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결혼 - 여자들 사이의 섹스 없는 사랑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
에스더 D. 로스블럼 & 캐슬린 A. 브레호니 지음, 알.알 옮김 / 이매진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보스턴 결혼‘은 미국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존재한 여성들 간의 동거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성애적 결혼이 여성을 완성시킨다는 남성 중심적 여성관이 팽배하던 시절 결혼은 여성에게 유일한 ‘승인‘의 장이며, 동시에 영원한 족쇄였다. 결혼은 남성의 경제력과 여성의 출산력을 교환하는 제도였고, 그 결과물인 ‘가정‘은 냉담함과 엄격함에 따라 지배됐다. 그러나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살아갈 만한 전문직 일자리들이 생겨나면서 여성은 결혼하지 않으면서도 잘 살 ‘궁리‘를 해냈다. 청교도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미혼이면 당연히 금욕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와 여성들 간의 친밀성을 결합해낸 여성의 문화적 능력이 바로 ‘보스턴 결혼‘이었다. 여성들은 마치 친밀한 부부처럼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지만, ‘섹스‘가 없는, 또는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관계로 함께 살았다. 물론 이것은 19세기 미국의 현상만은 아니다. 보스턴 결혼 같은 관계로 사는 여성들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이를 낳아줘야 한다는 강박도, 남편의 감정과 성적 충동을 일방적으로 헤아려줘야 하는 불평등도 존재하지 않는 여성들 간의 동거 관계는 평온하고 장기적이었다. 그러나 보스턴 결혼은 그뒤 ‘성적인‘ 것을 강조하고, 비혼 동거 여성을 낙인찍고 비정상화하는 사회적 변화에 밀려 더는 언어화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성관계를 뜨거운 ‘열정‘의 산물로, 여성 간의 친밀성을 레즈비어니즘으로 ‘낙인‘ 찍는 사회에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 사이의 친 - P8

밀성은 서둘러 자매애와 우정으로 정의 내려졌다. 자신의 정체성을 레즈비언으로 규정하는 여성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레즈비언은 ‘성적으로 여성에게 끌리는 존재‘라는 존재론적 속박에 눌려 헌신적이지만 섹스가 부재한 관계를 ‘위기‘로 여기기 시작했다.
《보스턴 결혼》은 이런 인식의 혼란을 해결하려 한 레즈비언 여성들이 쓴 책이다. 로맨틱하면서도 성적이지 않은 여성들 간의 관계, 격한 감정을 성기 섹스로 환원시키지 않는 관계에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지은이들은 선조 언니들의 지혜와 현대 레즈비언 여성의 자부심을 복원해 ‘신 보스턴 결혼‘을 창조해내고 있다. - P9

얼마 전 어느 워크숍에서 마니 홀은 레즈비언 관계에서 섹스가관계를 정의하는 변수가 되는 까닭을 설명했다. 홀에 따르면 우리 레즈비언들은 자신의 관계를 외부에서 거의 승인받지 못한다. 그런데 섹스를 하지 않으면, 내부의 인증조차 없어져버린다. 홀이 레즈비언들에게 추천하는 방법은 관계의 "참고서Cliff Notes"들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섹스 서사sex narrative보다는 친밀함 서사intimacy narative가 될 만한 것을. 가부장제가 좋은 관계는 섹스를 포함한다고 간주한다면, 섹스를 뒤집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 홀은 "세상에 섹스 같은 것은 없다. 로맨스니 환상이니 절정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은 없다.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것은 남성 발기다. 우리는 이제 때려치겠다고 맹세를 해야 한다"라고 썼다. - P34

관계란, 집단이 합의한 이름이 있든 없든, 관계다. 우리는 관계를 범주화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관계의 한 양태를 병리 현상으로 취급하려고 보스턴 결혼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다. 우리 언어로는 기술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존재해왔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무형의 관계들까지 레즈비언 문화의 어휘를 확장해보려는 뜻이다.
내 의견으로는, 보스턴 결혼이(아니면 다른 어떤 류의 관계든지) 상대적으로 바람직하고 건강한지는 결국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지의 문제다. 그런 관계에서 성적이지 않으려는 자신의 욕구와 동기들을 자각하고 있는가? 자기 본능과 본성을 막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의 성적 본능을 가로막으면서 다른 본능들까지 막고 있는가? 자신의 성애적인 본성에 수반된 에너지를 다른 통로로 이끌어주고 있는가? 이것이 자신에게 좋고 건강한 선택인가?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는가, 그것은자각과 의식이 동반된 선택인가? - P47

‘보스턴 결혼‘이라는 명칭의 시발점이 된 헨리 제임스의 소설《보스턴 사람들The Bostonians》(1885)은 19세기 후반 미국 도시 지역에 이런 관계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 소설에서 헨리 제임스는 서로 헌신적인 여성 커플을 여럿 등장시킨다. 제임스는 자기 소설을 "뉴잉글랜드에서 아주 흔하던 여자들의 우정 가운데 하나[에 관한] …… 아주 ‘미국적인American‘ 이야기"로 특징지었다. 그런 관계는 ‘보스턴 결혼‘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아직 여성 동성 관계female same-sex relationship가 ‘레즈비언‘으로 널리 낙인찍히는 시대가 아니던 19세기 후반, 자기 일을 가진 여성들에게 그런 ‘결혼‘은 굉장히 그럴듯한 것이었다. 그런 관계는 여성에게 동지애companionship, 돌봄nurturance, 마음 맞는 이들끼리 나누는 연대감, 로맨스(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모든 관계는 아니라도 일부에서는, 섹스)를 가능하게 해줬다. 자기 삶에 ‘중요한 타자‘가 가져다 주는 모든 이점을 주면서, 이성애에 따라붙는 짐들, 그러니까 자기 직업을 가진 앞서 나가는 여성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짐은 없었다. 한 세기가 지나도록 이런 관계는 많은 중산층 여자들에게 합리적인 선택지로 남아있었다.
19세기 후반, 여성에게 새로이 열리고 있던 직업군에서 일하려고 진지하게 고려하던 여자라면 여러 번 임신하고 대가족을 꾸릴 책무를 지는 상황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어 - P51

렵지 않게 이해했다. 남아 있는 선택지 가운데서 제일 나은 것은
‘노처녀‘였다. 노처녀로서 이성 간 내연 관계를 통해 외로움을 달래는 일은 도덕 규범에 어긋났으나, 가까운 여성 친구와 나누는 동지애를 굳이 멀리할 이유는 없었다.
과거 긴밀한 여성 간 우정은 고귀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로맨틱한 우정이라는 관례가 서구권에서 보인 발전을 추적했는데, 적어도 르네상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서구 관례와 비슷한 것들을 비서구 세계, 예를 들어 중국, 인도, 아프리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구의 성과학자들이 ‘레즈비언‘이라는 종種으로 정의해버리고 자기들이 내린 정의를 대중의 의식에 퍼트려놓기 전까지, 로맨틱한 우정은 다른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가능하고 또 널리 흥했다. ‘레즈비언‘은 로맨틱한 우정 관계에 전제되고 높이 찬양받던 ‘고귀한 순수성‘을 수상쩍게 만드는 성 정체성을 의미했다. 또한 ‘레즈비언‘이라는 범주의 출현은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에게 자기 애정을(따라서 자기 자신까지)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분류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면서 이 여성들을 나머지 여성들로부터 갈라놓았다.
그러나 여성들의 강렬한 애정이 언제나 수상하게 비춰지지는 않았다는 증거는 압도적이다. 역사적으로 젊은 여자들에게는 종종 다른 여자들과 키스할 수 있고, 서로 아껴주고, 함께 잠을 자고, 넘치는 사랑을 표현하고, 영원한 믿음을 약속하는 관계가 허용됐다. 이런 관계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로 성적이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개인의 성적 취향이 가지는 스펙트럼을 고려하면, 실제 성기 성애genitally erotic가 그중 전혀 없었다고 믿기는 어려우며, 역사적인 기록도 일부는 확실히 그런 성애를 나눴다고 입증한다. 하지만 나는 대 - P52

부분 그렇지 않았다고 본다. 위에 제시했듯이, 저 로맨틱한 친구들과 동시대에 산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믿은 것과 같은 까닭에서다. 성욕의 잠재력에 관한 일반적인 생물학적 설명 방식도 있다. 그러나 개인이 사회와 나누는 상호작용과 개별 환경이 성욕의 표현 범위를 결정짓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1950년대에는 킨제이가 면담한 여자들 가운데 20퍼센트가 19세 무렵에 삽입 성교를 해봤다고 했는데, 1971년에는 대조군 표본 수치가 거의 50퍼센트에 가깝게 올랐다. 변한 것은 명백히 성욕의 생물학이 아니라, 더 많은 여자들이 욕망을 의식하고 그 욕망에 따라 행동하도록 허용(때로는 심지어 강요)한 사회인 것이다. 이성애 행위와 동성애 행위 사이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는 1950년대보다도 훨씬 심하게 여자들이 섹슈얼리티를 부정하게 만드는 시대였다. 이 시대 여성들은 좋은good 여자한테는 자발적인 성욕이 없다고 믿게끔 자랐다. 단순히 부부 관계와 출산의 의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남편의 욕구를 고려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지 않는다면, 여자들은 성적이지 않은 존재였다. 이성애 경향이 있든 동성애 경향이 있든, 섹슈얼리티에 가해지는 이런 제재에 맞서 싸운 여자들보다는 이것을 내면화한 여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대개 성적이지 않게끔 사회적으로 구성됐다. - P53

다른 시대에는 이런 관계가 허용됐는데, 어째서 지금은 낙인이 찍혔는가? 아마 ‘여러 세기에 걸쳐 남자들이 이런 관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가 하나의 대답이 될 것이다. 이런 관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불가침이자 보편적인 남성 우월주의(여자는 남자로부터 독립된 존재일 수 없다는 관념을 강요하는)에 타격이 될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로맨틱한 우정이 사회 조직에 주요한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은 까닭은 이 로맨틱한 우정을 주로 찾아볼 수 있던 중간 계급과 상류층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여자는 다른 이유를 제쳐두고서라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살아남으려면 결혼을 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해 그런 관계는 한시적이거나 적어도 결혼에 견줘 부차적으로 비춰진 것이다.
또한 그런 관계는 사회적 요구에도 부응했다. ‘정숙한‘ 여자는 결혼 말고는 남자와 관계를 맺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평판에 흠이 나지 않게 하려면 자기 애정을 어디다 둘지 조심해야만 했다. 여자의 정조에는 어떤 오명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가 한 여자에게 남편의 가정으로 옮겨갈 때까지 아무도 사랑하지 말라고, 감정이든 희열이든 무엇이든 느끼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다른 여자와 나누는 로맨틱한 우정은 그런 감정적 요구들을 충족시켜줄 수 있었고 또한 이미 말했듯 죄가 되지 않고 무해하다고 간주됐다. 젊은 여자의 순결(보통 엄청 - P55

난 가치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에 그런 관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여자가 결혼할 때까지 여러 가지 문제에 말려들지 않게 지켜준다고 여겨졌다. - P56

‘로맨틱한 우정‘, ‘보스턴 결혼‘ 같은 용어가 ‘변태‘, ‘도착‘, ‘동성애‘, ‘레즈비어니즘‘이라는 용어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갔다.
이 태도 변화는 성적 가능성을 사람들이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못한다. 여성-여성 관계의 관례가 전에는 사회적 위협이 될 수 없었지만 1920년대쯤에는 그 위상이 변했다. 여성주의 운동이 거둔 다양한 성공은 이제 노동 인구로서 더 많은 여자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뜻했다. 앞서나가는 극소수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여자들이 더는 생존을 위한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경제 문제가 여자들을 결혼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여자들이 다른 여자들하고 맺는 관계를 통해 완벽하게 만족한다면, 오랫동안 여성주의의 공격에 버텨온, 이성애 결혼이라는 위기에 처한 제도는 뭐가 되겠는가? 여성-여성 관계를 비정상으로 낙인찍는 것이 이성애를 변호하는 무기가 됐다.
낙인찍기가 여성-여성 관계에 끼친 영향은 복합적이다. 한쪽에서는 그 영향이 매우 파괴적이었다. ‘레즈비언‘이라는 이름표로 낙인찍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던 여자들에게는 수세기에 걸쳐 여자들이 누려온 강렬한 동성 간 감정적 결속의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레즈비언‘만이 다른 여 - P59

자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자신은 레즈비언이 아니라 한다면, 이 여성들은 다른 여자를 향해 그 어떤 강렬한 감정을 경험하 게 되더라도 그것을 억눌러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1920년대 여자들에게는 그 선조 격인 여자들보다 훨씬 허용되는 범위가 좁았다.
한편으로는 ‘레즈비어니즘‘이 소개돼 여자들이 자기의 동성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훨씬 큰 자유가 생겼다. 자기네 관계를 영속 가능성이 있는 관계로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들 스스로 ‘레즈비언‘ 이라는 이름표를 받아들이면 다른 여자를 향한 사랑을 단초로 하나의 생활 양식이나 나아가 하위문화까지도 구축할 수 있게 됐는데, 예전에는 대체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번 여자가 ‘레즈비언‘이라는 이름표를 받아들이고 레즈비언 하위문화 속에 자리를 잡으면, 다른 여성들을 향한 사랑과 관련한 전에 없던 또 다른 압력들, 자기 정체성이 낙인찍히는 것하고는 다른 차원의 압력들에 시달렸다. 근대에 등장한 새로운 통설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심지어 여자나 아이까지도 성적인 존재였다(이것은 앞에서 썼듯, 유럽과 미국의 역사 전반에 걸쳐 격렬히 부정돼온 사고방식이다). 바로 전 세기나 더 앞선 시대의 가정을 완전히 뒤엎고, 마담 드 스탈과 세라 오언 주엣의 편지에서 드러나는 그런 정열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관계는 예외 없이 성적 요소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라는 추측이 널리 퍼졌다. 또한 관련 당사자인 여자들이 종종 그런 전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자신의 충동이 자기를 에로틱한 방향으로 이끌었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즉 스스로 다른 여성과 강력한 결속을 경험했다고 인정하면 ‘레즈비언‘이라는 - P60

이름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레즈비언‘은 여성-여성 간 ‘성적‘ 관계를 암시하므로, 이 여자들은 그렇게 보이게끔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내면화된 압력을 받았다(단지 자신에 관해 감정적으로 일관성 있는 시각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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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아가기 - 비혼여성, 임대주택, 민주화 이후의 정동
송제숙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한국 싱글남성의 노동과 비교했을 때 한국 싱글여성 노동의 유일하게 다른 혹은 더 강조할만한 지점은, 여성 대다수가 제조업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에마저 학위에 대한 보상을 안정된 일자리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데 있다. - P27

고등교육을 받은 젊은 싱글여성들이 제대로 고용되지 못하는 상황은 노동시장의 두 가지 경향을 보여준다. 첫째,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의 노동시장 신자유주의화를 통해 시간제 일자리가 지배적인 고용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시간제 일자리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며, 전일제 일자리를 차지한 남성들의 비율도 줄어들고 있다. 둘째,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양질의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에게 안정적인 직업시장에 진입할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산업예비군, 잉여인구, 혹은 한국에서 신빈곤층이 된 젊은이들을 일컫는 표현인 ‘백수‘가 되었다. - P28

전세와 재테크를 각각 퇴적된 금융화와 월스트리트식 금융화의 창으로 설명하는 2장은 비혼여성들의 주택과 경제적 독립, 삶의 안정성을 규율하는 데 전세와 재테크가 가진 함의를 도출한다. 자산증식 메커니즘의 젠더화되고 계급화된 규율은 분명 싱글가정을 차별하고 있다. 나아가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을 이해하려면 (전세를 통한, 이후에는 공식적인 금융시장에서 투자의 확대를 통한) 이 같은 금융투자 기교들에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은 주로 한국이라는 국가와 재벌이 산업생산을 통해 국가적인 이익의 증식을 주도해왔다는 ‘발전주의 [자본주의] 국가‘의 틀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스케일에서 (하위주체들의 생존전략에서 출발한) 비공식적인 금융화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 이론적 기여를 할 수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가정경제 수준에서 소득이 불규칙한 사람이 (대체로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통해) 삶의 안정성과 자산증식을 어떤 식으로 관리하는지 더 세밀하게 이해하고, 이들이 거시경제 수준에서 국가 및 전 세계 수익 창출과 자본주의 시스템의 재생산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지를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공식 경제를 정량화하기 어렵다고 해서 이 같은 분석의 중요성까지 무시할 수는 없다. - P39

이어지는 1장에서는 한국에서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인 성적 통제와 결혼 압력이라는 차별적이고 당혹스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집을 어떻게 떠나 자기만의 장소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다양한 비혼여성들의 설명을 소개한다. 그리고 2장에서는 혼자 살고자 하는 비혼여성들 앞에 놓인 제도적·경제적 도전들의 맥락을 살펴보고, 퇴적된 금융화와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라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비혼여성들의 재정적 불안을 살펴본다. 3장에서는 비혼여성들의 삶과 환경에 구현된 향유라는 규범을 중심으로 - P42

구舊학생운동 세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동 영역을 살핀다. 이는 반체제적인 정동으로서의 향유와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관리의 속성으로서의 향유가 역설적으로 수렴되는 현상을 특징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4장은 자유화 이전 시대부터 지속된 정동의 영향이 정치 및 사회조직에 몸담고 있는 비혼여성들의 활동에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책을 마무리한다. - P43

따라서 스스로를 비혼여성이라고 여기는 내 연구참여자들은 여성의 주거 해방을 개인적인 실천으로서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의식과 공적인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그 투쟁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사회적 규범에 맞서 새로운 정체성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이 특수한 사회역사적 순간들(미디어와 여행을 통 - P54

한 코즈모폴리턴적 문화의 영향과 성평등의 주류화)을 거쳐왔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시기에 학생운동가로 활동했었으며 사회운동의 자유화가 진행되던 시기에 점차 여성과 다른 사회정의 문제로 정치적 관심을 옮겨간 시대적 변화의 장본인들이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서 자기만의 주거지에서 살기 위한 여정과 사회운동과 관계 맺기 위한 노력은 자유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좌파적인 인간상의 증표라 할 수 있다. - P55

내 연구참여자들도 결혼을 하지 않으면 가난을 면치 못하거나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에게 그 무엇보다 거주 독립의 동기를 부여한 것은 가족들의 결혼 압력이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혼시장을 염두에 두고 퍼부어지는 외모에 대한 간섭의 말들과 꾸준한 중매 제의를 경험했다. - P56

제가 감정적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그분들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다는 거죠. 무엇보다 결혼 압력은 부모님과 제 사이의 골을 깊게 만들었어요. - P62

전 진짜 해방된 기분이에요.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을 때도 부모님이 제 삶에 많이 개입했던 건 아니지만, 보는 눈이 있을 때랑 없을 때랑 자유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 P66

호선은 자신의 필요와 욕구(평화롭게 사는 것)를 알게 된 순간 망설이지 않고 집을 떠났다. 어쩌면 호선은 관습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 젖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예외적‘인지 모른다. 하지만 가족에 대해 감정적으로 민감하고 가족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전혀 예외적이지 않다. 엄마의 동정과 걱정은 호선에게 압박감을 주어 결혼에 대한 감정을 바꾸도록 했다. 자신이 외로운지 아닌지 자문하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 어떻게 낭만적인 관계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이 욕망을 결혼에 대한 재고와 뒤섞이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집에서 독립함으로써 확보된 물리적 거리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가족으로부터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가족에 대한 감정적 민감성은 여전히 숙제로 남게 된다. - P69

가족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추억마저도 죄책감이 들거나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그렇게 큰 고생을 했다, 우리 아빠가 날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했다, 뭐 그런 식으로요. 가족에 대한 추억을 건드리게 되면 가족구성원의 희생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같은 장소에서 함께 살아간다고 해서 1차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생활양식과 관점을 공유해야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가족 안에는 단지 혈연과 지연 때문에 억압적인 기대 같은 게 있어요. 생물학적 가족은 ‘순리‘ 같은 걸 따르는 것 같아요. - P73

가정 안에서, 그리고 결혼을 하려고 할 때 이루어지는 비혼여성에 대한 성적 규제는 단순한 감정적 지원의 문제를 넘어선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불안한 경제적 상황은 결국 자신의 거처를 얻기 위해 가족의 재정적 지원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낳는다.
이 장에서 되풀이된 진술들은 사회적 자본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로서 화폐자본이 갖는 힘을 확인시켜준다. 가족과 친족 내에서 호혜성의 원칙으로 오가는 사회적 자본을 대체할 유일한 힘은 화폐자본으로 귀결된다(자세한 내용은 2장을 참조할 것).
어머니로부터 몸매에 대한 잔소리와 저임금 일자리에 대한 부당한 지적과 함께 데이트와 결혼에 대한 압력을 받았던 보희는 어머니의 관점을 이렇게 전한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거면 돈이나 넉넉하게 벌든가." 역시 가족들과 따로 떨어져 사는 소정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돈을 더 번들 그분들이 더 이해해주실지도 잘 모르겠어요 [웃음]." 부모와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집을 나와 따로 살고 있는 몇 안 되는 비혼여성 중 하나인 지수는 가족의 압력을 진정시키는 화폐의 힘을 이렇게 설명한다. "특히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벌이가 좋다는 걸 부모님이 아시고 난 다음부터 제가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 결혼 얘기를 별로 안 꺼내세요." - P83

라파비차스Lapavitsas(2009)는 신용거래와 금융서비스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필요로 하는 개별 가정을 발판으로 신자유주의 안에서 30년간 켜켜이 쌓인 금융자본주의를 "일상생활의 금융화"라고 정의한다. 그는 최근의 금융화된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등이 주목했던 금융자본이 있던 초기 자본주의와는 다르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금융화의 상황이 더 복잡하다. 이는 한국이 최근에 발전하여 뒤늦게 세계자유시장에 뛰어들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기 훨씬 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부터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은 공식적인 금융투기의 규모와 양태에 비교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본의 생산보다는 화폐자본의 순환을 우선시함으로써 (특히 이자에서 이윤을 남김으로써) 자산을 마련하는 자산증식의 논리와 욕망이라는 측 - P89

면에서 양자는 거의 차이가 없다. 엘리어카Elyachar(2010)의 간명한 지적처럼 비공식 시장은 친족구성원이나 이웃 같은 1차적인 사회적 네트워크에 크게 의지한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착취 과정은 훨씬 복잡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월스트리트식 금융화global financialization‘라는 라파비차스의 맥락과 구별 짓기 위해 가정경제의 뿌리 깊은 토대를 이루고 있는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퇴적된 금융화sedimented financialization‘라고 부를 것이다.
이 장에서는 젠더화된 노동빈곤층을 살펴보는 창이라는 의미에서 월스트리트식 금융화과 퇴적된 금융화의 개념적, 역사적 차이를 개괄하고 이 두 금융 시스템이 비혼여성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퇴적된 금융화가 어떻게 심지어 ‘포드주의적인 생산양식‘ 혹은 ‘신자유주의 이전의 자본주의‘로 알려진 시기에 이미 화폐자본이 주도적으로 자산증식을 꾀하는 데 이용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 화폐자본을 가지지 못한 노동빈곤층은 어떻게 배제되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금융자본은 전부터 존재했다. 그리고 퇴적된 금융화는 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통해 만들어진 월스트리트식 금융화와 그저 나란히 공존하지 않는다. 그보다 퇴적된 금융화는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실천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라는 이름의 이 새로운 금융화를 (순환의) 속도와 (불안의) 강도, (금융 계급의 양극화라는) 영향 면에서 더욱 가속화시킨다.
우리가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을 이해하려면 (전세주택과 비공 - P90

식적인 대출, 그리고 나중에는 전 지구적인 시장을 통한) 이 같은 금융투자 기법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 자본주의는 산업생산을 통해 국가적인 이윤의 축적을 주도하는 양대 기둥을 국가와 재벌로 바라보는 ‘발전주의 [자본주의] 국가‘의 틀에서 주로 설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가계경제의 수준에서 대체로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통해 삶의 안정성과 자산을 관리하는 불안정한 소득계층에 대한 보다 세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 P91

임대 시스템과 대출 정책은 한국의 부동산경제와 금융시장의성격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변동성이 큰 한국의 도시 부동산시장은 자산축적과 계급양극화의 주된 근원이다(H. B. Shin 2008). 한국전쟁(1950~1953년)과 군사쿠데타 및 독재의 시기(1960~1987년)를 거치며 한국의 경제적 중심은 농업에서 산업생산으로 급속히 바뀌었고, 이와 함께 농민들이 대거 도시로 유입되었다. 사람들은 특히 수도인 서울로 몰려들었는데, 그 결과 오늘날 서울은 전체 인구의 1/4을, 수도권 지역까지 고려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같은 대대적인 이주와 함께 도시 지역의 아파트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부동산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는데, 서울의 경우 1986년과 2002년 사이에 - P100

300% 이상이 올랐다(신광영 2003, 줄레조 2007, 하의도 2008).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오른 1970년대 말, 1980대 말, 그리고 1990년대 말 세 시기는 특히 주목할만하다. 이 세 시기를 거치면서 비공식적인 현금시장과 결합한 부동산시장은 비공식적인 현금시장을 위해 완전히 활용되었고, 화폐자본을 통한 부의 양극화를 가속화시켰다(김용창 2004),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부동산 소유는 부와 계급이동성을 결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상황에서 특이한 점은 공식적인 임대금융 부문이 거의 개발되지 않다보니 부동산자산 거래(매매뿐만 아니라 임대도)가 현찰 목돈시장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택담보대출시장은 2003년에야 도입되었고, 지금도 일반적으로는 고소득의 정규직 종사자에게만 가능하다. 은행의 주택대출 시스템과 주택보험기관들 역시 최근까지도 정부가 운영하는 주택기금에 국한된 미개발 상태였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과거 주택 구입 비용을 조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파트에 청약할 수 있는 저축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최근에 채택된 북미식의 주택담보대출mortgage과는 달리, 주택 구입을 위한 한국의 은행 대출은 부동산 소유권이 확정된 이후에야 가능했고, 구입한 주택을 위해 대출할 수 있는 최대치는 북미의 주택담보대출(95%)보다 낮은 70%였다.
수년에 걸친 군사독재와 국가의 경제정책을 통한 성장의 유산들은 대체로 은행 융자 관행과 관련된 규제에 영향을 미쳤다.
1960~1997년까지 중소기업과 개별 가구는 심한 제약 때문에 은 - P101

행 대출을 받기가 어려웠다. 발전주의 국가의 성격이 강했던 한국은 은행을 통제하여 대기업(재벌)이 생산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이에 대부분의 대출(90%)은 대기업의 몫이었다.
이 같은 한국 대기업들은 미국이나 다른 선도적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정부의 총애를 받는 정도가 달랐다. 한국에는 삼성, LG, 현대 등 약 열 개 정도의 재벌이 있는데, 각각의 재벌들이 족벌주의를 통해 재생산한 자회사들은 자동차·전자·첨단기술상품·섬유·의류·제과·요식업·식료품업·백화점 등거의 모든 산업 및 서비스 상품을 망라한다. 좀 더 최근에는 벤처캐피털 회사와 여타 제2금융기관들도 재벌의 네트워크에 속하게되었다. 아시아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이들 재벌이 양적인 면에서나 속도의 면에서나 월등한 생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신용거래로 상품의 생산과 유통 사이의 시간적 격차를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우호적이었던 발전주의 국가 한국은 개별 가정에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저축을 하라고 장려했고, 이를 토대로 은행에는 대기업에 저리로 돈을 빌려주라는 압력을 넣었다.
따라서 개별 가정에서는 비공식적인 대출업과 계가 은행보다 훨씬 접근 가능하고 수익성이 좋으며 더 나은 선택지로 각광받았다. 비공식적인 대출의 이자율은 연 60%가 넘었지만(은행 대출 이자는 연 20% 미만이었다) 중소기업과 개별 가정들은 규제 밖에 놓인 비공식 화폐시장의 단골고객이 되었다. 이는 한국인들 - P102

이 치솟는 주택 가격을 어떻게든 감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주택 가격을 치를 때 목돈의 현금을 선불로 내야 했기 때문이다.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을 해내는 한 방법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창의적으로 비공식 대출 시스템을 부풀리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주택 구매에 필요한 목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주요한 방법은 주택임대 시스템을 목돈의 현금을 냈다가 돌려받는 전세라고 하는 일종의 신용 시스템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Dongchul Cho 2006, Nelson 1991, Renaud 1989).
부동산시장이 연구 분야에서뿐만 아니라(공공주택에 대한 정책 지향적인 연구의 일환으로서) 정치에서도 뜨거운 주제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또한 도시 주거의 가혹한 상황에 대한 우려가 전반적으로 확산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전세에 대한 역사적·정치경제학적 연구가 드물다는 점은 뜻밖이다. 부동산과 주택 문제를 다루는 사회학자, 도시계획가, 경제학자 그 누구도 전세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지 못하고, 전세가 금융시장 및 화폐자본의 축적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비중 있는 정치경제학적 분석도 흔치 않다. 연구자들은 공공주택의 형태를 바꾸고 좀 더 완화된 대출 정책을 개발할 것을 권고해왔다. 하지만 이런 정책 제안들은 목돈이 요구되는 보증금의 관습 자체에 대해서는 별 문제를 삼지 않는 듯하다. 이 원인은 한국에서 전세 시스템이 집 장만 과정에 완벽하게 침투해버린 데다, 문화 속에 워낙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서 대안적인 메커니즘을 상상하는 것마저 불가능해 - P103

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연구참여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 중 누구도 많은 현금과 고소득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이 고통스러운 전세 시스템을 비판하지 않았다. 대신 이들은 목돈 마련의 어려움을 개인적 실패 혹은 세대의 실패로 인식한다. - P104

(주로 남성이 수행하는) 임금노동과 (주로 여성이 참여하는) 비공식 화폐시장 간의 이 같은 젠더화된 분업은 정규직일자리시장에서 여성고용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남편이 돈을 벌어오고 학교를 다니는 자녀가 하나 이상 되는) 규범적인 가정의 일원인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의 주 관심사인 자녀 교육과 자녀의 초기 경력개발을 관리하는 일과의 관계에서 가정의 재정적 안정성에 대한 책임을 맡는다. (부모에게는 딸의 결혼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큰 손실일 수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아들이든 딸이든) 자녀의 결 - P107

혼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에도 목돈의 현금이 들어간다. 학원비도 대야 하고 교사, 군 복무와 대학입학 관련 기관의 인사, 그리고 자녀의 고용주에게 뇌물도 줘야 하기 때문이다(S. J. Park and Abelmman 2004).
현대적인 계가 젠더화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성이 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부관계나 모계, 사돈관계를 통해 삶의 경로와 패턴이 연결된 주부와 아이 어머니들에게만 허용된다. (계주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거나 순번이 다 돌 때까지 돈을 유지하지 못해) 발생할 수 있는 분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구성원의 모집은 주로 가족·결혼·고향·학교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진다. 결혼과 가정에서 멀리 떨어진 여성들은 이런 종류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약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적인 신용시장에서 주변화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고등학교나 대학 동창들과 같이 어떤 계를 만든다 해도(재정관리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이 중 결혼해서 부모가 되는 구성원이 생기기 시작하면 결혼한 동료들이 싱글들을 낙인찍듯 대할 뿐만 아니라 공통의 관심사가 사라지기 때문에 싱글들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가령 내 연구참여자인 자경은 그녀가 결함 있는 성인이라는 암시를 주는 남성 동료의 모욕적인 언행에 발끈한 뒤 대학 동창들로 구성된 사회적 네트워크의 모임자리에 더 이상 초대받지 못했다. 또 다른 연구참여자인 호선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정기적인 친척 모임에서 점점 발을 뺐다. - P108

이처럼 계가 결혼과 모성을 가지고 여성의 입지를 제한하는 젠더화되고 가족/결혼 중심적인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계급과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비공식적인 금융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생존과 사회적 비용 때문에 모두가 목돈의 현금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계는 단지 돈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목돈의 용도는 주거(구입과 임대 모두), 교육(공교육과 사교육 비용 모두), 결혼(결혼식을 직접 치르는 하객으로 참여하든), 모든 종류의 경조사 비용 등 다양하다. 현금 선물이 필요한 경조사로는 생일(특히 아기의 백일과 돌, 어른의 경우 환갑, 칠순, 팔순), 기념일, 시험(행정고등고시, 사법시험, 외무고등고시 같은 전문직 시험뿐만 아니라 대학 입학시험과 대기업 입사시험), 졸업, 그 외 중요한 성취 등이 있다. 화폐자본이 많은 사람일수록 화폐 선물을 거래하기가 더 좋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계급화된 관행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참여 방식은 계층을 넘어서 누구나 다 받으면 줘야 한다는 호혜성의 원리를 토대로 삼고 있다. 가령 민서는 아버지가 예상보다 빨리 은퇴하시고 이를 계기로 부모가 농촌으로 이사를 가자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그만둔다는 것은 자녀의 결혼이나 부모의 장례식 같은 가정의 경조사가 발생했을 때 동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부조금, 즉 호혜적인 화폐 선물을 포기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결혼은 목돈을 이용해 자녀 결혼 비용을 상쇄하고, 신혼여행·가구·주택 등의 형태로 신혼가정을 지원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다. 현금 선물인 축의금은 신랑과 신부 가족들이 가장 신뢰하 - P110

는 사람(주로 가족구성원)이 결혼식장이나 교회에서 걷는다. 그리고 이 선물을 받을 때는 돈을 낸 사람의 이름과 액수를 대체로 기록하여 이를 돌려줘야 할 때 최소한 어느 정도의 금액이어야 하는지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런 종류의 화폐 선물은 계에 투자할 수 있는 종잣돈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한국에서 현찰 목돈에 대한 필요와 그 공급은 계급과 관계없이 보편적이며 정상화되어 있다. 즉, 사람들은 화폐시장을통해 소득을 창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략, 다시 말해 (이자를 통해) 돈 버는 돈에 이미 익숙하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에서는 임대 시스템이 수익을 남기기가 좋다는 인식이 생겼다. 집주인의 입장에서는 전세보증금을 받아 이자를 챙길 수 있기 때문에 쏠쏠한 돈벌이가 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금융위기 이전에는 정부가 은행을 규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집주인(혹은 현금을 가진 사람중에 이자 낳는 자본 혹은 돈 버는 돈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은 전세보증금을 비공식 대출시장에 투자하거나 더 수익이 높은 아파트를 구입하는 데 썼다. 중산층은 두 번째 집을 다른 사람에게 임대할 수 있고, 노동계급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일부를 임대하여 얻은 목돈을 굴려 나중에 자녀가 태어나거나 성장했을 때 더 큰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세보증금은 모두에게 유리했다(Nelson 2000). 목돈의 보증금 확보는 주택이나 아파트 현금 구입으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전략이다. 한국의 많은 중산층이 이런 보증금을 잘 굴려서 노동계급에서 중산층으로 계층이 - P110

동을 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집주인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거의 없다. 임대가 종료되었을 때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돌려줄 보증금이 없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로 들어오는 세입자와 나가는 세입자, 그리고 집주인이 부동산 중개소에서 함께 만나, 들어오는 세입자의 보증금을 나가는 세입자에게 넘겨주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주인이 원래의 보증금을 손실고 새로운 세입자도 찾지 못한 데다가 비공식 대출로 부채를 메우지도 못했을 경우에는, 부채 때문에 자신의 부동산을 잃을 위험에 놓일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입자를 제때 찾는 문제는 집주인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전세의 교환가치가 높긴 하지만(부동산 구매가의 절반 이상), 한국 세입자들은 앞서 지적했다시피 월세는 돈을 날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직업이 불안정하고 소득이 불규칙한 세입자들은 월세를 낮추기 위해 보증금을 높이고 싶어 한다. 이는 어째서 내 연구참여자들이 룸메이트가 이사를 가버리고 나면 전세보증금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빌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이들은 월세를 내는 것보다는 목돈의 전세금을 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세 제도는 세입자에게 불리하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노동빈곤층을 위해서는 월세 제도를 채택하는 게 더 낫다.
는 제안도 있었다 (Nelson 1991). 노동계급 세입자 역시 목돈의 현금을 동원하여 더 큰 거주공간을 획득하는 방편으로 전세 제도 - P111

를 활용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집을 소유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넬슨의 주장에 동의한다. 특히 소득이 제한적이고 결혼과 가족을 통해 형성된 사회적 자본이 한정된 사람의 경우, 통상적으로 주거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목돈을 만들 수가 없다. 이들에게 임대주택은 자신이 가진 한정된 자금으로 얻을 수 있는 영구적인 주거지라는 지속 가능한 형태여야 한다. 따라서 정부는 연령과 결혼을 우선시하는 조항을 없애 전세대출 정책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 또한 중산층 부동산시장에 종속되지 않고 안정적인 소득이 없는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을 늘리고 전세대출을 확대한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는 한국의 맥락이라는 창을 통해 전 지구화되고 있는 금융 관행이라는 더 넓은 주제로 연결된다. 공식적인 금융시장이 전 지구적 규모로 폭발하기 전부터 이미 발달해있었던 화폐자본을 통한 자산증식은 화폐자본이 (일반적으로는 이자 발생과, 포인트카드 같은 현물 보상을 통해) 어떻게 그리고 왜 노동빈곤가정과 불안정노동자들의 삶에서 중요한 생존수단으로 편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더 깊은 (부정적인) 함의를 가질수 있다. - P112

이처럼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장은 화폐자본(이자 낳는 자본)의범위와 형태를 전방위적으로, 특히 포인트카드 같은 유사현금 제도의 창출을 통해 확대했다. 좀 더 안정된 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주식시장과 공식적인 신용대출시장을 이용할 수 있으며, 포인트카드 제도는 가처분소득이 많지 않은 청년, 학생, 어린이들까지도 공략한다. 금융자본주의의 중심부가 젊은 층으로부터 그 광대한 인프라의 씨를 뿌리면서, 이런 식으로 이자 낳는 자본의 논리, 즉 이자를 통해 혹은 포인트와 마일리지를 쌓아 비록 공짜일지언정 화폐자본력을 늘릴 수 있다는 신화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반이 있으며, 이 현상은 포인트카드 같은 금융상품을 이용하여 자산을 축적하는 작은 규모의 관행에 의해 도전받기보다는 오히려 정당화된다.
이런 종류의 금융상품과 선택지를 이용하는 ‘재테크‘라고 하는 행위는 사회경제적 안정을 얻고자 한다면 일반인에게도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개인들은 더 이상 평생고용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국가관료주의가 부패하고 무능하다는 평판 때문에 새롭게 발족한 국민연금 역시 신뢰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내 연구참여자들은 자신이 이런 자산증식 기법들을 제대로 이용하고 있는지 - P116

걱정스러워했다. 대부분은 미래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사적인 금융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비용에 관계없이 모두가 이런 기법들을 이용할 수 있고, 유일한 변수는 정보를 관리하는 개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듯 싶었다. 이 장의 첫머리에 있는 인용구에서 원이가 밝히고 있듯, 이들이 이런 기술을 갖추지 못했을 때 이를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다. - P117

이 대화는 금융위기 이후의 금융 불안이 자산을 축적하고 현재와 미래의 불안정에 맞서는 최상의 방법이었던 금융위기 이전의 소소한 돈 불리기와 목돈 거래라는 금융 습관을 어떻게 증폭시키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들려준다.
요컨대 한국의 임대 제도는 집주인이 집세만 받는 시스템이 아니라 목돈의 현금을 비공식적으로 손에 넣어 돈놀이를 할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세입자는 목돈을 집주인에게 맡겨놔도 아무런 이자를 받지 못하지만, 집주인은 목돈의 현금을 받아 낮은 위험으로 이를 다른 곳에 투자하여 이자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새로운 금융 기법들이 등장하여 사람들의 일상생활 곳곳으로 침투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이용된 자산증식 수단의 중추인 임대주택의 중요도가 더욱 확대되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퇴적된 금융화와 월스트리트식 금융화가 한국 신자유주의 속에서 융합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금융위기 이후 공식적인 금융시장이 자유화되면서 등장한 신용카드, 주택담보대출, 사보험 및 연금, 고금리 저축상품 등 이자 낳는 자본을 굴릴 수 있는 추가적인 기회가 나타났고, 이는 한국에서 월스트리트식 금융화를 이루고 있다. 산업자본가와 금융시장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결합한 금융자본이 출현한 증거로, 경제학자들은 대기업이 금융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비은행 금융기관들의 지분을 상당히 소유하게 된 점을 거론한다(C. H. Lee, Lee, and Lee 2002), 비은행 금융기관은 전세를 통해 상당한 보증금을 - P121

받는 집주인, 계에 참여하는 사람, 심지어는 고리대금업자 같은개인들에게 중요한 채널이다. 내 연구참여자들의 경험에는 이보다 훨씬 소박한 방식으로 이런 종류의 월스트리트식 금융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고리대금업과 계, 그리고 전세라는 보편적인 주택 임대 시스템을 통한 비공식적인 금융자본축적과 목돈의 현금 기반 거래에 의존하는 사회적인 맥락을 고려했을 때, 재벌 주도의 산업자본주의를 통한 현대 한국 경제의 등장과 관련된 지배적인 이론은 한국 자본주의를, 특히 가계경제의 측면에서 완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마르크스는 산업자본이 등장하면 효율성 증대를 위해 순환과 축적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민간 대부자들을 제도화된 은행으로, 그다음에는 공식적인 금융자본 시스템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고리대금업 같은 비공식적 금융 관행이 사라진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한국의 비공식 대출과 신용시장은 산업자본 레짐이 절정에 이르기 전에도, 절정인 동안이나 그 후에도 결코 소멸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비공식 금융자본, 그중에서도 특히 계는 산업자본이 점점 우세해지는 동안 금융자본의 제도화 속으로 자취를 감추기보다는 자산축적의 핵심 요소로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사례를 토대로 생각했을 때, 주택금융 영역에서는 구매뿐만 아니라 독특하게도, 임대 제도 역시 이자 낳는 자본을 축적하는 핵심 요소이며 이는 자본주의 축적 과정에 노동계급의 의도하지 않은 동참을 통해 실행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중 - P122

요한 점은 금융자본을 허구적이라고 일반화시켜버릴 경우 임금과 목돈의 현금 운용 모두가 한국의 맥락에서 계급을 막론하고 수익을 창출하는 중요한 양식이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는 한국 자본주의 역사(자본주의의 축적 과정과 위기), 그리고 국가 및 재벌 주도 경제발전의 위기라는 큰 그림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강력한 금융시장(주식시장이 부각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사채나 큰손 같은 다양한 고리대금업과 계 같은 비공식 대출업)이 없었다면 그 무엇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초기에는 (이자 낳는 혹은 허구적인) 주택 호황이 자본축적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월스트리트식 자본은 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을 통해서야 보편화되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주택과 금융시장의 연관성은 최근 주택시장과 금융시장이 붕괴해 크게 피해를입은 북미와 유럽국가의 상황과 유사해 보일 수 있다(Panitch andGindin 2008).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행 시스템에 의한 주택시장 투기가 주택과 (공식적인) 금융시장의 불안정으로 이어지게 된)은 한국의 상황과 다르다. 한국에서는 주로 비공식 금융시장을 통해 가계자산의 관리가 이루어졌고, 이렇게 관리된 가계자산이 주택(및 임대) 시장에 투기되면서 아시아금융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국가경제의 몰락을 초래하기보다는 오히려 국가경제를 지탱함으로써 공식적인 금융시장을 크게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이같은 비교는 투기를 자본주의적 축적의 믿음직한 방법으로 옹호 - P123

하는 월스트리트 은행가 등의 견해를 지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융화와 금융시장이 주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로에 좌우된다는 솔깃한 일반화에 도전하기 위함이다.
요컨대 이제까지 나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주거안정성 및 금융안정성을 저해하는 다섯 가지 구조적 제약의 집합을 다루었다. 첫째, 한국전쟁 이후 경제는 목돈의 현금과 그 이자를 개별 가정의 자산축적을 위한 주요 수단이자 원천으로 활용하는 독특한 금융시장을 발달시켰다. 둘째, 전세를 이용하는 보편적인 관행은 목돈 순환의 핵심 고리다. 셋째, 임대주택의 경우 까다로운 요건과 관료적인 평가절차 때문에 임대주택에 맞는 금융상품과 대출 기회가 제한적이다. 넷째, 금융법과 은행조례는 특히 임대주택대출 신청 자격요건에 정규직 일자리 규정과 연령 규정을 넣음으로써 결혼한 부부와 규범적인 가정이 당연히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듯이 명시해놓았다. 다섯째, 일반적으로 여성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비혼여성들은 대출 자격요건인 정규직 근무 기록을 제시할 수 없었다. 앞의 세 가지 맥락은 경제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네 번째 사항은 대출 신청 전에 혼자 살았음을 증명할 수 없거나 나이가 어린 싱글(젠더를 막론하고)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사항은 혼자 혹은 비가족구성원과 함께 살고 싶은 비혼여성 같은, 재정적으로 주변화된 집단의 주택 필요에 젠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 중요하다. 관습법 관계에 있는 이성커플도 네 번째 사항의 영향을 - P124

받을 수 있지만, 이 경우 주택 문제는 남성 쪽의 자원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고용 상태가 안정적일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전세대출 등의 융자 신청요건에 부합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비혼여성, 여성 동성커플, 가족관계나 성적인 관계가 아닌 사람들로 이루어진 가정이, 특히 정규직 시장에 진입했던 경력이 없거나 그런 경력을 쌓을 수 없는 젊은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있을 경우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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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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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정의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전시하여 소비하지 않되 고통의 절대성에 사람들이 충분히 공명하게 할 수 있을까? 또한 어떻게 - P7

하면 고통에 대한 증언을 전문가의 해석을 기다리는 날것의 정보도, 그렇다고 그 자체로 완벽한 말도 아닌, 고통에 대한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런 자리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의 뒤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증언자들이 힘차게 증언하고, 참석자들이 공명하고, 정치적 결의를 하고 난 다음이다. 참석자들이 떠나간 자리, 혹은 증언자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난 다음의 문제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야기하고, 그 고통에 다른 사람들이 공명함으로써 증언자들은 힘을 받는다. 그러나 다시 홀로 남은 자리에서 사람들은 묻곤 했다. "이 고통이 끝나긴 할까요?"
끝이 없다는 것.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것. 그것이 고통의 끝자락에 단단히 붙어 있는 가장 큰 절망이라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이 고통을 고통으로 지속시켰다. 따라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단 하나다. 고통이 끝나는 것. 고통을 통해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고통에 대한 언어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고통이 끝난다면 그 모든 걸 접을 수 있다고 했다. - P8

오히려 내가 주목하고 염려하는 것은 고통을 겪는 이들의 주변 세계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어떤 말로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고 혹은 소통하지 못하면서 누구와 세계를 짓고 또 누구와의 세계는 부수고 있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고통을 겪는 이들이 쓸 수 있는 언어로는 어떤 세계를 짓는 것이 가능한가. 혹 그 언어로 주변 세계를 짓는 것은 불가능하고 부수는 것만 가능한 것은 아닌가?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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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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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위프트식의 풍자, 볼테르식의 철학적 허구, 그리고 우화식의 SF는 모두 우리에게 빛을 전해 줄 뿐, 온기는 없다. 인류에 대한 보편 진실을 찾기 위해, 이런 글들은 개별 인간들의 강력한 저항정신을 포기하고 가야 한다. 다른 소설들은 거기에서 활력을 얻는데 말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 방식들은 스스로를 남성으로 성별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을 비하할 수도 있고, 여성을 남성 등장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끼울 수도 있으며, 아예 여성을 내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두가 18세기나 그 이전 모든 세기의 문학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SF는 너무 자주 인류의 절반만으로 "미래"를 창조함으로써 장르의 지적, 도덕적 잠재력을 좁힌 나머지, SF 하면 다 사내아이들을 위한 순진한 모험담이라 치부할 수 있게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자료에 나오는 솔라리스학의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은모두 남성으로 보인다. 현재 솔라리스에 가 있는 과학자들은 모두 - P240

남성이니, 분명 이전에 갔던 팀도 모두 남성이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쓰인 진지한 소설이 여성을 아예 포함시키지 않고서 지적 영역을 구축하려 한다면, 이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누락을 통해 어떤 선언을 담는 셈이다. 독자는 당연하게도 혹시 지적인 영역이란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걸까 생각할 수 있다. 혹시 여자를 받아들이면 그 영역은 무너질까? 이건 그런 암시일까? - P241

자기가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해 쓰는 작가는 두 가지 위험을 감수한다. 하나는 오해와 와전, 즉 잘못 진술하는 것이다. 또 하 - P252

나는 착취와 강탈, 즉 잘못하는 짓이다. 지배적인 집단에 속하면서더 힘없는 집단 구성원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작가들은 그런 위험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무관심으로 위험을 감수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그런 무지는 결과를 망친다.
콜럼버스는 자신들이 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이들의 통제자이자 소유자이자 정당한 착취자로 타고났다는 백인의 확신을 신세계에 가져왔다. 인디언들은 그 후로 줄곧 그 어마어마한 특권 의식에 맞서 왔다.
침묵당한 이들을 위해 말하는 일과,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화자의 목소리로 묻어 버리는 일은 다르다. 후자와 같은 잘못을 너무나 오랜 기간 저질렀기에, 어쩌면 정직한 선의와 선행을 아무리 쌓는다 해도 인디언에 대해 쓰는 백인 소설가(또는 회고록 저자, 또는 인류학자)가 또 강탈하겠구나 하는 의심을 완전히 씻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디언과 백인이 관계를 맺은 역사 전체에서 죄의식은 피할 수가 없다.
죄의식이란, 죄의식을 인정함으로써 더 나은 곳으로 갈 수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주로 인디언 작가와 활동가들이 쉼 없이 의식화해 준 덕분에 우리는 서서히 더 나은 곳으로 향했다. 백인 작가들은 열렬한 동일시가 역겨운 침해일 수 있고, 이상화는 악마화 못지않은 모욕일 수 있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이제 순진하게도 "인디언의 관점에서" 소설 쓰기에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다. - P253

모하비 땅 깊숙이 자리 잡은 외딴 방목장에서 사는 사우스보이는 인디언들과 함께 섞여서 자랐고, 알고 있는 것 대부분을 인디언들에게 배웠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많은 부분 인디언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인디언은 아니다. 그는 피가 섞인 게 아니라 문화와 정신과 마음이 섞인 사람이다. 그에게는 두 영혼이 있다. 그리고 열다섯의 나이에 그는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은 영영 떠나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성인이 된다는 건 언제나 자기 사람들을 찾고 망명에 나서는 일, 둘 다인지도 모르겠다. - P255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 가늘게 비치는 빛은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고독한 한 사람이다. 주인공은 오직 잘못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함으로써만 옳은 일을 하고 남편을 지킬 수 있다. 그녀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눈이 먼 척하지만 사실은 눈이 멀지 않았기에, 견딜 수 없는 참상들을 목격해야 한다. 그녀의 딜레마 속에는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라는 냉소적인 옛말이 들어 있다. H. G. 웰스는 그 격언이 틀렸음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뛰어나면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쓰기도 했다. 사라마구는 그 반박을 더욱 발전시켜, 지난 50년간 세상에 나온 가장 강력한 도덕 소설로 만들어 낸다. 나에게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고, 20세기의 가장 진실한 우화다. 이 작품은 위기에 마비된 이 기묘한시대에 문학이 무엇일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사라마구는 2010년 여름, 87세에 사망했다. 그해 가을, 휴턴 미플린 하코트 출판사는 그의 소설들을 전자책으로 출간했고, 블로그에서 처음으로 버추얼 문학에 대해 말한 사람이 사라마구였기에 이렇게 가상으로 존재하는 판본이 있는 게 딱 맞는 일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해 현실에서 떼어낸 듯 보이는" 허구라고 쓴 그는 이 장르의 발명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돌리지만, 이 장르에 보르헤스의 작품에는 없는 탁월 - P269

한 요소를 가져온 사람은 사라마구였다. 평범한 사람들과 일상에 대한 열정적이고 연민 가득한 관심 말이다.
우리에게 분류 카테고리가 정말로 더 필요하지는 않을 테지만, 버추얼 문학은 외삽(外揮) 경향이 있는 과학소설과 사변 소설, 완전히 상상해 낸 현실을 다루는 판타지, 분개와 개선 의지가 담긴 풍자 소설, 남아메리카 고유의 마법적 리얼리즘, 진부함에 고착된 현대 리얼리즘과 다른 유용한 카테고리일 수 있다. 나는 버추얼 문학이 이 모든 장르와 기반을 공유하지만 (실제로 모두 겹쳐지는데가 있고), 그 목적이 사라마구의 표현대로 수수께끼를 밝히는 데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이해한다.
그의 작품들에서 이는 가장 소박하고 수수한 통찰로, 어마어마한 계시가 아니라 그저 해가 뜨기 전에 서서히 찾아오는 빛이다. 드러난 수수께끼는 대낮의 빛,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빛이며, 말 그대로 매일 일어나는 신비다. - P270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 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주는 유일한 소설가다.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다. 그에게는 우리가 부족하나마 지혜라고 부르는 예리하고도 꾸밈없는 이해력을 얻어 낼 시간과 용기가 있었다. 지혜라고는 부르지만 흔히 지혜라고딱지 붙이는 번지르르한 다독임이 아니다. 그는 전혀 사람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체념하라는 조언을 읊어 대진 않지만, 친절한 트릭스터인 희망에 대해서도 별로 확신하지 않는다. - P271

사라마구는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은 우주의 침묵이고, 인간은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침이다." 그가 그렇게 극적인 경구를 내놓을 때는 자주 없다. 나라면 신에 대한 사라마구의 평소 태도를 꼬치꼬치 따지고, 회의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끈기 있다고 표현하겠다. 흔히 보는 절규하는 전문 무신론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이고 교권 반대론자이며 종교를 믿지 않고, 신실한 지도자들도 당연히 그를 싫어하거니와 그역시 진심으로 그들을 싫어한다. (...) 사라마구의 무신론은 페미니즘의 한 조각이고 그의 페미니즘은 여자들에 대한 학대와 저임금 지불과 평가 절하에 대한 격분, 모든 사회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권력을 오용하는 방식에 대한 격노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그에게는 사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는 약자 편에 서 있다.
사라마구에게 감상주의가 없지는 않다.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면에서 대단히 희귀한 뭔가를 전달한다. 환상을 깨뜨리면서도 애정과 경탄을 허용하고, 맑은 시선으로 용서한다. 그는 우 - P273

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그 정신과 유머 면에서 최초의 위대한 유럽 소설가 세르반테스와 가장 가까운 작가인지도 모른다. 이성의 꿈과 정의의 희망이 끝없이 좌절될 때, 냉소주의는 쉬운 출구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농민 사라마구는 그쉬운 출구를 택하지 않는다. - P274

노벨상 연설에서 사라마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사는 작은 경작지 너머로 모험을 떠날 수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기 때문에, 남은 가능성이라곤 뿌리를 향해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제 뿌리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야심을 부려도 된다면 세상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 힘겹고 끈기 있는 파 내려가기가 이토록 가볍고 기분 좋은 책에 깊이와 무게를 더한다. - P286

SF는 어떤 현실 상황에 대한 상상 속의 전복에나 기꺼이 힘을 빌려준다. 상상력을 기르지 못하는 관료들과 정치가들은 SF 소설이란 다 레이저총이나 나오는 헛소리이고,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SF 작가가 검열을 당하려면 『우리들』의 자먀찐처럼 대놓고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노골적이지 않았고, (내 좁은 지식으로는) 정부 정책을 대놓고 비판한 적도 없다. 그때도 제일 감탄했고 지금도 감탄하는 점은, 그들은 이념에 무관심한 듯이 글을 썼다는 점이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우리 작가들도 힘들어하는 일이건만, 그들은 자유로운 사람처럼 썼다. - P289

이 책이 나왔을 때는 SF에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중심인물로 쓰는 일이 꽤 드물었고, 지금도 SF는 쉽사리 엘리트주의에 빠진다. 엄청나게 뛰어난 머리, 비범한 재능, 일반 승무원보다는 지휘관, 노동 계급의 부엌보다는 권력의 회랑이 나온다. 이 장르가 전문적으로, 그러니까 "하드하게 남아 있기를 원하는 이들은 엘리트 스타일을 선호한다. SF를 그저 소설 쓰기의 한 방식으로 보는이들은 전쟁을 장군들만이 아니라 주부와 죄수와 16세 소년들의 눈으로 묘사하고, 외계인의 방문을 지식인 과학자들의 시선으로만 보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통해 서술하는 좀 더 톨스토이다운 접근을 환영한다. - P291

"달의 아침"이라는 챕터는 그 자체로 ‘왜 사람들이 과학소설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지도 모른다. 진지하게 묻든 깔보듯이 묻듣 간에 그 질문의 답을 내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나는 이런 글을 볼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읽는다. 미지의 것들에 대한 기가 막히도록 정확한 통찰, 뜻밖이면서도 필연적인 아름다움…… 과학자들이 아는 것과 같은 발견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 P306

이야기 끝에 가서 그는 다시 한 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미래로 더 멀리멀리, "1분에 1000년 이상씩 성큼성큼" 여행하다가 시간의 끝에서 어느 해변가의 "아득하고도 무시무시한 황혼에 도착한다. 이 황량하고 웅장하며 인간을 넘어선 장면은 순수한 과학소설적 상상이 이제까지 쓴 가장 훌륭한 구절이 분명하다.
과학소설은 인간이(또는 딱 인간처럼 행동하는 신이나 동물이나 외계인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를 정말로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이야기다. 가끔 한 번씩 눈을 들어 인간의 행동이 아무 의미도 없고 인간의 관심사가 대수롭지도 않은 영역을,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면 루크레티우스가 말했던 "빛의 해안"이 잠시나마 위로를 넘어서는자유를 언뜻 비춰 줄지 모른다. - P315

웰스는 과학소설이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을 갖기 오래전에 과학소설을 썼다. 그는 그것을 "과학 로맨스"라고 불렀다가 나중에는 "가능성의 판타지"라고 불렀는데, 지금 정착한 이름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 P321

내 생각에, 『시녀 이야기』,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는 모두 SF가 하는 일의 한 가지 사례가 된다. 그것은 현재의 경향과 사건들에 상상을 더하여 반은 예언, 반은 풍자인 근미래를 추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애트우드는 자기 책이 SF라고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최근에 내놓은 멋진 에세이집 『움직이는 과녁Moving Targets』에서 애트우드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가능하고 어쩌면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오늘날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소설"인 SF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독단적이고 제한적인 정의는 애트우드의 소설들이 완고한 독자와 서평가와 문학상 수여자들이 아직까지 기피하는 장르로 격하당하는 사태 - P339

를 막기 위해 고안한 것만 같다. 그녀를 문학 게토로 밀어 넣을 문학 편견쟁이들을 원치 않는 것이리라. - P340

지난 세기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진지한 시인들은 오직 시만 쓰지, 소설은 쓰지 않는다고 배웠다. 그런 순수주의자들에게 괴테는 무의미했다. 그와 동시에, 모더니즘 소설 비평가들은 상상 문학을 쓰면 진지한 소설가로서 자격이 없어진다고 선언했다. 현실주의자들에게 메리 셸리는 무의미했다. 교수와 문학상 수여자들은 순수주의를 더 좋아했기에, 타고난 재능 탓에 국경을 서성인 이단아 작가들은 계속 가시철조망에 부딪치고 말았다. - P346

우리는 사랑 이야기를 브론테나 오스틴의 손에서나 드물게 예술이 되는, 로맨스 서가에 가득한 흔하고 단세포적인 장르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사실은 사랑에 대나 이야기인가? 나도 어느 글쓰기 워크숍에서 과제로 "사랑 이야기"를 줘 보기 전까지는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그 워크숍에서는 욕정에 대한 단편을 열네 편 받았다. 다음에 다시 시도했을 때는 욕정에 대한 이야기가 열한 편, 증오에 대한 이야기가 두 편, 조카딸을 사랑한 여자를 그린 사랑 이야기가 한 편 나왔다.
우리가 얼마나 온갖 종류의 사랑을 하는지 생각해 보면, 소설에서는 사랑을 성적인 욕망으로만 탐구하거나, 성생활을 권력의 - P385

도구로 이용하는 학대나 착취나 집착 관계로만 다룰 때가 이토록 많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다.
『레도잇』은 사랑 이야기다. 열정적으로 성취했으나 결코 안정감을 얻지는 못한 어느 결혼한 부부의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루고, 젊은 여자 로티가 새아버지와 어머니와 이복 남동생에게 품은 격정적인 분노와 거부의 사랑을 다룬다. 가족의 사랑이란 난파선과 가라앉은 보물이 가득한 해안도 없고 해도도 없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이려니. 참으로 멋진 이야기다! 어떤 마돈나 사진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는 우리들 대부분이 실제로 사는 삶에 바싹 다가온다. 낭만적이지도 않고 끝도 없는 적응과 실망과 재적응, 눈먼 잔인성과 눈먼 다정함, 매듭과 복잡한 얽힘과 엉킨 그물들, 격분과 의리와 반항, 서로 함께 살아가려 노력하고 서로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열정들. - P386

일상에 대해 쓴다는 건 힘든 일이다. 비범한 것, 전율스러운 것, 초월적인 것은 자동으로 매력을 발하지만 심지어 특별히 불행하지조차 않을 만큼 흔한 삶을 묘사하려면 용감한 저자여야 한다. 게다가 행복이라니, 성적인 만족도 아니고 야심에 대한 보상도, 황홀경도, 지복도 아니고 그저 일상의 행복이라니 이건 사실상 소설에서 사라진 무언가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감상주의로 보거나,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쓰기 쉽지가 않다. 진실성 있게 울리려면 가장 초라한 종류의 성취와 만족에 대한 묘사조차도 인간의 부족함과 잔인함, 언제나 질병과 몰락과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쓰여야만 한다. - P400

한 마디만 잘못 써도 모든 게 믿기지 않아진다.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에는 잘못 쓴 한 마디가 없다. 구어체의 편안함과 투명함을 갖춘 산문체와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말이나 뻔한 말 하나가 없다.
보통 어떤 소설을 어떤 상황에서 썼느냐는 독자인 나에게 별로 흥미를 일으키지 않지만, 이 경우에는 저자가 죽어 가면서 쓴 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동받고 경외감마저 느낀다. 이 책은 삶의 먼 가장자리에서,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책임감을 품고 써낸 보고서다. 하루프는 증언하고 있다. 우리보다 멀리 가서, 그곳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어 한다. 하루프가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내가 그 사실을 알면서 책을 읽었기에, 나는 오직 해야만 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과 함께한다는 귀한 특권을 고맙게 여겼다. - P401

어쩌면 행복이란 자유와 함께하기에, 불행보다도 예측하기 힘든 것인지 모른다. 또한 자유와 마찬가지로, 결코 확고하지가 않다. 영원할 수가 - P403

없다. 그러나 행복은 현실이 될 수 있고, 이 아름다운 소설에서 우리는 그 행복을 공유할 수 있다. - P404

요즘에는 많은 미국인이 지구 온난화를, 진화를, 과학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어쩌다가 그렇게 어리석고 위험하게 사실을 부정하게 된 걸까? 그 이유를 무식에, 멍청함에, 공화당에, 남부 레드넥에 두는 건 정말이지 오만하고 비겁하게 질문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킹솔버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자기가 쓰는 사람들을 알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신용이라곤 없으며, 세상과 그 속의 자기 자리를 이해하려고 할 때 거의 도움받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만 잔뜩 받는, 그 생생하고 취약하며 무시당하는 사면초가의 시골뜨기들을. - P411

어떤 작가들은 소설 속에 미래상과 특수 용어를 가득 채워놓고서 맹렬히, 심지어는 식식대며 이건 SF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아니, 아니, 난 그런 형편없는 물건은 쓰지 않아요, 건드리지도 않아요. ‘문학‘을 쓰지요. 이런 작가들은 그 경멸스러운 장르의 비유와 전통은 신기하게 잘 알면서도 SF 장치들을 참으로 서툴게 쓰고, 용어의 의미를 참으로 무분별하게 무시하며, 바퀴를 다시 발명하면서 어찌나 스스로에게 탄복하는지, 그들의 시도야말로 방법을 배우지 않고도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증명하려 하는 망한 노력처럼 보인다. - P432

기묘하게 아름답고, 생생한 세부 사항 모두가 이질적이지만, 그런데도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친숙하기만 한 풍경. 모든 소설이 그렇듯, - P435

SF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 P436

어떤 이들은 과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다 몰아냈다고 장담하고, 또 어떤 이들은 과학이 세상에서 마법을 쫓아냈다고 울면서 "다시 마법에 걸리기를" 빈다. 하지만 찰스 다윈이 어떤 몽상가 못지않게 발견과 경이와 심원한 신비로 가득한 놀라운 세상에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세상에서 마법을 빼앗은 사람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세상이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본 사람들, 신이 움직이는 기계로만 본 사람들이다. 과학과 환상문학은 지적으로 모순되지만, 둘 다 세상을 설명한다. 양쪽 모두 상상력이 활발하게 기능하여 의미를 찾고, 딱정벌레를 설명할 때나 여마법사를 설명할때나 세부 사항과 사고의 일관성에 엄격한 주의를 기울여 지적인 동의를 얻어 낸다. 규정하고 금지하는 종교는 과학과 환상 양쪽 모두와 불화하며, 종교는 믿음을 요구하기에 양쪽의 공통 기반인 상상력을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자라면 다윈과 루슈디 둘 모두를 드러난 진실을 반대하는 "불복종하고 불경한 인습 파괴자"로 비난해야 한다. - P465

사라마구의 진실 말하기는 지성, 치열한 예술적 용기, 그리고 진지한 인간의 애정이라는 희귀한 조합에서 말미암는다.
노벨상 연설에서 사라마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충분히 이들과 동화했는지 잘 알 수 없는 유일한 지점은 그 여자들과 남자들이 그런 가혹한 경험에서 얻은 미덕, 바로 삶에 대한 당연하다는 듯 소박한 태도입니다…… 저는 매일 제 정신에 울리는 끈질긴 호출처럼 그 교훈을 느낍니다. 저는 광활한 알렌테주 평원에서 제게 주어졌던 존엄의 예시와 같은 위대함을 조금 더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잃지 않았어요. 시간이 이를 말해 줄 겁니다. - P479

전통에 맞게 출판사나 비평가의 구멍에 밀어넣을 수 없는 소설들은 "경계선"이라느니 "페미니스트"라느니 "지역적"이라느니 하는 폄하의 라벨을 얻고, 그러면 교수들이 그 작품들을 무시하고 소위 전문가들이 모욕할 수 있게 된다. - P486

신체나 정신 모두에 큰 고통을 많이 겪은 모리는 독서를 "보상"으로 본다. 실제로 책은 모리의 열정과 적극적인 지성이 더 큰 예술과 사상의 현실을 접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하던 모든 사람과의 이별, 부서진 골반의 고통, 대단히 고상하고 무척이나 이상한 세 고모들이 보낸 여자 기숙학교의 숨 막히는 쩨쩨함, 그리고 정신 나간 마녀인 어머니의 불가사의한 공격을 다 헤쳐 나가기 위해 모리에겐 책만 있으면 된다. 거의 그렇다. 하지만 독서마저도 결국에는 모리를 저버리고, 인생에 친교를, 사람의 온기를 구하려던 모리는 효과 있는 마법에 의존한다.
『타인들 속에서』는 재미있고 사려 깊으며 예리하고 흠뻑 빠 - P493

져들 만한 이야기지만, 마법에 대한 부분은 그 이상이다. 모리가 새로 사귄 친구들이 자신과의 우정을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이 건 주문에 강제당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모리가 겪는 도덕적인 고통은 힘의 책임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사람의 고통이다. 그리고 쉽거나 빨리 해결되는 고통도 아니다. 이 책의 핵심은 위령의 날 전야에 웨일스 산 속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도록 도우라는 요정들의 명령에 모리가 따르는 장면이다. 모리를 불구로 만든 차 사고에서 모리의 쌍둥이 자매가 죽었는데, 자매의 영혼은 지금 어둠의 문 앞에서 붙들고 매달려 모리가 그녀를 보내지 못하게 한다. 말을 아낀다는 점에서도 극적인 면에서도 잊기 힘든 이 대목에서는 모든 상실과 어려움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만큼 몰려들고, 마치 옛 발라드에서처럼 조용하고 사실적인 서술이 불가해한 경험을 심화시키며, 기이한 일을 현실로 만든다. - P494

SF 소설에서 자기들은 SF를 싫어한다고 되풀이하여 선언하는 등장인물들을 보게 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단지 지넷 윈터슨은 대놓고 장르를 쓰면서도 "문학 작가로서의 신용도를 지키려 하는 걸까 추측할 뿐이다. 분명 이젠 윈터슨도 모두가 SF를 쓴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텐데? 과거 골수까지 리얼리즘에 파묻혔던 작가들도 이제는 SF의 비유와 장치와 플롯이 가득한 소설들을 내놓다 보니, 차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문학의 정전‘을 지키며 으르렁대는 머리 셋 달린 개들뿐이다. 확실히 나는 차이를 모르겠다. 뭐 하러 신경을 쓸까? 하지만 나는 상상의 공동 기금을 이용하면서, 정작 그 기금을 만들었고 이용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이용하 - P495

도록 열어 놓은 동료 작가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척하는 저자들의 기묘한 배은망덕이 신경 쓰인다. 약간만 보답하는 너그러움을 보여 준대도 나쁠 게 없으련만.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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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 - 삶과 책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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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필요한 것, 아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타당해 보이는 선을 따라가는 삶을 상상하며 살았으면서도 어느 정도 자유를 허용하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겁니다. 수동적으로 듣는 게 아니라, 귀를 기울여야 해요.
귀를 기울인다는 건 공간과 시간과 침묵이 필요한 공동체 행위지요.
읽기는 귀 기울이기의 한 방법이고요.
읽기는 그냥 듣기나 보기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이죠. 여러분이 하는 행동, 끊이지도 않고 알아들을 수도 없이 지껄이고 외쳐 대는 매체의 돌격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속도대로 읽는 겁니다. 여러분을 압도하고 통제하기 위해 빠르고 거세고 큰 소리로 밀어붙이는 내용이 아니라,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이고 싶은 내용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이 어떤 당부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강매를 당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읽을 때는 보통 혼자라 해도 다른누군가의 정신과 교감하지요. 세뇌를 당하거나, 조작당하거나, 이용당하는 게 아니에요. 상상력의 현장에 함께한 거죠. - P26

문해력이 중요한 이유는 문학이야말로 사용 설명서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매뉴얼, 우리가 여행하는 ‘삶‘이라는 나라에 가장 유용한 안내서예요.

의식적으로 어떤 문제를 다루거나 어떤 특정한 결과를 끌어내려고 쓴 시나 소설은, 그 작품이 아무리 강력하거나 유익하다 해도 첫째가는 의무과 특권을 포기한 겁니다. 작품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요. 글의 제일 중요한 임무는 단순히 올바르고 진실한 형태를 주는 말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 형태가 곧 글의 아름다움이자 글의 진실입니다.
잘 만든 토분은 그게 쓰고 버리는 테라코타든 고대 그리스항아리든 상관없이 토분일 뿐, 토분 이상도 토분 이하도 아닙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잘 만든 글도 그저 말들의 행렬이에요.
제 말들의 행렬을 쓸 때 저는 제가 생각할 때 진실하고 중요한 것들을 표현하려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에세이를 쓰면서도 그러고 있죠.
하지만 표현은 계시가 아니고, 이 에세이는 쓸 때 예술성이 - P94

들어간다고 해도 예술 작품이기보다는 메시지입니다.
예술은 메시지 이상의 뭔가를 드러내죠. 소설이나 시는 쓰고 있는 저에게 진실을 드러낼 수 있어요. 제가 진실을 집어넣는 게 아니라요. 이야기를 만들면서 그 속에 든 진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독자들은 그 속에서 다른 진실을 찾을 수 있지요. 저자가 전혀 의도한 적 없는 방식으로 그 작품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 P95

전 제 내면의 교사에게 더 믿음을 갖고 있어요. 이 교사는 이해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기에 섬세하고 겸손하답니다.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고도 모순된 의견들을 담아내지요. "너희가 날 이해하든 말든 상관없어"라고 중얼대는 오만한 예술가의 자아와 "이걸 들으라고!"라며 외쳐 대는 설교자 자아 사이를 중재할 수 있어요. 진실을 선언하지 않고, 제시만 하지요. 고대 그리스 항아리를 가져다가는 이렇게 말해요. "이걸 자세히 봐요. 연구해 봐요. 연구하면 보상이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이 그릇에서 찾아낸 것들을 어느 정도 말해 줄 수 있어요. 당신도 이 그릇에서 그런 걸 몇가지 찾을지 모르지요."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렇듯 저도 제 예술이 제게 가르쳐 준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기 때문에, 내면의 교사가 필요해요. 하지만 그 교사조차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어요. 결국 교사는 아이들에게 메시지를 기대하라고 가르친 존재니까요. 교사의 본능은 "명확"하고 명백해지는 거예요. 제 본능은 해설 없이 더욱 명쾌 - P97

하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고요. 제 일은 의미를 완전히 작품 자체에 포함시켜서, 살아 있고 변화할 수 있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예술가가 도덕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발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선명하게 말하되, 그 말들 주변에 침묵의 영역을, 빈 공간을 남겨 두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다른 진실, 더 나아간 진실과 통찰들이 생길 수 있게 하는 거죠. 그 공간이야말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곳이니까요. - P98

내가 왜 시애틀에 - P116

있는 게리 박물관은 틀렸다고 생각하고 왜 샌프란시스코 순수 예술의 궁전은 옳다고 생각하는지 자문하다가는, 왜 내가 임신 중단권이 옳다고 생각하는지나 고문이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하려들 때와 똑같이 어마어마하게 힘들고 아무리 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고민에 빠져들고 만다. 그리고 나는 윤리적인 질문과 미학적인 질문 사이에 정말로 종류의 차이가 있다거나 중요성에 차이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진술을 더 파고들자면 철학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테고, 나에겐 철학적 이해가 없다. - P117

인쇄물을 마주하고 의식을 유지하지 못하는 데 대한 자기만족은 의심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또한 나는 우울하게든, 약간은 고소해하면서든 책이 사라져 간다는 추정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나는 책이 남을 거라 생각한다. 다만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책을 읽지는 않을 뿐이다. 왜 지금 우리는 모두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인간 역사의 대부분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은 글을 아예 읽지 못했다. 읽고 쓰는 능력은 힘 없는 자와 힘 있는 자의 경계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힘이었다. 즐거움은 고려 대상이 - P124

아니었다. 상업 기록을 유지하고 이해하는 능력, 먼 거리에서도 암호를 써서 소통할 수 있는 능력, 신의 말씀을 지키고 스스로의 의지와 스스로의 시간에 따라서만 전도할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은 타인을 통제하고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모든 문자 사회는 문해력을 (남성) 지배 계층의 구조적 특권으로 삼아서 시작했다.
문해력은 아주 서서히 아래로 흘러들고, 덜 비밀스러운 만큼 덜 성스러워졌으며, 더 대중적이 될수록 직접적인 영향력이 덜해졌다. 로마인들은 결국 노예와 여자 등 일반 대중까지 읽고 쓰게 했으나, 그들을 계승한 종교 기반 사회로부터 응보를 받았다. 암흑시대, 기독교 사제는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었으나 대부분의 평신도는 대부분 읽을 줄 몰랐고, 많은 여자들도 읽을 줄 몰랐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오늘날 무슬림 사회 몇 군데가 그러하듯, 읽기는 여자에게 부적절한 행위로 여겨졌다.
유럽에서는 중세 전체를 문자의 빛이 서서히 확장되고, 그 빛이 르네상스를 밝히고, 구텐베르크와 함께 찬란해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다음에는 어느새 노예들이 글을 읽고, 이런저런 선언문이라는 종잇조각들과 함께 혁명이 일어나고, 거친 서부 전역에서 여교사들이 총잡이들을 대신하고, 사람들이 뉴욕에 최신 소설을 싣고 온 증기선에 몰려들어서 "어린 넬이 죽었어요? 죽었어?"라고 외치고 있다. - P125

내가 ‘책의 세기 라고 불렀던 과거, 많은 사람이 소설과 시를 읽고 즐기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때라 해도, 얼마나 많은 사 - P130

람이 졸업 후까지 독서에 많은 시간을 들이거나 낼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절엔 대부분의 미국인이 힘들게 일했고 오래 일했다.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은 늘 있었고,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언제나 적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그 숫자를 모르는 건, 그때는 걱정할 설문조사 결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독서에 시간을 낸다면, 그건 그게 직업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거나, 다른 매체를 바로 접할 수 없거나 다른 매체에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면 독서를 즐기기 때문이리라. 퍼센트에 대한 한탄은 설교조를 유도한다. 우리가 책을 읽지 않는다니 나쁜 일이다. 더 읽어야 한다, 더 읽어야만 한다? 우리는 댈러스에 사는 졸음 많은 친구에게 집중하느라 우리 동족을, 단지 읽고 싶어서 읽는 쾌락주의자들을 잊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언제는 다수였던가?
나도 산전수전 다 겪은 와이오밍의 어느 카우보이가 30년동안 안낭 속에 『아이반호Ivanhoe』를 한 권 넣고 다녔다는 사실, 뉴잉글랜드의 여성들이 브라우닝 시 모임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게 좋다. 아직도 그런 독서가들은 있다. 우리의 학교들은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아니 다른 누구에게도) 별로 쓸모가 없지만, 최악의 학교라 해도 책 한 권을 심장에 품고 나오는 아이들은 있다.
물론 책은 이제 "오락 매체"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 즐거움을 전한다는 점에서는 사소하지 않다. 경쟁을 보라. 공영 라디오가 정부의 적개심 탓에 무력해진 사이, 의회는 몇몇 기업이 민영 - P131

라디오 방송국을 사서 품질을 떨어뜨리도록 허용했다. 텔레비전은 계속 무엇이 재미있느냐에 대한 기준을 떨어뜨리다 못해,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두뇌를 마비시키거나 적극적으로 추잡한 상황에 이르렀다. 할리우드는 리메이크를 리메이크하면서 역겨움에 도전하는 가운데, 가끔씩은 획기적인 작품이 우리에게 영화를 예술로서 대할 때 무엇이 가능한지 돌이켜 준다. 그리고 인터넷은 모두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아마도 그 포괄성 때문에 웹서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미학적인‘ 만족감은 이상할 정도로 적다. 컴퓨터로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시나 책을 읽을 순 있겠지만, 이런 물건들은 웹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 웹이 창조한 것도 아니고 웹 고유의 것도 아니다. 어쩌면 블로그는 네트워킹에 창조력을 얹으려는 노력일 수도 있겠고, 블로그가 미학적인 형태를 발전시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성공하지 못한 게 확실하다.
게다가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수동적인 즐거움과 자신들의 즐거움을 다르게 인식한다. 일단 버튼을 눌러 켜면 TV는 계속, 계속, 계속 흘러나오고 그저 앉아서 멍하니 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독서는 능동적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행동이고, 내내 깨어 있어야 한다. 사실상 사냥이나 채집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스스로 말하지 않기에, 책은 도전이 된다. 책은 물결치는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 줄 수도, 요란한 웃음소리나 거실에 울리는 총소리로 귀를 먹먹하게 만들 수도 없다. 책은 머릿속으로 귀 기울여야 한다. 책은 영상이나 화면처럼 눈을 움직여 주지 않는다. - P132

스스로 정신을 쏟지 않는 한 정신을 움직이지도 않고, 마음을 두지 않는 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해 주지 않는다. 단편소설 하나를 잘 읽으려면 그 글을 따라가고, 행동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글을 쓰는 것만 빼고 다 해야 한다. 읽기는 게임처럼 규칙이나 선택지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읽기는 작가의 정신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모두가 빠져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책은 재미있는 물건이다. 첨단기술을 뽐내지는 않지만 복합적이고 극도로 효율적이다. 작고 경제적이며, 감상하기나 다루기나 기분 좋을 때가 많고, 수십 년이나 어쩌면 수백 년까지도 갈 수 있는 정말 뛰어난 장치다. 선을 꽂거나 활성화하거나 기계로 실행할 필요가 없다. 빛과 사람의 눈, 그리고 사람의 머리만 있으면 된다. 단 하나뿐인 무엇은 아니지만, 수명이 짧지도 않다. 책은 오래간다. 책은 믿을 수 있다. 당신이 열다섯 살 때 어떤 책이 뭔가를 말해 줬다면, 오십 살에도 같은 말을 해 줄 것이다. 정작 당신의 이해는 완전히 달라져서 아주 새로운 책을 읽는 것 같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책은 물건이라는 사실,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내구성이 있고, 무한히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가치재라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 P133

어린 아기들에게 물론 잠은 자연스러운 상태다. 아기들은 천사처럼 지조 있게 그리로 돌아가며, 배고픔이나 불편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면 우리에게 자신들의 슬픔과 분노를 알린다. 아기가 깨어 있는 시간은 드넓고 잔잔한 바다에 흩어진 작은 섬들이다. 그 섬들이 하필 부모에게 수면 욕구가 가장 절실한 곳에 끊임없이, 시끄럽게 모인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장한다는 건 점점 더 자주 깨어 있는다는 뜻이다. 아기가 깨어 있는 시간을 나타내는 섬들은 점점 늘어나다가 이어 붙어 낮의 대륙이 되고, 우리 어른들은 목적을 가지고 그 대륙을 돌아다니고 일을 하면서 우리는 깨어(awake) 있으니 곧 자각하고(aware)있다고 확신한다.
명상을 행하는 사람들이 증언하다시피, 그 둘은 같지 않다. 하루 종일 또렷하게 깨어 있으면서 한순간도 자각하지 못할 수 있다. 다중 작업은 가장 최신이자 현재까지 가장 성공적인 자각 회피 - P142

방법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차를 몰면서 휴대폰으로 브로커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각으로 통하지 못하는 좁은 분산 의식에숙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자각하든 그냥 깨어 있든 간에, 우리가 정신을 산란하게 만드는 전자 기구들을 아무리 공급받는다 해도 여전히 잠의 바다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밤이면 밤마다 우리에게 불가사의한 곳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요구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잠이 들 수 있고, 그 의지가 영원히 좌절당하는 것 같은 때라도 사실 밤새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불면증은 형언할 수 없이 비참하지만, 계속 잠을 자지 않는 상태는 정신과 신체에 너무나 파멸적이기 때문에, 50시간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면 끔찍한 고통을 가해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잠들지 않을 수도 있으나,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하고 만다. 아무리 의식을 붙들고 있으려 해도, 의식이 녹아내릴 때가 오면 붙잡을 도리가 없다. 의식은 그냥 꺼지고, 온 우주를 조용히 데려간다. - P143

그래서, 우리가 여자들에게 무엇을 배우느냐는 질문에 답해 볼까요? 제가 첫 번째로 내놓을 거대한 일반화는 우리가 인간이 되는 법을 배운다는 겁니다.
지금 오리건에 이르기까지, 1000년이 넘도록 모든 사회에서 여자들은 어떻게 걷고, 말하고, 먹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다른 아이들과 놀지, 그리고 어떤 어른들을 공경해야 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해야 할지에 이르는 대부분의 기초적인 지시를 제공해 왔어요. 기초 기술이자, 기본 규칙들이죠. 살아남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산다는 놀랍고도 복잡한 일 전체예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부분의 장소에서 아기와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때로는 온전히 어머니와 할머니와 이모, 고모, 이웃, 마을 여자들, 유치원과 유아원 교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았어요. 이 전통은 지금 미국에서도 이어지죠. 아이들을 데리고 슈퍼마켓에 온 젊은 어머니를 볼 때마다, 사실은 인생 학자이며 놀랍도록 복합적인 교육 과정을 가르치는 교사를 보는 거예요. 그 사람이 잘 가르치느냐, 썩 잘 가르치진 못하느냐는 규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거의 늘 가르치는 건 그 사람이에요.
그들이 가르치는 기초 기술들은 대개 성별이 무관해요. 남자아이도 여자아이도 배우죠. 사회적인 기술에 이르면 파란색이나 분홍색이 주어지고, 여자아이는 어른들과 있을 때 얌전하고 예의 바르게 굴라고 배우는 반면 남자아이는 소리를 지르고 성가시 - P149

게 굴도록 배운다거나, 여자아이는 머리에 꽃을 꽂고 춤을 추면 칭찬을 받지만 남자아이가 그러면 부끄러워하게 한다거나 할 순 있겠죠. 하지만 전반적으로 여자들이 가르치는 기초 기술과 예의는 성별을 아울러요. 반대로 어린아이들이 남자들에게 배우는 건 성별화될 때가 많죠.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분홍색과 파란색이 섞이지 않게 하는 데 관심이 많을 수 있어요. 아버지들은 아이들에게 성 역할을 가르칠 때가 많죠. 남자애에게는 남자다워지는 방법을, 여자애에게는 여자다워지는 방법을요. 남자들은 성장하는 남자애들의 교육은 완전히 넘겨받으면서, 여자애들에 대한 추가 교육은 무시할때도 많아요. 수천 년 동안 여자애의 교육은 거의 전적으로 집안과 여성이 맡았고, 아직도 그런 곳이 많아요. 남자들이 자기 딸이 아닌 여자애들을 가르치는 건 상당히 최근에 생긴 현상이죠. 수천 년 동안 집 밖의 법은 남성 사제들이 정했고, 집안에서는 가족 중 아버지가 그 법을 집행하면서 딸들에게는 복종밖에 가르치지 않았어요. 여섯 살쯤이 지나면 남자애들은 남자에게 배우고 여자애들은 여자에게 배우는 게 일반적인 규칙이었고, 성별 구별과 위계, 퍼다나 샤리아 법은 절대적이 될수록 더 진짜가 됐어요.
특정 나이가 지난 남자애에 한하여 남성 지식만 가르치면서 남자들은 어린아이에게 공동체의 예의와 도덕을 가르치는 중요 - P150

역할을 여자들에게 맡겼어요. 성별 무관하게 사람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을요. 어쩌면 여기에 변화의 기반이, 어쩌면 전복의 기반까지도 풍성하게 있을지 몰라요. - P151

공적인 남성형 가르침과 사적인 여성형 가르침은 다를 수 있고, 그 차이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요. 슬럼가에 사는 홀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스스로를 존중하고 정직한 시민으로 행동하기를 기대한다고 가르치지만, 그 아이들이 길거리 지도자인 젊은 남자들에게, 또 너무 자주 교사와 경찰관에게 배우는 것은 그들이 한 가지 역할밖에 허용되지 않는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며 그 역할이란 중독자와 범죄자가 되고 쓸모없거나 그보다 더 나쁜 존재가 되는 것일 때처럼요.
아니면 어떤 가족이 아들들을 평화롭고 자비롭게 사는 이야기로 키웠는데, 남성 기관이나 군대가 그 아이들을 전쟁 이야기에 밀어 넣어, 사람을 죽이고 가차없이 잔인해지도록 내몰릴 때도 그렇지요.
아니면 어떤 어머니가 딸들을 요리와 살림 같은 전통적인 기술을 귀중하게 여기는 전통으로 키웠는데, 사업가와 정치가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이야기로 그런 일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믿게 할 때도 그렇죠. 아예 일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고 말이에요.
아주 자주 반복되는 이야기 하나는 우리에게 여자들은 타고나기를 모험심이 없고 보수적이어서 전통 가치를 잘 지킨다고 해 - P153

요. 정말 그런가요? 남자들이 스스로를 혁신가이자 거물로, 사회의 방식을 바꾸는 사람들이자, 새롭고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사람들로 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전 모르겠네요. 생각해 볼 가치는 있겠지요. - P154

내가 여자라면, 왜 난 남자들이 중심이고 우선이며 여자들은 주변에 부차적으로 나오는 책을 쓰고 있는 거지? 마치 남자가 된 것처럼?
그야 편집자들이 그러길 기대하고, 서평가들이 그러길 기대하니까죠. 하지만 무슨 권리로 그 사람들이 나에게 남장을 기대하는 거죠?
내가 진짜 자신으로, 빌려 입은 턱시도나 국부 보호대 말고 내 몸 그대로 쓰려고 한 적이 있긴 했을까? 내 몸, 내 옷을 입고 글 쓰는 방법을 알긴 할까?
아닙니다. 전 방법을 몰랐어요. 방법을 배우느라 시간이 꽤 - P155

걸렸죠. 그리고 제게 그 방법을 가르쳐 준 건 다른 여자들이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요. 이전 세대의 여성 저자들, 남성우월주의 문학 지배층에게 묻혔다가 『노턴 여성 작가 앤솔러지』 같은 책에서 재발견되고 찬양받고 다시 태어난 작가들요. 그리고 대부분 저보다 젊은 동료 작가들, 문학 보수파와 장르 보수파 양쪽에 저항하며 여성으로서 여성에 대해 쓰는 여성 작가들요. 전 그 작가들에게 용기를 배웠어요.
하지만 여성의 지식을 숭배하고 우리는 남자들이 모르는 걸 안다고 우쭐하고 여자들에겐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지혜가 있고 본능적으로 자연을 안다고 생각하진 않았고, 지금도 그러고 싶진 않아요. 그런 숭배는 대개 여자를 원시적이고 열등하다고 여기는 남성우월주의를 강화할 뿐이에요. 여자들의 지식은 기본적이고 원시적이고 언제나 어두운 뿌리를 따라 내려가는 반면, 남자들은 빛 속으로 자라는 꽃과 곡물을 경작하고 소유한다는 거죠.
하지만 어째서 남자들은 성장하는데 여자들은 계속 유아어를 해야 하죠? 어째서 남자들은 ‘생각하는데‘ 여자들은 무턱대고 ‘느껴야‘ 하죠?
아래는 제 소설 『테하누』에 나오는 어느 등장인물이 성별화된 지식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대목이에요. 중심인물인 테나와 테나의 친구인 늙고 가난하고 무식한 마녀 이끼가 남자 마법사들과 그들의 힘에 대해 논하죠. 테나가 여자들의 힘은 어떠냐고 묻자 이끼가 말해요. - P156

"아, 글쎄요. 여자는 완전히 다르지. 여자가 어디에서 시작하고 끝나는지 누가 알겠어요? 들어 봐요, 나에겐 뿌리가 있어. 이 섬보다 더 깊은 뿌리가 있지. 바다보다 더 깊고, 땅이 솟아오른 때보다 더 오래된 뿌리요. 난 그 어둠 속으로 돌아가요."
이끼의 눈은 불그스름한 테두리 안에서 기묘하게 번쩍였고 목소리는 악기처럼 울렸다. "어둠 속으로 돌아간다고요! 난 달보다 더 이전에 있었지.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몰라, 아무도내가 누구인지, 여자가 무엇인지, 힘을 지닌 여자가 무엇인지, 나무뿌리보다 더 깊고 섬들의 뿌리보다 더 깊고 창조보다 더 오래됐으며 달보다 더 오래된 여자의 힘이 무엇인지 말할 수가 없어. 감히 누가 어둠에게 질문을 던질까요? 누가 어둠에게 이름을 묻겠냐고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나 여자들에게나 거듭거듭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말을 한다고 듣고 읽어요. 실제로는 정반대 말을 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래요. 위에 인용한 연설은 그 내용에 찬성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백 번은 인용됐어요. 하지만 테나의 대답에 주목한 독자나 비평가는 하나도 못 봤네요.
"누가 어둠에게 이름을 묻겠냐고요?" 이끼가 말하죠. 아주 수사적인 질문이에요.
하지만 테나는 대답해요. 이렇게요. "내가 묻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죠. "난 어둠 속에 충분히 오래 살았어요." - P157

이끼는 남성우월주의 사회가 여자들에게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있어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남겨 둔 유일한 영역을 자랑스럽게 자기 것으로 주장하죠. 원시와 신비, 어둠의 영역을요. 그리고 테나는 거기 한정되기를 거부해요. 테나는 이성과 지식과 사상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고, 어둠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햇빛까지 차지하려 하죠.
저 대목에서 테나가 제 대신 말하고 있어요. 우린 어둠 속에 충분히 오래 살았어요. 우린 햇빛에 똑같은 권리가 있고, 이성과 과학과 예술과 나머지 모든 것을 배우고 가르칠 권리가 똑같이 있어요. 여자들이여, 지하실과 부엌과 아이 방에서 나와요. 이 집 전체가 우리 집이에요. 그리고 남자들이여, 그렇게나 무서워하는 어두운 지하실에서나 부엌과 아이 방에서 사는 방법을 익힐 때가됐어요. 그러고 나면 우리 모두가 불가에 모여서, 우리가 공유하는 집의 거실에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우린 서로에게 할 말도 많고, 배울 것도 많아요. - P158

나는 여자들의 소설을 문학 정전에서 한 권씩 한 권씩, 한 명씩 한 명씩 배제하는 흔한 기법이나 수법을 네 가지 알고 있다. 이 수법들은 폄하, 누락, 예외화, 그리고 실종이다. 이 넷이 쌓여 지속적으로 여자들의 글을 주변으로 밀어낸다. - P160

폄하(Denigration)
(...)
편견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존재하며, 편향은 생략을 통해 드러난다. 비평가들은 여자들과 얽힌 장르라면 읽지도 않고 통째로 묵살할 수 있다. 미스터리나 전쟁소설이 로맨스가 흔히 겪는 경멸과 무시를 당한다면, 아니면 남성 중심적인 장르에 "칙릿" 같은 경멸스러운 딱지가 붙는다면 분개와 저항이 있을 것이다. 많은 여자들이 특정한 마초형 글쓰기를 "프릭릿"이라고 부르지만, 비평에서 그 용어를 쓰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생색내는 익살투가 여성 저자를 폄하하는 데 쓰이는 일도 많다. 여자들의 글은 매력적이다, 우아하다, 가슴 저민다, 감성적이다 같은 소리를 들을 수는 있어도 강력하다거나 선이 굵다거나 대가답다는 말을 듣는 일은 아주 드물다. 어떤 저자의 성별은 저널리즘 정신마저 지배하는 모양이며, 성별(gender)은 성적인 매력으로 읽힌다. 조지 엘리엇을 논하면서 "수수했다"는 언급이 빠지는 일은 드물다. 『가시나무새』의 저자인 콜린 매컬로의 《뉴욕 타임스》 부고에도 똑같이 외모 관련이 깊은 정보가 들어가 있었다. 남성 저자들은 살았든 죽었든 간에 못생겼다거나 매력 없는 남자였다는 언급과 함께 논하는 일이 없건만, 예쁜 얼굴이 아니라는 죄악은 죽은후까지 여자들을 따라간다. - P161

어떤 여자가 쓴 책을 다른 여자들의 작품과 비교하면서 남자들의 작품과는 비교하지 않는 것도 교묘하고 효과적인 폄하 수법이다. 그렇게 하면 서평가가 어떤 여자의 책이 어떤 남자의 책보다 낫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으면서, 여자들의 성취를 안전하게 주류에서 밀어내어 닭장에 집어넣을 수 있다.

누락(Omission)
정기 간행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남자들의 책을 여자들의 책보다 많이, 더 길게 평한다.
여자들의 책은 남자나 여자나 평하지만, 남자들의 책은 남자들이 평할 때가 훨씬 많다.
도 여자들의 책은 공동 서평에서 함께 다룰 때가 많은 반면, 남자들의 책은 개별 서평을 받는다.
가장 두드러지는 누락 기술은, 예상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대놓고 경쟁하는 분야에서 쓰인다. 문학상들이다. 심사위원들은 흔히 남자와 여자 양쪽이 들어간 최종 후보를 뽑지만, 상은 남자에게 준다.
여성 저자들에게만 한정된 상을 제외하면,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문학상 최종 후보 목록을 본 적이 없다. - P162

앤솔러지도 똑같은 젠더 불균형을 보이는 편이다. 최근 잉글랜드에서 출간된 SF 앤솔러지 하나는 여자 작가의 단편을 하나도 싣지 않았다. 소란이 일었다. 작품 선정을 맡은 남자들은 여자 작가를 하나 초청했는데 잘되지 않았으며, 어째선지 그냥 모든 단편이 남자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말로 사과했다. 정말 죄송하다고.
"어째선지" 모든 단편이 여자 작가로 구성되었다면, 눈에 띄었을 것이란 느낌이 든다.

예외화(Exception)
남자의 소설을 논하면서 저자의 성별을 언급하는 경우는 - P163

몹시 드물다. 여자의 소설은 저자의 성별과 함께 논의되는 경우가아주 잦다. 정상은 남성이다. 여성은 정상의 예외, 정상에서 배제된 존재다.
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 비평가는 애써 울프가 예외임을 보여 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 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았다고 밝혀진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 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컬트"의 대상이다. 그 작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가슴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 P164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 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화는 작가의 죽음 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실종(Disappearance)
나는 이 말을 적극적인 의미로 쓰며, 여기에 내포된 의미를 온전히 의식하고 있다.
여자들의 글을 깎아내리는 온갖 어리석거나 교묘한 수법을 통틀어, 실종이 가장 효과적이다. 일단 작가가 힘을 잃고 조용해지면, 남성 연대가 재빨리 외부인을 상대로 똘똘 뭉친다. 여성 연대나 정의로운 본능이 그 결속을 깰 만큼 강한 경우는 드물고, 그 노력이 성공한다 해도 남성 결속은 쉽사리 다시 이루어지기 때문 - P165

에 노력을 끝없이 이어 나가야 한다.
나는 이전에도 특히 격분했던 실종 사례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과 마거릿 올리펀트였다. 둘 다 지금까지도 종종 "미시즈(Mrs.)"로만 불리는데, 두 작가의 성별과 사회적 위치를 알리는 칭호다.("미스터 디킨스"나 "미스터 트롤럽"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개스켈과 올리펀트는 생전에 유명하고 인기 있었으며 존경받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죽고 나자 바로 사라졌다. (...)
이런 부당한 격하는 불쾌할 뿐 아니라 낭비이기도 하다. 사실 뛰어난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는 그중 두 명을 단지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던질 수 있을 만큼 많지가 않다. 그런데 그들의 소설이 실종된 데 어떤 다른 이유를 댈 수 있나? 개스캘은 페미니스트들과 영화 덕분에 이제 상당히 잘 복귀했다. 올리펀트는 아니다. 어째서? 올리펀트와 트롤럽에게는 유사성이 많다. 한계는 명확하지만, 치명적은 아니다. 둘 다 확실히 재미있는 소설을 썼고, 심리 면에서 신중하고도 통찰력 있으며, 또한 매력적인 사회 보고서다. 하지만 올리펀트의 작품만 사라졌다. - P166

여성 비평가들, 페미니스트 작가들, 공정한 학자와 교사와 문학 애호가들이 의식적으로 계속해서 페일리의 작품이 보이도록 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읽고, 다시 찍어 내는 노력을 기울이지않으면, 그녀의 작품은 몇 년 안에 조용히 무시당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다. 어쩌다 보니 절판이 될 것이고, 그보다 못한 작가들의 작품이 오직 남자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살아남는 동안 잊힐 것이다.
그러지 말자. 이렇게 계속 훌륭한 작가들이 남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실종당하고 묻혀 버리게 둘 수는 없다. 평화로이 썩어 가게 두어야 할 작가들은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끊임없이 부활하여 비평과 커리큘럼의 좀비가 되는 판에 말이다.
나는 미인이 아니지만, 나에게 ‘그녀는 수수했다‘ 같은 묘비 - P169

는 주지 말아 달라. 나는 실제로 할머니지만, 나에게 ‘누군가의 할머니‘라는 묘비는 주지 말라. 나에게 묘비가 있다면, 내 이름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보다도 작가의 성별이 아니라 글의 우수함과 작품의 가치로 판단받는 책들에 내 이름이 박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훨씬 크다. - P170

장르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유용한 본보기들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전복적이었던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올랜도Orlando』를 읽었을 때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 나이에는 그 책이 반은 계시 같고 반은 혼란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 - P171

다. 작가가 우리와 많이 다른 사회를, 아주 색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극적으로 살려 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엘리자베스 시대 장면들을, 템스 강이 얼어붙은 겨울을 생각하고 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그곳에 있었고, 얼음 속에 타오르는 모닥불들을 보고 500년 전 그 순간의 경이로운 기이함을 느꼈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로 실려 가는 진짜 설렘이 있었다.
(...)
소설 『플러시Flush』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개의 마음속으로들어가는데, 말하자면 비인간의 뇌이자 외계의 정신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대단히 SF적이다. 다시 한 번, 그 책에서 내가 배운 것은 정확하고 선명하고 고도로 선별된 세부 사항이 가진 힘이었다. - P172

내게는 사실 사람들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읽고 쓰는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는 같이 일하고 대화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좁은 방에 혼자 앉아서 종일 화면을 보며 쓰고 읽는다. 만나서든 전화하는 구두로 이루어지던 의사소통이 이제는 쓰고 읽고 이메일을 통할 때가 많다. 그래, 그 모든 게 책 읽기와 별 상관이 없는 건 맞다. 하지만 읽기를 그 어느 때보다 더 가치 있는 기술로 만든 압도적인 과학기술의 보급이 낳은 결과가 책의 죽음이 되는 까닭은 모르겠다.
은수 종말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 하지만 아이패드로 할 수있는 놀랍고도 끊임없는 다른 모든 것들과 벌이는 경쟁이 책을 죽이고 있다고요!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그 경쟁이 독자들의 안목을 더 높이기만 할 수도 있다. - P176

책의 죽음에 대한 다른 항의들은 웹에서 제공하는 직접 경쟁과 관련되어 있다. "손끝으로 켤 수 있는 오락의 세계"는 독서를 하찮게 만든다.
이때의 "책"은 대체로 문학을 가리킨다. 현재 DIY 매뉴얼과 요리책, 이런저런 안내서는 책 중에서 화면의 정보로 대체되는 일이 가장 많은 종류다. - P179

아무리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해도 『일리아드』나 『제인 에어』나 『바가바드 기타』가 죽었다거나 죽을 거라고 믿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경쟁하게 된 건 맞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책이 무슨 내용인지 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책은 손끝의 오락 세계로 대체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그 작품들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읽기를 배우는 한(재정이 부족한 공립학교들에서 배울 수도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특히 읽어야 할 책을 배우고 그 책을 지적으로 읽는 방법(재정이 부족한 공립학교에서 이제는 생략해 버릴 때가 많은, 기본 기술의 확장판이다.)을 배우는 한, 그 사람들 중에 손끝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무수한 오락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종이가 됐든 화면이 됐든 책을 읽을 것이고, 문학이 주는 즐거움과 존재 증대감을 누리려 문학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책이 지속적으로 존재하게 지키려고 할 것이다. 지속성은 문학과 지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책은 대부분의 예술과 오락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차지한다. 수명이라는 면에서는 아마 건축과 돌 조각만이 책을 능가할 것이다. - P180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그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 만들고야 말 것이다.
기술 세대가 아니라 인간 세대 말이다. 지금 기술의 한 세대는 생쥐 수명만큼 짧아질 판이고, 이러다가는 초파리 수명만큼 짧아질지도 모른다.
책의 수명은 그보다는 말이나 인간의 수명, 때로는 참나무,
심지어는 레드우드의 수명과 비슷하다. 그러니 책의 죽음을 슬퍼 - P183

하기보다는 이제 책이 살아남아 전해지고 지속될 방법이 하나가아니라 둘이 됐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게 좋겠다. - P184

모든 독자는 특정 장르를 선호하고 다른 장르는 지루해하거나 불쾌해할 거예요. 하지만 어떤 장르가 다른 모든 장르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 편견을 변호할 준비를 해야 하고 변호할 수 있어야 해요. 변호하려면 그 "열등한" 장르들이 실제로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특성은 무엇이며 탁월한 작품은 무엇인지도 알아야 하고요. 그러니까 읽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모든 소설 장르를 문학으로 접근한다면 리얼리즘 규칙에 따라 쓰지 않는 인기 소설가들에 대한 심술궂은 혹평과 비웃음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순수예술 석사과정에서 상상 장르 창작을 금지하는 일도, 너무나 많은 영어 교사들이 사람들이 실제 읽는 책을 가르치지 못하는 상황도, 그리고 실제로 그 책을 읽 - P187

는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사과하는 멍청한 일도 끝날 거예요.
비평가와 교사들이 단 한 종류의 문학만이 읽을 가치가 있는 문학이라는 주장을 포기한다면 소설이 하는 다른 일들과 그 방법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더 생길 것이고, 무엇보다도 왜 모든 장르마다 특정한 책들이 다른 대부분의 책보다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고, 몇백 년간 그렇게 여겨졌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여겨질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생기겠지요.
세상엔 진짜 수수께끼가 있으니까요. 왜 어떤 책은 재미있고, 어떤 책은 실망스럽고, 또 어떤 책은 계시를 내려 주며 오래도록 즐거울까요? 작품의 질이란 뭘까요? 훌륭한 책을 훌륭하게 만들고 형편없는 책을 형편없게 만드는 건 뭘까요?
소재는 아니에요. 장르도 아니죠. 그렇다면, 뭘까요? 좋은비평은, 좋은 책 이야기는 언제나 그 문제를 다뤘어요. - P188

좋아요. 이야기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일어난 일을 말하는 이야기,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말하는 이야기죠.
첫 번째 이야기에는 역사, 저널리즘, 전기, 자서전, 회고록이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소설이 있죠. 지어내는 이야기들요.
우리, 미국인들은 첫 번째 종류를 더 편안해하는 편이에요. 우리는 뭔가를 지어내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과 "실제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편안해하죠. 우리는 "리얼리티"에 대해 말해주는 이야기들을 원해요. 어쩌나 원하는지, 심지어는 완전히 가짜 상황을 꾸며 놓고 찍으면서 그걸 "리얼리티 TV"라고 부를 정도죠.
이 모든 것들의 문제는, 당신의 진짜는 나의 진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현실(리얼리티)을 같은 방식으로 인지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현실을 아예 인지하지 못하죠. 폭스 뉴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리얼리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이런 차이가 아마 우리에게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일 거예요.
‘사실(fact)‘이 우리의 공통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상식같지요. 하지만 사실, ‘사실‘은 너무나 구하기 어렵고, 너무나 관점에 달려 있으며, 너무나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차라리 소설에서나 - P190

서로 공유하는 현실을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답니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도 있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읽어 줌으로써 우리는 상상의 문을 열어요. 그리고 상상은 우리가 서로의 머리와 마음에 대해 알 가장 좋은 방법,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지요. - P191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소설은 사실 파악이나 거짓말이 아닌 다른 층위의 현실로 넘어가죠.
상상과 소망 충족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둘 다 글쓰기에서나 삶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충족은 현실에서 잘라 낸 생각이고,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지만 위험할 수 있는 방종이에요. 상상은 아무리 마구잡이일 때라 해도 현실과 떨어져 있죠.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풍성하게 만들어요. 돈키호테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푹 빠진 나머지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죠. 그게 소망 충족이에요. 미겔 세르반테스는 기사이고 싶어 하는 한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함으로써 우리의 웃음과 인간 이해를 크게 증대시켰어요. 그게 상상입니다. 소망 충족은 히틀러의 천년 왕국이고, 상상은 미합중국 헌법이에요.
이 차이를 알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위험해요. 우리가 상상을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 한갓 현실도피라 여기고, 그래서 믿지 않고 억누른다면, 상상은 손상되고 왜곡되어 침묵에 빠지거나 거짓말을 하게 될 거예요. 모든 기본적인 인간 능력이 다 그렇듯, 상상력도 어려서부터 평생 연습하고 단련하고 훈련해야 해요. - P192

인터넷이라는 멋진 신세계에서의 독서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할게요. 여기 우리 모두는 글쓰기에 대해 말하고 있고, 다들 이젠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말해요. 전문가들은 책이 죽었다고 울어대고, 사람들은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읽을 생각이 없어요. 미국인들은 책을 10년에 4분의 1권 정도 읽어요. 호메로스가 어떻게 아이패드와 경쟁하겠어요? 아무도 『돈키호테』를 원하지 않아요. 트윗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면 우린 여기 글쓰기 축제에서 뭘 하는걸까요?
작가들이 언제나 했던 일이죠. 우린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 P196

쓰고, 읽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파였어요. 엘리트가 아니라, 그냥 소수파예요. 이 세상 사람들 다수는 즐거움을 위해 글을 읽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고, 어떤 사람들은 읽으려 하지 않죠.
머리를 쥐어뜯을 일이 아니에요. 세상을 구성하려면 온갖 부류가 다 있어야 해요. 남자들이 몇 시간씩 방망이로 공을 때리는 모습을 보는 건 저에게도 즐겁지 않고, 세상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즐겁지 않죠. 그렇다고 해서 야구가 - 아니면 크리켓까지도 - 죽은 건 아니에요.
우리는 바뀐 게 독서가 아니라 출판인데도 독서에 대해 괜히 허둥거리고 있어요. - P197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가끔은 모든 사람이 쓰고만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제 말 믿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그리고 자본주의 기술이 만든 거대 기계의 뒷구멍과 틈 속 어딘가에서 작가들과 독자들은 언제나 그랬듯 서로를 찾아낼 거예요. - P198

헤밍웨이처럼 유명한 작가들이 오직 돈 때문에 쓸 뿐이라고 큰소리치는 것과, 무명 작가들이 일이라서 글을 쓰는 것은 다른문제다. 나는 후자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다. 생계를 위해 소설을 쓴다는 건 힘든 일이고, 거의 언제나 낮거나 불확실한 이익밖에 얻지 못하는 고도의 숙련 노동이다. 틀에서 벗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에게는 노예의 굴레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기술이 그렇듯 진지한 종사자는 그 보상으로 뭔가를 할 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걸 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끝낼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내적 확신까지도 얻을 수 있다. 본서를 포함하여 딕의 최고작 여러 편에는 정직하고 겸손한 장인에 대한 딕의 깊은 존경심이 스며 있다. 작가 본인이 오랫동안 그런 존재였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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