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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회의 전반적인 복지제도에 대한 말이 나올 때, 가장 흔한 반대 논리(?)는 "우리나라가 선진국마냥 복지 운운할 때냐"라는 반문이다. 즉, 대한민국은 아직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운용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실 영국이 복지제도를 전면적으로 도입했던 시기를 생각한다면, 이 논리는 그 자체로도 문제가 많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논리'가 일관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문제 삼는 부분이 그것이다. 왜 선진국 반열에 오르지 못한 국가들이 선진국이 주장하는(혹은 선진국이라야 감당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강요받는가? 저자가 책의 앞부분에서 이미 서술하고 있듯이, "현재 경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제도의 대부분이 현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의 원인이기보다는 결과"(33쪽)이기 때문에, 선진국이 강요하는 규제의 철폐나 극단적인 자유주의, 최소한의 정부 등은 일종의 '사다리 걷어차기'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사다리 걷어차기에는 과거에 대한 의도적/비의도적 망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것이 아마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일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자유 무역, 자유 시작 역사들만이 기정사실화 되어 개발도상국을 위한 사례로 남아 있(29쪽)"기 때문에 강요하는 입장에서든 강요받는 입장에서든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설사 그 '글로벌 스탠다드'가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경제학 책이 아닌 역사학 책으로 서술한다. 경제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나름 술술 잘 읽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현재 선진국들이 주장하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얼마나 '스탠다드'하지 못한 것인지를, 선진국들의 과거를 들추며 조목조목 밝혀낸다. 선진국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도 성장과정에서는 그다지 '좋은' 제도와 정책-즉 자유주의-을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영국과 미국마저도.
영국이 자유 무역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선진화된 기술력을 지녔기 때문이며, 이런 기술력 뒤에는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된 높은 관세 장벽'이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19세기 중반에 발생한 영국 경제의 전반적인 자유화(무역 자유화는 그 일부임)는 자유방임주의에 의해 이룩된 것이 아니라 정부의 감독 아래 진행된 고도의 관제管制 사건임에도 역시 주목해야 한다. (55쪽)
어떻게 보면 자유방임주의 제도/정책 또한 결국은 '제도'이며 '정책'이다. 마치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말처럼, 개입하지 않는 것 또한 개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과거에 택했던 '좋지 않은 길'이 지금 그들이 선진국에 올라선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홈쇼핑 프로그램을 보다가 유럽 여행 패키지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독일을 들리게 될 때 그 유명한 '쌍둥이 칼'을 증정한다고 홍보를 하고 있었다. '독일제' 칼, '영국제' 도자기, '핀란드제' 가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아우라를 생각한다면, 이 책에서 폭로(?)하는 어두운 과거-짝퉁 독일제와 그 물건을 만드는 독일제조자들의 꼼수(113쪽)-는 충격이라 할만 하다.
저자는 이렇게 선진국이 스스로의 과거는 지워버린채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개도국에게 자신들의 제도를 강요하는 것이 '사다리 걷어차기'가 될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한다. 설사 그것이 진정한 '선의'에서 나온 권유(라 쓰고 강제라 읽는다)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실제 개도국들에게는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문제는 사실 더 이상 논의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IMF가 거쳐 간 나라들 중에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체질 개선이 됐다거나 사정이 나아진 국가가 몇이나 되는가? 그들이 강조하는 재무의 투명성 등도 실패한 투자자의 '자기 정당화'와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재무 감사와 정보 공시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은 최근의 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외국인 채권자들은 경제 위기 국가들에 대한 부실 대출 결정의 책임을 불투명한 기업 회계, 감사 및 공시에 관한 느슨한 규제 탓으로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우선 이들 국가들이 기업 차원 정보와 관련해 이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은 경제 위기 이전부터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신중한 자금 대여자로서 당연히 취해야 할 태도는 이들 국가의 기업체에 대출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국제 자금 대여자들이 '정보 부재'를 문제 삼는 것은 자기 정당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169쪽)
그렇다고 저자가 선진국의 모든 제도는 무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정책과 제도는 각 나라 고유의 환경과 특성에 맞춰서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제도를 운영할 정책의 주체가 외부의 선진국들이 아니라 개도국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이 제도와 정책,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으로 되어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개발도상국들에서 이 같은 결과가 발생한 원인은 이 기간 동안 실행된 '정책 개혁'의 결과 '(진정한) 바람직한' 정책을 추구할 개발도상국들의 능력이 상당 부분 박탈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입장이다. (243쪽)
비록 제도의 정확한 형태가 중요하지만 권고되는 다수의 제도들은 정책과의 경우와는 다르게 개발도상국들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제도들은 그에 '적절한' 정책들과 결함할 때에만 그 잠재적 혜택을 완전히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245쪽)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이 과연 경제학 계열의 책인가 싶을 정도로 '역사'를 살펴보는데 주력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 한 편으로는 지금의 주류 경제학자들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깨닫게 된다. 존재하지도 않는 판타지로 학계의 주류가 됐기 때문이다. 실재할 수 없는 것이기에 모델은 더욱 아름다워야 하고, 또 복잡해졌던 것이다. Laissez-faire를 외치면서도 거기에 대한 설명은 무지막지할 정도다. 가만히 두면 된다면서 왜 그리도 말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 이유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가만히 둬서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혹은 설명해야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실증적이고 귀납적인, 그러면서도 독창적인 책이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선 경제학자 특유의 태도가 많이 거슬렸다. 모든 것을 '비용의 문제'로 치환하고 사고하는 것(136쪽)이 경제학 특유의 방법론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타당하다고 여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유시민의 '후불제' 표현이 비유적인 것임에도 불편한 이유는, 그 비용 지출의 주체가 한 쪽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비용의 편중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정치인데, 저자는 이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 책에서 무슨 정치까지 설명하기를 요구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그 부분이 설명되지 않으면 이 책의 가설이나 실증이 무의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언급된 많은 제도나 정책들이 경제학적 요소만 고려하여 시행되거나 좌절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몇 년 전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 리스트에 포함된 것은 코미디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불온도서라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이 책의 논지대로라면 박정희의 독재개발을 깔끔하게 설명하고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식 경제발전, 한국식 민주주의. 익숙하지 않은가?
따라서 경제 발전에 중요한 것은 현행의 모든 재산권을 무조건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알맞게 재산권의 보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재산을 현행 소유주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단체가 있다면, 소유주의 재산권을 보호해 주는 것보다 그 단체에게 소유물을 양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재산권을 수립하는 것이 그 사회에 더욱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158쪽)
그러나, 무언가가 사회에 더 유익하다고 판단을 내리는 주체가 누구인가? 이 부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이 논리는 굉장히 위험하다. 내가 재산권의 보호를 일순위에 놓는 사람이 아님에도, 저 주장은 위험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저 논리대로라면, 재벌 하나를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방송국을 순식간에 통폐합해버리는 것도 깔끔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그게 더 사회에 유익하니까"라는 말로.
또 저자는 각 국가별로 나름의 사정을 고려해 정책과 제도를 운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책 전체적인 구성이나 논지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결국 서구를 중심으로 한 '단계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순점이 보인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비교하고 논증하는 지점도, 선진국이 현재 개도국의 '단계'에 있을 때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다. 경제 개발 단계 모델의 가정, 개도국들도 결국엔 선진국의 길을 갈 것(혹은 가야만 할 것)이라는 가정이 없이는 이런 비교를 할 수 없다. 저자가 이런 가정에 대해 별 의심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극단적인 개발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가 경제발전의 선행조건이라는 근래의 통설"(140쪽)이라는 서술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이 가능하다. 이 또한 (비록 그 모델을 비판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국엔 서구 모델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통설이 저러한가? 처음에 복지제도를 언급했던 것처럼, 오히려 '우리의 통설'은 "경제발전이 되어야 민주주의니 뭐니 얘기할 수 있다"는 것 아니던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서술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현재 '바람직한 통치 제도good governance' 패키지의 일부로 개발도상국들에게 권고되고 있는 대부분의 제도는 현 선진국들의 경제 발전의 원인이라기 보다는 결과물에 해당된다. (237쪽)
로버트 달 같은 학자는 경제민주주의까지 주장하고 있는 판에, 단순히 시간적 선후관계만으로 따져서 '원인'과 '결과'를 도치시킨다. 얼핏 타당해보일 수 있지만, 원인과 결과를 이렇게 단순하게 연결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문제점들을 제기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런 문제점들이 이 책의 의의를 부각시킨다. 즉, 철저히 경제학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지금 선진국이 주장하고 권고하는 제도와 정책, 그리고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문제점이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 내부에서라도 이 문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비록 주류 경제학자들은 아직까지도 반론에 대해 아예 귀를 닫고 있는 모습이지만. 또 이와는 별개로 역사학이 가지는 의의를 한 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