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어둠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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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과 함께 깔끔한 책표지가 인상적인 이 책은, 혁명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혁명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했던 이들이, 왜 혁명의 성공 이후 서로를 죽이고 적이 되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성찰.

등장 인물 모두가 가상의 인물이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배경도 '저 너머'등으로 모호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저 너머'는 구 소련, '넘버원'은 스탈린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해서 소설이 허구라기 보다는 하나의 수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류 최대의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것이 이르는 길이라면 수단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

그리고 그 목표나 그것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라도 가진다면 반혁명분자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사회.

그러나 과연, 모든 인간이 그 어떤 목적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50세에 목표를 성취하게 된다면, 49세까지의 인생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세 쾨슬러는 이러한 모순을 직시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당시 너무나 커져버려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려하지 않았던(혹은 보지 못했던) 모순을.

 

그들은 권력 철폐를 지향하는 권력을 꿈꾸었고, 사람들의 지배받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 지배하는 일을 꿈꾸었다.

 

개인의 동기는 당의 활동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양심도 문제 되지 않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당은 한 가지 죄, 곧 계획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한 가지 처벌, 즉 죽음만 알았다. 죽음은 당의 활동에서 신비로운 것이 아니었다. 의기양양해할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치적 일탈에 대한 논리적 해결책일 뿐이었다.

 

권력의 유지가 목적이 되어버린 상황(물론 권력을 유지해야 전지구적 혁명을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에서,

권력은 공포에 의지하려는 매혹에 쉽게 넘어가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는 외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다. 모든 관습과 크리켓 도덕성을 배 밖으로 던져버렸으므로 우리의 유일한 지침 원리는 필연적 논리의 원리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최후의 논리적 귀결에 이르게 한 뒤 그것에 맞게 행동하고자 하는 끔찍한 강박관념에 휩싸여 있다. 우리는 바닥짐 없이 항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키를 조금만 건드리는 것도 생사가 달린 문제가 된다.

 

이제 게임의 룰은 정해졌고, 권력은 세부사항의 변주만을 허용한다.

누군가 어떤 죄로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어디에 앉아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 누구를 주인공 루바쇼프의 위치에 놓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심지어, '넘버원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논리적인 기반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제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논리는 언제든 충돌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혹은 그래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사회의 개인들은 일개 부속품, 하나의 세포로 전락한다.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으며,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

 

  당에서는 죽음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었고,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요소도 없었다. 죽음은 논리적 결과였고, 사람이 평가하는 다소 추상적인 성격을 가진 한 요소에 불과했다. 그래서 죽음은 잘 얘기되지 않았고, '처형'이란 말도 거의 사용된 적이 없었다. 관습적 표현은 '물리적 제거'였다. '물리적 제거'란 말은 정치 활동의 중단을 의미했다. 죽는다는 행위는 특별히 관심을 끌만한 것이 없는, 그저 기술적이고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논리적 방적식의 한 요소로서, 죽음은 그 어떤 친밀한 육체적 속성도 잃고 있었다.

 

아서 쾨슬러가 이 책을 쓰게된 시점을 생각하면, 이 책이 단순히 스탈린의 소련을 비판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책이 그러하듯, 이 경고가 그 시대, 특정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본다면 그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행위의 통제, 사상의 통제, 자유의 압살은 공산주의의 반대편에서도 쉽게 일어났던 일이었고, 또 쉽게 잊혀졌다.

(실은 잊혀진다는 것이 더 무섭다)

독재는 공산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박물관에 들어앉은 화석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에겐 고요함보다는 소란스러움을 참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고, 조금 피곤하더라도 '길 없는 목표'를 항상 경계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길 없는 목표를 보여주지 말라.

땅위의 목적과 수단은 너무도 얽혀 있어서

하나를 바꾸면 다른 하나도 바꾸어야 한다.

다른 길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갖는다.          - 페르디난트 라살레, <프란츠 폰 지킹겐>

 

지쳐있던 루바쇼프는,

 

  "그 당시 우리는 역사를 만들었네. 지금 자네들은 정치를 하고 있고, 그것이 차이야."

 

라고 말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정치가 필요하고 또 그것을 해야만 한다.

때문에 혁명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시점에서도 고민은 필요하다.

혁명은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정치의 또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저자 자신이 수인 생활을 체험했던 터라, 그것에 대한 묘사나 사고도 굉장히 탁월하다.

물론 '토론'으로 진행되는 주요 장면들이 조금 지겨울 수도 있겠지만, 소설로 읽는 켄 로치랄까 그런 느낌도 괜찮았다.

 

후마니타스에서 출간한 첫 문학책.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주제도 마음에 든다.

이런 깔끔한 디자인을 유지한채로 꾸준히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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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문화사 - 역사는 미술과 어떻게 만나는가, 심산 픽처링 히스토리 1
피터 버크 지음, 박광식 옮김 / 심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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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가 책의 내용을 더 잘 설명해주고 있다 - 역사는 미술과 어떻게 만나는가?

 

사실 역사가에게 사료의 분야가 넓어진다는 것은 일면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어찌됐거나 기쁜 일임에는 틀림없다.

제대로 된 역사가라면 사료가 풍부해지는 것은 그야말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 기록만이 아닌 '이미지'가 사료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혁명에 가깝다.

하지만 실제로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사료로 이용되는 사례는 그리 많이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의 보수성을 운운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이미지의 사용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문자 기록을 사료로 사용할 때에도 엄정한 사료 비판이 필수적이지만, 이미지에 대한 비판은 무척이나 중층적이다.

 

  1. 역사가들의 처지에서 반가울 얘기를 먼저한다면, 고대 이집트의 사냥 광경처럼 최소한 몇몇 지역과 시대뿐일지라도 예술은 문서자료들이 지나쳐 버리는 사회적 현실의 단면들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2. 나쁜 소식은 재현 예술은 겉보기보다 현실적이지 않고, 사회현실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왜곡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후원자들이나 고객은 말할 것도 없고) 화가나 사진가들의 다양한 의도를 계산에 넣지 않는 역사가들은 심각한 오해를 하게 될 수도 있다.

  3. 하지만 다시 반가운 소식이 있는데, 왜곡의 과정 그 자체가 많은 역사가들이 연구하고 싶어하는 현상들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사고방식이나 이데올로기, 정체성 따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구체적인 또는 현실에 충실한 이미지는 사람이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갖고 있는 심리적 또는 은유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므로 어찌보면 장황한 설명보다도 훨씬 직관적으로 역사가가 원하는 그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사회를 다루고 있는 이미지들을 사회의 단순한 반영이나 스냅사진 정도로 읽는' '명백한 오독'을 하지 않는다면,

이미지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자 기록을 버려야 한다는 양자택일의 논리로 치닫는 건 바보짓.

 

타자를 왜곡한 이미지들, 예를 들어 극도의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의 경우에도, 그것을 '사료가 아니다'고만 치부하는 것은

한없이 열려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내차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좀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런 그림들은 서구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줄 수도 있다. 여기서 살펴본 이미지에 표현된 타자는 바로 자아의 전도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타자를 보는 관점이 정형과 편견을 통해 중개된다고 했을 때, 이런 이미지들이 함축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관점은 한층 더 우회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을 읽어내는 방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이 이미지들은 귀중한 증거가 될 터이다. 루스 멜린코프가 중세 말의 북유럽을 두고 했던 언급은 분명히 훨씬 더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 "한 사회의 정수와 그 심리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회가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어디에 긋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한 지역과 시대에서 사람들이 '인간 이하'라고 여겼던 것들을 분석해 보면, 그들이 인간의 조건을 바라보았던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결국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주어진 과거의 자료들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의 문제다. 그것의 형태가 어떻던 간에.

보수적인 역사가는 사진이나 그림의 경우 조작의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비판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문자 기록도 마찬가지이며,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부지런하지 못함'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조작된 것이 분명한 사료를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활용할 수도, 아니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조작과 거짓 속에는, 역사가들이 열광하는 그 어떤 '전형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보면, 나도 석사논문을 쓸 때 나름 이미지가 주된 소재 중 하나였는데, 정말 발톱만큼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여튼, 요새 논문 쓸 자세를 잡기 위해서 나름 노력 중인데. 이 책도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좀 아쉬운 점이라면, 편집. 도판들이 죄다 흑백인 건 그렇다치더라도, 그림을 찾아보는 것이 굉장히 불편하게 편집이 되어 있다.

하다 못해, 사진 번호 뒤에 그 도판이 실려있는 페이지 정도는 적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나 싶다.

 

이상하게 맘 잡는 것이 힘든데, 다음 주부터는 정말 시작해야할 것 같다. 한 권만 더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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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 게르의 귀향
내털리 데이비스 지음, 양희영 옮김 / 지식의풍경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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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니, 이 책도 영화가 있다. 프랑스에서 만든 '마르탱 게르', 그리고 헐리우드에서 만든 '써머스비'.

이 책의 저자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는 '마르탱 게르'의 제작에 자문 자격으로 참여를 했었고,

그 과정 속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보충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

국내에서도 문화사, 미시사, 페미니즘 역사 등을 이야기할 때 꽤 많이 회자가 되는 책이기도 하다.

사놓은 건 한참 전이고 뒤적거리기도 많이 했던 책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정독.

 

가정을 이루고 있던 한 남자가 집을 떠났고, 몇 년 뒤 다시 나타는 그 남성은 성실하게 생활을 꾸려나간다.

그 남자가 가짜라는 소송이 걸리게 되었으나, 결백함이 거의 증명될 무렵. 갑자기 등장한 절름발이 남자.

그는 자신이 바로 진짜 '그 남자'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어찌보면 그저 흥미거리에 그치고 말 한 사건을 치밀하게 풀어내면서 다른 가능성을 읽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베르트랑드에게 '주체성'을 부여하여 그녀의 '선택'에 주목했다는 점은 중요한 점이다.

 

명백한 동의에 의해서든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서든, 그녀는 그가 남편이 되는 것을 도와 주었다. 베르트랑드가 새 마르탱에게서 발견한 것은 자신의 꿈이 실현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16세기의 가치를 인용하자면) 평화롭고 화목하게,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함께 살 수 있는 남자였다.

  그것은 18년 전 자신의 결혼처럼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것도, 자신의 어머니와 피에르 게르의 결혼처럼 관습에 따라 이루어진 것도 아닌, 창안된 결혼(invented marriage)이었다. 그것은 거짓말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베르트랑드가 묘사했던 것처럼 그들은 "진짜 결혼한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함께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 책이 약간은 과대포장된 면이 있으며(특히 국내에서) 헛점도 꽤 많다는 생각도 든다.

데이비스는 분명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지만, 추측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지나치게 많다.

'~일 것이다'는 식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굉장히 많은데, 저자가 설계한 '체계' 속에서 그 추측이 타당할런지는 몰라도

독자가 읽기에 그런 추측이 간단히 허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부분도 적지 않다.

책 앞부분의 지루할 정도로 상세한 배경설명처럼, 이런 추측의 과정을 좀 더 세밀하게 설명해줬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또 한가지 문제는, 국내에서 문화사, 미시사로 소개된 이런 책들이 겉보기와는 달리 썩 '재미'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물론 이건 이 분야 연구자의 잘못은 절대 아니지만, 국내에 이런 이미지를 만들어 놓은 연구자들에게 일말의 책임은 있다고 본다.

문화사, 미시사의 서술방식이 기존의 그것과 분명 다르고 그래서 때론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일종의 '일반론'은,

직접 그 책들을 읽어보면 무참히 깨져버리는 경우가 많다.(하긴 모든 소설이 다 재미있지는 않지. ㅎ)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산에 올라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는 것보다 항상 더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스펙타클'에 더 환호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이번 학기 강의에서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보라는 과제물을 주기도 했는데,

읽은 학생들 중에 흥미진진 재미있게 읽었다는 반응을 보인 학생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지루했다'는 반응이 훨씬 많았다.)

 

어쨌거나 한 인간의 '재량권'에 관심을 가지고 일말의 가능성을 역사학적 방법을 동원해 풀어내는 것은

정말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면서 책 자체에 대단한 감동을 느낀다거나 하진 못했지만, 계속 떠오르는 생각은 있었다.

역사에는 진실이 있을지도 모르나, 역사'학'에 진실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이 생각이 회의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결코 허무한 회의주의는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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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 터키편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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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개월이 된 아이를 데리고 그야말로 대책없이 여행을 떠난 한 엄마의 여행기.

사실 나는 여행기를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여행은 내가 가면 되는 것이지, 굳이 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읽을 필요가 있나 싶어서.

물론 온라인상에서 좋은 감상들을 읽으면서 감탄할 때도 많지만, 돈주고 책을 살만큼 이 장르에 심취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된 건, 묘한 인연으로 이 책의 저자를 알게 되었고, 또 그 저자를 보며 '아, 책도 좋겠구나' 싶어서 였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못된다. 게으른데다 반복되는 일상을 즐기는 인간형.

뭐 여행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떠나야할 타이밍을 전혀 잡지도 만들지도 못한달까.

혼자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고, 누군가와 함께 가더라도 먼저 가자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물론, 누군가 그런 얘기를 꺼내면, 내 스타일대로 '그래, 가자'라고 하지만. 허허.)

 

그런 나이기에, 36개월짜리 아이를 데리고 저 멀리 터키로 떠난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라기 보단, 상상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아직까진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 상상이 불가능한 걸지도.

하지만 이 여행기를 읽고 있노라면, 아, 정말 육아의 세계, 부모가 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구나 싶다.

 

  작고, 느리고, 지루한 것들을 반복해서 무비판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나는 조금 따뜻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엔 남과 다른 것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남과 같은 것에도 진심으로부터 눈물이 나올 때가 있어요. 어머니라는 자리가 준 선물이죠. 그리고 따지고 보면, 열심히 분석했던 시기에도 대단한 분석을 해냈던 것은 아니었거든요.

 

  아이가 그 옛날 술탄의 삶에 관심이 없듯 오늘 구석에 핀 들꽃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생생하게 현재를 좇는 아이의 눈은 죽은 자의 흔적을 따라가느라 치열하게 피어나는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런 일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일어났다.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늦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작고 조용하고 낡은 것들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단순히 아이를 '데리고' 다닌 여행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녀야할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당당한 여행 파트너로 생각한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 여행도 떠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한 편으론, 모든 아이들이 준빈과 같은 시선과 태도를 보이지는 않을 거란 생각도 든다.

어떤 부모 밑에서 자라나느냐 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아이의 신발을 신겨주는 데 걸리는 시간은 십 초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 아이의 땀방울과 신음 소리는 시시각각 화살이 되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내 가슴을 찔러대고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인내했다. 아이가 해낼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모의 무지이자 욕심이다. 그러나 아이가 해낼 수 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부모의 무능력이다.

 

어쩌면 내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좋은 부모가 될 자신이 없어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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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꽃 - 고은 작은 시편
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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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책에서 노벨 문학상 발표를 앞두고 고은의 책 리뷰를 받는다길래 올려본 책.

상은 못 받았지만, 이 책은 그야말로 간결하니 시답다. 리뷰는 '오늘의 책'으로 대신 갈음.

 

http://book.naver.com/bookdb/today_book.nhn?bid=64808

 

선생은 그 불타는 열정을 대상에 다 쏟아놓는다. 어딜 가도 정을 뿌리며 온몸으로 부딪치고, 있는 대로 정을 듬뿍 담아온다. 계곡을 만나면 발을 담가야 하고, 모래밭에선 맨발로 걸어야 하고, 산에 오르면 절을 해야 하고, 춤패를 만나면 그 안에서 춤을 추어야 한다. 그래서 모름지기 그 대상과 흔연히 하나되기를 원하며 그런 마음으로 시 쓰기를 원한다는 것을 이번에 비로소 알았다.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라는 명구는 이렇게 나온 것이다.


유홍준은 자신의 책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서 시인 고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인 고은을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아마도 [만인보]일 것입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 4001편의 방대한 시로 써내려간 '시로 쓴 인물백과 사전'. 하지만 지금 여기 소개하는 이 책은, 시인 고은이 단순히(?) 방대한 시 프로젝트를 완결하였기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가 된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합니다.

일상이 결코 가볍지 않으며, 또 그러하기에 한 사람, 한 생명의 삶 또한 결코 가벼울 수 없음을 시인은 간파해냅니다. 그리고 그 일상의 순간을 정말 '시'다운 함축과 절제로 표현하고, 독자들은 이제 그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느낍니다'. 마치 일본시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짤막짤막한 문구 속에서, 모든 사물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주름진 눈가에 담아 바라보는 노시인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억지로 힘을 주지 않아도 시의 힘, 시인의 힘이 느껴지는 거장의 소품이라고 할까요. 그 '힘'이 누구를 제압하는 힘이 아니라, 더 크게 우리를 안아주는 힘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짧은 문구 사이의 행간에서조차 시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한 마디로 이 책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아, 시답구나'.

 


누우면 끝장이다
앓는 짐승이
필사적으로
서 있는 하루

오늘도 이 세상의 그런 하루였단다 숙아 (11쪽)

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15쪽)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29쪽)

한반도에는 석탄보다 그리움이 훨씬 더 많이 묻혀 있다
55년 전
50년 전 흩어진 피붙이들이
무쇠 같은 휴전선 두고
그 남에서
그 북에서 그리움이 직업이었다

그리하여 삼면이 그리움투성이 한반도 (104쪽)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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