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빠는 필요없다 -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 이야기 ㅣ 이매진 컨텍스트 15
전희경 지음 / 이매진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얼마전에 있었던 '나꼼수'의 비키니 소동(?)의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진보/보수의 구도 속에서 '성 정치'는 철저히 외면 받아 왔다. 정치적 언변은 너무나도 진보적이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남성문화가 '운동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제기'들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고, 이 사소한 것들은 조직과 전선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의심과 공격을 받기 쉬웠다. 다음과 같은 주장을 보라. 아마 많은 사람들(특히 남성들)이 "아니, 그게 무슨 큰 문제라고 시비(?)냐?"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것과 연결된 맥락에서 정희진은, 왜 비전향 장기수는 '선생님'이고 위안부 피해자는 '할머니'로 부르냐고 물으면서, 좌우파를 넘어서는 남성 젠더의 지배 역사 속에서 역사의 주체이자 행위자로 간주되는 남성은 '선생님'이고 (남성) 역사의 피해자로 간주되는 '위안부' 피해 여성은 비정치적 존재로서 '할머니'가 된다고 비판한다. (121쪽)
남성 노동자의 파업 투쟁은 아내의 지지와 지원을 받지만, 여성 노동자의 파업 투쟁은 오히려 남편의 '허락'을 얻어야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여성 노동자에게 시민/노동자의 권리보다 아내/어머니/주부의 도리가 우선되기 때문이다. (127쪽)
그런 문제에 대해서 내가 통신에서 문제제기를 했더니 어떤 남성이 거기다가 "모든 사람들이 다 (성폭력 사건에 대해) 얘기를 하고 개입을 할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의 오만이다", 이렇게 썼더라구요. 개입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개입하는 사람도 있다, 이거지. 아마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 안 한다고 뭐라 그랬으면 그런 얘기 안 했을 거예요. 근데 그 상황에서는 그게 오만인 거죠. (181쪽)
그러나, 과연 이런 문제들이 '사소한' 문제인가? 자본과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전선'을 생각해보라. 자본의 입장에선 한 노동자의 임금, 한 노동자의 노동환경, 한 노동자의 목숨 따위 항상 '사소하게' 취급받지 않았던가? 그것에 분노하여 그렇게 힘들게 싸워온 것이 아니었던가? 분명 그러면서도 자신이 상대적으로 강자가 되는 조직 내에서는 또 다른 소수(수적으로는 절대 소수가 아닌)인 여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구조적으로. 결국 '진보'라고 불리는 집단도 젠더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이 되고 만다. 그러니 그게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고대녀'라는 말을 아무런 꺼리낌 없이 쓰지 않겠는가(나는 이 '**녀'라는 단어를 혐오한다). '여대생'은 또 어떤가? 지금이야 워낙 대학 진학률이 높아져서 그런 이미지가 많이 없어졌다고는 해도, 10년 전만 생각해보면 이 단어는 그냥 '여성 대학생'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남대생'(이런 단어를 쓰지도 않지만)과는 달리 '여대생'은 남성들의 로망이 집중 투여된 단어이자, 또 반대로 많은 남성들의 공격 대상이 되는 단어다. '순수한 여대생'이자 '철없는(머리가 텅텅 빈) 여대생'.
사실 1980년대에 대학에 진학한 여성이 대부분 상대적으로 풍족한 집안 환경을 갖고 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아들은 찢어지게 가난해도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지만' 딸은 여유가 있어야 대학에 보낸 성차별적 교육의 결과이기도 했다. (111쪽)
정치적인 폭력과 억압도 무섭긴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일상의 폭력과 억압, 차별이다. 그리고 거대한 정치담론과 일상적인 것은 그렇게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공/사는 실제로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돼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있을 뿐이며, 일상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구조적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문제와 사소한 문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둘 사이의 경계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동적이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무엇이 중대한 문제인가?'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는 누가 정의하며 '중대한 문제'와 '사소한 문제'는 어떤 과정을 통해 구분되는가(또는 변화하는가)다. (134쪽)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90년대 운동권에 몸을 담았던 여성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그들이 직접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들의 말을 들어가며 '구조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이 분석의 의도는 단순히 피해를 폭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 "누가, 왜 '근본 원인'을 알고자 하는가?", "'근본 원인'에 대한 대답은 어떤 정치적 효과로 연결되는가?"라고 묻는다면, 토론은 다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154쪽)
"그래, 차별은 나쁘지"라는 식의 무덤덤한 반응은 가장 나쁘다. 성 정치 속의 이 구조적인 차별과 억압은 이제 일상의 영역까지 내려와 수많은 여성, 그리고 심지어 남성까지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냉정하고 차분한 척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서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그것은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무능력일 뿐이다. (139쪽)
많은 남성들이(그리고 또 많은 여성들이) 이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는 것은 젠더 문제가 기존의 계급 문제 등의 하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젠더 문제가 계급 문제보다 '덜' 중요한가? 그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위계질서는 누가 만들었는가? 젠도 또한 계급이며, 그것은 경제적 계급과 또 다른 곳에 존재하면서 여기저기 섞이지 않는 데가 없는 중요한 문제다.
'노둥 문제가 먼저냐, 여성 문제가 먼저냐'라는 질문은, 여성을 노동자로 보지 않고 여성 노동자를 '여성'으로 보지 않을 때만 성립한다. '계급이냐 젠더냐'라는 질문은, 계급이 젠더 없이 조직될 수 없으며, 젠더체제 내에 계급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사라지게 하는 일종의 허위 질문이다. (215쪽)
영화 '밥, 꽃, 양'의 주인공이었던 현대자동차 식당 노동자들을 인터뷰할 때 보였던 다음과 같은 모습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여성의 일상적 경험에서 우러난 언어들은 공식화된 언어로 인정을 못 받아요. 회의할 때 보면 진짜 분명하게 드러나거든요. 그들이 언어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그 방식과 그런 문화가 표현을 막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나와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되고...... 현대자동차 노조 식당 아줌마들의 투쟁이 길지 않았는데, 용어는 다 운동권 용어에요. 너무 듣기가 싫더라구. 인터뷰를 하면 운동권 용어고, 그냥 얘기하면 아줌마 용어가 나와요. 근데 이미 그게 습관이 됐더라구요. 짧은 시간에 그 습관을 익힐 수밖에 없었던 거지. 언어가 다를 때 용서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155쪽)
언어. 그렇다. 이미 이 문제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데에도 침투해 있는 것이다(앞에 언급했던 **녀 또한 언어의 문제다). 남성들이 중심이 된 운동권의 용어를 쓰지 않으면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 남성들의 언어를 쓰고, 오빠가 아닌 형이라는 칭호를 쓰고, 사회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오버해서 혐오해야하고, 그러면서 '남자'가 되어 간다. 그래서, 과연 그렇게 하면 내부자가 될 수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 그 여성은 그냥 '독한년'이 되기 일쑤다. 그래서 저자는 '중심에 대한 욕망'을 그냥 포기해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가부장적 운동권에서 페미니즘 운동으로 활동의 영역을 옮기게 된 것이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권력의 우산 바깥"에 있는 자신의 주변성을 중심에 대한 욕망으로 치환하지 않고, 주변에 있기 때문에 더 비판적으로 일상적 권력의 미세한 망들을 읽어낼 수 있다고 다르게 인식하는 것. 주변성이 갖는 힘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57쪽)
분노는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금지된 감정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이 분노의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분노의 표정에 질식당하지 않고 행복해지기 위해 맞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다양한 표정을 갖고 살아가는 사회를 원하고, 바로 그런 다양한 표정과 그 표정의 변화들을 서로 격려할 수 있기를 원한다. (316쪽)
비록 나는 남자지만, 이런 분노와 표정들을 지지한다. 여성들이 분노할 수 있고, 마음껏 표정을 지을 수 있을 때, 남성들 또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유독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사회여서, 이 책을 '오늘의 책'에 권하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고민이 되긴 했다. 하지만 '시끄러움'을 두려워한다면 변화를 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비록 이 책을 위해 행해진 많은 인터뷰 내용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분석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인터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고 그걸 듣는 저자의 입장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하면 이해못할 부분도 아니다. 이런 책이나 글들을 계기로 좀 더 시끄러워지고, 그 시끄러움 속에서 이 책의 문제의식이 언젠가는 '별 것 아닌 것'이 된다면, 그 때서야 이 책 속의 인터뷰를 하나의 텍스트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담겨 있는 재미있는 텍스트들이 좀 더 넓은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그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99년도 민중대회에서 있었던 '컵 깨기 행사' 취지문을 링크한다. 한 번쯤 꼭 읽어보시길.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ca-2&id=12&page=1&SESSIONID=7e884f86da15b4afe4dadf416590a2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