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 몸과 의학의 한국사
신동원 지음 / 역사비평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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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하는 일도 있고 해서 사놓고 뒤적거리기만 하던 책을 정독. 부제는 '몸과 의학의 한국사'다. 저자는 국내에서 '의학사'를 전공한 몇 안되는 역사전공자이다. 그가 그동안 쓴 글들을 좀 더 쉽고 부드럽게 수정하여 책으로 낸 것이다. 제목은 호열자(콜레라)가 주된 내용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이런 식으로 책 전체의 내용을 알려주지 못하는 제목은 그리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의학에 대한 글이지만 현재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의학의 발달이 이런 고통을 모두 없애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믿음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 건강에 대한 기대가 증폭된 만큼 의학이 그것을 만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의학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숙명론으로 비극을 접을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과학과 의학에 대한 굳건한 믿음 때문에 더욱 건강에 집착하게 된다. 부풀어진 욕망을 따라잡지 못하는 의학의 시대, 그것이 현대의 아픔이다. (56쪽)

 

건강에 대한 강박. '예상 수명'이 나에게도 당연히 해당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잊고야 마는 '죽음'. 죽음에 대한 태도나 죽음과 관련된 의례들도 '근대성'과 연관지어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제 식민지기는 좋은 관찰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은 식민지 내내 별로 변동이 없었으며, 당시 일본 등 선진 제국에서 관리의 대상으로 삼은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이런 측면을 '근대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전 시대에 행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례없는 효용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그 효용이 확실한 과학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개인과 집단의 생활양식을 혁신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렇듯 식민지 조선의 위생경찰의 업무범위는 문명국가의 보편성을 띠고 있었지만, 그것의 집행방식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이나 당시 일본과 비교해볼 때, 조선의 위생행정은 훨씬 불완전하고 억압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를 '식민지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68쪽)

 

저자의 이런 관점이 매우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뭉뚱그려 '식민지 근대성'이라고 칭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문제가 있다기 보단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의 관심은 식민지 조선에서 '근대'의 '설득력'이 얼마나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왜 어떤 분야는 설득이 먹혔지만, 왜 또 다른 분야에서는 설득에서 실패를 하였는가? 이 부분에 주목을 한다면 앞서 언급한 서술보다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더 흥미롭다.

 

변강쇠가가 황당무계하고 어수선하며 체계가 잘 짜여져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19세기 세계관과 20세기 세계관 사이에 양립할 수 없는 엄청난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감했는데, 우리는 공감하지 못한다. (144쪽)

 

(우두법) 반대자에게 서양이란 시시각각 침투해 들어오는 서양세력을 뜻했다. 그 '서양'이란 전통적인 것을 '폭력적으로' 부정하는 원천으로 비쳐졌다. 우두법도 이런 조선 말의 위기의식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이를 단지 무지와 맹목으로만 비판해서는 안된다. (327쪽)

 

역병 예방과 건강의 향상이라는 목적 이면에는 피식민자 개개인에 대한 반(半)폭력적 통치행위가 짙게 배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무단적 행위에 대해 조선 민중은 엄청난 반감을 품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도구로 활용한 우두법과 같은 근대 문물 그 자체에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

무당은 자신이 마마를 물리친다고 믿었으며,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설령 문제가 생겼다고 해도 그것은 정성부족이나 필연적 운명 등으로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무속적인 설명은 성공과 실패를 모두 만족시키는, 오랜 전통을 가진 가장 일반적인 설명방식이었다. 개항 이후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이 급격히 바뀌어 나가기는 했지만 그러한 설명양식은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을 대체할, 신뢰할 수 있는 전반적인 세계관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328~329쪽)

 

과연 근대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을까? 설사 승리했다 해도, 근대는 전근대에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았을까? 근대는 '이성적으로'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전근대를 어떻게 이해하려 했는가? 반대로 전근대는 근대를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 어떤 방식으로 저항했는가? 논문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다. 아직도 여전히 불투명하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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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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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전반적인 복지제도에 대한 말이 나올 때, 가장 흔한 반대 논리(?)는 "우리나라가 선진국마냥 복지 운운할 때냐"라는 반문이다. 즉, 대한민국은 아직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운용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실 영국이 복지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했던 시기를 생각한다면, 이 논리는 그 자체로도 문제가 많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논리'가 일관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문제 삼는 부분이 그것이다. 왜 선진국 반열에 오르지 못한 국가들이 선진국이 주장하는(혹은 선진국이라야 감당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강요받는가? 저자가 책의 앞부분에서 이미 서술하고 있듯이, "현재 경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제도의 대부분이 현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의 원인이기보다는 결과"(33쪽)이기 때문에, 선진국이 강요하는 규제의 철폐나 극단적인 자유주의, 최소한의 정부 등은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다리 걷어차기에는 과거에 대한 의도적/비의도적 망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아마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일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자유 무역, 자유 시작 역사들만이 기정사실화 되어 개발도상국을 위한 사례로 남아 있(29쪽)"기 때문에 강요하는 입장에서든 강요받는 입장에서든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설사 그 '글로벌 스탠다드'가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경제학 책이 아닌 역사학 책으로 서술한다. 경제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나름 술술 잘 읽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현재 선진국들이 주장하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얼마나 '스탠다드'하지 못한 것인지를, 선진국들의 과거를 들추며 조목조목 밝혀낸다. 선진국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도 성장과정에서는 그다지 '좋은' 제도와 정책-즉 자유주의-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영국과 미국마저도.

 

  영국이 자유 무역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화된 기술력을 지녔기 때문이며, 이런 기술력 뒤에는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된 높은 관세 장벽'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19세기 중반에 발생한 영국 경제의 전반적인 자유화(무역 자유화는 그 일부임)는 자유방임주의에 의해 이룩된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감독 아래 진행된 고도의 관제管制 사건임에도 역시 주목해야 한다. (55쪽)

 

어떻게 보면 자유방임주의 제도/정책 또한 결국은 '제도'이며 '정책'이다. 마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말처럼, 개입하지 않는 것 또한 개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과거에 택했던 '좋지 않은 길'이 지금 그들이 선진국에 올라선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홈쇼핑 프로그램을 보다가 유럽 여행 패키지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독일을 들리게 될 때 그 유명한 '쌍둥이 칼'을 증정한다고 홍보를 하고 있었다. '독일제' 칼, '영국제' 도자기, '핀란드제' 가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아우라를 생각한다면, 이 책에서 폭로(?)하는 어두운 과거-짝퉁 독일제와 그 물건을 만드는 독일제조자들의 꼼수(113쪽)-는 충격이라 할만 하다.

 

저자는 이렇게 선진국이 스스로의 과거는 지워버린채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개도국에게 자신들의 제도를 강요하는 것이 '사다리 걷어차기'가 될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설사 그것이 진정한 '선의'에서 나온 권유(라 쓰고 강제라 읽는다)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실제 개도국들에게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문제는 사실 더 이상 논의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IMF가 거쳐 간 나라들 중에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체질 개선이 됐다거나 사정이 나아진 국가가 몇이나 되는가? 그들이 강조하는 재무의 투명성 등도 실패한 투자자의 '자기 정당화'와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재무 감사와 정보 공시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은 최근의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외국인 채권자들은 경제 위기 국가들에 대한 부실 대출 결정의 책임을 불투명한 기업 회계, 감사 및 공시에 관한 느슨한 규제 탓으로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우선 이들 국가들이 기업 차원 정보와 관련해 이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은 경제 위기 이전부터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신중한 자금 대여자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는 이들 국가의 기업체에 대출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국제 자금 대여자들이 '정보 부재'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 정당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169쪽)

 

그렇다고 저자가 선진국의 모든 제도는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정책과 제도는 각 나라 고유의 환경과 특성에 맞춰서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제도를 운영할 정책의 주체가 외부의 선진국들이 아니라 개도국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이 제도와 정책,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으로 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개발도상국들에서 이 같은 결과가 발생한 원인은 이 기간 동안 실행된 '정책 개혁'의 결과 '(진정한) 바람직한' 정책을 추구할 개발도상국들의 능력이 상당 부분 박탈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입장이다. (243쪽)

 

비록 제도의 정확한 형태가 중요하지만 권고되는 다수의 제도들은 정책과의 경우와는 다르게 개발도상국들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제도들은 그에 '적절한' 정책들과 결함할 때에만 그 잠재적 혜택을 완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45쪽)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이 과연 경제학 계열의 책인가 싶을 정도로 '역사'를 살펴보는데 주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 한 편으로는 지금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깨닫게 된다. 존재하지도 않는 판타지로 학계의 주류가 됐기 때문이다. 실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델은 더욱 아름다워야 하고, 또 복잡해졌던 것이다. Laissez-faire를 외치면서도 거기에 대한 설명은 무지막지할 정도다. 가만히 두면 된다면서 왜 그리도 말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 이유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가만히 둬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혹은 설명해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실증적이고 귀납적인, 그러면서도 독창적인 책이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선 경제학자 특유의 태도가 많이 거슬렸다. 모든 것을 '비용의 문제'로 치환하고 사고하는 것(136쪽)이 경제학 특유의 방법론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유시민의 '후불제' 표현이 비유적인 것임에도 불편한 이유는, 그 비용 지출의 주체가 한 쪽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비용의 편중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정치인데, 저자는 이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 책에서 무슨 정치까지 설명하기를 요구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 부분이 설명되지 않으면 이 책의 가설이나 실증이 무의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언급된 많은 제도나 정책들이 경제학적 요소만 고려하여 시행되거나 좌절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몇 년 전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 리스트에 포함된 것은 코미디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불온도서라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이 책의 논지대로라면 박정희의 독재개발을 깔끔하게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식 경제발전, 한국식 민주주의. 익숙하지 않은가?

 

  따라서 경제 발전에 중요한 것은 현행의 모든 재산권을 무조건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알맞게 재산권의 보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재산을 현행 소유주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단체가 있다면, 소유주의 재산권을 보호해 주는 것보다 그 단체에게 소유물을 양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재산권을 수립하는 것이 그 사회에 더욱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158쪽)

 

그러나, 무언가가 사회에 더 유익하다고 판단을 내리는 주체가 누구인가?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이 논리는 굉장히 위험하다. 내가 재산권의 보호를 일순위에 놓는 사람이 아님에도, 저 주장은 위험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저 논리대로라면, 재벌 하나를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방송국을 순식간에 통폐합해버리는 것도 깔끔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그게 더 사회에 유익하니까"라는 말로.

 

또 저자는 각 국가별로 나름의 사정을 고려해 정책과 제도를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책 전체적인 구성이나 논지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서구를 중심으로 한 '단계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점이 보인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비교하고 논증하는 지점도, 선진국이 현재 개도국의 '단계'에 있을 때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다. 경제 개발 단계 모델의 가정, 개도국들도 결국엔 선진국의 길을 갈 것(혹은 가야만 할 것)이라는 가정이 없이는 이런 비교를 할 수 없다. 저자가 이런 가정에 대해 별 의심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인 개발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의 선행조건이라는 근래의 통설"(140쪽)이라는 서술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이 가능하다. 이 또한 (비록 그 모델을 비판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국엔 서구 모델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통설이 저러한가? 처음에 복지제도를 언급했던 것처럼, 오히려 '우리의 통설'은 "경제발전이 되어야 민주주의니 뭐니 얘기할 수 있다"는 것 아니던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서술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현재 '바람직한 통치 제도good governance' 패키지의 일부로 개발도상국들에게 권고되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는 현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결과물에 해당된다. (237쪽)

 

로버트 달 같은 학자는 경제민주주의까지 주장하고 있는 판에, 단순히 시간적 선후관계만으로 따져서 '원인'과 '결과'를 도치시킨다. 얼핏 타당해보일 수 있지만, 원인과 결과를 이렇게 단순하게 연결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제기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런 문제점들이 이 책의 의의를 부각시킨다. 즉, 철저히 경제학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지금 선진국이 주장하고 권고하는 제도와 정책, 그리고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문제점이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 내부에서라도 이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비록 주류 경제학자들은 아직까지도 반론에 대해 아예 귀를 닫고 있는 모습이지만. 또 이와는 별개로 역사학이 가지는 의의를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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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박스판 - 전7권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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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명한 만화를 애니매이션도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박스판을 구입해서 보게 되었다. 섬세한 그림과 웅장한 스케일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놀란 것은 이 만화를 1983년에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10년간 '연재'를 했다는 것이다. 그 치밀함과 꼼꼼함이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거장으로 불릴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언급되어서 이젠 지겹기까지 한 '살아라!'라는 메세지. 그러나 작품 속에서의 그 메세지는 전혀 지겹지 않다.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오염'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끝내 '살아라!'라는 명령어를 놓치지 않는다. 이 지독한 낙관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철저히 독자의 몫.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야만 한다. 함께.

 

참고로 애니매이션의 내용은 전 7권으로 구성된 원작 중 2권 중반까지의 내용이라고 한다. '원령공주'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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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 논리학, 방패의 논리학 - 속이는 사람의 관점에서 쓴 역발상 논리학
니컬러스 캐펄디 & 마일스 스미트 지음, 석기용 옮김 / 교양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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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논리학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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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 이야기 이매진 컨텍스트 15
전희경 지음 / 이매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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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있었던 '나꼼수'의 비키니 소동(?)의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진보/보수의 구도 속에서 '성 정치'는 철저히 외면 받아 왔다. 정치적 언변은 너무나도 진보적이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남성문화가 '운동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제기'들은 모두 사소한 것들이고, 이 사소한 것들은 조직과 전선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의심과 공격을 받기 쉬웠다. 다음과 같은 주장을 보라. 아마 많은 사람들(특히 남성들)이 "아니, 그게 무슨 큰 문제라고 시비(?)냐?"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것과 연결된 맥락에서 정희진은, 왜 비전향 장기수는 '선생님'이고 위안부 피해자는 '할머니'로 부르냐고 물으면서, 좌우파를 넘어서는 남성 젠더의 지배 역사 속에서 역사의 주체이자 행위자로 간주되는 남성은 '선생님'이고 (남성) 역사의 피해자로 간주되는 '위안부' 피해 여성은 비정치적 존재로서 '할머니'가 된다고 비판한다. (121쪽)

 

남성 노동자의 파업 투쟁은 아내의 지지와 지원을 받지만, 여성 노동자의 파업 투쟁은 오히려 남편의 '허락'을 얻어야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여성 노동자에게 시민/노동자의 권리보다 아내/어머니/주부의 도리가 우선되기 때문이다. (127쪽)

 

그런 문제에 대해서 내가 통신에서 문제제기를 했더니 어떤 남성이 거기다가 "모든 사람들이 다 (성폭력 사건에 대해) 얘기를 하고 개입을 할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의 오만이다", 이렇게 썼더라구요. 개입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개입하는 사람도 있다, 이거지. 아마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 안 한다고 뭐라 그랬으면 그런 얘기 안 했을 거예요. 근데 그 상황에서는 그게 오만인 거죠. (181쪽)

 

그러나, 과연 이런 문제들이 '사소한' 문제인가? 자본과 싸워야 한다고 외치는 '전선'을 생각해보라. 자본의 입장에선 한 노동자의 임금, 한 노동자의 노동환경, 한 노동자의 목숨 따위 항상 '사소하게' 취급받지 않았던가? 그것에 분노하여 그렇게 힘들게 싸워온 것이 아니었던가? 분명 그러면서도 자신이 상대적으로 강자가 되는 조직 내에서는 또 다른 소수(수적으로는 절대 소수가 아닌)인 여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구조적으로. 결국 '진보'라고 불리는 집단도 젠더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이 되고 만다. 그러니 그게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고대녀'라는 말을 아무런 꺼리낌 없이 쓰지 않겠는가(나는 이 '**녀'라는 단어를 혐오한다). '여대생'은 또 어떤가? 지금이야 워낙 대학 진학률이 높아져서 그런 이미지가 많이 없어졌다고는 해도, 10년 전만 생각해보면 이 단어는 그냥 '여성 대학생'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남대생'(이런 단어를 쓰지도 않지만)과는 달리 '여대생'은 남성들의 로망이 집중 투여된 단어이자, 또 반대로 많은 남성들의 공격 대상이 되는 단어다. '순수한 여대생'이자 '철없는(머리가 텅텅 빈) 여대생'.

 

사실 1980년대에 대학에 진학한 여성이 대부분 상대적으로 풍족한 집안 환경을 갖고 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아들은 찢어지게 가난해도 어떻게든 대학에 보내지만' 딸은 여유가 있어야 대학에 보낸 성차별적 교육의 결과이기도 했다. (111쪽)

 

정치적인 폭력과 억압도 무섭긴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일상의 폭력과 억압, 차별이다. 그리고 거대한 정치담론과 일상적인 것은 그렇게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공/사는 실제로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돼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있을 뿐이며, 일상과 무관하게 작동하는 구조적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대한 문제와 사소한 문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둘 사이의 경계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유동적이다.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무엇이 중대한 문제인가?'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와 '사적인 문제'는 누가 정의하며 '중대한 문제'와 '사소한 문제'는 어떤 과정을 통해 구분되는가(또는 변화하는가)다. (134쪽)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90년대 운동권에 몸을 담았던 여성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그들이 직접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들의 말을 들어가며 '구조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이 분석의 의도는 단순히 피해를 폭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대신 "누가, 왜 '근본 원인'을 알고자 하는가?", "'근본 원인'에 대한 대답은 어떤 정치적 효과로 연결되는가?"라고 묻는다면, 토론은 다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154쪽)

 

"그래, 차별은 나쁘지"라는 식의 무덤덤한 반응은 가장 나쁘다. 성 정치 속의 이 구조적인 차별과 억압은 이제 일상의 영역까지 내려와 수많은 여성, 그리고 심지어 남성까지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냉정하고 차분한 척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부당한 상황에서 '감정적'이 되지 않는 것이 더 문제다. 그것은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약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는 무능력일 뿐이다. (139쪽)

 

많은 남성들이(그리고 또 많은 여성들이) 이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는 것은 젠더 문제가 기존의 계급 문제 등의 하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젠더 문제가 계급 문제보다 '덜' 중요한가? 그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위계질서는 누가 만들었는가? 젠도 또한 계급이며, 그것은 경제적 계급과 또 다른 곳에 존재하면서 여기저기 섞이지 않는 데가 없는 중요한 문제다.

 

'노둥 문제가 먼저냐, 여성 문제가 먼저냐'라는 질문은, 여성을 노동자로 보지 않고 여성 노동자를 '여성'으로 보지 않을 때만 성립한다. '계급이냐 젠더냐'라는 질문은, 계급이 젠더 없이 조직될 수 없으며, 젠더체제 내에 계급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사라지게 하는 일종의 허위 질문이다. (215쪽)

 

영화 '밥, 꽃, 양'의 주인공이었던 현대자동차 식당 노동자들을 인터뷰할 때 보였던 다음과 같은 모습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여성의 일상적 경험에서 우러난 언어들은 공식화된 언어로 인정을 못 받아요. 회의할 때 보면 진짜 분명하게 드러나거든요. 그들이 언어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지. 그 방식과 그런 문화가 표현을 막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나와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되고...... 현대자동차 노조 식당 아줌마들의 투쟁이 길지 않았는데, 용어는 다 운동권 용어에요. 너무 듣기가 싫더라구. 인터뷰를 하면 운동권 용어고, 그냥 얘기하면 아줌마 용어가 나와요. 근데 이미 그게 습관이 됐더라구요. 짧은 시간에 그 습관을 익힐 수밖에 없었던 거지. 언어가 다를 때 용서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155쪽)

 

언어. 그렇다. 이미 이 문제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데에도 침투해 있는 것이다(앞에 언급했던 **녀 또한 언어의 문제다). 남성들이 중심이 된 운동권의 용어를 쓰지 않으면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 남성들의 언어를 쓰고, 오빠가 아닌 형이라는 칭호를 쓰고, 사회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오버해서 혐오해야하고, 그러면서 '남자'가 되어 간다. 그래서, 과연 그렇게 하면 내부자가 될 수 있는가? 대부분의 경우 그 여성은 그냥 '독한년'이 되기 일쑤다. 그래서 저자는 '중심에 대한 욕망'을 그냥 포기해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가부장적 운동권에서 페미니즘 운동으로 활동의 영역을 옮기게 된 것이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권력의 우산 바깥"에 있는 자신의 주변성을 중심에 대한 욕망으로 치환하지 않고, 주변에 있기 때문에 더 비판적으로 일상적 권력의 미세한 망들을 읽어낼 수 있다고 다르게 인식하는 것. 주변성이 갖는 힘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57쪽)

 

분노는 오랫동안 여성들에게 금지된 감정이었다. 그래서 여성들이 분노의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분노의 표정에 질식당하지 않고 행복해지기 위해 맞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다양한 표정을 갖고 살아가는 사회를 원하고, 바로 그런 다양한 표정과 그 표정의 변화들을 서로 격려할 수 있기를 원한다. (316쪽)

 

비록 나는 남자지만, 이런 분노와 표정들을 지지한다. 여성들이 분노할 수 있고, 마음껏 표정을 지을 수 있을 때, 남성들 또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유독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민감한 사회여서, 이 책을 '오늘의 책'에 권하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고민이 되긴 했다. 하지만 '시끄러움'을 두려워한다면 변화를 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비록 이 책을 위해 행해진 많은 인터뷰 내용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분석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이 인터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고 그걸 듣는 저자의 입장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하면 이해못할 부분도 아니다. 이런 책이나 글들을 계기로 좀 더 시끄러워지고, 그 시끄러움 속에서 이 책의 문제의식이 언젠가는 '별 것 아닌 것'이 된다면, 그 때서야 이 책 속의 인터뷰를 하나의 텍스트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담겨 있는 재미있는 텍스트들이 좀 더 넓은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그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99년도 민중대회에서 있었던 '컵 깨기 행사' 취지문을 링크한다. 한 번쯤 꼭 읽어보시길.

http://go.jinbo.net/commune/view.php?board=cca-2&id=12&page=1&SESSIONID=7e884f86da15b4afe4dadf416590a2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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