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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와 왕국 ㅣ 알베르 카뮈 소설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평점 :
실존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는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을 읽어보면 하나 같이 드는 생각이 있다. 천재 작가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내용이 어려워 이해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기도 하지만 여러 번 읽고 깊이 생각하면 할 수록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치, 철학, 사상, 이념 등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경계를 짓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의 이치와 논리를 하나인 것처럼 단정하고 고정된 이미지로 만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카뮈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부정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에게서 작가의 의지와 생명력을 엿 볼수 있으며 얼마나 고심하고 철저하게 글을 썼는지 짐작이 간다.
느낌가는대로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들은 뛰어난 것이며 독자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시간의 흐름마저 거스를 수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게 아닐까.
<이방인>, < 시지프 신화>, < 결혼 여름>, < 전락> 등의 작품들을 읽어봤지만 <적지와 왕국>이라는 제목은 내게도 생소했다. 책세상 출판사에서 알베르 카뮈 전집 중 네 번째이고 화려한 컬러감과 멋스러운 프랑스어 제목의 표지가 시선을 끈다. 이 책의 구성은 여섯 편의 단편집으로 되있다.
<간부> , <배교자> , <말없는 사람들>, <손님> , <요나> , < 자라나는 돌>이 그것이다. '적지謫地' 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고 각 단편마다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알고보니 <전락>은 원래 <적지와 왕국>의 일부분을 이루는 작품이였지만 집필 과정에서 예상보다 훨씬 길어져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씌였지만 먼저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단다.
'수력학적 추락'의 운명을 담았던 <전락>과 <자라나는 돌>에서 드러난 물의 이미지가 겹치는 것 같기도 하다. 등장인물 중 요리사의 '돌 나르기'라는 행위는 신의 저주로 영원히 산 밑에서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삶을 살아야하는 시지프의 운명을 부조리한 인간의 삶에 빗대어 나타낸 것도 같다. 주인공 다라스트는 제방을 쌓고 길을 닦는 기사라는 직업으로 물을 다스리기 위해 브라질에 온 사람으로 그려지는데 카뮈 자신이 1949년 강연 차 브라질 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경험을 살려 작품에 녹아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그의 작품의 배경은 알제리였기에 이 작품의 배경이 더 특별해 보인다. 또한 계층 관계에 따른 인물 간의 대립 구조, 주인공 다라스트의 예상을 뛰어넘는 행동들이 마치 카뮈 자신이 정치적 힘의 상하관계를 부수고 자기가 지키고자 했던 사상을 표현해낸게 아닐까.
신과의 약속, 모든 사람들의 바램, 당위성을 모두 부정하 듯 시지프의 돌을 대신 짊어진 것 마냥 다라스트는 교회가 아닌 불구덩이 속으로 돌을 집어 던지는 행위를 함으로써 알 수 없는 환희를 느낀다.
"그도 익히 알고 있는 그 가난과 재 냄새를 절망한 듯 몇 번 깊이 들이마시면서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뭐라 이름지을 수 없는 어떤 불가해하고도 숨 가쁜 환희의 물결이 솟구쳐오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p238
<자라나는 돌> 외에 나머지 작품들의 배경은 주로 겨울이다.
한 겨울 추위에 사람들의 마음은 더 굳게 닫혀 있는 것 같고 아주 차가운 기운이 감돌아 작품의 분위기와도 아주 잘 어울리며 요즘 날씨와도 비슷해서 더 몰입이 된다.
<요나 혹은 작업 중인 예술가> 작품은 주인공 '요나'의 삶을 그리고 있다. 화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카뮈 자신이 과거에 처했던 상황을 그린 자전적 단편이다. 요나는 비교적 행운이 따르는 순탄한 삶을 살아왔고 화가로서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타인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자신의 시간을 갖기 어려웠고 더 이상 자신이 그렇게 바라고 그려왔던 삶의 단 하나의 믿음이였던 '별'을 잃어버리게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더렵혀지고 변색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끊이없이 물어야 할 것 이다.
" 전체가 하얗게 비어 있는 화폭 한가운데 요나는 아주 작은 글씨로 단어 하나를 써놓았는데, 알아볼 수는 있었지만 과연 그것을 '솔리테르solitaire(고독)'라고 읽어야 할 지 '솔리데르solidaire(연대)'라고 읽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
p181
단편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손님>이다.
책의 제목과도 잘 어울리고 인물과 배경의 묘사 또한 카뮈의 의도를 잘 나타낸 것 같다.
사막 고원지대를 배경으로 한 백인 교사' 다뤼'가 아주 외진 학교에서 헌병 '발뒤시'가 사람을 죽인 아랍인을 호송해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발뒤시 대신 이 아랍인을 정해진 장소까지 호송해 주라는 명령 같은 부탁을 받게 되고 아랍인과의 하룻밤을 지내며 그는 고민에 빠진다. 결국 그는 아랍인에게 감옥에 갈지 도망을 갈지 선택권을 넘겨 주고 돌아오는데...
교사가 떠날 수 없는 감옥과 같은 터전이 곧 평생 이곳에서 살아 온 그는 자신의 왕국일테지만 자신이 떠나면 적지가 될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살인자를 어떻게 대해야되는지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그의 분노에 치민 얼굴에 잘 드러나 있으며 인간이 인간의 죄를 물을 수 있고 판단하는게 가능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애매한 입장을 표하게 된다.
알제리 전쟁으로 인해 카뮈가 겪어야했던 이방인 신세와 중립적 입장 표명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고뇌하는 인간의 삶을 잘 표현해 놓았다.
<말없는 사람들>에서는 노동, 가난, 계층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배교자 혹은 혼미해진 정신>은 종교적 믿음에 대한 배신을, <간부>에서는 생소한 사막에 던져진 고독한 주인공 '자닌'이 적지라고 여겼던 곳이 사실은 왕국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담고 있다.
카뮈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적지와 왕국의 대립적인 관계를 다양한 상황과 인물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고 그 경계의 안과 밖을 결정 짓는 일은 허무할 뿐이며 모순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지와 성찰이 갖는 의미, 삶의 의미와 방식에 대한 끊임 없는 고찰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가 던지는 질문들은 하나 같이 심오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삶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있기에 인간이 주체적으로 어떻게 잘 살아갈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고 정해진 답을 알려주기 보단 독자가 스스로 찾아 갈 수 있도록 여운을 남겨주기에 더 매력적이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읽고 쓴 개인적인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