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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ㅣ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평점 :
'한낮의 어둠'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과 함께 깔끔한 책표지가 인상적인 이 책은, 혁명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혁명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했던 이들이, 왜 혁명의 성공 이후 서로를 죽이고 적이 되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성찰.
등장 인물 모두가 가상의 인물이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배경도 '저 너머'등으로 모호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저 너머'는 구 소련, '넘버원'은 스탈린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해서 소설이 허구라기 보다는 하나의 수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류 최대의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것이 이르는 길이라면 수단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
그리고 그 목표나 그것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라도 가진다면 반혁명분자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사회.
그러나 과연, 모든 인간이 그 어떤 목적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50세에 목표를 성취하게 된다면, 49세까지의 인생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세 쾨슬러는 이러한 모순을 직시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당시 너무나 커져버려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려하지 않았던(혹은 보지 못했던) 모순을.
그들은 권력 철폐를 지향하는 권력을 꿈꾸었고, 사람들의 지배받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 지배하는 일을 꿈꾸었다.
개인의 동기는 당의 활동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양심도 문제 되지 않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당은 한 가지 죄, 곧 계획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한 가지 처벌, 즉 죽음만 알았다. 죽음은 당의 활동에서 신비로운 것이 아니었다. 의기양양해할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치적 일탈에 대한 논리적 해결책일 뿐이었다.
권력의 유지가 목적이 되어버린 상황(물론 권력을 유지해야 전지구적 혁명을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에서,
권력은 공포에 의지하려는 매혹에 쉽게 넘어가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는 외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다. 모든 관습과 크리켓 도덕성을 배 밖으로 던져버렸으므로 우리의 유일한 지침 원리는 필연적 논리의 원리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최후의 논리적 귀결에 이르게 한 뒤 그것에 맞게 행동하고자 하는 끔찍한 강박관념에 휩싸여 있다. 우리는 바닥짐 없이 항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키를 조금만 건드리는 것도 생사가 달린 문제가 된다.
이제 게임의 룰은 정해졌고, 권력은 세부사항의 변주만을 허용한다.
누군가 어떤 죄로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어디에 앉아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 누구를 주인공 루바쇼프의 위치에 놓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심지어, '넘버원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논리적인 기반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제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논리는 언제든 충돌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혹은 그래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사회의 개인들은 일개 부속품, 하나의 세포로 전락한다.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으며,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
당에서는 죽음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었고,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요소도 없었다. 죽음은 논리적 결과였고, 사람이 평가하는 다소 추상적인 성격을 가진 한 요소에 불과했다. 그래서 죽음은 잘 얘기되지 않았고, '처형'이란 말도 거의 사용된 적이 없었다. 관습적 표현은 '물리적 제거'였다. '물리적 제거'란 말은 정치 활동의 중단을 의미했다. 죽는다는 행위는 특별히 관심을 끌만한 것이 없는, 그저 기술적이고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논리적 방적식의 한 요소로서, 죽음은 그 어떤 친밀한 육체적 속성도 잃고 있었다.
아서 쾨슬러가 이 책을 쓰게된 시점을 생각하면, 이 책이 단순히 스탈린의 소련을 비판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책이 그러하듯, 이 경고가 그 시대, 특정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본다면 그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행위의 통제, 사상의 통제, 자유의 압살은 공산주의의 반대편에서도 쉽게 일어났던 일이었고, 또 쉽게 잊혀졌다.
(실은 잊혀진다는 것이 더 무섭다)
독재는 공산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박물관에 들어앉은 화석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에겐 고요함보다는 소란스러움을 참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고, 조금 피곤하더라도 '길 없는 목표'를 항상 경계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길 없는 목표를 보여주지 말라.
땅위의 목적과 수단은 너무도 얽혀 있어서
하나를 바꾸면 다른 하나도 바꾸어야 한다.
다른 길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갖는다. - 페르디난트 라살레, <프란츠 폰 지킹겐>
지쳐있던 루바쇼프는,
"그 당시 우리는 역사를 만들었네. 지금 자네들은 정치를 하고 있고, 그것이 차이야."
라고 말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정치가 필요하고 또 그것을 해야만 한다.
때문에 혁명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시점에서도 고민은 필요하다.
혁명은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정치의 또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저자 자신이 수인 생활을 체험했던 터라, 그것에 대한 묘사나 사고도 굉장히 탁월하다.
물론 '토론'으로 진행되는 주요 장면들이 조금 지겨울 수도 있겠지만, 소설로 읽는 켄 로치랄까 그런 느낌도 괜찮았다.
후마니타스에서 출간한 첫 문학책.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주제도 마음에 든다.
이런 깔끔한 디자인을 유지한채로 꾸준히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