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Verve Collector's Edition [30CD Box Set] 재즈 명반 박스세트 6
버드 파웰 (Bud Powell) 외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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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리즈. 사은품으로 주는 모자도 좋고, 이만한 가격에 이만한 구성이라면 만족할만하지만... 

그래도 첫 번째 발매 때 지적됐던 앨범 자켓의 문제는 조금 개선해서 나왔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박스셋처럼 LP미니어처 옆면으로도 앨범의 번호나 제목 정도는 확인이 가능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앨범을 골라서 들을 때 빼서 확인을 해야하는 불편함이 여전하다. 

그래도 이 정도 가격에 이런 명반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역시 행운. 끝나가는 음반시장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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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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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동물농장'을 세 번째 읽게 되는 셈인데, 이번엔 네이버 오늘의 책 소개 때문에 다시 읽게 되었다.

두 번째 읽었을 때가 아마도 군에서 제대한 직후였던 것 같은데, 그 때 읽은 느낌과는 또 다르다.

아마도 러시아 혁명이나 스탈린 등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은 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어렸을 적 '동물농장'을 만화로도 봤고 동화책으로도 읽었었는데,

그건 아마도 오웰의 경고를 단순히 반공주의로 생각한 이들의 책과 만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웰의 경고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는 사회주의자임을 자칭했으며, 그렇기에 내부비판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혁명이 어떻게 배반당할 수 있는지, 권력이 독점되는 순간 어떻게 부패가 되는지,

그리고 그 부패되는 순간 대중들이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면 어디까지 치닫게 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여름 내내 농장 일은 시계처럼 돌아갔다. 동물들은 일찍이 상상도 못했을 만큼 행복했다.입에 넣는 먹거리는 그지없이 달콤했다. 그것은 과거 인색한 주인이 마지못해 동냥주듯 던져주던 그런 먹이가 아니라 동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위해 생산한 먹이, 진정한 그들 자신의 먹이였기 때문이다.

 

   「동무들, 여러분은 설마 우리 돼지들이 저들끼리만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 또는 무슨 특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겠지요? 사실은 우유, 사과를 싫어하는 돼지들도 많아요. 나도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돼지들이 우유와 사과를 가져가는 것은 건강유지를 위해서입니다. …(중략)… 그러므로 돼지들이 우유를 마시고 사과를 먹어야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돼지들이 그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어찌되는지 아십니까? 존즈가 다시 오게 돼요, 존즈가! 그래요, 존즈가 다시 오게 됩니다!」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보던 풍경 아닌가? '존즈'라는 거대한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서, 내부의 잡음을 없애는 것.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는 동안 클로버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자기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클로버는 여러 해 전 동물들이 인간을 뒤집어엎기로 했을 때 일이 이 지경이 되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오늘 있었던 공포와 살육의 장면들은 늙은 메이저가 그들에게 반란을 사주했던 그날 밤 그들이 꿈꾸고 기대했던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동물농장의 주인 여러분, 당신들에게 다스려야 할 하급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겐 다스려야 할 하층 계급들이 있습니다」 이 <명언>에 온 좌중이 함성을 질렀다. 펠킹턴 씨는 다시 한번, 동물농장이 식량 분배는 줄이면서 노동시간은 늘인 것을 축하하고 그가 본 대로 이 농장에서는 동물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는 것도 축하했다.

 

인간인지 돼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이 소설의 끝은, 그렇다고 해서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허무주의로 해석하긴 어렵다.

조지 오웰의 다른 글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글은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쓰여졌다.

 

우리 시대처럼 소란한 세월을 살면서 이런 문제들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넌센스이다. 이 시대의 작가는 누구나가 다 이런저런 형태로 그 문제들을 다룬다. 그것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어떤 방법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신의 정치적 편견을 더 많이 의식하는 사람일 수록 자기가 가진 미학적 지적 성실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할 기회도 더 많이 갖게 된다.

 

조지 오웰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동물농장'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의식하면서 쓴 첫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름 나의 글쓰기 지표랄까 그런 것을 하나 더 얻었다.

정치적으로 써라. 그것만이 너를 정치적으로 만들지 않을 것이다. 라는.

 

소설 속 캐릭터와 배경을 실제 역사와 맞춰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물론 동물농장이 우리의 현실과 너무 비슷해서 씁쓸하기 그지 없지만.

조지 오웰의 다른 책들과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을 읽어봐야겠다.

 

돼지가 두 발로 서던 장면의 충격이 다시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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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1-02-03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책들 번역으로 이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도정일 번역이라면 민음사본 도 보고 싶네요 ^^

낮에뜬별 2011-02-10 10:38   좋아요 0 | URL
번역본이 상당히 다양해서 고민이 되더라구요. 민음사 번역본도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3 - 여씨와 유씨 - 건설과 숙청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3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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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이 나왔다!

 

저자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놀랐다. 이렇게 3권이 빨리 나오다니.. !!! -_-... ㅋㅋ

'십자군 이야기'를 생각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그닥 미안하진 않은데, 여튼 3권을 들고 빨리 왔으니 반가울 수 밖에.

1, 2권도 나쁘진 않았지만, 이번 3권은 고증에 대한 지나치게 장황한 설명을 줄이고 사건에 대한 배경 설명을 더 많이 곁들여서 더 좋다.

그리고 이제야 본격적인 책의 썰을 풀 거라니 더 기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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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1-02-03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3권 먼저 보고 1권 2권은 아직 못 보았는데 부럽네요 ㅎㅎ

낮에뜬별 2011-02-10 10:38   좋아요 0 | URL
1, 2권도 좋습니다. 앞으로 기대가 되네요. ^^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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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가 조금은 부담스러울 수 있는 책이지만(ㅋㅋ), 굳이 광고계이 있지 않은 사람이 읽어도 재미있을 책이다.

실은 이 분이 같이 사는 분의 직장 상사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연찮게 이 책을 볼 수 있었는데.

음.. 뭐랄까, 제목에서 느낀 이상한 반감이 책을 읽고 나니 완전히 사라진 느낌이랄까 그렇다.

(이 '반감'은 아마도 인문학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이상한 열패감이란 걸 나도 안다.)

 

수많은 광고를 만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강조하는 것은 인문학적 소양이며, 그것이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

 

  "아리스토톨레스는 틀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소통은 '발신자→메시지→수진사'라는 경로를 거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신자→메시지→발신자'라는 경로가 옳습니다. 제대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발신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되질 않습니다. 수신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소통이 쉬워집니다."

  그렇다. 소통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귀가 열리는 법이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수신자에게 다녀와야 한다.

 

뭐, 학자들은 수신자를 감안해서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또 그렇게만 무시하고 넘어갈 부분만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면 인문학 전문서적은 책이 안나간다고 투덜대지나 말던가.

 

여튼 인용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책에서 놀라운 점은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을 이야기하는 책이 그 모범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인터뷰' 시리즈로 나와있는데, 형식은 전혀 인터뷰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두 저자(?)의 목소리가 제대로 된 소통을 통해 녹아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어떤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도 아닌, 그런.

인터뷰 대상자인 박웅현도 대단하지만, 그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 성실히 준비한 것 같은 강창래도 대단하다.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는 시쳇말이 실감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자기 반성의 의미에서도.

 

광고의 역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약간은 '아전인수'인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 '아전인수'를 포장하는 것도 능력.

어쨌거나 재미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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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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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은 단순명료하기에 매력적이고 때로는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슬픔과 기쁨, 남성과 여성.

어쩌면 우리는 이 이분법 속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걸지도 모른다. 그 이분법 속에서 고통 받는 와중에도.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메타포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어깨에 짐이 부과되었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되듯이, 이분법의 '경계'는 다시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

세상이 규정한 경계는 굉장히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그 경계가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심지어 고통까지도.

 

  그는 이보다 더 처절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테레사를 품 안에 꼭 껴안았고 그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더 이상 감당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구가 폭탄을 맞아 뒤흔들릴 수도 있고, 조국이 매일 새로운 침략자에게 약탈을 당하고, 그가 사는 거리의 모든 주민이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해도 이 상황을 차마 고백할 순 없겠지만 이보다는 훨씬 쉽게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테레사의 단 하나의 꿈이 불러일으킨 슬픔은 견딜 수 없었다.

 

영혼의 사랑과 육체의 사랑은 별개의 것일까, 아니면 함께인 것일까? 아니, 영혼, 육체, 사랑을 서로 엮는 것 자체가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

혹자는 '유일한 사랑'을 위해 육체를 저주하고,

 

  그녀는 불쑥 이 육체를 하녀를 내쫓듯 파면하고 싶어졌다. 오직 영혼만이 토마스와 함께 있고, 육체는 다른 여자의 육체가 수컷의 육체와 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멀리 추방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육체가 토마스에게 유일한 육체가 될 수 없었고, 테레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전쟁에서 패배한 육체이기에, 그렇다면 멀리 꺼질지어다, 육체여!

 

혹자는 초라해진 육체를 가진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육체를 저주한다.

 

그녀는 수줍음을 자신의 육체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았다. 그녀가 지금 뻔뻔스러워진 것은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그 뻔뻔스러움을 통해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 철저하게 뻔뻔해지고자 한 것이다.

 

이런 모호한 경계 위에서, 우리는 '소통의 불가능'에 직면하고 그로 인해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통의 불가능에 좌절하는 인간이야말로 소통의 가능성을 광신하는 철저한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삶의 부재에 좌절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해보면, 소통의 불가능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통일 수도 있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읽지 않았던 터라, 책을 꽤 오래 잡고 있었다.

특히 앞부분에 등장하는 꿈의 해석 부분은, 그 해석이 너무 단순하면서도 장황스러워 살짝 유치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연애사와 거시적인 역사를 넘나들고, 시점마저 제멋대로 넘나드는 형식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읽는 동안,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세상에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 '역사적'인 것이 어디 그렇게 명확하게 나누어질 수 있는가?

왜 나는 이 소설이 '연애소설'인가 '역사소설'인가를 두고 고민하는가?

(연애 속엔 역사가 없는가? 역사 속엔 연애가 없는가? 아니, 그 무엇의 속에 다른 무엇이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인간의 삶을 다룬다는 '역사'를 '경제사', '문화사', '정치사' 등으로 엄격히 나누는 것이 과연 '효율적'일 수 있는가?

 

한 개인의 삶, 한 사회의 역사는 중층적이기도 하지만 또 수많은 부분이 중첩되기도 한다는 사실.

이 뻔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꽤 오래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결국 이상하게 책을 읽어버린 셈이 되었는데, 어쨌거나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책을 접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2/3를 넘어서는 부분부터는 책을 읽는 속도도 붙었고, 왠지 등장인물들도 점차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뭐 막 그려러던 참에 끝나서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ㅎㅎ)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환상이니 하지만, 실은 모더니즘이야말로 환상이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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