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교수 - EBS 다큐멘터리
EBS 최고의 교수 제작팀 엮음 / 예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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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BS에서 기획 시리즈로 방영했던 다큐 '최고의 교수'의 내용을 활자로 담아낸 책.
아무래도 요새 초짜 강사 경험을 좀 하고 있다보니, '가르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기고 또 내 능력을 한계를 체감하는 중.
그래서 최근 학교 CTL에서 운영하는 교수법 프로그램에도 참여를 하는 등 여러가지로 관심을 갖는 중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혼자 공부하는 것과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정말 별개의 일인듯.
미국 대학에서 우수한 교육자로 꼽히는 8명의 교수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참고할 내용이 꽤 많다.
시험 방법이라든지 평가방법 같은 부분은 정말 실제로 차용을 해도 좋을 듯 싶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의대 신경과학 부문 교수인 노던 교수의 말.

내 강의의 목표는 감정을 저 멀리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지식을 접목시켜 연구하는 것이다.

여러 교수들의 교수법에서 단 하나의 '비결'이 있을리는 없지만, 그래도 일관적인 공통점은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질문'. 그래서 조벽 교수의 말 또한 기억에 남는다.
 
교수가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는 강의는 최하급 강의, 교수가 질문하고 학생이 답하면 조금 발전한 강의, 학생이 한 질문에 교수가 답하면 바람직한 강의다. 최상급 강의는 학생이 한 질문에 다른 학생이 답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배움의 길임을 잊지 말 것.
다큐 시리즈를 다 볼 시간이 부족하다면, 이 책으로 대신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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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 떼 Mr. Know 세계문학 42
프리드리히 실러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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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실러는 이 한 편의 비극에 자유의 이념과 더불어, 법과 개인의 갈등, 정의와 불의, 사랑과 폭력, 남녀의 지순한 사랑 등 인류의 영원한 과제이며 수수께끼를 더없이 절절하고 생생하게 엮어 넣었다. 등장인물들의 분명한 성격과 정곡을 찌르는 대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오한 인식, 작품을 꿰뚫고 흐르는 강렬한 언어의 힘은 오늘날까지도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인도주의 정신과 자유의 이상을 일깨운다.

 

소개글은 이와 같은데... 글쎄. 저렇게 거창하게 소개할 정도로 대단한지는 정말 모르겠다.

게다가 '오늘날까지도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낸다고? 흠.

그 시대를 생각하고 또 이 작품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하고 읽는다면 모르겠지만, 저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나는 읽는 내내 '아, 옛날 책이구나' 싶을 뿐이고, 고전이 주는 통찰력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다.

 

'고전'이라고 쫄아서 무조건 동경하며 읽고, 설사 일말의 감동이 없었어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건 역시 잘못된 거 같다.

인용하고 싶은 구절, 없음. 감정의 과잉과 유치할 정도로 전형적인 등장인물의 성격, 이해할 수 없는 극단성.

이런 것들이 그 시대와 오늘의 간극을 느끼게 해주는 역사적 텍스트라면 OK.

하지만 하나의 작품으로서 얼마나 높은 평가를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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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 - 사실을 재구성하는 역사 글쓰기의 모든 것
리처드 마리우스 & 멜빈 E. 페이지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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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논문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단계에서... (실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_-) 읽었던 책.
글쓰기에 대한 책들은 정말 셀 수 도 없이 많고 지금도 계속 쏟아지지만, 역사 글쓰기에 대한 책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역사 서술은 과거의 자료에서 증거를 찾아내고 개연성 있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증거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이다.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사실의 나열이 되거나 혹은 반대로 근거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저자들의 조언.

증거에서 뭔가 까다로운 문제를 찾아내 그것을 해결하거나 그게 왜 문제인지 설명하라. 질문을 던지고 답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나 논점에 곧장 접근하라. 

오슬랜더가 결론에서 말하듯이, 역사가의 목표는 "문헌이나 대상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나아가 설명하는데 있다."

  역사가는 구체적인 시기에 구체적인 장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간이 행동하는 동기는 어느 시대에나 복잡하고, 불가사의하고, 때로는 부조리하다. 어느 나라든 이유도 없이 광기에 휩싸이고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히스테리에 빠진 지도자는 국가적 재앙에 부딪히면 희생양을 만들거나 상상의 적을 꾸며내 책임을 지우고 학살한다. '합리적인' 사람은 생드니가 자신의 잘린 머리를 손으로 들고 걸어갔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람이 어떻게 20세기 초 아르메니아나, 세기 말 르완다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량학살극을 묵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야기가 공상적일수록 실제로 공상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문체에 대한 조언도 빠질 수 없다. 

말은 간단하고 명료하기는 커녕 모호하고 거칠고 복잡하고 장황하다. 특히 말이 장황하다는 것은 녹음된 대화를 글로 풀어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글로 줄이라"고 말한다. 말하는 것처럼 글을 쓰라고 하면,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일 경우 말하고 싶은 대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하고 거만하고 과장된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은 아니다. 좋은 글은 '간단명료한 글'이다.

역사 글쓰기에서는 그렇게 현재 시제를 남발하기보다 평범한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낫다.

이제 논문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눈길이 가는 부분들.

다른 견해를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의 견해와 상반되는 주장까지도 알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강화해야 한다.

역사가의 평판을 가장 크게 해치는 것은 과거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통찰하지 못하고 자료를 쉽게 믿어버리는 게으른 자세와 수동적으로 연구하는 자세다.

아무리 전자기술이 여러가지 편의를 가져다준다 해도 여전히 역사 글쓰기의 근본은 신중한 질문 구성, 정성 어린 연구, 성실한 평가, 세심한 편집이다.

거의, 약간, 보통 같은 표현이 별로 없고 완전히, 결코, 언제나 같은 표현이 많은 주장은 글의 저자가 해당 주제의 모든 분야를 연구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지표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에 정곡을 찌르는 아픈 말들.

어떤 시점에 이르면 조사와 준비를 마치고 글쓰기에 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되도록 글쓰기를 일찌감치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에는 여러분의 목표에 도움이 되는 자료만 읽는 게 좋다.

초고를 쓰는 데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질문에 관해 뭔가를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의 개념을 지금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저자가 예로 들고 있는 '저명한' 역사가 프레더릭 잭슨 터너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아픈 이야기다.
중요한 여러 권의 책을 쓸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와는 달리(몇몇 출판사와 계약까지 했다) 그는 책을 거의 완성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터너는 과제의 완성을 가로막는 어마어마한 심리적, 기계적 장애물을 만들었다. 학술권에 있는 사람에게는 낯익은 현상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완벽주의가 있다. 알고 싶은 사실이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면 그것을 토대로 이미 써놓은 초고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이후 2개월이나 12~18개월 동안은 대단히 낙관적인 자세로 계획을 추진하지만, 아무 것도 실현하지 못하면 또다시 절망에 빠져든다. 섣부른 호기심, 모든 것에 대한 탐욕스럽고 쉴 새 없는 관심, 무엇이든 성취하려는 각오는 대단했지만,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날아다니면서 일시적인 탐구의 즐거움에 편승해 글쓰기의 어려움으로부터 멀어지려 한 것이다.

오죽하면 겨우겨우 한 권의 책 원고를 얻어낸 까다로운 편집자가 이런 말까지 했을까.

"내 묘비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터너에게서 책이라고 불릴 만한 분량의 원고를 얻어낸 사람이라는 문구가 새겨져야 합니다."

글쓰기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 간의 상호 비평에 대한 조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자의 어조는 긍정적이어야 한다. 오로지 잘못된 점만 지적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잘한 점을 찾아내야 저자가 어떻게 작업을 계속할지 알게 된다.

이런 글쓰기의 기본 지침 뿐만 아니라 자료 찾는 방법, 파일 관리법 등등의 실용적인 부분까지 다뤄지고 있다.
사학과 전공 대학생, 대학원 초년생, 혹은 논문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도 그래서 읽은 거고.
어쨌거나. 최종 목적지는 글쓰기임을 잊지 말자. 원고가 없는 완벽주의 따위 존재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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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용산 평화 발자국 2
김성희 외 지음 / 보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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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90년대 중반쯤 벌어졌던 살인 사건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교수 아버지를 죽인 아들의 이야기였는데 당시 당연히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했다.
실은 나도 그 전 주에 다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뒤,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했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잊는다.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그저 지나간 일로 생각하거나, 혹은 아예 잊어버렸다.
도심 한 복판에서 공권력이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었지만, 사람들은 재범의 일, 타블로의 일만큼도 분노하지 않았다.
나의 일이 아니었고, 나의 일이 아니었으면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6명의 만화가들이 망루에서 목숨을 잃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려냈다.
그들이 테러범이 아니었음을, 우리의 이웃이었음을,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그저 사람이었음을.
그들은 살려고 올랐으나, 죽어서 내려왔다.
 
정말 묻고 싶은 요즘이다. 당신들이 자랑하는 G20이, FTA가, 4대강이, 살기위해 목숨을 걸어야하는 기현상을 멈추게 할 수 있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지만 그 속사정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당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한다면, 권한다.

앙꼬는 '새만화책' 때부터 눈여겨보던 작가인데, 왠지 실감나는 10대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기대되는 작가다.

조금 호흡이 긴 중장편을 그려낼 수 있다면 훨씬 더 '작가'가 될 것 같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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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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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많은 건 아니지만, 설렁설렁 읽어나가다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

게다가 내가 주관심사인 노년과 죽음을 직접 다룬 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탄생이 아닌 죽음에서부터 출발하여 되돌아보다 보면, 느낌이 조금은 다르기 마련.

'죽을 고비'를 넘기는 순간에 대한 느낌도 그렇고, '평범하게' 건강히(혹은 방탕하게) 살아가는 순간의 느낌도 그렇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예정된(?) 죽음을 상정해놓은 채로 한 인물을 삶을 훑어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가가 첫 장면에 띄운 죽음이라는 韻은 책 전체를 지배하고 만다.

하지만 읽는 내내, 독자인 나는 주인공을 소외시키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죽음이 결코 함께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고독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초,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쓴 폭 5미터 깊이 12미터밖에 안 되는 크기의 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것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이미지에도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죽음을 패배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노년은 패배로 향하는 수치스러운 길이 되고 만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과 가까워지고, 신체적 기능이 점차 파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건만(물론 당연하다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그 당연한 일에 슬픔을 넘어선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건강하지 않음은 일종의 죄악이 되었다.

 

  각 반에는 학생이 열 명 정도씩 있었으며, 그들은 그의 환한 작업실에서 만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대체로 그림을 배우는 것은 그 방에 오기 위한 핑계였으며, 그들 대부분이 그가 이런 일을 시작한 것과 같은 이유로 수업에 참여했다. 다른 사람들과 만족스럽게 접촉할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둘을 빼면 모두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매주 동지적인 명랑한 분위기에서 만났음에도, 대화는 어김없이 병과 건강문제로 흘러갔다. 그 나이가 되면 그들의 개인 이력이란 의학적 이력과 똑같은 것이 되었으며, 의학적 정보 교환이 다른 모든 일을 밀쳐냈다. 그의 작업실에서도 그들은 그림보다는 병으로 서로를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당은 어떤가요?" "혈압은 어때요?" "의사는 뭐래요?" "내 이웃 얘기는 들었나요? 간으로 퍼졌다는 군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녀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통증이 사람을 정말 외롭게 만드네요." 그러면서 다시 허물어지며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정말 창피해요."

  "창피할 일 전혀 없습니다."

  "있어요, 있어요." 그녀는 울었다. "자신을 돌볼 수 없다는 거, 궁상맞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거......"

 

이제 죽음은 물론이고 노년마저 은폐가 되어야할 대상이 된다. 죽음과 노년은 불김함이다.

현대 의학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기분 나쁜 패배이며 인간에게 다가오는 최대의 무력감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현대의 특이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노년과 죽음이 완전히 밀착한 것은 의학의 발달로 가능해진 일일테니.

하지만 그 바람에 우린 또 다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천수'를 누리는 것은 이제 몇 살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죽음과 노년이 패배라면, 삶과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 승리가 될 수 있는 걸까?

 

제목처럼, 모든 사람들이 마주해야하는(혹은 마주할 것으로 기대하는) 노년과 죽음에 대한 짧은 단상.

맛깔나는 번역 덕분에 쉽게 쉽게 읽으면서도, 왠지 답이 없는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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