
당시 조화영이 경험한 성인 발달장애인 직업교육훈련은 참여자가 자신의 몸을 자발적으로 움직여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일에 자신의 몸을 기계처럼 맞추는 과정이었다. 그곳에선 몸을 자유롭게 쓴 적이 별로 없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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