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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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은 단순명료하기에 매력적이고 때로는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슬픔과 기쁨, 남성과 여성.

어쩌면 우리는 이 이분법 속에서 안정감을 누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걸지도 모른다. 그 이분법 속에서 고통 받는 와중에도.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메타포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어깨에 짐이 부과되었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되듯이, 이분법의 '경계'는 다시 모호해질 수 밖에 없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

세상이 규정한 경계는 굉장히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그 경계가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심지어 고통까지도.

 

  그는 이보다 더 처절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테레사를 품 안에 꼭 껴안았고 그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더 이상 감당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구가 폭탄을 맞아 뒤흔들릴 수도 있고, 조국이 매일 새로운 침략자에게 약탈을 당하고, 그가 사는 거리의 모든 주민이 사형장으로 끌려간다 해도 이 상황을 차마 고백할 순 없겠지만 이보다는 훨씬 쉽게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테레사의 단 하나의 꿈이 불러일으킨 슬픔은 견딜 수 없었다.

 

영혼의 사랑과 육체의 사랑은 별개의 것일까, 아니면 함께인 것일까? 아니, 영혼, 육체, 사랑을 서로 엮는 것 자체가 얼마나 타당한 것일까?

혹자는 '유일한 사랑'을 위해 육체를 저주하고,

 

  그녀는 불쑥 이 육체를 하녀를 내쫓듯 파면하고 싶어졌다. 오직 영혼만이 토마스와 함께 있고, 육체는 다른 여자의 육체가 수컷의 육체와 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멀리 추방하고 싶어졌다! 그녀의 육체가 토마스에게 유일한 육체가 될 수 없었고, 테레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전쟁에서 패배한 육체이기에, 그렇다면 멀리 꺼질지어다, 육체여!

 

혹자는 초라해진 육체를 가진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 육체를 저주한다.

 

그녀는 수줍음을 자신의 육체의 가치를 재는 척도로 삼았다. 그녀가 지금 뻔뻔스러워진 것은 한때 그녀가 과대평가했던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그 뻔뻔스러움을 통해 지나간 삶과 엄숙하게 결별하고 철저하게 뻔뻔해지고자 한 것이다.

 

이런 모호한 경계 위에서, 우리는 '소통의 불가능'에 직면하고 그로 인해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통의 불가능에 좌절하는 인간이야말로 소통의 가능성을 광신하는 철저한 이상주의자일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삶의 부재에 좌절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해보면, 소통의 불가능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통일 수도 있다.)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읽지 않았던 터라, 책을 꽤 오래 잡고 있었다.

특히 앞부분에 등장하는 꿈의 해석 부분은, 그 해석이 너무 단순하면서도 장황스러워 살짝 유치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연애사와 거시적인 역사를 넘나들고, 시점마저 제멋대로 넘나드는 형식 때문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읽는 동안,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다.

 

세상에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 '역사적'인 것이 어디 그렇게 명확하게 나누어질 수 있는가?

왜 나는 이 소설이 '연애소설'인가 '역사소설'인가를 두고 고민하는가?

(연애 속엔 역사가 없는가? 역사 속엔 연애가 없는가? 아니, 그 무엇의 속에 다른 무엇이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인간의 삶을 다룬다는 '역사'를 '경제사', '문화사', '정치사' 등으로 엄격히 나누는 것이 과연 '효율적'일 수 있는가?

 

한 개인의 삶, 한 사회의 역사는 중층적이기도 하지만 또 수많은 부분이 중첩되기도 한다는 사실.

이 뻔하지만 중요한 사실을 꽤 오래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결국 이상하게 책을 읽어버린 셈이 되었는데, 어쨌거나 별다른 사전 정보 없이 책을 접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2/3를 넘어서는 부분부터는 책을 읽는 속도도 붙었고, 왠지 등장인물들도 점차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뭐 막 그려러던 참에 끝나서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ㅎㅎ)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환상이니 하지만, 실은 모더니즘이야말로 환상이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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