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대륙 - 20세기 유럽 현대사 커리큘럼 현대사 1
마크 마조워 지음, 김준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마크 마조워의 저작, 『암흑의 대륙』은 ‘논쟁적인 문제작’이라는 책의 홍보와는 달리 유럽 현대사의 개설서에 가까운 책이다. 물론 개설서가 논쟁적인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2010년의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이 ‘충격’을 주거나 혹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거나, 정반대로 극심한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1998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마조워가 이 책의 집필을 시작한 것은 1993년이다). 그러나.

 

끝없이 끓어오르는 증오감과 억누르지 못할 혈기가 지배하는 인간의 물결. 종종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에 맞춰서 호전적인 합창이 이어진다. 곧이어 단상 위에 누군가가 올라서자 주변은 침묵에 젖어든다. 이 종족의 족장으로 보이는 그 인물은 가장 화려한 복장을 하고서 열정적인 목소리로 좌중의 흥분을 배가시킨다. 주문과 같은 선언, 아니 선언과 같은 주문. 이 ‘의식’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종족이 얼마나 강한지를 재차 확인하고서 척결해야할 이웃 종족의 마을로 향한다. 전사들은 지휘자의 명령에 두려움 없이 적진으로 향할 것이다. 그들의 종족은 태생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패배란 없다. 그런데, 이 전사들의 손에는 창이나 활, 칼이 아닌 Kar 98k가 들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족장은 검갈색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콧수염을 기른 사내다.

 

종족간의 싸움, 내전, 민간인 학살, 야만.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주로 아프리카에 적용시킨다. 물론 그 적용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법. 100년도 채 되기 전, 암흑의 대륙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바로 유럽이었다. 마크 마조워는 바로 그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도 매우 꼼꼼하게.


이 대륙에 드리운 암흑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소위 ‘싸이코’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 극단에 서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에는 이미 ‘야만적’인 인종주의가 하나의 보편이었다. 그리고 그 보편은 ‘전체주의’로 귀결되었다. 이 전체주의는 억압과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방조 때로는 적극적인 협조에 의해 더욱 강성해졌다.

 

제3제국은 단지 억압 위에서만 세워진 것도 아니었으며, 법 제도의 작용으로만 유지된 것도 아니었다. 독일인 대다수가 히틀러를 지지한 것도 아니지만, 그에게 저항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를 받아들였고, 이 체제는 정상적인 삶의 일부가 되었다. (65쪽)

 

서구 사람들은 이런 대학살에 치를 떨었지만, 애초에 근동[아라비아, 북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발칸 등을 포함하는 지역]의 다민족 사회에 민족국가라는 서구적 개념이 도입되면서, 그들이 무엇보다 먼저 대량 학살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95쪽)

 

그러므로 ‘당시에는 나치 정권이 특별히 비정상적인 정권이 아니었으며, 인종 청소라는 정책을 최초로 시도한 정권도 아니었다’(93쪽)라는 마조워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추축국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도 민주주의 승리도 아니었다. 결과로서 민주주의가 도래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 책이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분열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 드라마 ‘Band of Brothers’가 묻는 ‘Why we fight’(이 드라마 시리즈의 9편), ‘Medal of Honor’와 같은 전쟁 게임이 보여주는 추축국과 연합군의 이미지, 그리고 불타는 교회의 입구를 막으라는 ‘명령’을 충실히 행했을 뿐이라는 순진한 표정의 가련한 여인(영화 ‘더 리더’ 中)을 보라. 어쩌면 마조워는 유럽인들이 ‘그러했다고’ 믿고 싶어 하는 환상을 깨부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생산되는) 이미지들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마조워의 ‘파괴행위’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분열’일 뿐이다.


이 책은 개설서에 가깝지만, (옮긴이의 평대로) 거시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마조워는 세세한 사료들을 섭렵하고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간다. 게다가 거대 구조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미시적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거시적 움직임 또한 생동감 있는 사료와 인용을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결핍’은 당의 지배에 위협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당 권력의 기본 요소였다. 당에 가입하거나 협조하는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족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378쪽)

 

1960년대 초가 되면 광고는 한발 더 나아가 여성들을 ‘젊은 어머니’와 나이 든 부인들, 그리고 젊고 섹시한 세련된 미혼 여성으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410쪽)

 

  고발이나 사찰의 공포가 가족, 심지어 잠재의식에까지 침투했다. 1934년 45세인 한 독일인 의사의 꿈이 이를 잘 말해준다. 

 

저녁 9시 정도 된 것 같다. 진찰이 모두 끝나고 소파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피로를 풀기 위해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방이 사라지더니, 곧 아파트가 사라져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두렵게도 내 시야가 미치는 곳 어디에도 아파트 벽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벽을 제거하라는 이번 달 17번째 포고령에 따라......".

 

꿈을 기록한 뒤에 그 의사는 또 한 번 이 꿈을 기록한 사실 때문에 고발당하는 꿈까지 꾸었다. 이제 잠조차 사적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62쪽)

 

전후의 시기를 넘어 마조워는 유럽의 민족국가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의 세계화가 유럽에서 민족국가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538쪽)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소속감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민족주의는 더이상 유럽의 평화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럽이 현실적 겸양만 갖춘다면, 굴곡이 심한 이 민주주의의 역사는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만약 유럽인들이 유럽에 대한, 작동 가능한 하나의 정의를 발견하고자 하는 무모한 욕구만 포기한다면, 그리고 세계에서 좀 더 소박한 지위를 수용할 수만 있다면,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있을 다양성과 차이를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540쪽)

 

하지만 마조워의 낙관론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할 수만은 없다. 마조워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전쟁들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유럽의 열강은 서로 군사적 경쟁자라기보다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견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다분히 결과론적 해석이라는 의심이 든다. 이렇게 바라본다면 세계 1차대전 또한 발발하지 않을 ‘그만한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현재의 위험요소를 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마조워는 이런 ‘과장’들을 종종 비판하고 있다), 과소평가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특히 그것이 결과론적 해석에 의지하는 것이라면, ‘역사가의 속편함’이 또 다시 도마에 오를 수 있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낙관론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순한 비관보다는 그 비관을 바탕으로 한 낙관이 훨씬 낫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또 역사가 단순히 반복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마조워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치의 제국주의는 유럽인들이 과거에 아시아나 아프리카, 특히 아메리카에서 저질렀던 폭력과 인종차별을 유럽에 가져왔다’(251쪽)는 마조워의 반성/비판을 효과적으로 소화한다면, 조금이나마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을 놓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이 기억력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모두 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억력을 위해서는 역사가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 기타 문제제기

1. 마조워가 사용하는 민주주의는 곳곳에서 다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2. ‘영국의 가치는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자유주의적이었다. 또한 분명 인종주의가 존재했지만, 영국의 인종주의는 생물학보다는 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114쪽) 이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문화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생물학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보다는 낫다.. 라고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150~151쪽에서 제시되는 헉슬리의 관점을 살펴보자면, 그가 숭배한 우생학은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3. 파시즘에 대한 문제제기. 39쪽. 파편화가 파시즘을 부추긴 요인이라면, 파시즘은 어떻게 파편화를 극복하였는가?
4. 민족주의 혹은 민족국가에 대한 이중관점.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묘사할 때 마조워는 민족이 허상에 가깝다는 의견을 넌지시 내비친다. 그러나 그가 현재의 상황을 묘사할 때와 같이 개념이 ‘허상’이라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 신자유주의에 대한 평가. 영국 노동당의 승리가 과연 신자유주의의 패배인가? (이것은 이미 그렇지 않다고 증명된 것이기는 하지만)
6. '효율적인 살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이것이 비판의 중심에 설 수 있는가? '비효율적인 살인'은 효율적인 살인보다 나은가?

 

이 역시 전체 페이지가 600이 넘는 책. 요새 두꺼운 책들을 연달아 읽어 좀 지치기는 한데... 이렇게 많은 분량, 긴 호흡의 글을 지치지 않고 끌어 갈 수 있는 저자의 힘에 놀라게 된다. 그만큼 이 책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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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쿳시 지음, 조규형 옮김 / 책세상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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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개월 동안 진행됐던 '로빈슨 크루소 읽기'의 마지막 단계.

근대적 인물인 로빈슨 크루소에 대비되는 인간형 방드르디를 내놓았던 트루니에와는 또 다르게, 쿳시는 해체와 재구성을 이야기한다.

원작의 작가 다니엘 디포는 원래 아버지의 성이 Foe였는데, 대륙의 플랑드르 가문이었던 점을 의식해 지은 필명이 Defoe라고 한다.

불어의 'de'는 영어의 'of'에 해당하는 것이자 영어에서는 또한 부정(not)의 의미도 있다고.

 

포를 통해 그(쿳시)는 작가로서의 한계와 의의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마지막 4장에서는 포의 목소리와 어떤 사실적인 목소리마저 지우고 있는데, 이는 사실주의를 대치하려는 실험이자 하나의 목소리에 의존하지 않는 내러티브가 가능한가를 시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말라. 약자가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신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기회, 이른바 마이크를 주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이러한 최근의 논지들을 극화해 보여주는 것이 바로 <포>이다.

 

조금은 지루했던 중반부에 비해, 막판에 와서 왜 그렇게 멍한 느낌을 줬는지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듯 하게 느껴진다.

 

어쨌거나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 주인공과 벙어리 프라이데이의 등장이다.

침묵과 고집으로 일관하는 남성 크루소와는 달리, 주인공은 '다르게' 사고한다.

(하지만 그 '다름'이 여성성인가, 혹은 여성성으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이 부분은 이번 학기 여성사 수업을 듣는 나로써는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역사에서 소외된 여성이라는 존재. 소설에 결코 등장하지 않는 여성.

 

  당신은 나의 침묵과 프라이데이와 같은 존재의 침묵을 구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실수를 범하고 있어요. 프라이데이는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매일매일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에 대해 방어할 힘이 전혀 없지요. 제가 그를 식인종이라 하면 그는 식인종이 되지요. 제가 그를 세탁부라고 하면 그는 세탁부가 되는 거지요. 진실로 프라이데이는 누구인가요? 이렇게 대답하시겠지요. '그는 식인종도 아니고 세탁부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명칭에 지나지 않고 그의 정수를 건드리지도 못한다. 그 또한 의미 있는 실체이고, 그는 그 자신으로서, 프라이데이는 프라이데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그가 스스로에게 무엇이든 간에(도데체 그가 스스로에게 무엇이기나 한가요? 그가 어떻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죠?), 그가 세상에서 무엇이 되는지는 바로 제가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니 프라이데이의 침묵은 어찌할 수 없는 침묵이죠. 그는 침묵의 자식이고, 태어나지 않은 자식, 태어날 수 없는데도 태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자식이에요. 하지만 바이아와 다른 일에 대해 제가 침묵을 지키는 것은 선택한 것이고 스스로 결정한 것이에요. 바로 스스로 침묵을 지키는 것이지요.

 

소설가 포 앞에서 주인공은 침묵의 권리를 이야기한다.

'프라이데이는 프라이데이다'라는 배려가 실은 굉장히 가증스러운 폭력에 기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하지만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모두에게 '말하게 하라'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마이크를 넘기는 것만으로 가능한가?

모두가 '몸의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몸의 언어가 기존 체계의 완벽한 성을 넘어설 수 있는가?

여기서 다시 '해체'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문제제기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니니.

 

사실 독백으로 진행이 되거나, 혹은 대화속에서 일방적인 장황설이 이어지는 소설은 개인적으로 좀 힘들다.

이 책의 설정 자체는 괜찮았지만, 늘어지는 중간 부분의 내용과 서술은 좀 지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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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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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최규석의 팬이다.

둘리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던 그의 상상력(?)에도 감탄하고, 그 특유의 우울함과 문제의식을 좋아한다.

때로는 촌스럽다는 지적을 받는 그의 그림체나 색감도, 솔직히 내 취향이다.

'한겨레21'이었던가, 그가 연재하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아끼고 아껴서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한꺼번에 보겠다는 욕심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했다.

 

올해 여름에 단행본이 나왔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다. 보자마자, 인터넷 서점에서 바로 구입했다.

 

내 누이들의 이야기를 하면 도시에서 자란 그 또래의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어째서. 농활을 가고 노동현장에 투신할 만큼 그러한 이웃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세대들이 어째서 내 누이들을 신기해하는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그들이 본 것은 농민이고 노동자일 뿐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 누이들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나의 외로움이고, 모든 '원주민'들의 외로움일 것이다. 그들이 제 이야기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한 채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77년생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화석 같은 이야기들. 그의 이야기에는 가난과 외로움과 자기연민이 묻어있다.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자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특별히 만화를 꺼리는 분이 아니라면, 일독을 권한다. 짧은 단편들 속에서 당신은 하나의 장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존재하지만 여전히 잊혀져가는 원주민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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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최재봉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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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Marx's Concepts of Man'.

1961년 초판이 나왔던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이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일소시키기 위해 쓴 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의 목표와 그가 꿈꾼 사회주의의 내용이라며 제시되었던(즉 마르크스의 비판자들이 제시했던) 象이 오늘날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중략)...더욱 놀라운 것은 마르크스 철학을 '유물론'이라며 가장 맹렬하게 비난하는 이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동기가 물질적 이득을 향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주의를 비현실적이라 공격한다는 사실이다.

 

이 왜곡과 오해는 비단 자본주의를 주장한 이들의 것만이 아니었다.

 

사실 소련 공산당뿐만 아니라 개혁적 사회주의자들 또한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믿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또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 다른 패러다임의 사회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일 따름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주장을 했으나, 그것이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유물론자로 불리기 보다는 이상론자로 불리는 것이 타당하다.

 

개인들이 표현하는 삶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누구인가는 그들의 생산, 그러니까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와 그것을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독일 이데올로기> 中)

 

에리히 프롬의 주장대로 '사적 유물론은 인간이 생산하는 것이 그의 생각과 욕망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

인간의 주된 욕망이 최대한의 물질적 이득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부분을 보면 '소유냐, 존재냐'를 고민했던 에리히 프롬이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했던 것이 이해될 수 밖에 없다.

프롬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이 비판이 단순히 부의 집중과 노동자의 물질적 빈곤에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화폐는 이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전유하며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다. 화폐는 진정한 풍요이다. 하지만 화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창출하기만을, 자신을 구입하기만을 욕망한다. (<경제학 철학 수고> 中)

 

이 욕망은 결국 인간을 화폐라는 수단에 종속시키며, 화폐를 창출하기 위한 노동에서도 '소외'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하면서 괴로워하고 노동을 하면서 '비인간화'가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외친 '노동의 해방'은 일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활동'으로서의 노동을 할 수 있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핵심논의는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고 소외되며 의미 없는 것으로 노동을 왜곡시키고, 따라서 인간을 "불구적 괴물"로 변형시킨다는 데 있다.

 

이 짧은 소고는 아직까지도 소련과 중국이 건재하던(물론 미국도 건재하던) 냉전의 시기에 출간되었기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프롬은 주로 '독일 이데올로기'와 '경제학 철학 수고'를 중심으로 하되 '자본'의 일부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의 인간 개념을 설명한다.

조금 아쉬운 것은 대체 '왜' 마르크스가 왜곡되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왜곡이 자본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칭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궁금해진다.

 

친구에서 선물로 받아 읽게 된 책이었다. 나는 그 보답으로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선물했다.

조로증의 시대다. 서로를 친구라 부르는 나이 서른의 남성들이 모이면 그들은 주로 주식와 펀드, 그리고 '좋은 곳'을 이야기한다.

이 조로증의 시대에 맥주를 한 잔 따라 놓고 에리히 프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녀석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으로 느껴진다.

 

왜 우리는 이상을 외면하려고만 할까? 너무 쉽게, 그리고 빠르게 늙어버렸기 때문에? 이상을 보며 노력할 힘은 없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우린 너무 무리를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힘이 없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직은, 덜, 힘들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인내력은 생각보다 참 강하다. 하지만 인내가 습관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인내로서의 가치조차 가지지 못한다.

 

까딱했다가는 번역이 아주 엉망일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하지만 읽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어릴 때 별로 와닿지 않았던 에리히 프롬이 나이가 들 수록 와닿는다. 나의 문제일까, 시대의 문제일까?

무리하며 살지 말자. 새해들어 가장 많이 하게되는 생각이다.

어쩌면 이런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빨리 늙어버린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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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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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식인과 지성인은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던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식인이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라면, 지성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걸맞은 인격을 가지고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쉽게 감동하고 쉽게 흥분하던 그 신입생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말에 수긍했다. 하긴 ‘대학생은 지성인’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쓰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제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 단어들을 사전에서 뒤적거려 본다(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지성인 [知性人]

[명사]

1 지성을 지닌 사람.

지성인의 면모를 갖추다

대학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에티켓쯤 지니란다.≪이청준, 조율사≫

2 <철학>=호모 사피엔스.




지식인 [知識人]

[명사]

일정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 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전문가가 좀처럼 지식인으로 발전하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전문가의 그것에 머물러 버리는 것이 한 특징이라고 그는 말한다.≪이청준, 조율사≫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법정, 무소유≫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건대, 지성인과 지식인의 개념 사이에는 그처럼 심오한 간극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도 10년 전의 대학 신입생이 그 간극을 쉽사리 인정했던 것은 그가 순진무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가 아직 ‘쿨’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이제 시대는 더 이상 지성인과 지식인의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지식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쿡쿡 찔러볼 뿐이다. 이 현상은 ‘지식인’의 개념 혹은 위상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이 ‘섹시’해야 책이 어느 정도 팔린다는 건 이제 기정사실에 속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 따위의 제목보다는 ‘지식인의 죽음’이라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것이 더 ‘섹시’하다(실제로 이 책/기획의 최초 제목은 ‘우리시대 지식인의 초상(肖像)’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식인의 죽음’ 앞에 ‘민주화 20년’이라는 말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민주화하면 생각나는 인물들이 있다. 물론 권력에 항거했던 ‘민중’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민중은 얼굴도 이름도 없다. 때문에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인물들은 ‘지식인’들이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저항적 지식인들. 그런데 민주화가 ‘된’ 지 20년이 지나, 정작 그것을 앞장서서 추구했던 지식인들이 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책에 대한 나의 리뷰는, 때문에 매우 근본적인 곳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식인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2.

  이 책에도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지식인 위기론’에 관련된 질문을 받은 ‘지식인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로 답변을 시작했다’(71쪽). 그들(그러니까 경향신문사에서 지식인이라고 찾아갔던 이들)이 위기에 처했다고 평한 지식인상은 ‘인텔리겐치아형 지식인’이었다. 인텔리겐치아는 러시아어 intelligentsia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 원래 뜻은 말 그대로 ‘지식인’이다. 하지만 인텔리겐치아는 단순히 지식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향을 내포한 개념이었다. 사회에 비판적이고 혁명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을 인텔리겐치아라고 칭했던 것이다(두산백과사전 참조).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이 이런 개념으로서 지식인의 죽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뒤집어 생각하면 지식인의 삶 혹은 ‘살아있는 지식인’이 어떤 개념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접근하고 있는 지식인의 ‘생명’은 사회순응이 아니라 사회비판에 있는 셈이다.

 

  이 책에서 ‘지식인’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바로 ‘권력’이다. 목차만 찬찬히 뜯어봐도 그러하다. ‘정치권력과 지식인’, ‘경제권력과 지식인’, ‘문화권력과 지식인’…. 책의 전체 내용을 한 마디로 무리해서 요약하자면, 지식인과 권력, 이 두 단어를 사용하면 될 것 같다. ‘지식인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이든 간에, 지식인이 권력에 종속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던가?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대부분의 펜은 칼에 맞서지 않았다. 오히려 칼의 첨병이 되어, 칼이 묻힌 피를 닦아주거나 이제는 자리를 잡은 칼이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도록 잉크를 함부로 튀기고 다녔다. 그것은 어찌 보면 ‘펜’의 숙명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식인에 관련된 문제제기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그렇다면 권력에게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 수사는 누가 그를 죽였는가라는 ‘책임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은 죽은 이가 타살‘당했는가’ 아니면 자살‘했는가’하는 지점이다. 자살과 타살의 판단이 선 이후에야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유독 지식인의 죽음을 논할 때는 그 죽음이 타살인가 자살인가를 묻지 않는다. 지식인은 힘이 없으므로 타살당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인 것일까? 그러나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면 또 다른 영생이 열릴 경우, 우리는 자살을 의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권력으로 돌아가 보자. 정치권력/경제권력/문화권력에 ‘굴복’하거나 ‘종속’된 지식인이 권력을 ‘잃었는가?’ 내가 보기에 그들은 권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식인임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지식인계에서 권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 스스로를 대중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을 먹고 살기 위한 다른 ‘노동’과 동급으로 놓지도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교수님’이며 ‘박사님’이고 ‘선생님’이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지식인에게 종속되어 있다’라고. 배운 자가 아니면 권력을 얻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이 경제적 권력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문화적 권력이든 간에. 권력을 얻기 위해 혹은 권력을 유지/세습하기 위해 간판으로 걸 학위를 받아내고 자식을 유학보내고. 이런 현상이 지식인이 권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인가? 천만에.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권력이 지식인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지식인’을 추구할 뿐이다.




#3.

  지식인은 죽지 않았다. 지식인의 죽음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들은 더욱 강성하게 살아있다. ‘잡초와 같은 생명력’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민중? 맞다. 흔히들 잡초를 민중에 비유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민중의 것이 아니다. 그 끈질긴 생명력의 주인은 민중이 아니라 먹물들의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제일 빨리 감지하고는 그것에 적응할 준비를 시작하고는 했다. 변화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지식인들의 능력은 더 힘을 발휘하고, 그들의 ‘세습’은 더욱 견고해진다.

 

  그런데도 지식인의 죽음이 언급되는 것은, 지식인들을 만족시켜줄 그 무엇이 약해진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그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그것. 존경심. 그렇다. 이제 그 누구도 지식인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젠 더 이상 ‘이상적 지식인’(그러니까 저 10년 전의 대학 신입생이 바라보았던 ‘지성인’)을 믿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한데도 지식인들은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관심 없는 지식인의 생사를 논하고 있을 수밖에. 그러므로 이처럼 웃긴 기획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논하고 있다니. 마치 자신은 죽었다고 여겨지는 ‘지식인’이 아닌 것처럼.

 

  그럼에도 이 기획은 웃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먹물들이 더 ‘쿨’해질 징조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젊은 지식인들은 굳이 ‘존경’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모든 것에 대한 변명이 가능해질 것만 같다. 그것만이 지식인의 전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기엔, 되돌아올 답변이 너무나도 차갑고도 단순명료하다. ‘그럼 난 뭐 먹고 살라고?’ 그러니 한 때 ‘쿨가이’였던 푸코의 말도 이제 우리 젊은 지식인들에게는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




“지식인의 역할은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난 두 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지식인들이 공식화해 왔던 모든 예측과 전망, 지령, 그리고 프로그램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지식인의 역할은 다른 이들의 정치적 의지를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그 혹은 그녀 자신의 영역에서 분석을 수행하면서, 자명해 보이는 원리들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하고, 행위와 사고의 방식 및 습성을 흔들어 놓으며, 상투적인 믿음을 일소하고, 규칙과 제도들을 새롭게 파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들이]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행할 것을 요구받는 곳에서, 정치적 의지의 형성에 참여하는 문제입니다.” (푸코 · 둣치오 뜨롬바도리, 『푸코의 맑스』, 이승철 옮김, 갈무리, 2004, 26쪽. )




  그렇다고 해서 젊은 지식인들이 권력에 소탈한 도인들인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존경을 바라지 않지만 그들 또한 지식인이고 싶어 한다. 아니 지식인이라는 애매한 칭호가 결코 ‘직업’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어떤 지식인도 지식인인 채로 대중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라는 고병권의 지적(219쪽)은, 또 다른 의미에서 촌철살인인 셈이다.




#4.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누구도 우리를 먹여살려주지는 않으니 이제 지식을 ‘파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일까? 어차피 먹물들의 자아비판인만큼,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해보자. 그래,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니 지식을 파는 행위를 무슨 버러지 보듯이 하지는 말자. 우린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이제 ‘존경’따위도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그런 허영에 넘치는 것도 얘기하지 말자(아직까지 존경에 미련을 둔 촌스러운 사람이라면, 존경에 걸맞는 지식과 실천을 보여 달라.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어떤 물건을 팔았는데 그것이 만든 이가 광고한 것만큼의 품질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소비자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 품질만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배상을 해줘야 한다. 아무리 신자유주의 시대라지만, 이런 상황에서 배상/보상을 하지 않을 자유를 외칠 정도는 아니니까.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상도(商道)를 지키지 않는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지식인이다. 대운하가 말도 안 된다고 자신의 권위에 기대어 주장하다가 순식간에 말을 바꾼다면, 자신이 앞서 기댔던 권위를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을 민영화해야한다고 강력 주장하는 교수라면, 자신이 속해있는 ‘국립대’부터 민영화하고 ‘고객’인 학생 앞에서 머리 숙여야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이 먹물들은 자신들이 시장논리와는 상관이 없는 ‘선비’인 줄 아는 모양이다.

 

  네이버 지식in에서 한 네티즌이 잘못된 답변을 내놓았다고 그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의 답변은 ‘무료’였으니까. 하지만 대학 교수는 무보수 명예직종이 아니다. 하다못해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더라도 그에게 지불되는 출연료의 일부에는 시청자가 납부하는 시청료가 들어가 있다. 그러니 이제 지식인들은, 그들이 결코 속한 적이 없는 ‘대중’들이 요구하는 ‘그 무엇’에 대해 쿨한 척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조금 더 배웠다는 이유로 생계를 보장 받는 사람이라면, 지식인이 아닌 척 쿨해서도 안될 것이다. 만약 자신의 변명대로 자신이 지식인이 아니라면, 그의 생계는 보장될 필요가 없다. 너무 먹고 사는 문제, 돈이 오고 가는 문제로만 ‘지식인의 죽음’을 논하고 있다고? 앞서서 얘기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고상한 지식인에 걸맞는 지식과 실천을 보여달라고.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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