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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브레인 - 우리 안의 극단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레오르 즈미그로드 지음, 김아림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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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1:00. 나는 별 모양 카페 대신 커피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들고, 에어팟으로 ‘뉴스공장’을 들으면서 핸드폰을 스크롤한다. 문득 일회용 컵이 손끝에 닿는 순간, 가벼운 죄책감이 밀려온다. “다음 번에는 꼭 텀블러를 챙기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달력을 훑던 시선이 5월 8일에 멈춘다. 어버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족들과 시간을 맞춰 부모님 댁에서 모이기로 약속을 잡는다.


나는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다고 믿고 행동하지만, 과연 그럴까? 오전에 커피에서 시작한 일련의 행동들이 내가 진정 자유롭게 내린 결정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일까?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는 왠지 내 일상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인 개념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와 선택, 심지어 일상의 사소한 행동들까지도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있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란 무엇일까?


‘이데올로기(ideology)’는 본래 ‘관념의 과학’ 또는 ‘관념학’을 뜻했지만, 오늘날에는 개인이나 집단의 신념 체계, 세계관, 행동의 기준을 규정하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이해된다.


내가 지금까지 접한 이데올로기는 주로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같은 철학자들을 통해 이해해 온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조작된 ‘허위의식’으로 규정했다. 알튀세르는 이를 ‘호명태제’라는 개념으로 확장하여,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했다.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이론 속에서 권력, 계급, 지배 구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즈미그로드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정치적·사회적 차원을 넘어, 신경과학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그의 핵심 주장은 이데올로기가 단순한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 우리의 뇌와 신경계, 행동 패턴에 깊숙이 각인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사고가 뇌의 구조 및 신경 작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연구를 통해 제시한다.


특히 그의 연구에서 주목할 점은,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전두엽 피질에서 도파민 수치가 낮고, 선조체에서는 높은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선조체는 습관화된 행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뇌 영역으로, 보수적이거나 극단적인 정치 성향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 몸은 우리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믿는 바가 우리의 생물학적 몸에 반영된다.”


안타까운 점은, 경직된 사고방식이 배제를 경험하거나 불안, 환경적 결핍에 놓일 때 더욱 강화된다는 것이다. 환경, 가정, 교육, 유전 등은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조건들이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수용 방식에 영향을 주며, 실제로 뇌와 몸에도 흔적을 남긴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선택한 뉴스 채널, 환경에 대한 죄책감, 가족에 대한 의무감. 이 모든 일상적 선택과 감정들이 특정 이데올로기의 발현일 수 있다는 즈미그로드의 말은 나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다.


만약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사회적 구조와 뇌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면, 자유의지와 주체로서의 개인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이데올로기적 프레임과 생물학적 제약을 벗어나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믿음, 신념, 선택, 심지어 정체성마저도 사실은 외부의 영향과 내부의 생물학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낯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정말 이것이 ‘내’ 생각인가? 나는 무엇을 믿고 있으며, 왜 그렇게 믿게 되었는가?


이데올로기를 인식한다는 것은 곧 익숙함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심이야말로, 주체로서의 개인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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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 아노크라시, 민주주의 국가의 위기
바버라 F. 월터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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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지도 있는 정치인이 소셜미디어에서 혐오의 언어를 휘두르며, 그것을 정치적 지지로 전환해내는 그 모습을.
지난겨울, 국군 통수권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그와 그를 지지하던 소수 사람들의 법원 폭동 모습을.


그러나 다행히, 봄은 왔다. 벚꽃이 피고 지는 이 계절 속에서, 우리를 독재의 어둠 속으로 끌고 가려 했던 그 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 불안 요소가 완전히 걷히진 않았지만, 우리는 한걸음 물러나 지난 시간이 남긴 어둠을 응시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대다수의 내전을 겪은 나라의 시민들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내전에 직면했다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징후는 무엇인가.
이 책은 다양한 국가의 사례와 통계 자료를 바탕으로 내전의 메커니즘을 설명해준다.


월터는 말한다. 내전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는 우발적 사태가 아니라, 여러 요인이 촘촘히 맞물려 도달하는 필연적 결과라고. 민주주의의 약화, 사회의 불안정, 극단주의의 확산, 그리고 무엇보다 파벌화가 주요한 요인이다.


놀랍게도, 민주주의의 쇠퇴는 인터넷, 스마트폰, 그리고 소셜미디어의 확산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과거엔 음지에 존재했던 사기꾼, 음모론자, 선동가, 반민주주의자들이 이제는 SNS라는 확성기를 손에 쥐고, 점차 하나의 목소리를 넘어 거대한 세력으로 확장되고 있다.
SNS는 그들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고요보다 공포를, 진실보다 거짓을, 공감보다 분노를 택하는가.


그 해답은 우리의 뇌에 새겨진 오래된 기억과 습성에 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공포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했고, 복잡한 진실보다 단순한 거짓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분노는 도파민을 분비시켜 쾌감을 주며, 동일한 분노를 느끼는 이들과의 유대를 만들어낸다.
공감은 인내와 사유를 요구하지만, 분노는 즉각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소셜미디어는 이 취약한 본능을 이용해 좋아요 장사를 하고, 정치인들은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들의 권력욕 앞에서 공동체와 공공선의 붕괴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경고한다.
내전은 먼 나라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언제든 시작될 수 있는 현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 ‘아노크라시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다.
한국은 정치 불안정 연구단의 2024년 정치체 점수에서 10점 만점 중 8점을 받았지만,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에서 펴내는 보고서에는 민주주의에서 독재로 변모하는 국가로 분류되었다. 지난 계엄 사태 이후로는 아노크라시 상태임이 자명하다.


어떻게 단 한 사람의 권력이, 불과 몇 해 만에 우리의 민주주의를 이토록 흔들어놓을 수 있었던 걸까.


속상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나는 집회때 여의도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빛을 기억한다.
여의도를 무정차로 지나치던 지하철. 우리는 2정거장 전에 내려,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울컥하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걸었다.


그때의 발걸음처럼, 이제는 우리의 어둠을 차분하고 냉철하게 들여다볼 시간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그것은 오직 우리의 관심과 견제를 통해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시민들은 할 일을 해왔다. 그러니 이제는 언론과 사법부가 그 책임을 다해야 할 차례다. 그것만이 위태로운 민주주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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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읽기 - 영국에서 정원 디자이너로 살아가기
김지윤 지음 / 온다프레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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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영화 ‘프렌치 수프’에서 내가 매료된 것은 요리의 향연이 아닌, 19세기 프랑스의 서정적인 풍경이었다. 느리게 펼쳐지는 화면 속에 가득 차오르던 따스한 햇살, 새들의 지저귐, 마당을 수놓은 들풀과 들꽃들. 그것은 자연이 빚어낸 완벽한 무질서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의 은근한 로맨스만큼이나 그 풍경은 깊고 잔잔한 잔상으로 남았고, 요리 장면보다도 더 오래 내 기억 속에 머물렀다.


꽃과 풀, 나무를 좋아해 전원주택으로 이사한 지 벌써 4년이 흘렀다. 처음 계획은 마트와 농협이 있는 읍내 분위기의 마을에서 시작하려 했으나, 지인의 소개로 이 집을 본 순간 나와 남편은 한눈에 반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마당에 펼쳐진 자연스러운 조경에 마음을 빼앗겼고, 남편은 넉넉한 주차공간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정원의 그라스와 야생화 때문에 집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지만, 전원주택에서 건물 못지않게 중요한 건 바깥과 어우러지는 정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4년을 살아보니, 녹색 풍경이 주는 위안과 채움은 생각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정원읽기』를 읽고 싶었다. 나는 정원을 바라보는 전문 디자이너의 시선과 경험이 궁금했다. 그것도 꽃과 정원으로 유명한 영국에서 실무를 쌓은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라니, 더욱 그랬다.


“우리에게는 어느 형태로든 자연과 연결되고 싶은 본능이 숨어 있다. 도시마다 그 갈증을 채워주는 보석 같은 공간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본다.”


영국의 농원을 방문할 때 느꼈던 설렘, 아름다운 정원을 완성하기 위해 오븐과 창호 견적을 조정하면서까지 정원에 진심인 클라이언트, 주말이면 공원 풀밭에 삼삼오오 모여 자연을 즐기는 도시 사람들. 저자는 이를 통해 정원 문화가 단순한 취미나 조경 기술을 넘어, 자연과 인간, 공간과 감각이 서로 교감해온 깊은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묘사하는 영국의 정원은 단지 아름다운 경관이 아니라, 자연을 받아들이고 일상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다.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손이 근질거려 근처 화원으로 향했다. 연보라색 프록스와 노란 들꽃 몇 포기를 사서 오랜만에 작은 정원 한켠을 채웠다. 흙을 파헤치자 개미들이 기어나오고, 젖은 흙냄새가 코끝에 번졌다.


어쩌면 정원이란, 내 삶의 속도를 잠시 멈추고 자연과 눈을 맞추는 조용한 순간들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철학자 한병철은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정신 없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잡초를 뽑고, 가지를 다듬고, 정성을 들이는 일은 곧 타자와의 만남이다.


그 자연이라는 타자 앞에서 나는 비로소 삶의 또 다른 속도와 기다림의 미학을 배운다. 저마다의 시간이 교차하고 포개지며, 계절마다 정원은 조용한 아름다움으로 채워진다.


꽃이나 식물은 어찌보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에 누릴 수 있는 여분의 것이다. 그들이 여유로움 속에 자연을 삶 속으로 들이고 누리는 문화가 책을 읽는 내내 부러웠다. 속도의 문화가 익숙한 우리에게도 그런 여분의 것을 누릴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 봄, 향기가 가득 퍼지는 히아신스 화분 하나 창가 곁에 두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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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국 대신 만둣국 - 소중한 맛에 대한 산문집
이범준 지음 / 책책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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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감각적 경험에 의해 소환되곤 한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효과’에서 보듯, 음식은 그 모양과 맛, 향을 통해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그 자극은 시간을 뚫고 잊혀진 과거를 현재로 불러낸다.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왜 토란국 대신 만둣국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추석이면 친정 엄마가 정성껏 끓여주시던 토란국, 그리고 결혼 후 시어머니가 직접 빚어 내신 만둣국. 그 두 음식의 교체는, 작가가 겪어온 삶의 변화와 관계의 전환을 상징하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마다, 그 관계만큼 새로운 음식도 삶 속으로 들어온다.


나에게 있어서도 토란국과 만둣국은 모두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래서 책의 앞부분을 읽다가 문득 울컥했다. 그 두 음식 모두 친정 엄마가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따뜻한 국물과 입 안에서 느껴지던 포근한 질감이 떠오르며,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몇 년 전부터 엄마와 거리를 두고 지내온 탓에, 그 음식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했다. 따뜻함과 그리움, 그리고 슬픔이 함께 밀려왔다. 매듭지어진 관계를 토란국과 만둣국이 잠시 흐트려 놓은 것이다.


이렇게 음식은 단순한 영양 공급원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관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다. 책은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어머니들의 음식’에서는 할머니, 어머니, 시어머니가 정성으로 차려낸 밥상과 그 안에 담긴 사랑을, ‘나의 음식’에서는 저자 자신의 삶에 깊은 인상을 남긴 음식들을, ‘사랑하는 이들의 음식’에서는 가족과 친구들과 나눈 식사의 의미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저자는 소박하지만 특별한 음식들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음식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만의 ‘음식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생각해보면 음식은 기쁜 날에도, 목이 메이던 슬픈 순간에도, 가슴 뛰던 추억 속에도 늘 곁에 있었고, 그렇게 내 삶의 모든 여정을 함께 해왔다. 혼자 먹는 밥은 유독 더 싱겁게 느껴진다. 오늘 가족들과 함께 두부와 김치를 송송 썰어 김치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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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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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마치 팔다리가 잘린 것 같은 환지통일까?

아직 상실을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헤아리기 어려운 감각이다. 주인공 바움가트너는 아내를 잃은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노교수다.


바움가트너가 ‘현상학 전공 철학 교수’라는 설정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철학적 바탕이 된다. 상실 이후, 그의 일상은 기억과 감각이 얽히는 순간들로 가득하며, 그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을 겪는다. 타버린 냄비, 오래된 커피잔, 낡은 타자기와 같은 평범한 물건들은 더 이상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아내와 함께한 시간의 흔적이자,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는 통로다. 그는 사물을 통해 기억의 풍경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아내를 다시 만난다.


현상학자 메를로-퐁티에 대한 언급도 의미심장한 장치다.

퐁티는 “우리는 세계를 신체를 통해 경험한다”고 말한 철학자로, ‘육화된 의식’을 강조했다. 바움가트너가 아내의 부재를 환지통처럼 묘사한 장면은 퐁티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퐁티의 철학에서 ‘살(flesh)’ 개념이 중요한데, 주체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고 상호 얽혀 있음을 설명한다.


이렇듯 아내를 잃은 경험을 ‘팔다리가 뜯겨 나간 것’에 비유하는 것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에 걸쳐 그와 얽히고 스며든 존재였다. 그렇기에 잘려나간 팔다리가 여전히 존재하는 듯한 환지통을 느끼는 것이다.


폴 오스터는 이 소설에서 죽음과 상실을 이어주는 세 가지 매개를 제시한다. 기억, 사물, 그리고 이야기. 이 가운데 이야기야말로 상실을 극복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다. 사물은 기억을 불러오고, 그 기억은 이야기를 통해 다시 살아난다. 이야기는 과거를 되살리며, 상실의 공간을 다시 구성한다. 동시에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아내가 남긴 미발표 원고와 바움가트너 자신의 글이 교차하면서 그는 상실을 이야기로 환원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살아간다. 과거에 머물던 시선은 점차 현재로 향하고, 그는 상실을 끌어안은 채 남은 삶을 살아갈 용기를 낸다.


“산다는 건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고통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을 통해 바움가트너는 삶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한다. 상실은 여전히 그의 삶에 현존하지만, 그는 더 이상 그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 관계 속에서, 사라진 이의 자리를 안고 오늘을 살아간다. 자신의 모험담의 마지막 장을 향할 때까지.


죽음 이후에도 삶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바움가트너』는 이 질문을 조용히 던진다. 상실은 단절이 아니다. 또 다른 형태의 연결이다. 기억과 이야기,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삶은 계속된다.


처음엔 책장을 잠깐 넘겨보다 곧 카페로 나가려 했던 내 발길을, 이 소설이 끝내 붙잡았다. 어느새 나는 마지막 장을 넘기며 단숨에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처음 읽어보는 폴 오스터의 소설. 그저 매력적이고 강렬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움가트너, 폴오스터, 열린책들, 소설추천, 도서협찬, 메를르퐁티, 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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