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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 마르크스를 말하다
에리히 프롬 지음, 최재봉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원제는 'Marx's Concepts of Man'.
1961년 초판이 나왔던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이 마르크스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일소시키기 위해 쓴 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의 목표와 그가 꿈꾼 사회주의의 내용이라며 제시되었던(즉 마르크스의 비판자들이 제시했던) 象이 오늘날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중략)...더욱 놀라운 것은 마르크스 철학을 '유물론'이라며 가장 맹렬하게 비난하는 이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일을 하도록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동기가 물질적 이득을 향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회주의를 비현실적이라 공격한다는 사실이다.
이 왜곡과 오해는 비단 자본주의를 주장한 이들의 것만이 아니었다.
사실 소련 공산당뿐만 아니라 개혁적 사회주의자들 또한 스스로를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믿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공산주의(또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와 다른 패러다임의 사회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자본주의의 한 형태일 따름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주장을 했으나, 그것이 경제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유물론자로 불리기 보다는 이상론자로 불리는 것이 타당하다.
개인들이 표현하는 삶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누구인가는 그들의 생산, 그러니까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와 그것을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독일 이데올로기> 中)
에리히 프롬의 주장대로 '사적 유물론은 인간이 생산하는 것이 그의 생각과 욕망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
인간의 주된 욕망이 최대한의 물질적 이득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부분을 보면 '소유냐, 존재냐'를 고민했던 에리히 프롬이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했던 것이 이해될 수 밖에 없다.
프롬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이 비판이 단순히 부의 집중과 노동자의 물질적 빈곤에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화폐는 이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전유하며 모든 것을 구매할 수 있다. 화폐는 진정한 풍요이다. 하지만 화폐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창출하기만을, 자신을 구입하기만을 욕망한다. (<경제학 철학 수고> 中)
이 욕망은 결국 인간을 화폐라는 수단에 종속시키며, 화폐를 창출하기 위한 노동에서도 '소외'되기에 이른다.
노동을 하면서 괴로워하고 노동을 하면서 '비인간화'가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외친 '노동의 해방'은 일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활동'으로서의 노동을 할 수 있는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핵심논의는 부의 불공정한 분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고 소외되며 의미 없는 것으로 노동을 왜곡시키고, 따라서 인간을 "불구적 괴물"로 변형시킨다는 데 있다.
이 짧은 소고는 아직까지도 소련과 중국이 건재하던(물론 미국도 건재하던) 냉전의 시기에 출간되었기에 더욱 놀라운 것이다.
프롬은 주로 '독일 이데올로기'와 '경제학 철학 수고'를 중심으로 하되 '자본'의 일부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의 인간 개념을 설명한다.
조금 아쉬운 것은 대체 '왜' 마르크스가 왜곡되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왜곡이 자본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자칭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궁금해진다.
친구에서 선물로 받아 읽게 된 책이었다. 나는 그 보답으로 하워드 진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선물했다.
조로증의 시대다. 서로를 친구라 부르는 나이 서른의 남성들이 모이면 그들은 주로 주식와 펀드, 그리고 '좋은 곳'을 이야기한다.
이 조로증의 시대에 맥주를 한 잔 따라 놓고 에리히 프롬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녀석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으로 느껴진다.
왜 우리는 이상을 외면하려고만 할까? 너무 쉽게, 그리고 빠르게 늙어버렸기 때문에? 이상을 보며 노력할 힘은 없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우린 너무 무리를 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힘이 없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직은, 덜, 힘들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인내력은 생각보다 참 강하다. 하지만 인내가 습관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인내로서의 가치조차 가지지 못한다.
까딱했다가는 번역이 아주 엉망일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책이다. 하지만 읽는데 큰 지장이 없었다.
어릴 때 별로 와닿지 않았던 에리히 프롬이 나이가 들 수록 와닿는다. 나의 문제일까, 시대의 문제일까?
무리하며 살지 말자. 새해들어 가장 많이 하게되는 생각이다.
어쩌면 이런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 빨리 늙어버린 사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