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리버럴리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트랜스 소시올로지 3
알프레두 사두-필류.데버러 존스턴 지음, 김덕민 옮김 / 그린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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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들어보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 책은 그 모호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문서로서 적절한 책이다. 내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탈정치의 외피를 뒤집어쓴 정치기획’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우선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탈정치가 정치적인 기획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적 기획’이 ‘경쟁’과 ‘도덕’을 어떻게 왜곡하여 이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1. ‘탈정치’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열렬한 믿음을 강조한다. 시장은 그 자체로 자기 완결적이며,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경제적 주체들이 건전한 경쟁을 거친다면 모두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믿음’이다.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개입’이라는 말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정치가들은 장기적인 손실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개입을 한다고 생각한다. 즉 정부의 시장 ‘개입’은 정치적인 의도로 시도되는 것이며, 그것은 일종의 ‘악’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그리하여 정부의 개입, 공기업, 복지제도 등은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그 부정 속에는 ‘탈정치’라는 논리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 논리’라는 말은 굉장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띤다. 정치 논리라는 말은 주로 ‘본질은 외면한 채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최근 현 대통령의 발언만 살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7일 논란이 되고 있는 세종시 수정 계획과 관련, “실질적 국가발전과 지역발전 관점에서 볼 뿐 정치적 논리는 없다”고 말했다.
(데일리 경제, 2009. 12. 8)


 

  이와 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탈정치’를 고수하며 ‘경제논리’의 지배를 선언한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클린턴이 내세웠던 캐치프레이즈는 ‘It's the Economy, stupid!’였다. 미국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북풍이니 총풍이니 색깔론이니 하는 말들이 나돌던 기존 대선의 양상과는 차별적으로, 지난 17대 대통령 선거의 유일한 키워드는 ‘경제’였다. 그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든 없든, 국정에 대한 비전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유권자들은 경제만 살린다면 모든 것을 눈감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현 대통령은 ‘불도저 정신으로 각종 사업을 일으킨 CEO’라는 이미지로 당선이 되었다. 이제 정치는 경제와 완전히 분리된 영역일 뿐만 아니라, 경제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주가가 얼마인가에 달려있다는 말이 그저 농담일 수만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와 더불어 특히 공기업과 복지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실제로 그 두 가지가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영화된 모든 기업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경제학적’으로 명확히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사영화는 각 분야마다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 노동조합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랜드, 기륭전자, 쌍용자동차부터 최근의 철도노조까지, 기존의 ‘노동운동’의 부정적 이미지는 이제 더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파업의 권리를 행사하는 노동자들은, 이제 불법행위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비합리적’ 집단으로 간주된다. 그에 비해 공권력까지 투입하여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진압한 정부는 ‘원칙’을 지켜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허준영 사장 등 코레일(한국철도공사) 경영진과 정부는 이번 노조의 집단행동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철도노조는 ‘원칙을 지킨 힘’에 손을 든 것이다. 코레일은 파업을 주도한 199명을 경찰에 고소했고 민사상 손해배상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1일 이번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한 데 이어 다음 날 이명박 대통령이 코레일 비상상황실을 직접 방문해 엄정한 대응을 강조했다. 정부가 쌍용자동차 파업에 이어 철도노조 파업에서도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 일각의 잘못된 노동운동 관행을 바로잡는 중요한 전기(轉機)가 될 수 있다.
(동아일보 사설 ‘철도노조, ‘원칙 지킨 힘’에 손들었다’, 2009. 12. 4)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후 처리도 경제적 방법(민사상 손해배상)으로 압박을 가하는 방법이 선택된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이 ‘경제논리’라는 교의를 바탕으로 평가되며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정치’는 소외된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탈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즘은 '경제적 탈규제' 모델이 전혀 아니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민간 주도'[모델]를 촉진하는 것도 아니다. 비개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베일 하에서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회적 영역에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개입을 하고 있다.

 

2. 신자유주의의 ‘정치논리’

 

  질문에 답하기 전에, 앞서 언급했던 ‘사영화’라는 단어부터 살펴보자.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사영화’라는 단어보다는 ‘민영화’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수사다. 영어를 번역하였을 때 오히려 ‘사영화’가 걸맞지만, ‘民’이라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전체’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저임금을 예로 들어보자. 경제논리로만 따지자면 노동에 대한 합당한 임금은 시장이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최저임금 같은 것은 국가가 나서서 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니,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한 개인의 10시간 노동이 어떻게 화폐와 1:1로 교환될 수 있는가?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과 화폐의 교환은 경제적인 논리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때문에 현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과장 / 왜곡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치적인 행위들의 지배를 받는다. 세금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인 예다. 감세 혜택은 최상위 계층에게만 돌아감에도, 그것을 교묘히 포장하여 이전 정권을 비난하거나 자신들의 정책을 옹호하는 데에 사용한다. 그리고 각종 국방비나 토건비(현재의 4대강 사업이 대표적) 예산의 증액, 그로 인한 보건 복지비의 감액에 대한 설득 또한 전혀 경제적인 근거가 없이 ‘정치적’인 논리로 일관한다. 일부 대기업 (소유주)의 탈세를 무죄 처리하는 것 또한 경제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행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현재 정치적 행위를 통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은 탈정치를 외친다.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의조차 지키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전인수 격으로 포장하고 밀어붙인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이 책에도 제시된 농업 분야의 신자유주의에서도 볼 수 있었던 점이다(이 책의 14장).


  따라서 앞서 던졌던 ‘우리는 정말 탈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에, 바보 같은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선거는 경제행위가 아닌 정치행위이다.’ 이 바보 같은 답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비로소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그것의 맨 얼굴에 어떠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일까?

 

정치경제학의 논증은 직관과 주장보다는 엄격한 분석에 기초하게 되었지만 정치경제학의 힘은 그들의 분석적 엄격함보다는 이데올로기적 호소에 의존한다.


 
3. ‘경쟁’이라는 함정 - 개인으로의 환원과 도덕적 비난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강조한다. 대내적으로는,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통하여 우수한 개체들이 살아남는 것이 결국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에 비해 대외적인 무역의 차원에서는, 모든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국제무역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이 책의 4장). 하지만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자체 모순을 가진 신화에 불과하다. 만약 모든 국가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 이익을 얻는다는 주장이 옳다면, 2004년 기준 전 세계 186개국 중 세계무역의 80%를 차지하는 것이 단 25개국이라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경쟁이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옳다면,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영국에서 불평등 지수가 가장 커졌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론적 분석 속에서조차 ‘계급’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 그들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공정한 경쟁’이라는 시장의 ‘도덕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주류경제학적 비판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면서, 자본주의 시장의 약점에 재주목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조차도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 계급 분할과 권력의 함의를 인식하는 것을 꺼린다. 그들은 이론적 분석 속에서 사회계급에 대한 단순한 언급조차도 꺼린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쟁’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개인의 몫으로 환원시킨다. 사회에는 다양한 변수-외부요인-가 존재함에도, 그것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 탓으로‘만’ 돌린다. 취직이 되지 않으면 ‘스펙’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게으르기 때문에.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의 이 든든한 방패는 다시 매우 효과적인 무기로도 사용된다. 즉 모두 개인의 능력에 달린 일이기 때문에 복지는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세금낭비’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경기도지사의 “학교가 무료 급식소는 아니다”(연합뉴스, 김문수 "학교 무료급식이 대표적 포퓰리즘", 2009. 12. 2)라는 발언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비난은 ‘도덕적인 영역’으로 확대된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 미혼모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전통적인 가정을 수호하려는 신우파의 공격에 의해 축소되었다. 물론 이들 신우파가 모두 신자유주의자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이 경제 ․ 복지정책과 연결되는 경우, 도덕적 타락은 경제적 궁핍의 원인으로 왜곡되고, 복지는 개인의 책임과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신우파는 무엇보다 핵가족을 방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도덕개혁조직들은 이 논쟁에서 성도덕의 문제를 중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낙태에 반대하는, '도덕성' 정치는 '도덕성'의 문제가 신우파의 경제/복지정책과 명확한 연결점을 찾는 경우 신자유주의적 의제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이는 대서양을 넘나들며 싱글맘을 복지도둑이라고 매도하는 데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도덕적 비난은 젠더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된 ‘게으름’ 또한 도덕적 비난과 연결된다. 보수언론들이 여전히 가난한 자의 성공기를 대서특필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것과 연관이 있다. 노년층 부양 또한 이런 방식으로 개인에게 떠밀어질 수 있다. 즉 ‘효’라는 도덕적인 가치를 내세워, 일정 부분 사회가 맡고 있던 노년층 부양을 개인에게 밀어버리고 그것을 맡지 않을 때 도덕적인 비난을 가하는 것이다(위에 언급한 경기도지사의 발언과도 연관이 있다. ‘밥은 집에서 먹이는 거지 학교에서 먹이는 것이냐?’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국가 생산력을 위해 아이를 낳자고 캠페인을 벌인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 본연의 모습이다). 이것은 앞 장에서 언급한대로, 경제적인 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이 부분은 뒤에 포스팅할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도덕적 타락은 경제적 퇴보의 원인으로 비추어졌고 복지 혜택은 개인의 자발적 노력과 책임을 질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시민이 소비자가 됨에 따라 집산주의와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도덕적 비난이 부조리한 사회조건에 대한 비판의 싹을 잘라버린다는 데에 있다. 이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공정한 시장’과 ‘도덕적 비난’을 성공적으로 세뇌시켜 모든 책임을 ‘알아서’ 자신에게 돌리게끔 만드는 경우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조차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행사하지 못하게(혹은 그럴 의지가 없도록) 만든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탈정치’ 전략과 그 맥락을 함께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양상은 더욱 심각한 것이다. 사회 혹은 정치에 비판적인 태도를 없애버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거의 동일한 계급 속에서 적을 찾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전체 파이가 부족하다는 위기의식을 (무한 경쟁이라는 수사를 사용하여) 한껏 고양시킨 뒤에 ‘분할’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 방법은 노동계에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취업 여부에 따른 분할, 국적에 따른 분할, 직종에 따른 분할, 고용안정 정도의 차이에 따른 분할, 중소기업과 대기업에 따른 분할, 성별에 따른 분할, 지역 분할 등이 그것이다(김태권 지음, 우석훈 해제, 『어린왕자의 귀환』, 돌베개, 2009, 170~181쪽). 노무현 정권 때부터 사용된 ‘귀족 노동자’와 같은 표현은 직종에 따른 분할, 최근의 쌍용자동차 사태는 고용안정 정도를 이용하여 분할의 방법을 사용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분할 전략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4. 전망

 

  그렇다면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한가? 사실 그 전망이 밝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제 ‘대의’가 설득력을 가지는 시대는 끝난 것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의 ‘혁명’은 기대하기 힘든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관적인 상황일수록 ‘국지전’이 중요하다. 우선 자신의 ‘계급’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행동’이라고 해서 그렇게 거창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남에 거주하는 최상위 계층들이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보수정당이 내세우는 것들과는 무관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정말 제대로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이기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의 맨얼굴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맨얼굴을 볼 수 있게끔 하는 시력은 경제논리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논리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국지전’의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참호를 점차 넓혀갈 의지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국제적 차원의 ‘현실적인 정치적 프로젝트’(p. 58)가 가능할 것이다. ‘연대’라는 말이 그저 낭만적으로 들릴 뿐이라면, 그것은 아직 우리의 국지전 준비가 덜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혹은 아직도 절실하지 않거나.

 

이 책은 서른 명에 가까운 학자들이 각자의 관점과 주제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비판/분석한 것이다. 그 비판의 방향이 모두 제각각이라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다양한 분석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고무적이다. 번역자가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의 비판자들 중에도 포스트 케인즈주의자, 칼레츠키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등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이러한 입장차는 신자유주의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완전히 판이하게 만든다. 어쨌거나,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신자유주의'를 한 번쯤 '공부'해본다는 생각에서,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 글의 호흡이 짧은 것이 좀 걸리지만, 입문서로서의 기능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읽어보자. 다음과 같은 각 저자들의 결론에 당신이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일단 당신이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니까.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은 반복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모델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비현실적인지를 드러내 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모델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다소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모델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루어져야할 세계를 다루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현실세계에 더 적절한 모델을 만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델에 맞게 적절하게 현실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적인 환상인 것이 아니며, 현실적 프로젝트이다.

 

무관심과 회의주의는 진보적 정치가 극복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행위에 다시 개입하는 것, 대안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개혁의 언어를 다시 되찾아 오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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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
데이비드 블랙번.제프 일리 지음, 최용찬.정용숙 옮김 / 푸른역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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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이라기 보다는 두 학자의 논문 하나씩을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책보다도 완결성이 있고 명확하다.

근대 역사의 '발전'에 있어 독일이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과는 다른 '특수한 길'을 걸어왔다는 기존의 신화를 비판한 글이다.

그 '특수한 길'은 '잘못된' 특수한 길로서, 이런 해석이 후에 등장하는 파시즘을 보는 관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두 학자가 이야기 하는 바는 굉장히 명확하다. '특수한 역사 발전을 거치지 않은 국가가 존재하는가?'

즉, 프랑스나 영국의 역사 진행과정이 비교의 '중심'에 서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던 시절만 하더라도(1980년), 그것은 전혀 당연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같은 논지를 전개하는 것 같은 두 학자의 '차이'를 음미하는 것에 있다.

조곤조곤 씹어가며 밥 알갱이의 단맛을 느껴가는 것 같은 데이비드 블랙번에 비해,

제프 일리는 냉면을 한 젓가락에 삼켜버리는 시원함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는 제프 일리의 스타일에 좀 더 끌린다.)

이런 '스타일'의 차이는 두 학자의 정치적 성향의 차이에도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도 해본다.

(제프 일리는 2002년에 유럽 좌파의 역사를 조망하는 매우 두꺼운 책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더 레프트'로 번역.

이 책의 저자인 두 학자 사이에는 부르주아지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여기에는 번역의 문제를 떼놓을 수 없지만, 그래도 스타일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스타일의 차이가 또 다시 글의 논지 전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한 너무나 흥미롭다.

 

'프랑스혁명은 너무도 거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형적일 수가 없었다'는 E.P 톰슨의 지적과 함께,

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리고 여기 멀리 한국에서도, 다음과 같은 서술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조선과 식민지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을 둘러싼 '근대화' 논쟁이 겹쳐 보이는 것은 나의 오버일 뿐인 걸까?

 

그런데도(독일의 역사가들이 시민혁명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음에도: 인용자) 독일 제국은 부르지아지에게 별 볼일 없는 지위만을 허락했던 "전산업적 지배"였다는 특이한 해석이 또 다시 나온다. 이는 "시민혁명"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민주주의 수준과 나란히 놓기 때문이다. 즉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라는 척도로 과거를 되돌아보기 때문에 제정 독일은 어쩔 수 없이 "후진" 국가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를 유럽의 역사 전개에 내재된 주요 목표로 보는 한, 진보된 사회구조와 퇴행적 정치 사이의 "불일치"를 발견하는 일은 계속된다. …… 이 테제에는 "올바른" 발전이라는 관념, 즉 "근대적"인 사회는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규범적 이해가 깔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독일 자유주의의 성숙이나 반동성 여부를 확인하는 데 외국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수상쩍다. 도대체 왜 한 나라에서 특별한 정치적 전통이나 정치운동이 형성될 때 그것들이 어떤 이상형과 일치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영국이든 독일이든 입헌 정부형태의 정치적 모델에 해당하는 자유주의가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필연적 이해 내지는 자본의 관철로부터 직접 나와야만 할 이유는 없다. 영국 역사의 전개 과정을 "산업화"와 "민주화"의 조화로 보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역사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승된 도그마의 문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자유주의적"인 것이 "부르주아적"인 것이라는 개념상의 혼란을 부추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 분명히 말해두지만 민주화에 관한 모든 공식적 기준에 의하면 "시민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립과는 직접적으로도, 인과적으로도 관계가 없었다. …… 달리 말하며 민주주의 정치로 가는 기회들은 부르주아지의 성공을 위한 조건이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불거진 모순에서 나온 것으로, 자본주의 발전이 만들어낸 새로운 상호 적대 세력들로부터 생긴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제프 일리. 이 다음부터는 데이비드 블랙번.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라는 랑케의 유명한 글귀는 역사가 어떻게 서술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역사가들이 19세기의 독일 역사를 서술해 온 방식은 "실제 일어나지 않은 그대로"라는 말로 특징짓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취급되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핵심은 자유방임정치나 영국의 길을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정상적인 길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상업이윤을 통한 자본의 장기적인 축적, 완전히 자본주의화 되고 상업화된 농업부문, 그리고 기업방식에 대한 전문지식의 점차적인 성장이란 특징을 갖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역사적으로 볼 때 도리어 흔하지 않은 경우였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자의식적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부르주아지라는 발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즉 그 발상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이념형을 상정하고 그것과 대조하여 일정한 민족적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행동을 평가하려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이 이행된 것과 시민혁명을 혼동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유럽 부르주아지의 정치를 간단히 주가株價 우위의 문제로 환원시켜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연속성과 관련된 실질적인 문제는 연속성의 "유무"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시각에서" 이 문제를 고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뜬금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학사'라는 분야는 정말 한 단계 위의 지적 놀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었던 책. 이제 '파시즘'을 읽으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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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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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실 이 정도 두께의 책은 읽기 전부터 부담이 생겨서 잘 시작을 못하는 게 사실이다.

물론 전체 600페이지 중에 각주 빼고 참고문헌 빼면 500페이지 정도지만.

하지만 예상 밖으로 이 책은 매우 읽기가 편했고 또 흥미진진했다.

 

저자인 팩스턴은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간단히 내릴 수 없으니 일단 파시즘의 행적을 살펴보자고 말한다.

 

  이 책의 목표는 파시즘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찾아냄으로써 파시즘이 지닌 고유한 매력과 그것의 복잡한 역사적 경로, 그리고 파시즘이 지닌 극단의 공포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하고, 이를 통해 파시즘이란 개념을 의미의 남용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다.

 

사실 2000년 즈음에 일었던 '일상적 파시즘' 등의 용어나, 촛불시위를 바라보는 걱정에서 언급되는 파시즘에 불만이 있었던 터라,

팩스턴의 이러한 집필 의도는 꽤 마음에 들었다.

팩스턴의 지적대로 그렇게 '개나소나' 다 파시즘이면, 진정한 파시즘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상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중심으로 기타 지역의 파시즘을 총체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파시즘의 가장 큰 특성은 '무정형성'이다. 그렇기에 파시즘을 단순하게 정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파시즘 체제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등장 과정과 정착 과정에 있어, 파시즘(혹은 그 지도자) 단독의 힘으로만 파시즘이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주변 정황과 타 세력들과의 관계, 그들의 반응 등을 면밀하게 관찰해야만 한다.

 

파시스트들이 대중의 승인을 얻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단계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중간계급을 설득해 파시스트의 폭력은 좌파의 도발을 막기 위한 필요악이라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교를 통해 살펴보면 파시스트들의 집권 성공 여부는 파시즘 지식인층의 명민함이나 파시즘 지도자들의 자질보다는 위기의 심각성이나 잠재적인 동맹 세력의 절박함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파시즘은 '정상화'의 과정을 거친다. 보수주의자들의 눈에 '좌파만큼은 위험하지 않은' 정상적 모습을 보이는 과정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위험한 것은 과격한 네오나치나 스킨헤드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쪽은 표현 수위를 조절하고 고전적인 파시즘 상징을 버림으로써 '정상적'으로 보이는 법을 배운 극우 운동이다.

 

아쉬운 점은 실패한 정상화인 무솔리니의 모습만을 자세히 보여줄 뿐, 그들의 성공과정은 그리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팩스턴은 매우 조심스러운 자세로 파시즘을 더듬어 간다.

한 인물이나 주변 정황만이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라는 변수도 있음을 강조하면서.

 

총통 개인의 기벽보다는 독일 국민이 그를 통해 이루려 한 것은 무엇이며 그가 거의 최후의 순간까지 수행했던 역할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포이케르트의 저작과 같은 연구들과 연결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파시즘엔 미시적 연구가 필수인듯.

 

이렇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라는 논지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극적인 회피로 끝나지는 않는다.

'명목론을 피한답시고 '단계'와 '과정'이라는 또 다른 명목론에 빠져버리는 위험'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파시즘에 대한 팩스턴의 간략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앞서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꼼꼼한 성찰을 통해 이끌어낸 탁월한 정의이기는 하지만,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팩스턴은 책의 뒷부분에서 기타 권위주의, 독재, 군부독재 등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이들이 왜 파시즘이 아닌지를 서술한다.

특히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는 부분은 '민주주의 성립 이전의 독재에는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부분이다.

팩스턴이 의도한 바는, 파시즘엔 '대중정치'가 필수적이므로 '민주주의'라는 기반이 없으면 파시즘도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칫 '서구중심주의'라는 오해를 살 여지가 충분히 있어보인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파시즘이 아니라고 가지쳐낸 독재, 군부독재 정부들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다.

저자가 제기하는 이유들이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사실 이렇게 접근하면 독재 또한 각 국가/정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파시즘'이라는 용어의 남용은 막을 수 있겠으나,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극단적으로 특수화시켜 버릴 위험이 생긴다.

 

미시적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겠다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적어도 최근 출판된 파시즘 연구서 중 몇 안되는 탁월한 저서임은 틀림 없다.

게다가 어렵지도 않고 재미까지 있으니 추천. 덤으로 노력에 비해 두꺼운 책을 읽었다는 자기만족도 크니 또 한 번 추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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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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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이용하여 새로운 창작을 시도한 미셸 투르니에의 작품.

무인도라는 이 작품들의 배경상, 작품에서 중요한 컨셉이 되는 것은 '타자의 부재'라는 주제다.

그러나 투르니에는 이 주제를 더 심오한 차원으로 끌어 올리고 있다.

 

그는 이제 인간이란 소요나 동란 중에 상처를 입고 군중에 밀리면서 떠받쳐 있는 동안은 서 있다가 군중이 흩어지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버리는 부상자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인간성 속에 지탱시켜 주고 있던 그의 형제들인 군중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물러가 버리자 이제 그는 두 다리에 의지하여 혼자 서 있을 힘마저 없어진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 세계의 가장 중요한 부품인 타인...... 그에게서 얼마나 대단한 덕을 보고 있었던 가를 나는 내 개인이라는 건물 속에 새로운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매일같이 헤어려보게 된다. ....(중략).... 인물들은 척도를 제공한다. 그 인물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감상자의 실제적인 관점에다가 필수 불가결한 잠재성을 추가하는 가능적인 관점들을 형성한다.

 

투르니에 자신도 지적하고 있듯이, 디포의 로빈슨은 일방적인 회고담이다. 이미 '승리'한 자의 후일담인 것이다.

반면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작품 속 현실에 존재한다. 이로 인해 이 로빈슨은 더욱 비극적으로 묘사된다.

디포의 로빈슨처럼 현실에 닥친 고난을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인간'상'이 아니라, 그냥 인간이다.

 

사실 그는 섬에 아주 정착하기 위한 작업 비슷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이 섬에 장기간 머무를 리 없다고 애써 믿으려 할 뿐만 아니라, 어떤 미신적인 두려움으로 인하여 이 섬 안에서 생활을 설계하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하게 되면 그것은 곧 빠른 시간 안에 구조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일이라고만 여겼다. 섬 안의 땅 쪽으로는 고집스럽게 등을 돌린 채 그는 머지 않아 구원이 찾아올 저 불룩하고 쇠붙이 같은 바다의 수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고독으로 인하여 비록 가장 보잘것없는 동물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에 대해 적의를 품은 감정의 표현 같다 싶은 것과 마주치면 무방비 상태가 되어 상처를 입었다. 손일을 하지 않으면 점차로 손에 박혀 있던 못이 풀리듯이 인간들이 그들 서로 간의 관계에 있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무관심과 무지의 갑옷이 그에게서 벗겨져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전개'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디포의 로빈슨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지루하다.

시점의 차이도 두 작품의 차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투르니에의 로빈슨이 누렸던 풍부한 잉크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다시 '타인의 부재'라는 전체의 주제와도 연관이 된다.

풍부한 잉크는 철저히 혼자였던 로빈슨에게 새로운 타자를 선사한다. 그리하여 그는 타인에게는 지루한, 자신이라는 심연에 빠져들었다.

타인의 부재. 그러나 결코 타인은 부재할 수 없다. 인간은 끊임 없이 타자를 생산하며, 문자와 언어는 그 생산을 부추긴다.

어쩌면 이 소설은 끊임없이 타인을 만들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슬프고도 기쁜 운명에 대한 찬사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면 여기쯤에서, '최초의 타인'이 되는 방드르디의 등장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총독으로서의 만족감, 문명을 지키기 위한 의식들, 그럼에도 로빈슨의 '문명'으로부터 탈주하는 방드르디.

폭발, 충격, 서서히 발견해가는 '다른 방드르디'. 서서히 드러나는 '본래의 로빈슨'.

 

  로빈슨은 뱃속이 뒤집히는 듯하여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노력과 두려움을 모르는 논리에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가 느끼는 예민한 구역질 등 그 모든 백인 특유의 신경 반응이 과연 최종적이며 고귀한 문명의 보증일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새로운 삶에 접어들기 위하여 언젠가는 팽개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될 죽은 찌꺼기일지를 자문해 보았다.

 

  로빈슨은 이 의문을 마음 속에서 몇 번이고 반추해 본다. 처음으로 신경에 거슬리기만 하는 이 천하고 바보 같은 혼혈아의 모습 저 속에 어떤 다른 방드르디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분명히 해본다. 마치 그가 옛날에, 동굴과 골짜기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통치된 섬 속에는 다른 섬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듯이.

 

이렇게 비록 소설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로빈슨과는 전혀 다른, 그리고 디포의 프라이데이와는 또 전혀 다른 방드르디가 등장하지만,

이 소설의 무게 중심은 결코 방드르디에게 넘어가지 않는다. 여전히 이 소설의 주인공은 로빈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로빈슨은 여전히(그리고 어쩔 수 없이) 혼자 결정하여 배를 떠나보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방드르디의 세계를 다시 이상화했다.

이것은 원주민을 주인공으로 삼고 또 그렇게 묘사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는 인류학자의 운명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 운명은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나 자신을 타자화 하는 순간이야 말로 가장 진지하고도 고독한 고통의 순간이다.

타자의 '없음'보다도 이것이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섬에 격리된 로빈슨이 비극적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우선 이런 소설을 기획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창작보다도 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렇게 단순히 비교할 문제는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결과물이 중요한 셈이다. -_-..)

김화영의 번역에는 불만이 없지만, '문학평론'이라는 것에는 역시나 거부감이 생긴다.

왜 한 작품을 평론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글이, 원작을 읽을 때 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그래서 뒷부분의 '논문'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꾸역꾸역 다 읽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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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대륙 - 20세기 유럽 현대사 커리큘럼 현대사 1
마크 마조워 지음, 김준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마크 마조워의 저작, 『암흑의 대륙』은 ‘논쟁적인 문제작’이라는 책의 홍보와는 달리 유럽 현대사의 개설서에 가까운 책이다. 물론 개설서가 논쟁적인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2010년의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이 ‘충격’을 주거나 혹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거나, 정반대로 극심한 ‘반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이 1998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마조워가 이 책의 집필을 시작한 것은 1993년이다). 그러나.

 

끝없이 끓어오르는 증오감과 억누르지 못할 혈기가 지배하는 인간의 물결. 종종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에 맞춰서 호전적인 합창이 이어진다. 곧이어 단상 위에 누군가가 올라서자 주변은 침묵에 젖어든다. 이 종족의 족장으로 보이는 그 인물은 가장 화려한 복장을 하고서 열정적인 목소리로 좌중의 흥분을 배가시킨다. 주문과 같은 선언, 아니 선언과 같은 주문. 이 ‘의식’을 통해 그들은 자신의 종족이 얼마나 강한지를 재차 확인하고서 척결해야할 이웃 종족의 마을로 향한다. 전사들은 지휘자의 명령에 두려움 없이 적진으로 향할 것이다. 그들의 종족은 태생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패배란 없다. 그런데, 이 전사들의 손에는 창이나 활, 칼이 아닌 Kar 98k가 들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족장은 검갈색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콧수염을 기른 사내다.

 

종족간의 싸움, 내전, 민간인 학살, 야만. 우리는 이런 이미지를 주로 아프리카에 적용시킨다. 물론 그 적용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법. 100년도 채 되기 전, 암흑의 대륙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바로 유럽이었다. 마크 마조워는 바로 그 사실을 지적한다. 그것도 매우 꼼꼼하게.


이 대륙에 드리운 암흑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같은 소위 ‘싸이코’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 극단에 서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럽에는 이미 ‘야만적’인 인종주의가 하나의 보편이었다. 그리고 그 보편은 ‘전체주의’로 귀결되었다. 이 전체주의는 억압과 폭력의 수단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방조 때로는 적극적인 협조에 의해 더욱 강성해졌다.

 

제3제국은 단지 억압 위에서만 세워진 것도 아니었으며, 법 제도의 작용으로만 유지된 것도 아니었다. 독일인 대다수가 히틀러를 지지한 것도 아니지만, 그에게 저항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를 받아들였고, 이 체제는 정상적인 삶의 일부가 되었다. (65쪽)

 

서구 사람들은 이런 대학살에 치를 떨었지만, 애초에 근동[아라비아, 북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발칸 등을 포함하는 지역]의 다민족 사회에 민족국가라는 서구적 개념이 도입되면서, 그들이 무엇보다 먼저 대량 학살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95쪽)

 

그러므로 ‘당시에는 나치 정권이 특별히 비정상적인 정권이 아니었으며, 인종 청소라는 정책을 최초로 시도한 정권도 아니었다’(93쪽)라는 마조워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추축국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도 민주주의 승리도 아니었다. 결과로서 민주주의가 도래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 책이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고 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분열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 드라마 ‘Band of Brothers’가 묻는 ‘Why we fight’(이 드라마 시리즈의 9편), ‘Medal of Honor’와 같은 전쟁 게임이 보여주는 추축국과 연합군의 이미지, 그리고 불타는 교회의 입구를 막으라는 ‘명령’을 충실히 행했을 뿐이라는 순진한 표정의 가련한 여인(영화 ‘더 리더’ 中)을 보라. 어쩌면 마조워는 유럽인들이 ‘그러했다고’ 믿고 싶어 하는 환상을 깨부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오늘날에도 계속적으로 생산되는) 이미지들에 큰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으면서도 마조워의 ‘파괴행위’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분열’일 뿐이다.


이 책은 개설서에 가깝지만, (옮긴이의 평대로) 거시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마조워는 세세한 사료들을 섭렵하고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간다. 게다가 거대 구조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미시적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거시적 움직임 또한 생동감 있는 사료와 인용을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측면에서 ‘결핍’은 당의 지배에 위협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당 권력의 기본 요소였다. 당에 가입하거나 협조하는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부족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였다. (378쪽)

 

1960년대 초가 되면 광고는 한발 더 나아가 여성들을 ‘젊은 어머니’와 나이 든 부인들, 그리고 젊고 섹시한 세련된 미혼 여성으로 구별하기 시작했다. (410쪽)

 

  고발이나 사찰의 공포가 가족, 심지어 잠재의식에까지 침투했다. 1934년 45세인 한 독일인 의사의 꿈이 이를 잘 말해준다. 

 

저녁 9시 정도 된 것 같다. 진찰이 모두 끝나고 소파에 앉아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피로를 풀기 위해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에 대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방이 사라지더니, 곧 아파트가 사라져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두렵게도 내 시야가 미치는 곳 어디에도 아파트 벽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벽을 제거하라는 이번 달 17번째 포고령에 따라......".

 

꿈을 기록한 뒤에 그 의사는 또 한 번 이 꿈을 기록한 사실 때문에 고발당하는 꿈까지 꾸었다. 이제 잠조차 사적 영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62쪽)

 

전후의 시기를 넘어 마조워는 유럽의 민족국가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본의 세계화가 유럽에서 민족국가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538쪽)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소속감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민족주의는 더이상 유럽의 평화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럽이 현실적 겸양만 갖춘다면, 굴곡이 심한 이 민주주의의 역사는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만약 유럽인들이 유럽에 대한, 작동 가능한 하나의 정의를 발견하고자 하는 무모한 욕구만 포기한다면, 그리고 세계에서 좀 더 소박한 지위를 수용할 수만 있다면,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있을 다양성과 차이를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540쪽)

 

하지만 마조워의 낙관론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할 수만은 없다. 마조워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전쟁들이 전면적으로 확대되지 않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오늘날 유럽의 열강은 서로 군사적 경쟁자라기보다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견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다분히 결과론적 해석이라는 의심이 든다. 이렇게 바라본다면 세계 1차대전 또한 발발하지 않을 ‘그만한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다. 현재의 위험요소를 과장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마조워는 이런 ‘과장’들을 종종 비판하고 있다), 과소평가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특히 그것이 결과론적 해석에 의지하는 것이라면, ‘역사가의 속편함’이 또 다시 도마에 오를 수 있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낙관론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단순한 비관보다는 그 비관을 바탕으로 한 낙관이 훨씬 낫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고, 또 역사가 단순히 반복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마조워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치의 제국주의는 유럽인들이 과거에 아시아나 아프리카, 특히 아메리카에서 저질렀던 폭력과 인종차별을 유럽에 가져왔다’(251쪽)는 마조워의 반성/비판을 효과적으로 소화한다면, 조금이나마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을 놓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이 기억력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모두 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기억력을 위해서는 역사가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 기타 문제제기

1. 마조워가 사용하는 민주주의는 곳곳에서 다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2. ‘영국의 가치는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자유주의적이었다. 또한 분명 인종주의가 존재했지만, 영국의 인종주의는 생물학보다는 문화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114쪽) 이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문화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생물학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보다는 낫다.. 라고 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150~151쪽에서 제시되는 헉슬리의 관점을 살펴보자면, 그가 숭배한 우생학은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3. 파시즘에 대한 문제제기. 39쪽. 파편화가 파시즘을 부추긴 요인이라면, 파시즘은 어떻게 파편화를 극복하였는가?
4. 민족주의 혹은 민족국가에 대한 이중관점.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을 묘사할 때 마조워는 민족이 허상에 가깝다는 의견을 넌지시 내비친다. 그러나 그가 현재의 상황을 묘사할 때와 같이 개념이 ‘허상’이라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혹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5. 신자유주의에 대한 평가. 영국 노동당의 승리가 과연 신자유주의의 패배인가? (이것은 이미 그렇지 않다고 증명된 것이기는 하지만)
6. '효율적인 살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이것이 비판의 중심에 설 수 있는가? '비효율적인 살인'은 효율적인 살인보다 나은가?

 

이 역시 전체 페이지가 600이 넘는 책. 요새 두꺼운 책들을 연달아 읽어 좀 지치기는 한데... 이렇게 많은 분량, 긴 호흡의 글을 지치지 않고 끌어 갈 수 있는 저자의 힘에 놀라게 된다. 그만큼 이 책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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