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정리하면, 글을 쓰고 읽는 것이 말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것과 달리 인간의 사유하는 역량을 비약적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추상성이 높아짐으로써 보다 본질적인 것을 사유하게 되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본질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그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체계적이고 치밀해야 합니다. 따라서 내 이야기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치밀한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바로 이것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인간의 사유역량을 비약적으로 높였다고 말하는 이유겠죠. 말로는 이 치밀함과 체계성을 도저히 담을 수 없거든요. - P101
물론 문자와 읽기의 추상성과 기호성이 너무 높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오자와 마키코가 얘기한 것처럼,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 에게 너무 일찍이 추상적이고 기호학적인 것을 다루게 함으로써 현실을 망각시킨다는 점입니다. 삶의 구체성은 놓치게 되는 것이에요. 소위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보편성을 생각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구체성을 망각하는 형태로 가면 반쪽밖에 못 취하는 것이 되겠죠. 맥루언을 비롯해 미디어학자들이 얘기했다시피, 어떤 미디어를 장착해서 그것에 연결된다는 것은 그 미디어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이 할 수 없는 것까지 받아 안는 것이거든요. 보통 자원(affordance)과 제약(constraint)이라는 개념을 많이 쓰는데, 특정한 매체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고, 이를 얻는 동시에 어떤 제한이 생긴다는 거죠. - P102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여러 교과뿐 아니라 매체들 간의 관계, 다양한 리터러시 사이의 균형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봐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삶과 어떻게 접속하느냐죠. 각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잘 알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매체를 활용하는 경험이 많아져야 합니다.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책 속이나 문제집 안에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말글을 사용하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경험을 통해 텍스트라는 기술을 유연하게 다루는 역량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그런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잘 키워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어요. - P105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결국읽기의 문제와 결합돼 있다고 봐요. 예전보다 독서를 안 한다고 한탄 - P110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읽는 양으로 보면 지금 훨씬 많이 읽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든요. 양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읽는데, 한 이벤트의 길이라는 면에서 보면 굉장히 짧아졌어요. 길이가 짧아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가 볼 때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이 짧아지고 작아진 것입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글쓰기가 대유행입니다만, 저는 좀 냉소적입니다. 읽기가 기반되어 있지 않은데 쓰기가 가능할 것인가 싶거든요.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이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글은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글을 쓸 때는 그 글이 당대를 넘어 후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질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글은 말과 달리 기록이잖습니까. 그 - P111
러니 글을 쓰는 것은 추상성을 높여 치밀하게, 체계적으로 구축함으로써 한편에서는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한 권의 책이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세계 내의 정합성과 논리성과 인과성과 핍진성을 다 맞춰내야 하는 거죠. 그런 걸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쓸 수가 있느냐?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쓰게 하더라고요. 매뉴얼이 있어요. 공장에서 제품이 나오는 것처럼 매뉴얼에 맞춰서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매뉴얼에 맞춰 썼을 때 그 사람이 과연 저자(author)가 되는 거냐, 아니죠. 그 글에 무슨 독창성(authenticity)이 있겠어요. 자기 사유가 없는데 독창성이 있을 리 없죠. - P112
선생님이 텍스트성의 역사를 말씀하시며, 초텍스트성 문화에서는 더 이상 정전이라는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정전은 없고, 주석으로서의 지식, 의견의 세계로 넘어갔어요. 의견의 세계에서 내 의견을 보태기 위해서는 이미 제시되어 있는 의견‘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듣기로 되는 게 아니고 읽기로만 가능해요. 듣는 것은 단수성이거든요. 이걸 듣고 다음 걸 들을 때는 and로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거고 그다음에 저건 저거, 이렇게 단수성이 죽 연결되는 거죠. 단수성이 연결된다고 해서 복수성의 세계가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복수성의 세계란 시간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시간을 공간화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한 공간에 여러 개가 있어야 복수성이라고 인지되니까요. 어찌 보면 기록이라는 것, 읽기라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해놓은 거죠. 한 공간에서 죽 읽게 되는⋯⋯. 글을 쓴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써놓는 순간 책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수성이 - P113
텍스트와 읽기가 가져다주는 역량이라는 면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다시, 책으로》에서 매리언 울프는 텍스트와 읽기가 공감능력을 키워준다는 얘기를 합니다. 마키아벨리의 사례를 드는데, 마키아벨리는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옷을 입고 책을 읽었다고 해요. 예를 들자면, 12세기에 쓰인 책을 읽으면 12세기 때 옷을 입고 영국 사람이쓴 책을 읽으면 영국 옷으로 바꿔 입고 읽었다는 거죠. 책을 읽는 것은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지함과 흥분을 유지하기위해서라고 합니다. - P123
울프는 이걸 공감능력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이 책과 책 읽기가 제공하는 고유의 역량이라고 하죠. 그런데 사유라는 측면에서는 공감능력이라기보다는 역지사지의 사유역량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변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그리스 신화가 ‘변신 이야기‘ 이지 않습니까. 변신은 인간의 오랜 꿈입니다. 하지만 신이나 천사 같은 존재와 달리 인간은 변신을 할 수가 없죠.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고, 이런 점에서 인간은 가능성을 빼앗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되는 가능성을 빼앗긴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통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언어예요. 우리가 뭔가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할 때를 한번 생각해보죠.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만 그 이미지들이 다 언어적이죠. 말과 글입니다. 다른 존재에 공감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게 하는 것, 생각에서라도 남이 되어보는 것, 그것이 역지사지이며, 아렌트는 그것을 사유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사유역량을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최근에 발간된 《공감의 배신》의 저자 폴 블룸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공감이라는 게 다른 존재의 입장이나 처지가 되어보는 것, 즉 역지사지하는 사유를 자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게 폴 블룸의 시각입니다. 그의 주장처럼 저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능력이 아니라 역지사지하는 사유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 P124
반복합니다만, 인간의 사유역량의 스케일을 획기적으로 키운 것이 읽기죠. 이론적으로 보면 내가 아직 읽지 못한 무한대의 텍스트가 있습니다. 그 무한대의 텍스트가 나의 어떤 상상력을 자극할지 모릅니다. 변신의 폭이라는 점에서 글은 시공간을 넘어 무한대의 경험을 지금 이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로 끌어오죠. 말의 세계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이에요. 그럼, 과연 이렇게 사유역량을 확장시키는 것이 읽기만의 특권일까요? 물론 저는 읽기가 일으킨 혁명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읽기만의 특권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고 봐요. 오히려 읽기를 이렇게 특권화하는 것이 사유에 진입하는 장벽을 높이 쌓는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P125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리터러시 교육을 제대로 해왔는가를 반성할 때,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진입장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읽기가 혁명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진입장벽이 높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진입장벽의 핵심이 추상성이에요. 텍스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추상성 때문에,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과는 달리 자기 머릿속에서 그 추상적인 개념들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텍스트는 읽어봤자 시각화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계속 읽어낼 수가 없죠. 그에 반해 영화는, 예술영화는 통속영화는 보이는 게 있으니까 보려고만 하면 계속 갈 수 있는 거죠. 이게 무얼 의미하냐면, 이 추상적인 글을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나한테 개념, 명제, 배경지식, 이런 자원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영상과 비교하면 현격하게 높은 자원이 필요한 거예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영화 〈매트릭스〉의 공간 이름인 컨스트럭트-건설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요소가 읽기를 굉장히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사유역량이 만들어지며 유지되는지는 아예 못 보고, 비문자적인 것은 천박하고 저급한 방식이라고 일축하며 읽기를 통한 것만이 고상하고 고급한 것인 양 평가하게 만들죠. 그래서 저는 읽기의 사유역량을 특권화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 P130
고 생각해요. 오히려 읽기의 진입장벽이 무엇인지를 첫 번째로 봐야 해요. 두 번째는 그 진입장벽을 낮추거나 뛰어넘으려는 교육을 해왔느냐, 이것이 성찰의 지점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교육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원을 대중적으로 만들어왔는가를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 P131
진입장벽을 통과하는 게 특히 어려운 영역이 ‘쓰기‘죠. 어렵기 때문에 갖게 되는 쓰기에 대한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텍스트의 아우라가 있는 거죠. 요즘 들어 사람들이 다 책을 쓰고 싶어하는 게 그 아우라 때문이죠. - P132
리터러시의 문제를 그저 개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안이하고도 위험합니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묻히는 상황에 터하고 있어요. 한 사회가 자신의 이슈를 발굴해내고 이를 사회문화적인 공론장으로, 나아가 제도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 - P133
량을 갖추었는가, 이것이 리터러시의 척도인 겁니다. 말해야 할 것에 침묵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말할 수있는 자‘에게서 리터러시의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죠.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문해력을 갖춘‘ 이들, ‘말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이들, 나아가 이들을 운용할 자본을 가진이들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빈곤이 가지지 못한 자의 책임이 아니듯, 비문해는 문해력 습득에 실패한 자의 책임이 아니죠. 오히려 그반대 아닐까 싶어요. ‘배운 놈들이 더한다‘는 말은 리터러시를 철저히 사유화한 이들에 대한 이 사회의 경고일지도 몰라요. - P134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리터러시를 개인의 역량으로만 보고 그 개인의 역량을 비판하는 것은 사회의 책임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읽기와 쓰기는 다른 매체와 달리 진입장벽이 분명히 높습니다. 그리고 그 높은 진입장벽에 의해 엘리트주의적인 요소가 있죠. 저는 이것은 읽기의 - P135
장점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진입장벽을 넘을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것이겠죠. 저는 읽기와 쓰기가 어렵다는 것, 재밌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P136
리터러시 역량의 개인화에 대해 제가 더욱 우려하는 것은, 소위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되는 거예요. 지금 한국사회에서나타나는 많은 혐오, 그게 여성 혐오든 노인 혐오든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든, 그 바탕에는 리터러시 문제가 깔려 있거든요. 만날 하는말이 "노인네들 유튜브 그만 보고 책 좀 읽어라, 신문 좀 읽어라."인 이유 또한 그들의 지적 능력에 대한 비하를 통해서 혐오를 정당화하 - P138
기 위해서죠. 그 뿌리에 리터러시의 개인화가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터러시가 개인적 역량이지만 그 역량을 키우는 것은 사회적 역량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사회적 역량이 되었을 때만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는 혐오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어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노인 혐오는 대표적으로 리터러시를 무기로 삼은 혐오예요. 무지하고 무식하다는 혐오죠. 이들은 무지하고 무식하여 자기 생각이 없으니 선동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자들은 공론장을 오염시키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위험한자들이기에 배제되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리터러시의 이름으로 혐오가 정당화되는 겁니다. 여성이나 소수자,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혐오도 여기에 뿌리를 둔 것이 많습니다. - P139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읽기에서 보기로의 전환은 몸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 보기 중심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중심으로 현재의 리터러시에 관해 말해보는 것이 어떨까 해요. 긍정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인 부분도 있을 테니까요.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만, 미디어의 변화 속에서 가르치는 일을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긴 글을 읽지 못하고 너무 지겨워한다는 말입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는 저도 많이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글을 좋아하는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면 대부분 긴 글을 읽지 못하고, 대하소설은 엄두도 못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사들도 학생들이 책 한 권 전체를 다 읽은 경험이 너무 없다고 걱정합니다. 읽기가 주는 역량에 대해 다시 얘기하면, 긴 글을 읽는 게 지루하고 재미도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에게 중요한 능력이,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며, 단순화되지도 않을뿐더러 단순화하는 게 좋은 것도 아니에요. 단순하게 인식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선악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등의 문제가 얽혀 있어요. 학문의 세계에서는 복잡성의 과학 등이 등장하면서 진리는 단순하다는 인식을 경계하는 분위기인데,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진리는 단순하다느니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복잡 - P143
한 현상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이것은 한 사람의 역량으로 볼 때도 문제지만, 한 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서도 문제적인 일이 되죠. - P144
딱 세 단계로 나눌 수는 없지만 단계성이 있는 것 같아요. 격식을 갖춘 책의 정보와 일반 웹문서의 정보, 다음에 동영상의 정보, 각각의 영역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고 했을 때 책, 위키피디아 등의 웹문서, 동영상의 차례로 지식의 호흡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제기되는데, 가짜뉴스는 완전히 틀린 정보를 주는 거지만 요약본은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정보를 준다는 거예요. 가짜라고 볼 수는 없지만 굉장히 주관적으로 요약될 수밖에 없어요. - P146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단편적인 정보를 담은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그렇게 요약되고 편집된 동영상을 기본 미디어로 삼아서 지식과 정보를 얻다 보면 일종의 관성, 아비투스가 생긴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걸 빨리,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건 소화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미디어를 접하면 지루해서 끝까지 볼 엄두가 안 나죠. 이런 변화 속에서 미디어를 편식하게 되고요. 몸은 점점 특정한 길이와 포맷의 영상에 익숙해지죠. - P147
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미디어도 중립적일 수 없죠. 특정한 매체 또한 단지 연결통로로만 기능하지는 않아요. 어떤 면에서는 연결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분리하고 단절시키는 거예요. 웹툰을 통해 정보를 접할 때와 영상을 통해 정보를 접할 때, 인지나 정서가 반응하는 방식은 다르죠. 라디오 청취에서의 정보 처리와 소설 읽기에서의 정보 처리 또한 다르고요. 비슷한 내용을 서로 다른 매체로 접한다고 할 때 우리 뇌는 단지 ‘비슷한 내용‘만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매체성‘을 경험합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매체에 따라 우리 뇌의 활성화 패턴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어요. 패턴이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뇌가 달라진다는것, 우리 몸의 습속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든 동영상이든 당장 필요한 지식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몸과 매체가 맺는 관계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고, 매체의 강점과 한계, 매체가 우리 머릿속에서 일으키는 변화, 매체의 사회적 영향 등을 무시하는 것이죠. 처리 과정 없이 산출물이 나올 수는 없잖아요. 매체를 사용할 때 수반되는 경험을 무시하고 써먹을 수 있는 지식만 결과로 보는 것도 위험하고요. 다매체 시대의 리터러시 교육을 고민할 때 ‘메타인지(metacognition)‘를 한 축으로 설정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미디어를 무색무취하고 중립적인 도구로 보는 게 아니라, 개별 매체의 성격을 따져보면서 어떤 면에서 강점이 있고 어떤 면에서 약점이 있는지 명확하게알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랬을 때 내가 책을 읽거나 웹툰을 보거나 - P151
영상을 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거든요. 그러지 않으면 그냥 보는 거죠. 뇌는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고요.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영상은 우리 뇌에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라고요. - P152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실 읽기와 보기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요새 많이 하는 말로 ‘어디서 읽고 보는가‘라는 플랫폼의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파일을 다운받아서 보는 것, 혹은 넷플릭스를 보는 것 등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읽는 것과 보는 것 중에서 어떤 것에 익숙해져 있는가라는 문제가 하나 있고, 어디에서 읽고 보는가라는 문제가 또 하나 있을 것 같습니다. 플랫폼, 매체, 그리고 인간의 행위 사이에 어떤 순환이 있는 것 같아요. 먼저 어떤 특정한 플랫폼, 공간에서 매체의 변화가 세계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게 세계를 대하는 몸의 변화를 일으키죠. 그러고 나면 그 변화된 몸으로 다른 매체들을 사용해 세계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세계를 만나는 공간, 즉 플랫폼의 특성이 또 매체의 특성을 넘어 주체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점에서, 아무래도 인터넷이라는 플랫폼 혹은 공간의 특성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공간의 읽기와 쓰기 사이에 아이러니한 비대칭성이 있다고 보는데, 쓰는 양과 길이는 무한대로 늘어나는 반면, 읽는 호흡은 점점 짧아지거나 요약적으로 되는 거죠. 인터넷에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시시콜콜하게, 별 쓸데없는 것까지 다 쓰고 있어요. SNS를 보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공간에 왜 쓰지 싶은 글이 많습니다. 이전 같으면 화장실에 익명으로 쓰던 글들이죠. 그러다 보니,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뭘 이런 걸 쓰냐." 또 "뭘 이 - P156
렇게 길게 쓰냐." 하면서 휙휙 넘기며 확인만 하려고 하죠. 쓰는 사람은 길게 쓰는데 읽는 사람은 촘촘하게 읽지 않아요. 그렇게 긴 글, 짜임새가 촘촘하지 못한 글을 다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거죠. 그 결과 그 사람이 글을 이끌어가고 구성하는 방식, 방법론 등은 간과하고 결론과 핵심만 봐요. 이건 깊이 있게 글을 읽는 것이 아니죠. 쓰는 사람은 무한대로 길게 쓰고, 읽는 사람은 가급적 결론만 요약해서 보려고 하는 이 비대칭성에 의해 독자의 죽음과 저자의 죽음이 모두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독자는 그저 글을 읽는 사람,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 깊이 있게 읽는 사람을 의미하는데요. 단순하게 읽는 사람이 아니에요.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복잡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깊이 있게 읽는 독자입니다. 글을 촘촘하게 읽으며 그 사람이 글을 구성해가고 논증해가는 방식, 즉 방법론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독자입니다. 이런 독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또한 이 비대칭성에 의해 저자도 죽어갑니다. 문자매체 중에서도 인쇄매체의 시대에 저자는 한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저자에게 무한대의 지면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칼럼은 200자 원고지 10장에서 20장, 단행본에 들어가는 한 꼭지는 100장 이내, 논문은 책으로 제본했을 때 100쪽에서 200쪽 등 글의 길이에서 한계가 주어지죠. 그렇기에 저자는 이 한계 내에서 어떻게 해야 자기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무엇보다 글의 짜임새, 구조, 글쓰기의 방법론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죠. 그런데 인터넷에 글을 쓰게 되면서, 쓰는 사람은 ‘장황하게‘ 글을 쓰고 난 다음에 ‘간략 - P157
하게‘ 명료한 메시지와 정보를 전달하게 되었어요. 한계 내에서 글을다루기 위해 짜임새를 만들어야 하는 저자의 죽음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터러시 교육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너무 많은 걸 읽어요. 짧고 난삽한 글들을 너무 많이 읽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걸 다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세상의 그 많은 지식을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알아야 될 것에 대해서만 알면 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 국민이 전문가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 사건을 알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인지식까지 죄다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내가 전문가나 준전문가적인 앎에 이를 수 있는가, 그건 아니거든요. 저는 이게 교육이나 리터러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고 생각해요. 근대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매개체가 있어야 하거든요. 의사를 비롯해 어떤 직능단체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논쟁이 생길 때 굳이 내가 그 내용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돼요. - P158
이와 관련해 ‘내재화(internalization)‘라는 개념을 살필 필요가 있어요. 러시아의 심리학자이자 교육이론가인 비고츠키의 생각을 기반으로 한 개념인데요. 어떤 기능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내면화되지 않아요. 30년 동안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고 해서 계산 능력이 - P164
키워지지는 않는 거죠. 그런데 30년간 주판으로 주산을 했다면 머릿속에서 웬만한 계산은 넉넉히 해낼 수 있거든요. 계산 능력이 내면화되어서 암산이 가능해지는 거죠. 우리가 검색을 하면 필요한 지식이 바로 나온다는 것은 내재화의 가능성, 내재화 이후 숙성되는 과정의 가치를 생각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봐요. 세상의 그 많은 ‘찾으면 나오는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는가, 그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 지식들을 내 머릿속에 가져온 뒤 기존의 경험과 지식, 또 새로 들어올 지식과 버무리고 숙성시키고 발효시켜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또 내 삶에서 어떤 상황에 닥치든 그걸 끄집어내서 맥락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역량, 이걸 보통 지혜라고 부르잖아요. 그 지난한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찾으면 나온다고 하는 건 배움과 발달의 본질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검색의 시대, 또 쉽게 이해되는 지식의 시대로 조금씩 가고 있고, 초등학생의 경우엔 조금 더 심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지금 리터러시 교육에서 추구해야 할 바는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내가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에 있는 지식을 엮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무엇을 새롭게 나의 지식과 지혜로 버무려 발효해내는가를 강조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걸 제가 다른 책에서 강조했던 표현으로 바꾸면, 리터러시가 앎의 문제가 아니라 다룸의 문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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