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의 효용 - 노동자계급의 삶과 문화에 관한 연구 질문의 책 5
리처드 호가트 지음, 이규탁 옮김 / 오월의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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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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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체제의 기원 - 한국전쟁과 자유주의 평화기획
김학재 지음 / 후마니타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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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이란 특정한 형태의 자유주의 기획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 즉, 냉전이란 특정한 전쟁인 동시에 특정한 평화를 추구했던 기획이다. (122~123쪽)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는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있었으나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인 ‘평화기획’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전반부에 각종 개념과 그 개념을 둘러싼 연구(이론)사를 서술한 부분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이게 대체 한국전쟁에 대한 책이 맞나 싶었다. 신문 기사나 출판사의 리뷰를 참고하여 ‘새로운’ 책을 겨울방학 커리큘럼에 포함시켰던 것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책은 성공한 책이다. 더군다나 이 책이 박사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임을 감안하면 매우 성공적인 박사논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책임론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틀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보았다는 것, 거기에다 꽤 탄탄한 이론의 정지 작업을 함께 진행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 평화기획을 '칸트적 기획'과 '홉스적 기획'이라는 큰 틀 속에서 시기별로 구분을 시도한 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 연구의 핵심 주장은, 판문점 체제는 단지 냉전 대립과 군사적 전투의 산물이 아니라, 자유주의 기획이 반영된 국제법과 정치적 기획이 충돌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34쪽)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기존에 진행된 사실 관계에 관련된 연구들의 통설을 뒤집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전쟁의 '역사성'을 항상 염두에 뒀기 때문이 아닐까?


전 세곙에 걸쳐 적은 주권국가의 합법적인 적이 아니라 인류의 적으로 선포되어 절멸의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본격화된 총력전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된 '이념 전쟁'으로서, 단순히 적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 국가와 국민을 괴멸시키고, 적을 섬멸하는 것을 정당화햇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 규모에서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도덕적인 전쟁은 없었다. 마치 중세 유럽의 종교전쟁이 전 세계로 확대된 것처럼, 전쟁 자체를 금지시킨다는 전 지구적 기획이 수립된 이후 전쟁은 오히려 전 지구적 규모의 선과 악의 대립이 되었고, 19세기의 실증주의적 전쟁 개념은 완전히 사라졌다. 동맹국들은 기본적으로, 공격을 먼저 시작한 추축국은 정상적인 교전 국가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이들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승자의 평화를 추구했다. (94쪽)


 그래서 이 책은 생각보다 매우 빠르고 쉽게 읽을 수 있다. ‘빠르고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박사논문’. 그 자체만으로 성공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계속 떠오르는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 실제 위법 논란과 법학적 차원에서의 논란을 구분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책의 중간마다 ‘위법성’ 등에 대해 서구의 법학자들이 당대에 논했던 내용을 정리해놓았다. 물론 이것은 국제법학적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실제로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문적 차원에서의 논쟁을 당시의 정치적 논쟁으로 치환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구분이 모호해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면이 있다. 더군다나 해당 부분의 논쟁이 실제 UN이나 미국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기에 더욱 헷갈린다.

소련을 적으로 규정하고 모든 책임의 근원으로 간주하는 냉전적 세계관은 미국이 전 세계에서 대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와 위협을 하나로 통합하는 서사를 제공했다. (137쪽)


2. ‘자유주의적 기획’이라는 정의 자체가 미국 중심의 분석이 아닌가? 책 전체를 읽다보면 냉전의 동력을 자유주의에서만 찾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냉전의 또 다른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련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소련과 중국은 미국의 전략에 수동적으로만 반응했는가?

3. UN이 개입하는 일련의 과정을 ‘칸트적 보편 기획’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이 또한 정치적 정당성 마련을 위한 레토릭에 불과한 것 아닌가? 또 중국 개입 이후의 상황을 두고 필자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홉스적 질서”이며 “포괄적인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는 과정으로서의 ‘정치’가 작동하지 않은 ‘합의 없는 질서’의 산물”이라고 보았다.(357쪽) 하지만 앞서의 ‘칸트적 질서’에서는 ‘정치’가 제대로 작동했는가? 어차피 그 당시에도 미국만의 자의적 해석이 많은 것을 주도하고 있던 것 아닌가?

이렇게 유엔으로 상징되는 칸트적 기획은 냉전 시기 홉스적 기획으로 전환되었고, 그 결과 전쟁과 평화의 의미나 형태, 양상이 모두 변화했다. (179쪽)


이것이 미국의 국익에서 볼 때, 유엔 결의안이라는 초국적 제도가 갖는 기능적 효용이었다. 즉, 한국전쟁의 초기 국면에서 유엔으로 대표되는 칸트적 법치 기획은 미국의 홉스적 냉전 기획의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273쪽)


4. 레토릭으로서의 칸트적 법치 기획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홉스적 기획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칸트적 법치 기획과 홉스적 기획이 이항대립의 위치에 놓일 수 있는 것일까?

한국전쟁 시기에 우리가 결국 목도한 것은, '합리적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고도의 자유주의적 이상이, 정치적 신념에 대한 배신을 우대하는 차별적 보상 시스템, 그리고 정치 체제에 대한 충성을 가장 호전적으로 증명해야만 난민적 지위를 부여하는 망명 시스템으로 대체된 과정인 것이다. (445쪽)


5.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보는 이런 관점이 기존의 ‘수정주의적’ 관점의 결론과 얼마나 차별성을 지니는가? 필자가 기존 연구의 한계라고 지적했던 것과는 달리, 이 책 또한 결국엔 미국의 의지와 전략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한국전쟁을 새로운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본 흥미로운 책임에는 틀림 없다. 현재의 갈등 상황에 대한 반성과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비전을 제시한 것은 기존 연구에서 보기 힘든 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저자의 문제의식은 진정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만 할 점이다. 우리는 왜 한국전쟁을 발전적으로 소비하지 못하는가?


한국 사회는 왜 정전 60년, 분단 70년이 지나도록 한국전쟁과 분단으로부터 폭력과 파괴, 단절과 갈등에 대한 깊이 있고 호소력 있는 성찰을 길어 올리지 못했을까? 한국전쟁은 왜 평화에 대한 지혜의 보고가 되지 못하고, 갈등과 냉전의 박물관으로 남아 있을까? 한국 사회가 그동안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던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며, 평화를 성취하는 데 실패하고 국제 평화에 기여하지 못한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52쪽)


판문점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평화에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561쪽)


우리에게 이 새로운 "이상이 숭고한 이유는 그것이 초월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넓은 관점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563쪽)


보통 '강박'하면 나쁜 것을 지칭하지만, 지금 나에겐 '새로운 관점'에 대한 강박이 필요한 것 같다. 그걸 위해선 역시 공부 밖에 답이 없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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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네 사람의 이야기
자작나무 에세이 모임 지음, 이영남 기획.진행 / 푸른역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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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 없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면 '항상' 틀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외적인 그 한 명이 바로 나의 가족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사회적 문제에 기인한다는 말은 옳으면서도 동시에 틀린 말이다. 결정적 순간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의 개인적 경험에 기인하는 것이다. (5쪽)


자살자의 유족이 모여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점차 스스로 체득하면서 남긴 기록. 유독 높은 자살율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자살자의 가족에 대해서는 모두가 침묵하고 모른 척 한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물론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지만, 그들을 위한 세심한 프로그램이 필요한 건 아닐까? 이런 프로그램의 부재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자살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말해주는 건 아닐까?


나는 아들을 보낸 후 고통의 시소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느 쪽 고통이 더 큰지 그것만 재고 있었다. 그런데 몰랐던 것이 있었다. 고통의 시소 저쪽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것이 울음이라는 것, 고통을 울음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 (66쪽)


자살자 유족이 쓴 네편의 글을 읽다보면, 의외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처음엔 이 부분이 좀 의아했는데,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니 당연한 얘기가 아닌가 싶다. 유족들의 글은 고인에 대한 추모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슬픔과 원망과 반성을 표현하는 수단이니까. 그걸 제대로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돌아봐야만 한다. 자살자와의 '관계'에만 집착하다가는 그 어떤 현실 인식도, 치유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 힘든 경험과 감정을 드러낸 유족들도 대단하지만, 각기 다른 상처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해당 프로그램을 진행한 기획자의 뚝심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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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발한다 - 해제ㅣ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의 양심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7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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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에 가장 앞장 서서 진실을 외쳤던 에밀 졸라의 글을 모은 책이다. 가장 유명한 글인 '나는 고발한다'는 의외로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직접 읽은 사람도 드물다. 아무래도 '현장의 글'이기 때문에 맥락을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나는 고발한다'도 명문이지만, 졸라가 드레퓌스의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도 좋은 글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오늘날에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건, 정작 당사자 드레퓌스는 그리 존경할만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드레퓌스가 사면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을 배신한 꼴이 되었지만, 졸라는 여전히 '사건'을 바라본다. 아마도 그가 '사람의 편'이 아니라 '진실의 편'에 서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친분에 의해 왜곡되고 무마되는가. 나부터가 공적인 문제에 대해 인간관계를 들이대지 않고, 서운해하지 않고, 기대하지 말아야겠다. 또 잘잘못이 분명한 일에 친분을 내세워 누군가를 방어해주려는 것도 삼갈 일이다.


뒷부분에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해제가 있는데, 짧은 글이지만 전체 글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해당 사건을 들어봤다면, 한 번쯤 시간을 내어 읽어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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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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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장에 대한 관심이 많다. 주제도 모르고 무슨 작가가 되겠다는 건 아니고, 인문학을 한다는 학자들이 문장이 엉망인 경우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물론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즉, 아름다운 문장을 원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 문법에 맞는 문장을 쓰고 싶기 때문에 문장을 다룬 책을 종종 사서 본다. 이 책도 그 책 중의 하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가 많은 책이다.


행위가 진행될 수 없는 동사에 보조 동사 '있다'를 붙일 수는 없다. (44쪽)


보조 용언, 그러니까 보조 동사나 보조 형용사처럼 보조해 줄 낱말을 덧붙일 때는 당연히 이유가 있어야 하고 그 효과를 봐야 한다. (45쪽)


문장의 주인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와 술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52쪽)


분명하게 뜻을 가려 써야 할 때까지 무조건 '대한'으로 뭉뚱그려 쓰면 글쓴이를 지적으로 게을러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64~65쪽)


지적인 문장이 아니라 지적으로 '보이는' 문장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지적으로 보이게끔 포장하지만 사실은 게으름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69쪽)


그러니 한글 문장은 순서대로 펼쳐 내면서, 앞에 적은 것들이 과거사가 되어 이미 잊히더라도 문장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러려면 문장 요소들 사이의 거리가 일정해야 한다. ......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장의 주인이 문장을 쓰는 내가 아니라 문장 안의 주어와 술어라는 사실이다. (196~197쪽)


 그리고 단편 소설 같은 이야기를 중간 중간 넣는 흥미로운 구성으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나름의 반전(?)도 있고, 한참 생각할만한 좋은 표현도 있다.


오해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만듭니다. 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풍경을 만들고 시선을 만들죠. 이해한 자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시선과 결코 볼 수 없는 풍경. 그것이 설사 왜곡된 시선이고 왜곡된 풍경일지라도 말입니다. 이해한 자는 풍경을 갖지 않습니다. 아니, 풍경을 가질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왜나하면 이해한 자는 자신과 이해된 것 사이에 거리를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이해한 것인데 굳이 거리를 두는 건 바보 같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해한 자가 갖는 것은 풍경이 아니라 장면이죠. 이해한 자신과 이해된 대상이 함께하는 장면. 하지만 오해하고 오해된 자들은 거리를 갖고 풍경을 갖습니다. 어떻게 해도 좁혀지지 않는 거리와 어떻게 해도 내게로 와서 장면이 될 수 없는 풍경을 말이죠. ......

누군가에겐 그 모습이 내가 속한 풍경이기도 하고 내 모습 자체가 풍경이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내겐 결코 풍경이 될 수 없죠. 왜냐하면 내가 지켜보고 있는 것은 풍경을 만드는 거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144~146쪽)


물론  이런 류의 책이 다 그러하듯, 모든 부분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시작하다'의 뜻에 집착해서 그 사용을 엄격히 제한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다"는 문장은 시작과 끝을 명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색하다는 거다. 그러나 "사람들이 놀랐다"라는 표현과 "사람들이 놀라기 시작했다"는 표현은 어색한지 어색하지 않은지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다. 두 표현은 분명 다른 상황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직원들이 하나 둘 퇴근하기 시작했다"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말하듯 이 표현이 바통을 주고 받으며 퇴근한다는 걸 표현하기 위한 문장일리가 없다. 만약 단어의 정확한 뜻에 그렇게 집착한다면, 서브플롯 속의 "미망인"이라는 단어는 왜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지 모를 일이다. 심지어 상대를 직접 지칭할 때도 미망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그야말로 어색한 표현이다. 또 단어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 어색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표현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이런 부분은 내가 알아서 받아들이면 될 일. 재미있게 잘 읽은 책이었다. 특히 "문장은 손가락이 아니다"라는 지적에는 많이 뜨끔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은 사용할 때에 꼭 필요한 문장인지 재확인을 해야겠다. 이 책의 목차를 두고 퇴고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있었다, 있다

- 관계에 있다

-에 대한(대해)

-시키다

될(할) 수 있는

그, 이, 저, 그렇게, 이렇게, 저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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