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생을 마치려 합니다 - 유서와 자살에 관한 한 연구
우도 그라스호프 지음, 배진아 옮김 / 해토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제목이 좀 그런가? -_-;; 부제 역시 '유서와 자살에 관한 한 연구'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와도 연관이 있을 것 같아서 샀던 책이다.
표지만 봐서는 그냥 그런;; 책일 줄만 알았는데 읽어보니 그렇진 않았다.
 
처음 40페이지 정도는 자살에 대한 간략한 분석이 이뤄져 있다.
저자가 자살에 관해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인만큼 피상적인 이해에서 확실히 탈피한 느낌.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몇 가지 중에 한 가지는 뒤르켐 연구의 문제점이다.
 
그러나 듀르크하임이 실시한 연구에도 한 가지 문제점은 있다. 그것은 바로 듀르크하임이 소위 우려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는 자살률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의 손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통계수치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살 건수의 증가를 오로지 사회적인 타락현상의 결과로서만 간주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동 사망률 감소 하나만 하더라도 1871년과 1950년 사이에 자살률을 25퍼센트나 증가하게 했다.
 
결국 자살률은 '률'일 뿐이라는 얘기.
또한 자살률을 전반적인 사회현상을 나타내는 척도로 사용하려는 태도도 문제가 있으며
자살 동기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살률을 '척도'로 사용하는 것은 나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과연 자살률이 낮으면 잘 사는, 행복한 사회일까? 그렇게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음에도 많은 경우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전쟁 기간에 자살률이 급감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좀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자살률을 '척도'로 단순하게 환원하는 것도 극단적이긴 마찬가지.
 
저자의 간단한 분석이 끝난 뒤 총 50편의 유서 원문이 실려 있다.
1959년에서 1989년 사이, 동독과 서독에서 발견된 유서들.
그리고 그 유서들 뒤에는 간단한 정황 설명이 되어 있다.
분석 부분에서는 책장이 빨리 넘어 갔는데, 이 유서 원문들을 접하면서 책장이 더디게 넘어갔다.
왠지 모르게 힘들고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던 듯.
뭐.. 내가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해서 읽은 탓도 있겠지만;;
저자의 말대로, 완전한 좌절감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느낌이기 때문이다.
 
자살이나 유서에 대해 조금 더 넓은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 책이랄까.
표지 디자인을 더 잘했으면 더 관심을 끌 수 있을 책이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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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이 귀엽게 생긴 책은 하워드 진의 극본이다. 부제처럼 '역사모노드라마'이기 때문.
극본 하워드 진, 번역 윤길순, 출연 마르크스. (원제는 'Marx in soho')
 
마르크스의 독백과 마르크스의 부인이었던 예니의 구박^^;들을 읽고 있으면 웃음이 나올 정도.
읽으면서 에~설마~했었는데, 이 극본은 실제로 워싱턴, 미네소타 등등 여러 곳에서 공연되었다고.
마르크스. 이 이름을 한국에서의 나는 어떻게 들어왔을까.
'공산당 선언', '자본론'. 단 한 글자도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주저리 주저리 말은 많지 않았던가.
 

이 극본에서 마르크스가 강조하고 있는 것을 굳이 들이대지 않더라도
현재의 북한, 또 스탈린의 소련이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 공산주의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무식한 나로서도 단호히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상한 오해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내, 건너들은 이야기인데 최근 민노총의 발간물 중에 조선일보가 딴지를 걸어 문제가 된 것이 있댄다.
문제의 내용은 조선일보가 말하길 '북한 사상'이 들어가 있다는 거였는데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난 상대에게 반사적으로 물었다.
과연 '북한 사상'이란 게 뭘까? 솔직히 난 배운 적도 없고 자세한 내용도 모르는데.
그런데 '뻘건색'만 보면 치를 떠는 조선일보 아저씨들은 참 잘도 안다.
그렇담 결국 걔네들은 읽고 보고 다 했다는 얘긴데, 그럼 쟤네들이 더 위험한 놈들 아닌가?
아니면, 하나도 모르면서 그랬다는 말일까? 어느 쪽이든 위험하기는 매한가지.
왜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정보는 다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정보는 모두 부정해버리는 걸까?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예니의 구박이었지만, 어쨌거나 핵심은 가장 마지막 부분.
 
  내가 제안 하나 하겠습니다. 일단 여러분 엉덩이에 뾰루지가 났다고 가정하세요. 그래서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으면 너무 아파서 당장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은 움직여야 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맙시다. 그냥 이 지구의 엄청난 부를 인류를 위해 쓰자고 합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도록 합시다. 식량과 의약품,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나무와 풀, 즐거운 가정, 몇 시간의 노동과 그보다 많은 여가 시간을 줍시다. 그리고 그걸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인간은 누구나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마지막에 부록처럼 실려있는 예니가 1844년 파리에서 마르크스에게 썼던 편지도 인상 깊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지 느껴지는 그런 편지.
 
그건 그렇고... 책이 쬐끔 비싸긴 하다. 170페이지도 안되는 책인데 9,800원이라...
내가 양장본을 좀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런 책은 들고 다니면서 보기 편하게
그냥 소프트 커버로 나오는게 나을듯하다.
그리고 중간에 한 40페이지 정도 핑크색 종이로 바뀌는데 이건 대체 영문을 모르겠다는;;;
 
아직 하워드 진의 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데,
'미국민중저항사'나 '오만한 제국'은 한번쯤 읽어봐야 겠다.
내가 좋아하는 말들 중의 하나도 하워드 진의 것이니만큼.
 
'내겐 포기할 권리가 없다.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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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 동양문화산책 6
전여강 지음, 이재정 옮김 / 예문서원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미주를 제외하고 200페이지 정도 되는 앏은 책이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중국 명, 청대에 '자살'한 여성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말이 자살이지, 살인에 가깝지만.
어느 정도 알려진대로(알려졌나?;) 적지 않은 명, 청대의 여성들은 자살을 요구 받기도 했다.
남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는 경우는 물론이고, 얼굴도 보지 않은 약혼자가 결혼 전 죽었을 경우도
자살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이럴 경우 이 죽음을 '자살'이라고 볼 수 있을까?
 
표지에 나와있는 저 그림은 '탑대'의식의 일부로 탑을 쌓아 그 위에서 공개적으로 자살했던 그림이다.
날짜와 장소를 널리 알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의식을 치뤘던 것이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열녀'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는데
과연 이 여성들의 의지는 어떻게 형성됐던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재미있는 부분을 지적한다.
첫째, 과거에 실패한 절망한 남성 유학자들이 자살을 부추겼다는 것.
그들은 자신들의 절망적인 상황을 여성들의 고통을 보며 위로하고 즐겼다는 것이다.
둘째, 여성들 또한 자살에 대해 감성적 자발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당시 유행하던 불교와 민간신앙은 귀신이 되어 상대를 벌하려는 경향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성들이 더욱 쉽게(?) 자살을 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흥미로운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이 관점을 효과적으로 증명하고 있지는 못한 것이 좀 아쉽다.
그는 중국 지방지를 통해 과거 지원자의 수와 여성 자살자의 수의 변화를 보여주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그 두 가지 수치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건 좀 오버하는 거지만;; 여성 자살자 수의 그래프 변화 추이가
당시 닭고기 소비량의 변화와 일치하다면 이것이 서로 연관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거다.
물론 저자의 가설은 심증적으로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설득력을 가지려면 단순한 동시적 수치 증가 이외에
다른 것들이 제시되어야 할 것 같다.
저자의 근거에서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당시 문맹률이 엄청 높았고 특히 여성의 경우 더 심했을텐데
문인들이 열녀를 칭송하는 글을 마구 지어냈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나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그들의 의도가 자살을 칭송하고 권장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두 개의 그래프를 제시하여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심증'은 있다, 언제나. 그러나...
결국 저자는 Sommer가 지적하는 것처럼, 자살에 대한 원인을 밝히려고 했으나
효과적으로 밝혀내지는 못한 것 같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의 격정적인 문체다.
그는 여성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자살을 해야만 했던 것, 그리고 그것을 추앙하고 칭송했던 것에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내 생각도 저자와 같다. 하지만 그것을 글로 풀어 내면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선
때론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가장하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 아닐까.
학문의 시작이 '감정적 요인'인 것이 나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시작이 연구를 지속적으로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위대한'과 같은 가치판단이 들어간 표현을 남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차라리 그 표현을 독자의 머리 속에 스스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더 효과적이진 않을까.
 
이런 아쉬운 점이 있지만,
단식으로 자살한 자들의 의도(자신의 시도를 말려주기를 호소하는 자살 방법)나
'할고'와 같은 자해효도;;에 대한 분석 등은 상당히 흥미롭다.
허벅지나 신체 일부를 베어내어 병을 앓는 부모에게 먹이는 행위.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신사층들에게는 무지랭이 백성들이 하는 행위였을 뿐이다. (재밌지 않은가!)
읽는 속도는 더뎠지만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고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들을 나 자신에게 다시 투영할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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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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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인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에서도 나타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기이다.
그럼에도 이 짧은 에세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이 책이 '번역서'이기 때문이리라.
조선인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어로 책을 쓸 수 없는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인사말에서 나는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으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민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또 이런 이유로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본인들의 눈에만 띌 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비록 조선말을 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조선인임을 항상 자각하고 있었고
(또는 자각할 수 밖에 없었고) '조국'이라는 말에 남다른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형제들.
때문에 그의 형들은 모두 '조국'으로 유학을 갔으나,
조국은 그들을 잡아들여 고문하고 십수년간 유폐시켰다.
 
어쨌거나 이 책은 독서기인만큼 많은 책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내가 읽은 책이라고는
'삼국지'와 루쉰의 '고향' 달랑 두 편 뿐이다.
물론 개인차일 수도 있지만 내 독서량이 지극히 부족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상 깊었던 구절.
 
어른의 눈물을 아는 자가 아이의 눈물을 안다. 아이의 눈물을 이해하는 자가 어른의 눈물까지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읽었던 프랑츠 파농의 책 중 한 구절 또한 내 머리 속에 깊이 남게 될 것 같다.
 
하나의 다리(橋)를 건설하는 일이, 만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의식을 풍요롭게 하지 못할 양이면, 차라리 그 다리는 만들지 않는 편이 낫다. 시민들은 예전처럼 헤엄을 쳐서 건너든가 아니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된다. 다리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오른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다리는] 사회 전체에 절대로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식으로 만들어져서는 안된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의 피와 땀, 두뇌 속에서 태어나야만 한다. (...중략...) 시민들은 다리를 개인의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때야 비로소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이었지만, 깔끔하고도 정성이 깃들여있는 번역과 함께 즐겁게 읽었던 책이었다. 물론 책도 이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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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자의 고독 - 모더니티총서 2 문학동네 인문 라이브러리 7
노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김수정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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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음'의 나락^^;;으로 몰아 넣었던 책.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이 대학교 4학년이 되기 전 겨울인 걸로 기억한다.

그때 생일 선물로 이 책을 받았는데(뭐.. 달라고 한거지만;;ㅋ), 가장 소중한 책 중 하나다.

앞에 얘기했던 것 처럼 내가 '죽음'이라는 테마에 더 심취할 수 있도록 해준 책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제처럼 한번 펼쳐들면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다 읽을 수 밖에 없는 책이다.

 

이 책은 총 3파트, '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화와 죽음', 그리고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총 150페이지가 안되는 아주 적은 분량에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80페이지.

짧은 글 속에서 집필 당시 80이 넘었던 이 老大家의 역량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엘리아스는 필립 아리에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과거를 무조건 미화시키고 현재를 격렬히 비판하는 듯한 아리에스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아리에스의 비판에 포함되지 않는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결국 현대의 죽음은 길들여진듯이 보이고 그 폭력성도 제어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현대의 이성은 죽음 혹은 죽어가는 자들을 일반적인 삶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격리시키기 시작했고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죽음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관용어구를 구태의연하고 가식적이라고 느끼면서도

막상 죽음 앞에서 할 말은 잃어버린다.

죽음이라는 '짐'을 모두 외면해왔고 또 그 짐을 이제 파편화된 개인 혼자서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도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끝내 숨기려고만 하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대한 정서적인 배려보다는 장기(臟器)에 대한 위생적 조치만이 존재하는 현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에 대한 고민은 '삶'에 대한 고민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우 근본적이고도 큰 부분을 애써 외면하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일까?...

 

이 응축된 저술을 읽는 내내(그리고 읽을 때마다) 대가는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감동(?)을 떨쳐버리기 힘들고, 그가 제시하는 많은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의 대표저작이자 이 책의 기본 바탕이 되는 '문명화 과정'에 대한

시니컬한 비판도 가능하다. (왜 문명에 '단계'가 있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게 너무나도 큰 책일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이번 주 있을 학회 첫 텍스트로 내가 추천했던 것이기도 하고.

사회학, 인문학이 나가야할 전략적 방향을 보여준 책이랄까.

늙은 대학자의 인간에 대한 진한 애정이 느껴지는 명저다.

 

어제 다시 읽으면서도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그때의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듯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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