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스위프트식의 풍자, 볼테르식의 철학적 허구, 그리고 우화식의 SF는 모두 우리에게 빛을 전해 줄 뿐, 온기는 없다. 인류에 대한 보편 진실을 찾기 위해, 이런 글들은 개별 인간들의 강력한 저항정신을 포기하고 가야 한다. 다른 소설들은 거기에서 활력을 얻는데 말이다. 또한 이런 이야기 방식들은 스스로를 남성으로 성별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을 비하할 수도 있고, 여성을 남성 등장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끼울 수도 있으며, 아예 여성을 내보내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두가 18세기나 그 이전 모든 세기의 문학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SF는 너무 자주 인류의 절반만으로 "미래"를 창조함으로써 장르의 지적, 도덕적 잠재력을 좁힌 나머지, SF 하면 다 사내아이들을 위한 순진한 모험담이라 치부할 수 있게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자료에 나오는 솔라리스학의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은모두 남성으로 보인다. 현재 솔라리스에 가 있는 과학자들은 모두 - P240
남성이니, 분명 이전에 갔던 팀도 모두 남성이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쓰인 진지한 소설이 여성을 아예 포함시키지 않고서 지적 영역을 구축하려 한다면, 이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누락을 통해 어떤 선언을 담는 셈이다. 독자는 당연하게도 혹시 지적인 영역이란 여성을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걸까 생각할 수 있다. 혹시 여자를 받아들이면 그 영역은 무너질까? 이건 그런 암시일까? - P241
자기가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해 쓰는 작가는 두 가지 위험을 감수한다. 하나는 오해와 와전, 즉 잘못 진술하는 것이다. 또 하 - P252
나는 착취와 강탈, 즉 잘못하는 짓이다. 지배적인 집단에 속하면서더 힘없는 집단 구성원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작가들은 그런 위험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무관심으로 위험을 감수한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해도, 그런 무지는 결과를 망친다. 콜럼버스는 자신들이 신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이들의 통제자이자 소유자이자 정당한 착취자로 타고났다는 백인의 확신을 신세계에 가져왔다. 인디언들은 그 후로 줄곧 그 어마어마한 특권 의식에 맞서 왔다. 침묵당한 이들을 위해 말하는 일과,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화자의 목소리로 묻어 버리는 일은 다르다. 후자와 같은 잘못을 너무나 오랜 기간 저질렀기에, 어쩌면 정직한 선의와 선행을 아무리 쌓는다 해도 인디언에 대해 쓰는 백인 소설가(또는 회고록 저자, 또는 인류학자)가 또 강탈하겠구나 하는 의심을 완전히 씻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디언과 백인이 관계를 맺은 역사 전체에서 죄의식은 피할 수가 없다. 죄의식이란, 죄의식을 인정함으로써 더 나은 곳으로 갈 수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주로 인디언 작가와 활동가들이 쉼 없이 의식화해 준 덕분에 우리는 서서히 더 나은 곳으로 향했다. 백인 작가들은 열렬한 동일시가 역겨운 침해일 수 있고, 이상화는 악마화 못지않은 모욕일 수 있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이제 순진하게도 "인디언의 관점에서" 소설 쓰기에 나서는 사람은 별로 없다. - P253
모하비 땅 깊숙이 자리 잡은 외딴 방목장에서 사는 사우스보이는 인디언들과 함께 섞여서 자랐고, 알고 있는 것 대부분을 인디언들에게 배웠으며,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많은 부분 인디언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인디언은 아니다. 그는 피가 섞인 게 아니라 문화와 정신과 마음이 섞인 사람이다. 그에게는 두 영혼이 있다. 그리고 열다섯의 나이에 그는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은 영영 떠나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성인이 된다는 건 언제나 자기 사람들을 찾고 망명에 나서는 일, 둘 다인지도 모르겠다. - P255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 가늘게 비치는 빛은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고독한 한 사람이다. 주인공은 오직 잘못을 저지르고 거짓말을 함으로써만 옳은 일을 하고 남편을 지킬 수 있다. 그녀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눈이 먼 척하지만 사실은 눈이 멀지 않았기에, 견딜 수 없는 참상들을 목격해야 한다. 그녀의 딜레마 속에는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라는 냉소적인 옛말이 들어 있다. H. G. 웰스는 그 격언이 틀렸음을 입증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뛰어나면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를 하나 쓰기도 했다. 사라마구는 그 반박을 더욱 발전시켜, 지난 50년간 세상에 나온 가장 강력한 도덕 소설로 만들어 낸다. 나에게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고, 20세기의 가장 진실한 우화다. 이 작품은 위기에 마비된 이 기묘한시대에 문학이 무엇일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사라마구는 2010년 여름, 87세에 사망했다. 그해 가을, 휴턴 미플린 하코트 출판사는 그의 소설들을 전자책으로 출간했고, 블로그에서 처음으로 버추얼 문학에 대해 말한 사람이 사라마구였기에 이렇게 가상으로 존재하는 판본이 있는 게 딱 맞는 일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를 더 잘 드러내기 위해 현실에서 떼어낸 듯 보이는" 허구라고 쓴 그는 이 장르의 발명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돌리지만, 이 장르에 보르헤스의 작품에는 없는 탁월 - P269
한 요소를 가져온 사람은 사라마구였다. 평범한 사람들과 일상에 대한 열정적이고 연민 가득한 관심 말이다. 우리에게 분류 카테고리가 정말로 더 필요하지는 않을 테지만, 버추얼 문학은 외삽(外揮) 경향이 있는 과학소설과 사변 소설, 완전히 상상해 낸 현실을 다루는 판타지, 분개와 개선 의지가 담긴 풍자 소설, 남아메리카 고유의 마법적 리얼리즘, 진부함에 고착된 현대 리얼리즘과 다른 유용한 카테고리일 수 있다. 나는 버추얼 문학이 이 모든 장르와 기반을 공유하지만 (실제로 모두 겹쳐지는데가 있고), 그 목적이 사라마구의 표현대로 수수께끼를 밝히는 데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이해한다. 그의 작품들에서 이는 가장 소박하고 수수한 통찰로, 어마어마한 계시가 아니라 그저 해가 뜨기 전에 서서히 찾아오는 빛이다. 드러난 수수께끼는 대낮의 빛,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빛이며, 말 그대로 매일 일어나는 신비다. - P270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 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주는 유일한 소설가다.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다. 그에게는 우리가 부족하나마 지혜라고 부르는 예리하고도 꾸밈없는 이해력을 얻어 낼 시간과 용기가 있었다. 지혜라고는 부르지만 흔히 지혜라고딱지 붙이는 번지르르한 다독임이 아니다. 그는 전혀 사람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체념하라는 조언을 읊어 대진 않지만, 친절한 트릭스터인 희망에 대해서도 별로 확신하지 않는다. - P271
사라마구는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은 우주의 침묵이고, 인간은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침이다." 그가 그렇게 극적인 경구를 내놓을 때는 자주 없다. 나라면 신에 대한 사라마구의 평소 태도를 꼬치꼬치 따지고, 회의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끈기 있다고 표현하겠다. 흔히 보는 절규하는 전문 무신론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이고 교권 반대론자이며 종교를 믿지 않고, 신실한 지도자들도 당연히 그를 싫어하거니와 그역시 진심으로 그들을 싫어한다. (...) 사라마구의 무신론은 페미니즘의 한 조각이고 그의 페미니즘은 여자들에 대한 학대와 저임금 지불과 평가 절하에 대한 격분, 모든 사회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권력을 오용하는 방식에 대한 격노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그에게는 사회주의의 한 부분이다. 그는 약자 편에 서 있다. 사라마구에게 감상주의가 없지는 않다.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면에서 대단히 희귀한 뭔가를 전달한다. 환상을 깨뜨리면서도 애정과 경탄을 허용하고, 맑은 시선으로 용서한다. 그는 우 - P273
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그 정신과 유머 면에서 최초의 위대한 유럽 소설가 세르반테스와 가장 가까운 작가인지도 모른다. 이성의 꿈과 정의의 희망이 끝없이 좌절될 때, 냉소주의는 쉬운 출구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농민 사라마구는 그쉬운 출구를 택하지 않는다. - P274
노벨상 연설에서 사라마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사는 작은 경작지 너머로 모험을 떠날 수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기 때문에, 남은 가능성이라곤 뿌리를 향해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제 뿌리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야심을 부려도 된다면 세상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 힘겹고 끈기 있는 파 내려가기가 이토록 가볍고 기분 좋은 책에 깊이와 무게를 더한다. - P286
SF는 어떤 현실 상황에 대한 상상 속의 전복에나 기꺼이 힘을 빌려준다. 상상력을 기르지 못하는 관료들과 정치가들은 SF 소설이란 다 레이저총이나 나오는 헛소리이고, 아이들이나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SF 작가가 검열을 당하려면 『우리들』의 자먀찐처럼 대놓고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노골적이지 않았고, (내 좁은 지식으로는) 정부 정책을 대놓고 비판한 적도 없다. 그때도 제일 감탄했고 지금도 감탄하는 점은, 그들은 이념에 무관심한 듯이 글을 썼다는 점이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우리 작가들도 힘들어하는 일이건만, 그들은 자유로운 사람처럼 썼다. - P289
이 책이 나왔을 때는 SF에서 이런 평범한 사람들을 중심인물로 쓰는 일이 꽤 드물었고, 지금도 SF는 쉽사리 엘리트주의에 빠진다. 엄청나게 뛰어난 머리, 비범한 재능, 일반 승무원보다는 지휘관, 노동 계급의 부엌보다는 권력의 회랑이 나온다. 이 장르가 전문적으로, 그러니까 "하드하게 남아 있기를 원하는 이들은 엘리트 스타일을 선호한다. SF를 그저 소설 쓰기의 한 방식으로 보는이들은 전쟁을 장군들만이 아니라 주부와 죄수와 16세 소년들의 눈으로 묘사하고, 외계인의 방문을 지식인 과학자들의 시선으로만 보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을 통해 서술하는 좀 더 톨스토이다운 접근을 환영한다. - P291
"달의 아침"이라는 챕터는 그 자체로 ‘왜 사람들이 과학소설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는지도 모른다. 진지하게 묻든 깔보듯이 묻듣 간에 그 질문의 답을 내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나는 이런 글을 볼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읽는다. 미지의 것들에 대한 기가 막히도록 정확한 통찰, 뜻밖이면서도 필연적인 아름다움…… 과학자들이 아는 것과 같은 발견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 - P306
이야기 끝에 가서 그는 다시 한 번,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미래로 더 멀리멀리, "1분에 1000년 이상씩 성큼성큼" 여행하다가 시간의 끝에서 어느 해변가의 "아득하고도 무시무시한 황혼에 도착한다. 이 황량하고 웅장하며 인간을 넘어선 장면은 순수한 과학소설적 상상이 이제까지 쓴 가장 훌륭한 구절이 분명하다. 과학소설은 인간이(또는 딱 인간처럼 행동하는 신이나 동물이나 외계인이) 지배하지 않는 세계를 정말로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이야기다. 가끔 한 번씩 눈을 들어 인간의 행동이 아무 의미도 없고 인간의 관심사가 대수롭지도 않은 영역을,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면 루크레티우스가 말했던 "빛의 해안"이 잠시나마 위로를 넘어서는자유를 언뜻 비춰 줄지 모른다. - P315
웰스는 과학소설이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을 갖기 오래전에 과학소설을 썼다. 그는 그것을 "과학 로맨스"라고 불렀다가 나중에는 "가능성의 판타지"라고 불렀는데, 지금 정착한 이름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 P321
내 생각에, 『시녀 이야기』, 『오릭스와 크레이크』, 『홍수의 해』는 모두 SF가 하는 일의 한 가지 사례가 된다. 그것은 현재의 경향과 사건들에 상상을 더하여 반은 예언, 반은 풍자인 근미래를 추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애트우드는 자기 책이 SF라고 불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최근에 내놓은 멋진 에세이집 『움직이는 과녁Moving Targets』에서 애트우드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가능하고 어쩌면 이미 일어난 일이므로, "오늘날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 소설"인 SF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독단적이고 제한적인 정의는 애트우드의 소설들이 완고한 독자와 서평가와 문학상 수여자들이 아직까지 기피하는 장르로 격하당하는 사태 - P339
를 막기 위해 고안한 것만 같다. 그녀를 문학 게토로 밀어 넣을 문학 편견쟁이들을 원치 않는 것이리라. - P340
지난 세기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진지한 시인들은 오직 시만 쓰지, 소설은 쓰지 않는다고 배웠다. 그런 순수주의자들에게 괴테는 무의미했다. 그와 동시에, 모더니즘 소설 비평가들은 상상 문학을 쓰면 진지한 소설가로서 자격이 없어진다고 선언했다. 현실주의자들에게 메리 셸리는 무의미했다. 교수와 문학상 수여자들은 순수주의를 더 좋아했기에, 타고난 재능 탓에 국경을 서성인 이단아 작가들은 계속 가시철조망에 부딪치고 말았다. - P346
우리는 사랑 이야기를 브론테나 오스틴의 손에서나 드물게 예술이 되는, 로맨스 서가에 가득한 흔하고 단세포적인 장르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사실은 사랑에 대나 이야기인가? 나도 어느 글쓰기 워크숍에서 과제로 "사랑 이야기"를 줘 보기 전까지는 그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그 워크숍에서는 욕정에 대한 단편을 열네 편 받았다. 다음에 다시 시도했을 때는 욕정에 대한 이야기가 열한 편, 증오에 대한 이야기가 두 편, 조카딸을 사랑한 여자를 그린 사랑 이야기가 한 편 나왔다. 우리가 얼마나 온갖 종류의 사랑을 하는지 생각해 보면, 소설에서는 사랑을 성적인 욕망으로만 탐구하거나, 성생활을 권력의 - P385
도구로 이용하는 학대나 착취나 집착 관계로만 다룰 때가 이토록 많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다. 『레도잇』은 사랑 이야기다. 열정적으로 성취했으나 결코 안정감을 얻지는 못한 어느 결혼한 부부의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루고, 젊은 여자 로티가 새아버지와 어머니와 이복 남동생에게 품은 격정적인 분노와 거부의 사랑을 다룬다. 가족의 사랑이란 난파선과 가라앉은 보물이 가득한 해안도 없고 해도도 없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이려니. 참으로 멋진 이야기다! 어떤 마돈나 사진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는 우리들 대부분이 실제로 사는 삶에 바싹 다가온다. 낭만적이지도 않고 끝도 없는 적응과 실망과 재적응, 눈먼 잔인성과 눈먼 다정함, 매듭과 복잡한 얽힘과 엉킨 그물들, 격분과 의리와 반항, 서로 함께 살아가려 노력하고 서로를 사랑하려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열정들. - P386
일상에 대해 쓴다는 건 힘든 일이다. 비범한 것, 전율스러운 것, 초월적인 것은 자동으로 매력을 발하지만 심지어 특별히 불행하지조차 않을 만큼 흔한 삶을 묘사하려면 용감한 저자여야 한다. 게다가 행복이라니, 성적인 만족도 아니고 야심에 대한 보상도, 황홀경도, 지복도 아니고 그저 일상의 행복이라니 이건 사실상 소설에서 사라진 무언가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감상주의로 보거나,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쓰기 쉽지가 않다. 진실성 있게 울리려면 가장 초라한 종류의 성취와 만족에 대한 묘사조차도 인간의 부족함과 잔인함, 언제나 질병과 몰락과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쓰여야만 한다. - P400
한 마디만 잘못 써도 모든 게 믿기지 않아진다.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에는 잘못 쓴 한 마디가 없다. 구어체의 편안함과 투명함을 갖춘 산문체와 단순해 보이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말이나 뻔한 말 하나가 없다. 보통 어떤 소설을 어떤 상황에서 썼느냐는 독자인 나에게 별로 흥미를 일으키지 않지만, 이 경우에는 저자가 죽어 가면서 쓴 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동받고 경외감마저 느낀다. 이 책은 삶의 먼 가장자리에서,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책임감을 품고 써낸 보고서다. 하루프는 증언하고 있다. 우리보다 멀리 가서, 그곳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어 한다. 하루프가 자신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내가 그 사실을 알면서 책을 읽었기에, 나는 오직 해야만 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과 함께한다는 귀한 특권을 고맙게 여겼다. - P401
어쩌면 행복이란 자유와 함께하기에, 불행보다도 예측하기 힘든 것인지 모른다. 또한 자유와 마찬가지로, 결코 확고하지가 않다. 영원할 수가 - P403
없다. 그러나 행복은 현실이 될 수 있고, 이 아름다운 소설에서 우리는 그 행복을 공유할 수 있다. - P404
요즘에는 많은 미국인이 지구 온난화를, 진화를, 과학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어쩌다가 그렇게 어리석고 위험하게 사실을 부정하게 된 걸까? 그 이유를 무식에, 멍청함에, 공화당에, 남부 레드넥에 두는 건 정말이지 오만하고 비겁하게 질문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킹솔버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자기가 쓰는 사람들을 알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도 신용이라곤 없으며, 세상과 그 속의 자기 자리를 이해하려고 할 때 거의 도움받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만 잔뜩 받는, 그 생생하고 취약하며 무시당하는 사면초가의 시골뜨기들을. - P411
어떤 작가들은 소설 속에 미래상과 특수 용어를 가득 채워놓고서 맹렬히, 심지어는 식식대며 이건 SF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아니, 아니, 난 그런 형편없는 물건은 쓰지 않아요, 건드리지도 않아요. ‘문학‘을 쓰지요. 이런 작가들은 그 경멸스러운 장르의 비유와 전통은 신기하게 잘 알면서도 SF 장치들을 참으로 서툴게 쓰고, 용어의 의미를 참으로 무분별하게 무시하며, 바퀴를 다시 발명하면서 어찌나 스스로에게 탄복하는지, 그들의 시도야말로 방법을 배우지 않고도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증명하려 하는 망한 노력처럼 보인다. - P432
기묘하게 아름답고, 생생한 세부 사항 모두가 이질적이지만, 그런데도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는 친숙하기만 한 풍경. 모든 소설이 그렇듯, - P435
SF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 P436
어떤 이들은 과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다 몰아냈다고 장담하고, 또 어떤 이들은 과학이 세상에서 마법을 쫓아냈다고 울면서 "다시 마법에 걸리기를" 빈다. 하지만 찰스 다윈이 어떤 몽상가 못지않게 발견과 경이와 심원한 신비로 가득한 놀라운 세상에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 세상에서 마법을 빼앗은 사람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세상이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본 사람들, 신이 움직이는 기계로만 본 사람들이다. 과학과 환상문학은 지적으로 모순되지만, 둘 다 세상을 설명한다. 양쪽 모두 상상력이 활발하게 기능하여 의미를 찾고, 딱정벌레를 설명할 때나 여마법사를 설명할때나 세부 사항과 사고의 일관성에 엄격한 주의를 기울여 지적인 동의를 얻어 낸다. 규정하고 금지하는 종교는 과학과 환상 양쪽 모두와 불화하며, 종교는 믿음을 요구하기에 양쪽의 공통 기반인 상상력을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자라면 다윈과 루슈디 둘 모두를 드러난 진실을 반대하는 "불복종하고 불경한 인습 파괴자"로 비난해야 한다. - P465
사라마구의 진실 말하기는 지성, 치열한 예술적 용기, 그리고 진지한 인간의 애정이라는 희귀한 조합에서 말미암는다. 노벨상 연설에서 사라마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충분히 이들과 동화했는지 잘 알 수 없는 유일한 지점은 그 여자들과 남자들이 그런 가혹한 경험에서 얻은 미덕, 바로 삶에 대한 당연하다는 듯 소박한 태도입니다…… 저는 매일 제 정신에 울리는 끈질긴 호출처럼 그 교훈을 느낍니다. 저는 광활한 알렌테주 평원에서 제게 주어졌던 존엄의 예시와 같은 위대함을 조금 더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잃지 않았어요. 시간이 이를 말해 줄 겁니다. - P479
전통에 맞게 출판사나 비평가의 구멍에 밀어넣을 수 없는 소설들은 "경계선"이라느니 "페미니스트"라느니 "지역적"이라느니 하는 폄하의 라벨을 얻고, 그러면 교수들이 그 작품들을 무시하고 소위 전문가들이 모욕할 수 있게 된다. - P486
신체나 정신 모두에 큰 고통을 많이 겪은 모리는 독서를 "보상"으로 본다. 실제로 책은 모리의 열정과 적극적인 지성이 더 큰 예술과 사상의 현실을 접하는 유일한 길이다. 사랑하던 모든 사람과의 이별, 부서진 골반의 고통, 대단히 고상하고 무척이나 이상한 세 고모들이 보낸 여자 기숙학교의 숨 막히는 쩨쩨함, 그리고 정신 나간 마녀인 어머니의 불가사의한 공격을 다 헤쳐 나가기 위해 모리에겐 책만 있으면 된다. 거의 그렇다. 하지만 독서마저도 결국에는 모리를 저버리고, 인생에 친교를, 사람의 온기를 구하려던 모리는 효과 있는 마법에 의존한다. 『타인들 속에서』는 재미있고 사려 깊으며 예리하고 흠뻑 빠 - P493
져들 만한 이야기지만, 마법에 대한 부분은 그 이상이다. 모리가 새로 사귄 친구들이 자신과의 우정을 선택한 게 아니라 자신이 건 주문에 강제당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모리가 겪는 도덕적인 고통은 힘의 책임을 정직하게 직시하는 사람의 고통이다. 그리고 쉽거나 빨리 해결되는 고통도 아니다. 이 책의 핵심은 위령의 날 전야에 웨일스 산 속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도록 도우라는 요정들의 명령에 모리가 따르는 장면이다. 모리를 불구로 만든 차 사고에서 모리의 쌍둥이 자매가 죽었는데, 자매의 영혼은 지금 어둠의 문 앞에서 붙들고 매달려 모리가 그녀를 보내지 못하게 한다. 말을 아낀다는 점에서도 극적인 면에서도 잊기 힘든 이 대목에서는 모든 상실과 어려움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만큼 몰려들고, 마치 옛 발라드에서처럼 조용하고 사실적인 서술이 불가해한 경험을 심화시키며, 기이한 일을 현실로 만든다. - P494
SF 소설에서 자기들은 SF를 싫어한다고 되풀이하여 선언하는 등장인물들을 보게 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단지 지넷 윈터슨은 대놓고 장르를 쓰면서도 "문학 작가로서의 신용도를 지키려 하는 걸까 추측할 뿐이다. 분명 이젠 윈터슨도 모두가 SF를 쓴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텐데? 과거 골수까지 리얼리즘에 파묻혔던 작가들도 이제는 SF의 비유와 장치와 플롯이 가득한 소설들을 내놓다 보니, 차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문학의 정전‘을 지키며 으르렁대는 머리 셋 달린 개들뿐이다. 확실히 나는 차이를 모르겠다. 뭐 하러 신경을 쓸까? 하지만 나는 상상의 공동 기금을 이용하면서, 정작 그 기금을 만들었고 이용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이용하 - P495
도록 열어 놓은 동료 작가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척하는 저자들의 기묘한 배은망덕이 신경 쓰인다. 약간만 보답하는 너그러움을 보여 준대도 나쁠 게 없으련만.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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