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순간의 꽃 - 고은 작은 시편
고은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4월
평점 :
네이버 책에서 노벨 문학상 발표를 앞두고 고은의 책 리뷰를 받는다길래 올려본 책.
상은 못 받았지만, 이 책은 그야말로 간결하니 시답다. 리뷰는 '오늘의 책'으로 대신 갈음.
http://book.naver.com/bookdb/today_book.nhn?bid=64808
선생은 그 불타는 열정을 대상에 다 쏟아놓는다. 어딜 가도 정을 뿌리며 온몸으로 부딪치고, 있는 대로 정을 듬뿍 담아온다. 계곡을 만나면 발을 담가야 하고, 모래밭에선 맨발로 걸어야 하고, 산에 오르면 절을 해야 하고, 춤패를 만나면 그 안에서 춤을 추어야 한다. 그래서 모름지기 그 대상과 흔연히 하나되기를 원하며 그런 마음으로 시 쓰기를 원한다는 것을 이번에 비로소 알았다. "금강산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 서로를 바라보자"라는 명구는 이렇게 나온 것이다.
유홍준은 자신의 책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서 시인 고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시인 고은을 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아마도 [만인보]일 것입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 4001편의 방대한 시로 써내려간 '시로 쓴 인물백과 사전'. 하지만 지금 여기 소개하는 이 책은, 시인 고은이 단순히(?) 방대한 시 프로젝트를 완결하였기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가 된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합니다.
일상이 결코 가볍지 않으며, 또 그러하기에 한 사람, 한 생명의 삶 또한 결코 가벼울 수 없음을 시인은 간파해냅니다. 그리고 그 일상의 순간을 정말 '시'다운 함축과 절제로 표현하고, 독자들은 이제 그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느낍니다'. 마치 일본시 '하이쿠'를 연상시키는 짤막짤막한 문구 속에서, 모든 사물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시선으로 주름진 눈가에 담아 바라보는 노시인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억지로 힘을 주지 않아도 시의 힘, 시인의 힘이 느껴지는 거장의 소품이라고 할까요. 그 '힘'이 누구를 제압하는 힘이 아니라, 더 크게 우리를 안아주는 힘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짧은 문구 사이의 행간에서조차 시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한 마디로 이 책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아, 시답구나'.

누우면 끝장이다
앓는 짐승이
필사적으로
서 있는 하루
오늘도 이 세상의 그런 하루였단다 숙아
(11쪽)
4월 30일
저 서운산 연둣빛 좀 보아라
이런 날
무슨 사랑이겠는가
무슨 미움이겠는가
(15쪽)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29쪽)
한반도에는 석탄보다 그리움이 훨씬 더 많이 묻혀 있다
55년 전
50년 전 흩어진 피붙이들이
무쇠 같은 휴전선 두고
그 남에서
그 북에서 그리움이 직업이었다
그리하여 삼면이 그리움투성이 한반도
(104쪽)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1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