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2

 

2005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각종 광고와 영화 등에 출연하면서 이제는 명실상부 ‘스타’ 반열에 올라선 다니엘 헤니(Daniel Phillip Henney). 그의 ‘서구적’인 마스크와 체격, 그러면서도 ‘동양적’인 외모를 유지한 그의 외모는 스타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는 한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지만, 한국 드라마에 출연(그것도 대사가 중요한 연애드라마!)하는 것에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모국어(?)인 영어를 쓰면 되는 것이었고, 방송에는 알아서 친절하게 자막을 깔아주었으니까.


그런 그가 한국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헐리우드까지 진출했다. 좋은 조건이지 않은가. 외모도 준수하고 무엇보다 ‘영어’가 되니까. 그의 출연작은 <엑스맨 탄생 : 울버린>. 그는 ‘에이전트 제로’라는 배역을 맡아 출연하였다. 비록 단역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가 등장하는 씬은 꽤 많았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이국적인 외모의 그 배우는, 영화 속에서 단지 ‘동양인’일 뿐이었다. 그는 특히 헐리우드 액션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동양인이었다. 총검술이나 무술의 달인이지만 냉혹한 악역, 하지만 그 악역 중에서 주역은 되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말이 없는 자’.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그가 영어를 잘하고 말고는 애초에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여자 캐릭터의 경우 그 이미지는 더욱 고정적이다. 찢어진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무술은 기본, 그러면서도 왠지 다도와 어울리고 또 그러면서도 팜므파탈적인 이미지를 가진 여성. 국적이 그리 문제될 것이 없는 이런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서도 ‘동양’은 그만의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양인 패션 모델을 보라). 그리고 그 이미지는 항상 ‘소외’되어 있는 타자의 이미지였다(이렇게 소외를 시키면서도 아시아 시장을 위해 동양인 배우를 출연시킨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1-3

 

사이드는 말한다. 동양은 ‘유럽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타자’였다고.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서양뿐만 아니라 모든 주체가 타자를 만들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닌 것은 타자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사이드가 주장하는 것은 그런 단순한 수준의 인식론이 아니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을 하나의 지식담론으로 보고, 그것이 현상에서 작용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무엇보다도 오리엔탈리즘이란 하나의 담론, 곧 살아 있는 정치권력과 직접적인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양한 권력과의 불균형적인 교환과정 속에서 생산되고, 또한 그 과정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동양인’이라는 것을 날조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으로서 그를 말살시키는 지식과 권력의 결부를, 나는 단순히 학문상의 문제로만 생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결부는 지극히 명백한 중요성을 갖는 지적인 문제이다.

/

또 그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이 오리엔탈리즘이란 기제가 억제력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이 지점은 아마도 푸코를 선용한 것이리라). 서양인들은 동양을 알아야 하고, 그 앎에 대한 생산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스스로에게 불어넣었는데, 그 ‘앎’의 대상은 항상 고정적이었다. ‘동양인은 어디에서도 같았기 때문’이다(이건 우리가 보는 중동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13세기, 1940년대, 1960년대, 1990년대를 차례차례 상상해보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고전적 이슬람과 중세적인 이슬람 또는 이슬람 일반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이슬람사회, '하나의' 아랍적인 정신, '하나의' 동양적 심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 이슬람 또는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구성된 그 7세기적인 이상형은, 최근의 식민지주의, 제국주의, 통상의 정책으로부터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통일성을 유지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들에게 동양인은 동물과 같다. 동양인은 유전적이며 선천적인 한계를 가지고, 그 한계는 개선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이드의 선언대로, ‘동양인이 동양인이라고 하는 점이야말로 바로 범죄’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이드가 강조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이 단순히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히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오리엔탈리즘이 식민지 지배라는 사실을 추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에 앞서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라는 차원을 간과하게 된다.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나름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그 전통은 ‘이미 그들(제국주의자)을 위하여 어휘, 이미지, 수사법, 형상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 ‘준비’를 통하여 동양은 하나의 이미지를 부여받게 되었다. 동양과 직면하기 이전에 그들만의 ‘실체’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양의 ‘이미지’가 이미지인 이유는, 서양인이 본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산만한, 하나의 거대한 실체를 표상하거나 대변함으로써 이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이미지’는 교정되고 처벌되어야 하는 ‘동양화된’ 대상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이미 불가능한, 실패한 임무이다. 그리고 서양인의 입장에서, 그 ‘불가능’과 ‘실패’는 임무 자체에 오히려 더욱 강한 사명감의 아우라를 제공하고 비장감마저 감돌게 한다. 이 사명감과 비장감은 기왕에 구축된 오리엔탈리즘을, 선험적이고 ‘반경험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서 다시 오리엔탈리즘을 강화시키는 일종의 ‘재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문제 ․ 대상 ․ 특질 ․ 지역을 다루는 경우의 습관으로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는 대상을 어떤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지시하고 명명하며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어 다음에는 그 단어와 문장이 현실성을 확보하고, 또는 더욱 단순하게 그것이 현실 그 자체라고 인정하게 된다.

 

#1-4

 

글의 처음에 제시한 김춘수의 시가 이런 의미에서 창작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서양인들에게 동양이 마치 저 시의 ‘꽃’처럼 인식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자의적으로 지어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으며(‘인간과 장소 및 경험이 한 권의 책에 의해 언제나 묘사될 수 잇다는 사고방식이며’, 내가 이름을 불러주자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그 결과 책(텍스트)이 그 속에 묘사된 현실보다도 더욱 큰 권위를 얻어 더욱 널리 이용된다’). 이 자의적이면서도 이기적인 태도는, 내가 직접 가지 않고 ‘그’를 이름 지어 ‘오게끔’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왔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왔다고 내가 인지’하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나 여기 왔소’라고 말할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애초에 그렇게 할 수조차 없는 존재이니까.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에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되어있다. 어찌 보면 오리엔탈리즘은 ‘자아가 없는 자폐증’에 비유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아 중심적인 사고를 통해 수많은 타자를 생산해내지만, 결국 자아의 실체는 없는. 때문에 서양 초기의 인류학은 매우 공허한 울림만을 남긴다. 인류를 연구하긴 하는데, 그 인류를 연구하는 자신(그 또한 인류)에 대한 관심은 적은('‘상이점’을 말하면서 ‘무엇과의’ 차이인지가 완전히 무시된다면, 이 상이점이란 말은 어떤 의미를 담는 것일까?'). 이렇게 타자만을 생산해내는 구조 속에서, 타자에 대한 텍스트의 초점도 왜곡된다.

 

텍스트의 초점이 사자(lion) 일반이 아니라 그 사나움이라는 주제에 더욱 모아짐에 따라, 사나운 사자를 취급하기 위하여 권장된 방법, 실제로는 사자의 사나움을 더욱더 강화하고, 사자를 반드시 사나워야 하는 것으로 만들게 되리라. 왜냐하면 사나움은 실제 사자의 성질이며, 또 그것이 사자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본질이고, 또는 알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텍스트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서술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 현실 자체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꽃은 존재자체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추상화된 개념 혹은 이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개념과 이념은 불변의 것이다.

 

동양에 관한 하나의 사고체계로서 그것은, 언제나 특수한 인간적 세부로부터 출발하여, 초인간적인 일반화로 상승했다. …… 오리엔탈리즘이 전제로 삼은 것은, 서양과는 완전히 상이하고(상이한 이유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언제나 변함없는 동양이었다.

 

자신의 노래와 꿈 속에서만이 아닌, 실제의 꽃을 만나게 되면서-때로는 가시에 찔리기도하면서-‘나’는 실망도 하게 되고 그에 따른 비난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비참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다시 오리엔탈리즘의 ‘전통’에 매달린다. 그리하여, ‘좋은 동양’은 고대에 쓸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좋은 동양’은 현재의 ‘나쁜 동양’을 말하기 위함이리라. ‘특히 당신을 가리켜 얘기하는 것이 아니야. 그 민족과 종교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라는 ‘발빼기’가 바로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동양인이고, 그 다음에 한 사람의 인간이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동양인으로 돌아온다.

 

결국 ‘꽃은 무엇보다도 먼저 꽃이고, 그 다음에 한 식물이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꽃으로 돌아온다’. 오리엔탈리즘의 범위는 이처럼 지적이면서 인식론적인 측면까지 침투해있는 것이다. 때문에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히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사이드와는 다른 맥락에 위치하지만, 왠지 프란츠 파농의 비애가 느껴지는 것은 오버일까?(그렇게 오버는 아닌 모양이다. 역자도 후기에서 종종 파농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2-1

 

매미는 꽤 오래 사는 곤충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미를 ‘한 철’ 곤충으로 기억한다. 실로 ‘메뚜기도 한 철’이 아니라 ‘매미도 한 철’인 셈이다.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17년까지 땅 속에서 유충으로 있다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비록 짧은 한 철이지만 긴 세월을 ‘참아낸’ 매미를 보고 감탄하기도 하고, 긴 세월을 감내하다가 드디어 성공을 이루어낸 사람들을 매미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매미가 땅 속에 ‘갇혀’ 17년이란 세월을 ‘참으면서’ 지냈을까? 왜 우리는 항상 ‘전지적 작가 시점’에 익숙한 것일까?


사이드는 ‘문헌학’이 구성한 초기 오리엔탈리즘에 주목한다. 문헌학은 말 그대로 문헌에 대한 정보를 캐내고 그 속에서 시대적 의미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아니 ‘시대적 의미’보다는 문헌을 연구함으로써 하나의 ‘계보’를 만들어내는 것이 문헌학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양을 대상으로 하는 문헌학이 단순히 물질적인 ‘문헌’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문헌을 바탕으로 ‘동쪽의 인간’들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밝혀내고, 조명하여, 구출’하여 ‘학생 앞에 보’였다. 그리고 그 ‘구출된’ 지식은 ‘텍스트로부터 텍스트로 복사’되어 ‘문자 그대로 상투적 관념’이 되었다. 하나하나의 개인(주로 지식인)이 오리엔탈리즘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오리엔탈리즘에 ‘상투적’인 것이야말로 가공할만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인도회사와 같은 대규모 조직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여행자의 이야기로부터도 식민지가 창조되었고, 자민족 중심의 원근법이 확보되었다.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이론과 실천을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동양에 관한 객관적 지식에 별안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문헌학과 같은 학문 분야에 의해 변형된 한 세트의 구조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힘은 그 자체로 현실에서 위력을 자랑하였으며, 그 힘이 만들어낸 ‘현실’은 또 다시 그 ‘힘’을 증폭시켰다. 방대한 자료를 통해 구축한 ‘다가가지 않은 피라미드’에 그들은 간접적으로 이름을 새겼으며, 이름을 새기는 순간 그제야 피라미드(동양)는 하나의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사시는 아라비아 시와 같은 것에 나타난 유용성과 흥미로움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말한 것은,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적절하게 변형되어야 비로소 아라비아 시는 감상의 대상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피라미드는 서양에 의해 풀어져야 할 하나의 ‘원초적’ 수수께끼인 셈이다.

 

퀴네의 정식에 의하면, 동양은 문제를 제기하고 서양은 그것을 해결한다. 곧 아시아는 예언자를 가지며 유럽은 전문가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초적 수수께끼는 동서양이 함께 발을 딛고 있는 ‘인류’의 기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애초에 동양은 미숙하고 야만적이며 여성적(수동적)인 존재이므로. 때문에 바벨탑을 세움으로써 공통의 언어가 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결국 르낭을 비롯한 근대의 학자들은 문화적 타락을 증명할 동양의 ‘고어’를 창조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셈어였던 것이다.

 

#2-2

 

어떠한 비정상이라고 하여도, 불필요한 예외로 고찰될 수는 없다. 도리어 비정상이야말로, 동일한 계층에 속하는 모든 구성요소

를 하나로 묶는 규칙적인 구조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이 책에서는 ‘우리’)이 모든 것을 창조하여 하나의 지식 체계를 구성하고, 그 체계 속에서 부단한 재생산을 해왔던 것은 바로 저 이유 때문이다. 하나의 ‘완벽한’ 타자를 설정함으로서 ‘완벽한’ 자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며, 그 속에서 ‘권력’이 창출된다.


 

이 구조는 비단 동서양 간, 인종 간의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밖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남성적 ‘도시’를, 뒤에서 말없이 수수한 모습으로 뒷바라지하는 여성적 ‘농촌’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오히려 농촌이야 말로 ‘자족’이 가능한 곳이고, 도시야말로 오염에 찌든 곳이지만, 도시가 바라보는 농촌은 지저분하고 게으르며 수동적이다. 기껏해야 공기 좋고 물 맑은, 명상하기 좋은 곳. 그곳에서 ‘생활’은 없다. 아룬다티 로이는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도사인 체하는 사람들은 강연을 하면서 진짜 인도, 인도의 정신은 시골에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이 무슨 허튼 소리란 말인가. 손가락만 한 무화과 잎 하나로 색색의 화려한 물건들이 터질 듯 꽉 들어찬 정부의 수납장을 가려 보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인도가 시골에 살아 있다고? 그렇지 않다. 인도는 시골에서 죽어가고 있다. 인도는 시골에서 학대를 받는다. 인도는 도시에 살고 있다. 인도의 시골은 오로지 도시를 섬기기 위해 산다. 인도의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의 노예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들은 지배를 받아야 하고, 계속 살아 있되 겨우, 그리고 간신히 살아가야만 한다. <아룬다티 로이, 『생존의 비용』 중>

 

오리엔탈리즘도 마찬가지다. 서양인들은 그들 나름의 지식체계를 확고하게 다져가면서 동양을 ‘예속’시키고 ‘학대’하며, 그들 위에 군림한다. 사이드의 지적대로 그들의 ‘학문 속에 권력에 대한 이기적 의지가 숨어 있고, 그것이 그의 노력을 지원하는 것이자 그의 야심을 부패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말 그대로 ‘믿음’으로 체화되었기에 그들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시대와 자민족중심주의적인 문화에 의해 생겨난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미가 땅 속에서 ‘정말’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가, 인간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수많은 자료를 인용하며 지식체계를 구축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믿음은 복잡할 필요가 없었다. 단순할수록 타자의 생성엔 유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동양에게 복잡할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었다.

 

논리적으로 구축되고 동양이라고 불린 그 영역 속에서는, 어떤 종류의 단정은 모두 동일한 역학적 일반성과 문화적 유효성을 갖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유럽’과 ‘아시아’ 또는 ‘서양’과 ‘동양’이라고 하는 해묵은 구분은, 인간의 다양성에 유래하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차이에 대해 지극히 광범한 꼬리표로 가축 무리를 나누는 것과 같이 작용하여, 그 과정에서 인간을 한 가지나 두 가지의 궁극적이고 집합적인 추상개념으로 환원시킨다. 마르크스도 예외가 아니다. 그에게도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실존적인 정체성보다 집합적 개념으로 동양을 사용하는 것이 용이했다.

 

매미도 종류에 따라 1년에서 17년의, 매우 다양한 길이의 유충 시절을 거쳐 성충이 된다. 그러나 그것인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건 아마도 너무나도 당연한 ‘종의 이기성’에 기원하는 것이리라. 우리 눈에 매미든, 붕어든, 사자든 크기를 제외하고 모든 생김새가 비슷해 보이는 것처럼. 아, 그런데 잠깐. ‘종’이라고? 그렇다. 서양인과 동양인은 ‘종’이 달랐던 것이다. 이보다 깔끔하고 명확한 구분이 어디있겠는가? 이 깔끔한 구분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간이 스스로에게는 초시간적인 능력을 부여하고 사회와 민중에게는 한 개인의 수명 전체를 강제하는’ 전도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체계’는 이제 동양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그 모든 것을 ‘예외’로 만들어버린다. 드디어, 선험이 경험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2-4

 

그 제국의 지도제작술은 완벽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주의 지도는 도시만큼 컸고, 제국의 지도는 주만큼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지도들도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게 되자 지도제작자들은 제국만큼 크고 한 점 한 점이 그대로 일치하는 제국의 지도를 만들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과학에 대한 열정」중)

 

보르헤스가 풍자하려던 지점은 좀 다른 것이지만, 어쨌든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간접적 지식’이 실재를 덮어버린 현상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토록 ‘열정’을 가지고 연구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은, 그 제국주의적 의도(혹은 무의식)는 차치하더라도 결국 오리엔트를 덮어버리고 없애버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의 당연한 전제조건일지도 모르겠다.

 

동양이 논의의 대상인 경우에도 동양은 완전히 부재하며 그 대신 오리엔탈리스트와 그들의 언어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오리엔탈리스트의 실재란 동양의 실질적 부재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이드도 그것을 대체할 그 무엇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이 차별과 소외의 메커니즘을 타파하고 ‘그 무엇’이 아예 없는 이상향을 지향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을 지향하는 그의 목소리는 크고 높다.

 

하나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현상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시작되었던 그 원한과 불평등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지만, 이제 이런 것들은 영구적인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 혹은 부분적인 완화는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최소한의 보편적인 수용자세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이 글을 간단히 맺고자 한다.

 

이 세계에 부시, 샤론, 빈 라덴, 럼스펠드에 이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반대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과 해방에 대한 인간적이고 휴머니즘 적인 소망을 쉽게 미루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이에 대하여 하나마나한 이상론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니그로 정신’이라든가 ‘유대인의 인격’에 관하여 학술적인 글을 쓰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을 우리가 만들어왔음을 생각할 때, 이것을 ‘이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되묻게 된다. 우리의 믿음, 특히 어떤 ‘한계’에 대한 믿음이 어디까지 유효한 것인가 생각해야 하며, 그 생각이 우리를 포기가 아닌 희망에 대한 의지로 이끌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야기한다. 희망을 위해 당신의 믿음을 깨뜨리라고. 슬프지만 그 믿음의 파괴 없이는 아무 것도 달라질 수 없다고. 우리가 믿는, 아니 믿고 싶어 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이드가 인용했던 니체의 말 한 구절을 다시 읽어 본다.

 

곧 진리란 그것이 착각임을 망각하고 있는 착각이다.

 

#3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내가 읽은 이 책은 오리엔탈리즘 발간 25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에 다시 나온 판본이다. 두께에 비해 가격도 싼편이고, 개정 증보판답게 이전 판본에서 사용된 어색한 단어들이나 문장들도 수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이드의 후기 2편이 실려 있고 역자의 후기도 100페이지에 달한다. 하지만 문학비평가였던 사이드답게 글이 쉽지는 않다. 번역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보기엔 원문 자체도 그리 녹녹치 않은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역주가 굉장히 많고 긴 편이라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하지만 읽기 싫다면 그냥 지나치면 될 일이기 때문에 역주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많은 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현실을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

 

그것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100페이지에 달하는 역자의 후기다. 대부분의 역자후기가 책 내용의 요약이나 저자의 약력 정리, 혹은 개인적인 감상에 그치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역자가 지금보다 훨씬 젊을 때 쓴 후기이므로 굉장히 서슬이 시퍼런 문장이 가득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100% 동감을 절대 할 수 없지만 논쟁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예를들어 '모든 민족과 개인이 공존하고 공생하는 사회, 서로의 존엄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사회를 이룩하고 투쟁과 소유가 아니라 대화와 존재의 삶의 터를 이룩'하는 것이 과연 후기 중간에 보이는 서양(특히 영국)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의 적대감의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나, 마지막에 제시하는 '이상향'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서 '증오'는 에드워드 사이드 또한 고개를 저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특이한 후기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보기보다는 오히려 책을 읽기 전에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서슬이 시퍼렇기 때문에(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문제가 되는 지점과 내가 현재 서있는 지점을 확실하게(그리고 사이드의 글보다 훨씬 쉽게) 확인한 후에 책을 읽을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면서도 정작 이 용어를 '유행'시킨 이 책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 항상 맘에 걸렸는데, 읽는다고 고생 깨나 했지만 어쨌거나 다 읽어서 속은 시원하다. 물론 내 독서 능력에 다시 한 번 좌절하기도 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이상적인 남자'하면 떠오르는 가치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용기', '강인함', '씩씩함' 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박노자의 이 신간에서는 1890~1900년대 나타나는 '이상적 남성성'의 계보를 살펴보고 있다.

'왠 남성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동안 박노자가 관심을 가져왔던 영역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뜬금 없지도 않다.

박노자는 1900년대 초반 사회진화론,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와 같은 담론에 관심을 가져왔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대충 감이 오겠지만, 1900년대 강조된 남성성은 전통시대의 그것과는 또 다른 '육체적 강자'로서의 남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과 근대가 그렇게 명확하게 단절되는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뒷부분에 이영아의 발문에도 지적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너무 '근대의 근대성'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

 

이데올로기는 권력관계 전체를 정당화하는 상징 영역이다. 이데올로기 영역은 사회 곳곳의 완고한 기존 현상(예컨대 가부장적 가족구조)을 포함한 권력 구조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또한 "전통"은 전체 권력 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에서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 영역은 대개 혁신성을 가시화하는 데에는 놀라울 만큼 소극적이다. 기의(signified)가 대대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기표(signifier)들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 후기 사회(17~19세기)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추앙받았던 이순신은 근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대담무쌍하고 성공적이며 지능적이고 애국적인 전사의 상징, "조선의 넬슨(Horatio Nelson)"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렇지만 숭배의 내용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숭배를 표현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한 연속성을 드러낸다.

 

여러 자료들과 시대상황을 검토한 후, 저자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조선의 경우, "애국적 남성의 훈련된 신체"의 근대적 이상은 최소한 두 가지의 토착적 남성성 패러다임을 혼합, 계승한 것이었다. 하나는 왕조국가와 성리학적인 도덕규범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의 독립과 자주"라는 새로운 지상 가치로 옮겨가던 고답적 "군자"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대 민족 이념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겁 없는 협객을 존중해온 김구와 같은 평민들의 패러다임이다. 전통적으로 "고상한 목표", 자기 수양, 도덕적 청렴을 부각시키던 "군자" 패러다임은 최남선 등의 "자기희생" 강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세시풍속의 일종으로서 이웃 마을 사이의 돌싸움에서 드러나는 사납고 거친 남성성에 대한 평민드의 애착은 새로운 남성적 에토스의 군사주의적인 양상으로 이어졌다.

 

이런 양상이 '기댈 조국이 없는', 그러면서도 일제에 의해 총동원되어야 했던 식민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자리를 잡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성은 강인함(그러나 국가권력에 순종하는)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남성상은 '배려하는 남자'. 물론 이 배려와 돌봄은 넓은 의미를 가진다.

약자를 배려하고, 사회차원에서는 각종 사회문제들을 무시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는 그런 남성.

세계에서 가장 긴 주당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점을 감안하면 '배려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도,

근대적 이상이었던 '튼튼한 육체'를 발전적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뒷부분에 같은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는 이영아의 비판적 발문이 실려 있어 책을 잘 매조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영아의 문제제기 외에 개인적으로 드는 의문도 있다.

 

우선 '정당한 폭력을 "남성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변화시키는 훈육된 남성 투사라는 상투적 이미지는, 개화기와 그 후의 조선사회에서 성차 의식을 "민족화"시키는 과정에서 창출된 것 뿐이다.'라는 저자의 견해.

 

조선시대와 근대를 비교하면서 폭력성에 대한 해석을 할 때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나 싶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근대와 전근대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은 "국민국가를 위해서 칼을 드는 여성"의 근대적 이미지를 쉽게 수용할 만한 문화적 배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결론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일단 그것이 '조선만의 특성'이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분석을 위해서는 당시의 '여성관'도 면밀히 살펴봐야만 한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칼을 드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좀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이런 '적극적'인 행위를 권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보기에 여성들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존재였다.

그나마 여성이 칼을 드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신의 정절이나 가문의 명예 혹은 부모의 목숨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국가를 위해 칼을 드는 여성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며, 그 상상 또한 현실의 남성을 공격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공식적'으로는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딸, 부인,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문에 이 시대의 '담론'과 '현실'의 괴리 또한 반드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권장'으로 표상되는 남성성만이 아니라 '금기'로 표상되는 남성성도 함께 살펴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쉬운 예로, '남자가 왜 질질 짜고 그러냐'는 금지 혹은 비난. '훈육' 속에는 권장 외에도 금기, 금지가 상당한 영역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당시 남성에게 무엇을 금지하였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상적 남성성을 탐구하는 다른 경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더 아쉬운 점은, 머리말에 비해 글이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제말기를 거치면서 겨우겨우 일상까지 파고든 이상적인 남성성이, 저자의 말처럼 왜 '변화'했는가?

물론 저자의 관심은 1900~1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머리말에 이야기한 문제제기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동유럽이나 중남미 사회들의 "이상적 남성" 이미지와 비교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완력이나 담력보다는 학력 및 경제 능력 부분이 더 중요시된다. 일부 지식인 사회를 제외하면 동유럽 여성들은 "근육이 없는 남성", 심하면 "주먹질 못하는 남성"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르다. "명문대 졸업생"과 "엘리트 대기업 사원"이라면 그 정도의 "결함"(?)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대한민국에서 경제적 측면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의 "인생 성공"은 절대적으로 "학력 자본"에 좌우된다. 고등교육의 대중화는 남미나 동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한 개인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철저한 학별의 위계질서가 대한민국처럼 공고하게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적 프로젝트로서의 '건강한 남성의 육체만들기'는 멈추었지만, 여전히 각 기업체는 '군인정신'을 강조한다.

극기훈련을하고, 해병대로 가서 '훈련'을 받고 강인한 '정신'을 요구 받는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나의 관심이 많았던 부분이라 좀 아쉬웠다.

다소 허망한(?) 저자의 이상적 남성상을 피력할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을 좀 더 분석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영아는 발문에서 여러가지 생산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몸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문제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발문 첫부분에 나오는 연예인 군 입대에 대한 해석은 같은 입장에서 완전히 동의를 하지 못하겠다.

연예인 군문제에 일반 남성들이 그렇게나 민감한 것은,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 때문은 아니다.

(군대를 다녀오면 사회의 제대로된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합의가 있는 것은 100% 맞지만 그것이 '남성성'과 연관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물론 이것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주장처럼 이 요인이 가장 핵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그가 부차적으로 취급한 '평등'의 문제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평등'이라고 하니 뭔가 고상한 거 같은데, 표현을 좀 바꾸자. '피해의식'이 더 적절하겠다.

요즘 군대 가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갈 수 있으면 안가는게 좋다. 군대라는 곳은 이제 그런 곳이다.

그런데 정작 안간 이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왜? 나는 그런 X같은 곳에 2년 혹은 2년이 넘도록 다녀왔으니까.

나도 다녀왔으니, 너도 가야하는거 아냐?라는 논리가 바로 핵심이다.

어떠한 보장을 위한 평등이 아니라 피해와 불이익의 공유를 위한 '평등'. 때문에 '여자도 군대가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1권이 나온 후 한참 나오지 않던 '히스토리아' 시리즈가 다시 시작된 것도 환영할만한 일.

'속편격'으로 집필 중이라는 이영아의 책도 기대가 된다. (근데 이것도 히스토리아 시리즈로 나오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 누구나 꿈 꾸는 세상
후루타 야스시 지음, 요리후지 분페이 그림, 이종훈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엔 우화인 줄 알았는데, 실제 이야기였다.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들어진 나라 나우루 공화국.

바티칸과 모나코에 이어 세번째로 작은 독립국.

이 책은 이 나라에서 벌어진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정말 단 10분이면 다 읽을 분량이지만, 이 콩알만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얻은 것과 잃은 것,

어느 쪽이 많은지는

인광석의 섬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금부터 생각해야겠지요.

그렇게 보통 생활, 보통 수준의 국가란

어떤 것인지를 배워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보통'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우루 사람도 한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다 모를 겁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고, 또 그 '이런 일'이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님도 느낄 수 있다.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두고 그저 제국주의의 잘못이라고만 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절반은 그림으로 되어 있는데, 원화에 잘 묻어갈 수 있도록 레터링을 잘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아직 좀더 흔들려도 좋을 때잖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스무 살 시기의 쓸쓸함과 달콤함에 관한 이야기

 

이런 홍보 문구와 야시시한(?) 표지라면, 이 책은 그야말로 마케팅의 실패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이런 악플로 리뷰를 시작하는 것은 이 책이 적어도 이런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그건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좋게 봤다는 뜻)

어떤가? 표지와 홍보 문구만을 봤을 때, 당신이 예상할 수 있는 이 소설의 내용은?

 

  "야 이 나쁜 놈들아, 우리 언니 잡아가지 마아, 야 이 나쁜 놈들아, 우리 언니 잡아가지 마아......"

  피 흘리는 경애를 안고 목놓아 외쳤다는 수경이.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너의 슬픔에 내 슬픔이 공명하는 소리. 그리고 수경은 목이 터져라 외치다가, 화답 없는 세상에 절망하여 저세상으로 떠났다. 지금, 2번 시다 판님이가 3번 미싱사 경자를 잡아가지 말라 외치는 것은 수경이 경애를 살려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이제라도 화답해야 한다. 내가 인간이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내가 우리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 쪽으로 돌려놓고자 한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할런지도 모르겠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은 네가, 어디 그 시대를 현재와 비교하느냐고.

그러나 백이면 백,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았거나, 혹은 그 시대를 '아픔'으로 지내지 않은 자이다.

혹은, 그 '아픔'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 있는 파렴치한이거나.

 

때문에 이 소설의 제목,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단순한 '청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정신의 청춘', '마음의 청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이 책의 홍보문구에 더 화가 난다.)

'저' 인간의 슬픔과 아픔, 고통을 내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적어도 그것에 냉소를 보내지 않는 것.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

  "미안해, 수경아, 미안해. 화내서 미안하고, 웃어서 미안하고, 밥 잘 먹고, 잠 잘 자서, 정말 미안해......"

  그건 진심이었다. 그 순간 수경이 화를 냈다.

  "왜, 왜, 니가 미안한 건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 왜 미안하다고 하는 건데? 진짜 미안해해야 할 사람들은 가만있는데에, 왜, 왜 그러는 건데에. 내가 말했잖아. 난 단지 이상할 뿐이라고. 이상하고 이상해서 숨쉬기가 힘들 뿐이야. 나도 숨을 크게 쉬며 살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아. 숨을 크게 쉬려면 가슴이 너무 아파. 여기 이 가슴 한가운데가 터져버릴 것만 같단 말야"

 

나는, 숨쉬기가 힘들만큼 아픈 적이 있었던가? 하다못해 나를 위해서라도?

... 고통을, 아픔을, 슬픔을. 그것을 알아야 뭐하냐고 냉소짓기 전에 눈물부터 흘리리라.

사내 눈에서 찔찔 흘러내리는 눈물 자욱보다도, 쿨한 냉소가 훨씬 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싶다.

적어도 이 시대를 사는 '인간'이라면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시인이 혼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병원 현관을 나섰지만, 집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아픈데, 집에 가면, 집이 주는 안락함이 내 고통을, 내 아픔을 모른 체할 것이 나는 겁났다. 집에 들어간면 나만 편해질 것이 나는 두려웠다.

 

나도 겁이 난다. 나도 두렵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식 e - 시즌 5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5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지식 e 시리즈는 2권까지만 사서 보고 그 다음은 뭐 나오나 보다... 하고 넘어가고 있었는데, 어느덧 5권이 나온 모양이었다.

또 '아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려는데, 이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DVD를 준다는 말에 혹해서 사버렸다.

그러나 백과사전을 주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사서 볼만했다라는 결론. (앞서 사서 봤던 1, 2권도 꽤 좋았다)

 

3, 4권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이번 5권은 이전의 책과 형식이 조금 다르다.

주제에 상관되는 국내의 인물들을 인터뷰하여 붙여놓은 것. 꽤 괜찮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교육제도에 관련된 부분에서는 얼마 전 학원 광고로 논란이 있었던 신해철 씨와의 인터뷰도 있었는데 여러 모로 생각해볼 글이었다.

물론 마치 자신이 공교육을 비판하기 '위해서' 광고를 찍은 것'처럼' '보이게' 된 것에는 그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지적은 그가 연예인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되새겨볼만한 말이다.

 

  한번은 라디오에서 아동과외 문제를 다루면서 아동 사교육과 조기교육에 대해 극렬하게 성토한 적이 있다. 적어도 어린애들을 과외 열풍으로 억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사교육 반대론자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런데 게시판에 한 청취자가 글을 올렸다.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하나 둘 셋! 하면서 동시에 그만두기 전에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그랬더니 그 글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호응하더라. 나는 그것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동시에 그만두는 문제가 아니라, 남들이 다 그렇게 해도 나는 내 자식 그렇게 안 키운다고 해야 끝날 문제다. 이것은 내가 쫄지 말아야 끝나는 문제다. 우리나라 교육문제는 집단적으로 위협받거나 집단적으로 쫄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만들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산 참사 피해 유가족과의 인터뷰는 정말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잊어서도 안된다. 결코.

이 책을 사서 보지는 않더라도 혹시 서점에 가서 볼 기회가 있다면, 이 인터뷰만은 꼭 읽어보길 권한다.

 

  병원에서 망연자실 있으려니 용산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어요.유족의 서명날인을 맏아야 하니 경찰서로 빨리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전화기에 대고 악을 썼습니다. 야, 이 개자식아, 서명을 받을 일이 있으면 너희가 와야지 유족더러 오라 가라냐! 그랬더니 경찰서에서 하는 말이, 시신이 경찰서에 있는데 유족이 서명날인을 해야 시신을 인도해줄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분이 솟아도 시신이 거기 있다는데야 안 가고 어쩌겠어요. 부리나케 용산경찰서로 달려갔지요.

  참, 어이가 없습디다. 서명을 다 받고 나더니 시신이 여기 없다는 거예요. 눈이 뒤집어졌지요. 야, 이놈들아, 사람 죽이고도 모자라 유족들 데리고 장난하냐! 시신이 여기 있다고 해서 허위허위 달려왔더니 이제와서 시신이 없다고? 책임자 나와라! 그러고 한 10분쯤 있으려니 책임자라고 한 사람이 나왔는데, 그래요? 누가 그랬지? 누가 그랬지?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더 기가 막힙디다. 시신이 전부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 있다는 거예요. 시신이 왜 국과수에 가 있다는 거예요. 시신이 왜 국과수에 가 있냐고 물으니 부검 때문에 보낸 거랍니다. 유가족 동의도 없이 누구 맘대로 부검을 하느냐고 악을 썼더니, 원래 경찰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나요.

  저녁 8시쯤 되니 국과수에 갔던 시신들이 순천향대병원에 도착했다는 거예요. 달려갔지요. 그때부터 새벽 2시가 넘도록 또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위에서 지시가 안 떨어져서 시신 확인을 못시켜준다지 뭡니까. 2시 30분이 되어서야 유족 대표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대요. 그런데 먼저 들어갔던 삭람이 내 손을 꼭 잡더니 안 보는 게 좋겠다고 해요. 그래도 내 남편인데 안 볼 수 있느냐고 우겨서 들어갔지요.

  두 사람은 얼굴 형체가 그대로 있어서 누군지 알아보겠는데, 나머지 세 구의 시신은 누가 누군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 내 남편이 있다는데도 말이지요. 손목과 발목이 잘려 있고, 두개골이 열려 있고, 뱃가죽이 벌어져 있고, 손가락들이 잘려 있고, 살점이 여기저기 뜯겨져 있고, 치아가 줄줄이 부러져 있고... 그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어찌 말로 다 형언할 수 있을까요.

  시신 한 구를 확인할 때마다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지면서도 나는 다섯 구의 시신을 모두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결국 금니 하나와 체구를 보고 남편을 미루어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고가 벌어진 바로 그날 유족들에게는 아무런 상의나 통보조차 없이 시신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부검의 흔적을 감안하더라도 내가 보기에 그것은 결코 불에 타 죽은 시신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화재에선가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이 여러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지요. 이 사회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아무것도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이 화염 속에서 사람들을 구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을 영웅으로 치하하고 포상했던 공권력은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분도 지난 대선 때 저 괴물을 지금 저 자리에 올려놓는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쨌거나 사람 죽이라고 뽑은 것은 절대 아닌데.

정말 가슴이 턱턱 막히는 일들이 가득한 요즘이다.

하지만 분노는 할지언정, 체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사소한 일 하나라도 행동하고 저항할 것이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비웃는 것 따위 이제 완전히 무시하겠다. 그런 것 따위, 지금 문제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