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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 초록 지붕 집의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곽춘 옮김 / 메이킹북스 / 2025년 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오후 5시 무렵이면 시작하던 '빨간머리 앤'을 보려고 집으로 달려가던 어린 시절.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독특한 성격과 밝은 에너지로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앤에게 반해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TV 앞에 앉아 앤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했던 그 시절의 추억이 '빨간 머리 앤'을 읽으며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설 속 앤을 따라가며 그녀의 넘치는 상상력과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니, 어른이 되면서 잊고 살았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일상의 작은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감탄하던 일, 온종일 같이 붙어 있던 친구, 실패해도 '내일은 새로운 날'이라며 다시 일어서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평범한 풍경 속에서도 경이로움을 발견할 줄 아는 시선. 언제부터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 걸까? 앤의 이야기는 마모되고 잊혀졌던 나의 일부를 일깨워주는 듯했다.
“알아야 할 것이 무척 많다고 생각하면 즐겁지 않나요? 그런 것 때문에 저는 산다는 게 즐겁고, 또 그런 세상이 즐거운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앤을 단순한 어린 낙관주의자로 볼 수도 있지만, 그녀의 매력은 삶의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고아로 자란 앤이지만, 그녀는 결핍보다는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삶을 온전히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 커스버트 남매와 함께한 초록 지붕 집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관습적인 가족이 아닌, 서로를 정말로 사랑하고 보듬어 주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퀸즈를 졸업했을 때만 해도 제 앞에 놓인 미래는 곧게 뻗은 큰길 같았어요. 저는 그 쭉 뻗은 길을 바라보면 수많은 이정표가 제 눈에 보일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 길에 모퉁이가 생겼어요. 그 모퉁이를 돌아가면 무엇이 놓여 있는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이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래요. 모퉁이는 그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어요. 아주머니, 그 모퉁이 다음에는 길이 어떻게 뻗어 있을지 궁금해요."
사랑하는 매튜 아저씨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머릴라 아주머니의 건강 악화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에이번리에 남아 아이들을 가르치며 아주머니를 돕기로 한 앤. 꿈에 그리던 미래를 포기해야 하는 삶의 모퉁이를 만나지만, 그 모퉁이 너머엔 또 무엇이 있을지 설레이며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앤의 모습에서 진정한 성숙함을 발견한다. '초록 지붕 집의 앤'은 그녀가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시 세상에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무리된다.
앤을 따라 웃다가 울다가 붉은색 예쁜 책장을 덮고 잠시 생각한다. 그녀가 마주치는 모든 자연물들—꽃과 나무와 숲과 시냇물—의 아름다움에 매번 경이로운 감탄을 표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쩌면 우리도 앤처럼 인생의 모퉁이마다 잠시 멈춰 서서 꽃과 나무와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를 가진다면, 일상에서 자주 잊곤 하는 삶에 대한 사랑과 긍정이 되살아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