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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 - 사실을 재구성하는 역사 글쓰기의 모든 것
리처드 마리우스 & 멜빈 E. 페이지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논문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단계에서... (실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_-) 읽었던 책.
글쓰기에 대한 책들은 정말 셀 수 도 없이 많고 지금도 계속 쏟아지지만, 역사 글쓰기에 대한 책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역사 서술은 과거의 자료에서 증거를 찾아내고 개연성 있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증거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이다.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사실의 나열이 되거나 혹은 반대로 근거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저자들의 조언.
증거에서 뭔가 까다로운 문제를 찾아내 그것을 해결하거나 그게 왜 문제인지 설명하라. 질문을 던지고 답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나 논점에 곧장 접근하라.
오슬랜더가 결론에서 말하듯이, 역사가의 목표는 "문헌이나 대상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나아가 설명하는데 있다."
역사가는 구체적인 시기에 구체적인 장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간이 행동하는 동기는 어느 시대에나 복잡하고, 불가사의하고, 때로는 부조리하다. 어느 나라든 이유도 없이 광기에 휩싸이고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히스테리에 빠진 지도자는 국가적 재앙에 부딪히면 희생양을 만들거나 상상의 적을 꾸며내 책임을 지우고 학살한다. '합리적인' 사람은 생드니가 자신의 잘린 머리를 손으로 들고 걸어갔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람이 어떻게 20세기 초 아르메니아나, 세기 말 르완다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량학살극을 묵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야기가 공상적일수록 실제로 공상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문체에 대한 조언도 빠질 수 없다.
말은 간단하고 명료하기는 커녕 모호하고 거칠고 복잡하고 장황하다. 특히 말이 장황하다는 것은 녹음된 대화를 글로 풀어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글로 줄이라"고 말한다. 말하는 것처럼 글을 쓰라고 하면,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일 경우 말하고 싶은 대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하고 거만하고 과장된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은 아니다. 좋은 글은 '간단명료한 글'이다.
역사 글쓰기에서는 그렇게 현재 시제를 남발하기보다 평범한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낫다.
이제 논문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눈길이 가는 부분들.
다른 견해를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의 견해와 상반되는 주장까지도 알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강화해야 한다.
역사가의 평판을 가장 크게 해치는 것은 과거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통찰하지 못하고 자료를 쉽게 믿어버리는 게으른 자세와 수동적으로 연구하는 자세다.
아무리 전자기술이 여러가지 편의를 가져다준다 해도 여전히 역사 글쓰기의 근본은 신중한 질문 구성, 정성 어린 연구, 성실한 평가, 세심한 편집이다.
거의, 약간, 보통 같은 표현이 별로 없고 완전히, 결코, 언제나 같은 표현이 많은 주장은 글의 저자가 해당 주제의 모든 분야를 연구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지표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에 정곡을 찌르는 아픈 말들.
어떤 시점에 이르면 조사와 준비를 마치고 글쓰기에 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되도록 글쓰기를 일찌감치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에는 여러분의 목표에 도움이 되는 자료만 읽는 게 좋다.
초고를 쓰는 데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질문에 관해 뭔가를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의 개념을 지금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저자가 예로 들고 있는 '저명한' 역사가 프레더릭 잭슨 터너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아픈 이야기다.
중요한 여러 권의 책을 쓸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와는 달리(몇몇 출판사와 계약까지 했다) 그는 책을 거의 완성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터너는 과제의 완성을 가로막는 어마어마한 심리적, 기계적 장애물을 만들었다. 학술권에 있는 사람에게는 낯익은 현상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완벽주의가 있다. 알고 싶은 사실이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면 그것을 토대로 이미 써놓은 초고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이후 2개월이나 12~18개월 동안은 대단히 낙관적인 자세로 계획을 추진하지만, 아무 것도 실현하지 못하면 또다시 절망에 빠져든다. 섣부른 호기심, 모든 것에 대한 탐욕스럽고 쉴 새 없는 관심, 무엇이든 성취하려는 각오는 대단했지만,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날아다니면서 일시적인 탐구의 즐거움에 편승해 글쓰기의 어려움으로부터 멀어지려 한 것이다.
오죽하면 겨우겨우 한 권의 책 원고를 얻어낸 까다로운 편집자가 이런 말까지 했을까.
"내 묘비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터너에게서 책이라고 불릴 만한 분량의 원고를 얻어낸 사람이라는 문구가 새겨져야 합니다."
글쓰기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 간의 상호 비평에 대한 조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자의 어조는 긍정적이어야 한다. 오로지 잘못된 점만 지적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잘한 점을 찾아내야 저자가 어떻게 작업을 계속할지 알게 된다.
이런 글쓰기의 기본 지침 뿐만 아니라 자료 찾는 방법, 파일 관리법 등등의 실용적인 부분까지 다뤄지고 있다.
사학과 전공 대학생, 대학원 초년생, 혹은 논문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도 그래서 읽은 거고.
어쨌거나. 최종 목적지는 글쓰기임을 잊지 말자. 원고가 없는 완벽주의 따위 존재할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