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른 삶에서 배울 수 있다면
홍신자 외 지음 / 판미동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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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책을 읽는 일은 타인의 언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 미처 닿지 못한 사유의 영역을 탐색하고,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눈을 얻는다. 『우리가 다른 삶에서 배울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책 읽기는 결국 다른 삶을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이해해가는 여정이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직업도 나이도 다른 세 사람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아방가르드 무용가 홍신자, 독일 한국학자 베르너 사세, 소설가 김혜나. 얼핏 이질적으로 보이는 조합이었지만, 그들의 대화는 서로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메워갔다.


책을 읽는 내내 향기로운 라벤더 티 한잔을 마시는 듯한 편안함이 마음을 적셨다.


홍신자 선생님은 비움의 미학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법을 들려주었다. "뭔가를 많이 채워 놓는다고 해서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에요. 우리는 단 하나의 오브제를 가지고도 엄청나게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엄청나게 커다란 세계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하거든요."


특히 삶의 역경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넘어야 할 산은 그때그때 산 위에서 부딪치고 해결해 나가야죠. 인생에는 완전한 실패도, 완전한 성공도 없어요. 실패했다고 할들, 그것을 통해 배우고 깨닫게 될 뿐이에요."


가끔은 미소 지어지고, 때로는 눈물 한방울 슬쩍 훔치며 책장을 넘겼다.


김혜나 작가가 고백한 '부서지고 싶으면서도 부서지기 두려운' 모순적 감정은 내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진실하지 못한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라는 존재가 부서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안정을 추구하는 그 불안한 마음의 풍경이 너무도 익숙했다.


책 앞부분의 편지에서 "그러니 달리는 버스 안에서까지 달리지는 말아요, 우리. 가끔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을 자연스레 움직여 보는 게 좋은 거 같아요." 라는 문장을 보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A라는 인물이 보낸 편지로,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맞닿아 있었다.


몇 년 전 힘들었던 시기, 제주도를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 또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달리는 법만 배운 사람이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을 맡겨보라는 이 조언은 나에게도 필요한 말이었다.


여든이 넘는 나이지만,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와 사유들은 비단 나이를 통해서 얻어진 지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저절로 인간의 내면을 채워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살아가다 보면, 결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타인과 관습에 따라 살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만들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멈춰 서서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알고, 쉬운 길 대신 의미 있는 길을 택하는 용기를 가졌다.


홍신자 선생님과 사세 교수 부부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지혜는 삶의 매 순간을 깊이 있게 경험하고 성찰했기에 얻어진 것이었다. 우리는 각자 고유한 무늬를 지닌 채 살아간다. 그러나 다른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국 타인의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이 책을 덮으며 멈춰 서서 다시 한번 내 삶의 방향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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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만든 세계 - 500년간 지속된 서구의 군사혁명과 전쟁으로 가는 어두운 길
윌리엄슨 머리 지음, 고현석 옮김 / 미래의창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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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임박했을 때,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소식을 들었을 때도 '에이 설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냉전시대에 태어나 자랐음에도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온 탓에, 나는 전쟁의 가능성에 대해 안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만든 세계』에는 지난 500년 동안 서구에서 일어난 전쟁들의 역사를 자료와 수치를 기반으로 꼼꼼하게 기록하고, 각 시대별 전쟁의 양상과 특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이 현대 사회와 문명 발전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전쟁에 관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지식들이 책을 읽으며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연결되는 시간이었다.


저자는 방대한 역사적 증거를 토대로 전쟁이 단순한 파괴 행위를 넘어 인류의 정치, 경제, 기술, 사회 구조를 어떻게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는지 보여주고, 인간과 인간사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전쟁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저자는 전쟁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대부분을 형성했으며 지금도 끊임없는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말한다. 전쟁의 근본적인 본질은 수세기 동안 변하지 않았지만,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 적응은 서구의 전쟁 방식과 사회구조를 지속적으로 바꿔놓았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시대의 대규모 징집 제도는 근대 국민국가 개념을 강화했고, 군사적 필요로 발달한 통신 체계는 현대 우편 시스템의 기반이 되었다. 남북전쟁 중 개발된 철도 물류는 글로벌 공급망의 원형이 되었고, 세계대전에서 발전한 항공, 레이더, 컴퓨터 기술은 민간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냉전 시대의 군사 경쟁은 우주 개발과 GPS 같은 현대 기술 발전을 촉진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사적 사건들의 실체와 규모였다. 책의 앞부분 30년전쟁, 7년전쟁 등을 읽을 때만해도 너무 먼 이야기여서 그저 하나의 흥미로운 스토리처럼 읽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7천~8천5백만명 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냉혹한 통계에 이르러서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전쟁에서는 사람이 숫자로 대체된다.


『전쟁이 만든 세계』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상기시킨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보다 더 놀랄 일이 아니었듯이, 인간의 본성은 지난 500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저자가 경고하듯 '전쟁으로 가는 어두운 길은 여전히 열려 있으며, 과거의 교훈은 곧 잊혀지고 만다.' 21세기에도 전쟁의 가능성은 여전히 높으며, 그 형태만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전쟁이 일어났을까? 저자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여러 층위의 답을 제시한다. 가장 먼저, 인간의 본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권력과 영토에 대한 욕망, 자원의 한정성, 그리고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집단적 정체성이 충돌의 씨앗이 되어왔다. 기술적 혁신과 군사적 우위에 대한 경쟁 역시 계속해서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촉발시켰다.


전쟁은 우리의 세계를 만들었고 미래를 결정짓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 책은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세계에서 현대 문명과 국제 분쟁들을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복잡한 국제 정세를 더 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평화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그리고 전쟁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현실을 더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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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의 심리학 - 예술 작품을 볼 때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오성주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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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나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는 가요, 재즈, 팝송 그리고 클래식까지 다양하다. 사실 클래식 음악에 매료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예전에는 최신 유행곡이 아닌 클래식을 올드하고 진부한 음악이라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공유해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그 분께 감사하다.) 그것도 여러 번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없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 바로 그것이었다.


음악은 듣다 보면 별다른 사전지식이 없어도 영혼의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림은 좀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 같다. 미술관에 서서 추상화나 현대 미술 작품을 바라볼 때면 무엇을 느껴야 할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함이 밀려오곤 했다.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옆에 적힌 설명을 읽어도 여전히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워서 아쉬울 때가 많았다. 마치 모두가 알아듣는 언어를 나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림이 주는 시각적 매력이 있기에, 가끔은 미술관을 찾고 책장에 미술 해석을 도와주는 책들이 몇 권 꽂혀 있다. 『감상의 심리학』에 눈길이 간 것도 미술에 대한 관심과 이해하고픈 열망 때문이었다. 이 책은 작품해설이나 작가의 스토리가 아닌 '감상자'인 나에게 초점을 맞춘 접근법으로 시작한다. 그림을 볼 때 내 심리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해 주니 고개를 끄덕이며 몰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도판들이 많이 실려 있어서 읽고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전략에 관한 내용이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그림을 10초 이내로 보고 계속 볼지 말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답을 찾듯 감상하려 했기에 오히려 부담감으로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저자는 빠르게 전체를 둘러본 후,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들만 다시 찾아가 집중적으로 보라고 조언한다. 이런 실용적인 팁들이 미술관 피로도를 줄이면서도 감상의 질을 높이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여행을 가는 이유는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쉼을 얻고자 함이다. 마찬가지로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미술관을 찾는 것은 일종의 여행이다. 다양한 작품들 속에서 작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일상의 부침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한 점은 때로 우리를 다른 시공간으로 데려간다. 또한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여 신선한 자극을 주거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황홀감을 느끼게 한다.


클래식이나 미술감상은 예전에는 귀족들과 특권층만 누리던 문화였지만, 지금은 더 대중화되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여건을 떠나서, 아름다움을 마주하고 누릴 권리는 모두의 것이다. 작품에 감흥하고 해석하는 일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미술관에서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할지 막막했던 이들에게 『감상의 심리학』은 미술과 친해질 수 있는 새로운 관점과 도구를 제공하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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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의 과학자 - 망망대해의 바람과 물결 위에서 전하는 해양과학자의 일과 삶
남성현 지음 / 흐름출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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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도시에서 성장하고 살아온 나에게 바다는 늘 쉼과 위로 또는 낭만의 장소였다. 빽빽하고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탁 트인 바다를 마주하는 순간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늘 궁금한 미지의 공간이기도 했다. '바다 위의 과학자'라는 제목은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제목만으로도 설렘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바다를 향한 저자의 애정과 경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인류는 아직 바닷물 한 방울만큼도 바다를 완벽히 알지 못한다"는 그의 고백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지식의 한계를 직면하게 했다. 내가 해변에서 느꼈던 작은 감동들이 사실은 바다의 일부분만을 경험한 것이라는 깨달음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저자가 설명하는 '진짜 바다'는 수평선 너머, 우리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펼쳐져 있었다.


세상에, 수도 없이 발을 담그고 감탄했던 바다가 바닷가였다니. 그렇게 따지고 보면 제대로 된 바다는 경험해보지 못한 셈이다.


바닷가가 아닌 망망대해에서 경험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은 책 전체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육지의 끄트머리도 찾아볼 수 없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밤... 검은 바다 위에서 보는 별빛이 찬란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는 사실은 오직 먼바다에 나가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일 것이다."


남성현 교수는 단순한 연구자가 아닌, 바다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 비밀을 탐구해온 탐험가이기도 했다. 75회에 걸친 승선 조사를 통해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남극까지 누빈 그의 여정은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우윳빛 바다의 발견, 태풍과의 조우, 심해의 신비로운 현상들에 대한 묘사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열어주어, 나도 모르게 바다의 깊은 세계로 빠져들며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이 경이로운 바다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평등의 공간이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편하고 안전한 공간인 셈이다." 그렇다. 도시의 아케이드 공간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조건과 환경 속에서 우리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그러나 바다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공간이기에,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진정한 위안과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는 위로가 되고 낭만이 되는 그 미지의 푸른 바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푸른 행성일 수 있는 이유는 바다가 지구 표면의 7할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신비하고 광활한 이 공간은 인류가 달에 발자국을 남겼음에도 아직 그 깊은 곳까지 완전히 탐험하지 못한 마지막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바다 위의 과학자』는 이 경이로운 바다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하며, 신비와 감동을 전하는 동시에 해양 현상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전달해 준다. 과학과는 거리가 먼 나는 과학적 사실과 데이터보다도 그 적막하고 고요한 바다 위에서 별빛과 달빛을 받으며 갑판에 누워있었을 저자가 떠올라 미소 지어진다. 

책을 읽고 나니 바다…아니 바닷가에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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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 초록 지붕 집의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곽춘 옮김 / 메이킹북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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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오후 5시 무렵이면 시작하던 '빨간머리 앤'을 보려고 집으로 달려가던 어린 시절.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독특한 성격과 밝은 에너지로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앤에게 반해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TV 앞에 앉아 앤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했던 그 시절의 추억이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며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설 속 앤을 따라가며 그녀의 넘치는 상상력과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니, 어른이 되면서 잊고 살았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일상의 작은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감탄하던 일, 온종일 같이 붙어 있던 친구, 실패해도 '내일은 새로운 날'이라며 다시 일어서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풍경 속에서도 경이로움을 발견할 줄 아는 시선. 언제부터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 걸까? 앤의 이야기는 마모되고 잊혀졌던 나의 일부를 일깨워주는 듯했다.


“알아야 할 것이 무척 많다고 생각하면 즐겁지 않나요? 그런 것 때문에 저는 산다는 게 즐겁고, 또 그런 세상이 즐거운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앤을 단순한 어린 낙관주의자로 볼 수도 있지만, 그녀의 매력은 삶의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고아로 자란 앤이지만, 그녀는 결핍보다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삶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 커스버트 남매와 함께한 초록 지붕 집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관습적인 가족이 아닌, 서로를 정말로 사랑하고 보듬어 주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퀸즈를 졸업했을 때만 해도 제 앞에 놓인 미래는 곧게 뻗은 큰길 같았어요. 저는 그 쭉 뻗은 길을 바라보면 수많은 이정표가 제 눈에 보일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 길에 모퉁이가 생겼어요. 그 모퉁이를 돌아가면 무엇이 놓여 있는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이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래요. 모퉁이는 그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어요. 아주머니, 그 모퉁이 다음에는 길이 어떻게 뻗어 있을지 궁금해요."


사랑하는 매튜 아저씨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머릴라 아주머니의 건강 악화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에이번리에 남아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주머니를 돕기로 한 앤. 꿈에 그리던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삶의 모퉁이를 만나지만, 그 모퉁이 너머엔 또 무엇이 있을지 설레이며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앤의 모습에서 진정한 성숙함을 발견한다. '초록 지붕 집의 앤'은 그녀가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시 세상에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앤을 따라 웃다가 울다가 붉은색 예쁜 책장을 덮고 잠시 생각한다.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자연물들—꽃과 나무와 숲과 시냇물—의 아름다움에 매번 경이로운 감탄을 표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우리도 앤처럼 인생의 모퉁이마다 잠시 멈춰 서서 꽃과 나무와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를 가진다면, 일상에서 자주 잊곤 하는 삶에 대한 사랑과 긍정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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