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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분량이 많은 건 아니지만, 설렁설렁 읽어나가다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
게다가 내가 주관심사인 노년과 죽음을 직접 다룬 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탄생이 아닌 죽음에서부터 출발하여 되돌아보다 보면, 느낌이 조금은 다르기 마련.
'죽을 고비'를 넘기는 순간에 대한 느낌도 그렇고, '평범하게' 건강히(혹은 방탕하게) 살아가는 순간의 느낌도 그렇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예정된(?) 죽음을 상정해놓은 채로 한 인물을 삶을 훑어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가가 첫 장면에 띄운 죽음이라는 韻은 책 전체를 지배하고 만다.
하지만 읽는 내내, 독자인 나는 주인공을 소외시키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죽음이 결코 함께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고독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초,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쓴 폭 5미터 깊이 12미터밖에 안 되는 크기의 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것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이미지에도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죽음을 패배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노년은 패배로 향하는 수치스러운 길이 되고 만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과 가까워지고, 신체적 기능이 점차 파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건만(물론 당연하다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그 당연한 일에 슬픔을 넘어선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건강하지 않음은 일종의 죄악이 되었다.
각 반에는 학생이 열 명 정도씩 있었으며, 그들은 그의 환한 작업실에서 만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대체로 그림을 배우는 것은 그 방에 오기 위한 핑계였으며, 그들 대부분이 그가 이런 일을 시작한 것과 같은 이유로 수업에 참여했다. 다른 사람들과 만족스럽게 접촉할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둘을 빼면 모두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매주 동지적인 명랑한 분위기에서 만났음에도, 대화는 어김없이 병과 건강문제로 흘러갔다. 그 나이가 되면 그들의 개인 이력이란 의학적 이력과 똑같은 것이 되었으며, 의학적 정보 교환이 다른 모든 일을 밀쳐냈다. 그의 작업실에서도 그들은 그림보다는 병으로 서로를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당은 어떤가요?" "혈압은 어때요?" "의사는 뭐래요?" "내 이웃 얘기는 들었나요? 간으로 퍼졌다는 군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녀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통증이 사람을 정말 외롭게 만드네요." 그러면서 다시 허물어지며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정말 창피해요."
"창피할 일 전혀 없습니다."
"있어요, 있어요." 그녀는 울었다. "자신을 돌볼 수 없다는 거, 궁상맞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거......"
이제 죽음은 물론이고 노년마저 은폐가 되어야할 대상이 된다. 죽음과 노년은 불김함이다.
현대 의학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기분 나쁜 패배이며 인간에게 다가오는 최대의 무력감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현대의 특이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노년과 죽음이 완전히 밀착한 것은 의학의 발달로 가능해진 일일테니.
하지만 그 바람에 우린 또 다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천수'를 누리는 것은 이제 몇 살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죽음과 노년이 패배라면, 삶과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 승리가 될 수 있는 걸까?
제목처럼, 모든 사람들이 마주해야하는(혹은 마주할 것으로 기대하는) 노년과 죽음에 대한 짧은 단상.
맛깔나는 번역 덕분에 쉽게 쉽게 읽으면서도, 왠지 답이 없는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